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올 무렵 외 1편

[신작시]

 

 

밤이 올 무렵

 

 

이원

 

 

 

빛이 넘치게 스며드는 거다 빛이 넘치게 몰려오는 거다 빛에 숨 막히는 거다 빛에 타죽는 거다 이런 느낌으로 빛을 떠올리면 얘야 너는 아프구나 얘야 너는 병증이 있구나 얘야 빛은 그런 게 아니다 이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누구? 나무들 바람이 넘치게 일렁이는 거다 바람이 넘치게 몰려오는 거다 바람에 숨 막히는 거다 뒤집히면 나뭇잎 한 장의 뒷면은 다른 색이다 어떻게 그렇게 가까이에서 그럴 수 있어? 빛을 떠올리면 바람을 떠올리면 얘야 너는 신경이 쇠약해졌구나 얘야 너는 숨을 세어야겠구나 얘야 너는 멀리 봐야겠구나 블라인드를 올려 줄 이는 누구? 석양들 넘치게 녹아내리는 거다 석양들 넘치게 끓이는 거다 석양들 가로를 잡고 숨넘어가는 거다 들어가면 물들이 있단다 숨차게 잠기는 거다 이 모든 것이 모여 밤이 된단다 그래서 밤 속에 들어가면 탈 것 같구나 그래서 밤의 물기둥 속으로 들어가면 늘 등줄기가 타오르는구나

 

 

 

 

 

 

 

 

 

 

 

 

 

 

 

다음 페이지도 파도라면

 

 

 

 

    펼쳐 놓은 책은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않았고
    그 페이지를 읽어야 했지

 

    책은 꽤나 두꺼웠거든

 

    문제는 죽은 사람들이 그 페이지로 자꾸 들어가는 거야
    펼쳐 놓은 페이지가 거기였으니
    거기뿐이었으니

 

    그거 알아? 죽은 사람은 무거워
    하나 남은 표정을 못 놓치거든
    점점 내가 무거워진 것은
    그 페이지를 넘기려고 했기 때문이지
    무거워서 들 수가 없고
    거기는 와글와글 이어서 상가의 음식은 입뿐인 허기여서

 

    상가의 근조는 여기로 몰려들었던 거야

 

    사실 나는 몰라 죽은 사람을 들어 본 적이 없어
    죽은 얼굴을 본 적은 있지

 

    이 책이 얼마나 거대한 줄 알아?
    놀랍게도 어마어마하게도
    딱 책상만 해
    지금까지의 시간을 다 쏟아 부어
    한쪽으로 접으면
    양쪽이 없어지고
    표정은 봉인되고

 

    책상은 심연의 책이 된다

 

    다무는 입술과 벌리는 입술을 떼어 놓지 않으면
    오른쪽 왼쪽 영영 잃어버린다고 약속하면
    입들이 눈보라로 던져지면

 

    다시 출렁일지도
    다시 운동화를 신고 문 밖으로 나가게 될지도

 

    그만!
    그만!
    그러면 나는 볼 곳이 없어져

 

    나는 내 눈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병국 작가소개 / 이원

1968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1992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사랑은 탄생하라』가 있으며, 현대시학작품상·현대시작품상·시로여는세상작품상·시작작품상·형평문학상·시인동네문학상을 수상했다.

 

   《문장웹진 202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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