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 외 1편

[신작시]

 

 

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

 

 

유병록

 

 

 

    참 애쓰는구나
    지구 멸망을 막으려 분투하는 사람들을 보고
    영화관을 나와
    자주 들르던 칼국숫집에 간다

 

    사정이 생겨 문을 닫습니다
    그동안 사랑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세상 칼국숫집이 그 집뿐이겠냐만
    그 비빔칼국수와 황태칼국수를 먹지 못한다니

 

    친구 같기도 하고 자매 같기도 한
    한 명은 사장님 같고 한 명은 직원 같기도 한
    아주머니 두 분

 

    도대체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
    슬픈 일이 있었는지
    임대료가 턱없이 올랐는지

 

    멸망한 지구처럼 불 꺼진 가게 앞에서 머뭇거리다
    저녁은 뭘 먹을지 고민하다
    앞으로 칼국수를 먹지 않겠다 다짐하다

 

    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
    칼국숫집이 없어지는 건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우리 사랑은 왜 여기까지인지

 

    집까지 걷기로 한다
    칼국수의 맛을 기억하는 데 온 저녁을 할애하기로 한다

 

 

 

 

 

 

 

 

 

 

 

 

 

 

 

차곡차곡 차분차분

 

 

 

 

    눈이 내린다
    차갑고 포근하게 세상을 덮는다

 

    누구든 용서할 수 있다면
    아무도 죄를 묻지 않는다면
    이런 밤이리라

 

    말하는 것만으로도 얼마쯤 용서받는 기분이 드니까
    아무도 없는 눈밭에서
    용서받지 못한 일을 늘어놓고 싶다

 

    눈밭에 잘못을 차곡차곡 써둔다면
    푸른 싹이 돋을 때쯤
    죄책감도 다 녹아 사라질까

 

    용서할 사람이 더 이상 세상에 없는 잘못은
    무릎이라도 꿇고 뉘우쳐야겠지
    그럼 좀 나아지겠지

 

    지금껏 지고 다닌 죄를 내려놓고
    조금 가뿐한 마음으로 걸어 다니고 싶다

 

    눈 차분차분 내리는 날
    그리하여 순백의 마음을 간직하는 날
    어떤 죄도 용서받을 것만 같은 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용서를 구하지 않을 것이다

 

 

 

 

 

 

 

 

 

 

 

 

 

 

 

 

 

이병국 작가소개 / 유병록

2010년 《동아일보》로 등단.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문장웹진 202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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