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과 페티시즘 - 양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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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in 문학]

 

비평 기획
– 한국 문학에 불만 있다?
 

    2016년 한국 문학은 어느 위치에 자리하고 있을까요. 문학을 둘러싼 최근의 담론들 그리고 2010년대 중반 현재의 한국 사회 문화의 종합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한국 문학은 어떻게 생각되고 이야기될 수 있을까요. 그보다 먼저, 현재의 복합 다층적인 사회 문화적 조건과 더불어 한국 문학은 어떤 형태와 어떤 맥락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 문학에 대한 불만은 기실 개별 텍스트, 즉 어떤 소설, 어떤 시, 어떤 산문, 어떤 글쓰기에 바로 드러나 있는 요소들로만 환원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한국 문학을 구성하는 개별 텍스트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이야기될 수 없는 것도 분명합니다. 한국 문학에 어떤 막연한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개별적인 문학 작품들에 대한 감상과 비평이 먼저 제기되지 않았을 리 없었으리라는 것이 이번 기획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이번 비평 기획은 가급적 구체적이고 실감이 되는 의견을 나누려고 합니다. 솔직해야 하는 만큼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으나, 비평가로서가 아닌, 오랫동안 한국 문학에 애정과 관심을 유지하고 있는 독자로서 한국 문학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상을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헤아려 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 문학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려 합니다.

 

 

한국문학과 페티시즘(Fetishism)

 

 

양윤의

 

 

    1. ‘최초의 책’이라는 환영

    식민지 시절에 출간된 초판본 시집인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김소월의 『진달래꽃』, 백석의 『사슴』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1) 그 이유로 기사에서는 “감성을 자극한 패키지와 초판본을 그대로 재현한 디자인 콘셉트”를 들었다. 아련한 시절에 대한 향수를 지녔다는 점에서 팝 아이콘 상품의 일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 초판본 시집에는 대량생산되는 도서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종의 아우라가 서려 있는 듯하다. 실제로 이 책들의 이미지는 SNS를 타고 수많은 유저들에게 인증 혹은 재-인증되고 있다. “초판본을 그대로 재현”한 시각이미지 속에서 고인이 된 시인의 삶이 그 책을 통해서 현현한다고, 긴 시간을 거쳐서 손에 쥔 저 책의 즉물적인 감각이 특별한 소유욕을 낳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열풍은 벤야민이 말한 예술작품의 아우라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육필원고도 희귀본도 아니다. 그것은 문학을 희귀한 ‘레어템(한정판)’의 형태로 소유한다고 느끼게 만드는 대체상품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런 한에서 이 책을 소장한다. 작가의 친필 사인이 인쇄되어 있는 책을 ‘단 한 권의 책’으로 상상하기, 대량생산된 책을 ‘단 하나의 책’으로 간주하기. 이것은 단순한 키치가 아니다. 키치는 ‘대량생산’된 예술작품으로 처음부터 원본성이 거세되어 있다. 하지만 저 초판본 시집은 대량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자신이 원본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책을 페티시(fetish)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초판본의 “디자인 콘셉트”로 소비되고 있는 저 시집들은 고유명 윤동주, 김소월, 백석과 무관한 환유적인 사물일 뿐이다. 이 책은 진짜 초판본이 아니면서도, 최초의 시절을 상기하는 유력한 사물이 되었다. 바로 페티시가 되었다.

 

    1)   「시집 3권이 10만 부 팔렸다. 지금 ‘초판본 시집' 열풍이 불고 있다」, <허핑턴 포스트 코리아>, 2016년 03월 03일. <http://www.huffingtonpost.kr/2016/03/03/story_n_9371166.html>

 

    2. 문명과 페티시즘

    페티시즘(fetishism)은 물신주의, 물신숭배, 주물숭배, 절편음란증 등 다양한 용어로 번역된다. 페티시즘이라는 용어는 포르투갈어로 ‘마법’, ‘부적’을 뜻하는 ‘페티소(fetisso)’에서 왔다. 15세기 포르투갈이 서아프리카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이 지역의 부족들이 평소 숭배 대상으로 삼고 있던 신적 자연물을 이 이름으로 불렀으며, 18세기 프랑스의 비교종교학자 샤를 드 브로스(Charles de Brosse)가 세계 각지에서 페티소를 숭배 대상으로 하는 원초적 신앙을 페티시즘이라고 명명했다.2) 개별적인 생물이나 무생물이 페티시가 될 때, 그 사물은 신적인 것의 현현으로 간주된다. 그것이 일반적인 징표(상징)와 다른 것은 페티시 너머에 또 다른 신적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페티시는 사물화, 개별화된 신이면서도 여전히 물질인 것, 다시 말해 파괴할 수도 버릴 수도 있는 소유물이다.
    페티시즘은 미학과 쌍둥이다. 이 둘 모두 물질에 대한 감각과 이를 지각하는 정신 사이의 관련성에 주목하여, 객관에 깃든 주관 혹은 주관을 표현하는 객관을 이론화하는 과정에서 산출되었다. 미학이 예술과 미적 감정을 종교의 신성성, 사물의 실용적인 사용, 경제의 논리와 분리된 특별한 경험으로 정립하는 동안, 페티시즘은 유사-종교적 경험을 설명하는 용어로 정착된다. 계몽주의의 정의에 따르면 “원시적인 페티시란 가장 계몽되지 못한 영혼과 가장 문명화되지 못한 사회가 갖고 있는 전형적인 문화적 인공물이며 진정한 종교적인 이해와 자기-의식적인 미적 판단이 시작되기 이전의 역사가 없는 정지 상태에서 얼어붙은 채 남아 있는 것이었다.”3) 토테미즘이 원시종교의 일반 이론이라면, 페티시즘은 계몽되지 못한 물신숭배자가 자신의 욕망을 물질세계에 투영한 미성숙한 이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 문명화된 사회에서도 페티시즘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를 폭로한 이는 둘이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그들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상품세계의 물신적(物神的) 성격에 관해 설명한 바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마르크스가 말하는 물신숭배는 자본주의적인 생산체제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2)  마토바 아키히로 외, 「페티시즘」, 『맑스사전』, 오석철, 이신철 옮김, 도서출판b, 2011, 480쪽.
    3)  윌리엄 피에츠, 「페티시」, 도널드 프레지오시 편, 『꼭 읽어야 할 예술이론과 비평 40선』, 정연심 외 옮김, 미진사, 2013, 158쪽.

 

    상품형태의 신비성은, 상품형태가 인간 자신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 자체의 물적 성격으로 보이게 하며, 따라서 총 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그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관계[즉,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 한다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치환(置換: substitution)에 의해 노동생산물은 상품으로 되며, 감각적임과 동시에 초감각적[사회적] 물건으로 된다. (중략) 이것을 나는 물신숭배(物神崇拜: fetishism)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노동 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되자마자 거기에 부착되며, 따라서 상품생산과 분리될 수 없다. 상품세계의 이와 같은 물신숭배는, 앞의 분석이 보여준 바와 같이,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 특유의 사회적 성격으로부터 발생한다.4)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직접적 관계가 물건들의 관계로 나타난다. 사회적 관계가 물화(物化)되는 것이다. 상품은 인간이 노동에 의해 만들어내는 생산물에 지나지 않으나 고유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인지된다. 배후에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노동의 생산물이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전도가 발생하는 것,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사태를 물신성의 비밀이자 ‘물신숭배’라고 명명한다. 바로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상적인 종교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전도는 이중적이다. “상품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화폐가 가치척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모든 상품이 자신의 ‘가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선 그것과의 교환 가능성을 입증해야 하는 역설적 전도”가 다시 일어났다. 이제 “상품 세계에서 화폐는 모든 상품의 신이고, 모든 상품 소유자의 신이다.”5) 화폐는 그 너머에 또 다른 신적 존재를 상정하지 않으면서도, 물질적으로 현현한 신(이자 소유물)이라는 점에서 페티시다.

 

    절편음란물(페티시)은 단순한 남근의 대체물이 아니라, 절편음란증(페티시즘) 환자의 어린 시절에 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가 나중에 상실되어 버린 아주 특별하고 구체적인 남근의 대체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상적인 삶의 과정 속에서 상실되어 버린 남근을 절편음란물을 통해 부활시키고 보존하려는 욕구가 절편음란증을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하면, 절편음란물이란 남자아이가 한때 그 존재를 믿었던 여성의 남근, 혹은 어머니의 남근의 대체물이다.6)

 

    프로이트가 보기에, 어머니와의 합일의 불가능성 때문에 불안감을 가지게 된 아이는 성인이 된 후에도 팔루스를 얻지 못한 상흔을 그대로 간직한다. 어머니에게서 거세되어 사라진 음경을 환유적인 대체물로 되살리려는 욕망이 페티시즘의 원인이다. 왜 되살리고자 하는가? 음경의 부재야말로 거세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어머니에게 음경이 없음을 알면서도 이를 부인(verleugnung, disavowal)하기 위해 대체물(페티시)을 여성의 음경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남성 환자가 집착하는 페티시는 대개 거세 불안을 회피하기 위한 여성 성기의 대체물이다. 반면 여성 환자의 경우에는 성교 혹은 남성 성기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따라서 이들의 페티시즘은 무성적(無性的)이다.
    결국 페티시즘은 비문명과 문명을 관통하면서, 경제(사람들 사이에서 군림하는 화폐라는 신)와 무의식(개인의 내밀한 욕망 속에서 드러나는 사물화 된 신)을 관통하는 키워드인 셈이다.

 

    4)  마르크스, 『자본론』1-상,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91, 93쪽.
    5)  이진경,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휴머니스트, 2011, 291~292쪽.
    6) 프로이트,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김정일 옮김, 열린책들, 2003, 312쪽(단, 괄호 속 설명은 인용자의 것).

 

    3. 한국문학의 페티시즘

    한국문학에서 페티시라 할 수 있는 것들을 유형화해 보고자 한다. 페티시즘이 자본주의의 핵심(돈과 성)을 관통하는 주요한 테마라는 사실을 먼저 적어 두기로 하자. 오해 없길 바란다. 문학에서 페티시즘을 읽는 것은 병리적인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무의식과 삶의 원형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욕망과 돈은 병약하거나 특별한 주체가 아니라 모든 주체에게 내걸린 화두이다. 이 글이 한국문학에 대한 네거티브 리포트가 아니라, 한국문학을 읽는 징후적인 독법이 되기를 바란다. 결론을 당겨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문학 자체가 페티시즘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문학은 이미 하나의 상품이며, 그래서 스스로를 페티시로 설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학의 위의를 말하는 담론에 깃든 신성성을 생각해 보자. 문학가를 문사로 여기는 오래된 전통을 떠올려 보자. 내 손 안에 든 물성(物性)이 스스로 신성(神性)으로 탈바꿈하는 순간, 그것은 페티시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3-1. 상품-페티시와 교환의 신(神)

    가장 명료한 페티시는 문학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표에 기탁할 때 드러난다. 상표는 욕망의 위계질서를 보여주는 이정표다. 여기에 전제된 전도의 논리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고품격, 고품질이 표상하는 정신적 가치(패션에 대한 안목)가 일단 상품으로 표현되면, 그 상품의 소유만으로도 정신적 가치가 보장된다. 고객 입장에서는 ‘프라다’나 ‘루이뷔통’의 미적 가치를 논할 필요가 없다. 그것을 소유한 것만으로도 고객은 이미 어떤 정신적 가치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소유권이 이미 화폐 페티시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다. 따라서 이렇게 드러난 욕망에는 욕망의 원인과 결과가 은폐되어 있다. <왜 욕망하는가? 무엇을 욕망하는가?> 따위의 질문이 화폐 페티시에 의해 이미 선-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욕망은 세계의 결핍을 은폐한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이 작동하는 원리와도 같다. 지젝이 공식화했듯이, “우리는 그것이 상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하지만……”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물신적인 부인(否認)7)이 그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손에 들려 있는 프라다 핸드백은 나의 가치를 틀림없이 높여 줄 것이다. 여기에는 프로이트가 말한 거세 불안이 잠재되어 있다.
    정이현이 처음 소개한 발랄한 도시녀들의 세계를 생각해 보자. “서울 남산 중앙의 특급 호텔인 하얏트 호텔”8), “모노그램 캔버스 라인의 진짜 루이뷔통 백”9)으로 대변되는 계급적 소도구는, 거기에 의탁해서 자신의 계급을 현시하는 자들의 텅 빈 욕망을 보여준다. 그 욕망이 텅 빈 것은, 그것이 상품을 매개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화폐가 그 욕망을 매개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칙릿 소설이 고급 상품들을 나열함으로써 거기에 담긴 속물적인 태도를 비판한다면(그러나 그 비판 속에서 고급 상품들의 위계는 ‘폭로’되는 게 아니라 ‘전시’된다), 정이현의 소설은 그들의 몸까지 페티시로 소비된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7)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이수련 옮김, 인간사랑, 2003, 44쪽.
    8)  정이현, 『낭만적 사랑과 사회』, 문학과지성사, 2003, 14쪽.
    9) 같은 책, 34쪽.

 

    그는 창가의 일인용 소파에 앉아 말없이 밖을 내다보고 있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율은 순결의 흔적을 함께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먼저 그를 부를 수는 없다. 나는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움직일 때마다 골반 전체가 뻐근하게 쑤셔 온다. 그에게 왠지 미안하다. 그렇지만, 이제 곧 나의 흔적을 확인한다면 틀림없이 그도 기뻐할 것이다. 나는 조심스레 이불을 들친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10)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주인공 ‘유리’는 수많은 남자들과 사귀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섹스만큼은 한사코 피해 왔다. 그녀가 남성들의 순결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녀 자신이 그 이데올로기에 올라탔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첫 섹스에서 혈흔이 남지 않았다. 그녀에게 신분상승을 안겨 줄 유일한 트레이드마크가 사라진 것이다. 결국 그녀는 ‘결함이 있는 상품’으로 간주되고, 남자는 비싼 것이 아니라면서 그녀에게 “진짜 루이뷔통 백”을 던져 준다. 저것은 일종의 화대가 아닌가. 이 무시무시한 환유는, 그녀의 몸이 “명품 가방”과 구별되지 않는 페티시라는 것을 폭로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섬뜩하다. “조용히 운전에 몰두하고 있는 그의 옆얼굴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져서, 나는 마음속으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다. 누가 뭐래도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11) 안간힘이 담긴 저 마지막 선언은, 그녀의 말이 아니라, 페티시였던 상품이 하는 말일 것이다. 그는 자신을 아끼고 사랑했다. 내가 그의 소유물이 되었으니,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다. 그러나 페티시는 결함이 발견되는 순간, 다시 말해서 매력을 잃는 순간, 바로 버려지고 파괴된다.

 

    10)  같은 책, 33쪽.
    11)  같은 책, 34~35쪽.

 

    3-2. 사물-페티시와 성화의 몸짓

    김중혁의 초기 소설에서는 교환가치로서는 쓸모없는 사물들이 특정한 개인에게는 소중한 것이 되는 예가 흔하다. 「무용지물 박물관」(『펭귄뉴스』)에서 「악기들의 도서관」(『악기들의 도서관』)에 이르기까지, 상품으로서는 무용하지만 개인에게는 유용한 사물들이 소설에 가득하다. 김중혁의 서사는 저 ‘단 하나의 사물’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해서 그것의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완결된다. 이를 수집가적 페티시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기원적으로 볼 때 박물관은 제국주의의 현시욕망이 만들어낸 페티시들의 전시장이다. 박물관의 전시품들은 전 세계를 사물화한 환유적인 표식이면서 세계를 소유했다는 자부심의 상징이다. 그런데 김중혁의 인물들에게서 수집품은 경제적인 것과도, 권력과도 무관한 것이다. 그것은 무용하거나 무력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리방패」를 보자. 이 소설의 주인공은 서른 번째 면접에서 떨어진 두 젊은이다. “두 시간 전 면접관들의 웃음소리를 생각하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M과 나는 언제나 입사시험을 함께 치렀다. (중략) 우리는 서른 번의 입사시험을 함께 치렀다. 백전백패, 승률은 제로였지만 혼자서 시험을 쳐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12) 김중혁의 아이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지위는 어떤가. 매번 취업 문턱에서 좌절하는 산업예비군이다. ‘면접(面接)’이란 성인과 청소년 시기의 ‘접면(接面)’이다. 이들은 학생 시절을 이미 졸업했으나 아직 사회인이 되지 못했다. 이들에게 ‘입사(入社)’란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면서 성인이 되는 예식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도무지 진지함이란 게 없다. 이들은 반드시 입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보다는, 면접장에서 어떻게 퍼포먼스를 할 것인가를 궁리하느라 시간을 보낸다. 지금도 둘은 면접관에게 인내심을 보여주려고 실 뭉치를 푸는 이벤트를 선보였다가 엉클어진 뭉치를 풀지 못해서 실패한 참이다. 그런데 지하철에서 실타래를 풀다가 오해를 받아 곤욕을 치른다. 엉킨 실을 다 푼 후에 실의 길이를 재보겠다고 칸을 질러 가다가 테러범으로 오해를 받은 것이다. 역무원이 이유를 추궁하자 둘은 행위예술을 한 것이라고 우긴다.

 

    “조각나 있는 현대인의 마음을 하나의 실로 이어 주고 싶다는 메시지가 담긴 이벤트라고 할 수 있지요. 현대인의 삶을 가장 잘 반영해 주는 공간이 지하철이잖습니까.”13)

 

    누군가 이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올린 덕분에 이들은 유명인이 된다. 그런데 저 실타래에 부여된 의미는 조변석개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인내심을 보여주기 위한 소도구였다가, 길이를 재보기 위한 호기심의 도구가 된다. 다시 그것은 폭발물의 도화선으로 의심을 받았다가, 끝내는 현대인의 마음을 하나로 이어 주기 위한 상징이 된다. 그렇다면 저 의미들은 사물 그 자체와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고 어떤 방식으로든 교환 가능하다는 점에서 무의미의 의미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들에게 실 뭉치는 전시(퍼포먼스) → 호기심 → 놀이 → 성화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성화(聖化)의 몸짓이 실은 놀이였을 뿐이라고 말해도 좋고, 모든 진지한 몸짓을 놀이의 차원으로 승화하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저들의 수집품이 상품-페티시와 다른 것은, 저 몸짓에 어떤 계급성도, 경제원칙도 담기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러면서도 수집품이 페티시가 되는 것은 저 몸짓이 수집품에 부여한 신성함이, 틀림없는 신성함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칼을 부딪쳤다. 췌췌엥, 하는 소리가 객실에 울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소리가 컸다. 예술전문기자는 지하철 의자에 앉아서 입을 벌린 채 우리를 바라보았다. 재미있어서라기보다 너무 유치해서 못 봐주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상대방을 정말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온 힘을 다해 칼싸움을 했다.14)

 

    지하철 실 뭉치 사건을 계기로 이들에게 인터뷰 요청이 들어온다. 이제 이들은 예술전문기자 앞에서 플라스틱 칼과 유리방패로 ‘유치한’ 싸움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들은 “정말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온 힘을 다해” 퍼포먼스를 벌인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구경하러 몰려든다. 이제 성화의 몸짓(포즈)은 실제의 성스러움과 구별되지 않는다. 바로 이때, 김중혁의 사물들은 페티시로 전환된다. 무용지물이 성물이 되는 순간이다. 물론 이 연관에 필연성이 없다는 점을 상기해 둘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들이 그토록 신성시했던 유리방패와 플라스틱 칼을 지하철에 두고 나오는 데서도(아이들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페티시는 숭배자가 거기에 부여한 신성함을 철회하는 바로 그 순간, 무용한 사물로 떨어진다.

 

    12)  김중혁, 「유리방패」, 『악기들의 도서관』, 문학동네, 2008, 144쪽.
    13)  같은 책, 154쪽.
    14)  같은 책, 171쪽.

 

    3-3. 몸-페티시와 분할된 육체

    정이현의 소설이 폭로하듯, 몸 역시 하나의 상품-페티시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런데 거기에 성스러움이 부여되는 순간, 몸은 상품-페티시가 아니라 일종의 우상이 된다. 우상은 페티시와는 조금 다르다. 그것은 숭배자의 소유물이 아니라 경배물이다.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신이다. 그런데 여성의 몸이 남성 주체의 시선에 포획될 때 그것은 경배의 대상(우상)이 아니라, 시선이 소유한 소유물(페티시)로 다시 전락한다. 여성의 몸은 생략되고 분할되며 부분화된다. 이를테면 이런 묘사.

 

    내가 왜 네게 빠지게 됐는가를 종일 생각하다가 먼저 떠오른 것은, 너의 손이다.

 

    내가 처음 보았던 너의 손은,

 

    우리 집 데크의 내 흔들의자 팔걸이에 자연스럽게 놓여져 있었다. 네가 산책하던 중 내 집에 들어왔다가 무심히 그 의자에 앉아 잠든 날 보았던 손이다. ‘놓여져’ 있었다는 내 표현에 주목해 다오. 그것은 네 의지로 네가 내려놓은 손이 아니었다. 우연히, 그곳에 놓여져 있었다. 소나무 잔가지 흰 그늘이 정물 같은 너의 손등 위에서 고요히 그네를 타고 있었지. 상앗빛 손가락들은 아주 가늘었고 손등에 수맥처럼 연푸른 핏줄이 가로질러 흘렀다. 너의 팔목은 겨우 손가락보다 조금 굵은 것 같았어. 나는 한참이나 그것을 세세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팔목으로부터 장지(長指)와 약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는 핏줄은 도드라져 보였지. 지금이라도 네 손등 위의 그 핏줄을 살펴보렴. 그 핏줄 가운데쯤, 작은 매듭 같은 부분이 있을 게야. 마치 어린 새싹처럼 살짝 솟아오른 피돌기 부분. 내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한 것은 핏줄의 그 매듭이 뛰고 있다고 알아차렸을 때였다.15)

 

    박범신의 『은교』 속 한 장면이다. 노년의 시인 이적요와 그가 사랑한 소녀 은교. 그는 그녀(‘너’)가 “순결하고 착하고 깊고 빛난다고” 늘 생각해 왔지만, 그가 사랑에 빠진 것은 그렇게 모호한 인상 때문은 아니다. 그가 빠져든 것은 우연히 거기에 놓여 있었던 그녀의 손 때문이었다. 저 집요한 묘사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탐욕스러운 시선의 권력이다. 그리고 마침내 손등 위의 핏줄에서 “작은 매듭”처럼 돋은 부분이, 마치 그 자체로 독립적인 하나의 생물인 것처럼 뛰는 것을 보았을 때, 저 시선의 포획은 ‘완성’된다. 은교는 전체로서 한 여자가 아니라, 손등 위에서 뛰는 작은 생물이, 이적요(‘나’)의 시선이 소유한 부분 대상이, 분할된 몸-페티시가 된다. “내가 평생 갈망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로망이 거기 있었고, 머물러 있으나 우주를 드나드는 숨결의 영원성이 거기 있었다. 네가 ‘소녀’의 이미지에서 ‘처녀’의 이미지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16) 거듭 강조하거니와 은교 전체가 여신이 아니다. 그랬다면 그녀는 그의 우상(즉 열렬한 경배와 찬탄의 대상)이 되는 데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손등에 돋은 저 작은 생물은 이적요의 시선에 의해서만 생명을 부여받은 작은 소유물이다. 그리고 손에서 시작된 시선의 지배는 부분 대상에서 부분 대상으로, 쇄골로 허리선으로 그 영역을 넓혀 간다.
    이 절대적인 시선의 탐닉과 건너편에 늙은 이적요 본인의 몸이 있다. “성긴 머리칼 밑의, 주름진 이마, 번질거리는 광대뼈, 합족한 듯한 볼, 긴 턱을 골고루 둘러싼 고랑들”을 가진 늙은 얼굴과 “근육들이 빠져나가면서 쭈글쭈글해지기 시작한 몸”17)이 있었다. “오, 육체는 풀과 같은 것.”이라고 탄식하거나, “이건 나, 이적요가 아냐!”18)라고 부정하는 정신이 있었다. 이 허물어져 가는 몸과 정신을 반대편에 맞세움으로써, 작가는 『은교』에서의 몸-페티시가 상품-페티시로 전락하는 걸 저지할 수 있었다. 교환 가능성을 봉쇄함으로써 몸이 가치 척도를 가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15)  박범신, 『은교』, 문학동네, 2010, 92~93쪽.
    16)  같은 책, 93쪽.
    17)  같은 책, 101~102쪽.
    18)  같은 책, 103쪽.

 

    4. 페티시즘과 실재

    페티시즘은 우리와 페티시를 환유적으로 연결한다. 페티시는 우리 몸의 연장이거나 소유물이거나 가치를 표상하는 상품이다. 페티시는 우리 곁에 부가된(attributed) 것이다. 그러나 그를 통해 우리 자신의 속성(attribute)이 된다. 페티시는 본질과 속성을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는 철학 전통에 속해 있다. 예컨대 본질(사람)에 사물(술)이 더해져서 어떤 속성을 가진 사람(술 취한 사람)이 되었다고 가정하자. 페티시의 전통에서라면, 그 사람의 본질은 멀쩡한(술 취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참 장한 커플이다, 우리.”
    “맞아. 당신 참 장해. 오래 버텼어. 다녀와라.”
    영경의 젖은 눈에 퍼뜩 생기가 돌았다.
    “정말 괜찮겠어?”
    “난 괜찮아.”
    영경이 더는 묻지 않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다행이다.”
    “다행이지. 우리 빵경이, 걱정 말고 다녀와.”
    영경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 정말 안 나가겠다는 말은 못 하겠어, 환아.”
    “그래, 다녀오라니까. 너무 오래 있지만 말고.”19)

 

    19)  권여선, 「봄밤」, 『안녕 주정뱅이』, 창비, 2016, 21쪽.

 

    권여선의 「봄밤」 속 연인의 대화를 보자. 수환은 치료받을 시기를 놓친 악성 류머티즘 환자이며, 영경은 중증 알콜중독자다. 둘은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만나 또 다른 막다른 길인 요양원에 함께 들어왔다. 이곳에서 이들은 일명 “알류 커플(알콜 중독+류머티즘)”로 불린다. 수환은 영경이 술을 마시면 안 되는 환자임을 알고 있으나, 그녀가 술을 끊고 나서 금단증상으로 고생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한다. 그녀의 외출은 인사불성이 된 그녀가 병원으로 실려 오는 것으로 끝나고, 그는 그녀를 기다리다 병세가 악화되어 숨을 거둔다. 진통제를 맞아 가며 아픈 것을 감추고 술 마시러 나가는 그녀를 배웅한 수환은 그녀를 깊이 사랑했다. 영경도 마찬가지. 남은 이들은 “영경의 온전치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그리고 수환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죽어버렸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아챈다.
    이 사랑에는 본질과 부가된 속성 사이의 격벽이 없다. 수환은 팔다리가 심하게 뒤틀린 환자인 “환”이고, 영경은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중독자인 “빵경”이다. 그리고 둘은 그 상태 그대로 서로를 사랑한다. 페티시와 달리, 이들 커플에게는 질병과 술이 그들의 본질을 가리거나 그들의 본질에 부가된 어떤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를 ‘실재’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권여선이 이번 책에서 소개한 ‘주정뱅이’는 이처럼 단순히 술에 취한 사람이 아니라, 취한 상태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어떤 실존의 양태에 놓인 사람이다. 그러니 나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페티시 너머에 있는 것이 바로 그 실존 혹은 실재가 아닐까?■

 

 

 

 

 

 

 

평론가 양윤의

작가소개 / 양윤의

– 문학평론가. 서울 출생. 200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으로 등단. 평론집 『포즈와 프러포즈』(문학동네, 2013)가 있음.

 

《문장웹진 2016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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