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언캐니한’ 귀환, 그리고 그 속의 여성들

[문학더하기(+)]

 

 

일본의 '언캐니한' 귀환, 그리고 그 속의 여성들

 

 

신샛별

 

 

 

    1. 일본, 친숙하고 낯선

 

    유년기에서부터 다양한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 둘러싸여 성장한 한국의 청년세대는 국가 사이의 물리적·심리적 장벽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소박한 의미에서조차 이미 트랜스내셔널하다. 소위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1) 세대라고 부를 수 있을 그들이 경험하는 한일 관계 역시 기본적으로는 그럴 것이다. '일본'이라고 하면 불가피하게 과거사의 상처를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는 기성세대와는 달리 청년세대는 일본 문화에 거리낌이 없다. 자신들이 향유하고 전파하는 문화에 일본(일본적인 것)이 직‧간접적으로 내포돼 있음을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그들은 그 문화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20주년이었던 작년 한‧일 합작 프로젝트로 진행돼 화제를 모은 〈프로듀스 48〉의 방영과 흥행은 그들 세대에게 일본(일본적인 것)이 얼마나 친숙한가를 방증하는 사례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런 친숙한 일본의 표상은 어떤 순간에 돌연 그 친숙함을 상실하고 기괴한 것으로 변해버린다. 최근 보도된 '홍대 일본 여성 폭행 사건'을 보라. 30대 한국인 남성이 홍대 거리를 지나던 일본인 여성에게 접근했고, 그 여성이 자신의 뜻대로 반응하지 않자 욕설을 내뱉고 폭력을 가했다. 그때 남성이 여성을 모욕하기 위해 내뱉은 말 중 하나는 'AV(adult video) 배우'였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남자 아이들이 '앙 기모찌'나 '야메떼' 같은 일본 AV의 관용적 표현들을 사용하여 여성 교사를 모욕하는 일이 잦다는 뉴스를 떠올리게 하는 사례다. 이런 사례들에서 '일본'이라는 표상에는 '국가'와 '젠더'가 중층결정(over-determination)되어 있거니와 이렇게 민족주의와 여성혐오가 교차되는 지점에서 일본은 낯설게 솟아오른다.
    한국 청년세대에게 일본(일본적인 것)은 친숙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낯선 대상이다. 프로이트는 독일어 '운하임리히(unheimlich)' 속에 바로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고 분석해 냈다. 본래 친밀했던 것이 문득 낯설어지는 상황, '언캐니(uncanny)'라는 영어 번역어로 더 널리 지칭되는 그런 상황. 여기서 '낯설어짐'은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변해버리는 것과는 다르다. 낯설어지면서 발견된 모습은 사실 그것의 '본래' 모습이기 때문이고 말 그대로 억압돼 있던 것이 '되돌아온'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캐니'의 순간이란 내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내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설명을 확대하여 국가적 층위에서 발생하는 언캐니의 경험('the national uncanny')을 상정해 보면 어떨까.2)
    친숙한 일본은 문득 낯설어진다. 그럴 때 낯설어진 일본이 사실 본래의 일본이다. 대중문화 속에서 억압돼 있던 일본, 즉 침략국가로서의 일본,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일본이 낯설어지면 일본에 대한 우리의 표상 역시도 함께 일그러진다. 민족주의와 여성혐오가 동시에 작동하면서 탄생하는, '성적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유린되어 마땅한 문란한 여성'으로서의 일본이라는 표상으로 말이다.
    이런 맥락 속에 두 편의 소설을 배치해 보려고 한다. 『2018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돼 있는 박민정의 단편소설 「세실, 주희」, 그리고 그보다 무려 40여 년 앞서 발표된 박완서의 단편소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가 그것이다. 두 소설은 긴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공히 일본이 국가와 젠더라는 두 개의 좌표축을 가로지르며 '언캐니하게' 귀환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1) ‘디지털 네이티브’는 미국의 교육학자 마크 프렌스키(Marc Prensky)가 2001년 그의 논문 Digital Native, Digital Immigrants를 통해 처음 사용한 용어다. 논문은 저자의 홈페이지(www.marcprensky.com)에서 자유롭게 볼 수 있다.
  2)  ‘national uncanny’라는 개념은 Renée L. Bergland, The national uncanny: Indian ghosts and American subjects, Dartmouth College Press, 2000에서 차용한 것이다.

 

 

    2. 박민정, 「세실, 주희」3)

 

    언캐니한 일본의 출현, 예컨대 박민정의 「세실, 주희」에 그런 장면이 있다. 명동의 화장품 매장에서 함께 근무하는 일본인 여성 '세실'과 한국인 여성 '주희'는 국적은 다르지만 또래 여성으로서의 친밀감을 느낀다. 한국 아이돌 '유노윤호'의 팬이어서 한국 유학을 결심한 바 있는 세실이 주희에게 한국어 과외를 요청하는 장면까지만 보면 그녀들은 곧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 속에는 아슬아슬한 균열이 잠재돼 있는데,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있다는 세실의 증조외할머니가 '히메유리 학도대'로 활약하다가 미혼의 '순결한 처녀'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를 주희가 듣고 난 후, 그 균열은 또렷해지기 시작한다. '히메유리'를 검색해 찾아본 영화에서 전쟁 당시 집단 자결하는 학도대의 모습을 보다가 주희는 어쩌면 세실의 증조외할머니가 학생들의 자결을 선동하는 교사였을지 모른다고 상상한다.

  3)  박민정, 「세실, 주희」,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8. 이하 같은 책을 본문에서 인용할 경우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

 

    "그러자 문득 소름이 끼쳤다."(31쪽)

 

    이 '문득'이 중요할 것이다. 친숙한 세실이 '문득' 낯설어지는 순간, 그것은 '유노윤호'와 '명동 화장품'의 세계 속에서 억압돼 있던 본래의 일본이 되돌아오는 순간이다. 주희에게만이 아니라 일본 문화 개방 이후 태어나고 자란 한국의 청년세대 모두에게도 이런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모은 '세일러 문' 캐릭터의 원형이 히메유리 학도대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한국의 많은 '세일러 문' 세대들 역시도 저 '문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선대(先代)의 가상적 애국 이야기가 세실에게 제공해 온 자부심을 목격한 주희는 이제 세실과 이전 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작가는 결말에 이르러 두 사람이 크리스마스의 명동 거리를 함께 걷다가 일군의 군중과 맞닥뜨리는 장면을 그려 놓았다.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묻고 피해자와 연대하는 집회의 군중들 속에서 주희와 세실은 둘 사이에 흐르는 건널 수 없는 강을 끝내 건너지 못하고 그저 침묵할 뿐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주희는 순간 뉴올리언스의 펍에 앉아 있던 자신이 떠올랐다."(36쪽)

 

    왜 하필 주희는 이 순간에 이 기억을 떠올리는가. 이 소설에 한국과 일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도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주희는 미국에서 성장하여 영어 실력이 출중한 데다 서구 문화에 친숙한 여성 'J'와 미국 여행을 한 적이 있다. J를 믿고 그녀에게 일정을 모두 맡긴 미국 여행에서 주희는 뉴올리언스의 '마르디 그라' 축제에 참가했다가 남자들로부터 가슴을 보여 달라는 모욕적인 희롱을 당한 적이 있다. 그때의 자신이 몰래 촬영되어 포르노 사이트에 'slut'이라는 멸칭과 함께 올라와 있음을 알게 된 주희는 뒤늦게 J를 원망하게 된다. "멍청한 한국 애들이랑은 말도 섞기 싫다."(16쪽)라고 말하던 J는 혹시 축제에서 일어날 수 있을 일을 예상하면서도 자신을 데려간 것은 아닌가.
    J와 주희의 이 심리적 관계가 중요한 것은 그 관계의 구조가 어쩌면 주희와 세실의 관계에서 그대로 반복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J가 미국 문화에 무지한 주희를 방치한 것처럼, 주희가 한국 역사에 무지한 세실을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이것은 미국과 한국, 한국과 일본의 문제이기를 넘어서는, 근본적으로 여성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희와 세실은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가'의 장벽에 막혀 서로 침묵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공통의 질문을 '여성으로서' 함께 찾아 나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괜찮아요, 세실 상. 이건 평화로운 집회예요. 전쟁 피해자들을 위한 집회예요."
    세실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아, 그래요? 나도 중학교 때부터 반전 집회에 참여했어요, 일본에서. 우리 할머니도 전화에 돌아가셨으니까요."(36쪽)

 

    '피해'와 '반전'이라는 개념을 둘러싼 이 동상이몽의 엇갈림이 주희와 세실 사이에 침묵의 강을 흐르게 하고 말지만, 어쩌면 이 대목이야말로 '유노윤호'나 '명동 화장품'을 통해서가 아니라 역사라는 물길을 통해서 둘이 진정으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놓여 있는 대목인 것이다. 그러니까, 여성으로서의 연대 가능성 말이다. 이것은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와 일본의 '히메유리 학도대'의 역사적 차이를 지우자는 무책임한 발상이 아니라, 민족주의와 여성혐오가 뒤엉키는 오늘날의 한일관계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한일 여성이 어떤 방식으로 공통의 이해를 찾아 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뇌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이와 같은 고뇌는 주희와 세실만이 아니라 J까지도 포함한 여성 모두의 문제일 것이다. 'slut'이라는 멸칭은 그들 모두를 위해 준비돼 있으니까 말이다.

 

 

    3. 박완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4)

 

    주인공이 명동 거리를 걷다가 군중을 만나면서 일본에 대해 생각하는 「세실, 주희」의 결말이 40년 전에 발표된 한 소설의 결말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소설의 결말에서도 주인공은 종로 거리를 걷다가 일군의 군중을 만나고 또 일본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박완서의 초기 명편인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서 전남편 둘에게 모두 실망한 것으로도 모자라 세 번째 남편에게서조차 그 속물성에 혐오감을 느끼던 '나'는 우연히 재회한 여고 동창들을 만나면서 혹시 그들에게는 한국 사회가 잃어버린 부끄러움이 남아 있는지 궁금해 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에게도 역시 "부끄러움의 알맹이는 퇴화하고 겉껍질만이 포즈로 잔존"(324쪽)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수치가 멸종됐음에 실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면 차라리 안심이라는 이중적 생각 속에서 종로 거리를 걷던 '나'는 뜻밖에도 잃어버린 부끄러움을 되찾는다. 공교롭게도 '일본'이라는 타자를 통해서 말이다. 좀 길지만 널리 인용되는 해당 대목을 아래에 옮겨 보자.

  4)  박완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1』, 문학동네, 2006. 이하 같은 책을 본문에서 인용할 경우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

 

    어느 날 어디로 가는 길인지 일본인 관광객이 한 떼, 여자 안내원의 뒤를 따라 이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어느 촌구석에서 왔는지 야박스럽고, 경망스럽고, 교활하고, 게다가 촌티까지 더덕더덕 나는 일본인들에 비하면 우리나라 안내원 여자는 너무 멋쟁이라 개 발에 편자처럼 민망해 보였다. 그녀는 멋쟁이일 뿐 아니라 경제 제일주의 나라의 외화 획득의 역군답게 다부지고 발랄하고 긍지에 차 보였다. 마침 학생들이 쏟아져 나와 관광객들과 아무렇게나 뒤섞였다. 그러자 이 안내원 여자는 관광객들 사이를 바느질하듯 누비며 소곤소곤 속삭였다.
    "아노 미나사바, 고찌라 아다리까라 스리니 고주이나사이마세(저 여러분, 이 근처부터 소매치기에 주의하십시오)."
    처음엔 나는 왜 내가 그 말뜻을 알아들었을까 하고 무척 무안하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차츰 몸이 더워 오면서 어떤 느낌이 왔다. 아아,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 느낌은 고통스럽게 왔다.(326~327쪽)

 

    「세실, 주희」에서처럼 이 대목에서도 일본은 '언캐니하게' 귀환한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표면적으로 형성된 '친숙한' 한일 관계 속에서 '친숙한' 외양을 한 일본인 관광객들이 종로 거리를 걷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한국인 관광 안내원의 말을 들은 이후, 종로 거리에서 실제로 하기 시작하는 생각은 '한국은 미개한 나라'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들은 문득 낯설어진다. 여전한 제국의 시선, 억압되었다가 되돌아온 과거. 이런 읽기가 작품의 의도와는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러나 소설이 제공하고 있지 않은 아래 정보까지를 염두에 둔다면 어떨까.

 

    박정희 정권은 출범 직후부터 외화벌이를 위한 관광 활성화 정책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는데, 한국에 주둔 중인 미군을 대상으로 했던 초기의 정책은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를 계기로 그 방향이 크게 달라졌다. 1973년 관광호텔, 요정, 식당의 접객요원을 대상으로 연 40시간 이상의 교육을 법적으로 명시하고, '외국인전용 관광사업 기준'에 접객용 의자 총수의 2분의 1에 해당하는 여자 종업원을 전속으로 고용할 것을 강제하는 조항을 넣는가 하면, 국제관광협회에 '요정과'를 설치하는 조치를 취하는 등 이른바 '기생관광'을 통한 일본인 관광객 유치에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정부가 기획하고 또 관리하는 기생관광에 반대하는 여론이 한일 양국에서 가장 격화됐던 시기가 바로 이 소설이 발표된 1973, 1974년 무렵이었다.5)

  5)  졸고, 「정치적 텍스트로서의 박완서 소설」, 『동악어문학』 72집, 2017.8, 221~2쪽.

 

    주인공이 맞닥뜨린 관광객이 기생관광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으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당시 종로 거리 어느 곳에는 분명 한국 여성을 사기 위해 그곳을 거닐고 있는 일본인 군중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국가 주도 관광산업의 말단에서 노동이라는 미명 하에 부당한 성적 착취에 내몰린 것은 물론 당대 한국 여성들이다.
    그런데 「세실, 주희」에서 한일 관계의 이야기가 결국 미국을 포함한 한미일의 이야기로 읽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서도 결말부 일본의 등장 이전에 이미 전반부에서 미국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0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나'를 장악하고 있는 트라우마적 경험, 즉 전쟁 직후 홀로 생계를 책임지는 데 어려움을 겪던 어머니가 딸인 자신에게 '양갈보'가 돼주길 기대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경험이 고통스럽게 회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제 딸을 양갈보 짓 시키지 못해 눈이 뒤집힌 여자를 어머니로 가진 여자, 그 가슴의 그 징그러운 젖을 빨고 자란 여자가 어떻게 감히 부끄럽다는 사치스러운 감정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인가."(317쪽) 1970년대 한국 사회의 눈부신 경제성장 이면에 은폐돼 있는 것은 양갈보를 작정했을 만큼 급박했던 생존의 역사이며, 그 과거 속에서 한국은 미국이라는 남성을 대상으로 성을 팔아야 했던 여성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한국은 이제 미국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남성을 맞닥뜨리고 있는 것이다.

 

    "모처럼 돌아온 내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327쪽)

 

    박완서의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그러나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은 한미일을 가로지르는 여성의 위치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다. 「세실, 주희」가 한미일을 가로지르는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과 같이 말이다. 어디서든 여성의 삶은, 평범한 한 여성이 문득 'slut'이 되어버리듯이, 친숙한 세계가 문득 낯설어지는, 그렇게 '언캐니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샛별

작가소개 / 신샛별

동국대 국문과 졸업·동 대학원 박사 과정 수료. 201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어 등단. 여성-청년-시민이라는 세 겹의 정체성이 이끄는 대로 작품을 읽고 비평을 씁니다.

 

   《문장웹진 2019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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