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되게” ‘집’을 살고 있는가 - 김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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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리뷰(시)]

 

 

 

"참되게" '집'을 살고 있는가

 

 

 

김영임

 

 

 

 

    예전에 나나와 나는 그런 집에 산 적이 있었다.
    (······) 그러니까 ······ 벽 이쪽과 저쪽에 사는 사람들은 각자의 집을 한 개씩 가진 것이 아니고 반씩 나눠 사는 집이었던 거지. 벽 끝에 현관, 벽의 다른 쪽 끝에 화장실이 있는 구조로 현관과 화장실은 오른쪽에 속하기도 했고 왼쪽에 속하기도 했다. 이상하지만 그런 집도, 세상엔 있는 것이다.

 

    황정은의 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에 나오는 "이상하지만 그런 집"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기 위해 앞 페이지들을 반복해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공간을 분할하여 월세를 받겠다는 주인의 이기심은 "임의적인 접근을 제한하고, 접근과 드나듦, 만남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사람들의 활동을 제약"1)하는 벽의 원래 역할과 거리가 먼 구조물을 만들어냈다. 이상한 벽의 구조를 탐색하기 위해 벽을 '실패 돌리듯' 돌던 자매는 벽의 반대편에서 '나기'를 '만나고', '나기'의 어머니 '순자'는 자매들의 불행한 삶에 '접근'하고 '드나들'게 되면서 아이들을 보살핀다.
    이 '이상하지만 그런 집'은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사적 공간의 내밀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서 근대적 주거 개념으로서의 '집'이기에는 실패한 공간이다.2) 하지만 이 공간은 '소라', '나나' 그리고 '나기'를 "한 뿌리에서 자란 감자처럼 양분을 공유한 사이"로 느끼게 할 만한 기억과 연결되면서 바슐라르적 '집'의 내밀함을 성취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양쪽이 열려 있는 엉성한 공간은 형식에서는 실패했지만 내용으로는 성공한 '집'이었다.
    현대사회에서 '집'이라는 기호는 복합적인 층위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이 특별난 공간은 공적 영역에 대립하는(때로는 보완하는) 사적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 이데올로기의 기표로 기능한 지 오래다. 집이 주거공간이라는 사용가치를 훨씬 상회하는 교환가치의 대상이 되어버린 지금, 어떤 '집'이라도 바깥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줄 '내밀함'을 지닐 수 있다는 공간에 대한 시론은 어쩐지 초라하고 슬프게 와 닿기도 한다. 황정은의 인물들은 운이 좋은 편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계절의 시 중에서 '집'으로 감각되지 못하는 주거공간과 그곳에 속한 존재를 다룬 무거운 시들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문성해의 「Y의 이불」(『문학선』, 2018, 가을호)과 이희형의 「24살」(『시와 사상』, 2018, 겨울호)이다.

  1)  이진경,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 그린비, 2007, P.75.
  2)  작품에 나타난 인물들의 새로운 가족(?) 형태는 그 공간이 근대적 의미의 주거 관점에서 '형식'으로도 내용으로도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근대적 주거 공간은 폐쇄적 가족주의를 강화하면서 공적 공간의 이데올로기와 일관성을 이루는 근대성과 근대인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개인들에게 작동해야 하는데, 이 소설의 '이상한 주거 공간'은 우연적으로(?) 개방된 배치를 통해 다른 형태의 가족을 생산해 내면서 '폐쇄적 가족주의'에 균열을 냈다.

 

 

'비천한 처소'에서 '아름다운 우주'로

 

반지하방
절뚝절뚝 계단을 내려가면
삐걱이는 침대 위에
그것은 펼쳐져 있습니다
한 번도 각을 만들어 본 적 없는 그것에겐
시큼한 물비린내가 납니다

 

호수와 뭍의 경계에서
신발을 벗는 자와도 같이
당신은 그 속으로
옷을 입은 채 뛰어듭니다
어린 날 냇가에서처럼

 

당신은 그 속에서 아득히 눈을 감습니다
잠의 치어들이 닫힌 눈꺼풀을 건드릴 수 있게.
간혹 이불 밖으로 발을 차는 것은
잠 속에서도 당신이 줄기차게 헤엄을 친다는 증거

 

그 속에서 당신은 늙어 가는 허파 대신
옆구리에 푸른 아가미가 패입니다
냇가를 누비던 어린 시절처럼

 

하지정맥류의 종아리를 절뚝이며
만년 알바생인 당신은 또 나섭니다
지느러미 돋은 달과 함께
24시 편의점으로

 

「Y의 이불」 전문

 

 

    시적 공간의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하게 하는 재료는 단출하다. "삐걱이는 침대"와 그 위에 펼쳐져 있는 '그것'. 바슐라르는 "집이란 세계 안의 우리들의 구석"이며 "하나의 우주"라는데, 이 초라하기 그지없는 반지하방은 어떻게 Y의 우주가 되는 것일까. 그는 "참된 의미로 거주되는 일체의 공간은 집이라는 관념의 본질을 지"닐 수 있으며, 이때 '참된 의미의 거주'는 실제적인 측면에 한정되지 않고 또한 현재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바슐라르의 논리라면 "참된 안락이란 과거를 가지고 있는 법"이어서 "꿈을 통해 한 개인의 과거 전체가 새 집에 와서 살게 된"다면 아무리 비천한 처소라도 상상과 꿈을 통해 아름다운 우주로 환위(換位)될 수 있다.3)
    Y에게 이 반지하방 공간을 자신만의 내밀한 '집'과 '우주'로 느끼게 하는 것은 '이불'이다. '그것'이라는 시어로 지칭되는 '이불'은 "한 번도 각을 만들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누추한 형색이지만. '이불'의 경계는 Y를 단숨에 이동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이불'로 뛰어들면서 Y는 자신을 '과거의 참된 안락'으로 데려가 줄 '꿈'을 꾸기 위해 "그 속에서 아득히 눈을 감"는다. 지하방의 습기는 이불에 시큼한 물비린내를 배게 하고, 그 물비린내 덕(?)에 Y는 꿈속에서 "냇가를 누비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간혹 이불 밖으로 발을 차는 것"을 보면 Y는 "늙어 가는 허파" 대신 옆구리에 팬 "푸른 아가미"를 가지고 "줄기차게 헤엄을 치"고 있나 보다.
    시적 화자의 목소리 안에서 Y의 유년은 꿈을 타고 반지하방의 축축한 이불 위에 살게 되었다. 꿈속에서는 반지하방이라는 비천한 처소가 아름다운 우주로 환위된다. 비로소 그 공간이 Y에게 '집'이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꿈을 깬 Y에게는 "하지정맥류의 종아리"와 "만년 알바생"이라는 현실이 기다린다. 반지하방이 '집'이 되는 시간은 '꿈'이 아니면 불가능하며 현실에서 그곳은 비천한 처소일 뿐이다. '당신'이 "24시간 편의점"으로 나서는 순간에도 "지느러미 돋은 달과 함께"인 것은 반지하방을 '집'으로 변화시킨 물기어린 꿈을 털어버리지 못해서가 아닐까.

  3)  가스통 바슐라르, 곽광수 역, 『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pp.75-78.

 

 

'작은 배'의 불안한 항해

 

    방 하나가 겨우 차 있고 방 속에 작은 창이 겨우 차 있고 작은 창을 비집고 햇빛이 겨우 내려앉는 이곳에 내가 겨우 들어차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사는 곳을 원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방 하나라는 뜻도 되고 방 하나에 사람 하나라는 뜻도 되었습니다 이곳에 방 하나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좁은 방엔 채울 수 있는 것이 없었고 그래서 나는 집을 비워 두고 살았습니다 모두가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모두가 금방 떠날 것 같은 기분으로 방 안에 가득 차 있습니다 비워진 방은 넓었습니다 넓은 곳에 내가 놓여 있어서 나는 무서워집니다 불 꺼진 방 안에 누워 있으면 나는 떠오릅니다 누군가 나를 작은 배에 넣고 바다에 버려두고 간 것 같습니다 나는 어디로 흘러가고 흘러가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소리가 들려오고 하늘 끝에서 비집고 들어오는 빛이 근근이 보이지만 바다 한가운데에서도 밝게 빛나는 건 있어서 이불을 머리 위까지 올리고 눈을 감았습니다

 

    바다에 물이 가득 차 있습니다

 

   「스물네 살」 전문

 

 

    '원룸'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속박을 벗어나 '싱글라이프'라는 낭만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공간인가. 조개껍데기 속으로 되들어가는 이미지를 삶(體驗)으로써 고독을 받아들이는 기쁨을 서술한 바슐라르는 "집에서 홀로 산다! 얼마나 위대한 꿈인가?"4)라고 묻는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에게 '원룸의 고독'은 낭만적이지도 위대한 꿈이지도 않다.
    "좁은 방엔 채울 수 있는 것이 없었고 그래서 나는 집을 비워 두고 살"았다. "방 안에 가득 차 있"는 것은 "모두가 금방 떠날 것 같은 기분"뿐이다. 이 공간 안에서 시적 화자는 누워 있는 것 말고는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다. 특정 공간의 장식이나 배치는 공간을 점유하는 자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기미가 되지만, 시적 화자의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다. 문성해의 'Y의 이불'이 꿈속에서나마 '집'의 내밀성을 느끼게 하는 매개체였던 것에 비해 이 시의 '이불'은 그런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 집의 내밀성을 느끼게 해줄 대상은 아무것도 없다. 앞에서 언급한 "참된 의미로 거주되는 일체의 공간이 집이라는 관념의 본질"을 지니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몸을 숨길 만한 곳을 발견"5)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것이 없다면 "두터운 벽 뒤에서도 몸을 떨고, 더할 수 없이 단단한 성벽까지도 믿지 못"6)하게 된다. "넓은 곳에 내가 놓여 있어서" 무서워진다는 '나'에게 '방'은 "영혼의 은둔처"7)가 될 만한 '구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누군가 나를 작은 배에 넣고 바다에 버려두고 간 것 같"다는 화자에게 원룸은 "조개껍데기처럼 깊고 은밀"해서 "평온함의 꿈"8)을 이루어 줄 수 있는 "나룻배의 움푹한 밑바닥"9)도 되지 못한다. '누가' '나'를 배에 태웠는지도 알 수 없으며 "어디로 흘러가"는 것만 감각할 뿐인 목적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이 항해는 '광인들의 배'를 연상시킨다. '나'는 "빠져나갈 수 없는 배에 갇혀 (······) 이동공간의 포로"10)가 된 자다. "내가 겨우 들어차 있"는, 사람들이 원룸이라고 부르는 이곳에서 '나'는 세상 안의 거소를 마련하지 못하고 버려진 것만 같다. 「스물네 살」이라는 제목은 '나'의 불안과 공포가 젊은 시절 잠시 겪어내야 하는 것임을 암시한다기보다는 이 불확실한 항해가 쉽게 끝이 나지 않을 것을 더 뚜렷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내밀하게 파악될 때, 더할 수 없이 비천한 거소라도 아름답지 않겠는가?"11)라는 바슐라르의 조언을 나에게 십분 각인시키며 두 시를 다시 읽어 본다. 슬프게도 시 안의 공간들이 화자의 아름다운 우주로 환위되었다고 믿어지지 않는다. 꿈속에서만 가능한 환위는 현실의 공간이 '집'으로 작동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낼 뿐이다. 그것은 시인의 잘못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혹시 그 환위의 가능성에 감동받은 순간이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 나의 오독이었을 것이다. 시인은 환위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모든 이데올로기가 다 그러하듯 우리는 '스위트홈'의 환상을 스스로 수용하고 욕망하였지만,12) – 그 환상 속의 이데올로기는 '은밀'하기는 했던 것 같다 – 우리의 현실은 그 환상을 품을 자격에서부터 배제와 소외를 발생시킨다. 누구에게는 자신의 공간 안에서 가족을 꿈꾸고 '가족주의'(설령 그것이 환상과 기만의 이데올로기라 할지라도)를 실현하는 미래가 영영 불가능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스위트홈'은 이제 이데올로기의 자격도 상실할 만큼 현실은 노골적이고 가혹하다. 그래서 문성해의 이불이 가져다준 유년의 상상 안에서 행복하기보다 "지느러미 돋은 달과 함께/24시 편의점으로" 나서는 Y의 뒷모습에 먹먹해지고, 이희형의 작은 배의 주인에게 "바다에 버려두고 간 것"이 아니며 곧 육지에 닿을 것이라고 말해 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  가스통 바슐라르, 위의 책, p.238.
  5)  가스통 바슐라르, 위의 책, p.77.
  6)  가스통 바슐라르, 위의 책, p.78.
  7)  가스통 바슐라르, 위의 책, p.254.
  8)  가스통 바슐라르, 위의 책, p.238.
  9)  가스통 바슐라르, 위의 책, p.239.
  10)  미셸 푸코, 이규헌 옮김, 『광기의 역사』, 나남출판, p.57.
  11)  가스통 바슐라르, 앞의 책, p.77.
  12)  이진경, 앞의 책, p.423 참조.

 

 

 

 

 

 

 

 

 

 

 

 

작가소개 / 김영임

2016년 《문학과 사회》 평론 등단.

 

   《문장웹진 2019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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