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자 당신께 외 1편

[신작시]

 

 

소문자 당신께

 

 

권현형

 

 

 

    공기의 긴 한숨을 여명에 바친다
    새벽의 소음은 이마로 스며든다
    이동 중이라 끊긴 필름을 잇고 있다가

 

    오늘은 깨끗하게 당신 목소리를 듣고 있다
    빛 반 어둠 반 섞어 아스피린 아스파라거스, 아스피린 아스파라거스
    그렇게 읊고 있는 새가 음악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움직이는 모자는 상념을 갖게 한다
    머리에 쓸 것인가, 손에 들고 있을 것인가,
    모자의 혁명적 감수성 덕분에
    룩셈부르크에서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되어 본다

 

    베를린에서는 베를린이 되어 본다   
    모자가 전 재산인 채
    가방이 전 재산인 채

 

    이제 창문을 반쯤 열어 놓을 때
    얼굴의 반만 열어 두고
    골목과 나무와 땅의 절기를 살펴야 할 때
    기억나는 장소를 찾아, 당신을 찾아

 

    빨간 우체통에 언어 대신 공기를 부친다
    간절할 때 나는 텅 비어 있다
    전무후무한 공명이 전달되길 바라면서

 

    길이 명백한 지도와
    행선지를 표시하는 꼬리표는 아예
    영자사전처럼 씹어 삼켜버렸다
    당신에게 가기 위해 길을 끊어버렸다

 

 

 

 

 

 

 

 

 

 

 

 

 

 

 

설령 오래 걸릴지라도
2월은 자신의 손을 잡아 주는 달

 

 

 

 

    이제 그만 아프자고 내게
    속삭여 주었더니 차츰 나아졌다
    설령 오래 걸릴지라도
    2월은 자신의 손을 잡아 주는 달

 

    지금 당장, 그런 말보다 차츰 나아질 거라는
    말에 위로를 받는 날들
    그리하여 가장 두려운 타인
    나를 겪고 이해하느라 여러 세기가 지나갔다

 

    가능성, 욕망, 사랑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어느 날의 검은 기억
    낡은 기억의 안쪽에 상처받은 아이가 살고 있다

 

    누가 당신의 악마인가, 물었을 때
    '나'라고 대답한 가수 휘트니 휴스턴의 인터뷰를
    아끼는 책 읽듯 읽었다
    코카인도 마리화나도 아닌 자신과 싸우느라 생을 소진한
    그녀의 자존심은 시적이기도 하고 산문적이기도 하다

 

    길가에 고인 빗물이 맑기를 바라며
    말하고 싶어 안달하지 않기로 한다
    몇 시냐고 자꾸 물어보지 않기로 한다
    심장 근처로 살랑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장미 화관을 쓰고 만찬을 하는 습관이 있던 옛 로마 사람처럼
    차츰 장미를 좋아하는 습관이 생긴다
    시와 산문 사이에서 돌은 앉아 있고 나는 춤을 춘다

 

 

 

 

 

 

 

 

 

 

 

 

 

 

 

 

 

권현형 작가소개 / 권현형

1995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집으로 『중독성 슬픔』, 『밥이나 먹자, 꽃아』, 『포옹의 방식』 등이 있다. 제2회 미네르바 작품상을 수상했다.

 

   《문장웹진 202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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