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으로 가야겠다 외 1편

 

[신작시]

 

 

저녁으로 가야겠다

 

 

이성미

 

 

보랏빛 포도를 먹다가 나는 저녁으로 가야겠다. 그게 좋겠다. 낮은 덥고 빛이 너무 많아서 시끄러워. 작은 소리들이 들리지 않고 어두운 동그라미도 없지.

 

보랏빛 포도알을 입에 물고 나는 저녁으로 가야겠다. 날갯짓을 하자. 펄럭펄럭 공기 가르는 소리가 들렸고. 저녁이 보이지 않아서. 나는 계속 펄럭펄럭. 바람도 만났는데. 머리칼도 흩날렸는데. 저녁에 닿지 않았고.

 

아, 참, 나는 날개가 없지. 그렇게 내일로 떨어졌다. 깃털이 나보다 천천히 바닥에 닿았다.

 

햐얀 깃털은 햇빛 속으로 들어가버렸고. 나는 빛나고 시끄러운 낮을 향해 내일을 반복하게 되었다.

 

나는 왜 날개를 떠올렸을까. 저녁으로 가려고 했는데.

 

저녁에는 큰 날개를 가진 새가 날고 있겠지. 새가 큰 전나무에 앉으면 가지가 출렁, 흔들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릴 거야.

 

내가 가지 못한 저녁은 구름처럼 지구를 떠돌다 사라졌을까. 땅 속에 묻혔을까. 침묵으로 스며들었을까. 책 속으로 글자가 되어 들어갔을까.

 

내가 가려고 했던 저녁. 그곳에서 돌멩이는 웃음이 터질 때까지 동그랗게 몸을 말았을텐데. 흰 새는 나무 꼭대기에서 흰 꽃이 될 때까지 웅크렸을텐데.

 

낮의 한가운데에 앉아서. 나는 햇빛에게 야단을 맞으며. 나는 보랏빛 포도 껍질과 씨를 뱉고 나서. 내일로 가지 않고 저녁으로 가야겠다.

 

   

 

 

 

 

 

 

 

 

 

 

 

 

내일에서 돌아온다

 

 

집이었지. 정거장이 아니었지만. 기차가 달려와 이곳에 섰다. 문이 열렸고. 회색 가방을 던져놓고 기차는 떠났네.

 

집의 지하는 정거장이 되었다. 회색 가방 때문에 집은 다시는 집이 되지 못하지.

 

플랫폼에서 아이가 물었다. 저 기차는 어디로 가나요?

 

대답을 해야겠지. 묻는 이가 있다면. 모르겠다면. 미안하다고 말해야겠지.

 

아이에게 회색 가방을 주었다. 너는 여기서 기다리렴. 기차를 타고 싶을 때 타렴. 미안하다. 그 가방은 너보다 큰데.

 

사람들이 가방에서 꾸역꾸역 쏟아져나왔다. 여기가 어디인가요? 묻는 사람들은 가득하고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답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씩 사라졌고 신발만 남았다.

 

기차는 언제 또 오나요? 당신은 어디로 가나요?

 

회색 가방을 가진 아이가 사라지지 않도록. 미안하다고 말한다, 나는 계단을 올라간다. 지상의 집으로 간다.

 

기차는 내일에서 돌아온다. 철로가 없어서. 날아서 돌아온다. 두고간 것이 있어서. 무서워서 돌아온다.

 

알 수 없는 얼굴들이 기차 안에 가득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미안하다. 기차 안은 비어 있다.

 

 

 

 

 

 

시인 이성미

작가소개 / 이성미

2001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칠 일이 지나고 오늘』.

 

   《문장웹진 2016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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