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의 반복을 기억한다는 것 - 김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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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비평가 특집]

 

최근 몇 년 간 한국문학의 흐름은 그야말로 숨이 가쁠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한국문학은 달라져야 했고, 달라지고 있으며, 또 계속해서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도 더 많은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수많은 변화의 외침은 지금도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제 막 자리매김한 '젊은'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부탁했다. 이들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습을 비트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어갈 한국문학의 풍경을 기대하며 '기획'의 지면을 연다.

 

 

 

파괴의 반복을 기억한다는 것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1)과 몇 가지 텍스트들

 

 

 

김녕

 

 

 

 

1. 부정 미학과 잔존-이미지

 

    예술의 재현과 관련해 단연 아우슈비츠 이후보다 극단적이면서도 예민하게 견해가 나뉘었던 시기가 또 있을까?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2)라고 아도르노가 말했을 때, 그가 거절한 것은 단순한 서정시뿐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가상' 자체였다. 고대의 제의적 형상물에서부터 근대 초기의 양식들에 이르는 일련의 '예술'들은 세계‧자연과의 불화라는 고통의 경험에 대하여 행복‧화해를 약속하는 보충적인 허구로서, 정화(淨化, katharsis)의 효과를 담지해 왔다. 아도르노에게 아우슈비츠는 예술이 약속하곤 했던 행복과 화해의 이행 가능성에도 절멸을 실행한 사태였다. "우리들 한가운데의 암흑 구멍"3) 그 자체. 이 어둠 앞에 행복은 허락되지 않고, 화해는 불가능하다. 현실의 '부정성'을 봉합하려는 유쾌한 긍정의 예술은 "위로의 말로서 팔리"4)려는 기만이다. 그것은 그럴싸한 위안을 제공하는 기계장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기만하지 않는 예술은 무엇인가? 그러고자 하는 예술은 "현실의 가장 극단적이고 어두운 상태 속에서 존속하기 위해 그처럼 극단적이고 어두운 것과 동일해져야 한다".5) '부정성' 그 자체가 되는 것. 부정성-부조리를 조리로 화해시키지 않는 것은 물론 부조리를 내용으로서 '재현'하는 것도 아니며, 그 상태와 형식 자체로 부정성인 것. 아도르노는 시각예술에 있어서는 말레비치를, 음악예술에 있어서는 쇤베르크를, 극예술에 있어서는 베케트를, 문자예술에 있어서는 보들레르와 카프카를 저 '암흑의 구멍'에 대해 가능한 예술적 응답으로 불러들인다. 암흑과 고통의 경험 자체에 대한 미메시스로서 추와 불협화음을 미학으로 삼는 예술들, 거의 아무것도 현시하는 것이 없는 듯 보여서 상상력의 무능을 드러내는 예술들. 그렇게 이미지를 파괴하고 모든 현시를 부정함으로써 현시 불가능한 것을 현시하는 '숭고'하다고 명명되는 예술들은 우리를 한계 앞에 무릎꿇림으로써 오히려 그 한계 너머를 감지하게 만들고자 한다.
    그것은 '암흑' 이외의 '색채'를 말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으로(역설적으로) '유토피아적 화해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선택된 어둠이었다. 아도르노에게 유토피아란 "기존 상황에 대해 부정적"6)인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부정성을 통해 예술은"7)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유토피아를 말하게 된다고 생각되었다. 가령 "카프카의 글에서 이야기되는 바는 경험적으로 명백히 불가능하기 때문에 소설 독자들과의 합의를 깨뜨리지만, 바로 그로 인해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게 된다."8)는 식의 논평은 그러한 사유 방식의 가장 간단한 예시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미지의 파괴와 현시할 수 없는 것을 현시하는 부정 미학은 그 내용이 급진적인 것 이상으로 극단적으로 수용되어, 이미지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뻗어 나가기도 했다. 가령 이러한 논평들. "가시적인 흔적이 없으며 상상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시선 없는 절대적인 재난".9) 심지어는 절대적 명제를 예외들로부터 황급히 지켜내야 한다는 듯 히스테릭한 거부. "쇼아의 이미지들은 없다." "쇼아의 이미지는 없다." "이미지는 없다." "없다."10)
    한편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비르케나우의 강제수용소에서 비밀리에 촬영되어 '멀리', 즉 이곳까지 전해진 네 장의 사진을 붙잡는다. 이 이미지들은 무엇일까? 이미지 자체를 부정할 때에, 이 사진들은 쇼아의 이미지가 아니다. 쇼아의 절대적인 어둠은 어떤 시선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고, 쇼아를 다 담을 수 있는 이미지란 없기 때문이고, 아우슈비츠 자체가 증언자들이 말하듯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 장의 사진으로부터 위베르만과 『사울의 아들』의 감독 라슬로 네메시가 어떤 "본질적인 질문"11)을 읽어낼 때에, 그 질문은 이미지 자체를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특히 지금-여기에 '있는' 이 이미지는 진정 무엇이었나.
    그것은 나치스의 은폐 시도들, 그것을 거스르는 데에 수반되는 위험들, 동족 절멸의 과정에 자신들 스스로 '노동'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끔찍한 자기고발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1944년 8월의 수용소 바깥으로 멀리 전달되기를 희망했고 마침내 성공한 이미지들이었다. 민족의 말살은 물론, 진실의 말살 그 자체에 맞섰던 이미지들. 그렇다면 누군가가 이 이미지들을 '쇼아에는 이미지가 없다'는 전언에 입각하거나 '말할/재현할 수 없는 것'이라는 교조를 앞세워 그것들을 도로 어둠 속으로 파묻음으로써 "아우슈비츠를 언어로부터 절대적으로 분리된 현실로 만든다면 (···)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나치스의 제스처를 반복하는 것이며, 그들은 통치의 비밀과 은밀하게 연대적인 것이다".12) '최종 해결'의 맥락에서 명백히 "말살에 대한 망각은 말살에 속"13)하며 네 장의 사진은 바로 그 망각이라는 말살로부터 살아남아 잔존된 이미지이다. '실제로' 그렇다.
    위베르만의 이러한 논의가 우리의 사정에 시사하는 바도 없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근대, 특히 서울이라는 메트로폴리스야말로 말살과 추방 그리고 그것에 대한 망각 위에 성립되어 있다. 70년대 조세희 소설에서 나타나는 강제철거의 상황이나 박완서 소설에서 발견되는 거칠고 다급한 재개발의 풍경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운이며 용산의 비극으로 '반복'되고 있는 중이다. 조금이라도 뒤처지거나 낡거나 시효가 지난 것은 기어코 남겨 놓지 않는 이 공간에 대한 경험이 우리의 감성에 아무런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았다고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문학은 그러한 망각에 맞서 '잊힐 것'들을 제 안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잔존된 이미지로 기록해 왔다. 이러한 힘은 당면한 사태에 재빠르게 밀착하거나 작가나 인물의 정체성의 정치에 입각할 때에는 잘 포착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다. 어떤 것들은 현상되기까지 시차(時差)를 필요로 한다.14)
    재현에 대한 또 하나의 반론은 폭력에 대한 쾌락을 문제 삼는 것이다. 그건 재현의 시도에서 수용에 이르는 모든 단계에 도사리는 위험이다. 굳이 그것을 보아야만, 들어야만 이 세계에 그런 폭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정말로 당신은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당신은 단지 그것을 '보고' 싶을 뿐이며 즐기고 싶은 것은 아닌가? 재현되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은 기만이라는 것, 이는 충분히 뼈아픈 지적이다. 이는 세계의 폭력을 자명하게 늘 거기 존재하는 부정성으로 파악하고 의식적 감시의 대상으로 부상시키고자 하는 정신에 입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그 폭력이 자행되었다는 엄연한 개별적 범례를 '없던 일'로 치부하려는 움직임 또한 거세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이러한 은폐는 많은 경우 더 많은 권력을 소유한 쪽에서 시도하기 마련인데(미투는 바로 그 은폐와 망각의 권력에 맞서는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시간'마저 이쪽 편에 선다. 그것은 동일한 파괴가 반복되고 있다는 명징한 역사마저 풍화시키는 것이다.

  01)  르주 디디 위베르만, 오윤성 역,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 도서출판 레베카, 2017.(이하 『이미지들』로 표기하고 쪽수만 병기.)
  02)  테오도르 아도르노, 『프리즘』, p.29.
  03)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이나라 역, 『어둠에서 벗어나기』, 만일, 2016, p.15.(이하 『어둠』으로 표기하고 쪽수만 병기.)
  04)  테오도르 아도르노, 홍승용 역, 『미학이론』, 문학과지성사, 1997, p.72.
  05)  같은 책, 같은 곳.
  06)  같은 책, p.61.
  07)  같은 책, p.62.
  08)  같은 책, p.306.
  09)  정신분석가 제라르 바이츠만의 쇼아에 대한 논평들. 『이미지들』, p.46.
  10)  마찬가지로 제라르 바이츠만의 논평들. 같은 책, p.92
  11)  『어둠』, p.15.
  12)  『이미지들』, p.302.
  13)  같은 책, p.40.
  14)  동일한 맥락에서 이 글은 여러 시간대의 영화 및 소설 텍스트들을 다소 어지럽게 아우른다. 대상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영화 『사울의 아들』(라슬로 네메시, 2014)과 『히로시마 내 사랑』(알랭 레네, 1959), 소설 한강의 『소년이 온다』(창비, 2014)와 김숨의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현대문학, 2018) 그리고 『군인이 천사가 될 때까지』(현대문학, 2018).

 

 

2. 이미지, 기억, 상상

 

    『사울의 아들』은 아우슈비츠로부터 잔존된 이미지들을 받아, 다큐멘터리적으로 강제수용소의 구조나 작동 방식을 재구성하고자 하지 않고 '픽션'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이미 『사울의 아들』이 맞닥뜨린 위험이 있다. 누가, 어떻게 감히 아우슈비츠의 희생자들에 자신의 카메라를 가져다 댈 수 있는가, 심지어 허구를 가미해서? 그 행위는 엄연한 윤리적 위험을 수반한다. 라슬로 네메시가 그 위험을 몰랐을 리는 없다. 그는 그것을 무릅쓴다. 우리는 그의 영화에서 인식의 한계들을 반영하는 형식 속에서 감시와 통제를 '무릅쓴' 사진 촬영, 죽음을 '무릅쓴' 무장봉기, 그것들 못지않게 불가능해 보이는 장해를 '무릅쓰고' 한 소년의 시신을 구해내 아들을 발명하고 랍비를 찾아 헤매며 장례를 준비하는 사울을 본다. 그리고 그가 시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도망자들과 숨을 돌리던 오두막에 우연히 당도한 폴란드 소년을 '아들'로 본 듯하던 미소를, 뒤이어 들려오던 기총소사의 총성을, 그 뒤의 적막을 뚫고 저 멀리 달려 나가는 소년의 뒷모습도 본다. 우리는 수용소 파괴와 탈출의 시도들이 모두 실패하는 것을 본다. 사울의 장례 역시 그가 아이의 시신을 잃어버림으로써 실패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한 실패다. 그의 광기에 가까운 '감행'의 시도가 망자들이 재와 연기로 환원되어 영원한 실종과 망각에 처해지는 잔혹한 절멸의 기획에 맞서 "아이가 존재할 수 있는 상황"15)을 만드는 것이었다면, 그는 여지없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소년의 시신은 인간을 사물화 하는 소각로의 화염으로부터 벗어나, 강이라는 원형적인 피안의 통로에게 인계된다. 소년의 유해는 세계에 남겨졌다. 철두철미한 살해자가 남긴 몇 안 되는 증거 조각으로든, 파괴와 절멸의 '절대적이지 않음'을 증명하는 표지로든, 누군가의 아들로서든. 더불어 사울의 미소가 남겨졌다. 폴란드 소년에게 인계된, 아마도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을 것이 분명한 미소. 또는 그곳에 웃을 줄 아는 '인간'이 '있었다'는 기억의 대표 이미지가 될 주름투성이의 얼굴. 소년은 그를 거의 비장하다시피 굳은 표정으로 눈에 담고는, 나치스 추격대의 행렬을 지나 멀리 달려 나간다.
    이러한 이미지의 전달과 인계의 방식은 제한된 개인의 활동 범위를 넘어서서 비밀스런 촬영을 위해 카메라가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고, 촬영된 필름이 다시 손에서 손으로 건네져서 그들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땅속으로라도)으로 전달되어 가는 과정과 거의 일치하는 듯 보인다. 물론 거기에 즉각적인 전복이나 혁명의 효과는 없다. 그것은 미약하고 불완전하고 은밀하게 일해서, 다만 기억하게 할 뿐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이 영화가 아우슈비츠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데에 수반되는 위험을 무릅쓰고 '도박'을 감행하게 만든 무언가가 있다. 이것이 정치적으로 성공적인가 실패인가에 대한 판단은 각기 다르겠으나, 픽션이되 네 장의 사진이 증언하는 '실제'를 존중하는 방식의 픽션이며 '잔존'의 의지를 계승하는 것처럼 보이는 픽션이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진실의 조각'을 시간과 공간 모든 면에서 더 먼 곳까지, 그리하여 우리에게(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더 가까운 곳까지 보내려는 의지를 재생산하는 픽션. 라슬로 네메시는 그 네 장의 사진이 그냥 잊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그리고 사진들은) 아우슈비츠가 잊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서 정대의 혼을 초점으로 삼은 2장 '검은 숨'에 대해서도 짤막하게나마 이야기해 볼 수 있겠다. 여타의 장들은 자료와 증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접근'될 수 있는 영역에 다가가고 있는 데에 반해, 2장은 '없는 자'에게 시선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론적으로 이것은 가능한 시점이 아니다. 서술자를 그 위치에 가져다 놓는 시도도 적잖은 위험을 수반한다. 그런데 정대는 누구로 자리 잡혀 있나. 정대는 공식적으로 사망자도, 실종자도 아니고 없는 자다. 정대의 시신은 아우슈비츠의 '최종 해결'과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인멸된다. 실제로 5·18을 전후해 행방불명자로 신고 된 이는 242명이지만,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인정된 실종자는 82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160명은 어디로 갔는가? 행방불명이라는 증거는 실종자의 가족들이 증명해야 한다. 어쩌면, 그 가족들은 숱한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것을 증명해 내고 '인정'을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족조차 남지 않은 이들은? 누가 그들이 '있었다'고, 그러나 죽거나 사라졌다고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정대의 죽음을 목격한 동호도, 정대의 행방불명을 증언해 주어야 할 정미도, 사후적으로나마 말살의 증거가 되어 줄 정대의 유해도 실질적으로 남아 있지 못하다. 정미와 정대 남매는 고작 동호 모(母)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그러니 심지어 정대가 재와 연기가 되어버렸다고 누가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것을 말해 준 이는 아무도 없었고, 그래서 한강은 영혼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는 비약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울이 그러했던 것처럼(심지어 이 경우에는 유해조차 남지 못했지만) 정대가 존재할 수 있게 한다. 잊히지 않도록. 이토록 철저히 말살된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만든다.
    반복컨대, 망각은 말살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형집행인'들이 바라마지 않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의 증언을 소설화하는 최근 김숨의 작업들은 그런 의미에서 주목을 요한다. 특히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는 증언집이라기엔 정제되었고, 소설이라기엔 덜 정제된 증언과 소설의 중간적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성질은 전쟁사에서 배제되고 기각되어 온 여성들의 목소리를 채록‧수집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그것,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목소리 소설'이라고 명명한 그것과 동일하며 '소설-코러스'의 구성요소에 해당한다. 비록 '구성'된 결과물이라 하더라도, 증언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1차적으로 사료의 의의를 지닌다. 사건에 대한 촉각적인 기억들. 증언자들은 저마다의 시공간, 저마다의 위치와 입장에서 사건을 간직한 필름과 같다. 이미지들은 아직 음화(陰畫)의 상태로 숨겨져 있다. 그 기억들이 드러나려면, 그 사적 기억이 공적 기억의 망각의 더께 위로 드러나려면 그 이미지들은 양화(陽畫)의 과정을 통해 현상되어야만 한다. 알렉시예비치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김숨의 작업은 바로 그 일에 해당한다.
    이러한 작업의 관건은 '사건'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추출하여 '진실'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오래된 미결 사건의 책임소재를 가려서 즉각적이고 현실적인 조치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에 와서는 도저히 상상해 내기 힘든 어떤 파괴가 실제로 실행된 바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감히 상상하지 못할 것에 대해 상상케 하는 기억과 이미지들. 이들이 불러내는 상상은 단지 허구적인 것이나 공상적인 것이 아니다. 망각되어서 허구적이거나 공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자명한 파괴를 알게 하는 상상이다. 증언자들이 점차 줄어들고 누구도 더 이상 이 싸움에 귀 기울이지 않게 될 때 생겨날 진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사과나 보상의 차원을 넘어 누구도 그러한 파괴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하게 되는 사태, 『제국의 위안부』만 남겨지는 사태이다. 설령 사과와 보상이 넘치도록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파괴를······ 파괴의 반복을 망각할 때 그것은 언젠가 다시 회귀하기 위해 어둠 속에 매복한다.

  15) 『어둠』, p.91.

 

    제노사이드, 우리는 이에 대해 런던에서 무엇을 알고 있었나? 명확한 의식의 차원에서, 나의 지각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정치인들 중에서가 아니라 형법 범죄자들 중에서 모집한 엄한 감독관에 의해 운영되어, 강제수용소들은 잔인했다; 그곳에서 치사율은 높았다. 하지만 가스실들은, 인간에 대한 공업적 살육은, 아니다, 고백하건대, 나는 그것들을 상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들을 알지 못했다.16)

  16) 런던 소재 유대인 저항자의 증언. 『이미지들』, p.295.

 

    상상할 수 없는 것은 모르는 것이고 나아가 없는 것이다. 누군가가 말살을 상상할 수 없는 지경까지 밀어붙여 그것을 '미지'에 넘기고자 할 때,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어떻게든 바깥으로 더 먼 곳까지 보내고자 했다. 재현의 불가를 선언하는 것. 오로지 말할 수 없음, 상상할 수 없음만을 강조하는 것은 그들의 감행을 한 번 더 가로막는 담장이다. 그것은 쇼아'들'을 다시 부활해 반복되지 못하도록 '죽이지' 못하고 다만 감추어 준다. 그러면 이미지는? 명백히 그것은 "전혀 아무것도 부활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것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무릅쓰고' 시간들에 대한 기억을 '늘어놓는다'".17) 그러나 그 늘어놓음은 망각에 정면으로 저항한다.

  17) 같은 책, p.273.

 

 

3. 불완전, 부정확, 결함

 

    물론 기억과 상상과 이미지는 불완전하다. 모든 것은, 심지어는 어떤 곳에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자의 증언조차도 '절대적'으로 완전할 수는 없다. 『사울의 아들』은 물론 비르케나우의 네 장의 사진이 쇼아 전체에 대한 표상일 수는 없다. 『히로시마 내 사랑』이 전후 프랑스의 부역자 재판이나 히로시마 자체일 수도 없다. 『소년이 온다』가 그날의 광주 자체일 수는,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가 일제의 만행에 대한 모든 것이거나 일본군 '위안부' 전체일 수는 없다. 그것들은 각각이 결함을 가진 결함들의 구성이다. 어쩌면 재현에 있어 최소한 필수적으로 요구되어야 할 태도가 있다면, 자신이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의식하는 것일 테다. 지나친 자기신뢰, 모든 것을 재현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는 태도는 대상을 기억이 아니라 관음의 대상으로 변형시킨다.
    한편 재현 불가의 선언은 이미지가 '전체'일 수 없다는 이유로 그것을 "금지 및 완전 박멸의 대상"18)으로 삼는다. '진실 전체'에 비한다면 어디까지나 정확성과 균형을 결여한 파편이라는 지적은 옳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이미지의 조건이고, 이미지가 일하는 방식이다. 그것들은 부정확하기 때문에 스스로 '늘어놓'고자 했던 바와는 다른 것 혹은 이상의 것까지 드러낸다.
    김숨의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이하 『숭고』)의 화자 김복동은 아흔셋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것을 구술하고 있다. 김숨은 그 구술의 여백, 화제의 비약, 사실적 기억과 감상적 진술들의 뒤섞임을 부러 정제하지 않고 파편화되고 뒤섞여 있는 채로 두었다. 우리는 그 내용의 '사실들'을 추출해서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과정을 사료적으로 구성해 볼 수도 있고, 시기별로 파악해서 그 삶의 연표를 작성해 볼 수도 있을 터다. 그러나 이 기억들은 지나온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선명하지가 않다. 김복동은 자신을 처음 때렸던 '손'은 기억하지만, 그 손의 주인인 군의관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한다. 이 가담자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그를 지목할 수 없다고 이 증언이 무효하다고 말해야할까? 아니다. 그러한 영역에 속하지 않는 것들, 김숨이 휘발시키지 않고 남겨 둔 그 목소리들······ 그러니까 전생과 죄, 사랑 같은 것들에 대한 끝 모를 물음들도 우리에게 어떤 '앎'을 전달한다.
    가령 김복동(이자 이 소설의 화자)에게 전생은 자신에게 벌어진 파괴와 폭력을 이해해 보려는 수단이다. 그게 아니고서는 그 모든 일들을 이해할 길이 없는 탓이다. 어째서 그런가? 그녀가 단지 사건의 피해자로서 사태를 '종합'할 수 없는 수동적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인가?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 사태가 그녀에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일 테다. 세상에 그런 곳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이것은 화자가 살아 돌아와서 엄마에게 겪은 일들을 늘어놓았을 때 엄마가 보인 반응과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처음에 내가 엄마에게 말했을 때 거짓말이래./그런 일을 겪고 사람이 살 수는 없다며",19) "그런 데가 세상 어디에 있느냐고 했어, 그런 일을 당하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올 수가 있느냐고".20) 김복동이 갖는 의문도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김복동은 자신이 그 모든 것을 겪은 터라 거짓말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김복동은 차라리 자신이 전생에 자식들을 죽여서 벌을 받는 것이라는, 『전생록』 할아버지의 말을 믿는다. 자신에게 자행된 파괴를, 단지 현생에서의 우연적 사건이 아니라 전생에 걸쳐 반복되는 파괴로 생각한다. 현생에서 그녀가 맞닥뜨려야 했던 폭력의 원인이나 이유는 그녀가 '현재' 속에서는 구성해 내거나 납득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심지어 옥황상제의 딸이었던 시간까지, 자식들을 스스로 살해했다는 그 죄의 시간까지. 이러한 시간관에서 현생은 그때의 죗값을 벌로써 치르는 반복되는 삶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된다. 김복동은 파괴가 반복될 뿐인 지옥 같은 시간 속에 있다. 이 반복을 정지시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죄를 짓지 않는 것뿐이다. 그래서 김복동은 죄를 지을까 봐 겁이 난다고 여러 차례에 걸쳐 이야기하고, 말이 무섭다고 말하고, "아무도 미워하고 싶지 않아,/아무도 원망하고 싶지 않"21)다고 말하고, 누군가를 "아프게 한 거 있으면 태풍이 와서 다 쓸어가 버"22)리라고 빌고 또 빈다. 그런데 반복되는 파괴는 이뿐만이 아니다.

  18)  『이미지들』, p.241.
  19)  『숭고』, p.44.
  20)  같은 책, p.128.
  21)  같은 책, p.163.
  22)  같은 책, p.181.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왔더니 전쟁이 났어. (···) 엄마가 피난민들에게 집을 내주었어.
엄마가 불쌍하다며 가마솥에 밥을 한 솥 지어 그들을 먹였어.
그런데 떠나며 숟가락과 그릇들을 가져갔어.
전쟁통에 백두산 호랑이로 불리는 이가 양산 경찰서장으로 내려왔어.
경찰들이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트럭에 실었어. (···) 산에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총소리가 들렸어. (···) 그 마을에서는 지금도 한날 제사를 지내. 남자들이 한날 죽어서.

 

    양산 읍내 네거리에서도 경찰들이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였어. (···) 사배재에서도 (···) 부산에서도(···)23)

  23)  같은 책, pp.139-141.

 

    전쟁 이후의 전쟁. 학살 이후의 학살. 파괴 이후의 파괴. 여기서 증언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국가 형성 과정에서의 제노사이드라는 우리 근현대사의 그림자이지만, 김복동의 삶의 맥락에서는 '또' 자행된 파괴의 얼굴로 놓여 있다. 김복동의 삶에는 일본군 '위안부'로서 겪어야 했던 일과 그 사건을 자기 맥락에 놓기 위해 받아들인 전생에 걸친 무참한 윤회뿐만 아니라 또 다른 파괴들도 반복의 패턴을 새기고 있다. 현생과 전생, 사실과 감상을 넘나드는 구어의 흐름 속에 그 패턴만큼은 선명히 떠오른다.
    우리는 일본군 '위안부' 증언집이라는 맥락에서 『숭고』로 들어가 일본과 일본군만을 적대적 위치에 올려놓지만, 실로 김복동의 끊임없는 질문은 우리에게 폭력이 과연 그런 문제인지를 되묻게 하려는 듯 보인다. 어떤 파괴의 현장에서 학살의 주체는 일본군도 인민군도 아니고 우리의 경찰이었다는 사실이 불러일으키는 충격은 '저들'과 '우리' 사이의 경계를 지워 없앤다. 그렇게 김복동의 증언은 부정확하고 불완전한 방식으로, "정확한 균형 속에서는 그것을 결코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아는 방식"24)으로, 자명한 것으로 여겨져 온 악(惡)과 '우리'를 나누어주는 안온한 테두리를 흩뜨린다.
    비록 얼굴은 잊었지만, '때리는 것'으로 김복동에게 각인된 '손'의 이미지는 바로 이 맥락에서 유효하다. 김복동에게, 수많은 여성들에게 그 어머니조차 믿지 못할 일들을 자행했던 것은 그 '사람의 손'들이었다. 사람들에게 상상 못 할, 말로 못 할 일들을 저지르고 죽이고 태워 없앤 것들은 다른 게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2018년 6월 18일 오사카에서 일어난 지진을 두고 김복동이 "사람이 많이 다쳤어?//내가 도움 줄 게 없을까?"25) 하고 말했을 때, 당신이 그 말의 온기에 조금이라도 놀랐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사형집행인'들과 우리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다는 것을, 양자를 한사코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것이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24)  『이미지들』, p.250.
  25)  『숭고』, p.136.

 

    극복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 속에 대개 중압감을 주고 진절머리 나는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중압감과 혐오감은 결코 아우슈비츠 이후만큼이나 견디기 어려웠던 적은 없었다. 아우슈비츠 책임자들은 당신과 나처럼 콧구멍, 입, 목소리,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결혼할 수 있었고 아이들을 가질 수 있었다.26)

  26)  조르주 바타유의 아우슈비츠 서술. 『이미지들』, pp.47-48.

 

 

4. 동류(同類)라는 사실

 

    '우리'처럼 '그들'이 사람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형집행인들이 희생자들과 동류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단순히 우리와 그들, 사형집행인과 희생자들의 자리가 상호교환 가능하다는 뜻일까? 어제의 학살자가 오늘의 희생자가 되고 어제의 희생자가 오늘의 학살자가 되는 전복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그래도 좋다는 뜻일까? 그도 아니면 더 극단적으로, 사형집행인과 희생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둘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관건은 혼합이 아니다."27) 그러나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사형집행자가 되는 것은 바로 '동류로서'이다. (···) 사형집행자와 그의 희생자의 관계는 그들의 공통적인 "인간이라는 종" 속에서 정초된다".28) 그러나 '동류'라는 사실은 사형집행인에게는 정초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동류에게 고문을, 살해를, 소각을 실행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자신과 희생자 사이에 '완전히 다른 것'으로서의 관계를 설정한다.
    이 맥락에서 『히로시마 내 사랑』을 새삼 불러와 다시 이야기해 봐도 좋을 것 같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을 겹쳐 놓음으로써 바로 그러한 '다른 것'의 관계 설정이라는 조류에 맞선다. 우선, 독일군으로부터 조국이 점령당한 상황에서 독일군 청년과 프랑스 여자. 유례없이 격렬한 전쟁의 상황 아래 양자의 간극은 극도로 먼 것이다. '그녀'는 그 간극들을 '뛰어넘는다'. 실제로 '그녀'가 연인에게 달려가는 장면도 온갖 장해를 돌파해 나가는 시퀀스로 묘사된다. 그때 '그녀'가 넘는 것은 독일의 프랑스 점령 당시 가장 선명했을 울타리, 피아의 구분 그 자체나 다름없다. 이 울타리는 서로가 다르다고······ 서로가 가장 혐오스럽고 공포스러운 괴물이라고 말하지만, 그녀는 바로 그 '다름'을 무릅쓰고 거기에 수반되는 위험들마저 무릅쓴다.

  27)  같은 책, p.235.
  28)  같은 책, p.238.

 

    죽는 순간을 알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시신과 내 몸 사이에 어떠한 다른 점도 느낄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의 시신과 내 몸은 너무나 닮아 있었으니까요! (『히로시마 내 사랑』 中)

 

    여기서 그녀는 독일과 프랑스라는 국가적 조건을 뛰어넘어 '그'와 자신이 '동류'임을 발견하면서, 동시에 산 자로서 망자와의 '동류' 관계 역시 발견한다. 느베르의 희생자들. 프랑스에서 최초의 부역자 청산 작업은 레지스탕스의 자체적인 군법회의 등 예외적이고 초법적인 약식 절차를 거쳐 이루어졌으며, 약 9000명이 처형되었다. 이 가운데에 무고와 같은 부작용의 사례도 적지 않았다는 걸 새삼스레 지적하지 않더라도, '그녀'에게 가해졌던 식의 '전후 인민재판'이 드물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핵이 절멸기계로 작동했던 히로시마의 희생자들. 전쟁의 상황, 일본이 전범국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더라도 히로시마는 초법적이고 극도로 광범위한 인민재판과 다르지 않았다. 희생자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수만 명의 조선인과 연합군 포로까지 포함하여, 대다수가 전쟁범죄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민간인들이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교차되는 '그녀'의 매끄러운 피부와 원폭 피해자들의 이미지는 명백히 대비를 이루는데도, 프랑스의 느베르와 일본의 히로시마가 겹쳐지게끔 만드는 힘이 바로 이것이다. 일본인인 '그'는 '경험적'으로 "당신은 못 봤어" "당신은 몰라"라고 말하지만, '그녀'는 의미론적 혹은 인류학적으로 "난 다 봤어요" "난 다 알아요"라고 말한다. '그녀'는 실제적인 경험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현저히 먼 것과 '동류'임을 발견하는 역량으로 그것을 '안다'. 물론 '상상'을 통한 앎이다. '그녀'는 희생자들과 자신 사이에서 '어떠한 다른 점'도 아닌, '너무나 닮아 있'음을 찾아낸다. 그러한 감행을 실행하는 '그녀'의 이야기에 계속해서 '사랑'이 동반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과 자신의 여하한 차이는 차치하고, 어떻게든 닮은 점을 상상하면서 시작된다.
    같은 맥락에서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이하 『천사』)는 이미 그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하다. 여기서는 군인과 천사가 '완전히 다른 것'으로 간주되는 대신 동류의 서로 다른 양태로 파악되고 있으며, 심지어 전자가 후자로 이행될 수 있다는 믿음까지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길원옥의 증언들 역시 반복되는 파괴의 범례들을 아우른다. 가령 베트남전쟁 당시 퐁니‧퐁넛 마을 학살의 생존자인 '응우옌 티 탄' 그리고 하미 마을 학살에서 살아남은 동명의 '응우옌 티 탄',29) 이라크 소수민족 야지디 족 여성으로 IS 성노예 만행의 피해자인 '마르바 알-알리코',30) 2차 콩고전쟁에서 두 딸과 함께 군인들에게 강간당하고 남편을 살해당한 '레베카 마시카 카추바',31) 그리고 길원옥 자신까지. 길원옥은 각각의 범례에서 학살과 만행의 주체를 '군인'이라는 일반 명사로 아우른다. 이 범주에 민간인 마을에 화기와 병기를 사용한 베트남전의 한국군, 남자들은 죽이거나 살인자로 만들고 여자들은 겁탈하고 노예시장에 내다판 IS 병사들, 콩고의 정부군과 반군들, "아이를 갖지 못하게 수은을 먹이기도 하고 자궁을 들어내기도 했으며 전쟁에서 지자 야산으로 끌고 가"32) 살해를 자행했던 일본군이 구분 없이 들어온다. 길원옥의 언어에서 '군인'은 그러니까 포괄적인 '사형집행인'으로서 '파괴의 수행자' 전반에 해당하는데, 대단히 타자적인 외부의 존재가 아니라 완전히 '동류로서' 정초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29)  『천사』, pp.56-58.
  30)  같은 책, pp.87-96.
  31)  같은 책, p.141.
  32)  같은 책, p.92.

 

    어린 남자 아이의 손에 칼을 들려준 군인들에게도 엄마가 있겠지.
그 칼로 네 엄마를 죽여라, 하고 말한 군인에게도.
엄마가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으니까.
(···)
겨우 열세 살이던 내 옷을 찢은 군인도 잘못을 뉘우치고 눈물을 흘리면 천사가 될 수 있는지.33)

  33) 같은 책, pp.92-93.

 

    길원옥은 발현된 행위의 극단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다'라는 인식 아래, 누구도 묻지 않는 물음을 묻는다. 어떻게 자신에게도 엄마가 있을 텐데도, 네 엄마를 죽이라며 그 아들에게 칼을 쥐어줄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를 인간성으로부터 저 멀리 떨어진 외부의 절대악으로 간주하는 것이 더욱 간편할 텐데도. 어쩌면 이렇게 묻는 순간, 길원옥은 그 군인에게도 새겨져 있는 파괴의 반복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남자 아이들이 '군인'이 되어버리는 굴레를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에게서 대안적 가능성을 상상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으리라. '그 군인'도 천사가 될 수 있는가? 어떤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이 물음은 곧장 세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물음으로 확장된다. '군인'은 천사가 될 수 있는가?
    물론 이것은 간단히 답할 수 있는 성질의 질문은 아닐 것이다. 하나, 적어도 그러한 대안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자 한다면 저마다 믿는 바를 실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패의 판가름은 늦게 온다. 언제나 '지금'은 미지를 돌파하는 '감행'과 '무릅씀'만으로 채워질 수밖에. 길원옥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34) 말하기로 마음먹는 이유도 우선은 이렇게 설명된다.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그 끔찍한 일을 당하는 여자가 또 있으면 안 되니까."//"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테니까."35) 여기서 그녀가 말하지 않으면 '모를 것'들은 단지 '위안부'에 국한된 사실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당하는 여자'들 그리고 모든 '군인'에 걸친 파괴'들'에 대한 것이다. 또한 '군인'과 싸우려는 이들에게서조차 폐기되고 있는, 모두가 '동류'라는 앎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천사』는 단지 일본군 '위안부'로서의 증언일 뿐만 아니라, 싸움 대신 노래로써 군인을 천사로 변모시키기를 희구해 온 자의 이야기이고 망각을 무릅쓴 '말하기'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길원옥은 인터뷰어의 질문에 기계적으로 기억을 끄집어내는 수동적 인터뷰이가 아니다. 자신의 말의 힘에 대한 명확한 자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말한다. 그것은 본인에게 참혹한 상처이되 누구도 감싸주기는커녕 손가락질을 해서 고통을 가중시켰던 바로 그 역사를 드러내는 일이며, 그것을 감수하고 무릅쓴 '시도'이다. '군인이 천사가 될 때까지' 불릴 노래로 남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시도. 이 '말하기'는 김숨의 '쓰기'와 만나 기억과 앎의 말살과 맞선다.

  34)  같은 책, p.94.
  35)  같은 책, 같은 곳.

 

    따라서 '모든 것을 무릅쓰고 상상하는 것'. 왜 '모든 것을 무릅쓰고'malgré tout인가? 이 표현은 찢음을 나타낸다. '모든 것'le tout은 우리가 아직 답을 찾아내는 데 이르지 못하는 역사적 조건들의 힘을 가리킨다. '무릅씀'le malgré은 오로지 단독적인 것의 발견적 역량에 의해서 이 힘에 저항한다.36)

  36)  『이미지들』, p.280.

 

    희미하고 불완전하고 비영속적이어서 모든 증언이 그렇듯이, 모든 상상은 제각각이다. 바로 그 제각각인 상상을 경유하여 '오로지 단독적인' 관계들은 고안된다. 모든 차이를 넘어서 '그'를 사랑하는 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누군가와 함께하는 일, 내 것이 아닌 몸과 고통을 내 것처럼 받아들이게 하는 일, 내가 저지르지 않은 파괴에서 내 손을 보는 일은 상상의 일이다. 아우슈비츠, 히로시마와 느베르, 베트남, IS 성노예와 일본군 '위안부', 광주와 용산, 세월호의 관계를 발견하게끔 하는 것도 상상의 일이다. 그것들에 대한 이미지를 바라보는 일은 익명의 악을 우리 자신의 닮은꼴로 이해하고, 동시에 무참한 희생과 약한 빛도 우리 자신의 닮은꼴로 이해하게 한다. 그리고 파괴를 국가 간 분쟁이나 국가 내 폭력은 물론 인간의 일로 이해하게 하며, 어쩌면 정말 어쩌면 '군인'들로 하여금 자신과 희생자 사이의 동류관계를 발견하게 해줄는지 모른다.
    어쩌면, 이미지가 하는 일은 그뿐일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걸 '고작 그뿐'이라고 실망해야 할까, 아니면 '무려 ~씩이나' 하고 놀라워해야 할까. 그것은 반딧불의 미광이 그러하듯이, 아마도 어둠 — 그러나 완전하지는(절대적이지는) 않은 — 가까이에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부활시키지도 못하고, 진실 전체이거나 진리도 아닌 채. 그것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의탁될 수 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매번 변화된 현재와의 관계 속에서 다시 만들어질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로부터 '알 수 있는 것들'에 귀를 기울이되, 망각과 말살에 등진 자세를 유지하고, 가짜들 그리고 프로파간다를 주의 깊게 식별하는 일일 것이다. 동류로서 '군인'이 천사가 될 수 있다면, 천사 역시 얼마든지 군인으로 타락할 수 있다. 반딧불은 포획되고 사육될 수 있으며, 심지어 그 빛은 '이식'될 수도 있다. 반딧불을 애타게 발견하고자 하는 자는, 바로 그 희망에의 욕망 때문에 더 잘 속아 넘어갈 수 있다.

 

 

 

 

 

 

 

 

 

 

 

작가소개 / 김녕

201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문장웹진 201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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