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모임 – 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10 - 김주선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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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독자모임]

 

 

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10

– 문예지 신인 살펴보기

 

 

참여 : 김주선(사회, 문학평론가), 강소희, 김영삼, 송민우, 차유진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창작과비평》 2018 가을)
김지연, 「작정기」
(《문학동네》 2018 가을)
조시현, 「동양식 정원」
(《실천문학》 2018 가을)

 

 

 

김주선 : 저희가 진행하는 《문장 웹진》 좌담회가 드디어 10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짝짝짝)

 

김주선 : 10회까지 했다니 새삼 신기하고 놀라워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네요. 이번에 다룰 작품은 모두 문예지 신인 당선작입니다. 한동안 신인 작품을 다루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이번 작품들에서 그런 아쉬움을 상쇄했으면 합니다. 저희가 다룰 작품은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창작과비평》 2018 가을》, 김지연의 「작정기」(《문학동네》 2018 가을), 조시현의 「동양식 정원」(《실천문학》 2018 가을)입니다. 먼저 장류진의 소설부터 이야기해 볼까요. 이 소설은 말 그대로 '일'의 기쁨과 슬픔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데 이 소설은 기존에 우리가 익숙하게 봐왔던 서사의 흐름과는 다른 결을 갖고 있습니다. 기존의 수많은 소설들이 익히 그려 온 절망적인 정조나 상황에서 벗어나 있어요. 유머도 있고요. 이전과는 약간 다른 신선한 상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으셨나요.

 

 

강소희 : 저도 이 소설이 어쩌면 비참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을 다루면서도 절망적인 정조로 흐르지 않는다는 점이 무엇보다 좋았어요.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일을 하며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의 자세 같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하고 그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을 흔히 자아실현의 길로 제시하는데, 사실상 지금의 한국 사회는 그 꿈이 깨어진 시대잖아요. 대학을 졸업한 수많은 친구들이 공무원이 되기 위해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니까요. 그렇다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없는 이들이 삶은 비참하고 절망적인가, 라는 물음 앞에서 이 소설은 꼭 그렇지는 않다고, 당연히 슬픔은 있지만 소소한 기쁨도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삶의 행복은 일의 성취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일상의 취미나 타인과의 우연한 만남 혹은 기대하지 않은 작은 선물 같은 것에서 찾아진다는 사실을 소설 속 인물들이 보여주기도 하고요.

 

차유진 : 요즘 덕후들이 참 많죠. 그게 왜 그럴까 하고. 처음에는 워낙 다양하게 아는 것들이 느는 중에도 자기 취향이 분명해지는 거니 좋은 일이다 생각했거든요. 한데 곰곰 생각해 보니 그렇게 무언가를 온몸으로 좋아하지 않으면 견뎌지지 않는 생활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도 싶어서. 그게 좋으면서도 묘하더라고요. 이 소설을 읽으면서도 같은 생각이었어요. 소설 읽는 동안 즐거웠는데, 다 읽고 소설을 복기하는 도중에는 좀 가라앉았어요. 지금 내가 누릴 수 있는 게 소설의 육교처럼 한정된 거라면, 그러니까 새로운 높이에서 바람을 맞고 다시 제자리로 내려와야 하는 육교라면요. 고작 기분전환 아닌가 싶은 거예요. 그건 노동하는 내가 아니라 내 노동을 굴려 가는 자들에게나 좋은 일인 거 같고. 그래서 다시 읽어 보았는데, 그걸 견지해 두고 보더라도 첫 독후 때처럼 기분이 좋았어요. 해서 작가의 의도가 다른 방향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요. 그 의도는 소설의 의도라는 말보다는 작가의 마음에 가까울 거 같아요. '나는 정말 이 길이 좋다고 생각해.' 하는 마음. 그러니 그 마음에 동의하고 싶어졌어요.

 

송민우 : 청년이 주체로 등장하는 소설은 그동안 꽤 많았지만, 장류진의 이 소설은 슬픔이나 좌절에만 그 무게를 두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어요. 문장과 서사 모두 경쾌한 인상을 주고요. 한 개인이 세상과 어떻게 공존하는지 그 방법을 보여주는 것에 초점을 둔 것처럼 보였어요.

 

김주선 : 공존이요?

 

송민우 : 네. 소설 속 화자인 '나'의 입장에서 보면, 케빈과 데이빗은 좋건 싫건 계속 마주해야 되는 이들이잖아요. 그들과의 갈등은 분명 있지만, '나'는 아직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구성원이니까, 그래서 그들과 끝까지 불화하는 편을 선택하지 않고 일시적으로나마 공존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 같더라고요. 이와 관련해 등장한 중요한 장치가 캡슐커피머신과 레고 세트이겠고요. 그리고 이 소설은 취미의 가치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회사에서의 일, 회사 밖에서의 취미, 이렇게 두 영역을 엄격히 분리하려는 태도는 오늘날 물론 그리 낯선 태도는 아닐 거예요. 어쨌건, 일에서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니라 취미로부터 삶의 기쁨을 느끼는 한 개인의 모습을 잘 포착한 것 같아요.

 

김영삼 : 현대의 일상을 적절히 스케치했다는 인상은 다들 비슷한 것 같아요. 개인들이 겪는 어려움이나 사회적 문제가 잘 들어가 있다는 점도 그렇고요. 한데 아까 차유진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한편으로 이 소설은 현실 추수적이지 않은가 하는 비판이 가능할 것 같아요. 저는 이런 생각에 두 가지 점에서 변호를 하고 싶어요. 첫째, 이 소설은 글쓰기를 학문의 과정으로 배워서 쓴 소설들과는 다른 생동감과 다듬어지지 않은 풋풋함이 느껴집니다. 즉 모양새가 그럴듯한 작품들 또는 '문학적이다'고 느껴질 만한 주제를 다루는 작품들 때문에 새로운 사람이라는 의미의 '신인'을 보는 눈이 멀었는지도 몰라요. 두 번째로, 저는 이 소설이 훨씬 더 삶에 밀착한 채 쓰여 있다는 생각이에요. 2, 30대 여성이 겪는 사회적 일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다 보니 조금 가볍다는 우려가 있어 보이지만, 그런 우려 섞인 시선을 보기 좋게 넘어선 작가들의 전력이 있잖아요. 은희경 작가의 등장이 이와 유사해 보이고 정이현 작가에 대한 초기의 평가 또한 다르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더 좋은 작품을 써냈어요. 그러니 작가의 미래를 속단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강소희 : 심사평을 보니, "짧고 기민하게 잽을 날리는 가벼운 스텝의 복서" 같다고 평을 했더라고요. 확실히 가볍지만 청량하다는 것이 이 소설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이에요. 하지만 다루는 주제가 가볍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일과 삶을 분리시킬 수밖에 없는 현실, 그래서 워라벨을 삶의 모토로 삼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담아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부정적 현실을 담아내는 소설이 꼭 그 현실과 대결하는 방식일 필요는 없잖아요.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따뜻한 모습이나 빛나는 순간을 발견해 내는 소설도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주인공 안나가 평소 자신을 불편하게 하던 케빈에게 레고를 선물하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참 따뜻하고 좋았어요. 회사 동료인 케빈에게 삶의 즐거움인 레고를 선물함으로써 일과 삶의 분리를 흐트러뜨리기도 하고, 또 안나가 그의 일상 속으로 한 발짝 들어간 것 같은 느낌도 주고요.

 

차유진 : 일과 생활이 완전히 분리되는 건 또 아닌 거 같아요. 잘 보면 타인의 일과 속에서 그의 기쁨이 조금씩 드러나요. 또 작가 인터뷰에서 읽었는데요. 실제로 본인 지인이 아는 사람 중에 포인트로 월급을 받은 자가 있었다 하더라고요.

 

강소희 : 놀랐던 장면 중의 하나예요. 월급을 포인트로 받았다는 것도 그렇지만, 결국 돈으로 월급을 받던 때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서술하는 장면에서 참 놀랐어요.

 

김영삼 : 우리의 삶이 상당히 기호화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생각해요. 이번에는 소설에 의문을 표해 보고 싶어요. 문학이 우리의 삶을 보며 평가하거나 지도하는 시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작가가 우리의 삶에 내재된 진실을 찾는 게 작가의 윤리라면 윤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작품에 나타난 모습은 스케치의 차원에 머물렀고 더 깊은 차원은 못 보여준 게 아닌가 싶은 의문이 생겨요. 엔씨 건물을 보고 느끼는 감정이나 케빈과의 화해, 마지막에 나오는 회사 대표의 일관되지 못한 태도를 통한 화해를 보면, 이것이 작가의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인지 현상적 차원에서 써낸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이후의 작품 속에서 작가가 깊이를 획득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요.

 

차유진 : 이 정도 화해도 좋다는 느낌이에요. 소설에서의 온기가 정확하고 분명한 대안을 알려주지는 않아도요, 지금은 그러한 대안보다도 이 소설이 가진 온기를 더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강소희 : 저도 그 말에 동의해요. 앞에서 얘기했지만, 모든 소설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깊이 사유하고 그와 대결하는 방식이어야 하는 것은 아닐 거예요. 그 모순적인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차유진 선생님 표현을 빌리자면 온기를 발견하는 것이 아마도 처음부터 기획된 이 소설의 의도가 아닐까 생각해요.

 

송민우 : 덧붙이자면, 독자들이 최근 한국 문학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고 이야기하곤 하잖아요. 소설 속 인물의 내면, 특히 묘사된 감정에 대해서 어떤 독자들은 불쾌감을 느끼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인 분석 중 하나일 듯합니다. 정세랑 소설가에 대한 인기 역시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이야기해 볼 수 있을 테고요. 소설의 소재로서 선택된 사건이 심각성을 띠는 경우, 그리고 그 사건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까지 따라 심각해지는 경우, 소설은 지나치게 무거워지는 것 같아요. 무거운 소설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고요. 오래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놀러 가서 읽는 가벼운 읽을거리로 치부하던 그런 사람들이 있긴 했는데, 양보하고 양보해서 그 말을 수긍한다 하더라도, 소설이 그런 역할을 맡지 않으면 안 될 이유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쨌건 장류진 소설가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 역시 한국 문학을 수용하는 독자들의 방식이 변화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김주선 : 네. 이제 김지연의 「작정기」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요? 기본적으로는 애도에 관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 외에도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령 예전에는 어떤 불가능성에 대한 절망적인 모습이 주류를 이뤘는데 여기서는 불가능한 소망을 품을 때 그 불가능성을 앎에도 밀고 나가는 모습이 나타나 있잖아요. 다른 분들은 어떠셨어요?

 

차유진 : 저는 제목이 '작정기'니까, 뭔가 결심하겠다는 이야기인가? 싶어서. 뭐야, 좀 별론데? 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거든요. 아무래도 좀 삐딱해져서 기대가 없었는데 막상 소설을 읽으니 너무 즐거운 거예요. 혹 내가 처음 소설 집어 든 마음이 글러먹어 그런가 싶어 재차 읽어 보았는데도, 계속해 좋았어요. 소설에서 과거와 미래를 옮겨 다니는 문장, 상황, 이런 게 자연스러우니까 정말로 듣는 느낌이에요. 한 사람이 내 곁에서 실로 말하고 있다는 느낌. 힘을 주고 쓴 글이 아니라 배를 슥 밀듯이 물 위로 보낸 소설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 소설이 왜 이렇게나 좋나 생각을 해보고 제 나름의 답을 가져 보기도 했는데요. 원진에게 마음을 보답 받지 못한 내가 그의 죽음을 바랐던 순간이 원진의 죽음에 관여했으리라는 죄책감과, 동시에 원진이 그러한 나를 축원해 주었으면 바란다는 문장이 이 화자에게 분리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었어요.

 

강소희 :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구성이 굉장히 좋았어요. 대부분 죽음과 여행을 함께 그리는 소설들에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겪고 난 후 주인공이 여행을 떠나잖아요. 그리고 그 여행은 죽은 이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길이 되고요. 그런데 「작정기」에서는 그 구성을 깨뜨리면서 새로운 말하기 방식을 만들어내요. 원진이 계획한 여행을 혼자 떠나는 나의 여정에 이미 원진의 빈자리가 새겨져 있고, 여행에서 돌아온 후 원진의 죽음으로 비로소 상실을 확인하게 되죠. 일본에서 우연히 만난 유코와의 에피소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서툰 일본어 때문에 유코는 그녀가 죽은 친구를 대신해 일본 여행을 온 것이라 오인하게 되는데, 그 자리에서는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지지 않아요. 유코의 위로는 한국에서 실제로 원진의 죽음을 겪은 나에게 전해집니다. 이미 혹은 늦게, 인물과 사건들이 배치되어 있고 그 사이에서 죄책감과 상실감, 위안과 희망 등을 전달하는 방식이 참 좋았어요.

 

차유진 : 말씀대로 시차를 가지고 뒤늦게 도착한 것들이 적확해지는 차원이 너무 좋아요. 소설 속에 어떻게 보면 황당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지만 의아하지 않아요. 의문을 가질 법한 일들에 화자의 마음이 이미 견고해서, 읽는 나는 그런 거 겨를도 주지 않게 되는 거예요. 또 한편으로는 화자가 한 번 울고 난 다음 이러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때문에 모든 일들이 분명하게 이야기되지 않음이 동의되어요. 한데 신기한 게, 그러면 감정적으로 흐를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화자는 그러지 않아요. 상당히 절제해요. 자기비하나 자기변명을 하지도 않고요.

 

김영삼 : 지금 차유진 선생님의 말에 덧붙이고 싶어요. 소설의 문장이 사건과 정서에 휘둘리지 않고 담담하고 절제되어 있어요. 심지어 원진의 사고와 죽음을 전할 때조차 "시기가 좋지 않았다. 원진이 사고를 당해 병원에 누워 있었다.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거나 "그때는 이미 원진이 죽은 다음이었다." 정도로만 전달돼요. 멀찍이 거리를 두고 있으나 결코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의 아픔이 문장의 머뭇거림에서 느껴져요. 그렇다면 소설의 이런 문체는 작가의 스타일로 해석될 일이 아니라, '나'의 상실의 정서가 겨우겨우 언어로 만들어질 때의 색채로 읽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왜냐하면 '나'는 사랑을 표현할 수 없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잖아요. 마치 지도를 벗어난 길 위에 있는 것처럼, 'The northwest end'라는 이름의 어느 가장자리에서나 겨우 속삭여지는 위치에 있어요. 그래서 장례식장에서도 '나'는 전남편이나 전 애인과 달리 자신의 상실감을 무기 삼아 화를 낼 수도 없고, 술에 기대 슬픔을 과장할 수도 없어요. 언제나 '나'의 사랑은 음주 후의 술주정 같은 형식으로만 표현됐으니까요.
    그러니 돌아와 이 소설의 문장들은 '나'의 마음이 처음으로, 맨정신으로, 언어의 힘을 빌려 표현된 상실의 결과물들로 보이는 거죠. 문장의 감정 절제는 어느 수줍은 자의 낯섦과 자기검열의 결과이기 때문에 아프게 읽혀지고, 가끔씩 혼자서 떠나는 낯선 일본의 거리에서 원진의 보호를 느끼면서 걷고 있을 '나'의 걸음의 속도나 그 보폭처럼 이 소설의 문장도 천천히 걷고 있는 중이라고 느꼈어요. 그리고 그게 슬펐습니다.

 

송민우 : 저도 다른 분들 말씀과 비슷할 것 같은데요. 저는 이 소설의 플롯이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언제 어떤 장면을 어떻게 보여줄지 혹은 보여주지 않을지를 아는 그런 역량을 지닌 소설가라고 생각했어요. 폴 오스터나 코맥 매카시처럼 단락(paragraph)의 길이를 통제하고, 그 단락들의 실용적인 배치를 통해 소설의 구조에 대해, 정확히 말하면 소설의 구조적 균형에 대해서 세심하게 고려하는 작가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한편, 이 소설은 아이러니한 상황이 많이 포착돼요. 소설의 초반부에 '나'와 원진은 원진의 할아버지의 죽음을 호상으로 여겨요. 그런데 그 죽음이 마침 그 둘의 일본 여행을 앞둔 시점에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기도 했죠. "어른들이 호상이래. 그래도 하필 이럴 때 죽다니."(341쪽) '나'는 그 죽음이 자신과 무관한 죽음이라 생각합니다. 몇 페이지를 넘기면 독자들은 이제 원진의 죽음과 마주하게 되죠. 그리고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알게 되는 사실 중 하나는 원진의 이혼입니다. 이땐 원진의 이혼 사유를 드러내지 않죠. 후반부에 이르게 되면 소설은 원진의 장례식장을 찾은 두 남자에 대해 서술해요. 한 사람은 원진의 전남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원진의 전 남자 친구죠. '나'는 원진의 불륜 사실을 이제 감추지 않아요. 이 소설의 특징 중 하나가 생략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거꾸로 말해 이것은 특정 장면을 드러내길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한 인물에 대한 독자들의 판단이 편향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고요, '나'의 심리가 반영된 선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차유진 : 화자가 자신을 위로하는 마지막도 좋았어요. 유코가 모형을 가져왔을 때 울음이 났고 위로도 받았지만, 그건 제 느낌에 일종의 스위치 같았어요. 유코의 모형 때문에 마음이 허물어진 건 맞지만요, 또 모형이 모든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면 소설이 이만큼 좋지는 못했을 거 같아요. 모형을 보고 터트린 울음은, 물론 원진의 죽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나의 응답받지 못했던 사랑. 다신 그럴 수 없을 그 마음 때문도 아닐까. 원진의 외도를 말한 부분도 자신이 그 일들로 아팠음에, 조금은 책하듯 써낸 문장이란 생각도 들어요.

 

김영삼 : 한 번도 자신의 사랑을 밖으로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우연히 누군가에게 의도적이지 않게 들킨 거예요. 그 누군가가 유코고요. 유코가 만들어 온 미니어처는요, 녹나무예요. 녹나무는 3000년의 시간을 살았어요. 말을 달리하면 녹나무는 3000년의 상실의 시간을 견뎌 온 존재이기도 해요. 자신이 3000년 동안 살면서 상실한 것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 나무의 물리적 시간의 흔적에 새겨져 있을 그 수많은 상실의 감정들이 이끼처럼 낮고 습하게 깔려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 이 녹나무는 남겨진 자가 감당해야 할 상실의 무게가 이 세계에 서술한 물리적 표현이라고 느껴져요. 사랑을 상실한 자가 살아남아서 그 부재를 꾹꾹 견디는 모습이 보여요.

 

강소희 : 이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물리'예요. 원진의 죽음처럼 물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은 믿고 싶지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죠. 반면 일본에서 렌트한 차를 원진이 타고 잠시 사라졌다는 주인공의 상상은 물리적으로 설명 불가능하고 따라서 믿고 싶지만, 믿을 수가 없는 것으로 제시돼요. 그런 점에서 유코의 선물이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이 아닐까요. 먼저 그 미니어처에는 3000년 된 녹나무가 있잖아요. 그 나무는 긴 세월 동안 무수한 비바람을 이겨낸, 즉 물리적 힘을 이기고 살아낸 존재예요. 그리고 그 나무 옆에는 함께 있는 것이 불가능한 원진과 내가 나란히 서 있어요. 따라서 유코의 미니어처는 물리적 힘을 이겨낸 존재와 물리적 법칙으로 설명 불가능한 믿음을 주인공의 눈앞에 현시한 선물이었다는 점에서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읽었어요. 그리고 그 위로가 소설의 마지막에 원진이 나의 미래를 축원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고요.

 

 

김주선 : 이 소설은 호평 일색이네요. 다음 소설로 넘어갈게요. 이번에는 조시현의 「동양식 정원」입니다. 독특한 형식의 기묘한 소설이죠. 엇비슷한 두 개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여행을 떠났는데 길을 잃고 헤매다가 동양식 정원에 도착해서 기묘한 경험을 한다는 건 공통적인데, 처음에는 무니라는 사람과 여행을, 두 번째는 아주라는 사람과 여행을 가죠. 그때마다 둘 중 한 사람은 죽어 있는 상태고요. 와중 정체를 알 수 없는 남녀가 나오는데 무니, 아주와 아무런 관계가 드러나 있지는 않습니다. 또 나, 무니, 아주 셋 사이에 뭔가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처럼 암시되어 있죠. 하여튼 묘합니다. 생략이 정말 많고요. 다들 어떻게 읽으셨나요. 먼저 간단히 인상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송민우 : 저는 일본적인 기담(奇譚)으로 읽혔어요. 상황과 공간 묘사는 20세기의 일본 소설을 생각하게 만들었고요.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들요. 사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일본 영화나 만화에서도 자주 포착되는 요소겠죠. 이 소설은 그러한 특정 이미지가 변주되는 듯합니다. 인물들의 특정 행위로 인해 특정 상황이 발생하는데, 그러한 상황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제시되고 있진 않은 듯해요. 한 명의 독자로선 그저 현상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소설의 의미론적 차원에 대해 이야기하기가 다소 난감했어요. 그렇지만 확실히 서사적 긴장과 분위기를 갖춘 소설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어서, 독해할 때 의미론적 차원에 초점을 둘 게 아니라 이미지가 주는 흥미에 초점을 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영삼 : 확실히 서사에 매력적인 부분이 많아요. 정원의 주인이 꺼내는 말들이 묘하잖아요. "왜 목적지도 아닌 곳에서 함부로 내리고 그러세요?"와 같은 식의 말들이요. 한데 저는 이 소설의 형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어요. 현실과 비현실적 공간을 교차하고, 연결되는 매개들을 적절하게 배치하면서 엮어 가는 서사 방식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어려운 일을 해냈다 싶기도 하지만 저는 상당히 관습적인 서사 방식으로 보여요. 예컨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의 두 개의 달이 뜨는 비현실적 공간과 한 개의 달이 뜨는 현실 공간의 교차와 변주가 이와 아주 유사합니다. 그래서 딱히 놀랍다거나 하진 않았어요.

 

강소희 : 동양식 정원과 그 안의 수족관이라는 공간은 아마도 죽음으로 인한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가게 되는 곳이겠죠.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은 소설인데, 저는 그 공간의 시작에 죽어버린 여자애가 있다고 읽었어요.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는 동양식 정원과 인간의 형상을 한 물고기의 연원인 동시에 또한 초현실적으로 현재와 만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고요. 그리고 처음에는 나와 무니, 다음에는 나와 아주가 각각 아주와 무니를 죽음으로 잃고 그 상실감에 동양식 정원을 찾아오는 이야기가 변주돼요. 그런데 의문인 것은 왜 두 이야기의 변주가 필요했을까 하는 점이에요. 작은 차이로 반복되는 두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에 대한 답을 저는 찾지 못했어요.

 

차유진 : 저는 소설을 선명하게 읽었어요. 정원에 있는 인어들은 사람이라면 마음에 남길 수밖에 없는 정념이라 생각하는데요. 사람이 어떤 사건을 겪으면 빨리 내려놓고 그냥 앞으로 가야 할 때가 있는데, 그게 바람처럼 쉬이 되지 않죠. 비우려고 해도 다시 채워지고 정화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그런 상태요. 그래서 저는 이 소설이 굉장히 현실적이라고 생각했고, 정념이라 명명되기 이전, 검은 비늘을 입기 전의 모습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던 거 같아요. 하지만 꼭 이러한 모양의 이야기일 필요가 있었나 하는 의문은 들었습니다.

 

김영삼 : 저는 연못에 사는 사카나히토(물고기 인간)가 제일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정념 덩어리'라고 나오는데, 다른 설명들을 보면 인간이 한 번씩은 빠지게 되는 어떤 욕망의 대상이면서, 이루지 못해 못내 아쉬운 과거의 시간들이 사카나히토로 형상화되어 있어요. 소설의 인물들이 여기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는데, 사실 누구나 그런 면이 있죠. 저에게도 그렇게 빠져나오지 못했던 연못이 있었어요. 그래서 소설의 의도는 명확하다고 생각해요. 제 의문은 그런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 이런 중첩된 구조와 형식이 반드시 요구되느냐 하는 점이에요. 언젠가 배운 매력적인 플랫폼에 자신의 서사를 얹어낸 느낌이라서 소설 곳곳에서 아귀가 맞지 않아 삐걱대는 소리가 느껴져요.

 

강소희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동양식 정원과 수족관에 사는 물고기가 상징하는 건 분명해요. 하지만 두 이야기의 변주가 소설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그 변주의 의미를 잘 모르겠어요. 설명되지 않은 채 남겨 두어야 할 것과 결국에는 해명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이 소설은 마지막까지도 소설의 기묘한 분위기를 몇 개의 이미지만으로 덧붙인 채 끝나버린 것 같아서 아쉬웠어요. 솔직한 느낌을 말하자면, 설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설명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김영삼 : 차라리 장편이었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마음을 아련하게 만드는 지점이 더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아요.

 

강소희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야기가 더 풀려 있으면 좋겠어요. 더 재밌어질 것 같아요.

 

김주선 : 논의가 상당히 공통되는 것 같네요. 이야기가 재밌고 전하려는 바는 명확하나 왜 이런 형식을 취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렇게요. 이번 좌담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일동 : 수고하셨습니다.

 

 

 

 

 

 

 

 

참여자 소개 / 김주선

전남 화순 출생. 2015년 문학과사회 평론부문 등단. 조선대학교 강사

 

참여자 소개 / 김영삼

전남대학교 국문과 강사

 

참여자 소개 / 송민우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등단. 조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재학

 

참여자 소개 / 강소희

대학원을 졸업하고 전대와 동신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참여자 소개 / 차유진

광주대 문창과 졸업

 

 

   《문장웹진 201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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