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에 관한 명상 - 권희철
목록

[문학 더하기+(시)]

 

 

 

개에 관한 명상

 

 

 

권희철

 

 

 

 

짐 자무시, 〈패터슨〉, 2017
박솔뫼, 『사랑하는 개』, 스위밍꿀, 2018
권민경,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2018

 

 

    짐 자무시의 영화 〈패터슨〉(2017)이 개봉했을 때, 나는 약간 주눅이 들어 있었다. 내가 신뢰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 영화가 얼마나 근사한지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이 영화에서 거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시인들이 좋아한다는데, 그러니까 "〈패터슨〉은 (···) '영화적인 것은 무엇인가'와 '시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아름답고 생기로운 답이라는 걸 온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1)는데, 대체 내 몸과 마음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영화적인 것은 그렇다 치고, 시적인 것에 대해서 이렇게 몰라서야 원, 하는 생각에 풀이 죽고 말았다.
    내가 본 〈패터슨〉은 '일상이 시(詩)가 되는 영화' 같은 것이 아니었고, 차라리 '답답한 집구석으로부터 드디어 가출에 성공하는 개에 관한 영화'였다. 아니면 '시쓰기의 실패에 관한 영화', 그것도 아니면 '여기에서 시를 써온 사람은 마빈(패터슨-로라 커플과 함께 사는 개)밖에 없네요'라고 말하는 영화라고 해야 할까.
    일상은 그 자체로 시가 될 수 없다, 고 나는 생각한다. 시라는 것이 꼭 의미심장한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한다거나, 초월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거나, 별스럽게 아름다운 것에 대한 도취로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루하고 무의미한 반복처럼 보이는 일상 안에서 자기만의 미로를 만들고 그 미로를 통과하는 중에 더 이상 지루하고 무의미한 반복이 아닌 체험을 이끌어내며 삶을 확장하지 않는 이상, 일상은 진부함의 감옥이 되기 쉽고, 그런 한에서 시는 쓰여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일상이 그 자체로 시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미로 만들기라는 과제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핑계거리가 되기 쉽고, 무기력한 삶에 대한 기만적인 장식이자 옹호가 되기 쉽다고도 덧붙이고 싶다.
    영화 속 패터슨 시(市)의 버스 기사 패터슨은 시를 쓰고 있었을까? 물론 그는 시를 썼다. 비밀노트에 틈틈이. 반복되는 일상의 틈에, 누구와도 즉각적으로 교환할 수 있는 것으로 기대되는 일반 언어의 틈에, 자기만의 비밀스런 말들을 만드는 바로 그 행위가 이미 미로 만들기의 시작이다.
    패터슨은 평범한 성냥갑에서도 미로를 만들어낸다. 이 미로 만들기가 패터슨의 시 「Love Poem」이 된다. 이 시의 아래에는 이런 연상들이 흐르고 있는 것 같다. '오하이오 블루팁'이라는 성냥의 로고는 왜 비스듬하게 인쇄되어 있는가. 그것은 이 성냥이 무엇인가를 큰 소리로 외치고 있기 때문에 확성기의 형태로 인쇄될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그렇다면 이 성냥은 무엇을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치고 있는가. 여기에 차분하고도 격렬하게 타오를 준비를 마친 작은 성냥이 있다는 것, 그것으로 사랑하는 여인의 담배에 불을 붙여 줄 수도 있다는 것, 그때의 불꽃은 세상에 다시없을 유일무이한 고유한 형태로 춤추리라는 것, 그때 여인은 담배가 되고 나는 성냥이 되거나 혹은 그 반대가 되리라는 것, 담배에 옮겨 붙는 그 뜨거운 춤과 집중하는 흡기와 연기의 몽롱한 흩어짐 속에서 이뤄지는 것은 사실 상대방을 불타오르게 하는 키스라는 것, 그 키스는 천국으로 타오르게 되리라는 것. 이것이 '평범한 사물에서 천국의 입구에 이르는 미로 만들기'가 아니면 무엇일까.
    하지만 '오하이오 블루팁' 성냥이 그 자체로 천국의 입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사물이 제자리에서 천국의 입구에 이르는 미로를 만들어내는 일이 없었다면, 다시 말해 패터슨의 시쓰기를 통해 활성화되고 있는 저 연상들이 없었다면, 성냥은 그저 성냥일 뿐이다. 하지만 패터슨은 시를 썼다. 그는 미로를 만들었고 성냥이 외치는 큰 소리를 들었으며 그 커다란 울림 속에서 뜨거운 입술과 부드러운 불꽃을, 키스와 담배를, 담배 연기와 연인의 영혼을, 그와 그녀를 뒤섞었고, 그렇게 해서 천국을 향해 뜨겁게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패터슨의 시쓰기를 압류하려 드는 힘이 있다. 그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노선으로 버스를 운행해야 하므로 수시로 시쓰기를 중단하고 지루한 반복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반복하는 힘은 차라리 미로에 의해 분열되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의 토양이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일상이 시를 압류한다고 간단히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패터슨과 함께 사는 여자 로라의 경우라면 사정이 다르다. 로라는 자신의 옷과 소품들 그리고 온 집안에 비슷한 문양들을 반복해서 그린다. 그 문양들 사이에서 미묘한 차이를 읽어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 영화가 그런 차이들을 의식적으로 혹은 효과적으로 생산하는 것 같지 않다. 로라는 차이나는 반복을 생산하는 인물이 아니라 차라리 '반복의 반복'을 강요하며 미로 만들기를 좌절시키는 힘의 실행자다.
    로라의 문양들은 주위 공간을 비슷한 패턴들로 정체시키는 것 같다. 로라는 일상의 운행이 끝난 패터슨을 다시 마빈의 반복되는 저녁 산책의 동반자로 내몰며 또다시 동일한 패턴 속에 가둔다. 그 패턴 안에서 시인 패터슨이 어떤 미로를 만들어낼 수도 있겠지만 로라가 미로 만들기의 협력자는 아닌 것이다. 패터슨은 로라가 집 안 곳곳에 걸어 둔 마빈의 초상화를 보며 약간 어색하고 불편한 표정을 짓는데, 그것은 아마 '왜 남편이나 애인인 내가 아니라 개의 그림을?'이라는 불만에서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무엇인가를 닮게 그리고 그것을 기념하고 그래서 무엇인가를 하나의 이미지 안에 멈춰 있게 만드는 것은, 시와는 반대되는 일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사진이나 초상화가 암시하는 '고정시키는 힘' '반복의 반복'이 미로를 만들고 분열시키며 열어젖히는 시인을 어색하고 불편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보면 패터슨의 점심 도시락을 싸면서 로라가 매번 자신의 '사진'을 함께 넣어 두는 것이 그저 사랑스럽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로라 그리고 로라와 패터슨의 관계의 무엇인가를 반복하고 고정시키는 사진이 패터슨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첫 번째 도시락에는 로라의 사진과 함께 단테의 초상이 그려진 엽서도 함께 들어 있는데, 그것은 혹시 패터슨이 로라에 대한 사랑을 담아 쓰는 시 「Love Poem」이 너무 멀리 가지 못하도록 그것을 '베아트리체를 통해 천국에 이르는 단테의 글쓰기의 반복'으로 그러니까 복제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묶어 두려는 것은 아닐까?2)
    생각해 보면 패터슨이 로라를 사랑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로라와 함께 있을 때의 패터슨의 표정은 언제나 약간 긴장해 있고 초조한 기색이 역력하다. 로라는 나중에 요식업으로 성공할 꿈을 꾸는 것 같지만 로라가 해주는 요리가 패터슨에게는 고통인 것 같고, 이제 막 기타를 사서 독학하며 스타 컨트리 가수가 되겠다는 로라를 바라보는 패터슨의 표정에도 뭔가 어색한 기운이 가득하다. 로라는 수시로 패터슨의 시를 칭찬하지만 로라가 패터슨의 시를 읽고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내고 변주하여 다른 문장을 내뱉는 장면은 전혀 없다. 패터슨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패터슨에게조차 허황된 꿈을 꾸는 것처럼 보이는 로라를 생각하며 패터슨이 「Love Poem」이나 「Glow」나 「Pumpkin」과 같은 연애시를 쓰는 행위는 시쓰기가 아니라 낭만적 연인들의 관습을 반복하는 것뿐이지 않을까? 충분히 시적으로 보였던 「Love Poem」조차도 그저 로라의 '반복의 반복'이라는 덫에 걸려들어 판에 박은 연애시에 멈춰서는 것이 아닐까? (저 세 편의 시가 뒤로 갈수록 유치해지고 상투적이 되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면 패터슨이 점점 더 로라의 반복의 반복 안에 갇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정적으로 로라는 내켜하지 않는 패터슨에게 비밀노트의 시들을 '복사'하라고 반복해서 요구한다. 시를 복사하는 일이, 그렇게 해서 시집으로 출판하는 일이, 시를 더 이상 시가 아니게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전체 구도 속에서는 시를 '반복의 반복'으로 차압해 버리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이제 다음날이면 복사될 패터슨의 비밀노트를, 패터슨과 로라가 영화를 보러 간 사이에 마빈이 갈가리 물어뜯어 버린 것은, 어떤 의미에서 패터슨의 시쓰기가 '반복의 반복'에 장악되는 것으로부터 구원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마빈의 물어뜯기에는 반복의 격벽을 뚫고 나가는 격렬한 미로 만들기의 실천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마빈은 찢어발기는 이빨로 훌륭한 시를 쓴 것이 아닐까?3)
    비밀노트 분쇄 사건 직후 로라는 패터슨에게 과장되게 미안한 마음을 표시하며 애지중지하던 마빈을 집 밖으로 내쫓고 이후로 마빈은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빈은 정말로 쫓겨난 것일까? 반복을 반복하는 힘에 납치되어 있던 마빈이 드디어 물어뜯는 이빨로 시를 썼고 그로 인해 로라의 고정시키며 점령하는 패턴 바깥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것이 아닐까? 패터슨과 마빈 사이의 기묘한 분위기는, 로라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남자와 개 사이의 갈등이 아닐지도 모른다. 마빈은 분열시키고 열어젖히는 미로 만들기의 시적 과업을 상기시키는 진정한 시적 동료이자 스승이기 때문에, 반복의 반복에 갇히고 있는 패터슨을 긴장시키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끝난 이후 패터슨이 마빈 없이도 시를 쓸 수 있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첫 장면과도 같이 월요일 아침 로라 옆에서 깨어나는 패터슨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내게 이 영화는 우울한 결론을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보다 조금 앞서 우연히 만난 어느 일본 시인이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라는 말과 함께 빈 노트 그리고 '아하!'라는 선문답 같은 깨달음의 감탄사를 선물하는 장면에서 우리가 보는 것도 시에 대한 동양적 깨달음이라는 진부한 상투구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영화는 결국 '반복의 반복'에서 빠져나오는 데 실패하게 되리라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닌지. 영화가 끝난 뒤 패터슨이 시를 쓰게 되더라도 그 시는 더 이상 미로 만들기의 실천과는 무관한 어떤 진부함의 복제품에 멈추게 되는 것은 아닐지.
    짐 자무시가 시에 대해서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해서 혹은 개에 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내가 보기에 이 영화에서 시를 쓴 사람은 물어뜯는 이빨을 가진 마빈밖에는 없다.

  1)  남다은, 「선택-영화」, 『문학동네』 2018년 봄호, p.589.
  2)  사진이나 초상화가 묶어 두려는 힘과 연관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이진경 옮김, 『카프카 –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동문선, 2001, 1장 참고.
  3)  사진이나 초상화가 묶어 두려는 힘과 연관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이진경 옮김, 『카프카 –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동문선, 2001, 1장 참고.

 

*

 

    개라는 동물은 왜 밥그릇에 담긴 음식만 보면 참지를 못하고 순식간에 그 음식을 몽땅 먹어치워 버리는 것일까? 심지어는 왜 먹을 것이 아닌 것조차 다 물어뜯어 망쳐버리는 것일까? 개는 인간과 달리 식사 예절을 모르고 배고픔도 제어하지 못하며 파괴적 충동에 시달리는 짐승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이 아니고, 개는 자기 앞의 사물이 현재의 모습으로 고정되는 대신 끊임없이 다른 사물로 변화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 좀 더 과감하게 말해서 모든 사물의 진리가 최종적으로는 무(無)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그 최종 진리인 무(無)를 드러내기 위해 먹어치워 버리거나 물어뜯어 버리는 것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해설하는 알렉상드르 코제브는 무(無)와 욕망과 부정성(否定性)의 운동에 대해 논하며 '물어뜯는 이빨로 진리에 도달하는 개의 철학적 실천'에 대해 이런 방식으로 언급한 적이 있다고 나는 기억했고, 마빈을 보며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철학자-개가 떠올랐다. 시와 철학의 교차에 대해서도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기억의 오류. 다시 찾아본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역사와 현실 변증법 — 헤겔 철학의 현대적 접근』(설헌영 옮김, 한벗, 1981)에는 그런 개가 등장하지 않았다. 마빈! 어디 간 거니?
    스크린 바깥으로 빠져나간 〈패터슨〉의 마빈이 시인답게 미로를 만들며 다른 텍스트들을 향해 산책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면 어떨까.

 

*

 

    박솔뫼의 소설집 『사랑하는 개』(스위밍꿀, 2018)의 표제작에는 금이라는 사내가 나온다. 금은 일 년 만에 이 소설의 화자를 찾아와 이렇게 주장한다. '사실 나는 개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인 94년 4월 13일에 소년 금은 함께 놀던 개 노디에게 개가 되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런 말은 곧장 실현되는 것이어서 금은 노디가 되었고 노디가 금이 되었던 것이다. 개는 인간보다 수명이 짧기 때문에 노디가 된 금이 벌써 죽었나 싶지만 금은 또 다른 개가 되는 식으로 살아 있고 그것이 지금 내가 산책시키고 있는 이 개다. 그런데 일 년 전 너와 만났을 때 내가 개가 되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개가 된 금이 말했다. 그래서 내가 다시 개가 되고 개 속으로 들어간 금이 다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나는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다.'
    인간과 개 사이의 영혼 교환에 대한 금의 이 엉뚱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우리의 흥미를 끌지만, 그래서 금이 된 노디가 다시 개로 돌아갈 것인지 혹은 도대체가 금이 하는 이야기가 터무니없는 농담인지 소설의 설정상 참인지를 결정짓는 것이 「사랑하는 개」의 관건은 아니다. 그런 이야기의 줄기가 그 줄기대로 진행되는 바 없지 않지만, 그와는 별도로, 금이 저 엉뚱한 이야기를 시작하며 "혹시 94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세요?" 하고 물어 온 탓에, 이 소설의 화자는 1년 전 금과의 만남의 장면을 세밀하게 재생시키는 한편 94년의 여름의 기억 속을 골목길을 무심히 헤매고 다니듯 산책한다. 그것이 과연 정말 일어났던 일인지, 이제 와서 현재의 기억을 투사하며 상상해 낸 일인지, 혹은 그것이 상상에 불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바로 이 기억의 헤매임을 통해서 존재값을 부여받는 것인지, 혹은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 하더라도 그 사소한 사건을 함께 경험했던 사람들 모두가 그 사건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면 그것은 다시 유령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인지, 결정불가능하게 만드는 문장들과 장면들이 꼬리를 이었다가 꼬리를 감췄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래서 그것이 확실히 존재하는 것인지 유령적인 것인지 판정할 수 없는 가운데 그 많은 현실적이거나 회상되었거나 상상된 것이 애틋하게 감촉된다.
    「사랑하는 개」의 느슨하게 연결되었다가 이상한 지점에서 집중한 뒤 난데없이 도약하는 문장들의 나열이라는 것은, 다음의 두 인용문의 관계를, 현재의 은유(A)에서 비롯된 과거에 대한 상상적 기억(B)으로 이해해야 할지, 과거의 현실(B)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가 현재의 회상으로 되살아난 것(A)으로 이해해야 할지 확정할 수 없는 가운데, 다만 A와 B 사이에서 기억/상상의 혹은 현행적/잠재적 산책로를 밟는 촉감을 발생시키려는 시도이다. 아니면 차라리 기억과 상상 사이를 오가는 혹은 현행적 차원과 잠재적 차원을 오가는 미로를 만들어내려는 시도라고 해야 할까.

 

    (A) 혹시 94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세요? 네 기억해요. (···) 94년도면 제가 열 살 때인데요. 그때 이사를 갔거든요. (···) 그리고 그해는 여름이 기억나요. 굉장히 더웠었고 (···) 해가 쨍쨍해서 뭔가 더운 나라처럼 길가에 빛과 그림자가 선명하게 구분되었던 것이 기억나요. (···) 여름의 이야기를 시작하자 멀리서 여름의 냄새가 햇볕에 잘 말린 흰 천의 냄새가 컵에 맺힌 물방울의 표면이 떠올랐다.(『사랑하는 개』, pp.44~45)

 

    (B) 94년의 여름 교실 창가에 앉아 있었을 때 (···) 아주 가늘고 작은 그래서 눈에 보일 리 없는 피에로 복장의 사마귀 크기의 무언가가 맞은편 건물에서 곡예를 넘고 있었다. (···) 피에로는 어느새 내 옆 창가로 와 속삭였다. 이것 봐. 이걸 기억해. 1994년 6월 28일의 하루 이걸 기억해. (···) 다시 찾아온 것. 걸려 있던 액자가 움직이고 말을 듣고 있는 사람 입이 움직이는 모양을 천천히 모두 다 기억하는 이들. 고개를 돌렸을 때 피에로는 사라지고 커다란 햇볕에 잘 말린 커다란 흰 천이 멀리서 햇빛과 바람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는데 맡아 본 세제의 냄새가 나를 찾아오고 그 뒤에는 누군가 서 있다.(pp.65~66)

 

    물론 「사랑하는 개」에는 금이 어린 시절 길렀다는 노디라는 개, 그리고 현재의 금과 함께 산책하는 개가 등장한다. 하지만 내가 다시 나타난 마빈으로 간주하고 싶은 개는 그 개들이 아니다. 꼬리를 이었다가 꼬리를 감췄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다시 나타나는 저 문장들과 장면들, 그러니까 「사랑하는 개」라는 텍스트 전체가 '하나의 기다란, 기억/상상 혹은 현행적인 것/잠재적인 것을 헤매며 산책하는, 그 산책의 와중에 무엇인가를 되살려내기도 하고 만들어내기도 하는, 개의 흔적'이 아닐까. 이 '흔적의 개'를 다시 나타난 마빈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어쩌면 이 단편의 제목 '사랑하는 개'에서 사랑하는 대상 역시, 금이 지금 산책시키는 개나 어린 시절 길렀던 노디가 아니라 여기 이렇게 길게 이어졌다 끊어지며 헤매면서 되살리고 만들어내고 있는 텍스트의 운동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개는 산책하는 개. 안녕, 마빈? 너 여기 있었구나. 「사랑하는 개」를 읽는 일은 이 텍스트의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고 결국 이 흔적의 개와 함께 기억/상상 혹은 현행적인 것/잠재적인 것을 헤매며 산책하는 일이다.
    『사랑하는 개』에 수록된 다른 세 편의 단편에 명시적으로는 개가 등장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저 텍스트의 운동이 변형되어 작동한다는 점에서 소설집 『사랑하는 개』 전체가 개와 함께 읽는/산책하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평범한 일상의 매 순간 속에 이미 끼어 들어와 있는, 그러나 감지되지 않는 작은 존재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뛰어다니는 것을 예감하고 그것들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차가운 여름의 길」), '동면'이라는 가상의 상황 속에서 엄마의 '만들어진 기억'과 실제로 유산한 아이가 어디선가 만나는 '가느다란 연관'을 찾아내려는 흐름 같은 것(「여름의 끝으로」), 예전에 가본 여행지의 식당을 다시 찾느라 헤매며 예기치 않은 장소와 사람들을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고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 없는 장소를 실제의 장소 위에 겹쳐 보는 것(「고기 먹으러 가는 길」)이 모두 다.
    〈패터슨〉의 시인이 시를 쓰는 패터슨이 아니고 비밀노트를 물어뜯어 가출에 성공한 마빈이라면, 『사랑하는 개』의 개는 금이 길렀거나 산책시키는 개가 아니고 저 문장과 장면들의 흐름과 도약과 헤매임을 통해서만 표현되는 헤매며 산책하는 개의 흔적이다. 마빈을 마빈으로 만드는 것이 반복의 반복을 물어뜯고 찢어발기는 이빨이라면, '사랑하는 개'를 사랑하는 개로 만드는 것은, 반복의 반복으로부터 경로를 이탈하여 헤매며 산책하는 "홱홱홱 종종종"거리는 발걸음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홱홱홱 종종종"은 「고기 먹으러 가는 길」에서 가습기의 김 사이에서 피어 나온 유령적인 닭들의 리듬이지만, 닭인가 개인가 고양이인가를 구분하는 것이 여기서의 관건은 아닌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막다른 골목에서 홱홱홱 방향을 바꾸고 이것저것 평범하지만 예기치 않은 것들을 냄새 맡고 두리번거리며 나아가느라 종종종 경쾌하게 걷는 개의 다리가 개의 물어뜯는 이빨만큼이나 시인의 자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일정한 방향이나 속도를 흐트러뜨리는 "홱홱홱 종종종"의 리듬, 그 리듬으로 사라져 가느라 보일 듯 말 듯한 개의 꼬리는 롤랑 바르트의 개를 떠올리게 한다.
    롤랑 바르트는 개의 꼬리에 매료된다. 개의 꼬리는 그 흔들림의 강도나 진폭 속도 등의 미묘한 변화를 통해 자기 영혼의 미묘한 떨림을 있는 그대로 섬세하게 표현해 낼 수 있고 또 그것을 표현해 내지 않거나 감추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개의 꼬리가 없다는 결함을 보완하느라 뉘앙스가 풍부한 텍스트를 만들어내려 애쓰는 것이다. 번역가능하고 교환가능한 일반언어들이 놓치기 쉬운 독특하고 미묘하며 미세한 것들을 체험하고 표현하는 꼬리를 언어에 달아 줄 때 '뉘앙스'가 풍부한 텍스트가 발생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기억의 오류. 바르트가 개의 꼬리를 인간의 언어와의 관련 속에서 말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의 비슷한 내용의 문장을 찾아냈다. "개에게서는 정동이 눈에 보입니다. 그 절대적 무매개성과 '운동성' 속에서 말입니다. 개의 꼬리를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꼬리를 흔드는 동작은 정동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얼굴이 아무리 자주 바뀐다고 해도 개가 꼬리를 흔드는 동작의 미세함은 따라갈 수 없습니다. (···) 빠른 변화에 따라 이루어지는 다양한 무늬의 애정(항상 개의 꼬리, 슈퍼 얼굴과 같은 개의 꼬리를 생각하세요)."4)

  4)  롤랑 바르트, 변광배 옮김,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민음사, 2015, pp.121∼123.

 

*

 

    이 모든 산만한 이야기와 개에 관한 명상은 권민경의 시 「가죽 자루」(『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문학동네, 2018)에서 시작됐다.

 

「가죽 자루」

 

나는 개이거나 곰이었는데 그 둘을 다 좋아했다. 꼬리가 길거나 짧은 육체.
빌딩 사이로 스며드는 꼬리. 사라진 몸 대신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콧수염이 씰룩거린다. 길 건너편. 우체통 뒤에 동물의 눈이 숨어 있다.

 

사람이나 동물이 간다. 무빙워크 위를 걷듯 아스팔트를 스쳐서. 긴 바퀴 자국을 남기며 멈추는 자동차. 혼은 연쇄적으로 투명하다. 이다지도 날렵한 몸이 도로를 가로지른다. 각자의 자루에서 벗어난 눈들.

 

자전거를 타고 갈 때 마주치는 것. 길을 비키는 사람들. 좁은 자루의 커다란 입. 사라진 다리. 나를 피하는 표정. 놀란 목젖. 눌린 자루에서 삐져나오는 혼.

 

질기며 약하기. 가로등 사이에 숨을 수 있는 능력. 나타나고 싶을 때 다시 나타날 수 있는 재능. 숨는 버릇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자꾸 자루를 삐져나오는 목숨 때문에 스카이라인은 미어진다. 이 자루가 터지지 않게 껴안기.

 

품속은 따뜻하다. 가득 메운 존재들. 도시는 빵빵하다. 목적지로 향하는 우편 꾸러미. 자주 받고 싶은 인사가 튼튼해진다. 냄새 없이.

 

    아마도 이 시에 의해 만들어지는 연상은 이런 것인 것 같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텅 빈 공간, 빌딩 사이 골목길 사이로 방금 무엇인가가 걸어 들어가 사라져 버린 것만 같다. 사라짐의 흔적인 어떤 '꼬리'를 본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수많은 꼬리들이 여기저기의 틈으로 스며들고 있는 것만 같다. 거의 보이지 않지만 가늘게 살랑거리는 꼬리들은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며 주위 공간을 흔들리게 하고, 콧수염처럼 씰룩거리며 흔들리는 텅 빈 공간으로부터 어떤 말이나 웃음이나 재채기가 터져 나올 것만 같게 만든다. 저 꼬리-아지랑이-콧수염 아래서 무(無)의 입이 열릴 때, 우편물을 가득 담은 자루의 입이 열리고 무수한 유령적 메시지들이 여러 장소들로 쏟아질 것 같다. 혹은 우리의 일상을 담아 두고 있는 가죽 자루에 틈이 생겨 우리 안의 무엇인가가 자유롭게 흩어질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런데 그 가죽 자루가 일상적 현실이기 이전에 우리의 영혼과 생명을 담고 있는 육신이라고 한다면, 이 시의 연상에 따르면, 그 가죽 자루 육신에 달려 있는 꼬리야말로 잠겨 있는 가죽 자루의 입구를 여는 '열쇠'가 된다. 꼬리는 사라지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의 흔적이며 그 흔적으로부터 아지랑이와 콧수염이 되어 무엇인가를 흔들리게 하고 씰룩거리며 유령적인 것들이 터져 나오게 하는 것이니까. (바르트의 흔들리는 꼬리가 권민경의 시에서는 사라지고 스며들면서 묶여 있는 자루의 주둥이를 연다.) 이런 연상들 때문에 시인은 "꼬리가 길거나 짧은 육체"를 좋아하고 그 때문에 자기 자신을 "개이거나 곰이었"다고 믿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한 믿음으로부터 이 시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주의사항. 그 가죽 자루를 함부로 다루지 말 것. 가죽 자루에 갇힌 채 틈을 찾고 결국엔 삐져나오는 그것도 가죽 자루의 품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가죽 자루는 무엇인가를 껴안고 잉태하게 하는 품이 되어 주는 것이기도 하니까. 뭐야, 너, 마빈 아니었어?

 

*

 

    나는 사라지는 꼬리에서 산책하는 개를 그리고 열리는 가죽 자루의 주둥이에서 물어뜯는 개를 떠올리며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와 『사랑하는 개』와 〈패터슨〉 사이에 오솔길을 내고 싶었던 것인데, 꼬리를 살랑거리는 개와 산책하는 개와 물어뜯는 개에 대해서라면 앞에서 이미 길게 이야기한 것 같다.
    이제 마지막으로 '짖(지 않)는 개'에 대해 덧붙이고 싶다. 이 '짖(지 않)기'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는, 다른 시인의 시작노트와 권민경의 시를 함께 놓고 보는 것이 편리하다.

 

    옆집 개가 문간에 나앉아 있다. 짖지도 못하고, 하지도 못하는 개. 엊저녁에 광견병 접종을 하고 온 개. 이제는 미칠 수도 없게 된 저 개. 개는 사람을 어떻게 견딜까…….(김언희, 「시작노트」, 『문예중앙』 2014년 가을호, p.245.)

 

「종양의 맛」

 

거대한 물혹과 한쪽 난소를 떼어낸 후
고기를 먹을 때면 뒤적거렸어
동물의 아픈 부분을 씹을까 조심스러워
그게 내 몸 같아서

 

암센터 건너 늘어선 주택
큰 개 순하게 매여 있네
짖을 타이밍을 잊은 개는
긴 혀를 빼물고 헐떡인다
너의 몸 어디선가 고요하게
자라고 있을 거야

 

나는 혹부리 여자
계절마다 새로운 혹이 돋고
모르는 새 유행에 민감해졌네
환자복 입고 딸기 향 립글로스를 발랐지
향기는 소독되고
주택가를 떠도는 애드벌룬
종양은 부푼다

 

사람들이 태아를 걱정할 무렵
나는 세상의 작은 혹들이 애틋했네
그런 처녀였지
종양을 잉태한 줄 모르고
손자는 먼 훗날의 이야기

 

주렁주렁 열린 감자 겨울을 나고 좋은 씨감자 될 거야
품질이 좋고 맛좋아

 

퇴원을 축하하며
엄마는 오랫동안 고기를 삶았지
들통을 열어 보면 작은 종양을 달고
열심히 꼴을 먹던 소가 떠올라
나는 오랫동안 식물이 되고

 

    시작노트의 저 개는 아마도 주인의 아파트에서 함께 살기 위해 성대수술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이 개는 짖을 수 없다. 할 수도 없다. 이 개는 자신의 충동에 충실할 수 없기 때문에 거의 미칠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인은 급기야 이 개에게 광견병 주사까지 맞히고 말았다. (시적인 비약을 거쳐) 그래서 이 개는 미칠 수도 없게 되었다. 미칠 수도 없는 이 개는 어떻게 되는 걸까? 견디다 못해 풍선처럼 펑 터져버리는 것일까? 미칠 수 없다는 것이 이 폭발조차 허용하지 않은 채 무엇인가가 견딜 수 없게 안으로만 쌓이는 괴로움을 견뎌야 한다는 것일까? 이 개는 자신의 삶을 저 지경으로까지 망가뜨리는 사람을 어떻게 견디는 것일까? 그리고 아마 이 노트에서 생략된 문장은 이런 것이리라.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삶 또한 그와 같이 짖을 수도 할 수도 미칠 수도 없게끔 만들어 놓지 않는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견디는 것일까?'
    그렇다면 짖는다는 것은 생동하는 삶의 건강한 발산이고 자기 긍정이며 짖을 수 없다는 것은 삶을 형편없이 구겨 놓는 일이 될 것이다. 김언희의 어떤 시들은 그러므로 짖을 수 없고 미칠 수조차 없는 상황과 관계되어 있거나 짖을 수 없는 사람들을 대신하기 위해서라는 듯이 거의 짖는 듯한 목소리를 취할 때가 있고, 그 짖기가 성공적이 되는 순간에 대해 시인은 종이를 찢어버리는 일이 벌어진다고도 쓴 적이 있다("종이가 찢어질 정도로 훌륭한 시를,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쓰고 싶었습니다."5) '짖기=찢기'에서 우리가 다시 마빈을 연상시키는 것은 자연스럽다).
    권민경의 시 「종양의 맛」은 특히 2연에서 김언희의 시작노트와 거의 같은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짖을 타이밍을 잊은 개의 몸속에서 괴로움이 신체화 되어 종양으로 자라는 저 장면에서. 그러나 권민경의 시는 김언희의 노트와 다른 길을 간다. 권민경의 시는 짖으려 하지 않고 찢으려 하지 않는다. 이미 「가죽 자루」에서 본 것이지만, 권민경의 시는 어떤 '틈'을 발견하려고 애쓰지만 가죽 자루를 함부로 터뜨리거나 찢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차라리 거기서 어떤 '품'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 그래서 난소의 종양은 태아처럼 애틋하게 자라나는 작은 혹이 되고, 주렁주렁 열려 알이 굵어지는 맛 좋은 감자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의 첫 연과 마지막 연에서 화자가 하는 일이, 종양을 앓다가 신체의 일부를 떼어내야 했던 자신의 아픔과 살코기로 해체되어 식탁에 오른 소의 아픔을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고, 그러한 동일시 속에서 소 역시 자신처럼 종양을 앓았으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아니며, 소를 먹는 자신을 속죄하기 위해 스스로 풀이 되어 소에게 먹히는 상상을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시는 그런 도덕적인 시가 아니다. 시가 전개되면서 종양은 태아와 감자와 함께 하나의 꿈속에서 반죽되어 더 이상 고통의 덩어리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된다. 그러니까 「종양의 맛」은 고통의 덩어리에 대해 짖어대거나 그것을 찢어버리지 않은 채로, 고통의 덩어리를 다른 무엇인가로 변형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내기가 걸려 있는 꿈이다. 이 시의 시작에는 자신의 고통에서 비롯된 다른 존재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분명히 있지만, 시가 전개되면서 자신의 고통에 대한 호소나 다른 존재의 고통에 대한 공감 또한 다른 것으로 변형된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고기 삶는 들통을 열어 보고 "열심히 꼴을 먹던 소가 떠올라/ 나는 오랫동안 식물이 되고" 만다는 것은 소를 먹는 자신을 속죄하기 위해 스스로 풀이 되어 소에게 먹히는 일을 상상한다는 것이 아니다. 소는 물혹처럼 부풀어 있는 여러 개의 위(胃)를 지니고 있고 그 위로 되새김질하며 열심히 꼴을 먹는다. 열심히 꼴을 먹는 일은 상상 속에서 더 많은 위를 애틋한 작은 혹처럼 돋아나게 할 수 있고 그것들 하나하나를 애드벌룬처럼 부풀게 할 수 있다. 커다랗고 무수한 생명의 가죽 주머니들. 이 시의 화자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며 소의 물혹-위장처럼 주렁주렁 많은 물혹-감자들을 낳고 기르는 씨감자가 된다. 대지를 파고들어 이곳저곳을 더듬으며 어둠을 움켜쥐어 무수한 굵은 알로 눈뜨는 감자가 된다. 그리고 아마도 소가 주렁주렁 열린 물혹-살코기로 누군가를 먹이듯 나-감자 또한 나의 물혹-감자들로 어떤 존재들을 먹이고 싶을 것이다. 어떤 존재들을? "세상의 작은 혹들"을. 더럽고 불쾌하고 불순한 것으로 취급되고 떼내어지고 버려지는 것들을. 없는 셈 취급되거나 차라리 없어져야 하는 것으로 취급되는 것들을.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에는 바로 그런 종양과도 같은 것들을 견디고 기르고 먹이려는 꿈이 들어 있다. 이를테면 이런 꿈. "나는 오랫동안 낳길 희망했습니다 낳고 낳아 하나의 지파를 이루길/ 아프리카의 어머니 폴리네시아의 어머니 되길 바랐고 어떤 가능성을 지닌 뉴제너레이션을 품길 원했습니다"(「투명한 추첨함」, 그러나 권민경의 시에서 뉴제너레이션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크고 강하고 아름다운 보다 진화된 어떤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짖을 타이밍을 잊은 개"는 그저 불쌍한 존재가 아니다. 그 개는 짖거나 찢거나 폭발시키거나 물어뜯는 것과는 다른 길을 찾는 개, 가죽 주머니의 '품'에 대해 생각하며 그 자신이 가죽 주머니가 되어 무엇인가를 안고 품고 낳고 기르는 개다. 권민경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시적 포옹을 연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권민경의 짖지 않는 개가 (물어뜯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짖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짖지 않는 개가 그저 조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죽 주머니의 품안에서 결국 많은 것들을 소란스럽게 쏟아내기(=짖기) 때문이다. 내가 앞에서 권민경의 개를 '짖(지 않)는 개'라고 표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이런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 어느 피아노 연주자의 꿈에서 양손에 여섯 번째 손가락이 돋아나는 바람에, 쓸모없고 떼내어져야 할 바로 그것이 연주 안에 자꾸만 쓸모없고 떼내어져야 할 잡음들을 포함시킨다. 말하자면 이 여섯 번째 손가락이 악보의 품안에 미로를 넓히고 잡음을 낳고 기르는 짖(지 않)는 개다. 이 꿈을 악몽으로만 체험하지 않는 것이 권민경 시의 관건이다. 여섯 번째 손가락이 짖(지 않)을 때마다 잡음이 끼어들고, 잡음들이 번성함에 따라 연주하는 손가락들 자체가 부채처럼 넓게 펼쳐진다. 펄럭일 듯 펼쳐지며 소란스럽게 생동감 넘치는 생의 음악이여. 악보 위를 산책하며 미로를 뚫는 개, 미로의 주름들을 더듬으며 잡음을 낳고 기르는 개, 짖(지 않)는 개, 그 개들이 번성함에 따라 버려질 것들이 창궐하는 조율되지 않는 음악의 꿈을 그리고 그 꿈을 고이 간직하는 꿈을 아래의 시에서 읽어낼 수는 없을까?

  5)  김언희, 「시인의 말」, 『요즘 우울하십니까?』, 문학동네, 2011.

 

 

「귀여운 육손이」

 

귀부인의 부채처럼 활짝
펼 때 아름다운 손
레이스처럼 펄럭이던
여분의 삶
여섯 번째 손가락을 분리한 밤
열이 오르고 환상 속에서 손가락이 여섯 개인
아름다운 난쟁일 만나지
수줍은 듯 얼굴을 감싸는
열두 개의 별자리 열두 개의 귀여운 손가락
하늘이 커다란 오르골처럼 돌아가요
별들이 길을 따라 행진하네요
피아노를 연주하는 손
여섯 번째 손가락이 잡음을 만들어내지
꿈은 조율되지 않네

 

쓸모없는 것이 다정할 때
갓 먼지를 털어낸 보석함에
떼어낸 손가락 두 개를 고이 넣어두었어
어느 날 내 방엔 조그만 발자국이 어지럽고
보석함은 뚜껑이 열린 채
오르골 소리는 끓어질 듯 이어지네
없어진 건 여섯 번째 손가락뿐.
자다가 경기를 일으키고 머리맡을 더듬거렸어
어느 주머니 속
내가 벗어 놓은 이름
옛날 동전 부대끼네

 

 

 

 

 

 

 

 

 

 

 

 

 

작가소개 / 권희철

문학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전공 교수. 평론집 『당신의 얼굴이 되어라』가 있다.

 

   《문장웹진 2019년 02월호》

 

목록

댓글남기기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