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 외 1편

[신작시]

 

 

주술

 

 

김재현

 

 

 

    외할비가 산이끼를 펄펄 끓이는 사이
    대숲의 초록에 새벽이 내려앉는 것이다
    추수가 끝난 다랭논에서 할미는 팔각연에 뚫린
    네모난 창 속으로 흐르는 구름을 가둔다
    연은 마음을 적어 하늘에게 보내는 편지,
    그러나 어떤 마음은 축원인지 저주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사방이 어두웠다
    맨발로 도망치던 지난한 굽이길들 위로
    비는 내리지 않았다
    바짝 엎드린 기와 아래에 도착해서야
    어미는 펄펄 끓는 몸을 뉘었다
    나는 작대기로 시뻘건 장작들을 쑤시며
    마구 쑤시며,
    너는 나보다 뜨겁지 않다, 나의 증오는
    대숲의 어둠
    뚝뚝 부러지는 댓가지
    밤의 저편에서 툭툭 켜는
    짐승의 눈깔,
    가치 있는 것을 욕심낸다는 사람의 말은 거짓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을 버릴 리가 없다

 

    깨진 벽 틈으로 곰팡이가 자란다
    슬픔이 몸과 마음에 낙과 같은 멍을 그리듯이
    설익었는가, 썩어 문드러졌는가
    가자 가자 칭얼대는 어린 동생 년의 입을 막으며
    들썩이는 가마솥, 취쉿대는 증기를
    억누르는 어깨, 나는 점점
    외할비가 끓이던 독의 색처럼
    독의 색처럼

 

 

 

 

 

 

 

 

 

 

 

 

 

 

 

첫사랑

 

 

 

 

    공식을 배웁니다 수학은 어렵습니다 학교 앞 독서실에서 나는 당신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내 하교길의 법칙

 

    놀이터 그네는 당신의 까딱이는 연필입니다 나는 거기에 밀리기도 하고 당겨지기도 합니다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게 기웃대다 보면 오뚝이, 갈대, 낡은 독서실 입구에서 섰다 돌다 하늘을 보기도 하면서 "고민하는 것들은 모두 원의 형상이다"와 같은 명제를 내어놓고 혼자 낄낄거리기도 합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당신은 밤을 베어 먹는 달빛입니다 동네를 도는 독서실 버스에서 나는 차창에 비친 당신을 훔쳐보는 눈빛입니다 당신의 얼굴 속으로 당신이 얻어맞고 울고 도망치던 길들이 겹쳐 갑니다 추악과 가난에 움켜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당신의 얼굴 밖으로 범람합니다 나는 슬퍼져 수학 시험을 치르던 어느 날인가 "속집합은 원래 자신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침묵은 그저 들키고 싶은 마음과 이퀄이다" 같은 답안을 써두고 두 팔로 하늘을 받치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럴 리 없는 당신이 출석하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우유를 쏟아 놓고 간 당신의 책상을 훔치면서 내가 당번이어서 다행이지, 하였지만 실은 당신이 떠날 걸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열아홉의 늦은 겨울, 우리는 철창 같은 책상에 나란히 앉아 시험을 쳤습니다 아는 답은 하나도 없었지만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하나, 미리 답을 아는 사람들을 천재라고 부른다면 아마도 나는 이별의 천재

 

    정류장 아래에 선 당신의 그림자가 젖었습니다 나의 눈은 가물가물, 자꾸만 당신에게서 빗나갑니다 당신의 검고 긴 머리칼이 바람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 냄새가 슬픈 까닭은 내게 하기 힘들었던 당신의 말을 내가 먼저 써야 했기 때문,

 

    답을 알려줘도 쓰지 못하는 게 등신이라면, 아마도 나는 망각의 등신
    그리하여 나는 황혼 속에 오래오래 붙박혀
    속으로 외쳤던 천 번의 씨발, 맨벽에 들이쳐 으깨진 주먹

 

    첫,
    첫사랑이었습니다

 

 

 

 

 

 

 

 

 

 

 

 

 

 

 

 

 

김재현 작가소개 / 김재현

1989년 거창생. 201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문장웹진 202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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