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진 - 김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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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오리진

 

 

김희선

 

 

 

    교황청의 깊고 어두운 지하에 둥글고 오래된 나무 탁자가 놓여 있는 비밀스런 회의실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얼마 없다. 아마 아무리 많아 봤자 열댓 명 정도? 그들은 모두 바티칸에서 중요한 직책을 수십 년째 맡아 온 '몬시뇰'이라 불리는 최고위 성직자들이며, 교회의 중요한 일에 대하여 교황과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대단한 권한을 가진 추기경들이다. 탁자는 투박하고 아무 꾸밈없는 디자인에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해진 표면을 가지고 있는데, 전해 오는 전설에 의하면 오래전 베드로가 여기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신에게 기도를 올린 적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때만 해도 그것은 탁자라기보다는 그저 커다란 떡갈나무 둥치에 불과했고, 베드로가 천국으로 떠나버린 후에는 카타콤의 어두운 구석에서 곰팡이와 함께 서서히 썩어 가는 신세에 놓이고 말았다. 나중에 로마 시내 뒷골목에서 가구를 제작하는 일을 하던 어느 목수가 그 음습한 장소에서 떡갈나무 밑동을 발견할 때까지 말이다. 그는, 12사도들이 남긴 기록을 정리하고 새로 옮겨 쓰는 일을 하고 있던 한 필사가에게서 탁자 하나를 새로 제작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나무를 사용해 주시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소." 목수는 기꺼이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공방의 제자들이 모두 잠든 밤 작은 촛불을 하나 들고 지하묘지로 향했다. 그곳엔 박해받는 신도들이 쓰던 물건이 꽤 남아 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것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울 거라는 게 목수의 생각이었다. 그가 무덤의 돌문을 옆으로 민 다음 약간은 두려움에 떨며 조심조심 안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찾아낸 것이 바로 그 썩어 가는 떡갈나무 둥치였다. 하긴 그게 정말로 베드로가 쓰던 나무 밑동이 맞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할 것이다. 단지 한 가지 증거라고 내밀 수 있는 것은, 목수도 그날 밤 양초를 가까이했을 때에야 겨우 발견한 거지만, 한구석에 주머니칼 같은 걸로 새긴 '베드로'라는 이름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는 사실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필사가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는 당장 그것을 잘 다듬어 탁자를 만들어 오라고 지시했다. 목수는 긴 세월 동안 방치된 나무에 수북이 돋아 있던 버섯을 모두 따서 버리고, 끌과 대패 등을 이용해 겉면을 매끄럽게 다듬었다. 땅에 박혀 있던 뿌리 부분은 이미 썩을 대로 썩어 있어서 별로 힘도 주지 않았는데 그냥 쑥 뽑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만들어져 고가에 팔린 떡갈나무 탁자는, 밀라노 칙령이 선포되고 나서 얼마 뒤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바쳐졌다. 그가,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책 <고백록>을 그 떡갈나무 탁자에서 썼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탁자가 마지막으로 일반인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니케아 공의회가 열리던 당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회의실 한가운데 놓여 있을 때였다. 거기서 교부들은 서로 탁자를 주먹으로 쾅쾅 쳐가며 언쟁을 벌였고, 그리하여 삼위일체 교리가 만방에 선포됐을 때, 이단으로 몰린 아리우스는 한동안 그 떡갈나무 테이블에 팔을 짚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옆에 있던 아타나시우스가 "뭐 하십니까? 이제 떠나셔야지요."라고 말하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일어나서 터덜터덜 걸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아리우스가 떠나고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히자, 가장 나이가 많고 유별나게 등이 구부정한 교부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앞으로, 타락한 세상에 맞서 신의 말씀을 지키는 선택받은 자들만이 이 탁자에 둘러앉을 수 있는 영광을 누리도록 합시다." 모두가 박수를 쳐서 동의했고, 곧 탁자는 아무도 모르는 깊고 깊은 지하로 옮겨졌다. 방의 사방 벽은 튼튼한 돌로 메웠고 문은 두꺼운 강철로 특수제작 되었는데, 교부들은 거기에 거대한 자물쇠를 단 다음 총 12개의 열쇠를 만들어 서로 나누어 가졌다. 모두가 한꺼번에 열쇠를 넣고 동시에 돌려야만 열릴 수 있도록 제작된 자물쇠였기에, 그중 한 사람이라도 빠진다면 베드로의 성스러운 탁자엔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유서 깊은 탁자에 둘러앉아 열리는 '회의'(이곳에서는 이 단어 앞에 어떤 수식어도 붙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리고 이것만 보아도 이 모임의 성격이 얼마나 절대적인 것인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를 주관하는 교황청의 부서는 '신앙교리성'인데, 이는 오래전 악명 높았던 '종교재판소'에 부여된 새로운 이름이었으니, 지금 저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음울한 얼굴로 둘러앉아 있는 현대판 교부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로 심각한 것인지 짐작 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사실, 『버튼』이라는 이름을 가진 얄팍한 소설책이 아마존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을 때 교황청은 꽤나 동요했다. 그리고 반나절이나 걸리는 긴 회의를 마친 다음 신앙교리성 장관은 문서담당관인 바르톨리니의 사무실로 황급히 달려갔던 것이다.
    마침 매일 발행되는 교황청 홍보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에 매주 금요일마다 "비밀은 없다, 오직 진리뿐"이라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던 바르톨리니는, 원고를 쓰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가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사과의 말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이는, 신앙교리성 장관인 카사롤리 추기경이었다. 매부리코에 금테 안경을 걸친 신앙교리성 장관은, 원고를 쓰고 있던 문서담당관이 깃털 펜(그는 아직까지도 고풍스러운 방식으로 글을 쓰는 몇 안 되는 사람들에 속했다. 컴퓨터 자판을 누르면 왠지 생각이 기계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는 게, 매일 크리스털로 된 잉크병에 새 잉크를 채우고 깃털 펜으로 그걸 찍어서 한 글자씩 꾹꾹 눌러쓰는 그의 변명이었다. 그가 굳이 그런 걸 변명하는 이유는, 매주 원고를 보낼 때마다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의 교정 직원이 조심스러우면서도 공손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짜증난다는 듯한 태도로 이렇게 물었기 때문이다. "저어, 추기경님, 이젠 세상이 바뀌었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힘든 글쓰기를 계속하실 생각인지요? 저라면 컴퓨터를 이용해 좀 더 수월하게 글을 쓸 것 같습니다만.")을 천천히 내려놓는 걸 보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정말 마음도 편하십니다, 그려. 세상엔 불경한 책이 득시글대고 어린 양들은 혼돈에 빠져 우왕좌왕하는데 혼자서만 그렇게 여유 만만한 이유를 알 수가 없군요." 그 말에 바르톨리니가 빙긋 웃었다. "이런, 미안합니다. 지금 칼럼 원고를 쓰고 있어서요. 아무리 급하고 촌각을 다투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음,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내일 당장 신이 내려와 우리 모두를 심판할지라도, 나는 원고마감일은 꼭 지킨다는, 그런 신념으로 살아왔습니다. 잘 아실 텐데요?" 그 말에 카사롤리는 울컥했지만,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참았다. 하급 수사들도 지켜보고 있는데 최고위 성직자들끼리 말싸움이나 벌인다면 체통이 서지 않을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짜증과 분노,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깊이 숨을 들이마신 다음 억지웃음을 지으며 바르톨리니에게 말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 책임감!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 바로 신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신 올바른 삶의 길이지요. 헌데 미안하게도, 원고를 마감하셔야 하는 이 바쁜 시기에, 제가 이렇게 급한 일이 있어 결례를 무릅쓰고 이 방의 문을 벌컥 열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최근 들어 교회는 신의 말씀과 진리에 반하는 자들로부터 그 어느 때보다도 거센 도전을 받고 있으며, 신앙교리성은 그런 자들을 찾아내어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불철주야 부단히 노력해 왔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얼마 전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책 한 권이 보란 듯이 순위에 올라……." 그러나 신앙교리성 장관의 말은 여기서 끊겼다. 문서담당관이 다 알고 있다는 듯 손을 내저었기 때문이다. "아, 알고 있습니다. 그 소설책을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버튼'인가 뭔가 하는 제목을 가진." 카사롤리의 얼굴은 순식간에 벌겋게 변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누군가가 중간에 끼어들어 자기 말을 자르는 걸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카사롤리는 이번에도 또 한 번,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별것 아닌 사소한 일로 쓸데없는 분열을 초래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문서담당관에게 밉보여 봤자 좋을 건 하나 없다. 그는 교황청이 비밀리에 소장하고 있는 엄청나게 많은 문서들의 목록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바티칸의 사정을 잘 모르는 이들은, 도대체 그런 목록을 왜 단 한 사람의 성직자가 혼자서 간직하고 있는지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방식은 무척이나 전근대적이고도 비효율적인 방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원래 오래되고 변화가 없는 조직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법이다. 즉, 그저 예로부터의 전통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갖가지 불필요한 규칙을 꿋꿋이 지켜 나가고 있는 것 말이다. 단 한 사람의 성직자만이 문서 목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래전 ― 하긴 생각해 보면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지만 ― 종교재판소가 툭하면 사람을 화형에 처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은 모두 불살라버리던 시절에 만들어진 구시대적 법률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고 종교재판소가 신앙교리성으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또 책이라는 것이 부와 지위와 비밀스러운 지혜의 상징이던 시절이 다 지나가고 컴퓨터만 켜면 세상에서 가장 큰 도서관에 소장된 희귀문서까지 다 읽을 수 있는 시대가 왔어도, 이상하게 그 규칙만은 변하지 않았다. 즉, 오직 한 명의 담당자만이 이 거대한 석조건물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는 비밀문서들의 위치와 목록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여간 카사롤리 추기경은 왠지 기분이 나빠져서 좀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역시 이미 모든 걸 알고 계시는군요. 그렇습니다. 그 이상한 책은 어느 미치광이 작가의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신 따윈 없고 당연히 절대적 진리도 없으며 세계란 신기루와 같아서 언제든 마음만 먹는다면 새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떠들어대니까요. 다만 걱정인 것은, 그 책이 많이 팔리면 팔릴수록 세상은 어둡고 기묘한 생각에 좀먹어 들어갈 테고 사람들 내면의 불신은 점점 더 커질 거란 사실입니다. 방금 전만 해도 한 무리의 시위대가 광장 앞에서 구호를 외치지 않았습니까? 당장 전원을 끄라고요."
    얘기가 길어질 듯한 기미를 보이자, 바르톨리니가 의자를 권했다. "그러지 마시고 앉아서 말씀하시지요." 그런 다음 그는 밖에 있던 비서에게 차 두 잔을 부탁했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어쨌든 신앙교리성 장관은 고령자였다. 저렇게 오래 서서 저 정도로 흥분한 상태로 이야기를 계속하면, 결국엔 제 분을 이기지 못하여 풀썩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또 그건 얼마나 큰 문제가 되겠는가. 무엇보다도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이곳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고 그의 원고마감은 점점 더 늦어지게 될 터였다. 의자에 앉은 카사롤리 추기경이 숨을 돌리는 사이, 바르톨리니는 방금 전까지 적던 문장("따라서 이곳에 그 어떤 종류든 비밀스러운 뭔가가 존재한다는 생각이야말로 구시대적 발상인 것이다."라는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원고를 가지런히 정리하여 한 곳으로 밀어 뒀다. 아무래도 마무리는 좀 있다 조용한 시간에 마저 하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고를 밀어 두면서 그가 재빨리 한구석에 펼쳐져 있던 책을 접어서 표지가 보이지 않게 뒤집어 두는 광경을, 카사롤리는 보지 못했다. 따라서 그 위에 인쇄된 제목이 『버튼』이라는 것도 당연히 눈치 채지 못했고 말이다.) 그러고 나서 문서담당관은 접견용 소파에 앉아 국화차를 마시고 있는 신앙교리성 장관에게 말했다. "하지만 추기경님, 그 책에 대하여는 그리 걱정할 일이 없다고 봅니다. 어차피 지금은 다들 이런저런 의견을 내며 흥분해 있지만, 사람들은 곧 더 흥미롭고 재미난 뭔가에 빠져들 테니까요. 아마 대부분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자기들이 그런 책을 읽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말걸요?" 그러자 티스푼으로 건져낸 말린 국화꽃잎을 들여다보고 있던 카사롤리 추기경이 잔을 내려놓고는 자세를 바로하고 앉았다. 옷깃까지 잘 여미는 것을 보니 뭔가 아주 중요한 말을 꺼낼 예정인 듯 보여, 바르톨리니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곳의 문서담당관으로서 저들, 그러니까 『버튼』이라는 책을 쓴 작자 놈 말입니다, 그가 주장하는 내용이 백 퍼센트 옳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즉 당신이 관리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속속들이 알고 있는 저 광대한 책의 미로 안에 그들이 말하는 그런 불경한 물건 따윈 없다고 당당히 증언할 수 있느냐, 이겁니다." 잠깐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바르톨리니는 차를 한 입 마신 다음에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괴이한 물건에 대해서라면, 그는 어차피 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는 그 역시 거기에 대해 아는 바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

 

    처음 이 중차대한 직책을 맡았을 때 전임 문서담당관은 그에게 거대한 열쇠꾸러미를 건네주며 말했다. "자, 이게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작성된 모든 문서들이 담긴 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들이요.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 많은지, 아마 직접 보면 거의 기절할 지경에 이를지도 모릅니다. 인류 역사에 단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엄청난 비밀문서부터 별 쓸모없는 종이쪼가리에 이르기까지, 없는 게 없는, 그야말로 세상 모든 기록의 보고니까요." 바르톨리니가 두 손으로 열쇠꾸러미를 받아들자,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전 담당관이 잽싸게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그의 손에 꼭 쥐어줬다. "이게 무엇인지요?" 당황하여 묻는 바르톨리니에게 전임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오른손 검지를 입에 대며 "쉿."이라고만 대답했다. "모든 건 그 안에 다 적혀 있습니다. 나중에 아무도 없을 때 혼자서만 읽어 보시고, 열쇠는 잘 보관하되 종이는 찢어버리십시오, 아니, 찢어서 아예 삼켜버리세요. 아무도 알 수 없도록 말입니다. 그럼, 이제 당신에게 다 넘겼으니 나는 돌아가겠습니다." 바르톨리니는 그가 건네준 게 뭔지 주먹을 아주 조금만 펴고 조심스레 살펴봤다. 붉은색 비단주머니 안에 뭔가가 들어 있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실 건지요?" 전임 문서담당관은 환히 웃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거기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요. 그곳은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조용하고 정겨운 해변마을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다가 보이는 고향마을로 돌아가지 못했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그가 탄 승용차가 맞은편에서 오던 트럭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바르톨리니가 비단주머니를 다시 떠올린 것은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처음으로 집무실에 마음 편히 앉아 있을 때였다. 며칠간의 장례식과 업무 인수인계 때문에 온몸이 뻐근해진 나머지 길게 기지개를 켠 다음 주머니에 손을 넣은 순간, 안에 있던 매끄러운 천주머니가 손가락 끝에 닿았다. "이게 뭐지?" 그걸 꺼내자마자, 그는 별로 긴 대화는 나눠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꽤 사람 좋게 느껴졌던 전임 문서담당관의 얼굴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졌다. 그가 천국으로 올라가 영원한 복락을 누릴 거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톨리니는 "이승의 개가 저승의 재상보다 낫다."라는 어느 나라의 속담에 마음이 끌리는 편이었다. 그가 알기론, 천국엔 오직 빛뿐이고 인간은 모두 똑같은 얼굴로 미소 짓고 있다고 했다. 예전에 핀란드에서 여름을 나면서 낮만 계속되는 지긋지긋한 백야에 질린 그로서는, 빛이 가득하다는 천국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온통 어둠뿐이라면 등불이라도 켜면 된다. 그러나 오직 환하기만 하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그 거대한 빛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그런 자신의 생각이 불경하다는 것을 알고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비단주머니의 끈을 풀었다. 안에는 돌돌 말린 두루마리 같은 게 하나 들어 있었고, 그걸 펴자 은빛 열쇠가 툭 떨어졌다. 두루마리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뭘 읽고 씹어 삼키라는 거였지?"라고 중얼거리며, 바르톨리니는 두루마리를 앞뒤로 살펴봤다. 혹시 뭔가 비칠까 싶어 빛이 들어오는 창문 쪽에 대고 눈을 가늘게 떠봤지만,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아주 오래전, 소년 시절 읽었던 추리소설의 한 페이지를 떠올린 것은. 그는 책상 위에 있던 양초에 불을 붙이고는 그 타오르는 불꽃 위에 조심스럽게 두루마리 종이를 갖다 댔다. 그러자 서서히 글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분 같으니라고. 이런 구식 트릭을 쓰다니!' 이상하게 즐거워져서 바르톨리니는 빙긋 웃었다. 레몬즙으로 글자를 적은 뒤 말리면 종이엔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그걸 불 가까이 가져가면 즙이 묻었던 부분만 갈색으로 변하면서 원래 적었던 글자가 나타나는데, 사실 그건 아주 쉽고도 단순한 트릭이었다. 레몬에 들어 있던 구연산이라는 성분이 열에 의해 빠르게 종이 속 수분을 방출시키면서 나타나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바르톨리니는 불꽃 위에서 나타나는 글자를 하나씩 차례로 읽었다. "이것은 비밀문서 보관실 가장 안쪽 구석에 있는 금고의 열쇠입니다. 거기엔 당신이, 아니, 우리가 결코 알아서는 안 될 물건이 하나 들어 있지요. 그게 무엇이냐 하면…… 휴, 내 입으로는 도저히 말 못 하겠습니다. 어쨌든, 그런 줄 아시고, 절대 그 금고를 열지 마십시오. 그 안에 있는 물건에 손을 대서도 안 됩니다. 아마 아무 생각 없이 서명을 하셨겠지만, 당신이 문서담당관으로 임명된 뒤 받은 두툼한 각서엔 이런 조항이 있어요. 즉, 본인은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만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를 어길 시에는 내 생명으로 죄를 갚을 것이며 나의 영혼은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리라. 나는…… 나는, 그 맹세를 어겼습니다. 그러니 아마 당신이 이 두루마리를 읽을 때쯤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요. 그럼, 지옥의 유황불에 활활 타고 있을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길 바라며, 이만." 두루마리를 다 읽어 갈 즈음, 바르톨리니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평소 안전하기로 유명했던 그 도로에서 전임자가 타고 있던 승용차가 박살나버린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됐기 때문이다. 두루마리를 읽고 또 읽은 다음, 그는 얼굴을 찡그린 채 그걸 천천히 씹어 삼켰다. 사실 바르톨리니는 지금까지 꽤 많은 종이를 먹어 왔다. 원래 어느 조직에서든, 이 정도의 지위에 오르려면 엄청나게 많은 종이들을 씹어서 삼켜야 하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이상하게 뒷맛이 썼다. 입안에 남아 있던 종이쪼가리들을 삼키기 위해 물을 한 모금 물고 우물우물 양치질까지 했지만, 그 기이하리만치 기분 나쁜 뒷맛은 그 후로도 한동안 없어지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그 찝찝하고 음침한 종이의 맛은 그의 입속에서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나중엔 입 냄새가 나는 게 아닌가, 하는 망상에 시달릴 정도까지 되었다. 중요한 회의가 열리거나 혹은 기자들과 인터뷰라도 있는 날이면, 문서담당관은 몇 번이고 이를 닦고 가글을 한 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아 손으로 입을 막고 숨을 쉬어 봤다. 그래 봤자 맡아지는 것은 청량하기 이를 데 없는 박하향뿐이었지만, 그의 머릿속 후각은 그 씁쓰름하고 텁텁한 구연산 두루마리의 뒷맛에서 영원히 놓여나지 못했다. 아마도 믿음이 깊은 수도자라면 그 정도의 환각은 기도만으로도 충분히 물리칠 수 있었겠지만 ― 이라고 그는 믿었지만 ― 바르톨리니는 이미 '신'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환멸까지 느끼고 있는 처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신과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의 내면은 신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신과 멀리 떨어져 지내던 시절, 그러니까 평범한 교구 신부로 지내며 신자들의 이런저런 고해성사를 들어주고 평일이면 텃밭에서 직접 가꾼 당근이나 감자를 캐던 그런 시절에 그는 신과 꽤나 가까웠다(라고 여겼다). 하지만 베드로의 후계자이자 신의 사도가 거하는 바로 이곳, 바티칸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면서 그의 마음속에 있던 믿음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처음엔 신이 그를 떠났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울며 기도하기도 했지만, 나중엔 이해하게 됐다. 신이 그를 떠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아예 없었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그는 입에서 불에 태운 종이 냄새가 난다는 망상에 시달리면서도 기도도 하지 않은 채 속수무책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제복 위에 오리털 잠바를 껴입은 다음 몰래 교황청을 빠져나와 시내 뒷골목에 있는 다 쓰러져 가는 신경정신과 의원에서 상담을 마칠 때까지는.
    의사에게 문서담당관은 일부러 사투리를 써가며 말했다. "입에서 냄새가 난다는 환각에 시달립니다. 굳이 무슨 내용이 있었다고 밝힐 순 없지만, 어떤 중요한 비밀이 적혀 있던 종이를 씹어 먹은 뒤부터 그래요. 그것 때문에 대인기피증까지 생겼고, 식욕이 떨어져 체중마저 5킬로그램이나 줄고 말았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그의 말에 의사가 빙긋 웃었다. "신체화증후군이군요." "네? 뭐라고요? 신체화증후군…… 이라뇨?" "이뤄지지 못하는 무의식적 욕구가 몸에 이상을 일으키는 걸 말합니다. 당신은 그 종이에 적혀 있던 어떤 금기 ― 그게 뭔지는 나도 모르지만 ― 를 깨고 싶어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또 그럴 용기도 없는 거지요. 아마 냄새에 대한 환각은 계속될 겁니다. 금기를 깨지 않는 한 말입니다." 진료비를 지불한 뒤, 바르톨리니는 터덜터덜 병원의 계단을 내려왔다.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이 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일단 그는 그 금고를 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 안에 들어 있다는 '물건'을 봐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는 끊임없이 뇌리를 맴도는 종이 냄새에 시달리다 쇠꼬챙이처럼 말라 쓰러지리라.
    '난 살기 위해 맹세를 어기는 거야. 아마 신이 있다면, 이해해 주시겠지. 그는 자비롭다고들 하니까.' 뭔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중얼하며 평소와 달리 오리털 잠바를 입은 채 집무실로 들어가는 문서담당관을, 비서는 의아한 얼굴로 오래도록 쳐다봤다. 생각 같아서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라벤더 차라도 가져다주고 싶었지만 눈빛이 워낙에 번들거려서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옷을 갈아입은 뒤, 바르톨리니는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 넣어 둔 은빛 열쇠를 꺼냈다. 그걸 사제복 안주머니에 감춘 뒤 집무실 문을 열고 나와, 복도 끝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걸어갔다. 아까 오리털 잠바를 입고 있을 때와는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진 바르톨리니를 보며, 비서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히 문서담당관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니다. 툭하면 이랬다저랬다 하고 기분이 하루에도 여남은 번은 바뀌는 것 같다. 하긴, 매일매일, 하루도 쉬지 않고 오래된 문서들을 읽고 정리하다 보면 여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게 아닐 거야. 비서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그런 일에 빠져들다 보면, 현실세계와는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천 년 전에 신의 사도들이 직접 썼다는 천국의 문서를 읽는 자가 어찌 비루하고 혼돈에 가득 찬 진짜 세상의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생기겠는가.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 저 끝으로 멀어져 가는 문서담당관의 뒷모습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비서는, 곧 원래 읽고 있던 소설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복도 맨 끝에 다다른 문서담당관은 벽에 기대 세워 둔 르네상스 양식의 책장을 조용히 손으로 쓰다듬었다. 유리문이 달려 있는 그 책장 안엔 갖가지 희귀한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하긴 따로 도서관에 보관하지 않은 걸로 보아 여기선 그리 값나가는 도서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비록 세속의 고문서 전문점에 들고 가면 엄청난 값을 쳐줄지언정 말이다. 그런데 그중 위에서부터 다섯 번째 칸 중간 즈음에 유별나게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문고본 하나가 꽂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은 수세기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희귀한 보물과 예술품들이 즐비한 내부를 둘러보느라, 아무도 이런 조그만 책장 앞에 오래 서 있지 않았다. 어쩌다 한 명쯤은 ― 그러니까 특별히 책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 이 고풍스런 책장 앞에 잠깐 서 있기도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귀한 초판본이라든가 가죽으로 장정이 되어 있고 금박으로 글씨를 새겨 넣은 한정판 책들을 바라보느라, 어느 누구도 『브라운 신부의 비밀』이라는 제목을 가진 문고본에 눈길을 주진 않았던 것이다. 바르톨리니는, 그런 면에서 전임자가 무척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전임 문서담당관은 사람들이 흔해 빠진 것엔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 즉 아주 중요한 것은 척 보기에도 엄청 중요해 보이는 장소에 숨겨 둘 거라고 지레짐작한다는 사실을 역으로 이용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작은 문고본 책이었던 것이다.
    바르톨리니는 유리문을 조심스레 열고 문고본 책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놀랍게도 책장 전체가 빙그르르 돌며 지하로 내려가는 좁은 나선형 계단이 나타나는 것 아닌가. 문고본 책이 눈에 띄지 않도록 잘 꽂아 둔 다음, 문서담당관은 안으로 들어갔다. 돌쩌귀 사이에 있는 작은 단추를 누르자 책장은 다시 한 번 빙그르르 돌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극비문서 보관실로 내려가는 계단은 가팔랐다. 땅 밑으로부터는 오래된 공기에 서린 축축한 습기, 낡은 종이와 양피지들이 뒤섞여 내는 독특한 향기 같은 것들이 물씬 풍겼다. 계단을 다 내려가자 책장들이 미로처럼 펼쳐져 있는 거대한 지하서고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죽은 신부도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 올 만큼 크고 복잡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문서담당관은 빠르게 걸었다. 이 직책을 맡고 나서, 그는 가장 먼저 미로 같은 책장들의 위치부터 정확히 외워 뒀다. 상급자들이 아주 중요한 문서를 찾을 때 몇 시간씩이고 이런 데서 돌아다닐 순 없는 법이니 말이다. 구불구불한 미로를 이리저리 돌아 어느 구석에 도달하자, 문서담당관은 벽을 조심조심 만져 봤다. '찾았다!' 그는 속으로 외치며 아주 미세하게 튀어나와 있는 벽돌 하나를 천천히 빼냈다. 벽돌이 빠진 자리엔 조그만 열쇠 구멍 같은 게 있었는데, 그게 바로 '그것'을 따로 보관해 두는 금고의 문이었던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넣어 돌리자,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아니, 정확히는 벽이 열렸다고 하는 편이 옳으리라. 열린 벽 안엔 작은 상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고 아무런 표식이나 장식도 없는 그야말로 단순하고 깔끔한 나무 상자였다. '저기에 보기만 해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두렵기 그지없는 물건이 존재한다고?' 문서담당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나 무서운 뭔가가 들어 있다면 분명 상자의 형태도 엄청나게 끔찍할 것 같았는데, 이건 뭐 그냥 길에 떨어져 있어도 아무도 주워가지 않을 정도로 볼품없지 않은가. 뚜껑을 열자 안에 검은색 가죽 장정이 되어 있는 얇은 수첩이 한 권 놓여 있는 게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것은 수첩이 아니라, 수첩처럼 생긴 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검고 납작하고 반짝이는 물건이었다. 즉 그건 그저 한 개의 스마트폰일 뿐이었다.
    한동안 망연히 서 있던 바르톨리니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본 다음 가죽 케이스 안에 든 폰을 가져온 보자기에 잘 싸서 법복 안에 숨겼다. 그러고는 검은 상자의 뚜껑을 닫아 제자리에 두고 열쇠 구멍에 다시 열쇠를 넣고 돌리자, 벽이 스르르 닫히더니 마치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바뀌어버리는 것이었다. 옆에 놔두었던 벽돌로 열쇠 구멍이 있던 자리마저 막은 다음, 그는 빠르게 원래의 길을 돌아 나선형 계단이 있던 곳에 도착했다. 거의 뛰다시피 계단을 올라서 단추를 누르자 아까의 그 입구가 나타났다. 책장 너머 문틈으로 살며시 내다보니,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빠르게 밖으로 나와 『브라운 신부의 비밀』을 잡아당겼다. 그야말로 소리도 없이 벽이 사라지고 책장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뒤, 바르톨리니는 천천히 걸어서 집무실로 향했다. '너무 빨리 걷거나 서두르는 것처럼 보이는 건 금물이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의심받을 수 있으니까.' 이 넓고 넓은 교황청 안에 아직 CCTV가 없다는 사실이 그때만큼 고마운 적은 없었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이런 모험은 꿈도 꾸지 못했으리라.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갈 땐 너무나 기분이 좋아져 자기도 모르게 성가를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비서는, 아까까지만 해도 세상의 모든 걱정을 다 짊어진 듯 우울한 표정으로 돌아다니던 문서담당관이 이번엔 밝고 활기찬 얼굴로 콧노래까지 흥얼대며 들어오는 모습을 의아하다는 듯 쳐다봤다. '역시 이상한 분이라니까.' 책상 앞을 지나는 문서담당관의 몸에선 오래된 문서와 습기, 곰팡이, 이끼가 뒤섞인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얼마 후, 문을 닫고 들어갔던 바르톨리니가 구내 회선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네, 추기경님." 비서가 대답하자, 문서담당관이 뭔가 엄청나게 서두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분간은 아무도 들이지 말아 주십시오. 아주 중요한 문서를 정리하는 중이라 작업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그럽니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저녁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쯤,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문서담당관이 걸어 나왔다. 퇴근 준비를 하던 비서는 너무 놀라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저어, 어디 아프신지요? 서랍에 아스피린이 있는데, 그걸 좀 꺼내드릴까요?" 그가 묻자, 유령처럼 창백한 낯빛의 바르톨리니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너무 무리해서 문서를 정리했더니 좀 지친 것 같습니다. 걱정 마시고 들어가 보십시오." 비서는 옷걸이에 걸어 둔 코트를 꺼내 어깨에 걸치며 다시 한 번 문서담당관을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얼빠진 모습으로 멍하니 창 쪽을 보고 있었다. '하여튼 진짜 이상하다니까.' 인사를 하고 나오면서, 비서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

 

    2018년 9월 13일, 라스베이거스 뒷골목에서 자말은 자기 머리에 총을 쐈다. 얼굴 전체가 거대한 구멍으로 변해버린 채 곧바로 병원에 실려 갔지만, 목숨을 건질 순 없었다. 누군가는 그가 시립병원에 실려 가는 대신 좀 더 좋은 병원 ― 보험료를 두둑이 내는 부자들이 다니는 그런 크고 깨끗한 병원 말이다 ― 에 갔더라면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솔직히 아무리 뛰어난 의료진이라 할지라도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을 살려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자말은 정말 운도 없는 놈이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비극은 그야말로 어이없는 일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날 밤, 클럽에서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폰을 하나 주웠던 일 말이다. (참, 내가 얘기 안 했던가. 자말이 래퍼였다고. 뭐, 당연한 거지만, 이름 없는 래퍼였고, 그래서 밤새도록 공연을 해도 받는 돈은 쥐꼬리에 불과하긴 했다.)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문을 밀고 들어오던 자말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봐, 티미, 이걸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놈은 그렇게나 쪼잔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길에서 주운 스마트폰을 팔아 술을 사 마실 생각에 히죽이기나 하는. 목에는 스무 돈이나 나가는 가짜 금목걸이를 걸고 팔에는 온갖 문신을 한 채 "다 죽여 버리겠어." 어쩌고 하는 거친 랩을 읊어대며 으스댔지만, 알고 보면 겨우 그 정도였다는 뜻이다. "한심한 놈." 나는 다 떨어진 소파에 기댄 채 메신저를 하며 툭 내뱉었다.
    하긴 이건 내 생각인데, 그 저주받은 폰을 줍는 대신 그냥 지나쳐서 집으로 걸어왔다면, 언젠가 자말은 ― 나이가 좀 더 들어 개과천선도 하고 자기에겐 래퍼의 소질 따윈 없다는 걸 깨달을 즈음에 ― 작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난 그가 노트에 끼적여 둔 글을 정말 흥미진진해하며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그건 어느 추기경에 대한 얘기였다. 시커먼 옷에 목엔 하얀 칼라를 두르고 사는 이상한 독신남에게 세계 전체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뭐 이런 걸 썼지?" 녀석 몰래 공책을 훔쳐보며 처음엔 욕을 했지만,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끝까지 다 읽은 뒤였다. 흐지부지한 자말의 성격에 걸맞게 소설은 끝을 맺지 않은 상태였고, 그래서 난 몇 번이고 뒷얘기를 마저 써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자말은 알았다고 귀찮은 듯 대답하며 소파에 드러누운 채 야구중계만 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세계에 갑자기 암전이 찾아오더니 모든 것이 무(無)로 변하는 꿈을 꿨다. 식은땀을 흘리며 벌떡 일어나서 나도 모르게 자말의 목을 눌렀다. 곤히 자다가 번쩍 눈을 뜬 자말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미쳤어?"라고 소리쳤다. 그제야 난 마룻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일에 대해선 그 후 서로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우린 둘 다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게 다 자말의 미완성 소설 때문이라는 것을.
    어쨌든, 자말은 컴퓨터나 타자기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볼펜으로 소설을 썼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그저 컴퓨터나 타자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런 걸 살 돈이 없었고 설령 있다 해도 대부분은 술을 사 마시거나 가짜 금목걸이를 사는 데에 다 써버리곤 했다.) 처음으로 읽었던 것 빼고는 다 길이가 짧았는데, 주로 시궁창 같은 빈민가에 살던 애들이 어느 날 출세하여 과거에 자길 배신했던 옛 여자를 찾아가 허세를 부리는 얘기들이었다. 다 읽고 나서 "오, 이거 멋진데?"라고 예의상 말하자, 자말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 잠시 다녔던 무료 작문교실에서 그는 동료들의 혹독한 비판에 직면했다. "왜? 누가 뭐랬는데?" 내가 묻자, 자말이 욕설을 섞어 가며 들려준 이야기는 대충 이랬다. 즉 작문교실의 어떤 잘난 척하는 인간이 ― 그러면서 자말은 그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었다. "매일 말도 안 되는, 그야말로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거지같은 글을 써오는데, 그 자식 말로는 자기가 의식의 흐름 기법인가 뭔가를 따르고 있다는 거야, 젠장." ― 자말의 소설은 피츠제럴드라는 사람의 작품을 할렘가 버전으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자말이 피츠, 뭔가 하는 작가의 글을 표절했을 가능성까지 제기했다. 그게 누군지도 모른다고 항변했지만, 그 잘난 척하는 인간은 자기주장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놈은 맞춤법이 틀린 곳과 문장의 호응이 맞지 않는 부분을 다 찾아내서 온통 빨간 펜으로 고친 뒤 내게 돌려주기까지 했다고!" 사실 그때 자말은 허리춤에 권총을 꽂고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욱한 나머지 벌떡 일어서서 놈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려고까지 했다.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오른손이 허리띠 근처까지 가긴 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막판에 마음을 고쳐먹은 덕분이다. 그는, 저런 샌님 같은 새끼는 쏴봤자 총알만 아깝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놈을 쏴 죽이고 내친 김에 작문반 전체에 총을 난사함으로써 희대의 살인마가 되는 대신, 온통 빨간색으로 여기저기 표시되어 있는 원고뭉치를 집어던지고 쿨하게 교실을 걸어 나오는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자말에게 혹평을 퍼부어 작가로서의 싹을 무참히 꺾어버린 그 남자는 ― 아마도 본인은 자신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영원히 모르겠지만 ― 나중에 진짜 소설가가 되었다는데, 그가 누구인지 아무리 물어도 녀석은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어쨌거나, 자말은 그 사건 이후 매주 출석하던 작문교실에 더 이상 나가지 않았고, 당연히 소설도 다시는 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 만약 그때 그 미친놈이 ― 의식의 흐름인가 뭐 그런 기법을 쓴다는 ― 이상한 헛소리만 하지 않았다면, '자말'이라는 이름은 무명의 래퍼 대신 작가로 알려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작가가 됐다면, 자말은 길거리에서 폰을 주운 뒤 어이없게 죽는 대신, 콜로라도의 어느 조용한 통나무집에서 시가를 입에 문 채 타이프라이터나 치는, 꽤나 조용한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거다. 뭐,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정말로 늙어서 완전 노인네가 될 때까지 천수를 누렸을 거라곤 장담할 수 없지만 말이다. 사실, 알고 보면 작가들도 은근히 괴상한 죽음을 많이 맞이한다. 주로 글쓰기에 집중하겠다는 핑계로 오지를 찾아 들어간 소설가들에게 자주 일어나는 일인데, 그들은 사방에 아무도 없고 들리는 소리라곤 오직 바람소리, 까마귀 우짖는 소리뿐인 적막한 장소에서 기괴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게다가 시시각각으로 숨통을 죄어 오는 마감에 대한 고통, 베스트셀러나 하다못해 세기의 명작이라도 써보고 싶다는 욕망 등에 압도당한 끝에 완전히 돌아버린 그들은, 스스로 도끼살인마가 되어 온 가족을 몰살시키고 자기도 목숨을 끊어버린다. 아니면 영감을 얻겠다며 홀로 떠난 여행길에서 ― 그럴 때 그들은 반드시 듣도 보도 못한 낯선 길로 접어든다. 뻔히 보이는 이정표와 제대로 된 지도책을 무시하고 말이다 ― 광적인 팬에게 사로잡혀 두 다리에 망치질을 당해 가며 그녀(또는 그)가 원하는 대로 소설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끔찍한 상황에 맞닥뜨리기도 하고 말이다. 하긴 그것뿐인가. 헤밍웨이라던가, 하여튼 그 비슷한 이름의 어떤 유명한 소설가는, 그냥 자기가 알아서 자기에게 직접 총을 쐈다. 그것도 기다란 엽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하니,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머리가 좀 이상했던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왜냐하면 나였더라면 장총 대신 입에 물기 쉽고 총신도 짧은 권총을 사용했을 테니까. 그런데 여기까지 쓰고 보니, 아까 내가 했던 말을 약간 수정해야 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자말이 그때 작문교실에서 열렸던 합평회에서 심한 모욕을 당한 채 뛰쳐나오지 않았더라면, 라스베이거스 뒷골목에 있는 허름한 여관에서 자기 머리에 총을 쏘지는 않았겠지만, 그보다 좀 더 괴상한 방식으로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 둘 중 어떤 게 더 나은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고.
    하여간, 자말이 자는 나를 흔들어 깨운 건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길에서 스마트폰을 줍고는 좋아하던 날로부터 사나흘 정도 지났을까, "일어나 봐, 티미.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라며, 자말은 소란을 피웠다. 숙취 때문에 깨질 듯 아픈 머리를 겨우 가누며 눈을 뜨자, 녀석이 평소와 달리 약간 겁먹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잠 좀 자자." 하지만 자말이 스마트폰을 내밀었을 땐, 나도 모르게 화면에 떠 있는 글에 빠져들고 말았던 거다.
    긴 얘기를 하기 싫지만, 그래서 간단히 줄여서 말하는 거지만, 폰 화면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끊임없이 줄줄줄 흘러갔다. 태초에 폰이 있었다. 아니, 이건 너무 불친절한 말인가? 그래, 그렇다면 다시 말해 주겠다. 처음에 세상을 만들었을 때, 그들은 실수를 했다. '폰'이라는 버그가 '세계'라는 프로그램에 숨어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잘 알겠지만 ― 혹은 모르는 사람이 더 많겠지만. 왜냐하면 나도 그 폰에 뜬 글을 읽고서야 처음 알았으니까. 듣기론, 더글러스 애덤스라는 선지자가 언젠가 무슨 책에서 귀띔해 준 적이 있다지만, 역시나 나에겐 금시초문이었다 ― 지구는 원래 하나의 시뮬레이션이다.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지능을 가진 존재들이 '삶, 우주,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만든 가상의 실험 공간. 하여간 그들, 뛰어난 존재들은 이곳에서 벌어지는 인간, 동물, 식물 군상이 어우러져 엮어내는 기기묘묘하고 방대한 삶의 여정을 추적하며 '삶, 우주 등등'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실험을 시작한 지 수십억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아무런 답도 얻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바로 지금 자말이 손에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바로 그 폰 말이다. 폰은 버그였고 세계 속에서 일종의 '둠스데이 머신'으로 작동했다. 누구나 ― 말 그대로 그게 누구든지 간에 ― 그 폰을 손에 넣은 자는, 언제든 우주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 겨우 '전원 꺼짐' 버튼 하나를 누르는 것만으로.
    그리고 그놈의 버그 때문에, 세계는, 만들어진 뒤로 지금까지 거의 일주일 간격으로 다시 시작되어 왔다. 때론 15일이나 한 달을 넘기는 적도 있었지만 평균을 내보면 결국 일주일이었다. 고작 일주일. 쉽게 말해서 요점은 다음과 같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공간은 일주일 전쯤 어느 변덕스런 인간의 오른손 검지 끝에서 재탄생된 것이라는 거. "말도 안 돼. 그럼 역사는? 인류가 가진 이 유구한 기억들은?" 내가 중얼거리려는 순간 폰에 이런 글자들이 떠올랐다. "조용히 하고 계속 읽으시오." 뭐, 그 이후 이어진 글도 흥미롭긴 하지만 너무 길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짧게 줄여서 알려주겠는데, 우리의 모든 과거(우주까지 통틀어서 말이다)는 다 허구였다. 쉽게 말해서, 그들, 뛰어난 존재들이 머릿속에 심어 준 치밀하고도 복잡한 메모리에 불과했다는 뜻.
    세계가 다시 시작될 때마다 버그인 폰은 무작위적으로 누군가에게 발견되고, 그 누군가가 '전원 꺼짐' 버튼을 이용해 모든 걸 끝낼 때마다 우주는 내부에 품은 인간, 동물, 식물과 함께 새로이 탄생한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 폰을 주운 즉시 절대 손대지 말고 가까운 경찰서에 반납해 주길 바란다는 게, 화면에 떠 있는 기나긴 글의 결론이었다.
    "그걸 믿냐?" 여전히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자말을 비웃으며 내가 말했다. 누군가가 폰을 잃어버린 뒤 다시 찾기 위해 깔아 둔 글치고는 꽤 재밌었지만 사실 말이 안 되는 내용이었다. 대체 어떤 한심한 겁쟁이가 그런 말을 실제로 믿고 이걸 순순히 경찰서로 가져다주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내 앞에 서 있는 자말은 믿는 것 같았다. 그는 새빨갛게 충혈 된 눈으로 폰을 노려보고 있었다. "티미, 이 폰의 전원을 끄기만 하면 우린 새로 시작할 수 있어. 난 지긋지긋한 약에서 벗어나 작가가 되고 ― 그래, 만약 작문교실로 다시 돌아간다면, 이번엔 모든 수모를 참고 열심히 습작을 할 거야. 그래서 반드시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낼 거라고! ― 너 역시 지금과는 다른 뭔가가 될 수 있을 거야. 안 그래?"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는 게, 그때 난 왜 그를 쏜 걸까? 바보같이 히죽 웃으며 폰을 끄고 세상을 다시 시작하려는 자말이 그때만큼 멍청해 보인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누군가의 얼굴을 완전히 날려버린다는 것은 왠지 말이 안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갑자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전광석화와도 같은 빠른 동작으로 자말의 허리춤에서 권총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얼굴을 쏴버렸던 것이다.
    망연히 서 있던 나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권총 손잡이를 천으로 대충 닦은 뒤 자말의 손에 쥐어줬다. 욕실에 가서 대충 피를 닦아내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후드를 푹 눌러쓰고 밖으로 나와서는 거의 몇 시간을 하염없이 돌아다녔다. 주머니엔 그 폰이 있었다. 버그. 일주일 간격으로 다시 시작하기. 완전하게 모든 것을.
    마침내 막다른 길 끝에서 걸음을 멈췄을 때, 나는 내가 왜 친구를 쐈는지 알게 됐다.
    그러니까 난 그저 전원을 직접 끄고 싶었을 뿐이야.
    다른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적어도 그 녀석이 소설의 결말을 써주지 않아서 그런 짓을 했던 건 아니라고.
    멀리서 들려오는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사이드에 있는 버튼을 꾹 누르자 '전원 꺼짐'이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거기에 오른손 검지를 얹은 채, 나는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봤다. 어느새 어두워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세상 전체를.

― 자말 파사드, 『버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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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뒤 바르톨리니는 혼자 집무실에 앉아 라디오 뉴스를 듣고 있었다. 마침 아나운서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 주 베스트셀러 순위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부동의 1위를 지키던 『버튼』이 순위권에서 사라지고, 『그레이의 100가지 그림자』를 썼던……." 문서담당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될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그런 책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두 잊고 말 거라고, 신앙교리성 장관에게 호언장담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게 정말일까?
    그는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깊고 깊은 지하의 미로에 숨겨 뒀어야 할 만큼, 이게 거대한 힘을 지녔단 말인가?
    만약 '전원 꺼짐' 버튼을 누른다면, 그렇다면 세상은 다시 시작되고, 나 역시 다른 삶으로, 이 흰색 칼라가 달린 검은 법복 대신 오리털 잠바나 트렌치코트 같은 걸 입은 그런 미지의 인간으로 재생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러다가 추기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고, 그 어느 누구도 ― 설령 신일지라도 ― 모든 걸 새로 시작할 순 없다. 세계는 오래 전부터 여기 있었고, 기억은 시간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것들은 모두 너무나 견고하여 마치 화강암으로 지은 성처럼 단단하고 명확하다.
    '하지만 그래도…….'
    바르톨리니는 다시 한 번 폰을 만지작거렸다.
    '전원 꺼짐'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 번쯤 터치해도 상관없다는 듯 부드럽게 반짝이며.

 

 

 

 

 

 

 

 

 

 

 

 

 

 

작가소개 / 김희선

1972년 춘천에서 출생했다. 강원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를 수료했다. 2011년 《작가세계》로 등단했으며, 소설집 『라면의 황제』, 장편소설 『무한의 책』이 있다.

 

   《문장웹진 2019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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