빨래가 펄럭이고 우리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외 1편

[신작시]

 

 

빨래가 펄럭이고 우리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한여진

 

 

 

    아이가 밤새 울었다며
    여자들은 하나같이 눈을 비볐다

 

    한낮의 빛이
    초록의 옥상으로
    모여든다

 

    자, 이거 봐

 

    사과를 깎는 순간의 장면
    여자를 키워내는 여자의 손

 

    아니야 아니야

 

    도리질 치며
    더욱 크게 우는 아이

 

    빨간 껍질 벗겨낸
    하얀 속살 작은 입에 넣어 주면

 

    뚝, 잠 못 들던 밤은 잠잠해지고
    하품하는 여자의 입에서는 단내가 풍긴다

 

    사과를 키워낸 빛 앞에서
    여자는 자주 어지러움을 느꼈다

 

    아이는 여자의 손에서
    여자가 되거나 여자가 못 되거나

 

    눈을 맞춰 주면 묽게 웃고
    바라보지 않을 때 무한하게 자라서

 

    곧 창가에서 옷장 속에서
    티브이 앞에서 발견된다

 

    아이 손에 들린 사과 하나로
    가득한 어느 한낮

 

    반쪽의 사과
    어느 날의 장면

 

    하지만 사과를 반 바퀴 돌리면
    빨갛고 둥근 모습으로 굴러 떨어지고

 

    아이는 안다 그건
    모두 사과의 모습이라는 걸

 

    여자는 바란다 아이가 자라서
    마음먹은 것은 모두 하게 되길

 

    사과를 사과답게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빛과 여자들의 젖은 손

 

    아이가 크면 물어봐야지
    밤새 울던 날들을 기억하는지

 

    그럼 아이는 깔깔거리고
    웃음은 온 세상 가득 퍼지겠지

 

    우리가 곧 도착할 미래에 대해 생각할 때
    옥상 한쪽에서는 빨래가 천천히 펄럭이고 있었다

 

 

 

 

 

 

 

 

 

 

 

 

 

 

 

밤친구

 

 

 

 

    이상한 하루에 대해 쓰고 있다. 북한산 오봉로를 걸었다. 송추폭포를 지났을 땐 벌써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때마침 나타난 가까운 등나무에 걸터앉았다. 하얀 솜털 같은 벌레가 발목을 타고 기어오르고 있었는데 이름 모를 벌레였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상수리나무 옆 노란색 안내판에 '멧돼지 출몰주의'가 적혀 있었다. 바로 그 아래 조금 더 작은 글씨로 '멧돼지를 만나면 도망가지 말고 두 눈을 바로 바라보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멧돼지를 마주치게 되는 경우의 수에 대해 생각했고 산속에서 멧돼지와 조우했다는 사람은 아직 만나 본 적 없지만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서 멧돼지를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아주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유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자 정말로 멧돼지가 보고 싶었다. 멧돼지의 눈빛이란 어떤 것일까. 멧돼지가 나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좋을 텐데, 하는 이상한 생각과 함께 멧돼지의 뻣뻣한 털, 힘찬 콧김, 질긴 앞발, 출렁거리는 뱃살, 쫑긋한 귀를 다정하게 떠올리며 그만 잠이 들었다. 잠깐 혹은 그보다 더 오래 어쩌면 한나절 이상을. 눈을 떴을 때 당신은 옆에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일어났구나, 잠든 사이 친구가 왔어. 나는 몸을 일으켜 창밖을 바라보았다. 깊은 밤이었다. 대문 긁는 소리가 들렸다.

 

 

 

 

 

 

 

 

 

 

 

 

 

 

 

 

 

한여진 작가소개 / 한여진

2019 문학동네 신인상 등단.

 

   《문장웹진 202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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