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반지

[단편소설]

 

 

도둑맞은 반지

 

 

오선호

 

 

 

    "반지가 없어졌어. 다이아몬드. 할머니가 엄마한테 물려주신 거."
    정훈과 삼 년째 만나고 있는 나는 그가 그런 반지를 가졌다는 사실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무방비 상태에서 한꺼번에 알게 되었다. 이어질 말을 잠시 기다렸다. 그는 자신의 왼팔을 베고 누워 있는 나를 슬쩍 보더니 다시 눈길을 돌렸다. "집 안에서 받았고 어디로 들고 나간 적이 없는데 말이지." 얘기가 여기서 끝나면 곤란하다. 나는 더 기다렸다. 그 반지를 나한테 줄 게 아니라면 나는 그런 반지의 존재조차 몰라야 하는 것 아닌가, 최소한? 정훈은 말없이 눈으로 천장을 훑고 있을 뿐이었다. 반지가 거기에 붙어 있을 리도 없는데!
    더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 확실해졌을 때쯤, 나는 입을 열었다. "이 집에 드나드는 사람은 너 말고는, 나잖아." 지금 나를 의심하고 있는 거냐는 물음. "그렇지?" 침착하게 말하려고 애는 썼다.
    "지나도 오잖아." 나와 지나가 나란히 용의자라는 건가? "다른 사람은 아무도 온 적이 없어. 잘 알잖아." 정훈이 힘주어 말했다. 나는 이제 그런 것들이 좀 지긋지긋하다.
    "지나한테는 물어봤어?" 내가 물었다.
    "아니. 가져갔으나 안 가져갔으나 대답은 한가지일 텐데 뭐 하러 물어봐?"
    "그럼 나한테는 왜 물어봐? 내 대답도 한가지일 텐데." 나는 웃음을 섞어 말했다. 우습지 않은데 웃는 웃음에는 전염성이 전혀 없었다.
    "내가 너한테 뭘, 물어봤어?"
    냉방이 과했다. 솜털들이 오소소 곤두섰다. 그에게 맨살을 맞대고 있는 것이 무안해졌다. 무안하게 느끼는 것이 곧 부당하게 여겨졌고 그렇다면 정당한 것은 무엇인가에까지 생각이 이르자 나는 더 이상 그와 함께 누워 있기가 싫어졌다. 등을 돌리고 일어나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리버가 들어왔다. 리버는 정훈의 개다. 골든리트리버종이어서 리버라고 부른다 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만일 나에게 이름이 없었다면 정훈이 나를 과연 뭐라고 불렀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 이 한 마리, 머리를 외로 꼰 채 위를 보는 버릇이 있고 기분 좋으면 앞발 들기를 좋아하며 여간해서는 짖는 일이 없는 이 유일한 개를 품종의 이름으로, 그것도 대충 줄여서 부르는 것에 거부감이 들었다. 짐작만으로 기분이 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어리석게도 나는 정훈이 리버를 부를 때마다 내가 짐작한 내 호칭들 몇 개를 돌려 가며 떠올리곤 했다.
    "네가 가져갔니?" 나는 일어서서 허리를 살짝 숙이며 리버의 잔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리버가 반지를 삼킨 건 아닐까?"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은 정훈이 사이드 테이블 위에서 태블릿을 집어 들고 들여다보았다.
    "이거, 볼래?" 내게 다가와 그것을 내밀었다.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쇼츠 입은 여자가 나왔다. 놀라서 돌아보자 그는 턱짓을 하며 계속 보라고 했다. 여자는 영상으로는 들리지 않는 음악에 맞춰 목과 팔다리를 크게 움직였다. 통통한 몸이 공처럼 이리저리 튀었다. 긴 소파 위를 눈길 달리듯 뛰다가 바닥에 내려와 뱅글뱅글 돌더니 점프를 했다. 르누아르 그림을 연상시키는 양감의 육체였다. 명치 아래까지 긴 머리채가 치어리딩 수술처럼 흔들렸고 흔들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신나서 웃는 얼굴이 보였다. 그 웃음은 전염되는 종류였다. 웃어도 될까 하는 생각을 했을 때 나는 이미 조용히 웃고 있었다. 그런데 장소가 바로 문 밖, 정훈의 거실임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화면에 언제라도 정훈이 등장할 것만 같아 심장박동이 불쾌하게 빨라짐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밴 웃음기는 곧바로 옅어지지 않았다. 이 뽀잇한 살결의 여자가 왜 이 집 거실에 있으며 정훈은 왜 이것을 나에게 보여줄까? 우리의 역할극은 이제 장르를 바꾸는 것일까? 나는 기대와 의문을 동시에 품고 정훈을 보았다.
    "잘 추는 춤인가? 너, 무용과 나왔잖아. 보면 알지?" 그가 물었다.
    "배워서 추는 춤은 아니네. 그런데 누구······?"
    "지나잖아."
    "누구라고?" 내가 기억하는 지나는 달랐다. 잔머리가 나오지 않게 묶은 머리에 꼭 다문 입매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키는 크지 않아도 단단한 체격이었던 것 같은데 긴 소매와 청바지로 이렇게나 포동포동한 팔다리를 가리고 있었다고?
    "여기, 지나 왼손에 이거, 반지 아니야?" 정훈이 영상을 조금 앞으로 돌려 멈춘 후 가리켰다.
    "뭐가 보여? 난 모르겠는데."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그렇게 한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대충 만족해라, 그런 말 믿으면 절대로 안 돼. 많이들 기본으로만 한대서 타협했는데 봐봐.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잖아." 이게 반지인지, 반지라 쳐도 어떤 반지인지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다며, 정훈은 입주할 때 기본 옵션만 선택하여 더 높은 성능의 카메라로 바꿔 달지 못한 일을 후회했다.
    태블릿을 빼앗아 다시 재생시키고 춤추는 지나를 더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나와 삼 년을 만났고 지금 내 뱃속에 있는 6주짜리 태아의 생부이지만 아직 그 사실을 알지는 못하고 있으며 반지가 없어졌다는 말만 함으로써 나를 결혼상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남자의 집 거실에서, 쇼츠 차림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목이 타는 것 같은 불편한 느낌의 원인이 질투심인지 모욕감인지 임신 증상인지 알 수 없었다.
    "찍는다고 동의는 미리 얻었어?"라고 물었지만 나는 성훈이 동의를 얻지 않았음을 알았다. 영상 속 지나가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처럼 움직이고 웃었기 때문이었다.
    "카메라를 숨겨 놓은 것도 아닌데 왜." 거실의 카메라는 큼지막한 사과 크기로 천장 한쪽에 붙어 있다.
    "그래도 정확히 고지했어야지."
    "여기는 내 집이고 나는 지나가 여기 와 있는 시간에 대해 임금을 지불하는 사용자야. 지나는 여기에 일하러 오는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마."
    확신에 찬 음성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일순 얼어붙는다. 내가 하는 모든 생각이 혹시 착각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잘 빠져나오는 편이다.
    "너야말로 착각하지 마. 법으로 걸면 네가 걸려. 동영상 다 지우고, 이제껏 찍은 사실 지나가 모르게 해."
    "그럼 반지는 어떻게 찾아?"

 

    지나는 청소부다.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을 흔히 가사도우미라고 부르지만 지나는 자신의 프로필에 '청소부'라고 명시해 두었다. 가사 중에서도 청소를 주로 하니 알맞은 이름이다. 청소 이상은 하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보이기도 해서 좋아 보였다.
    나는 민정을 통해 지나를 소개받았다. 머리 잘하는 미용사를 추천받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우리 친구들, 지금은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인데 한때는 여섯이었고 넷이거나 셋이었던 적도 있었던 그 친구들 그룹 안에서 민정은 뭔가 '사야 할 것'을 추천하는 사람이다. 그녀가 좋다고 한 것들은 대부분 정말 좋았고, 때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좋은가가 전부는 아니었다. 민정이 산 것을 따라 사는 것은 친구로서 그녀를 신뢰한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나는 민정을 다른 친구들보다 특히 더 신뢰하는 것은 아니어서 그녀가 추천한 모든 것을 따라 사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지나는, 망설임 없이 소개를 받았다.
    아무래도 민정이 결혼식 때 나를 지목해 부케를 주었던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 부케를 받는 단 한 명이 바로 나라니 부담스럽기도 했고, 믿을 만한 친구로 인정받는 기분도 들었지만 조금 의외이기도 했다. 우리가 갓 서른 살을 맞았을 때 어머, 이제 우리 십년지기야? 라며 다 같이 감격해 보인 적이 있었는데, 볼이 발그레해진 민정을 보면서 나는 십 년씩이나 가까이 알고 지냈음에도 이 정도만 친한 사이구나, 라고 새삼 의식했던 적이 있었다. 그보다 더 오래전 내가 무용을 그만두고 하와이에 있을 때, 민정이 혼자 두 번이나 내가 사는 곳에 와서 며칠씩 묵은 적이 있었지만, 그녀가 나를 보러 온 것이라 여기진 않았다. 하와이는 누구에게나 놀러 가기 좋은 곳 아닌가. 그 예쁜 꽃다발이 다 말라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때까지 나는 부케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집 안에서 개미를 본 것처럼 멈칫했다. 나는 부케에 상응하는 신뢰를 보여주고 싶었으므로, 지나 얘기가 나왔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민정의 청소부를 나도 쓰고 싶다 했다.
    이 년 넘게 지나는 내 집에 드나들었다. 내가 회사에 가 있는 낮 시간, 일주일에 두 번씩 오다가 작년부터는 한 번씩. 그녀는 엄마가 보내준 분처럼 내 집에서 알게 된 단편적인 정보들을 임의로 짜깁기해 고자질을 하지도 않고, 냉장고를 뒤져서 반찬을 자기 맘대로 만들고는 웃돈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어플로 신청해서 부르는 사람들처럼 걸핏하면 바뀔 일도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했는데 그 이상이었다. 그녀는 뭐가 중요하고 뭐가 중요하지 않은지 알았다. 지나 덕분에 나는 배수구 속이나 청소기 내부, 전등갓 안쪽까지 깨끗한 공간에서 편히 지냈고, 매주 수요일마다 새로 다림질까지 된 침대시트 위에서 잘 수 있었다.
    심지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지나는 내가 쓴 일기를 읽고 일기장이 펼쳐진 책상 위에 포스트잇을 붙여 놓았다. 날짜, 청소를 시작한 시간, 끝낸 시간, 청소의 내용, 그리고 감사합니다, 혹은 주말 잘 보내세요, 해가 늦게 뜨는 계절이니 침실 커튼을 열어 둘게요, 냉장고 안에 보리차가 있어요, 여행 가서 사 오신 향기 나는 비누는 겨울옷을 보관하는 옷장에 넣어 두었습니다, 등등. 나는 일기장에 늦잠을 잤던 일, 어릴 적 할머니 댁에서 마시던 보리차, 혼자 다녀온 여행 등에 관해 적어 놓았다. 지나가 일기를 읽는다고 내게 직접 알린 적은 없다. 그러나 나는 지나가 그것을 꼼꼼히 다 읽는다고 믿었다. 빈집에서, 펼쳐 놓은 일기장을, 굳이 읽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남긴 글이 뜬금없이 길 때도 종종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일본인 친구로부터 '장사는 손해를 보더라도 언젠가 창고를 짓는다.'라는 속담을 들은 적이 있어요. 저는 그 말이 지금 당장은 얻는 게 없어 보여도 훗날에 보람된 성취를 이룰 것이라는 뜻으로 알아듣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힘들 때마다 그 말을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커다란 창고가 떠오르면서 기분이 좋아졌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속담은 장사꾼은 밑지는 거래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였어요. 원래 뜻이야 어떻든 제 해석이 더 근사하지 않나요? 내일은 장사(?)가 더 잘 되길 바라며. 안녕히 주무세요." 어떻게 보면 관공서 화장실 문에 붙어 있거나 영업사원이 단체 메시지로 뿌리는 글귀 비슷한 내용이었지만, 그걸 읽는 내 느낌은 각별했다. 손바닥만 한 포스트잇에는 후추알을 흩뿌려 놓은 것같이 특이한 필체로 매번 다른 내용이 적혀있었다. 마음이 복잡할 때 더욱 눈에 들어오는 오늘의 운세처럼, 나는 지나가 써놓은 글을 내 상황에 적용시키면서 읽곤 하였다.
    일주일에 한 번으로 횟수를 줄인 것은 아쉽지만 내 쪽의 사정이었다. 회사를 옮기면서 연봉이 절반으로 줄어들자 급여통장 잔고가 눈에 익은 숫자의 범위를 벗어나게 되었다. 가용 예산이 늘 넉넉했던 것에 비해 번다한 쇼핑을 싫어하는 성향이라 각 잡고 돈 생각을 할 필요가 없던 나는 진지하게 지출을 되돌아보았다. 새로 담당하게 된 변호사가 중학생 쌍둥이를 키우고 있는 싱글맘인데, 가사도우미를 일주일에 한 번만 부른다는 말을 들은 것도 참고가 되었다. 전에는 하지 않던 야근도 자주 했기 때문에 오히려 청소부가 더 긴요해지긴 했지만, 그즈음엔 일기를 거의 쓰지 않아서 지나가 한 번만 오는 것이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일기장을 펼치지 않게 된 것은 시간 여유가 줄어든 탓도 있지만 쓰지 않고도 달고 깊게 잘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로 간 회사에서 나는 적어도 일에 있어서만큼은 내적 갈등과 억압으로부터 훨씬 자유로워진 상태였다. 정훈은 누군가 내 직업을 물으면 비서라고 하지 않고 내가 전에 다니던 대형 로펌의 이름을 대곤 했었다. 묘하게도 이직을 한 직후 정훈의 연락이 뜸해진 적이 있었다. 회사 옮기는 문제를 상의할 때만 해도 그는 아무것도 반대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그렇게 해. 너는 잘할 수 있을 거야, 라고만 했었다. 그런 말을 아주 멀쩡하고 정떨어지게 했다. 연락 없이 한 달쯤 지났을 때, 개새끼구나, 잘 된 일이다, 여기고 있을 무렵 갑자기 정훈이 찾아왔다. 그동안 자기가 어떤 이유로 바빴는지 설명을 했는데, 설명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과시도 했다. 자기가 얼마나 능력 있고 특별하고 앞으로 더 많은 돈을 벌 것인지에 관해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말했다. 개새끼가 맞구나, 생각하면서도 나는 정훈을 계속 만났다. 그리고 지나를 소개해 주었다. 그는 가사가 해결되지 않는 것을 문제로 인식조차 못 한 채 짜증만 내다가 지나를 고용한 후 작은 평화를 얻었다.

 

    9.7인치 화면 안에서 방방 뛰는 지나를 보고 다시 돌려 보았다.
    "법으로 걸면 걸린다면서 너는 왜 계속 봐?"
    "응?"
    "오빠가 맛집에 데려오면 다른 여자들처럼 사진이라도 찍든가."
    정훈은 자기가 한 농담이 마음에 드는 표정이었다. 그는 나와 동갑이다. 요식업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는 그에게는 새로 가볼 식당이 항상 있었다. '다른 여자들'이 '#오빠랑'을 붙여서 어딘가에 자랑할 만한 곳도 많았지만, 가게 안에 들어서자마자 없던 입맛조차 더 멀리 달아나게 만드는 곳도 많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발레를 해서 음식의 양과 종류를 늘 정해 놓고 먹었는데 그게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대학교 3학년 때 고관절 부상이 악화되어 무용을 그만둔 후에야 내가 무용과 상관없이 먹는 것을 그다지 즐길 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각을 타고나지도 못했고 기르지도 못했다.
    "리버랑 산책하고 싶어. 빨리 먹고 나가자."
    "여기 괜찮은 것 같다."라고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하며 정훈은 벽에 붙은 메뉴를 정독했다. 하얗게 찐 닭과 숨죽은 파가 한 접시에 담긴 것을 보고 이북식이라고 했다. 곧이어 막국수가 나왔다.
    "사진 찍을까?" 실패한 농담을 받아 주었으나,
    "응?" 그는 눈앞의 음식에 집중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맛있게 먹어."라고 했다. 이번에는 내 눈을 보며 말했다. 그의 짙은 갈색 눈동자에 내가 불상처럼 가만하게 비쳤다. 구강으로 느끼는 쾌감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그의 진심을 나는 안다. 그는 나에게, 나는 그에게 각자의 역사상 최장기간 연인이었다. 서로에게 진심인 부분도 있고 그냥 넘어가는 부분도 있다. 자신이 진심으로 전해도 상대가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것들은 어떤 것들인지, 속속들이는 몰라도 대강은 알고 있다. 그런 작은 부분들까지 딱 들어맞으면서도 현재의 상대방만큼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남들로부터 들을 수 있고, 다른 '조건들'까지 더 나은 사람, 즉, 운명의 반쪽이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나타날 거라고 정훈은 믿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얼마 전까지 딱 그렇게 믿고 있었음을 최근에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야 깨달았으니 그를 탓할 수도 없다.
    사귄 지 일 년쯤 지났을 때였나. 이제 그만 헤어지는 게 덜 피곤하겠다고 생각을 정리하던 즈음이었는데, 정훈이 치즈가 죽죽 늘어지는 피자를 손으로 들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 모습조차 보기 좋으면서 울컥, 흐뭇해지고 말았던 적이 있었다. 그날 나는 이 사람이 뭔가를 먹고 있는 모습이 더 이상 좋아 보이지 않을 때가 되면 그때 헤어져야겠다고, 혼자 속으로만 정해 두었다. 이제 와선 다 쓸데없어진 일이지만 말이다.
    정훈이 닭고기의 살점을 얌전한 젓가락질로 능숙하게 갈라내어 적당한 크기로 집은 다음 입에 넣었다. 보기 좋다고 계속 보다 보면 판단을 흐릴 수 있다. 얼른 이 사람의 좋지 않은 면들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이 맡고 있는 직영점 CCTV로 어디서나 원하기만 하면 직원들의 행동을 지켜보는 사람이다. 똑같은 일을 집 청소부에게도 하고 있었다. 카메라는 거실에만 있는 것이 확실한지, 물어봐도 대답은 한가지겠지.
    "호연아, 내일은 출근해?" 국수를 작은 접시에 덜어서 내 앞에 놓아 주며 그가 물었다.
    "일요일인데?" 나는 젓가락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의도와 달리 금속과 플라스틱이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났다.
    "일요일에도 만날 나가잖아."
    정훈은 내가 일하는 곳의 변호사들이 나중에 국회의원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고 나는 그들에게 싼값으로 이용만 당하고 있다고 믿었다. 여러 번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는데도 자기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내 일요일이야."

 

    집에 돌아간 나는 엽산제를 먹고 스트레칭을 했다. 잠깐 명상을 한 후 맑아진 마음으로 지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늘 고마운데 제대로 인사를 못 한 것 같다, 만나서 식사대접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지나에게 동영상이 있다고 알려서 일을 크게 만들기는 싫지만, 앞으로 더 이상 그녀가 찍히고 싶지 않을 장면을 찍히지 않도록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한참 동안 답이 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가 어떤 실수라도 했는지 돌아보며 의아해했는데, 점점 지나가 무엇을 피하는 건지 궁금해졌고, 결국 그녀를 반지 도둑으로 의심해 볼 만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조금 통쾌하기도 했다.
    정훈이 그 반지를 일 년 전, 혹은 두 달 전쯤 주었다면 나는 그것을 간단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내 마음에 쏙 들게 잘생기긴 했지만 나에게 중요한 것들을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남자와 결혼까지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나 이제 임신을 했고 아기를 낳을 것이라, 그 반지를 거부하기까지의 과정이 간단하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되고 보니 정훈이, 이 개새끼가, 반지를 주기는커녕, 나를 반지 도둑으로 의심했다는 사실이 더욱 분했다. 천천히 호흡했다.
    지나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그 반지의 실물을 보지 못한 채 상상하는 거지만, 어쩐지 아주 큰 다이아몬드가 쨍하게 반짝이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옥사나의 반지처럼. 대학생 때 겨울방학 동안 뉴욕에서 어학원에 다닌 적이 있었다. 옥사나와 나는 첫눈에 서로가 발레리나임을 알아보았고 매 시간 나란히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우크라이나 키예프 국립발레단 출신이었는데 러시아계 미국인과 결혼하여 뉴욕으로 왔다고 했다. 어학원에 다니는 이유는 다양한 친구를 사귀고 싶어서라고 했는데, 그 목적을 이루기에 그 클래스는 적당한 곳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옥사나가 발목까지 내려오는 모피코트 여러 벌을 돌려 가며 입고 다니는 것, 항상 손에 낀 결혼반지가 잘 보이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 그 반지의 다이아몬드가 병아리콩보다도 큰 것, 등등이 모두 다른 클래스메이트들에게는 비웃음거리였다. 옥사나가 자리를 비우면 눈짓을 나누었다. 눈짓만 나누다가 말로도 흉을 봤고, 그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자신의 할머니가 타이완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줄 알았다고 말한 사람은 레즈비언이었고, 증조할머니가 무덤을 열고 나온 줄 알았다고 말한 사람은 채식주의자였다. 교실에 있던 전원이 폭소하기도 했다. 나도 같이 웃었지만, 한편으로는 좀 모자란 친언니를 둔 기분이 이와 비슷할까 싶었다. 외동딸이라 그런 기분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모르면서도 그랬다.
    주말이 지나도록 지나로부터 답이 오지 않았다.

 

    민정은 지나를 소개해 준 사람이기도 하고, 굳이 따지고 보면 정훈도 민정을 통해 소개받은 거나 다름없으니, 민정을 만나 얘기를 해보면 좋을 것 같았다. 월요일 퇴근길이었다. "어디?" 나는 으레 민정이 서울 어딘가에서 이런저런 교집합의 사람들과 함께 있거나 곧 그럴 예정일 것이고, 그런 자리에는 보통 내가 잠깐 끼었다가 나와도 괜찮았기 때문에 부담 없이 물어보았다. "집이야. 혼자 있어. 왜?" 예상 밖의 대답에 당황해서였는지 나는 상의할 게 있어서, 라고 곧바로 솔직하게 고했다. "와. 저녁이나 같이 먹자."
    신혼집은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지나는 이 집에서도 춤을 출까. 민정의 집 거실 천장에도 CCTV 카메라가 달려 있었다. 그녀가 정훈처럼 지나를 감시할 것 같지는 않았다. 청소부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라고 하면 오히려 골치 아파할 사람이다. 그래도 뭔가 없어지면 민정도 지나부터 의심할까? 자신의 사적인 영역에 들어온 타인은 일단 자신이 원할 때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있고 통제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을까? 그것은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당연할지 모르는 그것이 나에게는 영 불편하다. 위험하게 느껴진다. 내가 정훈의 사적인 영역에 들어가 있던 것이 풀기 버거운 문제를 만들었기 때문일까? 민정의 집에 온 나는 집주인의 환대를 받고 있지만.
    "추워?" 내가 벗어 두었던 카디건을 다시 걸치자 민정이 에어컨 온도를 높이면서 물었다. 괜찮다는 내게 마실 것을 가져다주겠다며 일어섰다.
    "그런데 웬일로 너 이 시간에 집에 있어, 그것도 혼자?" 이제부터 조신하게 집 지키면서 살림을 할 계획인 거냐고 농담조로 물었는데, 민정은 웃지도 않고 "그럴 생각도 해봤지. 안 해본 게 아니야."라고 대답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무슨 일 있는지 묻자, 남편이 두 집 살림하는 것을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고 했다. 다른 여자가 있냐는 내 질문에, 그건 아니라고 했다. "나 하나도 버거워서 도망가 있는 거야."
    결혼 전에 혼자 살던 회사 근처의 집을 처분하지 않은 것에 대해 민정의 남편은 기한 전에 전세를 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금이라도 상식이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알겠지만, 결혼하기 전까지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살아 본 적이 없는 민정에게는 그런 종류의 상식이나 경험이 없었다. 민정 모르게 그녀의 남편은 계약을 연장하고 혼자 살던 집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거기서 그냥 게임하고, 게임하다 지치면 잠깐 멍 때리다가 다시 게임하고, 그런대. 같이 게임하는 친구들도 부르고." 나는 민정이 집에 없는 시간이 훨씬 더 긴데 그가 굳이 다른 집을 얻어서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뭔지 물었다. "내 말이 그거야. 그런데 다르대. 여기서는 안 된대. 완전히 독립된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대. 버지니아 울프야, 자기가." 민정이 내게 탄산수를 건넸다.
    "좋게 생각해. 어쨌든 능력 있는 거네. 집이 둘이라니." 나로서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대출 껴서 전셋집이 둘이라니, 엄청난 능력이지."
    민정이 내게 회사에서 이혼도 다루냐고 물었다. 나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선 공정거래 팀을 오래 도왔고 지금 회사에서는 좀 더 넓은 범위의 일을 하지만 가사 사건은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혼인신고도 안 했는데 이혼도 아니지, 뭐." 민정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결혼식도 했고 여러 사람 앞에서 부부로서 지냈으니 사실혼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인정받아서 뭐 하게?"라는 민정의 말에 나는 "그건 그렇다."라고 해주었다.
    처음에 민정은 남편에게 화가 났는데, 며칠 지나자 자신이 남편에게만 속은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결혼에 속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우리 엄마는 자식들 낳아 기르고 요리 청소 집안일 전담하면서 아빠한테 가진 돈 다 오픈하고 버는 돈 다 내놓으라고 했거든." 자신이 엄마처럼 살 계획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대한 개념은 엄마한테 배우고 말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고 했다. "결혼생활에서 엄마가 했던 일 중에 나도 하는 건, 가만 보니까 남편이랑 자는 것밖에 없더라? 그것도 뭐 두 집 살림이니 말 다했지만." 민정은 소리 나게 웃었으나 그 웃음은 전염되지 않았다.
    민정의 엄마가 혼자 다 했던 일을 나는 지나와 나눠서 하고 있는 셈이었다. 맨살을 내놓고 춤추는 지나를 보면서 내가 왜 그렇게 목이 탔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지나가 반지까지 훔쳐서 끼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어리석다. 알고 있다. 정훈과 결혼하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옛날 같았으면 정훈의 아내가 했을 역할을 두고 청소부와 가상의 영역다툼을 하는 꼴이라니.
    "속은 걸 알았으니 이제 똑바로 알아야 할 차롄데······." 민정은 자신이 속은 것처럼 남편 또한 속은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에 이르렀으나 함부로 그런 말을 하면 남편이 쉽게 용서받은 것으로 오해할 것 같아서 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대상을 찾지 못한 민정의 화는 어이없이 수그러들었으나 화를 내지 않기도 어색해서 남편에게는 계속 어느 정도 화가 난 사람의 태도를 유지했는데, 어느 순간 그조차도 너무 귀찮아졌고, 그 여파로 만사에 흥미가 사라졌는데, 그러한 상태가 일시적일 것이니 걱정하진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혼자 좀 쉬려고 했는데, 뭐, 너, 무슨 문제가 있다고?"
    민정에게 반지가 없어졌다는 얘기를 했다.
    "이상하다. 지나 걔가 그럴 애가 아닌데."라고 하는 민정에게 나는 "네가 그럴 사람, 안 그럴 사람, 잘 구분하는 줄은 모르겠으니 그 얘기는 넘어가자."고 했고, 민정은 "그러자."고 하면서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이게 상의씩이나 할 만한 문제야?" 문제라고 했다. "왜?" 내가 임신 중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도둑맞은 반지 얘기를 처음부터 다시 했다.
    "결혼 안 하고 애를 낳겠다고?"
    "응."
    민정은 말을 얼른 잇지 못했다.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열었지만 기역인지 니은인지 모를 자음의 발음만 나오고 그쳤다. 그런 반응일 줄은 몰랐다. 김민정이 이럴 정도면 나머지 세상은 어떨지, 처음으로 조금이나마 실감한 순간이었다. 나는 내가 낳은 자식을 책임 못 질 정도로 무능력하지 않다, 십 년 넘게 일하며 모은 저축이 있고 그보다 더 많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있다, 현재의 직업을 유지할 자신도 있고, 언젠가 부득이하게 그만두어야 한다면 발레교습소를 차릴 대안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왜 돈 얘기만 해? 돈만 있으면 되는 문제야, 이게? 너한테는 돈이 제일 중요해?"   
    "돈이 제일 중요하면 결혼을 하는 게 낫지. 정훈이 장사 잘해. 냉정하게 주변을 봐봐. 아기 있는 사람들, 결혼을 했든 이혼한 다음이든 어차피 여자가 키우잖아." 내가 담당하는 변호사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쌍둥이 유치원 때 이혼했다는데 지금 중학생이야. 남편 문제를 빼버리니까 인생이 훨씬 심플해져서 좋대."
    "그 사람은 변호사잖아."
    "돈은 내가 더 많아."
    "그래?" 민정은 뾰로통하게 입을 내밀고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산부인과에서 처음 임신 진단을 받은 얘기부터 다시 했다. "의사가 결혼 예정인지 묻더라고." 병원을 나와 지하 주차장에서 운전대에 엎드려 조금 울었다. 갑자기 눈물이 터졌지만 또 갑자기 뚝 그쳤다. 의외로 괜찮았다. 정훈에게 임신을 알린다면 괜찮지 않은 일이 연이어 생길 것을 알고 있었다. "빈말이라도 그 반지가 나 줄 거였다고 안 한 걸 보면 내 생각이 맞았던 거지." 낙태가 가장 쉬운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반은 나를 닮았을 작은 사람이 얼굴은 아직 못 봤어도 분명 아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억지로라도 결혼을 하는 게 가장 현실적인 선택인 건 알아. 그렇지만," 결혼해서 살면 나는 아기를 기르는 것과 더불어 정훈의 아내 역할을 해야 한다. 이제까지의 나를 점점 지우고 새로운 내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될 새로운 모습이 간절히 원했던 것이어도 쉽지만은 않을 텐데, 하물며 내가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모습에 가깝다면야. 단지 법적으로 혼인한 부부가 있는 가정 안에서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서 그러한 변화까지 감당해야만 한다니 너무 벅차게 느껴졌다. 출산과 육아만으로도 힘든데, "내가 아내까지 되어야 하는 거야?"
    "야, 지호연, 태어날 아기 입장도 생각해 보고, 정훈 씨 생각도 좀 다시 해봐. 너무 네 생각만 하지 말고."
    "내가 내 생각 안 하면 누가 대신 해주는데? 넌 너 대신 네 생각 해주는 사람 있어? 결혼했더니 그런 사람 생겼어?"
    과했던 건 알았지만 통쾌했다. 새끼 품은 짐승의 공격성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앞날이 기대되었다. 마침 저녁식사가 배달되는 바람에 그날의 공격은 거기서 그치고 말았지만 말이다.
    초밥세트 메뉴가 아직도 새것 같은 식탁 위에 차려졌다. 우동 몇 가락을 먹고 나서 초밥 상자를 보니 네 줄 중 한 줄이 아무것도 덮고 있지 않았다. 민정이 회만 집어 먹고 있었다. 이렇게 먹으려면 회만 따로 시켰어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민정은 그냥 회는 너무 차가워서 맛이 없는데 초밥 위에 얹어 놓았던 회는 적당히 밥맛이 스며들어 있으면서 훨씬 맛있다고 대답했다.
    "그럼 이 밥은 다 버려?"
    "아, 그건 보통 남편이 먹는데."

 

    열 시도 되지 않았는데 도로가 제법 한산했다. 저녁 내내 들은 말과 한 말의 여운이 마치 옆자리에 누군가가 타고 있는 것처럼 시끄러웠다. 강변북로를 따라가다가 반포대교로 빠질 때쯤 나는 다시 반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생각은 돌고 돌아 몇 년 전 SNS에 '알 수도 있는 사람'으로 떴던 옥사나의 최근 모습에까지 가닿았다.
    어학원 스피치 시간에 옥사나는 고전발레의 근본 동작 원리를 설명했다.
    "중력을 거슬러 날아오르는 거예요. 누구나 그 한계를 알고 있죠.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이 새처럼 훨훨 날 순 없잖아요. 십 년, 이십 년, 날마다 발이 뭉개지도록 연습해서 겨우 이 만큼" 보석반지 반짝이는 두 손을 위아래로 벌려서 옥사나는 길이를 가늠해 보였다. "그것도 아주 잠깐 도약합니다."
    얼음물에 담그고 있던 발을 꺼내 타이즈를 입던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무대 위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흥분 상태가 되어 고통을 잊고 날았지만, 백스테이지로 돌아오자마자 고통은 빚쟁이처럼 들이닥치곤 했다. 나로서는 하나도 새로울 게 없는데도, 어쩌면 그래서였는지, 옥사나의 스피치를 듣다 보니 코끝이 맵싸해졌다. 억양 짙은 그녀의 영어에는 기묘한 울림이 있었다. 교실에 정적이 흘렀다. 모두 그녀에게 집중했다.
    "나는 발레단을 나왔지만 지금도 발레를 계속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어요. 날마다 중력을 거스르는 삶을 살고 있으니까요." 자신이 중력에 순응했다면 지금도 기차가 하루에 네 번밖에 오지 않는 우크라이나 시골에서 무의미한 방황이 방황인 줄도 모른 채 살고 있었을 거라고 했다. "남들도 다 이렇게 사니까 너도 똑같이 살아라. 네가 뭐가 잘났다고 네 부모, 네 형제, 이웃들,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느냐. 그렇지만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습니다. 나는 날고 싶었습니다." 특유의 몸짓으로 들어 올린 왼손에서 다이아몬드가 빛났다. 중력을 거스르는 그녀의 여정에서 그 보석은 아무리 크다 해도 사소한 전리품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날 이후 아무도 감히 그녀를 비웃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결국 다양한 친구들을 많이 만나고 싶다는 목적을 달성했다.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지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답이 늦어 죄송하다, 만나서 밥 먹자는 고객은 처음이다, 감사하다, 그러나 '주중에' 밤까지 스케줄이 꽉 차 있어서 도저히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다시 한 번 감사하다, 는 내용이었다. 주중에? 내가 눈치 없이 주말에 연락한 것이 실례였나. 일기장을 읽고 쪽지를 남겨 주는 사람이어서 잠시 착각을 했던 것 같다.
    사진에서 옥사나는 스웨트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반지는 눈에 띄지 않았다. 나잇살도 제법 붙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누가 봐도 한눈에 발레리나인 것을 알아볼 수 있을 만했다. 그것은 자세의 문제다.

 

    "아주 흔한 일입니다." 수요일 점심시간 화장실에 갔다가 혈흔을 본 나는 곧바로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는 임신 초기 증상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염려할 필요는 없지만 되도록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혹시 모르니 오늘은 일찍 귀가해서 좀 누워 계세요."
    반차를 쓰고 집에 왔다. 지나가 있었다. 이어폰을 꽂고 청소기를 돌리고 있어서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른 채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춤을 추고 있지는 않았지만 쇼츠를 입고 있었다. 손을 봤더니 반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 반지가 그 반지인지 알 수는 없었다.
    "악!" 나를 발견한 지나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나는 내가 내 집에 들어가며 사과를 해야 하는 게 부당하게 여겨졌다.
    "마침 잘 됐네요. 일 끝나면 차 한 잔 해요." 지나는 벽시계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눈동자를 굴렸다. "한 시간 더 걸려요. 그리고 십오 분. 차 마실 수 있어요."
    딱 한 시간 뒤, 지나와 나는 식탁에 마주 앉았다.
    "집에서 제가 청소하는 걸 직접 지켜보시는 분들도 있고, 분기별로 면담을 하는 분도 계시는데요." 지나는 밖에서 따로 보자는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라며,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내 제안을 거절했던 일에 대해 변명하고 싶어 했다.
    "사실 제가 청소부가 된 건 김민정 기자님 때문인데요. 아시죠?"
    처음 소개받을 때 대충 듣기는 했다. 지나는 원래 민정이 다니는 회사 디자인팀 인턴이었다. 회사 근처 수영장 저녁반에서 마주친 이후 밤마다 만나면서, 민정의 말에 의하면 '엄청 친해졌다'고 했다. 지나가 요약해 준 버전은 조금 달랐다. 인턴 기간이 끝난 뒤에도 민정은 종종 여러 사람 모이는 자리에 지나를 불러내곤 했다. 지나는 구직 활동에 도움이 될까 싶어 민정이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모임이 파할 때, 민정이 집 대신에 호텔로 간다고 하기에 까닭을 물었더니, 집이 너무 더러워서 호텔로 피신한 사연을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고. 지나는 자신이 호주에 워킹 홀리데이 갔을 때 청소회사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는 얘기를 했다. 그렇게 시작했더니 자꾸 소개가 이어졌고 어느덧 청소부가 직업이 되었다. 같은 사연을 민정으로부터 들었을 때는 뭔가 재밌고 신기했는데, 지나에게 듣고 나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진짜 청소부가 되고 난 다음에는 김민정 기자님을 한 번도 따로 만난 적이 없어요. 그 집에서 제가 일하는 동안 잠깐씩 마주친 적은 있지만요."
    "힘들겠네요." 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다.
    "힘이요? 그런 말이 아니고요. 제 일은 시간으로 체크되는 부분이 커서요. 이동 시간이 항상 타이트하구요."
    지나는 일반적인 가사도우미보다 비싸다. 그녀의 고객들은 그녀가 누구의 누구의 누구, 라서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약간 더 비싼 값을 치른다. 민정이 소개할 때 알려주는 사연, 민정에게서 시작되어 다음 소개자, 그다음 소개자에게도 전해지는 스토리, 지나가 어떻게 청소부가 되었나, 또한 이해할 수 없는 프리미엄이 되는 것 같았다. 물론 지나는 청소를 아주 잘한다. 민정이나 민정의 친구들, 그 친구들의 아는 사람, 그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어떤 생활방식을 잘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일기의 독자라는 점이 가장 지나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일기 말이에요. 제가 항상 책상 위에 펼쳐 놓는."
    "네?"
    "지나 씨가 매번 읽고 메모도 남겨 주고 그래서 좋았어요."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저는 그런 거 안 읽어요. 큰일 나요. 남의 집 청소하는 게 흔한 허드렛일이라고 막 생각하시면 안 돼요. 전 그런 사람 아니에요."
    "아니, 저는 나쁜 말을 하려는 게 아니고요."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한데요, 다음 달부터는 이쪽 지역을 저희 직원이 담당할 예정이거든요. 직원에게도 일기장이라든가 이런 것들에 관해서는 특별히 더 잘 교육시켜서 보내겠습니다." 지나는 인사가 늦었다며 명함을 건네고 자신이 회사를 세우게 된 경위를 잘 요약해서 말해 주었다. 여러 번 말해 본 것 같은 흐름이었다. "지금 일만으로도 너무 바빠서 홍보는 천천히 하려고 계획 중이에요."
    유리에 물방울이 맺혀서 미끄러웠던지 오른손으로만 들려다가 왼손까지 올라왔다. 아이스커피가 담긴 잔을 쥐고 있는 지나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있었다.
    "손 좀 줘 봐요." 내가 지나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하자, 그녀는 모르는 외국어를 들은 것처럼 눈이 가늘어지면서 고개를 살짝 기울이다가 오른손을 마주 내밀었다. 마치 악수를 하려는 것처럼. 그러나 나는 그 손이 내 손에 닿기 전에 다시 말했다. "그 손 말고 반대쪽이요." 지나는 기울였던 고개만 반대쪽으로 기울이면서 왼손을 바로 주지 않았다. 미묘하게 표정이 바뀌면서 "왜요?" 물었다. "주세요." 이곳은 나의 사적인 영역이고 지나는 그 안에 들어와 있다. 지나가 지나치게 당황하는 모습은 이 반지가 그 반지라는 증거가 되었다. 천천히 올라오는 왼손을 나는 낚듯이 잡고 "반지가 예쁘네요?"라고 말했지만, 처음 본 그 반지는 전혀 예쁘지 않았다.
    "죄송해요. 소파 밑에 상자도 없이 떨어져 있어서 중요한 물건이 아닌 줄 알았어요." 그녀는 눈물이 차오른 눈으로 용서를 구했다. 이제 갓 회사를 시작했는데 이런 일이 생겨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믿어 주세요. 이 반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저는 원칙이 있는 사람이에요. 일하는 집 물건에 손대거나 하지 않아요." 이상하게 들렸다. 원칙이 있는 사람에게 왜 하필 그 반지가 예외가 되었는지. 나는 지나에게 계속 질문했다.
    지나는 마룻바닥에 떨어져 있는 반지를 본 순간 그 집이 자신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알아듣지 못한 나는 재차 물었다. "선물이요. 제가 그 집을 정말 많이 좋아하거든요. 처음 갔을 때부터 계속 좋아했어요." 정훈을 좋아한다는 뜻인지 물었다. "사실 처음엔 저도 그런 줄 알았어요. 잘생기셨잖아요. 그런데 아니에요. 출근을 늦게도 하시는 분이라 제가 일하는 시간에 마주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확실해요. 그분을, 그러니까 집주인 사람을 좋아하는 게 전혀 아니고요. 집을 좋아하는 거예요. 그 집은 저한테 완벽해요." 그냥 보통 아파트 아닌가.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어려운데요. 사람들은 보통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그중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잖아요. 저는 여러 집을 돌아다니면서 집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안 그러면 제가 어떻게 이렇게 열심히 청소를 할 수가 있겠어요?" 지나는 정훈의 집에 대해 말했다. 그 집의 채광과 마루의 나뭇결과 수도의 수압과 조용히 부유하는 먼지의 행로와 고요할 때 흐르는 소음의 음색과 집 안에 배치된 모든 가구들과 희미하게 배어 있는 집의 냄새 같은 것들에 대해서. "좋아한다고 갖고 싶다거나 그런 게 아니고요. 그 안에 있는 게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런 마음이 나날이 자랐는데 반지를 보게 되었다. "며칠만 끼고 있다가 돌려놓으려고 했어요." 지나는 분명히 내 일기를 읽었을 것이다.
    "주세요. 그럼 다 해결돼요."

 

    같이 산책을 가면 꼭 정훈이 뒤처지고 결국 내가 리버의 똥을 치우게 되어서 못마땅했던 적도 많았지만,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렇듯 이것도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비닐 낀 손으로 뜨끈한 개똥에 반지를 박아 넣었다. 쪼그려 앉아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는데, 어느새 다가온 정훈이 나를 불렀다. "뭐 하고 있어?" 나는 앉은 채로 뒤돌았다. 한쪽 무릎은 꿇고 다른 무릎은 세운 자세로 개똥에 싸인 반지를 들어 보였다.
    "반지야. 봐봐."
    정훈은 기뻐하면서도 그것을 덥석 받지 못하고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오선호

작가소개 / 오선호

201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

 

   《문장웹진 2019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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