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업 외 1편

[신작시]

 

 

분업

 

 

정사민

 

 

 

    2020.02.02.
    요즘 같은 시대에는 예술도 하청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가, 나, 다에 하청을 주었다

 

    가는 일행을 쓰고
    나는 이행을 쓰고
    다는 삼행을 써서
    나한테 주도록 해

 

    나는 조금 수수료를 뗀다

 

    가는 일행을 썼다
    나는 이행을 썼다
    다는 삼행을 썼다

 

    가 : 가
    나 : 나가
    다 : 다 나가

 

    천재적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또다시 하청을 주었다

 

    가는 사행을 썼다
    나는 오행을 썼다
    다는 육행을 썼다

 

    가 : 가나
    나 : 나가다
    다 : 다 나가라

 

    일절만 해라, 일절만
    나는 가, 나, 다에 면박을 주었다

 

    가는 시무룩했다
    나는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다는 화를 냈다

 

    다는 시를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다를 잃었다

 

    다를 잃어도 다를 게 없다
    나는 가를 불렀다

 

    나 : 가
    가 : 나?

 

    가는 팔행을 썼다
    나는 구행을 썼다
    가는 십행을 썼다
    나는 십일행을 썼다

 

    2020.02.02.
    어젯밤에 애인과 다퉜어.
    어쩌다가?
    내 소설을 읽게 했거든.
    저런.

 

    나는 혀를 찼다.

 

    왜 그랬어.
    내 야심작이었는데.
    그럴수록 숨겼어야지.
    『구토』의 21세기 버전이었다고!
    『구토』는 끔찍하게 지루하잖아?
    애인이 그러더군.
    뭐라고?
    지루해서 구토가 나올 지경이래.
    저런.

 

    가는 의기소침해 보였다.

 

    그래서, 다른 느낀 점은 없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의 범벅이라고, 유아기에 끔찍한 애정결핍이라도 겪었냐는 거야.
    맙소사.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 다퉜어?
    아니.
    그럼?
    내가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서 그 말을 받아 적었거든.
    왜?
    소설에 쓰려고.
    세상에.
    그랬더니 나를 비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어.
    뭐라고?
    따라해. "이렇게 재미없는 소설을 써서 죄송합니다"
    따라했어?
    아니. 받아 적었어.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게 다야?
    다야.

 

    가는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또 뭘 쓰는 거야?
    다를 잃어도 다를 게 없다.
    아.

 

    나는 오십일행을 썼다

 

 

 

 

 

 

 

 

 

 

 

 

 

 

 

텔미

 

 

 

 

    네가 지금 죽어선 안 될 이유를 말해 봐.

 

    입안에 들어찬 총구에선 비릿한 쇠맛이 난다. 끈적한 침방울이 입가에서 무릎께로 길게 흘러내렸다. 여자는 방아쇠에 걸쳐 둔 검지를 규칙적으로 움찔거렸는데,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기고 싶어 안달난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억울한 마음을 담아 그를 바라보았다. 입안에 총구를 넣고서 어떻게 말을 하라고? 그러나 여자는 어서 말해 보라는 듯 턱을 치켜들 뿐 총을 치울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는 생각했다. 말을 할 수 없으니 생각만 했다. 내가 죽어선 안 될 이유를. 글쎄…… 나는 곰곰이 삶을 돌이켜보았다. 나는 서른 살이 넘었고, 전과는 없고, 대학교를 졸업 후에 감정노동직에 종사하고 있다. 미혼이었고 차는 없다. 운전면허도 없다. 나는 서울의 아홉 평 남짓한 방에 살고, 가끔 자전거를 탄다. 매일 말보로 한 갑을 피우고, 커피 네 잔을 마시며, 새벽이면 맥주나 와인, 위스키를 마신다. 잠들기 전 혀 클리너와 치실을 꼼꼼히 사용하지 않으면 개운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딴 것들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지금 죽는다면? 대사관에서 시신을 수습해 한국으로 보내주겠지. 비용이 발생할 테고…… 범죄 피해자니까 어쩌면 국가에서 지원을 해줄지도…… 그러면 나는 평소에 열심히 세금을 내던 것에 대해 약간의 보람을 느낄지도 모른다. 관 속에 누운 채로, 크게는 전세보증금이나 작게는 국세 환급금 따위가 든 계좌 잔액을 가져갈 순 없겠지만. 보람 정도는 챙겨 가도 괜찮겠지, 소박한 장래희망 아닌가?

 

    나는 다시 생각했다. 여전히 여자는 내 입속에 총구를 들이밀고 있었으므로, 생각만 했다. 내가 죽어선 안 될 이유를. 나는 대한민국 국적의 남성이었고 민방위 1년차다. 사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고 수료만 했다. TOEIC 점수를 제출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한때 하루라도 누군가와 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외로움을 견딜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애정을 구걸하는 나 자신을 경멸했고 사실은 그런 나를 더없이 사랑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아토피 흉터로 얼룩진 등을 보여주는 일에 끔찍한 수치심을 느낀다. (차라리 죽고 말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죽어선 안 될 이유 같은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늦은 새벽 방콕의 고급 호텔과 그 뒤편의 더러운 골목길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고…… 술도 음악도 없이 단지 흥겨웠을 뿐이다. 방콕의 새벽은, 빈부격차든 음란함이든 모든 면에서 서울보다 노골적이었다. 원초적이라고 해야 할까? 태국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이를테면 춤을 추다가 군중에 밀려 짓밟히거나 차에 치이거나 뱀에 물리거나 건물에서 떨어지거나 성을 사고팔거나 물에 빠지거나 사랑에 빠지거나……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여자는 왜 내게 총구를 들이민 걸까? 사람의 목구멍에 총탄을 쑤셔 넣으며 쾌감을 느끼는 이상성욕자일까? 혹은 그 사람이 죽어선 안 될 이유를 들으며 ─ 상대가 뭐라고 지껄이건, "아니, 그런 건 이유가 안 돼"라고 읊조리며 ─ 사람을 죽이는 싸이코패스일까? 인적 없는 골목길에서 여자는 내 뒤통수에 차가운 총구를 겨눴고 나는 그의 지시대로 두 손을 든 채 천천히, 뒤로 돌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여권은 숙소에 있었고, 현금을 얼마나 들고 나왔는지 계산하고 있었는데 여자는 내 입속에 총구를 쑤셔 넣은 채 단지, 이유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의혹에 찬 눈길로 여자를 훑어보았다. 그러나 복면을 쓴 여자의 두 눈은 클래식 공연 R석에 앉아 무대 위를 응시하는 관객처럼 한없이 차분하고 조금은 따분해 보였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해야만 한다. 생각 말고는 달리 할 일도 없으니 (애처로운 두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것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기에)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나는 혀를 내밀어 총구 속으로 집어넣어 보았다. 만약 여자가 방아쇠를 당긴다면, 격발된 탄환은 나선을 그리며 내 혀를 찢어발기고 입천장과 기도를 관통한 다음 머릿속을 완전히 휘젓고 두개골을 박살내겠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즉사할 테고, 그것은 썩 만족스러운 일이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누군가 내 두개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는 가늘게 눈을 뜨고 90도로 기울어진 시선 속의 테이블과 의자와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과 스피커로부터 흘러나오는 멜론 차트의 음악소리를 차례대로 인식했다.

 

    나는 모로 누워 애인의 무릎을 베고서 잠들어 있는 사람이었다. 이곳은 서울의 카페였고, 나는 머그잔의 아메리카노와 리필한 아메리카노마저 다 비우고서 검은 비닐봉투에 숨긴 위스키 한 병을 홀짝이던, 카페인-알코올 의존증세를 보이는 사람이었다. 새벽 세 시 ─ 보통 직장인들의 오후 열한 시 정도에 해당하는 이 시간대는, 내겐 모든 종류의 불안과 현실도피, 중독증과 충동조절장애가 몰려오는 시간대였다. 다행히 애인이 내 옆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기에, 나는 이따금 애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거나 그의 볼을 만지작거리고 배고픔과 졸림에 대해 칭얼대며 관심을 요구하는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그러나 글쓰기에 집중하는 애인은 내게 만족할 만한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고, 나는 편의점에 가서 싸구려 위스키를 ─ 1+1 행사 상품을 골라 외투 주머니 양쪽에 집어넣고서 ─ 사 와서는 홀짝이기 시작한 것이다. 애인은 그런 나를 엄격한 어른의 눈으로 바라보았고, 나는 장난기와 머쓱함, 만족감(이제야 내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이 뒤섞인 눈빛으로 애인의 두 눈을 마주하며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애인의 두 눈은, 사실을 말하자면 엄격한 부모의 눈빛이라기보다, 나잇값을 제대로 못하는 어른을 바라볼 때의 경멸감 ─ 경멸을 숨기지 못하는 솔직함이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 에 기초하고 있었고, 거기에 적당량의 걱정과 미약한 연민, 그리고 아주 희미한 애정으로 뒤섞여 있었는데, 그런 눈빛이 내겐 정오의 햇빛보다도 더 익숙한 것이어서, 때로는 안정감마저 느껴지곤 했다.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다시금 여자의 눈빛을 읽어내려 노력했다. 내 입에 권총을 쑤셔 넣은 여자는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옅은 갈색의 눈동자와 좌우로 길게 뻗은 눈매는 분명 어디선가 마주한 듯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어쨌든 생각하자. 또다시, 내가 죽어야 할 이유를…… 나는 범죄 전과가 없지만 기소유예 ─ 아마 지금쯤은 말소되었을 ─ 처분을 받은 적이 있는데, 길거리에서 지갑을 주웠다가 주인을 찾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범죄였는데 경찰관이 셋이나 찾아온 것이 꽤 의외였다.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고 비좁은 원룸 복도 앞에 경찰관 3명이 나란히 서 있다는 사실보다도, 그들이 문을 두드려 내 잠을 깨웠고 당분간 내가 더 잠을 잘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 짜증스러웠다. 나는 그들을 따라 건물 바깥으로 나가 출입구 계단에 주저앉아 3명의 경찰관을 차례대로 올려다보았는데, 이른 아침의 역광 속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고 이런 장면을 카프카의 소설에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근 파출소에서 출동한 그들은 미란다 고지도 없었고, 체포영장이나 수색영장도 ─ 있을 리가 ─ 없었지만 나는 순순히 그들에게 협조하여 경찰서로 가서 진술서를 작성했다. 야구 모자를 눌러쓴 채 경찰서 내부의 구조와 형태, 사복형사들의 차림새, 말투, 행정처리 요령, 진술서 양식, 입건된 피의자의 시선과 관점, 기분 따위를 세밀하게 기억해 두었는데 언젠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는 비교적 디테일하게 생각을 진행시켰고 하지만 생각을 하면 할수록 5년 전의 그 경험이 죽어야 할 이유까지는 아니지 않은가, 이래서는 여자가 총을 치우고 내게 발언권을 준다고 해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청하게 그를 올려다보겠군, 이자가 내게 원하는 건 고해성사일까 그럴듯한 궤변일까, 아니면 침묵과 복종일까, 어쩌면 분노와 반항일지도…… 하지만 나는 어느 쪽도 내키지 않았는데, 내 입에 차가운 쇳덩어리가 들어 있다는 게 생전 처음 겪는 일치고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고, 이 쇳덩어리가 나의 죽음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주는 자극과 긴장감이 역설적으로 내가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명제를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쯤에서 나는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는데, 애인이 내 머리통 ─ 생각을 잠시 들어올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피우러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애인을 따라가서 담배를 피워야 하나, 아니면 여전히 모로 누운 채 생각을 마저 이어 가야 하나 망설였다. 스피커로부터 흘러나오던 음악은 어느새 멈춰 있었고, 나는 자연스레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주고받던 사람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게 되었는데, 여자 한 명과 남자 여럿으로 구성된 그룹이었다. 남자 한 명이 나무를 활용한 모종의 예술 작업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열정적으로 발표한 참이었고, 그룹의 리더로 여겨지는 여자는 남자의 아이디어에 대해 명쾌하고 친절하지만 다소 부정적인 견해에 가까운 크리틱을 들려주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서서히 생각 속으로 빠져들면서, 여자의 신랄한 크리틱을 ─ 꽤 흥미를 가진 채 ─ 귀담아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남자의 아이디어는, 그가 갖고 있는 예술적 열정이나 신념과는 별개로 미학적 측면에선 지루하고 식상한 클리셰라는 것이었는데, 나는 여자가 인용하는 예술가들의 이름과 미학 지식에 대한 해박함에 감탄하면서, 저 남자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아마도 입을 총구로 틀어막힌 채 삶과 죽음의 모든 것에 대해 돌이켜보는 나의 심정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복면을 쓴 여자의 엷은 갈색 눈동자와 좌우로 길게 뻗은 눈매는 뒷모습만 보이는 저 여자의 인상으로부터 추출된 것은 아닐까, 여자는 이제 구체적으로 남자의 아이디어에 대한 발전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는데, 나무의 가지가 얽혀 있는 부분에 대한 디테일을 이야기하던 도중 자지, 라고 발음했다가 빠르게 가지로 정정하여 크리틱을 이어 나갔고, 여자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 없이 매끄럽고 이지적인 태도를 유지했으며 청중들 또한 아무런 동요 없이 그의 말을 경청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모로 누워 생각을 이어 나가던 도중이었기에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어 여자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으나, 그의 두 눈은 여전히, 클래식 공연 R석에 앉아 무대를 응시하는 관객처럼 한없이 차분하고 조금은 따분해 보이기만 했다. 그것은 담배를 피우고 있을 애인의 두 눈 같기도 했고, 깊게 잠들수록 서서히 두 눈을 치켜뜨는 나를, 내려다보는 애인의 가느다란 시선 같기도 했으며, 나는 무릎을 꿇고 생각에 잠긴 채, 내가 잘못 들었던 게 아닐까, 만약 내가 생각 속에서 ─ 이 모든 망상과 기억과 미래와 과거의 뒤섞임 속에서 ─ 순전히 나의 착각에 의해 '그것'을 생각 속에 집어넣고 만 것이라면, 위태위태한 균형 ─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의 끝없는 외줄타기 ─ 을 유지하던 자의식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데, 나의 혀는 입속의 비릿한 쇳덩어리를 쉴 새 없이 핥고 있었고, 담배를 피우러 간 애인은 아직도 자리로 돌아오질 않아 나는 비스듬히 목이 꺾인 채 모로 누워, 뒷모습만 보이던 여자가 어느새 크리틱을 끝마친 뒤 백팩 속에 들어 있는 권총을 뒤적거리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볼 때의, 검은색 KF94 마스크 위로 드러난 얇고 가느다란 연갈색의 눈동자를 떠올리면서, 검은 비닐봉투 속의 위스키는 식도를 따라 조금씩 내 몸을 역류하고 있었다.

 

 

 

 

 

 

 

 

 

 

 

 

 

 

 

 

 

정사민 작가소개 / 정사민

2019년 《현대시》 신인추천으로 작품 활동 시작.

 

   《문장웹진 202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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