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으로 보내는 편지

[제14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수필]

 

 

제14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우수상
– 에덴으로 보내는 편지

 

 

김한세(김규리)

 

 

 

    에덴으로, 딸에게
    작년은 내가 처음으로 너를 자각했던 때란다. 지상에 떨어진 내가 낙원에 있을 너를 느낀다는 건 곧 내 존재가 그만큼 상처입고 불안정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겠지. 환경에 종속된 인간은 그를 둘러싼 세계가 위태로워지고 휘청거리는 순간에야 비로소 자신 존재의 오롯함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야. 용서를 하나 구하자면,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자각했던 그 순간에 편지를 보내지 않았어. 내가 두려웠던 탓이야. 그 어떤 생각도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고 심지어 일종의 박탈감마저 느끼는 상황에서 내가 이성을 잃고 존재를 난도질할까 두려웠단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네게 편지를 쓰고 있지. 조금 모순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시간이 일정 지난 오늘의 나는 어느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어. 비수 같은 말을 품고 우리 모두를 훼손하는 일은 없을 거야. 또, 요새 하는 생각들을 종합해보니 네게 꼭 전해야할 것 같은 메시지가 있더구나. 주목적은 그거야. 그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나는 조금 독특한 버릇이 있어. 이걸 버릇이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밀한 속내를 터놓고 깊이 대화해본 이가 없으니 일단은 버릇이라 칭할게. 내 버릇은 내가 일종의 트라우마로 여긴 기억들을 끊임없이 떠올리는 거야. 일상생활을 하다가,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웠을 때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들. 나는 그것들을 소처럼 되새김질하고, 또 되새김질해. 그렇게 기억은 내 마음 속의 양분이 되지. 그것이 과연 성장을 위한 양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야.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생각해. 생각은 주로 기억 당시의 내게 아쉬웠던 것, 내 부족했던 것을 초점 삼아 흘러가. 왜 나는 그때 아버지께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이야기하지 못했을까? 왜 나는 무력하게 눈물만 흘려야 했을까? 왜 나는 나를 몰아세우는 어른들의 앞에서 입을 제대로 열 수 없었을까? 생각의 흐름은 빠른 물살과도 같아서, 그렇게 생각을 시작하는 순간 여태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 초등학교 때 발표를 하지 않았다고 나를 윽박질렀던 선생님, 계산 과정에서 바보 같은 실수를 계속 한다고 내 손등을 회초리로 때리던 학원 선생님, 수학 시험에서 실수로 세 개를 틀렸다고 나를 연신 없는 사람 취급하던 엄마…. 물론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이 춥고 그늘진 건 아니야. 그렇게 평면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고. 그렇지만 칼날 같은 경험들을 떠올리기 시작하다보면 어느새 나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
    음, 생각의 연속이 언제나 부정적인 것만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야. 나 스스로에 대해서 되짚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거든. 나 같은 경우에는 이러한 사고작용을 거치며 어른이 나를 꾸중하는 때 극단적인 공포를 느낀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나는 어른이 나를 훈계하는 순간, 마음 한편에서 예리한 두려움을 느껴. 저 사람이 곧 나에게 윽박지를 거라는 생각, 그래서 내 인격이 갈래갈래 찢어질 것 같다는 생각. 그러면 무력감이 차오르며 눈물부터 뚝뚝 떨구더라. 내가 타인과 토론을 잘 하지 못하는 것도 이 탓이 클 거야. 상대와 내가 동등한 발언권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발언력과 비판에 쉽게 휩쓸려버리거든.
    스스로를 되짚어보며 발견했던 것 중에 가장 큰 소득은, 내 공포의 근원을 마주한 거야. 왜 나는 어른들이 나를 억압적으로 몰아갔을 때 내 정당성을 내세우지 못했을까 생각해 보았어. 그랬더니 나온 결론은 내가 권위적인 환경에 계속 노출되며 성장했던 게 원인이라는 거였어. 우리 집은 전통적인 한국 가정 상이야. 내가 장녀이고 내게는 남동생이 없기 때문에 자식들을 대하는 부모님의 태도에 차이가 없을지는 몰라. 하지만 부모님의 성향은 수평적이라기보다는 수직적이야. 그래, 아들이 없는 가부장적인 가족. 그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약간의 안도감이 들었어. 부모님이 나보고 눈물이 많다고, 유약한 영혼이라며 꾸중했을 때, 내가 부모님께 이야기할 수 있는 변명이 하나 생긴 거니까. 내 정신이 나약한 게 아니며 내 눈물은 거듭된 무력감을 학습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겠지. 솔직히 말해서 변명이라는 표현도 우스워. 실제로 내가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내 의사를 밝히는 순간 엄습하는 공포감 때문에 제대로 말을 못하는 건 명백한 사실이니까.
    내 어머니가 자주 입에 담는 말이 있어. "그래도 뉴스를 보면 막 얻어맞고 뼈가 부러지고 멍이 드는 그런 애들 있지 않니. 그런 가정을 생각해보면 우리 집은 행복한 거야."
    아이를 학대하지 않는다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이상한 사고가 아닐까? 자신의 모습을 가장 최악의 경우와 비교하고 안심 하는 것은 표본을 잘못 선택한 거니까. 타인의 가장 깊은 어둠을 가져와서 스스로의 인격에 위안을 얻는 게,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게 있을까? 인간의 가장 저열한 상태와 자신의 최상의 상태를 비교하면서 자긍심을 느끼는 것은 허울뿐인 만족이겠지. 그런데 왜 내 부모님은 자녀에게 폭력을 휘둘러 반병신으로 만들어 놓지 않았다는 데서 뿌듯함을 느끼는 걸까? 그러더니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었어. 당신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데에서 밀려오는 분노가 말이야. 내가 아이의 인격을 지금보다 더 존중해주는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극도로 소심한 성정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음식점에서 종업원의 눈치를 심하게 보지 않아도 되었을까? 어른들에게 내 의사를 떳떳하게 밝힐 수 있었을까?
    나는 인정해야 했어. 나 자신의 존재를 내 의지 하나만으로 오롯하게 구축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리고 내가 지금의 내 가족의 구성원으로 존재하면서 대단히 많은 것들을 이어 받았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래, 나는 내 부모님이 표현하는 대로 유약한 인간일 수도 있어. 타인의 영향을 떨치지 못하고 괴로워하니까. 그리고 나는 내 평생을 걸쳐 괴로워해야 하겠지. 타인에게 휘둘리는 영혼을 안고, 여태껏 타인이 내 영혼 위에 남겨놓은 상흔을 더듬어야 하니까 말이야. 그러므로 이건 내 존재의 뿌리에 깊숙이 박힌 원죄인 셈이야. 내가 지금의 가정에서 태어난 순간, 죽는 날까지 어깨 위에 이고 가야할 그런 무게지.
    그렇게 생각을 하니 나는 네 존재가 두려워졌단다. 내 물렁한 정신은 나의 부모에게서 무의식적으로 병적인 가치관을 학습했을 텐데, 지상으로 현현한 네게 그 가치관을 다시 물려줄까, 그게 너무 무서웠어. 만약 내가 너의 어머니가 된다고 하면 꼴에 어버이랍시고 네 탄생을 결정지었다는 자만에 빠져 너에게 휘두르는 지배는 너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까. 울긋불긋한 멍 자국 가득한 존재가 스스로의 상처에 고통 받는 것도 모자라 내 자식을 괴롭히는 데까지 이어진다면. 이 얼마나 잔혹한 재생산이니? 나로 인해 슬픔의 바다에서 홀로 헤엄칠 네 존재를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절로 꺼림칙해져.
    내가 흔히 말하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는 그런 종교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원죄에 대해 무어라 단언을 하는 것은 주제넘은 행동일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끊임없는 생각을 통해 도달한 게 하나 있으니,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는 어쩌면, 되물림 하는 존재의 부조리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야. 내가 너의 존재를 에덴에서 찾은 것도 그 때문이야. 탄생과 성장으로 빚어지는 이 모든 고통 속에서 자유로울 존재, 그런 존재가 에덴에 있지 않다면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나는 결심했어. 괴로워 할 누군가를 나 자신의 의지를 통해 구원할 수 있다면 그건 내가 소망을 접는 거야. 네가 감히 지상으로 내려오길 희망한, 그 오만한 욕심을 접는 것. 이 이야기는 네게 편지를 쓴 목적이기도 해. 네게 보내는 이 편지가 네 순수한 정신에 영향을 미칠 것을 알면서도 그를 감수하는 의도이기도 하고.
    이건 너에게 보내는 나의 부탁이자 선언이야. 영원히 너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는 각오지. 그러니 이름 없는 내 자식아. 너에게 당부하니, 선악과는 내가 베어 물었고 지상에서의 고통은 내가 영원히 받을게. 너는 에덴동산에서 살아. 이게 네게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의 메시지야. 앞으로 내가 에덴으로 편지를 보내는 일은 없겠지. 너의 존재를 생각할수록 지상에 현현한 네 모습을 멋대로 기대할 테니까.
지상에서, 내가

 

 

 

 

 

 

 

 

 

 

 

 

 

 

 

작가소개 / 김규리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 감사합니다.

 

   《문장웹진 2019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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