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

[단편소설]

 

 

축복

 

 

기준영

 

 

 

    그녀가 아들 나이였을 때 일이다. 문고판 연애소설을 읽으며 사랑은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여자가 바다가 보이는 별장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면 남자는 밤낮으로 그녀를 그리워하며 바싹 말라가는 것.
    그가 아들 나이였을 때의 일이다. 아버지는 짐을 싸서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재혼했다. 형은 아버지를, 누나는 어머니를 따라갔지만, 그는 할머니와 시골에 남았다. 그는 이별이란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떠나간 것과 남겨진 것 사이에서 많은 질문을 꺼내놓지 않는 것.
    이제 그 날들로부터 걸어와 한 침대를 쓰는 그와 그녀는 여느 부부들처럼 서로에 대해서 어떤 부분은 너무 잘 알았고, 또 어떤 부분은 아예 몰랐다. 그들의 장단점을 조금씩 닮긴 했으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부모를 종종 놀라게 하는 외아들은 올해 열한 살이 됐다. 이름은 보경이었다.
    부부는 친척들과 왕래가 그다지 없는 편이었다. 명절이나 생일에 대가족이 모여 지나온 날들을 이야기하며 서로 덕담이라도 나누는 것이 바로 사는 일의 참된 면이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런 견지에서는 자기들의 인생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대수롭지 않게 고백할 사람들이었다. 그는 가족이 흩어진 즈음부터, 그녀는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으로 부모에게 큰 실망을 끼친 후로 점차 그렇게 되었다.
    금요일 밤 아홉 시를 넘긴 시각, 부부는 이튿날부터 일요일까지 눈이 내리겠다는 예보를 들으며 거실에 앉아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있었다. 내주 중으로 집안의 물건들을 대폭 정리해 공간 활용을 새로이 해볼 계획이었다. 새로 구입할 가전제품과 옷, 침구 세트, 처분해야 할 그릇과 화분, 기부할 만한 가구와 장난감 기타 등등.
    "자기 일요일에 코트 안에다 그거 입으면 좋겠어. 푸른 셔츠에 와인색 스웨터, 거기에다 회색 기모바지, 벨트는 새 걸로."
    그녀가 말했다.
    "눈 오면 차는 두고 가야겠네. 보경이는 마음 안 변할라나?"
    그가 중얼거리자 보경이 "아, 그럼요!" 하고 시원하게 대답을 하고 나서더니 제법 이런 카드를 들이밀었다.
    "그런데 은택이네 삼촌은 무주에 살잖아요?"
    그는 이 뜬금없는 질문에 뭔가가 걸려 있구나 싶으면서도 보경의 친구 은택이 도수 높은 안경을 쓴 녀석인지, 작은 키에 교정기를 낀 녀석인지 헷갈려서 아들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서 눈을 끔벅였을 뿐 무슨 꿍꿍이냐고 얼른 묻지를 못했다.
    "삼촌이 스키장에서 일한대요. 기회가 좋잖아요. 나도 은택이 따라 거기 놀러가고 싶어요."
    "알았어. 나중에,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부부는 다시 리스트를 살피며 거기에 1, 2, 3 표시를 해서 우선적으로 처리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세부 구분해뒀다. 보경은 아버지의 동의를 얼른 끌어내지 못한 걸 아쉬워하며 지난달에 사소한 거짓말을 들키는 바람에 어머니에게 혼쭐이 났던 걸 떠올렸다.
    "거짓말 다신 하지 마. 너 거기 소질 없어. 표정에 다 써있다고."
    보경은 엄마의 잔소리에 피곤해 했으면서도, 소질과 표정 운운한 그 지적은 너무 예리했다고, 여자들은 참 당해낼 수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보경은 요즘 여자들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래서 무주에 가면 은택의 삼촌뿐만 아니라 피겨 스케이팅 선수인 근사한 사촌누나도 만나보게 되리란 사실이 남몰래 비밀스러워졌다. 보경은 하품을 하는 척하면서 다음 기회를 만들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슬그머니 제 방으로 들어갔다.
    부부도 너무 늦지 않게 침대에 함께 들었다. 그녀는 잠자리에서 별 말이 없었다. 그래도 그는 그 무언에 대꾸하고 싶었다.
    "당신은 더 신경 쓰지 마. 모레 다녀와서 내가 다 자세히 말해줄 걸 뭐. 늘 고마워. 보경이도 대견해."
    그러고서 얼마 안 가 곯아 떨어져서는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았다. 쥐고 있던 끈을 놓아버리듯이, 미끄러지듯이, 까마득히 떨어져 내리듯이. 그녀는 그의 곁에서 픽 웃었다. "아이고, 이 사람아." 그러고서 등을 돌리고 얼마 안 있다 잠이 들었다.

 

    주말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과연 일요일 아침의 거리 풍경을 온통 새하얗게 만들어 놓았다. 그는 집안일을 도우며 간간히 창문 밖을 내다보았고, 눈이 더 올지, 길이 많이 미끄러울지를 가늠하려 했다. 그리고 점심식사를 마친 뒤에 옷을 갈아입고서 신발을 골라 신었다. 새 것을 신으려 준비해뒀지만, 결국 편히 오래 신던 것을 택했다. 보경도 평소에 즐겨 신던 운동화를 골랐다. 그녀는 별스럽게 배웅하려 들지는 않았다. 식탁에 앉아 다이어리에 뭔가를 적어놓으면서 "잘 다녀와" 했을 뿐이었다. 그는 나중에 아내가 평상시와 다름없는 태도, 지금과 비슷한 어투로 '어서 들어와', 하며 자기를 맞아줄 것이란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내가 다이어리에 단순하게 이렇게 정리하고 있을 듯했다. '남편이 보경이 데리고 자기 아버지 보러 간다.' 혹은 '보경이가 제 아빠랑 할아버지 보러 간다. 보경 아빠 벨트랑 구두 구입. 날씨는 눈이 펑펑.'
    그는 약속 시각보다 조금 이른 시각에 아들과 혜화역에 내렸다. 그가 우산을 펴들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근방에 도착했다고 하자, 아버지는 자신의 집이 아닌 그 맞은편의 붉은색 벽돌집 이층으로 오라고 했다. 거기가 양 여사의 집이라면서. 그는 형에게서 요사이 아버지가 육십 대의 여성분을 만나고 있는데 그 분이 다들 한 번 보고 싶어 한다더라, 아버지와 이웃이고 자기 남동생과 같이 산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무슨 풍문처럼 전해들은 바 있었다. 눈이 쏟아지는 휴일, 사귀는 남자의 자식을 맞이하러 제 집 대문을 열어젖히게 될 나이 지긋한 여성에 대해서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뭘 사가면 좋을라나?"
    그가 웅얼거리자 보경이 주변을 쓱 살피고는 "카드요." 하더니 손을 내밀었다. 그는 지갑채로 내줬다. 보경이 종종걸음을 쳐서 꽃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아들의 뒷모습을 눈으로 따르다가 천천히 그 꽃집 앞으로 다가가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경이 장미 한 다발을 들고 나와 그걸 쳐들고 흔들며 히죽 웃었다.
    "내 친구 새엄마는 장미꽃잎을 음식에도 뿌리고 욕조에도 뿌린대요."
    보경은 여자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지 제가 주워들은 정보들을 종알종알 풀어댔다. 그는 우산을 잠시 내려놓고 쭈그려 앉아 보경의 목도리를 매만져 여미면서 '정말 그랬대? 하고 장단을 맞추었다.
    "꽃은 아빠가 들고 갈게. 도착해서는 네가 잘 전해드려."
    보경이 그제야 "네."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보경에게서 꽃다발을 건네받아 안고는 우산을 챙겨들고 일어섰다.
    십 분쯤 걸어 붉은 벽돌집 앞에 도착했다. 그는 주변에 정차하고 있는 차들 중 알만한 차들이 있는지 둘러보았다. 형과 누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잠깐만요." 하는 저음의 여자 목소리가 인터폰에서 흘러나왔고 이어 대문이 열렸다.
    계단을 올라 2층에 거의 다다랐을 때 현관문이 열리며 양 여사가 나와 그들을 맞아주었다. 나이보다는 훨씬 젊어 보이는 인상이었고, 마른 체형에 광대가 도드라졌다. 양 여사가 손을 내밀자 그는 짧게 악수하고 제 찬 손을 빼냈다.
    "저희가 좀 일찍 왔나보네요."
    그는 보경을 먼저 안으로 들여보냈다. 보경이 양 여사에게 꽃다발을 건네자 양 여사가 활짝 웃음 지었다. 그는 우산을 접어 현관에 두고서 코트를 벗어들고는 양 여사가 안내해주는 대로 거실 창가 옆 소파에 아버지와 마주보며 앉았다. 그의 아버지가 양 여사를 그와 보경에게, 또 보경과 그를 양 여사에게 정식으로 소개했다.
    "경식이는 좀 아프다는구나."
    아버지의 말에 그는 "형은 그럼 오기 힘들겠네요."하고 반응했을 뿐 어디가 아픈 것인지 묻지 않았고, 아버지도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제가 시간을 이렇게 잡았는데, 하필 눈이 많이 와서 본의 아니게 미안합니다."
    양 여사가 깍듯이 예를 차리고는 꽃다발을 화병에 꽂아 그들 가까이에 있는 창문가에 두었다. 적당한 유리병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뒤적이지 않고 바로 화병을 꺼내온 걸로 봐서는 양 여사는 가끔 꽃꽂이를 하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양 여사가 차를 내오겠다며 주방으로 가자 보경이 그녀를 뒤따르며 뭐라고 말을 붙였다. 묻고 답하는 소리, 나지막이 웃는 소리. 그는 그 소리들에 신경을 쓰면서 자기 무릎을 일없이 주물럭거렸다.
    "몸은 좀 어떠세요?"
    그가 아버지에게 물었고, 그의 아버지가 간단하게 "뭐 그렇지."라고 대답했다.
    "어떠니, 너는?"
    "저는······"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신이 과묵한 남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고, 또 그런 이야기를 남에게 들은 적도 없었지만, 아버지나 형, 누나에게 '저는'으로 시작해야 하는 말들이 쉽지가 않았다.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미진하다는 걸 곧 깨닫게끔 됐기 때문이었다. 좀 더 성의 있게 답하고 싶다는 바람과 태연한 딴청이 더 나앗으리라는 약간의 후회 사이에 그가 표현해낼 수 없는 진실이 있는 듯했다.
    "다리가 안 좋은 거냐?"
    "아니오, 아니오."
    그가 갑자기 뭔가를 찬탄하듯이 두 팔을 들어 올려 보였다가 다시 소파 위에 털썩 내려놓았다.
    그는 스물세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 일 년 남짓 형과 아버지의 뜻에 부응해 그들과 함께 살았다. 군 제대 후였고 그 때 뒤늦게 입시를 준비해 지방에 있는 전문대학에 들어갔다. 학업에 열성어린 뜻은 없었다. 그저 제 앞의 시간을 계획대로 운용할 수 있는 사람처럼 비춰지길 바랐다. 한 집에 사는 짧은 동안 성실하게 생활했고, 이후 기숙사로 짐을 챙겨 떠난 후로는 그 집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는 남겨져 실망하는 사람이었다가, 이윽고 떠나가며 실망을 안겨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 둘 다 그가 진정으로 깊숙이 원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이후 그는 여러 여자들을 만났다. 동시에 둘, 또는 셋. 그 중 가장 변덕스러워 그의 가슴을 찢어놓은 여자와 세 번 이별하고 네 번째 해후 끝에 결혼을 했다. 세월이 그의 격정과 한숨을 조금씩 씻어가며 지난 일들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무언가를 조금씩 앗아갔을 것이다.
    양 여사가 접시에 홍차와 쿠키를 담아 내와 그와 아버지 사이에 놓았다.
    "드세요. 제가 만든 거예요. 이 선생님이 참 좋아하시잖아요, 이걸. 안에 오렌지 잼을 넣었어요."동그란 한가운데 그보다 작은 동그라미 모양의 오렌지 잼이 한가득 올라 있는 쿠키였다. 양 여사가 그 중 하나를 보경에게 주었다. 그도 하나 집어 들고는 입에 물었다. 홍차가 더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누나는 언제 올 것인지, 확실히 온다고는 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아니, 궁금하지 않기도 했다. '하긴 한 자리에 다 모였더라도 다 같이 할 만한 이야기가 많지 않을 텐데 그럼 곤란했겠지 뭐.' 그는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댔다. 아버지의 심중, 사람에 관한 호불호는 주로 형에게서 건네 듣곤 했는데, 대개 전화상으로였다. 그가 아버지와 대면한 자리에서 아버지에게 직접 들었던 이야기 중 크게 인상에 남아 있는 것은 보경과 그의 어린 날이 별로 닮은 데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시선으로 자기와 아내와 보경을 바라보려 했고, 그 시선이 제 마음 바닥을 둥그렇게 파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쿠키는 부드러웠고 안에 든 잼은 달았다. 보경이 빠르게 몇 개 먹어치우면서 넉살좋게 굴었다. 보경의 학교생활,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 여가시간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다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을 때 보경이 물었다.
    "누가 먼저 사귀자고 하신 거예요?"
    말짱한 얼굴로 진지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보경을 보고 그는 새삼 깜짝 놀랐다. 결혼 전 아내와의 연애시절 첫 산행에서 아내가 했던 말과 표정이 떠올랐다. "이 바위 옆 비탈길 기억하자, 우리. 내가 여기서 자기랑 뛰어내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지금을." 하던 때의 똑바른 자세, 말끔한 표정이.
    "굳이 누가 먼저랄 게 있나. 하나 꼽자면 잼 때문에? 내가 이웃들한테 잼을 만들어 돌렸거든."
    양 여사가 대답했다. 양 여사는 쿠키 안에 든 잼도 직접 만든 것이라고,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줄 때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보경이 그런 방면으로는 자기도 아는 바가 좀 있다는 것처럼 훅 끼어들었다.
    "에헤, 잼만 주신 건 아니시겠죠."
    그러자 그는 보경을 처음 접한 남의 아들인 것처럼 쳐다보았다.
    "잼은 그냥 잼이잖아요."
    "내가 전화번호를 물었다. 답례로 식사라도 대접하려고."
    그는 아버지의 대답에서 약간 화가 난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보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흥미를 드러냈다, 양 여사가 그 모양이 재미있었는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양 여사님은 자제분이 어떻게 되세요?"
    그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것을 묻고는 처치 곤란한 무언가를 남의 집 바닥에 엎지른 사람처럼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말았다.
    "없어요. 결혼한 적도 없고요. 같이 살던 사람은 두엇 있었네요. 지금은 아니고요. 남동생이 아래층에 살아요. 제 어린 남편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선생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고 하세요. 이제는 이 선생님하고 셋이서 같이 산책을 하기도 해요."
    양 여사가 대답했다.
    "있죠, 난 이대로 좋아요. 무슨 큰 변화를 바라지 않아요. 이 선생님은 잼보다는 많은 걸 나누고 싶어 하시는 것도 같지만 그게 뭔지 잘 모르는 분 같아요. 그래서 이건 내 아이디어였어요. 우리가 휴일 한두 시간쯤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보고 싶은 걸 만나보는 게 거창한 소원 같은 건 아니잖아요. 뭐 아닐 수도 있고요. 전 이렇게 보게 돼서 이대로 좋아요. 보경이는 정말 귀엽네요. 친구들한테 인기가 많을 것 같아."
    "그렇지도 않아요."
    보경이 골똘히 양 여사의 말을 듣다가는 시무룩하게 대답을 툭 내뱉었다.
    "키가 잘 안 커요, 전."
    "하지만 아빠도 할아버지도 키가 큰데, 보경이도 크지 않겠나?"
    양 여사가 어르듯 말하자 보경이 가만히 제 발끝을 내려다보다가 건성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그때 그의 형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휴대폰을 들고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서면서 시계를 보았다. 약속 시각에서 30여분 정도가 흘렀다. 형에게 "잠깐만." 하고는 양 여사에게 "담배 한 대 피고 올게요." 하고 양해를 구했다.
    "추운데 여기서 피워요."
    그는 양 여사의 말에 고개를 젓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바람에 실려 온 눈송이들이 그의 눈썹과 코끝에 부딪쳐 방울졌다.
    "정말이야? 오래 있을 거냐, 거기서?"
    형은 그가 양 여사의 집에 와있다는 말에 놀라면서, 자기는 아무래도 마음이 동하지 않아 늑장을 부리느라 시간을 흘려버렸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여자 친구가 종종 있어왔다고, 그 양 여사인가 무엇인가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 테지만, 그 여자가 집에까지 초대를 했을 때는 뭔가 바라는 것이 있어 그런지 모른다며, 안 그래도 서로 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시어머니를 맞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네 형수가 심란해 한다고 말했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야. 와이프가 좀 예민해, 요새. 제수씨는?"
    그는 그것이 '네 집 사람은 뭐라더냐?'는 질문인 것을 알았지만, 다른 말을 했다.
    "아, 저기, 나 애랑 왔어요."
    "지금 어떤데, 거기?"
    그의 형은 '이런 일은 기대하지 않았다'는 의미의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으며 미안해했다. 마치 기대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자신의 책임이 크다는 듯이. 그는 엄지와 검지로 속눈썹을 만지작대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눈 녹은 물이 그의 손가락 끝에 스며들었다. 그는 상황이 어떠했는지 나중에 자세히 들려달라는 형의 당부에, 그러니까 아버지와 형 사이에서 자기가 이런 일들의 중계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워했다. 그리고 그 당혹감은 점차 우스워졌다. "그래요, 그래." 그는 이후 몇 가지 질문에도 똑같은 대답을 했다.
    "네, 그래요, 그래."
    그때 아래층의 현관문이 열리며 젊은 여자가 나왔다. 눈에 띄는 금색 클러치를 들었고, 눈만큼이나 하얀 운동화를 신었다. 어깨를 덮는 머리칼은 짙은 검은색이었다. 갸름한 얼굴은 불그스름했다. 회색 스웨터에 야구 모자를 쓴, 어깨가 좀 굽고 살집 있는 남자가 그 여자를 뒤따라 나섰다. 여자가 남자에게 손을 흔들자 남자도 멈춰 서서 잠깐 손을 들었다 내렸다. 여자가 밖으로 나가고 난 뒤 남자는 뒤돌아서면서 모자를 벗어들고 고개를 쓱 쳐들었는데, 그 바람에 2층 계단에 선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양 여사의 남동생이라고 짐작되는 그 남자에게 얼결에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하고는 돌아섰고, 거기서 통화를 끝냈다.
    그가 다시 실내로 들어섰을 때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먼저 눈으로 보경을 찾았다. 보경은 소파에 몸을 푹 묻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양 여사는 그 맞은편에서 찻잔을 들고 홍차를 홀짝이고 있었고, 아버지는 창밖을 내다보는 중이라 뒷모습만이 보였다. 그는 '아버지가 저기 서서 내가 통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겠네······' 생각하며 젖은 머리칼의 물기를 손으로 몇 차례 털어내고는 보경의 옆자리로 가앉았다. 보경이 그에게로 고개를 기울이고는 속삭였다.
    "나, 알 거 같아요."
    "날 거 같다고?"
    보경이 도리질했다. 그때 그의 휴대폰이 다시 손 안에서 짧게 진동했다. 그는 손가락을 펼쳐 휴대폰에 뜬 문자메시지를 읽었다. '난 못 간다.' 이번에는 그의 누나였다. 그는 휴대폰을 도로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그가 몸을 움직거리자 보경이 그의 귓가에 얼굴을 들이밀고는 다시 말했다.
    "이 분위기 뭔지 안다고요."
    보경은 그와 눈을 맞추며 제 말 뜻을 어서 알아내라는 듯이, 아니면 저는 그냥 저대로 리듬을 계속 타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아니오, 하듯 흐느적거리는 몸동작으로. 그제야 그는 보경이 '분위기'라는 단어에 대해 언젠가 아내와 이야기 나누던 걸 본 기억이 났다. "분위기는 하나가 아니야. 여러 개야. 여기 단어카드에서 몇 개 골라서 늘어놓아볼래? 그래, 그렇게. 엄마 한 거 봐봐. 엄마는 슬픔하고 노랑하고 미소를 골랐어. 이런 게 같이 있으면 어떤 느낌이 들어? 그걸 분위기라고 할 수 있어. 보경이 너는 이쪽에다가는 우산하고 기침이란 단어를 골라 놓았네? 엄마는 거기에 열쇠하고 난로, 라디오라고 쓰인 카드를 같이 놓아둘게. 이렇게 다 같이 놓고 그림을 떠올려보면 어떤 것 같니?" 그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기타가 찌르르 울고, 여가수가 신음 같은 소리를 내고, 드럼이 두구두구두구두구 하더니 그 모든 게 하나로 큰 원을 그리며 소용돌이치다가 다시 잔잔해졌다.
    음악이 멈추었다. 양 여사가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툭 건드리고는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그의 아버지가 제자리로 돌아와 앉다가 중심을 잃고 비끗했다. 소파 팔걸이에 양손을 짚었고 천천히 무너지듯 내려앉았다.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던 날에, 그는 부단히 움직이며 당장에 무용해 보이는 일에라도 뛰어들어 무엇이든 해야 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던 시기가 있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또 다양한 사람들이 그에게로 와 무방비 상태로 허점을 보이며 북적이다 떠나갔던 시기이기도 했다. 아마도 그가 그들보다 약자였고, 항상 웃으려 노력했기 때문에. 허허실실 사람 좋지만 술을 마시면 짐승처럼 울부짖는 동료, 툭하면 훈계하기를 즐겼던 자수성가형의 기업대표, 회사 비품들을 챙겨 조카들에게 나눠주던 선배,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고 또 소심했던 사람들, 그리고 '절단내버리겠다'는 말을 아무 데, 아무 상황에서나 농담으로도 위협으로도 잘 쓰던 사람들, 침울한 사모님과 아직 병원을 찾지 않은 환자들. 그러나 기막힌 사례들을 되짚어보아도 이곳, 지금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이 이웃여자 만큼이나 그의 인생에 개별적으로 보이는 존재는 없었다. 양 여사는 그저 뭔가 있어 보이는 걸 좋아하는 바람 든 여자일까? 멋을 부리는, 현혹하는? 아버지는 좋았을까, 그것이? 그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제 어머니를 떠올릴 때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그의 이해를 원한 적 없던 그 오래 전 일들을 놓고 그저 자족하기 위해 너그러워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때로 복잡함 자체에 매달렸었다. 거기 베일 듯이, 피를 흘릴 듯이, 몸부림치듯이, 그러나 언제나 혼자,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소리 내지 않으며. 그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은 세월이 그에게 다가와 섣불리 위로할 수 없도록. 평화가 찾아온 것은 역설적으로 흩어진 식구들보다 더 그를 몰아치듯 가슴 아프게 한 여자를 만나고서였다. 그는 아내를 많이 사랑했고, 아내는 조금씩만 그를 사랑했다. 다른 것은 그보다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들이 생겼고, 그는 이제 어쩔 수 없는 것들은 어쩔 수 없는 그 모양대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아내의 특성이 그에게로 일부 옮겨왔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아마도 지난날의 아버지와 여기 이 공간에 함께 숨 쉬고 있는 아버지는 동일하지 않을 것이었다.
    "내가 학교에 있을 때······"
    라고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아우, 이 선생님. 그런 옛날이야기는 접어두시고요."
    양 여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의 아버지를 일으켰다. 양 여사와 아버지가 부둥켜안고서 다음 곡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집서 나왔니? 아버지는 전화를 안 받으시네.'
    걱정하는 한편 은근히 독촉하는 형의 문자를 확인한 순간, 그는 보경을 데리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몸과 마음은 아래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보경을 데리고 2층에서 나와, 혹 눈을 밟아 미끄러지는 일이 없도록 난간을 붙들고서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아래층 현관문을 두드렸다.
    "계세요?"
    그가 목청을 돋우자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곧 문이 열렸다.
    "네."
    "저희 아버지가 위층에 계세요, 양 여사님하고."
    "아, 네. 이 선생님 아드님?"
    "맞아요."
    "이 아이는?"
    "제 아들입니다."
    보경이 생뚱한 표정을 짓고 서 있다가 얼른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네, 그런데요?"
    그는 그 남자에게 자기 아버지와 함께 가끔 산책을 한다고도 들었노라고, 이른 저녁 식사라도 같이 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예의를 차리는 사람이야, 하고 생각하면서. 나는 인내를 아는 사람이야. 떠나기 전에는 두루 인사를 하고.
    "우리 누나는 거식증이 있어요."
    그는 이 집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손을 맞잡고 둥글게, 둥글게 원을 그리며 눈이 내리는 마당을 돌고 돌아 춤을 추는 일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하루이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경에게 스키장의 자유를 허락해 아들을 기쁘게 해주어야겠다고. 하지만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기대치 않던 정보를 갑자기 접하자 생각의 길이 막히며 딸꾹질이 났다.
    "좀 들어오세요. 따뜻한 물을 좀 드릴 테니 저기 앉아 기다려요. 발 밑 조심하시고요."
    그는 보경과 안으로 들어섰다. 양 여사의 동생은 자기 이름이 준모라며, 서로 편하게 이름을 부르자고 했다. 그래서 그도 이경주라고 제 이름을 소개했다. 준모 씨가 저편 주방 쪽으로 가 물소리를 내며 컵을 씻었다.
    "저는 보경이에요."
    보경이 거실에 깔린 푸르스름한 빛깔의 양탄자에 올라 거기 늘어져 있는 양말짝과 스웨터를 발끝으로 밀어내면서 딸꾹질하는 제 아버지를 대신하려는 듯이 소리 높였다.
    "저희 아빠는 형하고 누나가 있고요, 저는 형이랑 누나랑 다 없고요."
    준모 씨가 정수기에서 물을 한 잔 받으며 물었다.
    "위에 삼촌도 계시니?"
    "아뇨. 삼촌은 아파서 못 오신대요. 삼촌 이름은 이경식, 아빠하고 경자 돌림이에요. 고모 이름에는 경자가 없어요. 고모 이름은 정차율이에요."
    그는 거실 바닥에 자리 잡고 앉는 보경을 보며 또 딸꾹질을 했다. 보경의 다리 양 옆으로 셔츠와 양말, 스웨터, 헤진 앞치마와 빛바랜 무릎담요가 늘어져 있었고, 그는 아직 서있는 채였다. 준모 씨가 그에게로 다가와 따뜻한 물이 든 잔을 건네주었다.
    "천천히 드세요. 잠깐만요, 잠깐만."
    준모 씨가 이번에는 그가 서 있는 곳의 맞은편 방으로 들어가더니 의자 하나를 끌어내왔다. 쿠션이 두툼한, 발이 다섯 개 달린 사무용 의자였다. 등받이에는 양털로 만들 걸로 보이는 흰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그는 조금 민망해 하며 그 의자에 앉았다. 준모 씨는 거실 바닥에 늘어져 있는 옷가지들을 한 데 거두어 모아두고는 다리를 죽 펴고 앉더니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드러누웠다. 그리고 시선을 천장에 둔 채로 한쪽 팔을 뒤로 돌려 머리를 괴고 생각에 잠겼다가 불쑥 말문을 열었다.
    "이해합니까?"
    그는 순간 자기가 맞게 들은 것인지를 의심했다. 보경이 그에게 자그마한 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아빠, 나도 누워도 돼요?"
    그러자 준모 씨가 냉큼 끼어들었다.
    "오, 그럼. 쉬어라, 누워, 이 아저씨처럼. 네 나이 때는 어른들이 사방에서 아주들 골치를 썩이지. 거기 예외는 없다. 백퍼센트야."
    보경이 뭔가 가뿐해진 표정으로 저도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는 물을 한 컵 다 마시고 조금 전에 준모 씨가 물을 따라준 정수기 쪽으로 가 따뜻한 물을 조금 더 받아왔다. 그리고 의자에 앉으려다 등받이를 덮고 있는 양털 덮개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딸꾹질은 멈춘 듯했다. 그는 허리를 굽혀 덮개를 집어 올리려다 그게 여성용 점퍼라는 걸 알아챘다. 안쪽의 분홍색 라벨에 'My Venus'라는 상표가 달려있었다. 그는 그 양털점퍼를 반으로 접어서 등받이에 걸쳐두고는 의자에 앉았다.
    준모 씨의 거실에는 가구는 거의 없고 잡동사니가 중구난방으로 늘어져 있었지만 가만히 살피니 그렇게 엉망은 아닌 듯했다. 방금 전 준모 씨가 의자를 꺼내온 탓에 문의 삼분의 이쯤이 열린 방안이 바라다보였는데, 침대 위에 이부자리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내가 이 집, 이 아래층으로 이사를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는지 아무도 모를 겁니다. 말년에 누나랑 같이 사는 걸 꿈꾸는 남자들이 세상에 저 말고 또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누나를 좋아합니다. 제 진심을 제가 다 어떻게 알겠습니까만 하여간 그래요. 좋아해요."
    준모 씨가 말했고, 그는 잠깐 혼란을 느꼈으나 이어 말길을 찾아갔다.
    "거식증이라니, 전 전혀 눈치도 못 챘네요."
    "먹는 걸 거부하는 건 몸과 마음을 다 망치는 길이라고 의사가 누누이 분명하게 말을 했고, 누나도 나도 그걸 다 같이 들었는데, 수긍했는데, 좋아지고 싶다고 다짐했는데, 이게 어떻게 참 잘 안 되는 거예요. 지지부진하니 확 나아지지를 않아요. 누난 그 나이에 숨통 끊어질 짓을 하고 있어요. 저도 뭐든 득달같이 말리기에는 이제 힘에 부치니까 이렇게 쉬어줘야 해요. 문제들이 사방에서 폭죽처럼 터집니다. 제 속 터지는 줄도 모르고."
    준모 씨가 이런 말을 하는 동안 보경이 누운 채로 데굴데굴 굴러서 창가 쪽으로 가 모로 누웠다. 그는 '애를 이렇게 버릇없이 키우지는 않았는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놓아두었다.
    "누나가 자긴 제대로 삼키지도 못하는 쿠키나 잼 같은 걸 만들어 여기저기 돌리면서 정말로 행복한지 어떤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노력하는 거 같긴 해요. 노력에 관해서라면 평생 지치는 법이 없었으니까요. 그 와중에 잘 관리된 습관 같은 거랄까. 보시다시피 전 자주 지쳐서 이렇게 한 번씩 드러누워 있어줘야 하는데, 누나는 쓰러지고 싶을 때까지 춤을 추는 타입인 겁니다. 위에서 지금 춤추지 않나요?"
    "네."
    "노랫소리가 들리네요."
    "네, 그러네요."
    "아까 저희 딸, 보시지 않았습니까?"
    "아, 그분이 따님이셨나요?"
    "예. 아이를 가졌다데요. 이 얘긴 다 못하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보경을 의식해서인지 모로 누워 있는 보경의 뒤통수에 대고 말을 이었다.
    "하긴 제 딸이 어릴 적에 저를 참 좋게 참아준 걸 제가 다 잊어버리지 못합니다. 그 얘기도 다는 못해요."
    그는 거기 "네."하고 작게 대꾸했다.
    "나쁜 놈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이에요, 네? 딸애한테 바른 소리를 잔소리처럼 해댈 수밖에 없는 제 자신이 무진장 속상합니다. 긴 말 하면서 제가 먼저 울어가지고 특히나 그것 때문에 뒤끝이 괴로워 죽겠네요."
    준모 씨는 내주 중으로 딸이 자기 집으로 들어와 지낼 거라며, 한동안 그렇게 같이 지내기로 했으니 집안을 좀 정리하려고 하던 참이라고 덧붙였다.
    "아······, 그렇다면 저도 마침 아내랑 집안을 정리하던 중인데, 혹시······"
    그는 체크리스트를 사진 찍어 보관해둔 게 떠올라서 휴대폰을 꺼내들고 목록을 눈으로 훑어 내렸다.
    "화장대 같은 게 당장 필요하시지 않을까요? 저희가 마침 나눔 하려는 게 있는데 4단짜리 서랍장이 달려 있어요. 새 거는 아니지만 새 거랑 다름없는데요. 필요하시다면 보내드릴 수가 있어요. 완전히 새 걸로는 식탁보랑 큼직한 보스턴백이 하나씩 있고, 또······"
    그는 준모 씨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제 마음이 어디서부터 끓어오르는 것인지 몰랐으나 그게 끓어오른다는 것만은 알았다. 하고 싶은 말을 어디서부터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준모 씨 만큼 유연하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할 수 있는 말이 있었고, 그 점에 대해서, 그 물건들을 생활공간으로 들이고 또 다른 곳으로 이끌고 이동해오며 만들어낸 시간들에 대해서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그 집 대문을 나설 때쯤에는 눈이 그쳤고, 양 여사가 아닌 준모 씨가 배웅을 했다. 준모 씨는 헤어지며 그에게 이렇게 인사말을 했다.
    "누나가 내게 할 수 없는 이야기가 따로 있고, 그게 이 선생님하고 가능한 거라면, 그 정도면 저는 아무런 신경을 안 씁니다. 산책은 그냥 산책이고, 누구에게나, 저 같은 사람한테도 나쁠 게 전혀 없고요. 그러니까 제 말은······, 오늘 제가 엉망진창이었던 걸 좀 이해해주세요."
    "아니오, 아니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준모 씨와 악수를 하고 돌아섰다.

 

    그날 그가 보경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아내는 식탁에 앉아 다이어리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고, 그가 기대했던 바대로 "어서 들어와."하고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려주었다. 보경이 오줌이 마렵다며 종종걸음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그는 그녀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되도록 소상하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 몰라 막막해졌다. 그래서 결국 그녀가 먼저 물었다.
    "손에 든 그건 뭐야?"
    그의 손에는 쇼핑백이 하나 들려 있었고, 그 안에는 준모 씨가 챙겨준 양털 점퍼가 들어 있었다.
    "오늘 만난 사람이 당신한테 이걸 선물했어."
    "어머, 그 양 여사란 분이?"
    그녀가 쇼핑백 안을 뒤적여 양털 점퍼를 꺼내들었다. 보경이 화장실에서 거의 튀어나오듯 달려와 그녀에게 안기며 소리쳤다.
    "엄마, 나 아빠가 은택이랑 스키장 가도 된대요. 오면서 약속했어요. 정말 가도 되죠? 오늘 할아버지랑 양 여사님이랑 춤을 췄는데요, 되게 못 추는 춤이었거든요. 그리고 아래층에 사는 준모 아저씨가 속상해서 울었던 이야기했는데······, 아참, 그거 비밀이었나?"
    보경이 말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미소 띤 얼굴로 보경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여보, 나 오늘 긴 하루였어. 당신은 어땠어?"
    그가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난 친구 집에서 누워 쉬었어. 자기 흉도 좀 보고."
    "그 옷 입어봐 봐. 양 여사님 동생분이 딸 줄려고 산 건데, 그 딸이 자기 취향 아니라고 했대. 긴 이야기를 짧게 하면 일단 그래."
    그녀가 점퍼를 꺼내 들어 펼쳐 보곤 쿡쿡 웃더니 거기 한쪽 팔을 꿰어 넣으며 말했다.
    "근데, 나 낮술 좀 마셨거든. 지금 기분이 좋아. 좋은데, 긴 말이 잘 안 들리네. 즐거웠던 거 하나씩만 말해줘 봐. 딱 떠오르는 거 하나씩만. 보경이는?"
    "오렌지 잼 쿠키가 맛있었어요. 아빠는?"
    "자기 입은 그 털옷 안에 귀여운 핑크색 라벨이 있어."
    그녀가 눈을 끔벅거리며 "나는······" 하고는 양 손으로 커다란 양을 쓰다듬듯 제 몸을 거푸 훑어 내리더니 답했다.
    "잘 맞아. 보기보단 훨씬 따뜻해."

 

 

 

 

 

 

 

 

 

 

 

 

 

 

 

작가소개 / 기준영

2009년 단편 <제니>로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함. ​소설집 <연애소설>(2013), <이상한 정열>(2016), 장편소설 <와일드 펀치>(2012), <우리가 통과한 밤>(2018)이 있다.

 

   《문장웹진 2019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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