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모양

[글틴스페셜-청소년을 위한 SF소설]

 

 

시간의 모양

 

 

배미주

 

 

 

럭키문방구

 

    그 소년이 우리에게 온 덕분에, 리-다비트 구에 대한 우리 연구는 다시 희망을 보았다.

 

    우리 셋은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럭키문방구가 문을 닫은 걸 알았다.
    럭키문방구는 우리 초등학생 때 만남의 장소였다. 밖에 오락기가 있어서 약속시간보다 좀 늦게 가도 마음이 편했다. 중학생이 된 뒤로는 만남의 장소가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야, 왜 문 닫았대?"
    태영이가 아쉬워했다. '폐업정리' 종이가 색 바랜 채 붙어 있었다. 오늘 초여름치고 더워서 럭키문방구에서 파는 오백 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사먹자고 오지 않았으면 문 닫은 것도 모를 뻔했다.
    "우리가 안 오니까 문 닫지."
    건우가 말했다. 가지도 않았으면서 괜히 마음이 허전했다. 문방구 아주머니, 우리한테 잘해 주셨는데.
    "오늘은 뭐 하고 노냐?"
    건우가 나른하게 말했다.
    "게임이나 하자. 너네 집 돼?"
    태영이가 나를 보았다.
    "이준이네 집 안 되잖아. 누나 아파서."
    건우가 태영이를 째렸다. 안 되는 줄 알면서 번번이 묻는 마음은 이해한다. 누나 아프기 전만 해도 우리 집은 최적의 아지트였으니까.
    우리 셋은 내가 전학 온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친구다. 학원 안 다니는 아이들 예닐곱 중에 집 가까운 아이들 셋이 뭉친 거다. 그때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학원에 다닐 필요는 없다는 엄마의 소신 때문에 학원 대신 스포츠센터에 가서 일주일에 세 번 수영을 배웠다. 솔직히 난 학원에 다니고 싶었다. 수영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힘든 게 싫다. 내 소원은 죽을 때까지 편히 살면서 크게 아프지 않고 수술도 받지 않는 것이다. 지지난해 여름에 건우가 찬 축구공에 맞아 손목뼈가 골절됐을 때 내 소원이 깨질 뻔했다. 다행히 엑스레이를 찍어 보니 골절된 뼈가 어긋나지 않아서 몇 달 동안 깁스하는 걸로 끝났다. 그때 사람 몸이 생각보다 약하다는 걸 알았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땐 늘 오늘은 뭐 하고 놀까가 대화 주제다. 초등학교 땐 집 근처 공원에서 농구하고 배드민턴도 치고 축구공도 차며 놀았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편의점에서 군것질하고 우리 집이나 태영이네 집에 가서 주로 게임을 했다. 건우네 집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셔서 거의 안 갔다. 태영이네 집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늦둥이 동생이 있어서 좀 성가셨다. 엄마, 아빠가 모두 일하시고 누나도 학원에 다녀서 텅 비는 우리 집이 놀기엔 최고였다.
    "공원이나 가자."
    공원 쪽으로 슬슬 가는데 누가 불렀다. 돌아보니 문방구 아줌마였다. 못 본 지 일 년은 된 거 같은데 하나도 안 변하셨다. 단발머리도 기운 없는 표정도.
    "어, 안녕하세요!"
    "그래. 잘들 지냈니? 너희 셋 다 엄청 컸다. 이준, 누나는 좀 어떠니?"
    "그냥…… 잘 있어요. 감사합니다."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뒷머리를 긁었다. 누나 병은…… 설명하기 어려웠다.
    "아줌마, 가게 파신 거예요?"
    건우가 물었다. 건우는 여기 토박이라 나름 동네 사정에 밝았다.
    "그건 아니고…… 업종을 바꾸려고."
    "아, 그러시구나. 언제요?"
    "리모델링 공사 날짜가 일주일 뒤야. 진열대에 물건이 좀 남았는데…… 너희들 필요한 게 있음 가져갈래?"
    아줌마 말에 우린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 진짜요?"
    "그래, 하지만 너무 기대는 마라."
    아줌마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내밀었다.
    "자, 문방구 열쇠다. 공사는 다음 주 화요일부터 들어갈 거야. 그때까진 이 보조열쇠 너희가 가지고 있어라. 너희들 시간 될 때 들러서 챙겨 가렴. 친구들 데려와서 가져가도 되고."
    "와, 정말요? 감사합니다!"
    우린 입을 모아 소리쳤다. 대박.
    "너희들 우리 집 단골이었잖니."
    아줌마가 미소 지었다. 문방구 아줌마는 아이들 마음을 잘 아셨다. 아이들이 무얼 좋아하고 어떤 것에 신나하는지. 이제 동네 꼬마 녀석들은 어디서 만나 놀지. 좋아했던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게 싫었다.
    "먹을 것도 좀 있을까요?"
    먹보 태영이가 배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있을 거야. 불량식품이지만."
    아줌마는 빙그레 웃었다. "세상에 우량식품만 있어야 되는 건 아니잖아."
    "당연하죠!" 우리 삶의 모토가 그거였다. 공부 열심히 안 하는 애들도 있어야 공부 잘하는 애들이 덜 힘들다. 우린 세상에 보탬이 되는 존재였다.
    아줌마가 가시기 무섭게 우린 문을 따고 들어갔다.
    약간 어수선하긴 해도 진열대도 그대로 있고 문구들도 꽤 남아 있었다.
    "우리가 팔자!"
    건우가 눈을 반짝였다.
    "안 돼!"
    태영이와 내가 입을 모았다. 건우는 벌레 오타쿠였다. 사마귀, 산바퀴, 거미 등 약 40종의 벌레를 키웠다. 40종! 솔직히 건우 방의 벌레들이 한꺼번에 탈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진짜 궁금했다. 건우는 벌레 키우는 유튜브를 운영하고 동호회 형들과 채집도 갔다. 희귀종은 온라인으로 거래도 했다. 돈이 꽤 드는 모양이었다.
    "다른 애들은 몰라야 돼. 일주일 동안 우리 아지트란 말야."
    태영이 말에 나도 완전 동의했다.
    아줌마가 카운터로 쓰던 책상이랑 의자가 그대로 있었다. 셋이서 폰게임 하기 딱이었다. 삼구짜리 콘센트를 가리키며 건우가 씩 웃었다. 이 순간만큼은 전교 일등도 부럽지 않았다. 나는 간이의자가 더 있나 문방구 안쪽 내실로 가보았다. 아줌마가 가끔 거기서 커피를 타 와서 책상에 앉아 마시던 게 기억났다. 싱크대 따위가 있고 커튼을 쳐서 구분한 작은 공간일 뿐이지만.
    "야, 의자 두 개 더 있어!"
    건우는 욕으로 기쁨을 표현한 다음 집에 가서 교복 갈아입고 오겠다고 했다.
    "나두. 마지막 시간 체육해서 땀 나. 이준이 너는?"
    "난 그냥 있을래."
    내가 말했다. 나는 최대한 동선을 아끼며 사는 편이었다.
    "모노폴리도 챙겨와!"
    두 녀석이 나가고 재잘대는 소리가 차츰 멀어졌다. 나는 주로 듣는 편인데 쟤들은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수다가 끊이질 않았다.
    이제 조용해졌다……. 나는 책상에 엎드려 멍 때렸다.
    원래 아무도 없는 빈집에 있으면 안 들리던 소리도 크게 들리는 법이다.
    내실 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났다. 소리라기보다는 진동이라 해야 되나.
    귀찮은 마음과 궁금한 마음이 싸우다가 궁금한 마음이 이겨서 내실로 갔다.
    벽 쪽에 사다리가 붙어 있고 천장에 네모난 입구가 뚫려 있었다. 다락방인 모양이었다. 희미한 진동은 거기서 전해졌다. 둔한 나도 좀 이상하다 싶게 환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사다리를 밟고 올라갔다.

 

 

 

 

첫 번째 방문

 

    소년은 리-다비트 구의 바닥에서 솟아났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스쿠버다이버처럼.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상반신만 석상처럼 실험실 바닥에 얹혀 있었다.

 

    그 구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다.
    완벽하게 동그란 구름처럼 부드럽고 촉촉하고 살아 있었다.
    천장이 높고 아주 큰 방이었다. 그 안에 구가 있고 구 안에 내가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문방구는 오백 밀리 우유갑처럼 생긴 이층 건물의 1층에 있고 2층은 미용실이었다. 다락방이 이렇게 높고 건물 면적보다 훨씬 넓다는 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밑을 보았다. 벽사다리를 밟고 선 튼실한 내 다리가 보였다. 때 묻은 파란색 리놀륨 바닥도.
    내 다리는 문방구 사다리를 밟고 있고, 내 눈은 절대 가능하지 않은 공간을 보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였다.
    나는 그냥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방을 구경했다.
    구를 에워싸고 복잡하게 생긴 기계들이 잔뜩 있었다. 가운데 빈 공간엔 패치워크 커버를 씌운 소파와 체리색 안락의자가 있었다. 번쩍거리는 기계들과 전혀 안 어울리는 촌스러움이 생뚱맞았다.
    더 생뚱맞은 건 그 소파에 어떤 여자가 앉아 있는 거였다!
    잠긴 문방구를 내 손으로 열고 들어왔는데 사람이 있다니. 깜짝 놀랐는데 그 사람은 나보다 더 놀란 듯했다. 주거침입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설명할 길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혼나는 날이 그냥 넘어가는 날보다 많은 중학생의 본능이 붙들리기 전에 달아나라고 경고했다. 내가 주춤주춤 사다리를 다시 내려가는데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바닥에 뛰어내리는데 그 사람의 절박한 외침이 들렸다.

 

    안 돼! 가지 마!
    마고는 소리쳤다.
    실내화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마고는 리-다비트 구를 향해 달려갔다.
    실험실의 단단한 바닥이 맨발에 닿았다. 소년을 실험실에 들인 겹친 차원은 마고의 눈엔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마고는 소년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손바닥으로 바닥을 쓰다듬고 두드렸다.
    얼마나 기다려 온 순간이었던가. 제발 돌아와. 제발.

    나는 돌아온 친구들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혼자 비밀을 간직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왠지 말하면 안 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누나를 부축하고 나왔다.
    "준아. 누나 병원 좀 다녀올게."
    "엄마, 회사에서 일찍 온 거야?"
    "응."
    누나 얼굴빛이 많이 안 좋았다.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절뚝거렸다. 나는 더럭 겁이 났다. 퇴근한 아빠가 저녁 준비를 해두고, 우리 둘은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며 묵묵히 엄마와 누나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밖이 완전히 어두워져서야 엄마와 누나가 돌아왔다. 아빠는 거실 불을 켜고 주방에 가서 음식을 데우고 상을 차렸다. 식탁 누나 자리에 누나 저녁은 따로 차려졌다. 먹을 수 없는 게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많아서다. 오자마자 침대로 가서 잠들어버린 누나를 깨우는 건 내 몫이었다.
    "고름이 꽉 차서 딱딱하다고. 주삿바늘로 빼내려고 했는데 고름 조직이 벌집 같아서 다 빼낼 수가 없대. 그래서 그냥 수술해 달랬어. 근육절개 조금 했지만…… 고름 빼내고 봉합까지 시간도 많이 안 걸렸어. 그래도 다행이야."
    식탁에서 엄마와 아빠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누나는 남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처럼 묵묵히 젓가락질만 했다.
    "좀 더 먹어."
    "배 안 고파."
    "어떻게 배가 안 고파. 좀만 더 먹어."
    "아, 싫어. 거지같아."
    엄마는 말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누나는 가만히 있더니 젓가락으로 브로콜리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고마워." 엄마가 누나 손등을 토닥였다. "오늘은 일찍 자."
    "안 돼. 중간고사 며칠 남았다고."
    "지유야. 너 요즘 계속 새벽 2시까지 안 자고…… 아픈 것도 그래서."
    "어떡하라고. 시험인데."
    "그건 아는데……."
    엄마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누나는 전교 1등이었다. 어릴 때 누나는 나랑도 잘 놀아 주고 운동도 잘했다. 어리버리한 나를 괴롭히는 녀석이 있으면 찾아가 혼내 주기도 했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정말 공부만 했다. 누나에겐 목표가 있으니까.
    "누나, 럭키문방구 문 닫았다?"
    누나가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 어쩌라고?"
    누나는 시간 아깝다고 필요한 게 있으면 럭키문방구에 가서 샀다. 어쩌라고, 라니 좀 너무하다. 하긴 아파서 느닷없이 수술까지 받았으니 이해한다.
    건강하던 누나에게 병이란 녀석도 그렇게 느닷없이 찾아왔었다.

 

    리-다비트 구는 생겨난다. 그리고 사라진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시간여행의 이미지 하면 웜홀이나 타임머신을 떠올려 왔다. 하지만 리-다비트 구는 빈틈없이 얽히고 쌓인 확률적 시공이 겹친 차원이고 구의 모양을 하고 있다.
    리-다비트 구를 예측한 것은 부부이자 이론물리학자인 리와 다비트이다. 둘 중 더 탁월한 쪽이 리였고 학계에선 둘을 하나로 묶어 부른다.

 

 

 

 

두 번째 방문

 

    이틀 뒤에 아문 자리에서 다시 고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빠한테 전화하는 엄마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우리 지유 어떡해. 뭔가 잘못됐나 봐."
    엄마는 누나 학교에 전화 걸어 결석을 통보하고 누나가 다니는 대학병원에 전화해 입원 예약을 했다. 원래 당일 입원은 안 되지만 누나는 예외였다.
    "엄마, 입원 안 하면 안 돼? 5일 뒤가 시험인데……."
    엄마는 입을 꽉 다물고 욕실과 안방과 부엌을 빠른 속도로 누볐다.
    "그럼, 시험 치고 나서 입원하면 안 돼? 동네병원 가서 고름만 짜내고……."
    누나는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엄마와 누나가 병원으로 떠나고 텅 빈 집.
    기운이 쭉 빠지고 배가 고팠다. 돌아보니 식탁에는 물병밖에 없었다. 시계를 보니 9시. 무섭고 정신없어 시간 가는 줄도 몰랐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담임 선생님께 전화하고, 나는 학교에 가는 대신 럭키문방구로 갔다.

 

    "마고, 여긴 내가 지킬 테니 가서 좀 쉬어요. 당신은 안드로이드가 아니에요."
    맥컬리 교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맥. 차라리 제가 안드로이드였음 좋겠어요."
    마고가 지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제가 리 박사를 처음 만난 게 이십 년 전이에요, 맥. 우리가 리-다비트 구를 이만큼 키우는데 성공한 게 벌써 사 년 전이고요. 그런데 우린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틀 동안 자지 못해 마고의 입가에 주름이 생겼다.
    "그 아인 왔는데 우린 왜 가지 못하는 거죠?"

 

    다락방 아래 서니 갓 구운 빵 냄새와 커피 냄새가 났다.
    사다리를 올라가니 역시 그날과 똑같은 방에, 이번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처음 올라온 날 만났던 엄마 나이 또래의 동양인 여자고 다른 사람은 은빛 곱슬머리에 키가 작은 서양인 할아버지였다.
    둘 다 흰 가운 안에 생뚱맞은 분홍 스웨터를 입었다. 둘은 소파와 안락의자에 나눠 앉아 빵과 커피를 먹고 있다가 나를 보았다.
    "오, 얘야, 잠깐만!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발 가지 말아라."
    나는 갈 생각이 없다는 걸 보여주려고 구 밖으로 걸어 나갔다. 두 사람은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여기서 중학생은 메두사 같은 존재인가 보았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여자였다. 커피 잔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나에게 다가왔다. 우리를 탈출한 표범과 마주친 사육사 같았다. 여기서 중학생은 메두사에 표범 같은 존재인 모양이었다.
    "안녕! 다시 와줘서 정말정말 고맙다. 네 이름이 뭐니? 난 마고 라자물리 교수야. 저분은 맥컬리 워턴 교수님이고. 마고와 맥이라 부르렴."
    "안녕하세요.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전 이준이라고 해요."
    내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마고 교수님이 환하게 웃었다. 지나치게 행복해 보였다.
    "네가 리-다비트 구에 나타났을 때 실험실 카메라가 너를 찍었거든. 다각도로 찍은 그 영상을 분석해서 네가 사는 시대와 나라를 분석해 냈단다. 네가 입은 옷이 교복이라 특정하기가 좀 더 쉬웠어. 네가 다시 올까 봐 한국어를 이틀 동안 마스터했단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한국말을 이틀 만에 배우셨다고요? 아주 잘하시는데."
    "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소프트웨어를 깔았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마고 교수님이라는 분이 들고 있는 빵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저, 빵 좀 주실 수 있나요? 너무 배고파서요."
    마고 교수님이 또다시 환하게 웃었다. 내가 빵을 먹겠다 했다고 저렇게 행복해 하다니 보편인류애가 넘치는 분인지 중학생을 난생처음 보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물론이지! 진심으로 환영한다. 맥, 들으셨죠? 어서 그 빵을 내놔요!"

 

    자연에서 리-다비트 구는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긴 세월, 리-다비트 구의 지름을 확장하고 수명을 연장하는 노력을 해왔으며 서로 다른 시공 차원에서 온 물질이 구 안에서 섞이는 현상도 밝혀냈다.

 

    나는 마고 교수님이 이끄는 대로 소파로 가 앉았고 빵을 공손히 받아먹었다.
    "감사합니다. 아침을 못 먹었거든요. 밑에서부터 빵 냄새가 솔솔 나지 뭐예요."
    "오, 맥! 들으셨어요? 빵 냄새를 맡았대요! 빵 냄새를요!"
    마고가 맥 교수를 끌어안았다. 하, 이 사람들 진짜 뭐지.
    "그리고 또? 또 다른 건?"
    "네? 아 저…… 음, 밝았어요."
    "오, 맥! 들으셨어요? 빛을 봤대요."
    마고 교수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맥 교수님이 두툼한 손으로 마고 교수님의 손등을 토닥였다.
    "이게 꿈은 아니죠? 맥, 우리 리-다비트 구를 통해 과거에서 사람이 왔다고요. 빛과 냄새 입자가 그쪽으로 건너갔고요."
    마고 교수님이 눈물을 닦으며 조용히 말했다.
    "역사적인 날이에요. 우리가 해냈어요."

 

    경쟁자들의 견제와 염탐을 따돌리고 마고과 맥 팀은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 인간이 통과할 정도의 지름에 평균수명도 일주일에서 열흘이나 되는 리-다비트 구를 거듭 만드는 데 (정확히 말하면 부풀리는데) 성공한 것이다. 인간을 과거 또는 미래나 먼 우주로 이동시키는 것, 과학자들이 리-다비트 구를 연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였다.
    그게 약 4년 전이었다. 그 뒤로 마고와 맥은 수없이, 점점 더 크게 리-다비트 구를 생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구들은 갑자기 침묵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이쪽 세계의 물질도 저쪽 세계의 물질도 오가거나 섞이지 않았다.

 

 

 

 

시간은 어떤 모양일까

 

    "그런데 왜 아침을 못 먹었니? 거기도 식량사정이 좋지 않니?"
    거기도? 여기 식량사정이 나쁘다는 뜻일까?
    "아, 아니요. 누나가 아파서 병원에 가는 바람에……."
    마고 교수님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갑자기 심술이 났다. 이만 하면 많이 참았다.
    "저는 대답만 해야 돼요? 저도 질문하면 안 돼요? 과거에서 온 인간이란 게 저예요? 그럼 두 분은 미래 사람이고요? 농담이시죠? 미래로 가려면 타임머신을 타야죠.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날든지, 웜홀을 통과하든지."
    "얘야, 얘야! 잠깐만!"
    마고 교수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영화를 많이 본 모양이구나."
    나는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그 정도는 다 알아요."
    "그건 제대로 아는 게 아니란다. 맥, 이준의 말이 맞아요. 우리가 얘한테 협조를 부탁하려면 얘도 우리 일의 의미에 대해 알아야 해요."
    맥 교수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우리가 만든 매뉴얼에 따르면 과거인에게 현재의 정보를 제공하는 일은 금지하고 있어요."
    "왜요? 저한텐 궁금한 것투성이면서요?"
    "그건 네가 우리의 과거고, 우리가 너의 미래기 때문이야. 네가 미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돌아가서 네 현재가 변하면 우리 현재도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지. 우린 의도치 않은 변화를 막을 책임이 있단다. 우리가 알고 싶은 건 리-다비트 구와 관련된 것뿐이야. 네가 어떻게 리-다비트 구를 통해 과거에서 미래로 왔는지. 우리가 어떻게 해야 너처럼 과거나 미래로 갈 수 있는지. 그 때문에 너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고."
    이곳이 정말 미래라고? 물론 모든 게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의심 가득한 눈으로 문을 보자 맥 교수님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절대 금지란다. 넌 여기서 우리만 만나야 해. 절대 이 실험실 밖으로 나갈 수 없단다. 이해해 다오. 얘야."
    난 어른들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나도 과학책 좀 읽은 중학생인데 이해가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전 도저히 못 믿겠어요. 시간이 흘러야 미래에 가닿는 거잖아요. 하지만 저는 미래를 만날 수 없다고요. 제가 아무리 빨리 따라가도 미래는 늘 저보다 앞에 있잖아요."
    맥 교수님은 토론을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즐거운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연필과 수첩을 꺼내 드신 것이다.
    "좋은 질문이다. 과학자들도 늘 제대로 질문하려고 애쓴단다."
    맥 교수님은 연필로 수첩에 선을 하나 그으셨다.
    "우리는 미래와의 경주에서 늘 질 수밖에 없지. 시간이 일직선이라면. 아무리 달려가도 늘 미래는 우리 앞에 있을 테니까."
    맥 교수님은 이번엔 종이에다 도넛 모양을 그리셨다.
    "시간이 이렇게 도넛처럼 생겼다면 어떻겠니?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이며 어디가 원인이고 어디가 결과인지 정확히 말할 수 있을까?"
    맥 교수님은 도넛 옆에 다시 둥근 공을 그리셨다.
    "공 위에 점을 찍고 출발해 공을 따라 돈다면 어떨까?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길이 무수히 많겠지. 시간이 그런 모양이라면 어떻겠니."
    맥 교수님은 종이를 구겨 휴지통에 던지셨다.
    "이 얘긴 잊어라, 얘야. 보이는 대로 보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단다. 실재 시공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이상하단다."
    "어떻게 아세요? 보셨어요……?"
    맥 교수님은 즐겁다는 듯 미소 지으셨다.
    "보지 않고도 알아내는 것이 이론물리학이란다."

 

    닫힌 시공들이 유기체의 내장기관처럼 빈틈없이 서로 겹쳐 있다고 하자. 사건들은 우발적으로 상호작용하며 닫힌 시공선에 상처를 낸다. 사건의 확률적 불안정성이 임계상태에 이르면, 쉽게 말해 일어날 확률이 희박한 사건이 거듭 일어나 우주의 안정을 위협하면 장과 장 사이에 누공이 생기는 것처럼 차원의 틈새가 벌어지고 거품처럼 리-다비트 구가 태어난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누나가 입원한 병원으로 갔다. 엄마한텐 학교 마치자마자 왔다고 거짓말했다. 누나는 잠들어 있었다. 아침에 입원할 때보다 훨씬 얼굴빛이 나빴다. 항생제와 진통제가 든 혈관주사 바늘이 아파 보였다. 당직 의사 선생님이 오자 엄마는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 많이 아파해요. 수술해 주실 줄 알고 왔는데 항생제만 맞는 걸 지켜보자니 답답합니다.
    – 어머니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외과, 내과 협진 회의에서 결정한 거예요. 일단 칼을 대기 전에 내과적으로 할 수 있는 걸 다해 보는 게 원칙입니다. 특히 누공은 수술을 쉽게 안 해줘요. 이 병 환자들은 봉합 상처가 잘 아물지 않고 일단 원인이 내부에 있으니까요. 아이의 자연치유력을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 선생님, 아이 시험이 닷새밖에 안 남았어요. 닷새 만에 아물 리가 없어요. 아이 상처 보지도 않으셨잖아요. 내과 병동이라고 피고름이 나오는데 상처 소독조차 안 해준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요. 외과 쪽에서 와서 보기라도 해야 맞는 거 아닙니까.
    나는 보조침대에 걸터앉았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으니 누나는 더 작아 보였다. 누나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누나. 많이 아파?"
    "당연하지. 바보야. 너가 나라면 엉엉 울었을걸."
    "……."
    "……. 없어졌어?"
    "뭐라고?"
    "정말…… 없어졌어, 럭키문방구?"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는 가만히 있더니 한숨을 쉬었다.
    "너무 아파. 지친다……."
    누나가 그런 말 하는 거 처음 들었다. 나는 슬프고 겁이 났다.
    누나는 눈을 감고 돌아누웠다.

 

 

 

 

선택된 사람

 

    친구들은 이틀이 지나자 럭키문방구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덕분에 나는 럭키문방구를 독차지할 수 있었다. 녀석들에겐 누나 병원에 간다고 해두었다. 나는 학교를 마치면 아이들이 다니지 않는 길로 돌아서 문방구로 갔다.
    마고와 맥이 알록달록한 패치워크 소파와 체리색 안락의자에 앉아 나를 반갑게 맞곤 했다. 그곳은 미래니까, 현재의 슬픔이나 근심은 따라오지 못했다. 우리는 수다를 떨고 실험도 했다.
    사실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오리무중이었다.
    내가 어떻게 리-다비트 구를 통과해 왔는가?
    어떻게 하면 미래 사람들도 리-다비트 구를 통과해 과거나 미래로 갈 수 있는가?
    마고와 맥은 서로 반대 입장에 서서 논리를 전개해 나가곤 했다.
    두 사람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우주를 보았다. 우주의 의지는 단일하지 않다는 거였다.
    맥은 우주는 스스로를 고쳐 쓰려 하는데 내가 '선택된 자'랬다. 선택의 기준은 닫힌 시공의 인과율과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고는 리-다비트 구가 사건의 확률적 불안정성에 의해 태어나기 때문에 연대방어기제가 작동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힘은 리-다비트 구의 크기에 비례해 커진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마고와 맥이 사람이 통과할 만큼 큰 리-다비트 구를 만들자 원래의 자유도가 급격히 감소하여 아예 입을 봉해버린 거라는 논리였다.
    "이준이 있는 곳에서 리-다비트 구가 위장되어 있는 것이 그 증거예요. 공사 시작 날짜도 리-다비트 구의 수명과 같잖아요? 들키지 않고 자연소멸하길 바라는 거예요."
    나도 마고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내가 럭키문방구에 들어가고 다락방을 발견한 건 정말 우연이었다.
    맥은 특유의 점잖고 느긋한 말투로 우연은 우리 우주가 문제를 풀어 가는 방식이라고 했다.
    내가 맥의 주장처럼 선택된 자라면 리-다비트 구가 자연소멸하기 전에 그 증거를 보여줘야만 했다.
    실험실에서 보낸 첫날, 마고는 돌아가려는 나에게 연필 한 자루를 주었다. 나는 선물인 줄 알고 좋아했다.
    "미안. 우린 너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는 걸 알잖아. 이건 실험이야. 내일 다시 가져와야 해."
    다음날 연필을 되가져가자 마고는 기뻐했다. 그러곤 각종 분석기로 연필을 검사했다. 결론은 '연필 무사함'이었다. 연필은 리-다비트 구를 통과해 과거로 갔다가 건강하게 돌아왔다. 어제의 연필 그대로였다!
    다음은 조그만 식물 화분이었다. 우리 세계엔 없는 미래의 개량종이라고 했다. 아주 나쁜 환경에도 잘 자라고 땅에 옮겨 심으면 열매도 많이 달린댔다.
    화분 역시 내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무사히 돌아왔고 분석 결과도 좋았다. 심지어 조금 자라 있기까지 했다. 알고 보니 내가 운반한 건 식물만이 아니었다. 화분 흙속의 미생물들 또한 면밀한 분석을 거쳐 '상태 좋음' 판결을 받았다.
    마고는 리-다비트 구를 통한 시공이동을 꿈꾸는 미래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실험 결과라고 했다.
    마고는 나도 꼼꼼히 검사했다. 결과는 늘 '상태 좋음'이었다. 나도 어제의 나 그대로였다! 늘 발전과 향상을 강요받는 중학생으로서 어제의 나이기만 하면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마고와 맥이 좋았다.
    열심히 일하는 마고를 보니 왠지 미안했다. 내가 아무리 뒷문으로 옆집 드나들 듯 한다 해서 미래나 과거를 오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연필과 화분이나 나르고 있으니…….
    "마고, 미안해요. 큰 도움이 못 되어서요. 어떻게 제가 리-다비트 구를 통과해 시간 차원을 오가는지도 아직 모르고……."
    마고는 분석기에서 눈을 들더니 나를 꼭 안아 주었다.
    "그걸 알아내는 건 우리 과학자 몫이고 이제부터 시작인걸. 지난 몇 년 동안 힘든 나날을 보냈어. 좌절과 실망의 연속이었지. 물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정말 오랜만에 내가 과학자로서 어떤 꿈을 품었던가를 다시 느꼈어. 너는 우리의 영웅이야."
    코끝이 찡했다.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 스스로에게조차 해준 적 없는 말이지만
    그래, 나는 황금양털 대신 연필과 화분을 들고 미래로 가는 이아손이다.

 

 

 

 

마지막 방문

 

    내일은 누나의 중간고사 시험이 시작되는 날이고 럭키문방구 공사가 시작되는 날이다.
    누나는 아직 퇴원하지 못했다. 엄마와 누나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 지 엿새밖에 안 되는데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다. 보고 싶고 걱정된다.
    나는 팬에 기름을 두르고 달걀 두 개를 깨뜨렸다. 맥과 마고에게 햄에그 토스트를 해줄 작정이었다. 늘 자기들 몫의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나눠준 데 대한 답례였다.
    두 사람은 나를 실험실 밖으로 못 나가게 했지만 나도 눈치란 게 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맥과 마고가 사는 세상은 썩 형편이 좋은 것 같지 않았다. 먼 미래에 우리가 살아갈 세상이기도 하니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실험실에 있는 기계들과 실험도구는 훌륭했다. 후원금은 몽땅 연구에만 쓰는 게 분명했다. 좋은 사람이고 훌륭한 과학자인 맥과 마고.
    미래인들 모두 마고와 맥 같을까?
    그럴 리가 없겠지. 학년이 바뀔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어딜 가나 이런저런 사람의 비율은 비슷비슷한 거 같다.
    소파에 앉아 쉬다가 내가 잠들면 맥과 마고는 무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깼지만 근심어린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기가 미안해 자는 척하곤 했다.
    "정치인들을 설득하려면 리-다비트 구를 오래 열어 둘 방법을 찾아야 해요. 과거에서 되돌아오지 못할 확률이 이렇게 높아서야……."
    "정치권도 곧 탈주론자들이 장악할 거라는 말이 있어요, 마고. 수정금지법안이라도 통과되는 날엔……."
    "안 돼요! 그것만은 막아야 돼요. 이기주의자들."
    "수정론자들도 차츰 힘을 모으고 있으니 다행한 일이오."
    "어깨가 무거워요, 맥. 이준 얘기를 정리하면서 떠오른 아이디어인데, 과거에서 리-다비트 구는 숨어 있고, 자연 법칙과 사회현상에 적합한 범위 안에서 소멸한다면, 우리가 과거로 가 구의 수명을 연장할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위험을 무릅쓸 선발대가 필요하겠네요."
    "저는 언제든지 각오가 돼 있어요."
    "그거야 나도 그렇지만. 마고, 잊지 말아요. 우린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이 남았으니."

 

    미래에, 리-다비트 구의 연구개발을 둘러싸고 학계는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미래를 과거형으로 서술하는 게 이상하지만 일어난 일이니까.)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고, 세상은 아주 살기 나쁜 곳이 된 것 같다. 모두에겐 아니겠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겐 말이다.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도 모른다. 지구 전체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간여행의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오자, 먼 미래 세계로 탈주하려는 사람들과 과거로 가서 역사를 수정하려는 사람들(시간여행이 현실화될 때까지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도록 냉동수면에 들어간 사람들까지!)이 나타났다.
    미래로 탈주하는 것은 보다 안전한 방법이었다. 그들은 미래로 가서 돌아오지 않아도 되었다.
    미래의 인류 모두가 리-다비트 구를 통해 미래로 갈 수는 없다는 게 문제였다. 리-다비트 구의 평균지름이 아무리 커진들, 평균수명이 아무리 연장된들 전 인류가 탈출할 리-다비트 구를 만들진 못할 것이다. 미래사회의 이민법이나 시공 차원의 에너지 보존 법칙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말이다.
    과거로 가서 역사를 수정하는 방법은 훨씬 어려웠다. 우선 리-다비트 구는 sf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타임머신처럼 정교하지 않았다. 과학자들이 열심히 연구하고 있지만 아직은 시간을 특정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리-다비트 구의 수명이 짧으므로 과거로 간 사람들이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되돌아올 길이 사라진다.
    그래도 신념 있는 이들이 과거로 가서 역사를 바꾸는 데 성공한다면 그 혜택은 인류뿐만 아니라 지구 전체의 자연과 생명체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기득권을 쥔 자들은 여전히 탈주를 선호했다.
    과거를 바꾸었을 때, 지금 현재 그들이 누리는 것을 잃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예 현재의 자신이 아닐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건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나빠진 세계 안에서 편을 나눠 대립했다. 그게 틈틈이 훔쳐들은 것을 토대로 내가 짜맞춘 이야기다.
    물론 나는 맥과 마고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달걀프라이와 베이컨을 얹은 토스트가 완성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블루베리 잼도 듬뿍 발랐다. 냄새가 그럴듯했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문방구 골목으로 들어서자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종이가방이 젖을까 봐 문방구로 마구 달렸다.
    내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익숙했다. 문득 이 익숙함도 오늘이 마지막이란 생각이 들자 슬픔이 밀려왔다. 럭키문방구가 다른 가게로 바뀌고 다락방도 사라지겠지. 맥과 마고는 날마다 실험실에 있겠지만, 만날 길이 없어진다. 다시는 보지 못한다.
    "제가 뭘 가져왔게요!"
    나는 씩씩하게 인사했다. 맥과 마고는 다른 날과 똑같이 반갑게 맞았다.
    "오, 토스트잖아! 맥, 진짜 달걀프라이를 얹은 토스트예요."
    마고가 토스트를 꺼내 맥에게 건넸다. 둘 다 진심으로 기뻐해 줘서 어깨가 으쓱했다.
    "좀 젖었네?"
    "갑자기 비가 와서요."
    "오, 비가 온다고!"
    마고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두 사람이 토스트를 맛있게 먹는 동안 나는 핸드폰에 담아온 노래를 들려주었다. 인터넷이나 통화는 안 됐지만, 다운로드한 노래를 듣는 건 가능했다.
    이젠 새롭게 할 이야기가 없었다. 두 사람은 나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다 알아냈다. 벌써 논문 초고 하나쯤 썼을지도 모른다. 노벨상을 받은 논문들 가운덴 두세 페이지짜리도 있다는 건 과학을 좋아하는 누나 덕분에 나도 안다. 누나 덕분에 나도 재미있는 과학책을 많이 읽었다. 이제 생각났다. 누나는 가끔 필요한 책을 럭키문방구 아줌마에게 부탁하곤 했다. 공부하느라 한시도 아까운 누나는 버스 한두 정거장 타고 다이소나 큰 서점에 가는 건 물론이고, 집중력 깨진다고 인터넷 쇼핑조차 안 했다. 럭키문방구는 문제집과 아이돌 잡지도 팔았기 때문에 누나가 부탁하는 책도 함께 주문해 주셨다. 이제 생각난다. 두 사람은 마음이 좀 통했었나 보다. 누나가 럭키문방구 아줌마와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누나는 즐겁게 웃고 있었다.
    "이거 제가 좋아하는 그룹인데 어때요? 거기도 케이팝 있어요? 아, 그것도 대답해 주면 안 되죠?"
    마고가 토스트를 입에 한가득 물고 미안하단 뜻으로 내 손등을 쓰다듬었다.
    "너무해요, 정말……."
    내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쳤다.
    "미래에 대해 뭘 좀 안들, 제가 뭘 하겠어요? 저는 마고랑 맥한테 미주알고주알 다 말했는데, 전 마고랑 맥에 대해 암것도 몰라요. 오늘 지나면 이제 못 보는데……."
    맥은 그래 봤자 안 통할 거 같아서, 마고를 바라보았다.
    "제가 알아봤자 써먹을 데도 없지만 마고만 아는 그런 추억 같은 거 딱 하나만 말해 주세요. 이별 선물로요. 저도 기념으로 간직할 게 하나는 있어야 하잖아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말한들 누가 믿겠어요."
    마고의 눈빛이 흔들렸다.
    "제발요. 제가 무슨 로또 번호를 알려달라는 것도 아니잖아요……."
    마고는 한숨을 쉬고 맥을 바라보았다. 맥이 양팔을 벌려 보였다.
    "얘 말이 맞아요. 며칠 동안 누구에게 알리지도 않고 정말 잘해 줬어요. 이렇게 착하고 입이 무겁고 멋진 아인 처음 봤어요.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상이라도 주고 싶다고요."
    괜히 울컥해서 목이 따끔거렸다. 마고를 어떻게 잊을까.
    "알겠다. 네 소원 들어줄게. 하지만 듣고 실망하지 마. 정말 들어 봤자 아무 쓸모없는 내 어린 시절 추억 한 자락이니까."
    "실망 안 해요!"
    마고가 한 손을 살포시 가운의 앞주머니에 갖다 댔다.
    "여기 사진 한 장이 있단다. 내가 지금의 내가 될 수 있게 해준 분이지. 십대 때 단 한 번의 만남이지만 나는 그 기억을 평생 간직했단다."
    마고가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냈다. 한눈에 봐도 엄청 오래돼 보이는 사진이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과학자의 출판기념 사인회 때 받은 거란다. 서점에서 과학자의 사진을 인쇄해서 사인지로 만들었지 뭐니. 얼마나 기뻤던지. 내 보물 상자에 내내 들어 있었는데 요 몇 년 동안 이렇게 앞주머니에 넣고 다녔어. 힘들 때마다 꺼내 보며 그날 나눴던 대화를 곱씹곤 했지."
    "무슨 대화였는데요?"
    마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때…… 내 유학생활은 하루하루가 고행이었어. 세상은 긴 세월 동안 오로지 나빠지기만 했고, 이젠 더 나빠질 게 없다 싶으면 다음날 그게 아니란 걸 보여줬지. 고국에선 더 이상 아무것도 오지 않았고 주위는 살벌했어. 모든 게 퇴행했어. 나는 학업을 계속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어. 날마다 울었지. 하지만 공부가 너무 좋았어. 꼭 물리학자가 되고 싶었거든. 그날 내가 그분에게 물었지."
    마고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이런 제가 공부를 계속해도 될까요? 제가 당신처럼 훌륭한 과학자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분이 사인을 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어. 그분이 내 손을 힘주어 쥐며 말하더군. 이름이 뭐죠? 마고? 마고, 할 수 있고말고요. 돌아가 공부하세요. 언젠가 과학자가 된 당신을 만나면 내 동료가 되어 줘서 고맙다고 인사할게요."
    마고가 사진을 쓰다듬었다.
    "그분은 리-다비트 이론으로 남편과 함께 노벨상을 받았고, 내가 자신의 진정한 동료가 되기 전에 돌아가셨단다. 하지만 나는 내가 자랑스러워. 그분의 업적을 이어 가고 있으니까. 사진 봐도 돼. 그분은 처음 사인지를 구겨버리곤 새 사인지에 다시 사인을 해주셨단다. 당신에겐 내 소녀 때 이름을 써줄게요. 기억해 줘요. 그렇게 말씀하셨지. 사진 보여줄게. 여기 사인이 보이지?"
    마고가 내민 사진을 보았다. 은발에 몸집이 자그만 노학자가 서재에 서 있었다.
    이지유.
    사진에는 누나의 이름 석 자가 꾹꾹 눌러 써져 있었다.

 

시간의 비밀

 

    비를 맞으며 집에 돌아오는데 엄마가 전화를 걸었다.
    "이준, 왜 그렇게 전화를 안 받아. 비 오는데 밖에 있어?"
    "어, 엄마. 죄송해요. 지금 집 가고 있어요."
    "엄마도 누나랑 집 갈 거야. 저녁 같이 먹자."
    "정말요? 누나 다 나았어?"
    "아니."
    "그럼……."
    "누공이 막힌 건 아니지만…… 항생제로 급한 건 막았어. 그래서 일단 시험은 치기로 하고 퇴원하는 거야."
    엄마가 괴로운 듯 한숨을 쉬었다.
    "엄마가 누나한테 휴학 얘기 해봤는데…… 누나가 좀 생각해 보더니 안 하겠다고 했어. 자기 병이 낫는 병이면, 이번만 아프고 안 아픈 거면 휴학도 생각해 보겠는데 아니지 않녜. 평생 함께 가야 하는 병인데 아플 때마다 주저앉을 순 없다고……."
    "엄마, 나도 누나 말이 맞는 거 같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그러니……. 엄만 모르겠다. 잘 모르겠어."
    "엄마, 누나가 집에 와서 좋아요. 같이 저녁 먹으면서 더 얘기해 봐요."
    "……그래. 같이 저녁 먹으며 얘기해 보자."
    "빨리 오세요."
    전화를 끊고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보이진 않지만 문방구가 저기에 있고, 문방구 다락방에는 분홍 스웨터를 입은 마고와 맥이 온 힘을 다해 시간을 연구하고 있다.
    집을 향해 걸으면서 나는 사진 속, 오래전 죽은, 미래의 누나를 생각했다.
    오래전 죽은, 미래의 나는, 그때에 어디 있었을까? 무얼 하고 있었을까?

 

    마고와 맥은 소파에 앉아 소멸해 가는 리-다비트 구를 지켜보았다.
    무수히 반복해 온 일이건만 견디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번엔 각별히 더 그랬다.
    마고는 온갖 상념을 꾹 누르고 보고서 초안을 작성하는 중이었다. 초안은 늘 연필로 쓰는 게 마고의 오랜 버릇이었다.
    "저는 장소가 리-다비트 구를 여는 데 중요한 열쇠이지 않나 생각 중이에요."
    "검증해 볼 가치가 있는 가설이라는 데 동의해요."
    맥이 고개를 끄덕이다 덧붙였다.
    "나는 우리 리-다비트 구가 열린 이유를 알 것도 같아요."
    마고가 조용히 말했다. "이지유가 우리를 도우려 동생을 보낸 걸까요."
    "……우리 우주는 우연과 무지 뒤에 숨어 문제를 풀어 가길 즐기는 건 분명해요."
    "의인법은 넣어 두세요." 마고가 짜증을 냈다.
    "진화니 연대방어기제니 우주의 의지니 다 과학자들의 안이한 화법이에요. 지긋지긋하다고요. 맥 교수님은 그래 우리 우주가 그렇게 온정적이라 보세요? 그 모든 일을 겪으시고도?"
    맥이 지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우린 포기하지 않잖아요."
    마고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습관처럼 앞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냈다.
    "이준이 누나가 병원에 있다고 한 말 기억나세요? 그땐 한 귀로 듣고 흘렸는데. 저는 리 박사님의 자서전을 읽었어요. 외우다시피 하는걸요. 거기 적힌 대로라면 지유는 지난해에 발병했어요. 지금 얼마나 힘들까요. 앞으로도 더 힘든 일들이 많을 거라는 건 알지만, 처음은 더 견디기 어렵잖아요."
    "그렇죠."
    마고는 이제 희미한 잔상만이 남은 리-다비트 구를 쓸쓸히 바라보았다. 벌써 이준이 보고싶었다. 사랑스러운 아이였는데.
    "이제 다신 못 보겠지요."
    맥의 얼굴에도 슬픔이 어렸다.
    "알지 않소. 지유의 가족은 모두……."
    "알아요. 가장 먼저 희생되었지요."
    마고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떤 아픔은 절대 무뎌지지 않는다.
    "리-다비트 구를 건너온 건 이준이었어요. 전 이준이 자신들의 미래를 구하러 왔다고 생각해요."
    마고는 이준이 준 마지막 선물을 생각했다.
    마고, 이리 와보세요.
    리-다비트 구로 들어간 이준이 천진하게 마고를 불렀다.
    제가 가져간 물건들 다 괜찮았잖아요. 마고도 괜찮을 거예요. 여기 지금 비가 오고 있어요. 같이 빗소리를 들어요.
    마고는 걸어가 결연히 이준이 내민 손을 잡았다.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첫발을 떼야 한다.
    촉촉한 구름 속에 들어온 거 같구나.
    마고가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고 이준에게 속삭였다.
    들어 보세요. 저 빗소리. 들리세요?
    마고는 귀를 기울였다.
    오래된 장소에서 나는 냄새가 먼저 훅 코로 들어오고, 들렸다.
    빗소리.

 

 

 

 

 

 

 

 

 

 

 

 

 

 

작가소개 / 배미주

2008년 『웅녀의 시간여행』(문학과지성사) 출간. 2010년 『싱커』로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 그밖에 『바람의 사자들』, 『림 로드』 등이 있다.

 

   《문장웹진 2019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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