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 - 조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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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비평가 특집]

 

최근 몇 년 간 한국문학의 흐름은 그야말로 숨이 가쁠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한국문학은 달라져야 했고, 달라지고 있으며, 또 계속해서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도 더 많은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수많은 변화의 외침은 지금도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제 막 자리매김한 '젊은'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부탁했다. 이들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습을 비트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어갈 한국문학의 풍경을 기대하며 '기획'의 지면을 연다.

 

 

 

소녀는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

 

 

 

조대한

 

 

 

 

    1.

 

    메르스가 확산되기 이전 즈음의 일이다. 녹번동에서 종로를 향해 가는 702번 버스에서, 마스크를 쓴 대여섯 명의 사람들을 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스크를 끼고 다니는 것에 대해 유난을 부린다는 인식이 조금쯤은 있었던 듯싶다. 의아했던 것은 당시 마스크를 착용한 이들이 모두 어린 혹은 젊은 여성들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물론 우연의 일치였을 테지만, 유행하는 아이템처럼 귀에 걸쳐진 그녀들의 흰 마스크는 일상의 색채 속에서 유달리 도드라졌다. 얼마 후 강남역 인근의 노래방에서 한 여성이 살해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참혹한 죽음을 슬퍼했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추모 행렬에 동참했던 여성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는 점이다. 의문은 기시감처럼 떠올랐다. 왜 그녀들은 마스크를 쓰고 있는가? 물론 그것은 질병과 시선의 우연한 폭력을 막아내기 위한 최소한의 자구책이었을 것이지만, 조금 다른 대답을 위해서는 다소 긴 우회로가 필요할 것 같았다.

 

 

    2.

 

    근대 이전의 시에서 근대시로 전환되는 과도기의 시작점에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있다. 그는 《소년》 창간호 권두에 해당 작품을 실었다. 어쩌면 그에게 근대의 기획은 소년의 기획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근대의 미래상을 소년의 무한한 가능성에 겹쳐 보려 했다.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에서 소년들이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죽이고 그 살점을 나누어 먹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아버지를 해친 환희와 죄책감을 동시에 경험한 소년들은 그 유대감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서양 문화권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상징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루이 16세라는 봉건적인 아버지를 청산한 후에야 벽안의 소년들은 근대라는 이름의 어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근대와 근대의 전환기에서 우리의 소년들은 스스로 아버지를 죽이지 못했다. 일제의 폭력에 의해 살해당한 부친의 주검만을 얻었을 따름이다. 폭력적인 새아버지에 의해 죽여야 할 라이오스를 상실해 버린 오이디푸스들은 영영 어른이 되지 못할 위험에 처했다. 미래를 향한 충만한 가능성과 설렘으로 시작된 근대적 소년의 기획이 의도와는 달리 소년을 벗어날 가능성을 처음부터 봉쇄당하는 절망에 빠져버린 셈이다.1) 이 기형적인 소년의 탄생 곁에서 소녀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소녀(少女)는 확실(確實)히 누구의 사진(寫眞)인가보다. 언제든지 잠잫고 있다.

 

    소녀는 때때로 복통(腹痛)이난다. 누가 연필(鉛筆)로 작난을한 까닭이다. 연필은 유독(有毒)하다. 그럴 때마다 소녀는 탄환(彈丸)을 삼킨사람처럼 창백(蒼白)하고는 한다.

 

    소녀는 또 때때로 각혈(咯血)한다. (…) 내활자(活字)에소녀의 살결내음새가 섞여있다. 내제본(製本)에소녀의 인두자죽이 남아있다. 이것만은 어떤강렬(强烈)한 향수(香水)로도 헷갈니게 하는수는없을―

 

    사람들은 그 소녀를 내(妻)처라고해서 비난(非難)하였다. 듣기싫다. 거즛말이다. 정말이소녀를 본 놈은 하나도없다.
    그러나 소녀는 누구든지의 처가아니면 안된다. 내자궁(子宮)가운데 소녀는 무엇인지를 낳어 놓았으니 ― 그러나 나는 아즉그것을 분만(分娩)하지는 않었다. 이런소름끼치는 지식(智識)을 내여버리지않고야 ― 그렇다는 것이 ― 체내(體內)에 먹어들어오는 연탄(鉛彈)처럼 나를 부식(腐蝕)시켜 버리고야 말 것이다.

 

    나는 이소녀를 화장(火葬)해버리고 그만두었다. 내비공(鼻孔)으로 조희탈 때 나는 그런 내음새가 어느때까지라도 저회(低徊)하면서 살아지려들지않았다.

 

– 이상, 「소녀」(《조광》, 1939. 2) 부분2)

  1)  최남선을 앞세워 근대적 주체들의 고아 의식을 분석한 논의로는 김홍중, 「한국 모더니티의 기원적 풍경」, 『사회와이론』 7호, 한국이론사회학회, 2005 참조. 한편 이 글과 비슷한 문제의식과 방법론으로 나홍진의 작품 세계를 분석한 논의로는 조대한, 「여성 탈환을 위한 소년들의 추격과 도주 – 나홍진의 <추격자>, <황해>, <곡성>을 중심으로」, 『대중서사연구』 24권 1호, 대중서사학회, 2018 참조.
  2)  김주현, 『증보 정본 이상문학전집 1_시』, 소명출판, 2009, 134-135쪽.

 

    이상이 누구인가? 어린 시절 타의에 의해 친아버지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그는 죽여야 하는 아버지를 빼앗겨 끝내 어른이 되지 못한 아해들의 대표주자이다. 그가 바라본 소녀는 누군가에게 "연필로 작난"을 당한다. 이 때문에 소녀는 "복통"이 나거나 "또 때때로 각혈"을 하기도 한다. '피'라는 소재와 무언가를 "삼킨" 소녀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성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연필의 장난은 소녀를 찌르는 행동의 일종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찌르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찌르는 사물의 종류이다. 뾰족한 것들의 수많은 선택항 중에서 시인은 왜 하필 연필을 택했을까. 그것은 연필이 글씨를 적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그의 부친을 상징적으로 살해한 범인의 이름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김해경을 양자로 들여 친아버지의 자리를 없앤 백부의 이름이 바로 김연필(金演弼)이다. 이상은 연필로 인한 아픔을 소녀와 공유하고 있다. 그는 소녀의 고통을 일부나마 이해하는 유일한 소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그는 소녀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억울함을 담아 외친다. "거즛말이다. 정말이소녀를 본 놈은 하나도없다."
    이와 같은 공감과 연민에도 불구하고 소년이 소녀에게 느끼는 또 하나의 감정은 공포이다. 소년의 정체성의 "자궁가운데 소녀는 무엇인지를 낳어 놓았"다. 그는 이 잉태에 "소름끼치"도록 두려움을 느낀다. 이와 관련하여 앞서 살펴본 프로이트의 가설을 재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아버지를 죽인 후에야 소년은 어른이 된다'는 그의 진술 속엔 어딘가 미진한 구석이 남아 있다. '아버지를 죽였다'는 행위와 '어른이 되었다'는 평가 사이의 관계는 인과 관계라기보다는 선후 관계에 가깝다. 소년은 살부(殺父) 이후 어른이 되었다는 사후적 명명을 받았을 뿐, 어른이 되겠다는 목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한 것은 아니다. 실상 「토템과 터부」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소년의 살인은 어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녀를 되찾아오기 위해 행해진다. 그가 친부 살해를 저지른 근본적인 원인은 아버지가 모든 소녀들을 독점하고 소년을 무리에서 내쫓았기 때문이다. 부친 살해는 소녀를 둘러싼 수컷들의 쟁탈전에서 부수적으로 초래된 사건이었다. 소년과 아버지의 대립 구도 바깥에서 부산물처럼 존재하는 것 같던 소녀가 실은 그 구조를 작동시키는 내밀한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가설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소녀를 되찾은 후에야 소년은 어른이 된다.'
    그런데 이상의 소년들은 되찾아야 할 소녀를 잃어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상실한 대상을 다시 상실한 것이다. 아버지의 독점 이후 소녀는 상실의 대상이자 되찾을 목표물이었으나, 독점적 부군의 타살 이후 소년들은 상실의 대상 자체를 상실하였다. 잃어버린 대상도 되찾을 무엇도 없는 목적지를 상실한 근대의 미로 위에서 이상의 아해들이 행했던 일은 막다른 골목을 공포에 휩싸여 질주하거나 되찾을 수 없는 소녀를 비난하는 일이었다. '연필'로 상징되는 근대의 급작스런 폭력은 소년과 소녀가 함께 겪은 아픔이자, 시대의 우연이 선물한 불가피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그 고통과 공포의 책임을 소녀에게 전가하고 그녀를 불신하기 시작한다. 연필에 찔리고 탄환을 삼켜 더럽혀진 소녀는 "체내에 먹어들어오는 연탄처럼" 소년을 "부식시켜 버리고야 말 것"이다. "연필은 유독"하기 때문이다. 소년은 근대적 폭력과 그로 인해 기형적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자기 정체성의 불안을 소녀의 탓으로 돌리고, 끝내 그녀를 "화장해버리고" 만다.
    「의심의 소녀」라는 작품으로 등단한 김명순이라는 여인이 있다. 그녀가 문단에 올라선 1917년이 이광수의 선구적 소설인 『무정』이 발표된 해임을 감안했을 때, 그녀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한 시대를 살아간 여성 작가이다. 최초의 본격적인 문학 동인지인 《창조》의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녀는 문단의 중심에서 주목받는 삶을 살았을 법하지만, 실상 일본으로 도망치듯 건너간 후 생활고와 정신병에 시달리다 비참한 일생을 마감했다. 당시 주목받았던 것은 그녀의 작품보다는 그녀와 관계된 뒷소문들이었다.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그녀가 이응준 소위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건이 신문 매체를 통해 세간에 노출된다. 이 사건 때문에 김명순은 자살 시도를 했고 몸담았던 여학교는 그녀를 제적 처리했다. 이응준은 훗날 대한민국의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당대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어떤 가치판단을 내렸는지 쉽게 단언할 수는 없지만, 기생 출신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나 근대적 포즈를 취하며 자유연애를 주창하던 그녀를 이질적인 존재로 여겼음은 틀림없는 것 같다. 김명순은 폭력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그 자체로 의심받는 소녀의 전형이었다.
    의심과 불신의 그녀를 "활자"로 박제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졌다. 김기진은 「김명순씨에 대한 공개장」에서, 그녀가 "히스테리"적이고 "문학중독"이 된 이유는 "처녀 때에 강제로 남성에게 정벌을 받았"3)기 때문이라고 썼다. 김동인은 김명순의 필명인 김탄실을 한 글자만 바꾸어 쓴 소설 『김연실전』에서, 그녀를 성적으로 타락한 신여성으로 묘사했다. 그 "제본"들 속에는 의심받고 낙인찍힌 "소녀의 인두자죽이 남아있다". 믿지 못할 소녀를 집단 살해함으로써만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었던 근대 소년들의 처량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종이와 활자로 박제되었던 소녀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어떤강렬한 향수로도" 지울 수 없는 "살결내음새"가 되어 소년의 곁에 되돌아온다. 뒤늦게 태워버린 후에도 "조희탈 때 나는 그런 내음새가" 되어 "어느때까지라도 저회4)하면서 살아지려들지않"는다.

  3)  김기진, 「김명순씨에 대한 공개장」, 《신여성》, 1924. 11.
  4)  머리를 숙이고 사색에 잠겨 서성거림, 맴돌거나 선회함, 낮은 곳으로부터의 회귀 등.

 

 

    3.

 

    소녀의 이름이 문학의 장에 다시 떠오른 것은 '문학소녀'라는 명칭과 함께이다. 대체로 문학소녀란 문학을 사랑하고 문학 창작에 뜻이 있으며, 문학적 분위기를 좋아하는 낭만적인 소녀를 일컫는다. 다만 문학청년의 준말인 문청(文靑)이 예비 문학인의 어감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는 데 반해, 문학소녀는 철없던 과거의 순수함이나 이루지 못했던 꿈의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에 가깝다.5) 그녀들은 이유 모를 웃음과 울음이 터져 나오는 불완전한 시절의 표상이자, 감상적 혹은 대중적인 문학을 향유하는 집단의 기호로 간주되었다. 저류에 잠재되어 있던 어린 소녀들이 전면으로 부상한 것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다.

  5) 정미지는 이루지 못한 꿈이나 과거의 기억으로 호출되는 '문학소녀'의 정체성에 의문을 던진다. 논자는 1960년대의 문학소녀가 예비 현모양처를 규범화하는 단어이자 남성 중심의 지배 질서가 만든 미달의 표상이었음을 지적하며, 당시의 문학소녀는 미성숙한 존재가 아닌 남성 체제에 균열을 시도했던 욕망의 주체였음을 주장한다. 보다 자세한 논의는 정미지, 「불온한 '문학소녀'들과 '여학생 문학'의 좌표 – 1960년대 독서의 성별화와 교양의 위계」,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민음사, 2018 참조.

 

    소년이 손을 열어 보여준 건 칼이었다. 분홍색 손바닥 위로 슬몃 피가 비쳤다. "연필이나 깎지 그러니?" 소녀는 분명히
    비웃었다. 소녀는 뚫어지게 소년을 응시했다.

 

    여자애에게 위로를 받아본 일이 있었던가? 생각나지 않는다.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는 여자애가 무서웠다. 소년은 소녀의 집에 놀러 가보지 못했다. 소년도 소녀를 초대한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해수욕장의 모래밭에 누워 있는 소녀와,

 

    볼록한 가슴에 얹어주는 뜨거운 모래에 대해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생일 파티 같은 것은 부유한 초등학생들이나 하는 짓이다. "아무한테나 손을 벌리진 않겠지?" 소녀는 똑똑하다.
    소년은 히, 웃으며 천천히 손을 오무렸다. 손가락과 함께 칼이 사라져갔다.

 

– 김행숙, 「칼―사춘기 3」(『사춘기』, 문학과지성사, 2003) 전문

 

    소년이 소녀에게 "손을 열어 보여준 건" 분명 "칼이었다". 손바닥을 펼치며 소년은 내심 소녀가 놀라길 바랐을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소년은 이런 소녀가 익숙하지 않다. "칼"을 보여주면 응당 두려워하는 반응을 보여야 하는데, 소녀는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그를 "비웃"는다. 이상의 소년에게 치명적인 위해를 가했던 '연필'과 그 기억을 깎아냈던 자기 수세적 공격성의 '칼'은 이 소녀에게 한낱 조롱거리에 불과하다. 그녀는 소년의 손바닥에 놓인 칼을 비웃듯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걸로 "연필이나 깎지 그러니?"
    본디 소녀는 "언제든지 잠잫고 있"어야 하는 "누구의 사진"(이상, 「소녀」)이자, 소년의 시선을 맞이하는 피사체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반대로 "소녀"가 "뚫어지게 소년을 응시"한다. 일방적인 시선의 객체인 줄만 알았던 무언가가 사실은 그 렌즈 너머를 통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자신도 어떤 응시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 소년이 느끼는 감정은 공포일 것이다.6) 소년의 오래된 감각에 동조하는 이들은 이런 소녀에게 "무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소녀와 공포의 결합은 어딘지 익숙한 장르 문법 같기도 하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작품 중 <여고괴담>이라는 영화가 있다. 1998년에 개봉한 이 작품은 일시적으로 맥이 중단되었던 한국 공포영화의 부활을 알린 작품이다. 당시 호러 장르의 영화로서는 드문 흥행 성적을 기록하며 속편이 연달아 제작되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구전되던 소설 장화홍련전은 김행숙의 『사춘기』가 출간되던 해 <장화, 홍련>이라는 이름으로 각색되어 스크린에 걸렸다. 한국 공포영화의 관객 동원 기록을 갈아치운 이 작품 또한 소녀 자매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김행숙 역시 『사춘기』에서 소녀들의 목소리와 귀신들의 발화에 귀를 기울인다. 이 시집 속에는 「사춘기」와 「귀신 이야기」라는 제목의 연작시가 각각 여섯 편과 여덟 편씩 수록되어 있다. 대중문화의 징후성과 시인의 민감한 감각을 신뢰해 볼 수 있다면, 이 시대의 사회적 저변의 곳곳에서는 소녀-귀신들이 출현한 셈이다.7)
    이전과 달리 피가 나는 쪽은 오히려 소년이다. 소년의 "분홍색 손바닥 위로 슬몃 피가 비쳤다". 상처가 난 소년의 손바닥을 바라보며 소녀는 "아무한테나 손을 벌리진 않겠지?"라고 되묻는다. 그러자 소년은 쑥스럽게 웃으며 "손을 오무"린다. '피', '벌리다', '오므리다'라는 어휘들은 어른 흉내를 내던 소년이 소녀에게 발화하던 언어들이다. 손을 다리로 치환하면 의미는 더욱 명확해진다. 하지만 그 단어들은 이제 소년의 몫이 되었고 그는 의기소침해졌다. 삶의 목적을 상실한 막다른 공포 속에서 골목을 내달리기라도 했던 이상의 아해들과 달리, 이 소년들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들은 더 이상 질주하려 하지 않는다. 충격을 받은 소년들은 부푼 어른의 예복을 벗어던지고 아버지의 가장(假裝)을 그만둔다. "난 달리지 않을 거야. 달려가서 누군가를 만나고 덜컥, 아빠가 되고 싶지 않아."(김행숙, 「오늘밤에도」)
    주저앉은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래밭에 누워 있는 소녀"의 "볼록한 가슴"과 그 가슴에 "얹어주는 뜨거운 모래"를 상상하는 따위의 일뿐이다. 왜 하필 '모래'일까? 그것은 모래가 깔린 해변이 소녀의 적나라한 육체를 떠올릴 수 있는 손쉬운 공간이기 때문이지만, 모래와 여성이라는 소재가 어딘지 익숙한 상상적 모티프를 자극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서 낯익은 이야기 한 편을 겹쳐 보자.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라는 작품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곤충 채집을 하러 어느 지방에 갔다가 모래 구덩이에 떨어진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영문도 모른 채 구덩이 속에 갇혀 매일 모래를 퍼 날라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런 상황은 다분히 카프카적이다. 어느 날 문득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불가항력적으로 맞이해야 했던 세계의 폭력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스스로의 죄목을 사후에 구축해야 하는 이유 모를 형벌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같은 모래 구덩이 속의 여인뿐이다. 그가 화를 내고, 애원을 하고, 협박을 해도 그녀는 모든 것을 받아 주며 묵묵히 모래를 퍼 나른다. 그렇기에 소년이 모래의 여인을 "상상하는 일은 즐"거울 수밖에 없다. 정체성을 거세당한 사막의 고목이 다시 그 싹을 틔울 때까지 그녀는 담담하게 곁을 지키고 서 있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모래바람 부는 여자들의 내부"에는 소년들이 "알을 까고 나온 탄생의 껍질과 죽음의 잔해가 탄피처럼 가득 쌓여 있다"8). 그러나 이 작품에서 정말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말없이 모래를 퍼 나르는 그녀의 몸짓이다. 우연한 세계의 모래 구덩이 속에 함께 매몰된 소년은 "이래서야 오로지 모래를 치우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꼴"9)이라고 외치며 소녀를 비난한다. 소년은 자신의 삶에 다른 의미들을 부여하려 애쓴다. 이때 소녀는 그의 논리와 상관없이 덤덤하게 모래를 퍼 나르며 자신의 행위를 되풀이한다. 무의미의 폭력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또 다른 정체성을 환상적으로 구성하려는 소년의 손쉬운 유혹이 곁에 있지만, 소녀는 그것을 거절하고 고집스레 자신의 선택을 반복할 뿐이다.10)

  6)  다리안 리더는 『모나리자 훔치기』에서 재미있는 사례를 들고 있다. 많은 승객들이 출·퇴근길에 다른 승객들을 쳐다보며 시간을 때우는데, 그 시선의 대상이 나와 눈을 마주치거나 나를 응시하고 있다고 자각하는 순간 나는 커다란 불안감을 느낀다고 한다. 어떤 대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특권이고 그 역(逆)은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다리안 리더, 박소현 옮김, 『모나리자 훔치기』, 새물결, 2010, 76-77쪽.
  7)  보이지 않던 소녀들이 사회의 저변 곳곳에서 포착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녀들을 억누르던 소년들의 시각적 억압이 헐거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들을 억누르고 배제했던 폭압적 기제들은 왜 이 시기에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했던 것일까? 손쉬운 답은 소년들의 억압을 지탱해 준 축들이 무너졌다는 답변일 것이다. 근대를 지탱하던 두 축을 크게 국민국가와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면, 그 축들은 정상적으로 어른이 되지 못했던 소년이 의사(擬似)-어른의 흉내를 내기 위해 디디고 서 있던 두 개의 버팀목들이었다. 90년대 말 국가 경제 위기를 기점으로 소년의 축들이 무너져 내렸다. 한편 송아름은 <여고괴담>을 비롯한 이 시기의 공포영화를 1990년대 말의 사회적 불안과 맞물려 해석한다. 송아름, 「1990년대의 불안과 <여고괴담>의 공포」, 『한국극예술연구』 34호, 한국극예술학회, 2011 참조.
  8)  최승자, 「여성에 관하여」, 『즐거운 일기(日記)』, 문학과지성사, 1984, 49쪽.
  9)  아베 코보, 김난주 옮김, 『모래의 여자』, 민음사, 2001, 43쪽.
  10)  이 같은 소녀의 고집스런 제스처에서 안티고네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여기서는 비슷한 사례로 폴 클로델의 작품인 『인질(L'Otage)』을 언급하기로 한다. 『인질』의 주인공은 시뉴라는 여성이다. 어느 날 그녀가 사는 영지(領地)로 교황이 피신해 온다. 그녀는 교황을 보호하려 하지만 튀르뤼르라는 남자가 교황을 체포하려 한다. 튀르뤼르는 시뉴가 경멸하는 자이며 그녀의 부모를 죽인 원수이다. 그는 교황을 체포하지 않는 대가로 시뉴에게 결혼을 제안한다. 시뉴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연인이 있지만, 그녀는 자신을 희생하며 튀르뤼르와 결혼한다. 일 년 뒤, 그녀가 사랑하는 연인이 튀르뤼르를 찾아온다. 사랑하는 연인과 증오하는 남편은 서로 총격전을 벌인다. 이때 의아하게도 시뉴는 튀르뤼르에게 향하는 총탄을 대신 맞아 그를 보호한다. 치명상을 입은 시뉴를 품에 안고 튀르뤼르는 왜 자신을 구했는지 필사적으로 묻는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젓는 것처럼 얼굴을 찡그려 경련을 일으킬 뿐, 결국 대답을 거부하고 죽는다. 역시 주목해야 할 것은 튀르뤼르의 질문을 거부하는 시뉴의 경련적 제스처이다. 미친 듯이 이유를 묻는 그의 요구와 대면하여 그녀는 고개를 젓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을 뿐이다. 시뉴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집스레 대답을 거절하며 튀르뤼르가 원하는 언어적인 해명에 포섭되지 않는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알렌카 주판치치, 이성민 옮김, 『실재의 윤리』, 도서출판 b, 2004, 321-341쪽 참조.

 

 

    4.

 

    아파, 당분간 너 못 만나

 

    그런데도 방으로 들이닥치면 어떻게 해, 쩝쩝거리면서 왜 내가 먹던 어제 식빵을 먹고 있어, 룸메는 집에 올라갔지 방학이니까, 나는 이제부터 스터디에 갈 거야 그러니까

 

    좀 가, 냄새나니까 좀 가

 

    내 침대에 들어가서는 자는 척하고 있구나 그렇게도 입지 말라는 늘어난 면 티를 입고서, 굴욕 플레이가 더는 싫어서 너를 만났지 스쿨버스에 캐리어 올려줄 사람이 없어서 너를 만났어 일주일 전부터 너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기어이 마구 해버렸다 넌 이불 밑에서 번민광처럼 중얼거렸지

 

    내가 시험 떨어졌다고 이러는 거니?

 

    한 번 더 떨어져서 다섯 번 채워, 그다음엔 어디 국토대장정 같은 데라도 갔다 와 거기 가면 울면서 어른이 된대

 

    그러지 말랬지 그런 마이너스 사고방식

 

    갑자기 뛰쳐나와 네가 나를 안아버렸다 내 머리카락에 코를 파묻고 훌쩍였어 나도 몰래 스르르 가랑이가 벌어졌지만 딱 1분간만 키스해주었지 그리고 떨쳐냈다

 

    책상 위의 교정기를 이빨에 끼우고 너를 내려다봤어, 때릴 거야 때려버릴 거야, 고개를 흔들다가 이번 방학이 끝날 때까지만 참기로 했어.

 

– 박상수, 「기숙사 커플」(『숙녀의 기분』, 문학동네, 2013) 전문

 

    소녀라는 명칭이 미성숙한 어린 여성 혹은 어른의 질서 안으로 완전히 편입되지 못한 여자 아이들의 범역적인 지칭인 데 반해, '숙녀'는 정신적·물질적으로 수준 높은 생활을 영위하며 일정한 교양이 몸에 밴 성인 여성을 가리킨다. 위 시편이 실린 시집 『숙녀의 기분』은 소녀와 숙녀 사이 어딘가에 놓인 여성들의 발화로 채워져 있다. 유명 연예인 설리가 해당 시집을 들고 있는 공항 사진이 인터넷상에서 퍼지는 바람에, 이 책은 일명 '설리 시집'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손에 직접 들려 있던 사진으로 미루어보아 그 시집은 이동 중에 끼고 읽었던 것일 수도 있고, 공항 내 조공이 일상화된 아이돌 팬덤 문화를 떠올려 볼 때 팬들로부터 선물 받은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녀의 이미지와 숙녀라는 호칭은 묘하게 서로 조응하는 것이 사실이다.
    아역 배우이자 아이돌 그룹 출신인 설리는 스타의 성장 과정을 대중이 함께 바라본 케이스이다. 그 과정에서 흔히 사용되는 '정변'이라는 단어 속엔 자신들이 상상하는 모습대로, 즉 어린 소녀에서 아름다운 숙녀로 대상 연예인이 성장해 주길 바라는 욕망이 일정 부분 담겨 있다. 하지만 정작 뭇사람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렸던 그녀의 이미지는 래퍼 최자의 여자 친구였다. 최자의 예명이 남성의 커다란 성기를 의미한다는 것은 예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일부 대중들은 14살 연하의 여성과 만나는 힙합 뮤지션에게는 승리자의 호칭을 붙였고, 자신들의 기대대로 성장하지 않은 숙녀에게는 성적 루머와 대상화의 시선을 덧씌웠다. 여러 차례 게시된 그녀의 노브라 사진은 정숙한 숙녀의 상을 원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원성을 사기도 했다. 그렇다면 설리는 예쁜 소녀-숙녀의 틀을 부수길 바라는 이들의 응원을 한 몸에 받았을 것 같은데, 실상은 마냥 그렇지도 않다. 그녀는 로리타 콘셉트가 분명해 보이는 사진들을 수차례 공개하며 오히려 많은 이들의 비난을 받았다. 스스로가 남성적 눈길의 피사체임을 너무나도 잘 인지하고 있는 이 숙녀는 그 시선의 역전에만 힘쓰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모습이 예쁘게 찍힐 카메라의 각도에 골몰하기도 한다. 그녀는 자신을 비난하는 모든 이들에게 SNS 계정을 통해 다음과 같은 식으로 답했다. '적당히 하고 내 예쁜 얼굴이나 보렴.'
    위의 시 「기숙사 커플」에 등장하는 '나' 역시 언뜻 교양 있고 아름다운 숙녀가 되길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숙녀가 지켜야 하는 품격과 교양은 지배적인 남성의 시선으로 재단된 격식이라는 점에서 일방적인 강요일 듯싶지만, 그 틀을 자발적으로 원하는 소녀들도 있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구축해 놓은 커뮤니티와 담론 체계 안에서 숙녀로 편입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숙녀들은 신사들이 만들어 놓은 안온한 틀 속에서 만족감을 느끼며 그 시스템의 바깥으로 튕겨져 나오는 것에 대해 수치심을 느낀다. 그렇기에 비록 "냄새나"는 남자 친구이지만, 숙녀의 경계 밖으로 쫓겨나는 "굴욕 플레이"가 싫어서 인내하며 만난다. 레이디에게 "스쿨버스에 캐리어 올려줄 사람"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숙녀가 아닌 굴욕이 싫어서,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그와 사귀는 굴욕을 감내한다.
    그러나 일단 숙녀가 되고 보니 파트너의 상태가 자못 심각하다. 자신을 레이디로 만들어주는 이 기사는 갑옷 대신 "늘어난 면 티"를 입고 있다. 그는 "내 침대에 들어가서" 잠을 자고 "내가 먹던 어제 식빵"을 먹으며, 심지어 냄새까지 난다. 소녀는 그의 초라한 실태를 목격하고 자신이 몸담으려 하는 숙녀의 형상에 회의를 느낀다. 숙녀와 탈-숙녀라는 이중의 욕망 사이에서 그녀는 흔들리는 듯 보인다. 주목해 봐야 할 지점은 그녀가 선택한 마지막 행위이다. 나는 "이번 방학이 끝날 때까지만" 너의 만행을 "참기로" 결정하며, "책상 위의 교정기를" 다시 "이빨에 끼"운다. 일반적으로 교정기란 아름다움의 미래 가치를 위해 참기 어려운 아픔과 "키스"도 쉽지 않은 불편을 감내하는 기구이다. 그 교정될 미의 기준은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숙녀의 가치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결국 이 소녀는 숙녀로 거듭나기 위해 현재의 굴욕을 인내하기로 결정한 것일까.
    함돈균 평론가는 시집 『숙녀의 기분』에서 소녀의 '교정기'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이 교정기가 일종의 희곡적 '마스크'와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것은 세계를 뒤흔들어 놓는 쾌걸 조로의 마스크와 달리 사회의 시선에 스스로를 교정하는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도구이자, 주체적 자발성과 사회적 강제성의 충돌 가운데서 착종된 모호한 욕망의 사물이라는 것이다. 정확한 그의 분석을 참조하며 논의를 조금 더 진행시켜 보자. 이 소녀를 향한 비판적 논의들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다소 일차원적인데, 요약하자면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는 식의 비난이다. 즉 숙녀의 안온한 울타리 안쪽과 그 바깥을 필요에 따라 넘나드는 이중적 행태에 대한 비판이다. 하지만 사회적 억압과 개인의 의지 사이에서 일생 동안 흔들리는 것이 대부분의 주체의 삶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이러한 비판은 다소 가혹하거나 편집증적인 듯싶다. 일관성을 근거로 소녀의 행동을 무화하려는 다소 저의가 의심스러운 이러한 비난과 진지하게 대결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맞닥뜨려야 할 논의는 반박하기 어려운 두 번째의 비판이다. 사회의 억압을 개인이 이겨내는 일이 쉽진 않을지라도, '숙녀'로 대변되는 젠더적 강압을 돌파하여 진정한 자신의 아름다움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당위적으로 너무나도 올발라 보인다. 하지만 사회라는 대타자의 오염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나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과연 발견 가능한 것일까. 가령 내가 애초부터 핑크색을 좋아했던 것인지 혹은 젠더적인 주입에 의해 좋아하게 된 것인지 과거를 거슬러 진정한 나의 취향을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은 아마도 없을 듯하다. 주체의 자기 인식은 처음부터 사회로의 편입 이후에 탄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억압되고 소외되어 있다는 말보다 정확한 표현은 억압과 소외의 이름이 곧 주체라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전복적인 쪽은 강제된 사회의 요구 바깥에 존재하는 진실한 나를 찾아가자는 주장보다는, 나라는 실체가 실은 타인의 욕망으로 채워진 텅 빈 형식에 불과하다는 자각과 선언이 아닐까? 소녀가 쓴 마스크는 사회적 억압 너머에 있을 나의 이상적인 얼굴이 아니라, 그 가면 아래 자신의 모습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지이자 연극에 불과한 스스로의 삶을 그럼에도 계속해 보겠다는 고집의 표식이다.11) 물론 이러한 삶의 태도를 지닌 채 걸어가는 일은 어딘가에 기대어 나아갈 때보다 훨씬 힘든 여정일 것이다. 자신의 걸음걸이가 옳다고 보증해 줄 어떠한 이념과 실체도 없는 불안과 고독 속에서, 공허한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스스로의 책임으로 채우며 걸어 나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닐 때에야 진실로 소녀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11) 조운 콥젝은 '멜로드라마'를 사례로 이와 비슷한 설명을 한다. 일반적인 관념과 달리 멜로드라마는 현실을 초월하는 이상이나 꿈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와 같은 이상이 세계 속에선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무의미한 세계를 향한 불평의 양상은 남녀가 각기 다른데, 남성들은 척박하고 비속한 형태로 세계를 재현하는 반면 여성들은 '모조적(inauthentic)'이고 가면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재현한다. 멜로드라마는 의미가 결여되어 있고 어떤 지탱물도 지니지 못한 세계에 대응하는 여성의 불평을 상징한다. 조운 콥젝, 김소연 외 옮김, 『여자가 없다고 상상해봐』, 도서출판 b, 2015, 196-197쪽.

 

 

    5.

 

    어렸을 적 빨간 마스크를 낀 여자에 대한 괴담이 돌곤 했다. 그녀의 마스크 안에는 흉측하게 찢어진 입이 있다고 했다. 그 여자와 마주치면 '나 예뻐?'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예쁘다'고 대답하면 똑같이 해준다며 입을 찢고, '못생겼다'고 대답하면 화내면서 입을 찢는다고 했다. 두려웠던 것은 그녀의 마스크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지만, 그보다 더욱 무서웠던 것은 말로는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그녀의 행동이었다. 이 괴담 속엔 오랜 시간 흔들리고 요동쳐 왔음에도 끝끝내 포섭되지 않았던 소녀에 대한 두려움이 일정 부분 녹아 있는 것 같다.
    고집스레 마스크를 선택한 소녀는 소년의 체계 내에서 이해되지 않는 오류이자 공백의 표지이다. 소년이 오염시킨 변덕의 형상이나 무한히 환대받는 타자로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공란의 존재로서 그렇다. 공백이 드러나는 유일한 순간은 펼쳐진 가림막 너머를 상상할 때뿐이지 않을까. 따라서 소녀의 얼굴에 걸쳐진 그 얄팍한 가림막은 유형의 무언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무형의 소녀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념적 포섭과 의미론적 회유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끝내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 소녀의 귀에 걸린 두 줄의 끈은 그녀의 고집을 지탱하는 불안한 고리이자 아무것도 아닌 현재의 자신을 끊임없이 유예하려는 텅 빈 몸짓이다. 왜 그녀들은 마스크를 쓰고 있는가? 소녀들만이 지금 여기에서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소개 / 조대한

2018년 《현대문학》 평론 부문 등단.

 

   《문장웹진 201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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