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오래 외면 받고, 때로 외면하는 글쓰기

 

[에세이]

 

 

오래 외면 받고, 때로 외면하는 글쓰기

 

 

최분임

 

 

    저녁이면 무료하고 답답한 하루가 또 지나갔다는 느낌이 몸 어디선가 밀려 나왔다. 흔히들 늦었다, 라고 말하는 삼십대 후반의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마흔을 훌쩍 넘어서 있었다. ‘삶이 이렇게 지루하고 무력해도 되는 걸까?’ 씁쓸한 혼잣말에 손을 놓고 멍해지는 날이 많아졌다. 알 수 없는 공허감에 스스로를 낭비했다. 주위를 둘러보거나 친구들과 전화 통화라도 하고 나면 나와는 전혀 다른 공기,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두 삶의 방향을 잘 알고 있다는 듯 거침없고 당당해 보였다.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주눅이 들었다. 마냥 이렇게 살 것이냐고, 내 안의 누군가가 날 툭, 쳤다. 그렇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지, 라고 되물으며 움츠러드는 자신이 보였다. 바람 빠진 풍선에 공기를 불어 넣듯 무너져 내리는 자신을 몰아세우자 묻어 뒀던 꿈, 글을 써보고 싶다는 대답이 들렸다. 그러나 생각은 생각일 뿐 막연하고 캄캄했다. 곧이어 열등감이 고개를 들었다. 열등감은 못처럼 견고해서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쉽게 뽑혀 나가거나 뽑아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먼 저곳에서 이곳까지 그 어떤 알 수 없는 속도가 막 지나간 듯 내게 처음으로 열등감을 안긴 친구 희가 곁에 서 있었다.

 

    *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 들어가야 하는 시골 마을이었다. 옆집에 살던 희는 키가 크고 마른 몸매에다 얼굴도 예뻐서 모든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집안 사정은 녹록하지 않았다. 늙은 아버지와 배다른 형제들, 재취 자리로 들어와 1남 3녀를 낳은 희 엄마는 늘 술에 취해 풀어진 눈빛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같은 엄마에게서 태어난 오빠마저 알코올중독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삶을 접기 위해 여러 번 농약을 마셨고 매번 저승 문턱에서 되돌아왔다. 그러는 사이 몸과 마음은 망가져 폐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 희 오빠에게 마을 사람들은 ‘불사조’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꽉 막힌, 출구 없는 동굴 같은 환경에서도 희는 늘 밝고 명랑했다. 집안의 어떤 한 줄기 빛은 막내딸 희가 아니었을까, 아니 희가 붙잡고자 한 것이 한 줄기 빛 아니었을까, 싶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 당시 5월이면 어린이날을 즈음하여 시내에 있는 황성공원에서는 박목월 시인의 이름을 딴 <목월백일장>이 열렸다(검색을 해보니 올해로 49회째, 해마다 열리고 있었다). 그 백일장에 참여하려면 각 학교에서 실시하는 글짓기를 통과해 대표로 뽑혀야 했다. 다른 것은 다 기억에서 휘발되고 없는데 그 당시 희가 고른 <냉이>, <얼굴>이라는 시제만 또렷하게 남아 있다. 그중 <냉이>라는 제목의 동시는 다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이른 봄 냉이를 캐 와서 물에 씻고 보니 하얀 뿌리가 드러났다. 그 종아리가 추워 보였다.” 선생님이 읽어 주시는 희의 동시를 듣는데 질투심과 열등감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희의 반짝이는 상상력과 글 솜씨를 따라갈 수 없을 거라는 열등감은 그때부터 내 안에 똬리를 틀었다. 어떻게 단숨에 저리 잘 쓸 수 있지, 싶었다. <얼굴>이라는 동시도 아주 기발하고 훌륭했는데 세월이 다 집어삼킨 탓에 머리에 남아 있지 않다. 정작 나 자신은 그날 어떤 시제로 무엇을 썼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희와 나는 <목월백일장>에 나갈 학교 대표로 뽑혔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희에게 기가 꺾여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날 백일장 행사장에서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인물이 있었다. 무리에 섞여 식전 행사에 참석했는데 맙소사, 연단에서 인사말을 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 박목월 선생이 아닌가! 어떻게 책에 나오는 인물을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직접 눈앞에서 봤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정작 백일장은 시큰둥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그날 우리 둘 중 누구도 수상권에 들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희는 운이 없었을 뿐, 심사위원들 눈이 나빠 희의 작품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렇게 내게 일찌감치 열등감을 유적처럼 남긴, 재능이 반짝이던 희는 결국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도시를 떠돌다 29살의 봄, 자신이 살던 13층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세상과 이별했다. 세상이 희를 버린 것인지 희가 더러운 세상 따위 던져버린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떤 좌절과 비참함이 희를 캄캄한 절벽으로 내몰았는지를 짐작하기엔 나는 함량미달이었다. 희의 사망소식에 회사를 조퇴한 후 고속버스를 타고 장례식장을 가는 도중 냉이의 시린 종아리가 내내 차창에 떠올라 희의 모습과 겹쳐졌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희는 부검실에 있었다. 경찰과 병원 관계자들이 바삐 드나드는 문, 열고 닫는 그 사이사이 희가 보였다. 쏟아지는 불빛 아래 핏기 가신 나신으로 침대에 반듯하게 눕혀져 있는 희는 눈부셨다. 냉이 뿌리처럼 희고 긴 종아리가 유난히 추워 보였다.

 

    *
    희를 떠올리자 린도 곁을 서성였다. 희가 내게 일찌감치 열등감을 심어 줬다면 린은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한 곳인지, 인간 또한 얼마나 허약하며 부조리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준 친구였다. 린은 나보다 한 살 위였지만 가장 친한 친구였다. 어느 날 갑자기 린이 서울로 남의 집 가정부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인 아이에게 가정부라니, 이게 말이 되나,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 한계를 뛰어넘는 가혹함이 존재했으며 나는 단지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린에게 미안했다. 어린 딸에게 모진 린의 어머니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 어린아이를 가정부로 들이겠다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다. 누구보다 영리하고 공부를 잘해 늘 1등을 놓쳐 본 적 없는 린에게 닥친 이 상황이 실제인지 꿈인지조차 헷갈렸다. 또한 이 현실을 린이 견딜 만한 것인지조차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린은 가기 싫다고, 앞으로 더 말 잘 듣고 더 공부를 잘하겠다며 매달렸지만 새파랗게 젊은 과부였던 린의 어머니는 어린 딸을 매몰차게 뿌리치셨다. 린의 어머닌 일찍 세상을 떠난 남편을 대신해 큰아들을 일찌감치 대처로 내보낸 후 린의 언니와 린마저 남의 집 가정부로 보내면서도 태연하셨다. 속은 알 수 없었지만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그 당시 내가 아는 모성은 그렇게 비정한 것이 아니었다. 은연중에 든 생각이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모성은 자식들의 손을 놓지 않는 것, 탯줄처럼 견고하게 연결된 그 무엇이 부모와 자식 간의 끈이라고 생각했기에 린의 어머니를 도무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모성은 그 어떤 욕망보다 자식이 중심이거나 먼저여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린에게 닥친 현실을 통해 나는 내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어떤 것들이 실은 모래성처럼 허약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또한 정확하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뭔가 무참히 짓밟힌 느낌이 들었다. 삶에 대한 부정과 냉소적 태도는 아마 그때부터 싹텄을 것이다.

 

    *
    그 당시 마을에서 형편이 넉넉한 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 집도 가난이라면 만만치 않았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술과 담배로 한 번뿐인 생을 소비했으며 집 밖에서는 호인, 집 안에서는 폭군을 자처하셨다. 당연한 듯 집안일 따위 돌아보지 않으셨다. 아버지에게도 부성이란 게 있긴 있었을까,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문득문득 드는 의문이다. 안팎의 모든 일은 어머니 차지였다. 어머니에게 결혼은 사막을 건너는 일이었으며 당신은 늘 목마른 낙타였다. 혹 안에 저장된 에너지를 믿고 낙타가 사막을 건너듯 어머닌 당신의 혹인 자식들을 믿고 견디셨다. 아버지가 술을 과하게 드시는 날, 사막엔 비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쳤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한바탕 회오리가 집 안을 휩쓸었다. 그렇게 삶을 낭비하던 아버진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어느 날 불쑥 생을 빠져나가셨다. 삶이 생각대로 짐작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아버진 모르고 계셨던 걸까. 자리에 누운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 등교 준비를 하는 나와 동생을 불러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생전 하지 않던 잘 다녀오라, 는 말을 남긴 채 그날 오후 눈을 감으셨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갑자기 집 안이 적막해진 상황이 몹시 당황스러웠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아프고 슬픈 게 아니라 그 어떤 아픔도 슬픔도 실감나지 않는 게 아프고 슬펐다.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 스스로가 무참했다. 내겐 아픔이나 슬픔에게 내줄 감정 따윈 없는 걸까, 스스로에 대한 의문과 갈등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안심이 되는 건 불화가 일어나지 않는 집 안의 공기였고, 안심할 수 없는 건 내 무감각이었다. 아버지의 부재는 잠시 혼란스러웠고 오래 담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재가 남긴 상처는 그 부재로 인해 조금씩 아물어 갔다.
    7남매라는 등짐을 지고 걸으면서도 낙타, 어머닌 늘 묵묵하셨다. 고개를 가누지 못할 만큼 머리에 임을 이고 남의 집에 품을 팔고 지게를 지고 소를 몰아 밭을 가셨다. 밤낮을 가리지도, 여자라는 이유로 지레 겁을 먹지도 않으셨다. 또한 솜씨가 좋아 이웃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 초상집 수의를 짓는 일이며 잔칫집 떡과 유과를 만드는 일 등, 몸 아끼지 않고 힘을 보태셨다. 가까이 사는 시누이, 고모가 당신을 사람도 아닌 황소라며 놀려도 꿈쩍하지 않으셨다. 평생 메마르고 황폐한 길을 걸었지만, 몸빼를 벗어난 적 없었지만, 그 길이 어미인 자, 모성의 길이라는 걸 몸소 보여주셨다. 그렇게 고달픈 삶이었으면서도 자식들 공부를 많이 못 시켜서 늘 스스로 죄인을 자처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온전히 당신의 삶을 한 번도 누려 보지 못한 어머니께 한없이 죄송하지만 그땐 그 모든 걸 당연하게 여겼다. 내 어머니뿐이 아니었다. 마을의, 주위의 모든 어미들이 내 어머니와 비슷했다. 그랬기에 린 어머니의 행동은 낯설고 생경했다.

 

    *
    그렇게 서울로 떠난 린은 내게 수시로 객지에서의 고달픈 생활과 집에 남겨진 두 동생에 대한 걱정,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편지로 보내왔다. 나는 린의 외로움과 좌절, 한숨과 원망, 서러움을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정성껏 편지를 쓰는 것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알 수 없는 죄책감, 자리를 바꿀 수 없는 현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기력함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또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까 싶어 들판을 쏘다니며 딴 꽃잎들과 나뭇잎들을 책갈피에 넣어 말린 후 매번 편지에 동봉하곤 했다. 린은 그녀의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와 일 년치 선금을 받아가는 바람에 좀 더 조건이 좋은 집으로 옮기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며 눈물이 번져 제대로 읽을 수 없는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덧붙여 밤마다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베개 밑에 칼을 넣고 잔다고 했다. 어느 누군가에게는 그저 덤덤한 삶이 어느 누군가에겐 얼마나 날카롭고 아슬아슬하며 슬픈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린을 저렇게 가혹하게 몰아붙였을까, 부조리하고 참담한 현실에 숨이 막혔다. 그 먼 시간, 칼끝에 벤 듯 오래 아팠다.
    그 후부터였다. 나는 마치 첩자처럼 린의 어머니를 훔쳐보는 일로 바빴다. 린의 어머닌 시골에 살면서도 딱히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어디 몸이 아픈 것도 아니면서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지도, 남의 집 품을 팔러 다니지도 않으셨다. 일찍 세상 떠난 남편을 대신해 어린 자식들과 먹고살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 따윈 관심이 없어 보였다. 늘 분단장을 한 후 한복 속에 입는 속치마 바람으로 집 안을 맴돌거나 옷을 잘 차려입은 후 시내로 나가시곤 했다. 나는 당신의 모든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중에도 그 속치마가 늘 의문이었다. 동네 어느 아낙도 그런 차림새로 집 안을 맴돌며 하루를 보내는 걸 본 기억이 없었다. 게다가 대문이나 울타리가 있는 집도 아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몸매가 은근슬쩍 드러나는 그 속치마의 의미를 깨달았다. 시골에서 뭇 사내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방법 내지 장치로 속치마만 한 게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원초적인 욕망의 민낯을 본 듯 얼굴이 달아올랐다. 비밀스럽게 감춰져야 할 것을 들춘 느낌이었다. 삶의 진실은 차갑고도 씁쓸했다.
    린이 떠난 계절은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밤꽃이 막 피어오르던 때였다. 마을 앞 냇가 건너편 우리 밭 밭둑에는 아름드리 밤나무들이 죽 늘어서 있었는데 린과 함께 밤나무에 기어오르기도 하고 그늘 아래에서 소꿉놀이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장소였다. 소꿉놀이가 시들해지면 밤나무 밑 냇가에서 수영을 하기도 했으며 가을이면 함께 밤을 줍기도 했는데 이제 그 어디에도 린은 없었다. 린이 떠난 후 혼자 마을 쪽 둑길에서 건너편 밤나무들을 바라보는 일이 잦았다. 아름드리 밤나무 밤꽃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허공의 누군가 입술을 오므려 밤나무를 부는 것 같았다. 부풀어 오른 나무들이 뭉게구름처럼 붕 떠오르기도 하고 엷은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으며 웃음소리가 밤꽃 속으로 숨어들며 숨바꼭질을 하기도 했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감아 보면 일렬로 늘어선 밤나무들이 겅중겅중 고무줄놀이에 빠진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맨발로 우르르 냇물을 건너오는 밤꽃 향기가 달리기 잘하는 린이 달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이내 먹먹해져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들숨을 크게 쉬곤 했다. 그렇게 손에 잡히지 않는 린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다 뒤를 돌아보면 공중에 뜬 밤꽃들이 마치 누군가를 위해 따뜻한 밥 한 끼를 지어 모시 밥상보를 덮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언젠가 린이 돌아온다면 저 밥상보를 확 걷어내고 따뜻한 밥 한 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늘 배고팠던 시절이었기 때문일까. 그런 생각만으로도 질질 끌리던 그림자가 잠시 명랑해지곤 했다. 그렇게 린을 그리워할 때면 희에게 느꼈던 열등감을 제치고 언젠가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된다면 린의 이야기를 꼭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그렇게 린은 알게 모르게 세상에 대해,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눈뜨게 했다.

 

    *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씩 고개를 들 때 부엌에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는 매일같이 노래와 더불어 일반인들의 사연이 흘러나왔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연들을 듣다가 MBC라디오에서 <신춘편지쇼>가 있다는 공고를 듣게 됐다. 봄이면 매년 진행하는 이벤트라고 했다. 그해 주제가 <봄>과 <할머니>였다. 그 주제를 듣자마자 해마다 봄이면 산나물을 뜯기 위해 먼 산을 헤매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더불어 어머니 꽁무니에 매달리듯 따라붙던 고모도 떠올랐다. 두 분의 애증관계를 봄과 엮어 써보고 싶었고 단숨에 써내려갔다. 글을 보내고 나서는 이율배반적이게도 제발 내 글이 뽑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꾸며 쓴 글은 아니었지만 고모 입장에서 들으면 고모를 욕보이는 내용이었고 결국 내 치부를 내보인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랬는데 나중에 내 글이 1등으로 뽑혔다는 연락이 왔다. 고모가 제발 라디오를 듣지 않길 바랐다. 다행히 고모가 그 방송을 듣진 않았는지 조마조마했던 시간이 별일 없이 지나갔다.
그러다 그해 가을 <마로니에전국여성백일장>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참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일장이 열리는 마로니에 공원이 저만치 보이자 긴장이 됐다. 늦게 도착한 탓에 식전 행사는 일찌감치 끝난 상태였고 공원 여기저기 흩어진 참가자들이 10월의 햇살 아래 글을 쓰고 있었다. 접수를 하는 곳을 몰라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뒤늦게 접수를 하고 글제를 확인하니 산문 부문 글제가 <외출>과 <물방울>이었다. <외출>이란 글제를 보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든 휴대폰을 오래 만지작거렸다. 불과 몇 달 전 돌아가신 시아버님이 사준 휴대폰이었다. 위암으로 진단받고 항암 치료를 위해 입원한 병실에서 시아버님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내게 휴대폰을 선물하신 일이었다.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다 갖고 다니던데, 늦었지만 마음먹었을 때 해줘야지. 내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니.”
    당신 병세 걱정보다 내게 사줄 전화기에 더 마음을 쓰며 같이 간 시누이에게 현금을 건네셨다. 괜찮다고, 집에서 하는 일도 없는데 무슨 휴대폰이냐고, 안 그러셔도 된다고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다음에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 그런다는 말씀에 입을 닫았다. 그러셨던 아버님을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언제나 곁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려운 일이 터질 때마다 아버님 생각이 간절하던 터여서 울컥했다. 나무 그늘에 자리를 깔고 앉아 또 한참을 넋 놓고 앉아 있다 천천히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장례식 때 벌어진 이야기를 중심으로 아버님은 잠시 이승에서 외출한 거라고, 삶과 죽음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누구나 그 경계에 놓여 있다고, 삶이 있기에 죽음도 있다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더 소중하고 값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감정이 앞서다 보니 어느새 글은 늘어지고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춥지도 않은 날씨에 계속 몸이 떨렸다. 나중에 원고지에 옮겨 적기 시작할 때는 손가락이 곱아 볼펜을 쥐기가 힘들었다. 마감했으니 빨리 제출하라는 관계자의 말에 초고를 다 옮기지 못한 채 급하게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원고를 제출하고 나니 아쉬움이 많았다. 참가했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자고 스스로를 다독이자 한결 가벼워졌다. 문학 강연을 들으면서 글을 쓰는 허영에 들뜨지 않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랬는데 시상식에서 내 이름이 불렸다. 기대도, 생각도 못한 장원이었다. 또 몸이 떨렸다. 심사위원들은 심사평에서 “우리는 재치보다는 진솔함을, 아름다운 문장보다는 진정성에 더 큰 점수를 주기로 했다.”라고 했다. 그 백일장을 끝으로 글을 쓸 수 없었다. 아니, 내 글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상을 받고 생각해 보니 내가 글을 잘 써서 받은 상이 아니었다. 결국 주변 인물, 어머니와 고모, 시아버님을 우려먹었을 뿐이라는, 그 이상의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내겐 부족하다는 자조는 날 주저앉게 했다. 빚진 글쓰기였다는 생각이 날 괴롭혔다.

 

    *
    그러다 우연히 지역 문학 동아리 모임인 <소래문학회>에 나가게 됐다. 한 달에 한 번 회원들이 모여서 합평을 하고 있었다. 시와 수필, 소설을 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시를 썼고 합평도 시 위주로 이뤄지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쓸려 나도 시를 써볼까, 겁 없는 생각에 붙들렸다. 그렇지만 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학창 시절을 다 합쳐도 시를 써본 기억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 몇 번의 글짓기에서 상을 탄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 기억들이 슬그머니 날 부추겼다. 흔히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내게 딱 맞는 말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치기 어린 감상과 손에 잡히지 않는 흐릿한 관념, 소재주의, 성찰 없는 묘사 등이 난무하는 시를 써 합평회에 참석했다. 그런 시에 뭇매가 쏟아졌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고 그만 포기하고 싶었다. 그래도 시를 쓰는 동안 행복했던,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 주는 아슬아슬함이, 글이 주는 뜨거움이,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차오르는 느낌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시는 좀처럼 곁을 주지 않았다. 시가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괜히 야속했다.
    동아리 모임에 나가 시 합평을 받는 중에 인터넷에서 《사이버문학광장》을 알게 됐다. <창작광장>이라는 메뉴에 끌려 들어가 보니 일반인들이 작품을 올리면 일주일에 몇 편을 골라 기성 시인들이 평을 해주고 있었다. 이게 시가 되겠느냐고,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느냐고, 누군가를 붙들고 묻고 싶은 간절함에 드문드문 시를 올렸다. 잘 쓴 시를 뽑아 평을 해주는 곳이라 평을 못 들을 때도 있었다. 시가 아니라 넋두리라는, 산문이라는, 신파라는 소리를 듣고 나면 부끄럽고 힘이 빠졌다. 퇴고를 한 작품에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 됐다는 소리를 들을 땐 당장 그만두고 싶기도 했으며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을 땐 나이를 탓하며 한숨이 나왔다. 그렇지만 그런 모든 비판이 날 키울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내 글에 대한 그 누군가의 비판도 두려워하지 말자, 이건 내게 하는 비난이 아니다.’ 이렇게 다짐하고 나자 조금씩 뻔뻔해졌다. 부끄럽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 그런 비판들이 시를 쓰게 하는 힘이 됐다.
    그러다 《문장》을 통해 <동서문학상> 공모가 있기 전 실시하는 게시판 이벤트에 참여하게 됐다. 게시판에 글을 올리면 이름 있는 시인들이 일일이 댓글로 평을 해주는 형식이었다. 그런 기회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니어서 가슴이 설렜다. 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를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매달렸다. 요철이 심한 시에 칭찬보다 회초리가 더 많이 쏟아졌다. 그 회초리들이 부끄러움을 지나 아픔을 지나 뻔뻔함을 지나 달게 느껴졌다. 8주 동안 진정어린 충고에 감사했고 죄송했다. 그래도 여전히 시는 이것이다, 라고 말할 수 없는 자신이 답답했다. 선명하게 알아듣지 못하는 스스로의 무딘 감각에 매번 절망했다. 진화하지도 않았는데 퇴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땐 한심해져서 시를 외면했다. 그러다 슬그머니 다시 들여다보는, 변덕이 죽 끓듯 했다. 그 게시판에서 주 장원을 받은 작품과 몇 편을 퇴고해 <동서문학상>에 응모를 하고 난 후 잊었다. 시를 끌어안고 산 시간들로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거니와 내 시의 정서가 통하지 않으리라 생각해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나중에 「매조도를 두근거리다」라는 작품이 대상을 받게 됐다는 말을 들었다. 몸이, 생각이 잠시 가벼워졌다가 오래 무거워졌다. 정신이 들자 겁이 나기도, 부끄럽기도 하면서 시의 단초를 제공해 준 정약용 선생과 그 부인과 소실이었던 분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걸친 듯 불편하기도 했다. 내가 과연 이 상을 받아도 될까, 싶었다. 상이 주는 부담감이 가끔은 좋았고 가끔은 싫었다.

 

    *
    가끔은 글이 날 억압했고 가끔은 내가 글을 억압했다. 가끔은 글이 날 의심했고 가끔은 내가 글을 의심했다. 가끔은 글이 날 저울질했고 가끔은 내가 글을 저울질했다. 가끔은 글이 날 슬프게 했고 가끔은 내가 글을 슬프게 했다. 앞으로도 나는, 내 글은, 가끔 맑고 가끔 흐릴 것이다.

 

 

 

 

 

 

에세이 최분임

작가소개 / 최분임

경주 출생. 방송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제23회 마로니에전국여성백일장 산문 부문 장원·제12회 삶의 향기 동서문학상 대상. 소래문학회·동서문학회 회원.

 

   《문장웹진 2016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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