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들의 정류소

[단편소설]

 

 

말들의 정류소

 

 

조현

 

 

 
KBS 라디오 문학관 방송듣기
🔊 KBS 라디오 문학관에서 오디오북을 만나볼 수 있어요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서로의 고통과 상흔을 정답게 다독인다. 나는 방금 '정답게'라는 낱말을 썼다. 정답다는 것은 미워하지 않고, 지루해하지 않으며, 머뭇머뭇 손을 내밀고, '난 잘 있어요.'라고 눈인사를 하고, 사물에 애정이 담긴 이름표를 붙여 주고, 체온을 담아 악수를 하고, 그리하여 일용할 양식처럼 그 기억을 나의 살로 취하고, 나의 존재를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당신에게 온전히 내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언어는 말들의 정류소에 고여 있다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현현한다. 진심을 담았기 때문에 진심으로 전해지는 말들. 스스로를 고귀하게 만드는 말들. 하여 영원한 현재 속에 거주하는 문장들.

 

    오래전, 그러니까 학창 시절에 광화문의 한 신문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조사부 도서실에서 신문사의 역대 자료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케케묵은 통계, 미처 지면에 실리지 못한 기사의 초고, 이런저런 사건 사고를 담은 낡은 사진, 외신 텔렉스의 사본이 어지럽게 뒤섞인 서류 상자들을 하나씩 풀어 그 안에 담긴 잡동사니에 질서를 부여하고 분류표를 붙이는 업무였다. 그것은 마치 낯선 대지를 헤매면서 지도를 그려 넣는 것 같았다. 여기에 협곡, 저기엔 해안, 이렇게 말이다.
    물론 질서의 원칙과 분류표의 명단은 부서의 선임인 조사부장의 몫이었다. 그리고 사서이자 조사부 기자로 불리는 측량사들은 부장 지시에 따라 온갖 잡동사니들을 그런대로 쓸모 있게 분류하였다. 업무 보조이긴 했지만 나 역시 탐사대원의 한 명으로 황야를 헤맸다. 당시 조사부원들은 재능 있는 셰프가 벌꿀과 칠리소스를 섞어 근사한 요리를 만들어내듯이, 혹은 탁월한 시인이나 미술가가 거미줄과 철근과 안개를 연결하여 우주의 질서를 슬쩍 보여주듯이 그렇게 말들의 지도를 만들어내곤 했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꽤나 쓸모 있는 교훈을 배웠던 시절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뭐에 쓰나 싶은 잡동사니도 그럴듯한 분류표를 가슴에 붙이고 나면 누군가에게는 꼭 도움이 되는 정보로 탈바꿈한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나 역시 업무를 통해 개인적 사건 사고에 이름표를 붙이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마음의 지형도를 그리는 법이었다. 당시 진로를 확실히 정하지 못한 상태로 마음에 담아 둔 이성을 떠나보낸 나는 내 마음의 화산과 분화구, 괴물이 출몰하는 곳, 아직 오르지 못한 산, 아직 통과하지 못한 해협, 번민하는 리아스식 해안······. 뭐 이런 것을 마음의 좌표에 새겨 넣는 법을 배운 것이다.
    신문사들로 쏟아져 들어오는 자료들을 최종적으로 처리하는 곳도 조사부였다. 당시 신문사에는 서평으로 실어 달라거나 혹은 기사화해 주었으면 하는 책과 홍보물들이 배달되곤 했다. 그렇지만 신문에 실리는 것은 극히 일부이고 나머지는 필요한 기자들이 가져갔다. 혹여 나중에 기사에 참고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기자의 눈길을 끌지 못한 것들은 신문사 조사부로 넘어왔다. 사서 자격증이 있는 조사부 기자들은 그 자료들을 선별하여 보관할 가치가 있는 것은 도서실에 등록하고 나머지는 도서실 출입구 바로 바깥 복도에 세워 둔 책장에 꽂아 두었다. 그 서가로 말하자면, 신문사에 드나드는 누구라도 원하면 가져갈 수 있는, 그러니까 갈 곳 잃은 책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말들의 측량사인 조사부원들도 외면한 잡동사니들의 귀양지. 난 그 책장을 말들의 정류소라고 불렀다.
    서평이나 기사로 실릴 것을 기대하고 신문사로 보내졌으나, 신간 단신은 고사하고 기자들의 관심도 끌지 못한 책들. 그나마 신문사 도서실에 자리 잡기는커녕 말들의 정류소에 꽂혀 쓸쓸히 시간을 견디는 잡동사니들. 하여 난 점심시간마다 그 책들을 한 권씩 들고 나갔다. 그리고 메뉴를 주문하고 식사가 나오는 짧은 시간, 그리고 식사 후 근처 덕수궁 돌담길의 벤치에 앉아 그 책들을 읽었다.

 

    신문사에서 갈 곳 잃은 책들은 대체 무슨 종류였을까. 난 점심시간 광화문에서 갈 곳 잃은 말들에 대해 집중 탐구를 한 셈이다. 딱딱한 말투의 정부 홍보물, 알 듯 말 듯한 협회나 단체의 기관지. 온갖 행사 포스터와 안내책자. 뭐 이런 것들이었다. 그중에는 처음 들어 보는 출판사에서 나온 문집도 있었다. 난 특히 그런 문집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어느 한 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진 않았다. 점심을 먹는 동안만 손을 내밀어 보고 아니다 싶으면 돌아오면서 말들의 정류소에 다시 꽂아 두었던 것. 너에겐 다른 인연이 있겠지 하고.
    그러던 어느 날 노란색 표지의 시집을 발견했다. 물론 시인의 이름은 처음 들어 보는 사람이었고 표지는 맹맹했다. 아마 표지 디자인만으로 책의 운명이 결정된다면 그 시집은 인쇄소에서 나오자마자 말들의 정류소로 와야 할 그런 책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난 "오늘은 이 책을······" 하고 혼잣말 하며 그 시집을 들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날 분식집에서 내가 주문한 메뉴는 무엇이었을까. 순두부찌개? 오므라이스? 글쎄, 그런 건 기억나지 않지만 마치 비가 올 듯한 침침한 날씨였다는 건 생각난다. 난 식당 앞에서 자리가 나길 기다리며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내가 백까지 세기 전에 비가 내린다면 그날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자기 최면을 걸고서. 왜냐하면 왠지 모를 예감에 나는 우산을 들고 나왔으니까. 그리고 거의 백까지 숫자를 세었을 때 딱 맞춰 비가 내렸다. 가끔 이루어지는 작은 기적. 그래서 난 기분 좋게 그 촌스런 노란 표지의 시집을 읽어 봤다. 우연히도 맨 처음 실린 시는 「봄비」였다.

 

    지난밤에도
    어머니는 내 잠을
    지키셨다

 

    한밤 꼬박,
    門 밖을 서성이며
    서럽게 울고 계셨다
    일어나야지
    그만 일어나거라
    나직나직 내 가난의
    겨울잠을 일깨우시고

 

    노란 입술의 꽃잎 몇 개,
    다녀간 흔적으로
    뜰 앞에 남기셨다

 

    때마침 비가 내려서일까, 난 약간의 감동 속에 밥을 먹고 나머지 시들을 읽어 보았다. 첫 시와는 달리 나머지에선 별로 눈에 띄는 게 없었다. 그렇지만 난 시집을 정류소로 돌려보내지 않고 내가 가지기로 했다. 점심시간 나의 소소한 기적을 목도한 증인이니까, 그러니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여기고.
    그렇긴 하지만 시집은 집으로 와서 금세 잊히고 말았다. 책상 위에서 서가의 모서리로, 그리고 제일 윗칸으로 갔다가 다시 안 보는 책을 넣어 두는 책상자로.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렀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원했던 공부 대신 취업을 하고, 서툰 연애 끝에 결혼을 해서 분가를 하고 두어 번의 이직을 하고 드디어 더 이상의 이직은 엄두가 나지 않는 삼십대 중반이 되었다. 얘기하자면 나는 생소한 대지를 걸으며 삶의 사건 사고에 이름표를 붙였던 셈이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봄이 찾아왔다.

 

   
    그해 봄은 나에게 무척이나 힘든 계절이었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투병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벼운 소화 장애인 줄 알았는데, 갑작스럽게 병이 밝혀지고 급하게 입원이 결정되었다. 혼자 사셨던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하기 며칠 전부터 분가한 우리 남매들 몰래 혼자 옷 정리를 했다. 당신의 옷을 거의 다 자선단체에 기증하고 소소한 개인 물품들도 모두 정리했던 것이다. 물론 우리는 경황이 없던 탓에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어머니 병에 그래도 권위가 있는 병원은 어딘지, 정말로 가망은 없는 것인지, 기적적으로 완쾌한 환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 약은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알아보는 사이에 어머니의 물품이 정리된 것이다.
    언젠가 셋째가 얘기한 적이 있다. 우리는 정밀검진을 거쳐 어머니가 말기 암 판정받은 것을 나름대로 감췄다고 여겼는데 사실은 다 눈치 채고 있었다고. 언제나 깔끔한 것을 좋아해 매일 아침 베란다에 돋아난 난 잎을 닦아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던 어머니로서는 당신의 병이 영영 불치임을 짐작했으니 미리 버릴 것 버리고 정리할 것 정리한 셈이다. 사실 입원 당일 어머니를 모시러 온 우리들에게 당부한 것은 그래도 살아 있는 생명이니 말려 죽이면 안 된다고 베란다에 있는 화분들을 나눠 준 것이었다.
    결국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유독 어리광이 많았던 셋째는 어머니께 서운한 게 많았는데 그 후 어머니 기일이면 빼지 않고 얘기하는 게 당신 혼자서 사진첩을 정리한 일이었다.
    "나 초등학교 때 아빠 먼저 돌아가시고 이듬해였던가, 카메라 새로 산 기념으로 동물원에 소풍 갔을 때 엄마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찍힌 사진 있잖아. 그거 내가 난생처음으로 찍은 사진인데 나중에 사진첩 찾아보니 없더라고. 엄마 표정이 정말 웃기게 나와서 내가 정말 좋아하던 사진인데 그거 왜 버렸냐고."
    어머니 기일에 그런 얘기를 하면, 속 깊은 둘째가 셋째를 달랜다. 엄마는 제일 예쁜 모습만 우리에게 기억시켜 주고 싶었을 거라고. 그래서 조용하게 미소 띤 사진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치우신 거라고. 그렇지만 셋째의 서운함은 계속됐다.
    "그딴 게 다 뭐야. 난 솔직히 오빠랑 언니는 나보단 엄마랑 찍은 사진 더 많잖아. 그렇지만 난 언니 애기 돌잔치 때 엄마가 손주들 안고 있는 사진보다 갑자기 원숭이가 손을 뻗는 바람에 깜짝 놀란 사진 이런 게 생각난다고. 그거 지금도 얼마나 보고 싶은데. 그때 오빠랑 언니는 뭐 대단한 거 알아본다고 엄마가 소지품 정리하는 것도 몰랐어? 둘 다 미워. 그리고 엄마가 젤 미워······."
    셋째의 말은 그만큼 어머니가 그립다는 얘기일 것이다. 고통 속에서 힘들게 돌아가신 어머니를 지켜봤기에 더 마음에 사무치는 것일 터. 그런데 난 사진 말고도 동생들 모르게 버린 어머니의 물품을 더 알고 있었다. 그건 한 묶음의 편지였다.

 

    내가 처음 편지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해 지난 후였다. 그러니까 학교를 졸업하고 원하던 공부 대신 취업을 하고 막 직장 생활을 시작할 무렵이다. 첫 사회생활에 고민이 많았지만 어쨌거나 첫 월급을 받게 되어 어머니 반지를 해드릴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외출하신 틈을 타 반지 크기를 확인하러 예물함을 찾는데 장롱 깊숙한 곳에서 상자를 발견한 것이다.
    무지갯빛 자개가 화초 모양으로 박히고 검게 옻칠이 된 상자. 그리고 그 안에 몇 통의 편지가 단정하게 묶여 있었다. 편지의 발신인에는 낯선 남자의 이름이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주소를 보니 어머니의 고향에 있는 어떤 학교였다.
    난 꽤나 당혹스러웠기에 떨리는 손으로 편지 하나를 조심스레 꺼내 보았다.

 

    지원 씨.
        동창회에서 지원 씨 소식 듣고 편지 드립니다. 어려서는 서로 이름을 불    렀는데 이제 지원 씨라고 불러야 할 나이가 됐습니다······. 지금은 교직에 몸    담고 있는데 마침 학교가 지원 씨가 졸업한 학교이지요. 지원 씨와 함께 올    려다보던 나무는 운동장 한쪽에서 아직도 여전합니다······.

 

    지원 씨······ 나는 그 이름이 낯설었다. 우리 남매에게 어머니는 항상 엄마였지 지원 씨가 아니었다. 하여 난 감히 다른 편지를 마저 읽을 엄두를 못 냈다.
    첫 월급을 타고 예정대로 어머니에게 반지를 해드리면서 고민을 했지만 막 시작한 직장 생활로 정신이 없기도 하고 딱히 떠오르는 뾰족한 답도 없었다. 신문사 조사부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가끔 그런 적이 있었다. 상자를 열었는데 도대체 이건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모를 자료들이 나오는 경우. 이를테면 베트남에서 한국군의 전투 장면을 찍은 사진 뭉치이긴 한데 설명 자료가 없어 언제 어떻게 벌어진 것인지 그 내용을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 그럴 때는 일단 자료를 넘긴 부서에 문의를 한다. 다행히 고참 기자가 남아 있어 자료에 대해 아는 경우에는 분류가 쉬워진다. 그렇지만 딱히 확인하기 어려운 자료는 어쩔 수 없이 미분류로 남는다. 얘기하자면 그것은 비공식적으로 말들의 정류소에 봉인된 것이다.
    어쨌든 신문사의 노 기자에게 문의하듯 어머니에게 편지에 대해 말을 꺼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난 그냥 못 본 것으로 덮어 두었다. 아마도 그때는 그게 이십대 중반에 맞는 삶의 지혜였으리라. 그리고 결혼과 함께 분가를 하면서 어머니의 편지는 마음에서 점점 희미해져 갔다. 물론 어머니가 딱히 그분의 존재를 내색하지 않은 이유가 컸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명절을 본가에서 지내게 되면 가끔 생각이 날 때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 집에 어머니가 없으면 상자를 확인해 보았다. 편지는 일 년에 한두 통 꼴로 늘어나 있었고 여전히 단정하게 묶여 있었다.
    물론 어머니의 편지에 대해서 여동생들과 얘기할 기회가 몇 번 있긴 했다. 그러나 동생들도 차례로 결혼을 하면서 명절에도 얼굴 보기가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따로 만나 얘기를 꺼내는 것도 멋쩍어서 나만의 비밀로 간직해 온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입원하면서 당신의 많은 소지품과 함께 그 상자도 정리하신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의 편지 묶음은, 동생들도 영영 모른 채로 내 속에 있는 말들의 정류소에 봉인된 셈이다.

 

    어머니는 입원 후 매주가 다르게 쇠약해지셨다. 동생들은 어머니께 뭐라도 입맛 다실 것을 사드리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점차로 식욕을 잃어버리셨다. 병원, 그러니까 보호자로서 암병동을 출입하면 사람들이 눈에 띄게 구분된다. 비교적 초기 진단을 받아 병이 나을 것임을 바라고 그런대로 치료를 감내하는 사람들, 그리고 반대편에는 이미 시기를 놓쳐서 무기수처럼 모든 것을 체념하고 고통스럽게 연명치료를 하는 사람들. 그리고 소수이긴 하지만 기적을 바라며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온갖 비방을 찾는 사람들. 처음에 입원한 사람들은 방향을 못 잡지만 다소 시간이 지나면 이런 얼굴 중 하나를 얻게 된다. 그런 세 번째 부류 중에 막내가 있었다. 가장 다정다감한 성격인 셋째는 지치지도 않고 어머니의 병에 효험이 있을지도 모르는 대체의학을 찾아다녔다. 그렇다면 나와 둘째는 어떤 얼굴이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머니 자신은.
    일반인보다 이른 저녁 식사 후, 링거 지지대를 잡고 어머니와 함께 병원 정원을 돌 때였다. 어머니가 역광으로 번지는 플라타너스를 한참 올려다보셨다. 나무는 제 높이만큼의, 그러니까 살아온 날들만큼의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어려선 플라타너스가 세상에서 제일 큰 나무 같았어. 가을이면 곱게 단풍 든 나뭇잎이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데, 땅거미가 질 무렵 그걸 보고 있으면 왜 그리도 울음이 나던지.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올해는 단풍 드는 거 못 보겠지."
    "엄마, 무슨 소리예요. 치료 잘 받으면 통원할 정도로 좋아질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 단단히 매셔야 해요."
    "아니라는 건 나도 안다. 걱정인 것은 괜스레 니들 걱정시키는 거야. 너도 그렇고 둘째랑 셋째도 맞벌이한다고 다들 바쁠 텐데 니들이 뭔 고생인지. 참, 피곤하겠지만 집에 들를 때면 가져간 화분에 물이라도 줘라. 잎사귀도 한 번씩 마른걸레로 닦아 줘야 하는데."
    난 묵묵히 어머니의 얘기를 들으면서, 서른 몇 해를 살아오면서 소소하게 이루어낸 나의 작은 기적에 대해 생각했다.
    "플라타너스를 버즘나무라고 한다더라. 오래전에 그런 얘기를 들은 게 생각나네. 플라타너스가 맨 처음 생긴 곳이 중동인데, 점점 퍼져서 우리나라에까지 오게 된 거라고 하더라. 일 년에 몇 백 미터씩 씨앗을 뿌리면서. 그 얘길 듣고 플라타너스는 천천히 걷는 나무라고 생각했지."
    "우리 엄마, 똑똑하고 아직 기억력도 짱짱하네. 곧 퇴원해도 되겠어."
    석양이 저물어 가는 저녁나절, 서쪽 하늘을 등지고 흔들리는 나뭇잎들. 역광을 배경으로 빛 속에 스러지는 존재들. 삶의 윤곽들은 고요한 진동 속에서 부서지고 존재는 중력의 방향으로 붕괴한다. 동공에 고이는 눈물처럼 물기를 담고 있는 역광의 풍경들. 이렇게 링거 지지대를 끌고 병원을 산책하는 동안 자주 생각했지만, 역광을 배경으로 흔들리는 모든 풍경들은 나에게 일러준다. 어쩌면 우리들 삶이란 영원을 배경으로 빛나기에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고.
    퇴근해서 병실을 지키는 동안 병원 근처 도서관에서 수목도감을 빌려다 읽었다. 책에는 플라타너스의 자생지가 발칸 반도와 히말라야 사이의 어딘가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니 아마도 최초의 플라타너스는 메소포타미아 근처의 어떤 곳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최초의 녀석은 돌연변이였겠지. 그러므로 다른 나무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곳을 보고, 다른 상상력을 펼쳤을 것이다. 하여 그 애는 외롭고 서글펐으나, 그렇게 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개성적 존재의 시원이 된 것이다.
    그리고 걷는 나무······ 녀석과 녀석들의 후손들은 어머니 말씀처럼 한 세대에 수백 미터씩 씨앗을 날려 보내 자생군락을 넓혀 왔을 것이다. 그러니 매우 느리긴 하지만, 플라타너스는 걷는 나무인 것이다.
    난 이렇게 병실에 입원해서야 어머니 자신의 낱말들을 듣게 되었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꼭 챙겨 먹고 다녀라, 하고 싶은 공부를 못 해서 어떡하니, 뭐 하러 용돈을 이렇게 많이 넣었니, 아무래도 둘째네 애기는 내가 봐줘야겠다······ 평소 어머니께 듣던 말들은 항상 예측이 가능한 낱말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난 수목도감을 읽으며 어머니의 편지에 대해 생각했다. 어머니는 거기서 지원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그리고 걷는 나무라는 낱말도. 내가 알지 못하는, 그러니까 우리들에게 말하지 못한 당신의 언어는 얼마나 더 있을까. 그러나 내가 읽은 편지는 달랑 한 장이었고 그나마 급히 읽었기에 더 이상 상세한 내용이 기억나진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어머니 몰래 확인할 수도 없다. 모든 것은 당신의 기억 속으로 침잠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 수목도감을 읽으며 병원의 이런저런 나무들에 대해 어머니와 얘기할 때가 동생들에게 편지에 대해 얘기할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몰랐다.

 

    그즈음 미술 전람회를 다녀왔다. 지쳐 있었기에, 마치 깨끗하게 빤 빨랫감을 탁탁 털어 햇볕 쨍쨍한 볕에 거는 것처럼 마음을 말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언론에서 고흐의 가장 유명한 그림이 한국에 왔다고 자주 소개했기에 나 역시 론 강에 비친 별들을 보러 갔지만 뜻밖의 작품 앞에서 오래 걸음을 멈추었다. 그 그림에는 내 마음의 지형을 자극하는 밤의 바다가 있었다.
    한 시간······ 어쩌면 두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그림 앞에 서 있었던 것은. 그리고 결심을 했다. 더 늦기 전에, 그러니까 어머니가 그런대로 거동을 할 수 있을 때 이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고. 당신이 간직한 말들의 정류소에 이렇게 근사한 지형 하나쯤은 그려 드리고 싶다고.
    며칠 후 난 주치의를 설득했다. "어차피 예정된 순리대로 병세가 진행되겠지요. 그러니 선생님, 그나마 어머니께서 움직이실 수 있을 때 다녀오고 싶어요." 중년의 의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딱 세 시간의 외출을 허락했다. 그리고 부디 좋은 추억 만들라고 했다. 악수를 청하는 손이 따뜻했다. 그래, 의사에게도 다사로운 피가 흐르는 거야.   
    물론 그렇게 다사로운 피는 어머니에게도 있었다. 말로는 버겁다고 했지만, 간만의 병원 밖 외출에 싫은 내색은 아니었다. 난 어머니께 예쁜 모자를 씌워 드리면서 부디 오늘 보는 그림을 온전히 기억에 담아 두기를 바랐다.
    '누군가 듣고 있어요? 어머니가 오늘 하루라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안 좋은 날뿐이잖아요. 그러니 부디 오늘만이라도.' 난 불리든 불리우지 않든 이 우주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어떤 전능하고 자애로운 존재에게 우리의 하루치 행복을 빌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림 앞에 어머니를 모실 수 있었다. 윈슬러 호머의 「여름밤」. 여전히 그림은 기적처럼 기이한 색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물의 역광이 있었다. 검은 하늘 아래 빛나는 파도며 바닷가에 역광으로 앉은 이들은 마치 이승의 끝을 구경하는 관객들 같았다. 그리고 은빛으로 빛나는 바다를 배경으로 두 사람이 서로를 깊이 껴안고 춤을 추고 있었다.
    "엄마, 이 그림은 혼자서 봐야 끝내주는 거예요. 나 잠깐 다른 그림 보고 있을 테니까 어머니는 더 있다가 나오세요. 만약 힘들면 전화하시고요. 저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다시 한 시간······ 혹은 두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다행히 어머니는 본인의 걸음에 의지하여 로비로 나왔다. 어머니의 얼굴이 촉촉해져 있었다. 우리는 그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른 것에 대해서도. 어떤 경우에는 아주 잠깐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밤새워 할 얘기를 주고받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어머니의 촉촉한 눈을 보는 순간 나는 그런 대화를 했다. 언어를 넘어서는 대화, 이를테면 어머니와 올려다보던 플라타너스의 역광이 주는 말들, 주어와 술어는 없지만 사물이나 존재의 그림자를 포착하는 대화······. 그래, 이런 것도 우주의 자애로움이 우리에게 주는 소소한 기적일 것이다.

 

    그 후로 난 가끔 병실을 비웠다. 물론 동생들이 없을 때, 즉 어머니를 보살피는 당번이 내 차례가 될 때. 그때 난 종종 간호실에 전화번호를 맡겨 두고 한밤의 병원 로비에서 책을 읽었다.
    "엄마, 지난번에 전람회 괜찮았지요? 이젠 외출은 힘드니까 대신 오늘은 화집을 보세요. 정말 좋아요."
    그렇게 가끔 어머니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면서 에드워드 호퍼며 호안 미로의 화집을 안겨 주었다. 화집을 보는 동안에는 엄마도 예뻐야 해요, 하고 머리를 민 어머니께 손수건 두건을 씌워 드리고 내려온 밤의 로비. 그때 난 무슨 책들을 읽었을까. 막내가 찾아온 대체의학 서적들, '기억이 나를 본다'라고 적은 스웨덴의 시인, 직장에서 미처 처리하지 못한 보고서들. 그러나 책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내가 바란 건, 어머니 혼자서, 잠시라도, 혼자만의 낱말들을 더듬어 보는 것. 아마도 그건 삼십대 중반에 맞는 삶의 지혜를 배웠기 때문이리라.
    "그동안 본 화집들 정말 좋았다······. 우리 첫째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 몰랐지. 언제 이렇게 컸니. 엄마 생각도 할 줄 알고. 그런데 이제 피부에 진물이 생기기도 하고 더 이상 그림은 좀 그래······. 그러니 오늘 보는 게 마지막이야."
    그렇게 말씀하신 날을 끝으로 어머니께서 화집을 보는 날들도 사라졌다. 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본 화집은 무엇이었을까. 한 쌍의 남녀가 부드럽게 하늘을 날고 있는 마르셀 샤갈이었을까, 아니면 윈슬러 호머가 담겨 있는 오르세 미술관 컬렉션이었을까.

 

    그 후로 예정된 시련의 시간이 다가왔다. 말기 암은, 그것을 지켜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사건이다. 머리는 모두 깎이고 항암제의 부작용으로 얼굴은 괴물처럼 부어오른다. 미각을 시작으로 후각, 시각 순으로 감각을 잃어 간다. 통증과 욕지기 같은 절망적인 감각을 제외하고 말이다. 청각이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지만 정상적인 대화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그래서 어느 날 병실의 거울 앞에 서면 내가 아닌, 나와 비슷한 어떤 종류의 무기력한 생물체가 우두커니 서 있음을 목격한다. 이런 절망감은 말기 암 환자에게 전락의 시작일 뿐이다.
    이윽고 의식의 분열이 시작된다. 지금 이 순간이 낮인지 밤인지, 잠을 자는 건지 깨어 있는 건지 구별할 수 없게 된다. 통증과 구토, 멀미를 동반한 몽환의 상태가 지속되고 드디어 강도 높은 모르핀이 투여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마약성 진통제는 육체와 정신의 외부로부터 오는 유의미한 신호를 차단하거나 환각이나 환청 같은 잡음을 일으킨다. 그리고 보호자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짓물러진 등이나 옆구리 쪽 피부는 마른수건에 쉽게 벗겨져 내린다. 마치 조심스러운 손길에도 짓무른 양파 껍질이 무너져 내리듯이.
    말기 암은, 아무리 해도,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해도, 결국 인간의 몸을 지옥으로 전락시키는 과정이다. 항암제나 모르핀은 그 과정을 모차렐라 치즈를 늘이듯이 고통을 연장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차마 간병인에게 맡길 수 없었기에 동생들과 함께 울음을 참으면서 어머니의 욕창을 돌보던 그때, 내가 내내 생각한 것은 최초의 플라타너스였다. 최초의 플라타너스는 최초의 결단으로 생겨났다. 그리고 인간 중에서도 그런 최초의 녀석들이 존재한다.
    최초의 배화교도. 최초의 유니테리언. 최초의 채식주의자. 최초의 공화주의자. 최초의 아나키스트. 최초로 실존이나 한계 상황이라는 낱말을 종이에 적은 이. 최초로 큐비즘을 떠올린 이, 최초의 히피, 최초로 보스턴 북쪽의 작은 마을 프루츠 넥의 밤바다를 화폭에 옮긴이, 최초의 게릴라 가드너, 최초의 호스피스, 그리고 최초로 안락사의 개념을 떠올리고 실행에 옮긴이. 말들이 뒤섞인 대지에서 최초로 자신이 캐낸 언어들에 이름표를 붙인 사람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어머니를 편히 보내드릴 용기를 낼 사람이 없었다. 물론 병원 자체도 그런 생각 자체를 못 했다. 강한 진통제, 그리도 더 강한 진통제만이 유일한 방식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편한 임종은 없었겠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너무나 힘들게 돌아가셨다. 동생과 나는 어머니의 짓무른 등을 닦아 드리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엄마, 조금만 참아. 조금만 더 참으면 이제 영원히 아프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아. 엄마 사랑해. 엄마 사랑해."
    밤의 병실에서 이미 의식을 잃은 어머니의 통통 부은 손을 잡고 우리 남매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어느 새벽에 어머니는 우리 곁을 떠나셨다.

 

    어머니의 상을 치르고도 간간이 울음이 터져 나오는 날들이 계속됐다. 어머니께서 겪은 고통은 우리에게도 커다란 정신적 상흔이 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계절을 보내고 이듬해 봄비 내리는 저녁을 맞았다.
    그 저녁, 비에 떨어져 흙물이 묻은 꽃잎들을 보는데 문득 옛날의 노란색 시집이 생각났다. 애써 찾아보니 안 보는 책들을 넣어 둔 상자에 시집이 있었다. 난 빗소리를 배경으로 이 시의 마지막 연을 여러 번 읽었다.
    그리고 그 밤에 어머니 꿈을 꾸었다.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꿈에서 난 어머니를 뵙자마자 울먹이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엄마, 지금은 아프지 않지?" 꿈에서 어머니는, "그래, 이제 아프지 않아. 그러니 행복하게 살 거라." 하고 답을 하셨다. 꿈에서 어머니는 젊은 시절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말간 피부에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계셨다. 난 어머니의 말씀에 한없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비록 꿈이었지만 "다행이에요, 다행이에요." 하고 기뻐했다.
    새벽에 꿈에서 깨어 한참을 우두커니 누워 있다가 머리맡의 시집을 펼쳐 보았다. 역광이 스며있거나 밤이란 낱말이 들어간 것들은 모두 슬픔의 언어이자 고통의 언어이다. 슬픔과 고통이 뒤섞인 언어에 한 가지 장점이 있다면 그것을 통과하는 이에게 꿈으로 징표를 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상처의 끝에 생기는 딱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마음의 지형도에 새겨 넣는다. '이 협곡은 이제 안전함. 다리가 놓였음.'
    난 아침에 동생들에게 전화를 해서 꿈 얘기를 들려주었다. 둘째는 "정말이지? 엄마 피부가 깨끗했지? 다행이야, 엄마가 괜찮아서."라고 했고 셋째는 "왜 엄마는 오빠만 편애해? 내 꿈에는 한 번도 오지 않고."라고 투덜댔다. 아마도 꿈은 자의식의 반영이리라. 그렇지만, 꿈은 또한 우주가 베풀어 주는 가냘픈 기적이기도 하다. 하여 그날 이후 우리 남매는 고통스러운 어머니의 모습을 떠나보내고 젊은 시절 고왔던 모습으로 당신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 봄비 내리는 날이면 말들의 정류소에서 데려온 시집을 펼치곤 한다. 젊은 시절에 미처 내 눈에 차지 않았던 다른 시들도 읽을 때마다 새롭다. 촌스럽게 느껴졌던 노란색도 얼마나 다정다감하게 느껴지는지. 난 그때마다 시집에 새겨진 시인의 이름을 손끝으로 쓰다듬어 본다.

 

    그러니 이제야 말할 수 있겠다. 세상에 쓸모없는 책은 없다. 좋은 책과 더 좋은 책이 있을 뿐이다. 더불어 그 시절 말들의 정류소에 고여 있던 언어들은, 이 세상에서 단 한 명쯤에게는 승천하는 꿈의 전령이 되어 주었을 거라고 믿는다. 어느 비 오는 새벽, 내가 어머니와 잠시 재회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지난주, 많은 시간을 이격하여 남자에게서 편지가 왔다.

 

    H님께
    생전에 지원 씨로부터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해 여름에 H님께서 주신 편지로 인해 살아서는 못 볼 줄 알았던 지원 씨와 해후할 수 있었습니다. 지원 씨와 함께 본 밤바다, 그리고 병실에서 함께 본 화집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참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동안 기회가 없었지요. 그런데 저 역시 이제 병실에서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날들을 보내려니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될 거란 생각에 용기를 내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 니다.
    동봉한 사진은 어린 시절 고향에서 함께 자랄 때의 지원 씨입니다. 부디    간직해 주세요. 그리고 항상 다복하세요. 이것으로 처음이자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만약 다음 생이 있어 인연이 된다면 그때 은혜를 갚겠습니다. 이만 총총.

 

    편지에는 중학생 교복을 입은 여자 아이가 커다란 플라타너스 잎을 모자처럼 머리에 대고 한쪽 눈을 찡그리고 있는 흑백사진이 함께 들어 있었다. 초롱초롱한 생기와 함께 장난기 섞인 표정. 어머니에게도 이렇게 발랄한 시절이 있었다니 금세 눈시울이 붉어져 왔다.
    이 사진을 평생 간직했을 남자. 어떤 과학자들이 조심스레 얘기하듯 만약 우리와 평행하는 우주가 있었다면, 그 세계에서는 어머니와 다정하게 노년을 보냈을지도 모르는 남자. 그해 여름, 내가 삼십대 중반에 맞는 삶의 지혜를 펼쳐 관공서의 공문처럼 건조한 낱말을 써서 편지를 보낸 남자. '이지원 님이 8월 10일 오후 2-3시, H미술관 윈슬러 호머의 그림 앞에 있습니다. 괜찮다면 나와 주세요.'라거나 '8월 30일 오후 7시~익일 오전 6시까지 이지원 님이 병실에 혼자 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읽은 남자. 그리고 비록 화집은 없었지만 막바지에 이른 어머니의 어느 밤을 지켜준 남자.
    만약 내가 뒤섞인 말들을 대할 때 약간만 더 성숙했다면 어땠을까. 이를테면 옻칠을 한 상자에서 편지를 발견한 때. 혹은 가끔 본가에 들러 어머니 몰래 상자를 확인하던 몇 번의 기회. 그때 내가 발견한 말들에 다정다감한 이름표를 붙여 줄 순 없었을까.
    그러나 나는 비겁하게도 어머니의 마음을, 그리고 동생들의 마음을 모른다고 핑계를 댔다. 즉, 나는 체온이 담긴 손길을 내밀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러니까 그때 이십대에 서른 살의 지혜를 가졌다면, 혹은 서른 살에 마흔 살의 지혜를 가졌더라면.
    자책 속에서도, 어머니와 남자가 그림 앞에서 잠시 행복했다니 작은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람은 죽으면 누구나 다른 차원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레테의 물을 건너기 전, 한 번의 애절한 춤을 추고 이승, 혹은 이번 우주에 대한 모든 것을 잊는다. 이런 깨달음이야말로 불혹의 나이를 앞서는 지혜인 것일까. 그러니까 이런 게 우주가 가끔 보여주는 자애로운 지혜의 언어일까.

 

    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모른다. 그러나 간절함을 전하고 싶은 누군가가 있었기에 말은 탄생했을 것이다. 무심코 털어놓은 진심의 문장들, 머뭇머뭇 눈빛으로 보내는 침묵의 말들, 비 내리는 새벽 다녀간 흔적으로 남기는 꽃잎의 언어들, 고통과 상흔을 달래는 손짓들. 밤의 로비에서 누군가의 해후를 빌어 주는 기도들. 잠시 말들의 정류소에 거주하고 있다가 이윽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마음을 전하는 나와 당신들의 가여운 언어들.

 

 

 

 

 

 

 

 

 

 

 

 

 

 

 

조현

작가소개 / 조현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새드엔딩에 안녕을』 등.

 

   《문장웹진 2019년 0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