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 도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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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사랑

 

 

도재경

 

 

 

    장항리 유적지 학술 심포지엄을 마친 자리에서 나는 동갑내기 민 교수로부터 내키지 않는 초대를 받았다.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그의 별장에서 이번 심포지엄과는 별개로 비공식 학술모임을 갖자는 것이다. 명목이야 토론자로 참석하지 않은 내 의견을 경청해 보고 싶다는 얘기였지만 보나마나 그의 수집벽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유물이나 고문서 따위를 앞에 놓고 강론이나 듣다가 돌아올 게 뻔했다. 물론 개중에는 지적 욕구를 채워 주거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것들도 분명 있을 테지만 누구보다 민 교수의 기벽을 잘 아는 나로서는 그의 초대가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하반기에 예정되어 있는 교수 임용을 앞둔 상황에서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에다가 심포지엄에서 좌장을 맡은 학계 선배인 박 교수와 한때 절친했던 이준하도 참석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민 교수는 유약한 체질이긴 했지만 학창 시절부터 집념 어린 구석이 있었다. 무엇이든 한번 손대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다. 어쩌면 그런 집념이 그를 지금의 자리에 앉게 한 건지도 모르겠으나 더러는 우려스러울 때도 있었다. 수십 년간 한 분야나 특정 인물에만 깊이 천착한 학자들 중에는 간혹 자기 동일시에 빠져드는 경우가 있었다. 백제 멸망사를 연구한 내 지도교수만 하더라도 그랬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그는 의자왕(義慈王)에 미쳐 있었다. 의자왕에게 등을 돌렸던 예식진(禰寔進)의 묘지명이 중국 허난성 뤄양시에서 수습되었을 무렵 지도교수는 별것 아닌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우는가 싶더니 그로부터 몇 해 뒤 산시성 시안시 일대에서 예씨 일족의 무덤이 추가로 발굴되자 이상한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 동료 교수로부터 차라리 의자왕의 실정을 간언하다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성충(成忠)이나 처자를 몰살한 계백(階伯)의 비극에 대해 연구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비아냥거림을 듣고선 의자왕의 무덤을 찾아 망국의 한을 풀겠다며 짐을 꾸려 중국으로 떠나버렸다. 그 후 뤄양시 외곽에서 지도교수와 비슷한 이를 보았다는 소문이 두세 차례 돌긴 했지만 망산(邙山)을 떠도는 의자왕의 유혼처럼 지금껏 감감무소식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약과인지 모르겠다. 조선 건국사를 연구한 한 노학자는 느닷없이 스스로를 이성계(李成桂)로 여기더니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잇겠다는 아들을 이방원(李芳遠)으로 몰아세우며 증오하기까지 했다. 그의 아들은 나의 지도교수를 비아냥거렸던 인물로 학계에서는 물론 대중들에게도 꽤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이따금 학회에서 그를 만날 때면 으레 내게 지도교수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게 없냐고 묻고는 자신은 아직까지 아버지로부터 외면당한다며 볼멘소리를 내곤 했다. 심지어 그는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손에서 피비린내가 난다는 핀잔을 여러 차례 들은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내 얼굴 앞에 자신의 두 손을 펼쳐 보였다. 나는 겸연쩍게 웃어 보이긴 했지만 어쩐지 그런 것 같기도 해서 애꿎은 뒷덜미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버렸다.
    물론 연구에 몰두하다 보면 특정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 정도 노력도 없이 성과를 기대한다는 것은 태만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그런데 민 교수의 경우엔 무모하리만치 지나쳐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연구자에게 있어 이는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연구자는 스스로를 경계하고 연구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균형감각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칫 조롱거리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민 교수의 위험천만한 집념은 어쩌면 집안 내력과도 무관한 것 같지 않았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어느 그룹의 회장이 민 교수의 부친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는데 학교 이사회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양이었다. 몇 해 전 민 교수의 임용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도 많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민 교수는 툭하면 연락이 두절된 채 어딘가로 종적을 감추곤 했고, 임용이 된 이후에도 그러한 기행은 여전했다. 물론 맨손으로 돌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정교한 문양이 돋보이는 청동기 거울이 아니라면 하다못해 마른 진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고대 시대의 토용이라도 구해 왔다. 그럴 때마다 그는 득의에 찬 표정으로 그것들을 손에 넣은 경위를 조목조목 설명하곤 했다.

 

    그날은 평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올림픽대로에는 차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하루 전 폭우로 인해 한강은 탁하게 불어나 있었고, 진회색 하늘은 또 한 차례 비를 뿌릴 기세였다. 일전에도 몇 차례 가본 적 있던 민 교수의 별장은 서울 근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수풀이 우거진 산중에 위치해 있었다. 342번 지방도로를 벗어나서도 승용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좁은 비탈길을 따라 이십여 분은 올라가야 했는데, 초입의 작은 농가 서너 채를 제외하고는 인적이 뜸했다. 그래서인지 별장에 들어서면 마치 까마득한 오지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공들여 조경한 정원의 중앙에는 큼직한 편마암들이 마치 수묵화에 그려진 바위산처럼 놓여 있었고, 곳곳에 커다란 석기나 석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모서리가 마모된 신라시대의 석탑도 있던 탓에 나는 매번 시선을 빼앗기곤 했다.
    별장에 들어서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별장 입구에 걸려 있는 풍경은 바람을 머금어 청량하게 울렸고, 계곡물을 끌어다가 만든 연못에는 여러 종의 관상어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박 교수가 먼저 도착해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나를 반기는 이는 민 교수뿐이었다. 박 교수는 급한 사정이 생겨 모임에 참석할 수 없다고 민 교수에게 미리 기별한 모양이었다. 민 교수는 우산을 받쳐 들고 블록처럼 생긴 별장으로 나를 안내했다.
    별장은 두 채의 직육면체 건물을 사이에 두고 넝쿨로 뒤덮인 작은 통로로 이어져 있는 구조였다. 바깥채는 그저 모던한 주거공간인 데 반해 안채는 민 교수가 여기저기에서 수집한 유물들로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숲 터널 같은 작은 통로를 지날 때면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안채 입구에는 '동소전(東小展)'이라고 음각된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누구의 글씨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동소전의 출입구는 이중으로 잠금장치가 되어 있었고 건물 외부에도 별도의 보안장치가 마련되어 있는 듯했다. 지상 4층, 지하 1층 규모의 동소전은 작은 박물관을 방불케 할 만한 규모였는데 선사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층별로 보관되어 있었으며 하나같이 보존 상태가 양호한 것들이었다.
    언젠가 민 교수는 동소전의 지하로 나를 안내한 적이 있었다. 민 교수는 동소전 입구에 있는 캐비닛에서 면장갑을 꺼내어 내게 건넨 뒤 자신도 장갑을 꼈다. 캐비닛 안에는 유구를 덮을 때 쓰는 천막용 비닐을 비롯해 캘리퍼스, 보링봉, 클리노미터, 권척, 줄자, 흙손, 공업용 테이프, 붓 등 유물 발굴용 도구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캐비닛 옆 선반의 하단에는 글리세린, 아세트산 칼륨, 포르말린 등이 담긴 병들이 보였는데 아마도 각종 유물을 방부처리하기 위한 용도로 구비해 놓은 듯싶었다. 민 교수는 지하로 들어가기에 앞서 어느 누구에게도 공개한 바 없다며 동료인 내게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 보였다. 부득이하게 연대를 거스를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을 뒤로 한 채 나는 성큼 민 교수의 보물창고로 발을 들였다. 주황색 핀 조명을 독점하고 있는 금관이나 금제 허리띠,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청동거울과 말띠드리개 등 그 안의 물건들은 하나같이 국보급 보물들이었다. 그것들은 의심할 나위 없이 모조리 진품이었는데 값어치를 따지자면 좋이 수십억은 호가할 것 같았다. 그중 회색 석관 하나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석관 안을 들여다보다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머리카락까지 온전히 보존된 성인의 미라였다. 나는 그게 왜 민 교수의 별장 지하실에 보관되어 있는지 의아했다.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는 그곳이 아니라 박물관이어야 마땅했다.
    몇 해 전 서울 근교의 도로 확장공사 현장에서 신라 하대의 유적지가 발견되어 공사가 중단된 적이 있었다. 미라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바로 그 유적지에서였다. 민 교수가 검증한 바에 의하면 그것은 신라 하대의 성인으로 추정되는데 경추부에 날카로운 흉기로 살해된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따금 조선시대의 미라가 발굴된 적은 있었지만 그보다 앞선 시대의 미라는 학계에 보고된 적이 없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미라의 복식이나 함께 출토된 유물로 보건대 그것은 민 교수의 말마따나 신라 하대의 것이 틀림없었다. 학술적 가치가 분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민 교수가 미라를 독점하게 된 계기에 의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어떠한 경로로 미라가 민 교수의 수중으로 넘어왔는지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암암리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그의 암거래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사실 그러한 경로를 통하지 않고서는 미라를 손에 넣기도 힘들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라의 보존을 위한 자신의 각별한 노력을 대수롭지 않게 털어놓았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노력에 대해 경외감이 들기보다는 집념 어린 그의 편집증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별장으로 들어서자마자 민 교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준하였다. 통화 내용을 미루어보니 그는 조금 늦을 모양이었다. 대학 동기인 그는 상냥하고 붙임성이 좋아 한때 격의 없이 지낸 사이이긴 했지만 졸업 후 서로 다른 진로를 걷다 보니 간간이 소식만 듣고 있었다. 얼마 전 강남에 골동품 컬렉션을 개장했다는 그는 골동품시장에서 꽤나 이름을 알리고 있는 듯했는데 민 교수와도 종종 거래를 하는 모양이었다.
    민 교수는 창가 쪽 원목탁자로 나를 안내하고는 두툼한 서류철과 함께 마시다 만 코냑 한 병을 내어왔다. 탁자 위에는 옻칠을 한 나무상자 두 개와 면장갑이 놓여 있었는데 얼핏 보아도 그 안에 든 게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민 교수는 서류철을 탁자 한쪽에 밀어 두고 술잔을 채워 내 앞에 내밀고는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그러고 보니 단둘이서 술자리를 갖는 건 꽤 오랜만인 듯했다. 내가 찰랑거리는 술에 입술만 적신 데 반해 민 교수는 술잔을 단숨에 꺾어 비웠다. 그러고는 곧바로 상자를 열어 보였다.
    긴 상자에는 비교적 날의 보존 상태가 양호한 칼 한 자루와 칼집이 들어 있었고, 그보다 작은 또 하나의 상자 안에는 손잡이 끝에서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금으로 상감 처리된 용무늬의 고리와 희미한 글귀가 새겨진 금박이 놓여 있었다. 형태를 보건대 그것은 신라 하대에 제작된 환두대도(環頭大刀)가 틀림없었다. 민 교수는 탁자용 조명을 밝히고 돋보기를 내게 건네며 칼집 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금박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투박하게 새겨진 희미한 글자가 보였다.
    아지라왕(我止羅王)
    "명문이 생소하군."
    민 교수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환두대도는 신라 하대의 진골 귀족 김주겸(金株謙)이라는 인물의 것으로 장항리 유적지 6호 고분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지라왕이라는 명문은 사서에서도 본 적 없는 낯선 이름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민 교수는 여태 보아 왔던 모습과 달리 사뭇 긴장한 듯 보였다. 그런 내 시선을 의식하기라도 한 듯 그는 견과류를 담아 놓은 나무그릇 속을 손가락으로 뒤적여 아몬드 두어 개를 집어 입에 털어 넣었다.

 

    몇 해 전 임천 유역의 손곡리 유적지에서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이 발굴되어 학계가 들썩인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신석기시대의 토기류를 비롯해 청동기시대의 석검과 석촉, 삼국시대의 분묘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유구와 1,000여 점의 유물 등이 출토된 것이다. 그러나 민 교수에게 손곡리 유적지는 그다지 대단한 게 아니었다. 아마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그가 어떤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민 교수가 사비를 털어 손곡리 인근 지역인 장항리를 후벼 파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농경지를 비롯한 사유지가 대부분인 장항리 일대의 발굴조사는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지만 민 교수는 포기할 뜻이 없어 보였다. 다행히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장항리에서 역시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손곡리에 비해 규모는 협소했지만 민 교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장항리의 고분군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를 앞둔 당시 그곳에서 신라 하대의 유물이 출토될 거라고는 어느 정도 짐작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민 교수가 찾고 있는 건 따로 있었다.
    장항리 유적지 심포지엄을 앞두고 언뜻 민 교수의 입에서 김주겸에 관한 얘기가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그의 말이 사료를 무시한 비약적 발언에 지나지 않다고 여겼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자료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물 발굴 성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김주겸에 대한 내용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내가 도울 일이라는 게 뭔가?"
    나는 환두대도에서 시선을 거두며 민 교수에게 물었다.
    그의 말인즉, 김주겸은 879년 있었던 신홍(信弘)의 모반 사건을 기획한 반역의 주역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의 말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장항리 일대를 후벼 파서 얻어낸 결론이 고작 김주겸이라는 사람의 반란을 규명하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삼국사기』 권 11, 헌강왕 5년의 한 대목을 살펴보면 "6월에 일길찬(一吉湌) 신홍(信弘)이 반역하려다 복주(伏誅)되었다."라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 더 이상 구체적인 정황을 확인하긴 힘들었다. 다만 학계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신홍의 모반 사건이 신라 하대에 빈번했던 권좌를 탈취하기 위한 반란임은 분명했다. 일길찬이라는 직책을 보건대 신홍이 반란을 일으킬 만한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세가 기울어 가는 신라 하대에 모반은 그다지 새로운 내용이 아니었다. 다만 이전에 있어 왔던 권력 지향적 반란이 하대로 가서는 민심의 동요와 지방 호족 세력과 결탁된 양상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나는 민 교수에게 신홍의 반란에 연루된 인물이 있다면 예겸(乂謙)이 아니겠냐며 조심스레 되물었다. 대아찬 시중이었던 예겸이 헌강왕 6년에 사직되었고, 몇 년 뒤 신덕왕조에 이르러 다시 그의 이름이 등장하므로 신홍이 예겸과 연루하여 모반을 일으켰다는 학설은 소수 의견이 아니었다. 그런데 민 교수의 견해는 전혀 달랐다. 경주에서 신홍과 결탁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김주겸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바로 임천 상류의 용유담 인근에서 발견했다는 비명(碑銘)의 일부가 그것이었다. 그가 언제부터 그것들을 수집해 온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표정을 보니 이미 몇몇 단서를 확보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여러 시일에 거쳐 비명의 조각들을 수습한 결과 그것들은 김준(金峻)이 작성한 것으로 확인했다는 것이다.
    김준, 내가 알기로 그는 최치원(崔致遠)과 각별히 교유했던 진골 귀족이었다. 민 교수가 해석한 비명의 내용인즉, 스스로를 '아지라왕'이라 칭했던 김주겸의 모반 내용이 적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항리 유적지 6호 고분에서 발굴된 환두대도와 김준이 작성한 비명은 김주겸의 행적을 입증할 연결고리이자 결정적인 자료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민 교수는 왜 심포지엄에서 그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밝히지 않았던 걸까?
    그는 면장갑을 끼고 두 손으로 떠받들 듯 칼을 들어 올렸다. 그의 각진 턱 아래에는 목주름이 여러 갈래로 겹쳤다.
    "어쩌면 바로 이 칼에 의해 누군가의 목이 달아났을지도 모르지."
    "그 칼이 왕의 목이라도 쳤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더 위험했던 인물."
    나는 그가 겨냥하는 인물이 누군지 어림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게 누군가?"
    "누구보다 자네가 잘 아는 사람."
    그는 자신의 빈 잔에 코냑을 따르며 말했다.
    민 교수가 궁극적으로 입증하려는 게 무엇이든 간에 너무나도 허황되어 보였다. 그러니까, 그는 최치원의 살해설을 주장하는 중이었다. 나는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고작 비명에 새겨진 몇 조각의 글자와 녹슨 칼 한 자루로 천 년도 더 지난 일의 전말을 밝혀내겠다? 글쎄, 그게 얼마나 가치 있는 작업인지 모르겠지만 고작 몇 점의 유물만으로 이미 흘러온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것 또한 순탄치 않은 작업이었다. 땡그랑거리는 풍경소리에 나도 모르게 창밖으로 시선이 가닿았다. 빗방울이 굵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연못가의 수풀 아래로 숨어든 들고양이 한 마리가 잔뜩 웅크린 채 연못을 노려보며 있었다.

 

    민 교수의 말마따나 내게 있어서 최치원은 어느 누구보다도 각별한 인물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위인전집을 통해 최치원의 생애를 처음 접한 이후 나는 그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당대 최고의 천재가 당나라에서 이름을 떨치고 돌아와 쓰러져 가는 왕국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악전고투하다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산속에 은거해 신선이 되었다는 얘기에 매료된 나는 가슴이 저미기까지 했다. 그 무렵 쉬는 시간이면 또래 아이들이 교실 뒤편에서 중국 무술영화의 주인공을 조잡하게 흉내 내곤 했는데 나는 그만큼 유치한 짓도 없다고 여겼다. 대신 나는 한 위인의 신비로운 생애를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만 독점하고 싶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어쩌면 전설에 나오는 모든 신선들이 또 다른 최치원일지 모른다는 상상을 펼치며, 사학자의 꿈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대학원 동료들은 내가 아내보다 최치원을 더 사랑하는 게 아니냐고 이따금 놀려대곤 했지만 썩 듣기 싫은 소리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치원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듬해 나는 진로를 다소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교에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던 지도교수가 중국에서 실종된 게 바로 그 무렵의 일이었다. 만약 그때 모교에 둥지를 텄다면 연구에 매진하는 게 한결 수월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최치원에 대한 내 열정만큼은 변함이 없었고, 언제 어디에서건 최선을 다한다면 최고의 전문가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후 나는 사설 고고학연구소에 적을 두고, 여러 기관의 문화콘텐츠 발굴 사업 자문을 병행해 왔다. 몇몇 지역에서는 문화콘텐츠 발굴 사업 일환으로 유적지를 복원하거나 역사 속 위인을 매개로 하여 테마공원 조성에 적지 않은 예산을 쏟아 붓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비정기적이긴 했지만 자문을 통한 부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그중 최치원에 대한 자문 요청은 꽤 많은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치원에 대한 유적은 고대의 다른 인물들에 비해 근무처나 연고지역, 영정의 봉안처, 설화지역 등 전국 각지에 다양하게 남아 있었다. 그와 함께 그에 대한 저술이나 후대의 사서와 문집 등 사료 또한 풍부해서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유용한 콘텐츠였다. 물론 내가 지역자치단체에서 주관하는 문화콘텐츠 발굴 사업의 타당성까지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사학자로서 후세에 왜곡된 역사가 답습되지 않도록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사료를 검토하고 고증에 임해 왔다.
    사실 신라와 당나라를 오갔던 최치원의 행적이나 전국 각지에 분포해 있는 유적과 행장을 살펴보면 연구자의 접근방법이나 전공 분야가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간혹 어떤 연구자들은 가설을 잘못 세우는 바람에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기도 했다. 가령 최치원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다수의 금석문과 그와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는 한 지역에서는 최치원 전(傳)에 언급된 최치원 묘의 발굴조사가 최근에 진행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묘는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설화의 경우 와전의 가능성이 다분하여 고증하는 작업 또한 만만치 않았다. 또 다른 경우로 『삼국유사』의 기록을 근거로 최치원이 경주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에 반해 군산 일대에서 출생했다는 설에 대한 연구 결과도 나와 있었다. 누군가 당사자의 행적을 주도면밀하게 파헤쳐 보았다고 해도 사실이 무엇인지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이는 연구 목적이나 성과는 제각각이지만 오늘날에도 최치원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이 유다르다는 반증이기도 할 터, 그런 만큼 보다 철저한 고증이 요구되었다. 특히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이후 말년의 행적은 베일에 싸여 있었는데,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이라 해도 천 년 전의 실종사건을 조목조목 추적해 밝혀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그런데 민 교수의 혀끝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을 겨냥하고 있었다.
    "자네가 최치원의 마지막 행적을 정리해 보는 건 어떻겠나?"
    민 교수는 김주겸의 칼이 최치원의 목을 쳤다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최치원에 대해서라면 내가 오랜 기간 천착해 온 연구 분야였던 탓에 민 교수의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실로 난감했다. 고작 환두대도 한 점과 몇 조각의 비명만으로 최치원의 살해설을 주장하는 건 억측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그 이상의 단서를 그가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최치원의 마지막 행적을 밝혀내기란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 교수는 생뚱맞기 그지없는 김주겸이라는 인물의 행적에 대해 거침없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인물이니만큼 보다 철저히 검증을 해야 할 텐데 어찌 된 영문인지 민 교수는 잔뜩 고무되어 있었다. 심지어 민 교수가 김주겸에게 너무 함몰된 나머지 섬망 상태로 빠져드는 건 아닐지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어느 틈에 이견을 제기해야 할지 기회를 엿보던 찰나 마침 민 교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준하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그는 이제 막 퇴근하고 나설 채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민 교수의 말에 따르면 신홍의 모반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고 김주겸은 한동안 잠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민 교수는 그에 대한 근거로 당시 김주겸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전무하다는 걸 이유로 들었지만 전혀 납득할 수 없었다. 그건 근거가 아니라 궤변이었다. 또한 김주겸이란 자가 실존했더라도 육두품에 불과했던 최치원이 과연 그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을까, 라는 점 역시 의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이런 논박에도 불구하고 민 교수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김주겸이 909년경 또 한 번 반란을 도모했다는 것인데 이번엔 왕경이 아닌 지리산 일대의 산간분지였던 천령(天嶺) 일대에서였다. 그 지역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은밀하게 근거지를 구축해 세력을 모으기에 용이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바, 그에게 모반을 꾀할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최치원이 천령군 태수로 부임하던 시기였다. 일찌감치 최치원의 능력을 눈여겨보던 김주겸은 당대 최고의 천재를 포섭하려 했다는 것이다.
    최치원이 태수로 부임했던 그 지역은 나도 몇 해 전에 가본 적이 있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상림(上林)'에 최치원 테마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지역자치단체에서 고증 작업을 요청해 왔기 때문이다.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보건대,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최치원이 천령군 태수로 봉직한 것은 틀림없었다. 우선 최치원이 귀국 당시 맡게 된 '한림학사(翰林學士)'라는 직함과 연관된 '학사루(學士樓)'가 오늘날에도 그 고장에 남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동양문고에 소장된 『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에는 해인사의 희랑(希郞)에게 보낸 최치원의 시가 실려 있는데 '방로태감(防虜太監) 겸 천령(天嶺)군수'라는 직함을 사용하고 있었다.
    한데 김준의 비명에도 역시 최치원이 천령 태수로 봉직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민 교수가 또 하나 주목한 지점은 '상림'이었다. 지난날 '대관림(大館林)'이라 일컫던 그 숲은 최치원이 천령 태수로 있을 때 수해를 막고자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 절반 이상이 소실되고 13헥타르가량 남아 있었다. 민 교수의 말인즉, 그 숲을 조성할 때 김주겸의 병력이 투입되었다는 비명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당시 두 사람 사이에 적잖은 교류가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치원은 신홍의 모반을 기획했던 김주겸의 실체를 몰랐다는 얘긴가.
    민 교수의 주장으론 그렇다는 것이다. 그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김주겸은 배후에서 내밀하게 실력을 행사하던 인물로 당시에 득세가도를 누리던 지방 호족과는 달리 음험하고도 교활했는데, 철저히 자신의 저의를 숨긴 채 최치원에게 접근했을 거라고 내다보았다.
    "그렇지만 조림공사가 끝날 무렵 최치원도 눈치를 채지 않았을까 추측되네. 자네도 알다시피 최치원이 어디 호락호락한 인물인가?"
    민 교수는 홀짝이던 술잔을 느긋하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어쩌면 황소를 글로써 물리쳤던 젊은 시절의 기개가 작동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그게 바로 최치원의 한계라고 보네. 한낱 육두품에 불과했던 그가 그때까지도 쓰러져 가는 왕국을 일으켜 세울 궁리를 하고 있던 거였지. 그래, 어찌 보면 그만큼 순수했던 위인도 없을 거야."
    민 교수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모름지기 최치원의 기질이 모리배나 다름없는 김주겸과 충돌했을 거라는 추측이 섣부른 것만은 아니었다. 최치원은 김주겸을 예의주시했을 것이고, 속내를 들킨 김주겸 역시 가만있을 리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 교수의 주장을 너그럽게 받아들여도 최치원의 천령 태수 시절 이후에 두 사람의 접점은 묘연했다. 비명에 적혀 있다는 '최(崔)'와 '해(害)'와 같은 글귀 따위로 최치원이 살해되었다고 보는 건 그야말로 비약이었다. 민 교수 역시 그 지점에서 신중을 기하는 듯했으나 그의 얼굴만큼은 확실한 물증을 쥔 것처럼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창밖엔 거세게 폭우가 몰아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리창 방음이 완벽한 탓에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귓속에선 환청처럼 풍경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실내를 둘러보아도 소리가 날 만한 물건은 없었다. 나는 민 교수에게 풍경소리가 들리지 않느냐며 물어보려다가 단순한 이명인 듯싶어 관두었다. 게다가 화제를 돌리는 것도 적절치 않을 듯하였다. 나는 코냑을 한 모금 삼켰다. 연구자로서 균형을 유지해야 할 때는 바로 이와 같은 경우가 아닐까. 섣불리 동조하거나 아니면 이견을 제기하기보다 가급적이면 민 교수가 밝혀낸 김주겸의 행적을 마저 들어 보는 게 나을 듯싶었다. 김준의 비명은 그다음 확인해도 늦진 않았다.
    정리해 보자면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당나라에서 유학한 최치원이 빈공과에 급제한 나이는 18세, 「격황소서(檄黃巢序)」와 같은 명문으로 이름을 떨친 그는 헌강왕 11년인 885년 3월에 귀국해 『계원필경(桂苑筆耕)』을 편집하여 이듬해에 정강왕에게 올렸는데, 김주겸이 최치원을 눈여겨보았다면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이후 최치원은 진성왕에게는 개혁을 건의하는 시무책을 올려 육두품으로선 최고 관직인 아찬의 벼슬을 받았으니 진골 귀족의 시기와 견제를 받은 건 당연한 일, 아마도 김주겸은 서서히 최치원과 물밑 접촉을 시도했을 것이다. 봇물이 터진 듯 전국 각지에서 내란이 일어났고, 지방 호족들마저 득세하여 신라는 급속도로 붕괴 중이었다. 경문왕계 마지막 혈족인 진성왕이 마지못해 양위하고, 김주겸은 노골적으로 본색을 드러낸다. 한편 최치원은 돌연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기로 결심한다. 정치적 후견인이 없는 상황에서 그 역시 신분의 한계와 절망감을 느꼈을 게 분명하다. 여기까지 민 교수는 별다른 견해를 제기하지 않았다. 한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최치원은 이후 각지를 소요하다가 가야산에 은거했다. 『동문선(東文選)』에 남아 있는 '팔각등루기(八角燈樓記)'의 내용으로 추측컨대 최치원은 최소 908년까지는 생존해 있었다. 하지만 사망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최치원에 대한 많은 사료와 설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말년에 관해서만큼은 자료가 빈약한데 그로 인해 그의 은둔설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사료상에 존재하는 빈틈은 후대로 구전된 설화가 어느 정도 메우고 있었다. 가령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에 싣고 있는 한 대목이나 고문헌의 기록을 해석한 것들 역시 거기에 해당됐다. 이에 대해 민 교수 역시 선선히 동의하는 듯하더니 슬며시 이견을 제시하며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최치원이 속세를 버리고 은둔을 했다거나 신선이 되었다는 그 얘기 말이네, 그건 고전에서나 다룰 만한 우스갯소리가 아닌가."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의 말인즉 후대 사가들의 경솔함으로 인해 천재로 이름을 떨쳤던 한 사람의 생애를 실종시켰다는 것인데, 오늘날 남아 있는 사료가 그뿐인 건 내 책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도 그의 말끝은 나를 겨냥하는 것 같았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파한집』에 언급된 한 대목을 들추어 보면, 가야산에 숨은 최치원이 어느 날 아침 관(冠)과 신발만을 수풀 사이에 버려 놓은 채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두고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냐는 말이지. 그래, 혹자는 그러한 내용을 두고 자살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이도 있긴 하더군. 그래, 그렇다고 쳐. 하지만 그건 너무 빤한 픽션이지 않는가. 나는 보다 논리적면서 실증적인 태도로 접근해 보고자 하네. 다시 말해 후대의 사람이 그러한 글을 남긴 배경이 무엇인지, 연유를 캐내야 한단 말이지."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나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일전에 자네가 보았던 미라를 기억하나?" 민 교수는 팔짱을 낀 채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자넨 그게 누구라고 생각하나?"
    나는 민 교수의 미소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는 턱을 치켜들고는 넌지시 나를 내려다보더니 탁자 한쪽에 밀어 두었던 서류철에서 미라 연대 측정 결과를 꺼내었다.
    "바로 최치원이라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가슴이 세차게 두방망이질 치는 걸 느꼈다. 거들먹거리는 그의 표정으로 보아 나를 떠보는 수작 같지는 않았다. 민 교수는 『파한집』에는 언급되지 않은, 김준의 비명에서 유추한 자료를 덧붙여 견해를 피력했다. 거기서 맨발 차림의 한 사람이 자객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바로 김주겸이 보낸 자객들에게 말이다. 그 순간 나는 민 교수가 어떠한 결론을 준비해 둔 것인지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미리 고백하건대 살아오며 그때만큼 내가 무력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민 교수의 논리는 의외로 촘촘했다. 환두대도와 비명의 내용, 그리고 미라의 주인은 완벽한 삼각구도를 이루어 최치원의 숨겨진 말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그의 논리를 부인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반론을 찾을 수 없었다. 만약 그의 주장이 사실로 입증된다면 최치원은 권력에 눈먼 귀족에게 희생된 피살자가 되고, 김주겸이란 이름은 탐욕의 화신으로 재조명받게 될 것이다. 가히 학계엔 일대 파란이 예상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녹슨 칼 한 자루와 비명 몇 조각에 의해 기존에 나와 있던 수많은 연구물들은 빛을 바랠 것이고,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신선으로 살아온 최치원은 미라로 전락해 박물관에 누워 있게 될 것이다.
    "자네가 설화 너머의 사실만을 입증해 주기만 하면 되네. 어떤가?"
    홀짝이던 코냑은 어느새 바닥이 드러났고, 민 교수는 상자 뚜껑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그는 늘 그렇듯 의욕에 넘쳐 있었다. 이제 민 교수의 제안에 대해 내가 대답해야 할 차례였다.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가?"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걸세."
    민 교수는 이미 결론을 정해 놓은 듯했다. 별안간 현기증이 일었다. 그제야 그가 나를 초대한 진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나와 거래를 원하고 있었다. 어쩌면 박 교수는 처음부터 모임에 참석할 이유가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단지 나를 꾀어내기 위해 박 교수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준하 역시 민 교수에게 가설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 대가로 무언가를 받은 공모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민 교수의 준비는 꽤나 치밀했다. 이제 그들과 손을 잡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공은 내게로 넘어온 셈이었다. 문득 어깨가 묵직해지는 걸 느꼈다.
    민 교수는 두 개의 상자를 조심스레 포개어 양손으로 받쳐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약 그가 곧바로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소파에 등을 파묻은 채 비 내리는 창밖 풍경이나 감상하고 있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조금은 느슨한 기분으로 민 교수와 싱거운 얘기 따위나 주고받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논리에 포박된 가녀린 짐승이 된 심정이었다. 물론 그의 논리에 굴복하긴 싫었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오랜 우상을 대면한다는 생각에 설렜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였던가, 그 순간 나는 조바심이 일어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내게 망설일 틈조차 주지 않고 동소전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향해 앞장서 걸어가는 중이었다.
    "함께 가보지 않겠나?"
    그는 취기가 오른 탓인지 살짝 비틀거렸고, 통로엔 자신감으로 가득 찬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귀가 먹먹해지는 걸 느꼈다. 넝쿨이 휘감고 있는 통로에는 후각이 마비될 만큼 짙은 풀냄새가 배어 있었다. 마치 깊은 숲 속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민 교수는 동소전에 들어서자마자 내게 면장갑을 건넸다. 나는 여태 예상조차 해본 적 없는 새로운 만남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민 교수는 비명 조각을 덮어 놓은 검은 천을 들추었고, 상자에서 환두대도를 꺼내어 선반의 가장자리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여길 한번 보게."
    민 교수는 비명 조각 하나를 가리켰다. 나는 그가 가리킨 조각에 얼굴을 바싹 가져다댔다. 민 교수는 나를 위해 핀 조명을 밝혀 주었다.
    "조금만 더, 자세히 볼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민 교수는 흔쾌히 수락했다. 나는 끝이 뾰족한 비명 조각 하나를 쥔 채 유심히 돌려 보았다. 거기엔 희미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광기에 사로잡힌 자객들에게 쫓기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부엉이가 숨이 차도록 울어대는 까만 저녁이었다. 그는 밥 짓는 냄새가 켜켜이 고여 있는 계곡을 벗어나 수풀을 헤치며 능선을 향해 힘껏 달아나는 중이었다. 저 멀리 산 아래 절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울렸고, 바람이 불 때마다 오래된 소나무의 가지가 소스라치게 떨렸다. 그의 머리카락은 풀어헤쳐졌고 발바닥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한평생 책을 벗 삼아 온 그의 손발은 연약했다. 목덜미에서 흘러내린 피가 도포를 붉게 적셨고, 결국 그는 힘없이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어느새 내 두 손엔 땀이 흥건히 배어 있었다. 그가 입은 상처가 내 것처럼 쓰렸다. 그를 구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아무도 찾아낼 수 없는 깊은 산속으로 달아날 수만 있다면. 하지만 평생을 쫓아다닌 그 사람은 이제 의지가지없이 애처로운 모습이 되어 내 앞에 쓰러져 있었다. 나는 회색 석관을 향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석관 안에는 담대하고 명철했던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얼마나 그를 보고 싶어 했던가. 당신으로 인해 지금의 내가 있는 거라고, 오래 전부터 흠모해 왔다고 나는 고백했다. 그러고는 그의 주름진 얼굴과 앙상한 손을 어루만졌다. 그의 몸은 따뜻했다. 아니, 여전히 뜨거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상처 부위를 매만졌다. 그러자 그가 감내했을 정신적 고통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두방망이질 치던 나의 가슴은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지금껏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던 것일까.
    이상하게도 온몸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목덜미가 뻐근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날카로운 통증이 신경 조직을 따라 세포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었다. 바로 그때 그의 등 뒤에서 김주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순간 무르춤해진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나를 향해 성큼 다가온 그는 칼을 뽑아들었다. 아지라왕, 명문이 새겨진 바로 그 칼이었다. 김주겸의 얼굴에서 섬뜩한 미소가 스쳤다. 그러나 나에겐 더 이상 그를 대적할 힘이 없었다. 무장봉기한 황소를 글로써 물리친 지난날의 영광도, 왕명을 받들어 지은 비문도, 경륜을 펼쳐 보이려 했던 의욕에 찬 문장도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자네, 대체 왜 그러나? 내 손을 잡게.
    그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대지 마! 나는 뒷걸음치며 소리쳤다.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살아오며 이 순간만큼 억울했던 적이 있었던가. 나의 모든 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가 맞았다, 라고 기억할 것이네.
    아니, 틀렸어. 자네의 그 허튼수작을 내 모를 줄 알고.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상대를 질타했다. 애초부터 나의 길은 따로 정해져 있었다. 상대가 뜻을 함께하자며 내게 다가온 그날부터 이 날을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칼을 쥔 자였다. 그의 예리한 칼끝은 이제 나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책무와 양심, 그리고 내가 사랑해 온 것들을 저버릴 수 없었다. 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어디선가 잔잔한 바람이 일었다. 어느샌가 나의 가슴을 가로지른 칼끝에서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의 입에서 소리 없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지금껏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하였건만, 대체 내가 왜 이 꼴을 당해야만 한단 말인가. 너무나도 허망했다. 온몸이 산산조각 난 듯 아팠다. 이윽고 하얀 빛이 어둠을 갈라놓는가 싶더니 누군가 황급히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거야?
    그의 목소리는 예나지금이나 상냥했다. 그는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하지만 차갑게 굳어버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서 나를 숨겨 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차마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저 오래오래 당신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 아마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폭우가 쏟아지는 저녁이었다. 희한하게도 저 아래 산사에서 풍경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작가소개 / 도재경

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피에카르스키를 찾아서」로 등단.

 

   《문장웹진 201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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