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목이 사라진 자리

[비평 in 문학]

 

비평 기획
– 한국 문학에 불만 있다?
 

    2016년 한국 문학은 어느 위치에 자리하고 있을까요. 문학을 둘러싼 최근의 담론들 그리고 2010년대 중반 현재의 한국 사회 문화의 종합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한국 문학은 어떻게 생각되고 이야기될 수 있을까요. 그보다 먼저, 현재의 복합 다층적인 사회 문화적 조건과 더불어 한국 문학은 어떤 형태와 어떤 맥락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 문학에 대한 불만은 기실 개별 텍스트, 즉 어떤 소설, 어떤 시, 어떤 산문, 어떤 글쓰기에 바로 드러나 있는 요소들로만 환원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한국 문학을 구성하는 개별 텍스트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이야기될 수 없는 것도 분명합니다. 한국 문학에 어떤 막연한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개별적인 문학 작품들에 대한 감상과 비평이 먼저 제기되지 않았을 리 없었으리라는 것이 이번 기획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이번 비평 기획은 가급적 구체적이고 실감이 되는 의견을 나누려고 합니다. 솔직해야 하는 만큼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으나, 비평가로서가 아닌, 오랫동안 한국 문학에 애정과 관심을 유지하고 있는 독자로서 한국 문학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상을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헤아려 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 문학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세목이 사라진 자리

 

 

책과 삶이 나에게 가르쳐주었듯, 세목(細目, detail)들을 통해서만 우리는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모든 세목을 알아야 하는 것은 그것들 중 무엇이 중요한지,
또 어떤 단어가 사물의 이면으로부터 빛나는지 결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산도르 마라이, 『잉걸불(embers)』 중에서

 

 

서희원

 

 

1. 리얼리티에 대한 열정

 

    ‘1830년의 연대기’라는 부제가 붙은 스탕달의 『적과 흑』은 쥘리앵 소렐이라는 문제적 인간을 통해 왕정복고 시기 프랑스 사회의 정치적·사회적 혼돈을 빼어나게 재현하고 있는 교양소설이다. ‘재현’의 측면에서 말할 때, 19세기 프랑스 리얼리즘 소설의 전범으로 꼽히는 『적과 흑』을 그 이전의 소설들과 구분지어 주는 장르적 특성은 단연 ‘묘사’이다. 『적과 흑』에서 스탕달은 인간이나 사물이 가진 고유의 형태나 자질에 주목하며 이를 세세하면서도 실감나게 묘사하는 방식으로 개별적인 대상이 가진 특수성 ― 중세 신학자 던즈 스코터스가 ‘이것다움(thisness)’이라고 명칭을 붙인 ― 을 드러내고 있다.
    스탕달은 경우에 따라서는 서술자의 목소리를 직접 노출하며 자신의 감각이나 경험을 통해 깨달은 세계의 형상을 기술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것은 쥘리앵 소렐이라는 특수한 렌즈에 의해 감광된 형태로 제시된다. 마치 쥘리앵 소렐의 감각으로 포착된 모든 것을 수집하려는 듯한 스탕달의 태도는 그가 자신의 파멸을 향해 내달리는 『적과 흑』의 결말부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서사적 정합성이나 장면들을 균등하게 기술하려는 소설가의 균형감각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기술된 이 대목에서 레날 부인을 향한 쥘리앵 소렐의 맹렬한 살의는 몇 줄로 짧게 요약된 여정으로 대체되고, 그가 단두대 위에서 맞이하는 극적인 최후는, 주의 깊게 읽지 않으면 알 수 없게, “만사는 간단하게, 극히 자연스럽게 끝났다.”라는 냉담한 한 문장으로 압축되어 있다. 스탕달은 범죄와 처형 사이에 놓여 진, 멈춰진 듯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한 것으로 보이는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이 감지하는 하찮은 일상에 문장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마치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의 대부분은 후회의 연속이며, 죽음을 기다리는 지루한 일상에 불과하다는 듯이 쥘리앵 소렐은 이 시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자신의 감각에 포착된 사소한 것들을 주의 깊게 감지한다. 쥘리앵 소렐은 자신이 수용된 형무소의 건축술과 조경을 눈여겨보며 그것의 섬세한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면회 온 친지들의 심리와 욕망을 그들의 표정과 몸짓, 언어적 특징을 통해 세밀하게 읽어내고, 인간들의 위선적 태도를 금전으로 치환하며,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을 작성한다. 여기에는 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의 사물들에 깃들어 있는 어떤 목적과 이상, 질서를 맹목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제2의 자연’을 세밀하게 관찰하며, 그것의 세목을 새로운 관점에서 연결하고 통합하여 진실을 발견하려는 소설가의 열정이 담겨 있다. 스탕달이 보여준 ‘삶의 특수한 경험을 상세하게 밝히려는 열정’은 리얼리즘 소설을 다른 예술의 장르와 구별하는 동시에 이것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덕목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세계의 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바라보며 이것들의 세목을 통해 진리를 찾아내려는 스탕달의 욕망이 가장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장면은 친구 푸케에게 자신의 매장에 대해 말하는 쥘리앵 소렐의 유언이다.

 

누가 알 게 뭔가? 어쩌면 죽은 후에도 감각만은 남아 있을지 몰라. 그렇다면 난 저 베리에르 시를 내려다보는 높은 산마루에 있는 동굴에서 쉬고 싶어 ― 쉰다는 말이 꼭 지금의 내 심경을 표현하는 말이야. 벌써 여러 번 자네에게 얘기했지만, 그 동굴 속에 들어가서 눈앞에 전개되는, 프랑스에서도 가장 비옥한 그 지방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사뭇 가슴속에 희망의 불길이 솟아올랐었거든. 그때는 그 야심이 나를 사로잡은 정열이었으니까…… 어쨌든 그 동굴이 나는 그리워. 그리고 그 위치가 또한 사색인의 마음을 끌게끔 되어 있다는 건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거야……1)

 

    종교적 신실함을 가진 보통의 유럽인들이 죽음의 과정에서 영혼을 찾고, 천국을 통해 그것의 영원한 안식을 희구하는 것과는 달리 쥘리앵 소렐은 “감각”의 잔존을 기원하며 프랑스의 대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산마루” “동굴”에서의 안식을 갈망한다. “사색인의 마음”을 매혹시키는 그 “위치”에서 바라보이는 풍경이란, 소설에 의거해서 말하자면 “희망의 불길”과 “야심”, “정열”을 쥘리앵 소렐에게 부여했던, 사소하고 하찮은, 무관하게 군집하며 마구 뒤엉켜 있는, 그렇기 때문에 이를 차등화하고 서열화하려는 관찰자의 창조적 욕망을 자극하는, 세계의 세목들이다.
    사물이나 경험에 대한 핍진하면서도 상세한 묘사가 독자들의 사유로 들어와 조합되며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키는 리얼리티의 감각은 비단 유럽 리얼리즘 소설만의 고유한 특성은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가 고정된 어떠한 불변의 대상이 아니라 가변적인 동시에 상대적일 뿐이라는 근대적 인식론의 확산과 함께 자연스럽게 퍼져 나갔고 발전하였다. 한국소설로 범위를 한정해서 살펴보자면, 냉정한 장인의 솜씨로 부르주아의 욕망을 해부했던 염상섭이나 “리얼리즘의 확대와 심화”라는 상찬을 들었던 박태원과 이상에서부터 “극사실주의”란 평을 받은 하성란이나 사소한 것들에 주목하며 여기에 담긴 풍성한 감성을 세밀 화가처럼 그려낸 천운영과 윤성희까지, 주목할 만한 소설사적 성과를 추동시킨 창조적 힘은 리얼리티에 대한 열정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스탕달, 『적과 흑』, 김붕구 옮김, 범우사, 1989, 524~525쪽.

 

    2. ‘주의 깊음’과 ‘무심함’

 

    밀란 쿤데라는 소설가와 독자를 매혹시킨 사소한 것들에 대한 열정을 찬미하며, “오직 소설만이 사소한 것의 거대하고도 신비로운 힘을 발견해 낼 수 있”2)었다고 쓴 적이 있다. 하지만 문학의 쓰기와 읽기 모두에서 요구되었던 ‘주의 깊음’은 빠른 변화와 속도를 특징으로 하는, 특히 사물의 독특한 차이를 가격으로 단순화시키는 화폐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현대적 도시의 일상에서 반드시 요청되는 삶의 태도는 아니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급변하는 삶 속에서 현대인이 자신의 정신적 건강을 지키기 위해 자연스럽게 선택한 태도는 ‘무심함’이다. 게오르그 짐멜은 인간의 의식이 차이를 기반으로 형성됨을 지적하며, 외적·내적 자극들이 급속도로 그리고 끊임없이 바뀌는 현대적 도시의 삶을 통해 대부분의 개인들이 신경과민을 앓고 있다는 사실과 이러한 생리학적 변화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둔감함”이란 새로운 정신적 현상이 등장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둔감함의 본질은 사물의 차이에 대한 마비 증세이다. 그렇다고 우둔한 사람에게처럼 그것이 전혀 지각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사물의 차이들이 지닌 의미나 가치, 나아가 사물 자체를 공허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둔감해진 사람에게 그러한 차이들은 모두 똑같이 침침하고 음울한 색조로 나타나며 다른 것보다 선호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3) ‘가독성(可讀性)’으로 평가되는 문학 텍스트의 가치, 텍스트를 수식하는 ‘타임킬링(time killing)’이란 표현 등은 “둔감함”이 문학 텍스트를 대하는 독자들의 기본적인 정조로 자리 잡았음을 명확하게 알려준다.
    문학의 세목이 요구하는 ‘주의 깊음’과 현대적 삶의 조건이 필수적으로 이끌어내는 ‘둔감함’은 문학 애호가에 있어서도 분명 양가적이다. 문학에서 세목을 읽어내는 교육의 과정이 가진 중요함을 강조하며, “문학이 우리를 좀 더 삶을 잘 알아차리는 사람으로 만들면, 우리는 삶 자체에서 실습하게 되고, 그리하여 이것이 우리를 문학의 세부사항을 좀 더 잘 읽는 독자로 만들면, 이것이 이번에는 우리를 삶을 좀 더 잘 읽는 사람으로 만든다.”고 말한 제임스 우드는 이렇게 솔직하게 고백하기도 한다. “고백건대 소설의 세부사항에 관한 나의 태도는 양가적이다. 나는 그것을 즐기고 소비하며 곱씹는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 생략 …) 그러나 나는 지나치게 많은 세부사항에 숨이 막히는가 하면, 명확히 플로베르의 영향을 받은 전통이 세부사항을 물신화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4)    21세기 한국소설을 중심으로 문학의 읽기와 쓰기를 생각할 때, 세목에 대한 강조와 현대인의 고질적인 정조가 된 무심함 사이에서 소설은 새로운 적응과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것처럼 판단된다. 소설이 보여주는 진화의 추동력은, 진화라는 단어의 선택이 알려주는 것처럼, 작가로서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문학 시장’이며 ‘독자’이다. 독자는 세목을 말없이 보여주기(showing)보다는 그것에 대해 조용하면서도 분명한 어조로 말해 주는(telling) 것을 훨씬 더 선호한다. 문학을 통해 숨 가쁘게 돌아가는 삶에 대한 위안을 찾고자 하는 독자는 급격한 차이를 가진 개성적인 묘사보다는 그것이 서사나 캐릭터를 음미하는 데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예상 가능한 것을 원한다. 사실 문학과 삶의 연관을 보다 밀접한 동시에 변증법적인 것으로 믿고 있는 문학 애호가들은 설명하기를 거부하는 침묵의 단어와 문장이 이를 직면한 독자를 보다 상상적으로 만들며, 그 빈곳을 채워내는 사유를 통해 읽는 사람을 독자인 동시에 작가로 만든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현대적 삶의 조건은 그들이 열망했던 것처럼 독자와 작가를 하나로 결합시키기보다는 이를 분명하게 분업화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김연수가 2005년 출간한 단편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 수록된 두 편의 소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후 「농담」과 「설산」으로 간략하게 표기하겠다)과 2013년 출간한 단편집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 수록된 「벚꽃 새해」를 세목을 다루는 기법의 차이를 중심으로 비교하며 분석할 것이다. 거론한 두 단편과 10년 정도의 시간적 격차를 두고 있는 「벚꽃 새해」는 ‘이별’이라는 주제를 우연하게 만난 두 남녀의 공간적 움직임으로 서사화하고 있으며(「농담」에서 그랬던 것처럼), 시간의 ‘세목’이라고 할 수 있는 에피소드들 ― 역사의 인과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사소하고 하찮은 일들 ― 을 통해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기법적 특징(「농담」, 「설산」에서 그랬던 것처럼)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또한 「벚꽃 새해」에는 이 단편의 문장에서 찾을 수 없고, 오직 「설산」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이상한 ‘얼룩’이 존재한다. 「벚꽃 새해」에서 헤어진 연인에게 시간의 무상함과 삶의 소중함을 알려준 황학동 시계점 노인의 이야기는 성진에게 “꼭 산 사람이 그대로 굳어버린 듯한 병마용과 남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은 여인들의 사막과 목이 잘린 채 폐허의 사원에 앉아 있는 돌부처들과 설산의 눈 녹은 물로 재배한 포도에 대한 이야기”5)로 기억되지만, 이 중 “설산의 눈 녹은 물로 재배한 포도에 대한 이야기”는 노인의 입에서도, 「벚꽃 새해」의 어떤 구절에서도 직접적으로 기술되거나 심지어 암시되지도 않는다. ‘설산의 포도’에 대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설산」이며, 이는 『왕오천축국전』의 구절과 오탈자에 세밀하게 각주를 달며 이를 통해 두 연인이 만들어 가는 놀라운 삶의 우연에 대해 말하는 첫 장면에 등장하고 있다. 의도적인지 아니면 우연한 기억의 혼선을 통해 만들어진 것인지 분명하게 말할 순 없지만, 「벚꽃 새해」의 ‘얼룩’은 하나의 단편을 읽고 해석하려는 고정된 시선과 대상 사이에 존재하며, 독자의 정상적인 응시를 교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벚꽃 새해」를 통해 ‘얼룩’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면, 정반대로 ‘얼룩’을 통해 「벚꽃 새해」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떨까. 독자가 반드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얼룩’이며, 이것이 「벚꽃 새해」에 담긴 작가의 메시지 그 자체라고 말이다.
    이 ‘얼룩’이 연결하고 있는 10년 남짓한 시간이 어떤 의미와 굴곡을 갖고 있는지, 그 간극이 소설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에 대해서라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인터뷰가 있다. 2012년 《문예중앙》 겨울호에 게재된 인터뷰에서 김연수는 2005년의 “유령작가”(『나는 유령작가입니다』)와 지금의 “유명작가”를 대비하며, 그때와 지금의 소설이 분명히 다르다는 질문을 받고는 이렇게 답한다.

 

    2)  밀란 쿤데라, 『커튼』, 박성창 옮김, 민음사, 2008, 36쪽.
    3)  게오르그 짐멜, 「대도시와 정신적 삶」,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김덕영·윤미애 옮김, 새물결, 2005, 41쪽.
    4)  제임스 우드,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설준규·설연지 옮김, 창비, 2011, 77쪽; 83쪽.
    5)  김연수, 「벚꽃 새해」, 『사월의 미, 칠월의 솔』, 문학동네, 2013, 31쪽. 앞으로 이 책에서의 인용은 간략하게 인용한 구절 옆에 쪽수만을 병기하는 방식으로 처리하겠다.

 

그 소설(『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 수록된 소설, 인용자)을 쓸 때는 독자와 관계에서 거의 절망이었어요. 독자는 생각하지 말자. 독자가 없는 소설을 쓰자, 그렇게 생각했고요. 그땐 소설 쓰는 재미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독자가 성가시기까지 했어요. 독자가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못 하는 부분이 생기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 생기기 때문에 독자가 없다고 생각하자, 혹은 계간지 독자 200~300명만 있다고 생각하고 쓴 소설들이에요. 그때 그렇게 쓸 수 있었던 게 나이 때문이지 않나 생각해요. 그때야말로 그 고독이란 게 엄청 길던 시절이었죠. 그 고독을 즐기기 시작한 거죠. 소설가가 돼서 너무 재밌구나 생각하면서 지나온 거죠. 그 뒤에 독자를 만나기 시작하면서 독자가 조금씩 중요해지기 시작했어요. 조금씩 그 존재를 알게 된 거죠. 그리고 나이 들고 기술적인 부분도 늘어나면서 그때와는 제가 약간 달라진 건 확실해요. 그중에 뭐가 더 좋으냐고 묻는다면 저야 지금이 더 좋다고 얘기하겠죠. 지금을 살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같은 소설을 다시 쓸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쓸 수 없을 거 같아요. 왜냐면 조금 다른 마음가짐이었어요. 그런 마음가짐을 다시 가질 수 있을까, 잘 모르겠어요. 요즘은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이게 그다지 좋은 것만은 아니야.’ 하는 생각. ‘사람들이 좋은 말만 많이 하고 책이 잘 팔리는 게 좋은 것만 아닐 거야.’ 하는 생각 말이죠. 그래서 옛날처럼 써볼까 생각하지만 과연 쓸 수 있을까? 잘 모르겠어요. 그게 나이의 영향도 있고 자꾸 성격이 부드러워지는 것도 있어서. 아무튼 옛날처럼 쓸 수 있을까? 궁금하긴 해요. 지금부터는 일부러라도 그렇게 써야 되지 않을까, 생각은 하는데……. 제가 또 싫증을 많이 느끼거든요. 지금까지 해온 이런 식은 이제 알겠고, 다시 다른 쪽으로 해보고 싶은데……. 앞으로 임진왜란 소설을 아주 길고 지루하게 쓰고 싶기도 하고, 그럼 어떻게 될까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도 제일 괜찮았다 싶은 건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쓸 때……. 그 시절, 괜찮았던 것 같아요.6)

 

    긴 인용이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김연수는 ‘독자’를 소설적 변화의 중심에 놓고 답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의 소설이 ‘소설’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지금의 소설은 충분히 독자를 의식하며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졌으며, 무엇이 김연수에게 독자를 만날 수 있게 해주었는가를 보자.

 

3. 침묵의 세목에서 말하는 세목으로

 

    지금까지 김연수가 발표한 많은 작품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단편임이 분명한 「농담」과 「설산」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작가의 관찰을 통해 풍성하고 선명하게 전달되는 삶의 세목들이다. 「설산」에 등장하는 ‘나’는 『왕오천축국전』의 “고작 227행뿐인 두루마리”7)에 세밀한 각주와 해석을 붙여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한 저자이자, 자살한 여자 친구를 이해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그녀와 함께한 시간들을 기록하여 소설로 쓴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그’의 여자 친구는 “부모님, 그리고 학우 여러분! 용기가 없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야만의 시대에 더 이상 회색인이나 방관자로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후회는 없어”(122)라는 유서만을 남기고 갑자기 투신자살을 하였다. ‘그’는 유서 어디에도 없는 사랑의 흔적을, 자신의 기억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 모를 죽음의 암시를 찾기 위해 책을 읽고 소설을 쓴다.
    김연수는 ‘그’의 문학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아메리카의 비극』에 적힌 한 문장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사소해 보이는 구절은 문학과 삶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변증법적인 광경을 어떤 것보다 잘 알려주고 있다. “이제껏 카터는 어떤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모든 것을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주변의 다른 평범한 사내들보다 훨씬 어색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 아름다운 아가씨와 밖에서 따로 만날 기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도무지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책에서 읽었거나 사람들에게서 들은 지식을 총동원해 여점원들의 성격이나 습관 등을 생각해 내려고 머리를 짜냈다.”(118) ‘그’는 이 구절에서 말할 수 없는 위안을 얻는 동시에 자신이 결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우울한 마음을 함께 읽어낸다. 문학을 통해 ‘그’는 삶의 빈곳처럼 보이는 자리에 무수한 세목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 세목들을 발견하고 상상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농담」에서 김연수는 ‘세목’에 주목하는 작가적 시선에 대해 작중화자 ‘나’의 입을 빌려 우회적으로 이렇게 쓴다. “나는 역사라는 이름의 위험천만한 폭약을 단숨에 폭파시키는 뇌관은 『열하일기』나 실학사상 같은 게 아니라 벽장 속의 지구의나 뜰 앞의 나무 한그루처럼 사소하고 하잘것없는 우연의 소산으로만 보이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만을 두고 본다면 세상의 모든 일은 인과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그 사이의 행로는 때로 매우 우연적이고 사소한 것들로 채워지곤 한다.”(18) 우연적이고 사소하며 하잘것없는 것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내고 있는 시간의 충전물들이다. 무의미하며 때로는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이 세목들에 대해서 작가는 어떠한 방식으로 글을 쓸 수 있을까. 모든 단어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문장은 문법이라는 연관의 법칙으로 단어와 단어를 연결시키고 있다.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무의미한 것들에 대해 쓴다는 것은 비록 언어를 통해서 실체화되긴 하지만 언어 속에서 누구나 알 수 있게 당연히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달의 뒷면과 같은 것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일종의 암시로 이해하며 상상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6)   김연수,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설」, 《문예중앙》, 2012년 겨울호, 367~368쪽.
    7)   김연수,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창비, 2005, 135쪽. 앞으로 같은 책에서 인용할 때는 간략하게 인용한 구절 옆에 쪽수만 표기하겠다.

 

나무 한그루. 하나의 가지는 북한산이 있는 북쪽을 향해, 또 하나의 가지는 한강이 있는 남쪽을 향해 서로 갈라져 서 있는 나무 한그루에 대한 얘기에서 시작하면 어떨까?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그날 길 잃은 아이처럼 그녀와 함께 걸어 다녔던 그 골목길들에 대해, 그리고 그 골목길에서 본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회사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오름차순으로, 혹은 내림차순으로 바뀌는 디지털 숫자들을 바라보며. 아니면 새벽 공원길을 달려가다가 길 옆 벤치에 발을 올리고 풀린 운동화 끈을 묶으면서. 며칠 굶은 짐승의 내장처럼 어둡고 습하고 꾸불꾸불한, 그러나 텅 비어 막히지 않고 계속 어디론가 이어지던 그 골목길들에 대해. 땅거미로부터 뭉게뭉게 피어오른 저녁의 조각구름들이 초승달을 스쳐지나가듯. 문득 문득. 총총히 정독도서관을 향해 비탈진 언덕길을 올라가느라 땀이 슬맺힌 교복 차림 여학생들의 쇄골 안쪽 살갗이며 국군서울지구병원 담벼락 밑에서 각자 누런 봉투 안에 든 자신의 엑스레이 필름을 반쯤 꺼내어 햇살에 비춰보던 사병들의 찌푸린 주름, 혹은 서울시 지방문화재 민속자료 제27호 윤보선 고택 돌죽담 모퉁이를 돌아갈 때 그녀를 바라보며 “방 보러 온다던 새댁이유?”라며 환하게 반기던 어느 할머니가 입고 있던 치마의 꽃무늬 같은 것들에 대해. 가끔 하릴없는 마음에 제 손톱을 가지런히 세우고 오랫동안 들여다보듯. 문득 문득. (9~10쪽)

 

    김연수 단편 「농담」의 첫 단락이다. ‘나’는 우연히 지하철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전 부인을 보게 되고, 그녀와 안국동, 가회동, 재동 일대를 산책하고 헤어진다. 이 작품은 그 산책에 대해, 그날 함께 본 풍경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어떠한 인연으로 처음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이혼했는지에 대해 담아내고 있지만, 정확한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한다. 김연수는 인생을 단순화시켜 말하는 사이비 철학자나 대중적 카운슬러와는 달리 그것을 복잡하게 뒤엉킨 무수한 세목들의 집합체로 묘사한다. 김연수는 “나무 한그루에 대한 얘기에서 시작하면 어떨까?”라고 말하며 소설을 시작하지만, “나무 한그루”는 “골목길”이나 “그 골목길에서 본 것들” ― “여학생들의 쇄골 안쪽 살갗”과 “사병들의 찌푸린 주름”과 “할머니가 입고 있던 치마의 꽃무늬” ― 과 인과의 순서나 중요성을 다투지 않는다. 그것들의 배치는 시작과 끝이라는 관념과는 무관한 우연한 배치에 불과하다. 김연수는 이를 통해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인생사를 하나의 문장이나 주제로 정리하기보다는 그것을 더 많은 해석과 상상이 가능한 자리로 돌려보낸다. 그 자리는 독자의 것으로서, 독자는 침묵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상상하며 각자의 심미안이 짚어내는 감상과 해석을 발견한다.
    ‘그 자리는 독자의 것’이라고 바로 앞에서 말했지만 이 이상적인 독자는 어느 시대에나 희소하다. 김연수에 따르자면 이러한 이상적인 독자는 없으며, 있다고 해도 문학 계간지를 소중하게 탐독한다고 상상되는 “200~300명”에 불과하다. 역설적이지만 「설산」과 「농담」은 독자는 없다는 상상을 통해 얻어낸 고독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후 김연수가 만나게 된 실제의 독자는 그가 우려했던 것처럼 무의식적인 영향을 주게 되고 그것은 소설적 변화를 만들어낸다.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벚꽃 새해」는 2012년의 인터뷰에서 김연수가 했던 말, “그때 같은 소설을 다시 쓸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쓸 수 없을 거 같아요”와 “아무튼 옛날처럼 쓸 수 있을까? 궁금하긴 해요. 지금부터는 일부러라도 그렇게 써야 되지 않을까, 생각은 하는데……”에 대한 작가적 실행으로 읽힌다.

 

경주 남산의 사계를 촬영하는 화보집을 의뢰받았을 때만 해도 성진은 거기에 그토록 많은 불상들이, 그것도 목이 잘린 채 남아 있을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 4월, 벚꽃이 만개했다는 소식에 봄 풍경을 촬영하러 남산을 찾아갔다가 목이 잘린 채로 앉아 있는 석불을 보고야 성진은 새삼 ‘맞아, 이런 게 바로 폐허의 풍경이었지’라고 생각했다.
(…중략…)
그 태그호이어 이야기를 좀 해보자. 그 시계는 지난겨울, 어느 깊은 밤에 멈췄다. 바로 전날은 대통령선거일이라 함께 모여서 개표방송을 보자며 친구들을 만나 저녁 7시부터 생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중략…) 다음날 깨어서 시계를 보니, 검정색 다이얼 위에 세 개의 침이 예각을 이루며 자정 무렵에 몰려 있었다. 날짜판의 숫자는 왼쪽으로 기울어진 20이었다. 그러므로 그 시계가 멈춘 정확한 시간은 대선이 끝나고 난 다음날, 새벽 12시 54분 49초였다. (9~10쪽)

 

    인용한 구절은 「벚꽃 새해」의 첫 번째 단락과 두 번째 단락이다. 「벚꽃 새해」는 성진이 옛 연인 정연에게 선물 받은, 그러나 그녀와 헤어진 이후 고장이 나 시계점에 팔아버린, 시계를 찾아 황학동과 종로 일대를 돌아다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도 풍경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고 있지만 그것은 개성적인 세목을 통해서 제시되고 있기보다는 “경주 남산”의 화보집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대중적인 이미지로 대체되어 있다. 또한 그 세목은 “폐허의 풍경”이라고 설명이 되고 있는데, 이는 독자들의 창의적인 상상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
    「벚꽃 새해」에서 「농담」의 “나무 한그루”가 위치했던 자리에 놓인 것은 성진이 선물 받은 시계 “태그호이어”이지만 그 사물이 하고 있는 역할은 전혀 다르다. 「농담」의 “나무 한그루”가 ‘나’와 ‘그녀’의 우연한 산책에 대한 “논리적이랄 수 없는 결론” ― “그녀가 어떤 나무 한그루를 중심으로 나를 끌고 다녔다는 결론”(16) ― 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태그호이어”는 두 남녀의 여정에 대한 대체 불가능한 이유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농담」의 “나무 한그루”는 그날 두 사람이 마주한 사소하고 우연적인 세목들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벚꽃 새해」의 시계는 “태그호이어”라는 명품 브랜드가 알려주는 것처럼 결코 사소하지 않은 삶의 지표 중 하나이다. “태그호이어”에 대한 묘사가 비록 세세한 숫자들에 의해 생동감을 얻고 있지만 그것은 독자의 상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회적 세목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농담」의 세목들은 ‘나’와 ‘그녀’의 삶의 인과에는 조금씩 벗어나 있으며, 그것들의 풍경과 정서는 결코 두 사람의 새로운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농담」의 세목들은 무관하며 무심하다. 이에 비해 「벚꽃 새해」의 세목들은 성진과 정연의 정서적 자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작가의 설명은 이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벚꽃 새해」의 세목들은 결코 우연적이지도 사소하지도 않다. 그것은 서사와 너무나도 잘 연결되는 삶의 유관한 풍경들이며 독자들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 소설의 적응과 변화를 무엇보다 잘 알려주고 있는 증거들이기도 하다. 세목이 사라진 자리를 메우고 있는 설명과 전형적인 묘사들은 분명 가독성이란 측면에서 유용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김연수의 어투를 빌려와 말하자면, 그 시절이 더 괜찮았던 것 같다.

 

 

 

 

 

 

평론가 서희원

작가소개 / 서희원

– 1973년 서울 출생. 2009년 《세계일보》 및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으로 등단

 

《문장웹진 2016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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