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글틴스페셜]

 

 

무제

 

 

곽다혜

 

 

 

    열일곱, 17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들 말하는 3년의 시작점. 달려야 하는 순간들만을 앞에 두고 나는 퍽이나 무력감에 젖어 있었다. 다들 그렇지 않을까.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확실히 뭐가 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희망찬 꿈과 현실, 그 경계에서 허우적거리던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해준 것은 특별히 더 거창한 것도 아닌, 지금에서야 말하는 나의 기억이다.

 

    '검문 있겠습니다. 성인은 신분증 제시해 주시면 됩니다.'
    사진으로만 본 DMZ, 실감나지 않았던 곳. 우리가 분단국가라는 것을, 아직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현실을 깨달은 것은 통일대교 위에서 검문을 받았을 때였다. 철저한 신분 검사와 무장하고 훈련하는 수 명의 군인들. 태어나 처음 겪는 검문에 나는 나를 찾기 위해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는 경계를 지나왔고, 그 경계의 안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로 차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느꼈다. 처음 보는 얼굴들과 이름들 그러나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낭독회에서 신철규 시인은 '시인은 백조 같다'고 했다. 물 위에서는 우아하게 있지만 물 밑에서는 바삐 발을 움직이고 있다고. 비슷한 시를 쓰지 않기 위해, 다른 말을 찾아 머리끝까지 쥐어짜 내는 시인을 말한 것이었다. 시인은 '바닥에서 건져 올리는 것'이고, 시를 쓰려면 쓰는 사람이 바닥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말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서 생생히 기억난다. 어둠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그 어둠 속에서 버티면서 색다른 말을 얼마나 찾아낼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박찬세 시인은 '~가 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안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시를 쓴다고 했다. 나는 내 마음에 들게 써지지 않아 종이를 덮었던, 시간이 없다고 핑계 대며 책을 읽지 않았던, 노력은 하지 않으며 성공만을 바랐던 나의 과거가 떠올랐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건대, 제일 아쉬웠던 점은 내가 그날 그 시간에 시집을 가져가지 않은 것이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책을 몽땅 사들고 가서 사인을 받고 싶다. 책 표지에 내 이름과 사인을 받으며 말하고 싶다. 그날 덕분에 저는 더 성장하게 되었다고, 바닥으로 내려가 버티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그러니 우리 같이 조금 더 버텨 보자고, 감사하다고.

 

    눈을 감았다 뜨니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올해 가장 춥다더니 별로 오지도 않던 눈이 이곳에서 하루가 지나니 가득 쌓여 있는 모습에 우리는 창문에 달라붙어 감탄사를 내뱉었다. 눈이 오며 새하얗게 쌓이는 풍경은 절경이었다. 하지만 폭설로 제3땅굴과 북한을 볼 수 있는 도라전망대는 가보지 못하고 도라산역과 도라산평화공원만 다녀오게 됐다. 도라산평화공원에서는 스탬프를 모두 찍으면 선물이 있다는 소식에 모두가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안 뛰었다. 언니들도 안 뛰었다. 같이 수다 떨고 사진을 찍으며 풍경을 감상했을 뿐. 저 멀리서 코와 귀가 새빨개지도록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사슴과 풍경을 구경하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새하얗게 펼쳐진 눈에 최초로 내 발 도장을 찍는 것은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누구도 도전하지 않는 영역에 내가 처음으로 도전한다는 기분이, 나의 발걸음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 짜릿함을 선사했다. 그저 하얀 눈 위에 내 발 도장을 찍는 것이지만, 그 사실만으로도 매력적이었다. 새하얀 눈 같은 꿈에 나라는 존재를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하나씩 한 발자국씩 찍고 있으면 어느 순간 눈이 다 없어져 있지 않을까. 눈이 다 없어진 바닥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써져 있지는 않을까.

 

    강영숙 작가는 '글 쓰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자유에 대한 제약을 받는 반면 허구의 영역은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다고, 그렇기에 자신은 글을 쓰고 있다고 했다. 학교의 제약, 사회의 제약, 우리는 모든 삶에서 제약을 받고 있지만 유일하게 제약을 받지 않는 영역인 상상의 영역이 기이하고 신비로웠다.

 

    나의 글에 대하여 김선재 작가는 물었다. 이 글에서의 나는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나이는 몇인지 등등에 대해 너는 설명할 수 있냐고. 입이 차마 열리지 않았다. 김선재 작가는 소설은 뻔뻔하고 정교하고 치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사소한 것까지도 설계하고 써야 한다고. 워크숍이 끝난 뒤 나는 한 세상을 그대로 책 한 폭에 옮겨 놓고 내 손으로 그 세계를 하나하나 이끌어 나가는 것, 그게 소설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교하지 않다면 그 세계에는 하나하나 구멍이 날 것이고, 서서히 모이는 구멍은 언젠가 반드시 눈에 확연히 드러나게 될 테니까. 나는 그 길로 노트에 끼적여 내려가기 시작했다. 소설은 하나의 세계라고. 내가 만들어낸 그저 그런 이야기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창조물이라고. 만들어낸 이상 끝까지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나라는 사람 속에 새겨 넣었다. 까먹지도 잊지도 말아야 할 것.
    소설은 하나의 세계이고 창조물이다.

 

    지혜의 숲에서 값진 책 선물을 받고 돌아오는 길, 나는 내가 바라보던 시선을 조금 옮겨 보기로 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아닌 숨겨진 노력들을 찾아보는 방향으로. 새로 나온 따끈따끈한 책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숨어 있는 것처럼 나에게도 그런 손때가 묻어 있길 바라기로 했다. '나'라는 책을 들어 올리면 나에게만 느낄 수 있는 따뜻함이 있기를 바라기로 했다.

 

    세상의 발걸음이 닿지 않는 곳, 우리의 죄의 역사가 담겨 있는 곳, 그러나 무엇보다 찬란하게 꽃피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 DMZ. 그곳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과 순간들. DMZ 남방 한계선에서 2km가량 떨어진 파주 캠프그리브스, 그곳에서 나는 진짜 나의 2019년을 시작했다.

 

 

 

 

 

 

 

 

 

 

 

 

 

 

 

곽다혜

작가소개 / 곽다혜

작가 지망생. 2003년 춘천 출생. 성수여자고등학교 재학 중.

 

   《문장웹진 2019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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