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회색지대에서 벌어지는 인간적인 분투 - 정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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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비평가 특집]

 

최근 몇 년 간 한국문학의 흐름은 그야말로 숨이 가쁠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한국문학은 달라져야 했고, 달라지고 있으며, 또 계속해서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도 더 많은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수많은 변화의 외침은 지금도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제 막 자리매김한 '젊은'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부탁했다. 이들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습을 비트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어갈 한국문학의 풍경을 기대하며 '기획'의 지면을 연다.

 

 

 

윤리적 회색지대에서 벌어지는 인간적인 분투

― 공지영의 『해리』, 편혜영의 『죽은 자로 하여금』, 박민정의 『미스 플라이트』

 

 

 

정재훈

 

 

 

 

    1. 훼손된 시신을 건지기 위한 서사의 호흡

 

    ‘세월호’ 이후부터 추동된 ‘죽음’에 관한 작가들의 문제의식은 다양한 문학적 상상력의 변이를 불러왔다. ‘죽음답지 못한 죽음’이 밝혀지지 않은 채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이를 소재로 한 ‘세월호’ 이후의 서사들은 보다 공공의 의미를 함축할 수밖에 없어졌다. 지금의 소설에서도 ‘추리서사’나 ‘미스터리’, 또는 그 외의 장르 기법을 통해 ‘파국’과 ‘죽음’을 그리고 있으며, 이는 작가들의 문제의식과 맞물려 다층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양상이다.1) 이러한 서사가 나오게 된 것은 ‘죽음’이라는 존재적 사건을 감싸고 있는 사회적, 윤리적 의미망의 급격한 훼손(죽음에 대한 조롱과 인신공격이 자행됨으로써 발생하는 사태)과 더불어서, 이를 바탕으로 보다 견고하게 조장된 저속하면서도 비윤리적인 풍토가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여기에 맞대응하는 차원에서 작가들의 문제의식으로부터 비롯된 문학적 상상력을 통한 ‘파국의 서사’는 ‘죽음’을 필두로 한 인간성의 총체적인 붕괴라는 급박한 시대적 위기를 ‘고발’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공지영과 편혜영, 그리고 박민정은 등단 시기도 다르고, 작품 세계가 지닌 스펙트럼도 제각각이지만, 최근에 들어서서 뚜렷한 공통점을 하나 엿볼 수 있다. 여기서 다룰 공지영의 『해리』(해냄, 2018), 편혜영의 『죽은 자로 하여금』(현대문학, 2018), 그리고 박민정의 『미스 플라이트』(민음사, 2018)는 문예 관련 기사나, 작가들의 인터뷰를 통해 언설되었던 ‘고발’, 또는 ‘내부고발’이라는 공통된 키워드로 한데 묶어 볼 수 있는 장편소설들이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부터 추적됨으로써 밝혀지는 “무진시(市)”의 총체적인 비리와 부패의 작태(『해리』), 사랑하는 이의 죽음 이후에 남겨진 자들에게 부여된 윤리적 행위에 관한 일련의 과정(『미스 플라이트』), 그리고 경기 불황으로 점차 황폐해지는 “이인시”의 풍경들(『죽은 자로 하여금』)은 이른바 윤리적 회색지대 속에서 파괴되어 가는 인간성을 ‘고발하려는 자’의 의지(작중 인물이든, 아니면 작가든 간에)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결코 드러나지 않았을 서사적 무게를 동등하게 내포하고 있다.
    본래 ‘고발’은 비인간적인 일련의 작태와 그로부터 축적된 부도덕한 관습들에 대한 과감한 윤리적 결단이다. 인간성이 처한 총체적인 위기와 더불어서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누군가의 ‘죽음답지 못한 죽음’에 의문을 던지려는 작가의 문제의식은 ‘고발’이라는 키워드와 쉽게 흡착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이 된다. 실제로 벌어진 것과는 별개로 작품의 소재로서 ‘고발’은 그에 따른 결과보다 ‘과정’ 자체에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을 통해 ‘고발’은 독자들로 하여금 보다 강력한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며, 고발하는 자뿐만 아니라 그것을 듣고, 보는 자들도 윤리적 시험대로 이끈다. 독자들이 『죽은 자로 하여금』의 “무주”처럼 윤리적 딜레마에 빠지기도 하고, 『미스 플라이트』의 “유나”가 남긴 “일기”를 읽으며 우리 사회의 감춰진 저속함에 분노하게 될 것처럼 말이다.
    ‘고발의 서사’는 그것이 다루는 사건 자체가 일시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실제로도 그렇지 않은가?) 장시간의 서사적 호흡(과정)이 필요하다.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고 그것이 적나라하게 폭로되는 과정을 구축하기 위해 요구되는 서사적 호흡은 사실상 ‘장편’이라는 형식에 기댈 수밖에 없다. 본래 장편소설이 지닌 “장르적 분투”(백지연)가 시장에 포섭되지 않으려는 문학 고유의 개별성과 자율성에서 비롯된 것이겠으나, 또 한편으로 본다면 ‘분투’는 문제(위급함)에 다가가려는 작가의 자의식이 시대와 맞닥뜨린 ‘난점’이기도 하다. 이것은 어떠한 해결점에 도달함으로써 완전히 해소되기보다는 그것의 전반적인 ‘과정’ 자체에서 오히려 그 문제의 심각성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고발의 서사’는 문학적 ‘분투’라는 그 과정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고고하고 엄숙한 ‘비판’이 아니라, 벌거벗은 죽음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끔찍한 ‘고백’에 더 가까울 수밖에 없다.
    작중 인물들의 행위에서나, 작가의 시선으로부터 예리하게 집중되는 ‘사건’의 (불)연속성으로서 ‘분투’는 비인간적인 작태와 더불어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에 놓인 파국의 한복판을 윤리적인 무대이자, 시험대로 삼는다. 인물들이 그곳을 쉼 없이 오가며 서사가 전개되기에 긴 호흡으로서 벌어지는 ‘분투’는 ‘죽음답지 못한 죽음’을 직감한 남겨진 자들 모두에게 숙명처럼 요구되며, 추동되는 행위 전반을 가리킨다. 죽음 이후 남겨진 자들은 그 ‘죽음’에 대해 경악하며, 훼손된 사회적, 윤리적 의미망으로부터 시신(‘죽음답지 못한 죽음’의 결과물이자, 하나의 은유로서)을 먼저 건져내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애도와 추도 이전에 그들은 제일 먼저 이 죽음이 ‘왜 일어났는가?’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이로써 ‘인간다운’ 의심과 함께 그들이 짊어지는 ‘죽은 자에 관한 존재론적 무게’는 서사가 전개됨에 따라 점차 가중된다. 이렇듯 남겨진 자들에게 추동된 윤리적 행위는 ‘죽음답지 못한 죽음’이 난무한 이곳 세계 내에서 이질화된 채로 서서히 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1) 이에 관한 내용은 졸고 「백골과 시취로 가득한 파국의 풍요」(『문학선』, 2018년 가을호)를 통해 다루었음을 밝힌다.

 

    2. 차가운 질서가 자리 잡은 공동의 도시

 

    ‘장소’는 작중 인물들의 ‘분투’가 발생하는 윤리적 회색지대이다. 폴 리쾨르에 따르면, 서사는 약속하기, 배반하기, 방해하기, 도와주기 등과 같은 몇몇 극적 단위들의 조합으로 환원된다.2) 이러한 인물들의 행위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기 위해서는 ‘죽음답지 못한 죽음’과도 같은 지극히 문제적 상황이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중 인물들에게 추동된 인간다운 의심과 윤리적 행위가 ‘고발’에 가깝도록 작동하기 위해서는 문제적인 장소가 필요한 것이다. 한 치 앞의 희망조차 엿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컴컴한 ‘공동(空洞)’처럼 지극히 극단적인 상황과 그에 따른 제한된 행동반경만이 작중 인물들에게 주어졌을 때, 그들의 행위는 종속이냐, 저항이냐를 두고 분화하게 된다. 그것은 또다시 서사 내 갈등을 증폭시키면서 작중 인물에게 또 다른 선택지를 제시한다. 이런 연속적인 행위가 조합되는 과정이야말로 비로소 문학적 상상력을 통한 윤리적 시험대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먼저, 편혜영의 『죽은 자로 하여금』의 주요 무대인 “이인시(市)”를 살펴보자. 조선업의 불황으로 급격하게 황폐해진 실제 도시를 모티프로 했을 것이 분명한 이인시는 마치 경제적 ‘공동’과도 같다. “호황이던 조선 사업의 위기”(20쪽)와 “초고령 사회”(143쪽)는 이인시를 그야말로 “빈사 상태”(21쪽)로 몰고 간다. 혹독한 불황을 맞이한 도시는 현재진행형에 놓인 총체적 재난이자, 파국이 벌어지고 있는 문제적 장소가 된다. 이전부터 ‘재난의 서사’로 대표되던 작가이기에, 도시의 불황은 ‘지속성’과 ‘대안 없음’이라는 측면에서 이전 작품들의 재난과 상당히 유사하다. 성장의 동력이 완전히 멈춰버린 이인시의 황량한 풍경이 자아낸 불황의 ‘공동’에는 오로지 ‘생존’과 ‘회생’만이 유일한 질서로 자리 잡는다. 이것은 끊임없이 시민들의 심리를 옥죄며 점차 강력한 권한을 행사한다.
    이인시의 축소판인 “선도병원”(10쪽)은 총체적인 불황 속에서 생존만을 몰두하는 기업에 더 가깝다. 도시의 발전에 발맞춰 확장도 했었지만, 불황과 동시에 이제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상황 속에서 선도병원의 “사무장”은 구성원들을 향해 일갈한다. “다 망하자는 겁니까?”(64쪽)라는 그의 외침에 모두가 침묵하는 이유는 현재의 시련(불황)이 확실한 “실패”라기보다는, 아직까지도 여전히 ‘회생’의 가능성이 남아 있는 일종의 “시행착오”(68쪽)의 과정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암묵적 동의에 따른, 하지만 성공 여부를 도저히 예측조차 할 수 없는 ‘회생’이라는 생존의 과제는 아이러니하게도 병원 내 구성원들을 더욱더 치열한 경쟁 논리로 끌어들인다. 따라서 “이인시는 더 이상 희망이 없어요.”(36쪽)라는 말은 곧이어 “그래서 말인데 돈 되는 일 좀 해봅시다.”(37쪽)로 매끄럽게 연결된다. 비리에 연루되어 서울을 떠나, 이인시로 온 주인공인 “무주”의 심리 또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비록 불명예스럽게 좌천되었을지언정, “아내”가 임신한 “아이”(“갱생의 희망을 선사하는 아이”, 56쪽)를 통해 그가 느낀 “다시 인생이 주어진 기분”(53쪽)이라는 것도 말 그대로 ‘회생’에 가깝다.
    사활이 걸린 위기 속에서 생존과 회생의 기회만을 잔뜩 몰두하게 만드는 이인시의 불황이 있다면, 공지영의 『해리』에서 “무진시(市)”를 대표하는 것은 마치 “상륙하는 점령군처럼 산만하고 무례하게 밀려”(1권, 14쪽)드는 희뿌연 “안개”이다. 이전에 발표되었던 작품인 『도가니』(창비, 2009)에서 반인륜적인 범죄가 자행되었던 장소(무진시)가 다시 소설의 무대가 된 것은, 마치 “모든 새벽마다” 나타나서 “모든 아침들”을 은폐함으로써 여전히 도시를 지배하는 안개의 집요한 주기(週期)처럼 무엇으로도 일소할 수 없는 파국의 징조를 기묘하게 재연하기 위함이다. 뚜렷하게 눈에 보이지만, 정작 그 안을 가늠하기 어려운 안개 속 무진은 추악한 사건들을 또다시 고스란히 감추고 있는 문제적 장소이다. 주인공인 “이나”가 “해리 주변에서는 모든 상식이 힘을 잃었다”(1권, 36쪽)고 한 대목처럼 “날 것”과 “정글”이라는 이미지는 이성(상식)으로는 도무지 그 안을 가늠할 수 없는 ‘공동’이자, 반인륜적인 야만의 장소를 떠올리게 한다.
    불황과 안개가 지배하는 도시는 각각 인간성의 ‘훼손’과 야만의 ‘은폐’가 작동한다. 문제적 장소로서 드러나는 도시들의 차가운 ‘질서’는 작중 인물들의 행위와 행위의 의미적 간극을 점차 벌린다(종속과 저항). 존재적 사건으로서 ‘죽음’의 본래 의미를 훼손하고 은폐하려는 반대 측의 인물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고발의 서사’의 목적이 모든 인물들의 행위를 ‘선’과 ‘악’이라는 식으로 극단적인 분류를 하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분투’하려는 행위의 연속과 점진적인 갈등을 지속적으로 거치면서 다시 ‘인간다운 가치’에 관한 진지한 사유와 냉철한 고민으로써 전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고발의 서사’는 ‘과정’ 자체에 시선을 집중함으로써 인간성의 복원이라는 과제가 제기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고고하고 엄숙한 비판이 아닌, 반성과 고백으로서 ‘분투’의 과정을 세밀하게 묘파해 나갈 수 있다.

  2) 폴 리쾨르 저, 김윤성 외 역, 『해석 이론』, 서광사, 2006, 144쪽.

 

    3. 죽음의 불투명성을 목도한 남겨진 자들

 

    문제적 장소 안에서 벌어지는 ‘죽음답지 못한 죽음’이라는 것은 지금의 소설이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진정한 인간다움을 사유함과 동시에, ‘고발의 서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서 드러난다. 박민정의 『미스 플라이트』는 “유나”의 억울한 ‘죽음’(자살)이 서사의 전면으로 대두된다. 이 작품은 주로 작중 인물들의 기억과 진술이 서로 교차하며 전개되는데, 서사를 지속적으로 이끌고 있는 사건(“유나”의 자살)의 발생 요인은 앞서 두 작품의 도시처럼 동일한 메커니즘을 지녔다. 노조 활동으로 인한 회사의 교묘한 탄압이 “유나”의 극단적인 선택을 이끈 결정적인 요인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그녀의 삶의 행적들을 볼 때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인간다운 ‘감수성’을 지녔던 그녀를 끊임없이 옥죄었던 외부의 질서는 군인인 아버지(“정근”) 밑에서 접한 ‘군대’, 그리고 이윤 창출만을 강요하는 ‘회사’처럼 삶 곳곳에 산재해 있다.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냉엄한 규칙에 옥죄이는 ‘감수성’은 지속적으로 훼손되면서 황폐해진다. 이것은 “유나”가 쓴 “일기”에서도 고스란히 기록된 채 남아 있다.
    한편 『해리』의 서사를 ‘고발’과 ‘추적’으로 이끄는 최초의 사건도 『미스 플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작중 초반에서 드러난 “김민주”의 죽음(자살)이다. 그녀의 어머니인 “최별라”의 증언으로 시작된 사건의 실마리는 주인공인 “이나”를 움직이게 한다. 서사가 전개될수록 “해리”에 의해 살해당한 또 다른 이들에 관한 증언도 있지만, “이나”가 특유의 감각(이것이 비록 ‘기자’라는 직업 정신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윤리적인 감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을 최초로 발휘하게 된 것은, 이 “김민주”의 자살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의 죽음(당시 “백 신부”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고 증언됨으로써 더욱 참혹해진 죽음)은 마찬가지로 “이나”가 과거 그에게 당했던 추악한 기억과도 곧바로 연결된다. “이나”의 “머릿속으로 기억의 검은 장대비”(61쪽)가 쏟아진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죽음은 “이나”의 이후 행위를 추동했던, 가장 결정적인 계기라고 봐야 한다.
    『미스 플라이트』와 『해리』에서 초반에 대두된 죽음(자살)이 문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러한 사건이 곧 ‘죽음답지 못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왜 일어났는가?’라는 인간다운 물음에서부터 밝혀져야 할 ‘비정상적인 죽음’이다. 왜냐하면 그 죽음이 발생된 근본 원인이 인간다운 가치가 훼손된 지점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이것은 공동체 구성원이라면 마땅히 추적과 고발을 해야만 하는 위급한 문제로 대두된다. 사회역학자인 김승섭에 따르면, 사회적 폭력으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경험에 대해 말하지만, 우리 몸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그 상처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다.3) 사회적 구성원들이 처한 질병의 원인이 부조리한 사회 구조나, 차별과 폭력을 발생시키는 그릇된 조직 문화에 따른 것이라고 바라보는 ‘사회역학’과도 유사한 문제의식으로서 문학적 상상력 또한 비판적인 포즈를 취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해 보인다. 더구나 ‘자살’은 몸의 질병을 뛰어넘어, 사회적 질병이라 할 만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근”과 “최별라”가 각각 마주했을 딸의 시신은 은폐된 사회적 폭력을 가리키는 ‘다잉 메시지’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을 처음부터 오롯이 해석하기는 어렵다. 특히, 익사한 딸의 시신을 본 “정근”의 반응은 의미심장하다. 시신을 보면서 자신이 그동안 죽음에 대한 “빈곤한 상상력”(49쪽)을 지녔다고 느끼는 그의 “당혹감”을 어떻게 봐야 할까? 약간 억지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정근”이 본 딸의 시신을, 한병철이 언급한 “풍크툼(punctum)”에 빗대어 보자. 사진의 요소 가운데 하나인 “풍크툼”은 근본적인 ‘불투명성’이며, 그것은 어떤 이름도, 기호도 갖다 붙일 수 없는 것으로서 드러난다.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것은 내면의 불안에 대한 확실한 표현에 가깝다.4) “정근”이 딸의 시신을 다시 떠올리면서도 “덤덤하게” 느낀 그 감정의 지점은 ‘설명 불가능한 무언가’를 가리키며, 이러한 ‘감정의 불투명성’은 (딸의) ‘죽음’이라는 존재적 사건이 앞으로 남겨진 그의 삶에 커다란 ‘공동’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완전한 해석과 의미로 가둘 수 없는 ‘죽음’의 불투명성은 『죽은 자로 하여금』의 “무주”에게도 동일한 문제로 다가온다. 직속 상사이자, 동료인 “이석”의 비리를 처음 발견하게 된 시점에서 문득 “무주”가 떠올린 것은 “사진으로 본 이석의 아이”(25쪽)였다. 끝내 “이석”의 비리를 병원 홈페이지 게시판에 익명으로 올리게 되고, 결국 이러한 행위가 아이의 죽음과 전혀 무관하지 않았다는 암시는 자못 섬뜩하다. “어떤 공명심과 정의감에 홀린 건지 의아”(95쪽)할 정도로 심각한 혼란에 빠진 “무주”에게 어느새 (아이의) 죽음은 딱히 명확하게 설명될 수 없는 순간(“꿈”)마다 묵직하게 다가온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94쪽) 걸어오는 아이의 기이한 걸음걸이를 꿈속에서 마주한 그에게 사실상 ‘죽음’의 이미지는 그 어떠한 대의명분(“공명심과 정의감”)으로라도 함부로 메워져서는 안 되었던 존재의 비극적인 상실이자, 공허한 빈자리(‘공동’)로부터 나온다.5)

  3) 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동아시아, 2018, 22쪽.
  4) 한병철 저, 이재영 역, 『아름다움의 구원』, 문학과지성사, 2016, 58쪽.
  5) “정의감과 도덕심에 취해”(49쪽)서 벌인 “무주”의 행위의 당위성을 제공했던 그의 “아이”도 “아내”의 유산 때문에 결국 죽게 된다. 이렇듯 어떤 대의명분이라 할지라도 생명을 초월하는 것은 없다는 절대적인 진리야말로 우리 앞에 놓인 설명 불가한 죽음의 ‘불투명성’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4. 윤리적 감각을 지닌 자들이 벌이는 분투

 

    ‘죽음’이라는 사건은 작중 인물들(누군가의 죽음 이후에 남겨진 자들)의 윤리적 행위를 추동한다. ‘안티고네’가 그러했던 것처럼6) 이들 세 작품의 작중 인물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행위는 ‘윤리적 정당성’, ‘행위의 당위성’, ‘서사의 개연성’을 지닌다. 이로써 독자들은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서사를 따라 윤리적인 문제의식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리쾨르가 바라본 서사(이야기)의 구조처럼, 작중 인물들도 사건을 따라 ‘죽음답지 못한 죽음’의 실마리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미스 플라이트』의 “정근”에게 지속적으로 추동될 행위는 “유나가 남긴 글을 영원히 발견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애써 추적해야 할 것”(227쪽)이라는 윤리적인 문제의식으로부터 나온다고 봐야 한다. 이는 유년 시절의 “유나”를 추억하는 “영훈”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그녀의 죽음에 분노하고, 상실을 느끼는 등의 인간다운 ‘감수성’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아픈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없”(25쪽)는 이곳의 오만하고 차가운 ‘질서’ 때문이다.
    훨씬 더 저속하고 반(反)인간적인 ‘질서’가 이곳에서 작동되고 있으며, 이것은 문학 외적으로도 비인간화가 빈번하게 벌어지는 부조리한 현실의 구조와 닮아 있다. ‘지극히 정당한 것’으로 인식되는 비인간적인 이윤 추구와, 철저히 성과만을 뒤좇는 현실의 끔찍하고 잔혹한 이면은 여과 없이 드러난다. 『죽은 자로 하여금』에서 “이석”이 “무주”에게 “생각해보면 그렇게 특별한 일이 벌어진 건 아니야.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잖아. 그게 전부지.”(195쪽)라고 말한 대목처럼 차가운 ‘질서’는 냉혹하기 그지없다. 『미스 플라이트』에서 “유나”의 감춰진 “일기”는 이곳이 지닌 뒤틀리고 탐욕스러운 민낯을 낱낱이 폭로한다. “면세 쇼핑”이라는 행위는 “누군가에게는 기회고 삶의 즐거움”(133쪽)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유나”를 비롯한 스튜어디스)에게는 “끔찍한 단어” 그 자체다.
    게다가 이곳에는 약속된 보상이나, 안락함 따위는 전무하다. “이석”의 말 그대로 차가운 ‘질서’가 구축된 이곳(도시) 어디에서도 “애당초 안전시설 같은 건 없”(195쪽)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능한 회생을 갈구하는 이들의 무기력한 환상(『죽은 자로 하여금』)과, 거짓으로 포장된 이미지(“페이스북”)에 맹신한 이들의 허황된 믿음(『해리』)은 처음부터 성립 불가능에 가까운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행위는 눈앞에 펼쳐진 급박한 위기를 오롯이 인간다움으로써 ‘직감’하려는 태도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향한다(종속). 반면, 분투(저항)는 눈앞에 펼쳐진 급박한 위기로서 대두된 ‘죽음’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함(윤리적 직감)과 동시에 그러한 위기를 한편으로 진정 ‘두려워하는 자들’로서 벌일 수밖에 없는 지극히 인간다운 충동(‘감수성’)이다. 남겨진 자들의 행위는 훼손된 사회적, 윤리적 의미망에 놓인 시신을 건지러 뛰어든다. 하지만 이들의 ‘감수성’은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상실에 마주선 자들로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상처’라는 부정성에 노출된다.
    남겨진 자들의 ‘감수성’이 맞닥뜨린 ‘상처’는 그 죽음이 ‘왜 일어났는가?’에서부터 드러난다. 상처는 남겨진 자들이 (이미) 죽은 자의 삶의 행적과 그에 관한 추억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더욱더 강렬해진다. 『미스 플라이트』에서 “유나”의 죽음은 작중 초반부터 제시되어 있다. 따라서 앞으로 전개될 서사의 향방이 무엇인지는 독자로서 아직 알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작가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부터 그녀의 죽음은 서사가 전개되면서 남겨진 자들의 기억과 진술에 의해 차곡차곡 둘러싸인다. 죽음을 둘러싼 남겨진 자들이 보이는 감정의 스펙트럼은 제각각 다르지만7), 이들의 기억과 진술은 앙상하게 뼈로만 남은 죽은 자(“유나”)에게 선명하고 뚜렷한 의미적 ‘살’을 덧씌운다. 은폐되거나 미화될 수 없는 ‘그 사람의 생전 모습’으로 (그리고 서사적으로)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훼손된 사회적, 윤리적 의미망에 갇힌 시신을 건져내려는 윤리적 행위이다.
    이곳의 오만하고 차가운 ‘질서’가 갈가리 찢어 놓은 ‘죽음’의 의미를 마치 “버려진 종잇조각들을 전부 다시 맞춰 봐야”(『미스 플라이트』, 21쪽)하는 것처럼 뛰어드는 행위는 결코 홀로 할 수 없는 중대한 일이다. 딸의 죽음 뒤에 남겨진 “정근”에게 “철용”과 “주한”이라는 조력자들이 있는 것처럼, 『해리』에서 “이나” 또한 혼자가 아니다. 한 사람(“김민주”)의 자살로 시작된 그녀의 추적은 이후에 “서유진”과 “강 변호사” 등의 조력으로 더욱 힘이 실리게 된다. 비리와 부패가 가득한 무진의 차가운 질서는 “지성도 이성도 지식도 모든 게 속수무책”(2권, 74쪽)처럼 사방을 옥죄지만, 이들은 ‘죽음답지 못한 죽음’을 추적하고자 하는 남겨진 자들로서 날로 견고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렇게 ‘분투’와도 같았고, 치열했던 “선한 싸움”(2권, 266쪽)은 말미에 이르러서 갑작스럽게 “이나”의 ‘감수성’을 되살리는 결과로도 이어진다. 그녀가 느낀 “훨씬 더 신선하고 아름답고 다채로운” 것, 그리고 “마음속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것”(2권, 269쪽)은 황폐하고 메마른 삶을 적시는, 인간다운 ‘감수성’이다.

  6) 안티고네가 오라비인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다시 전통적인 관례에 따라 매장함으로써 그것을 훼손된 의미망으로부터 건져내려고 했던 것을 가리킨다.
  7) 앞서 언급했듯이 “정근”은 딸 “유나”의 죽음을 ‘설명 불가능한, 불투명성’으로서 받아들인다. 이와는 전혀 다른 감정의 스펙트럼을 보이는 인물은 “유나”의 친구인 “철용”이다. “철용”은 그녀의 죽음에 관한 책임이 전적으로 회사(“B항공”)에 있다고 믿으며, 그가 장례식장에서 보인 난폭한 행동에서 볼 수 있듯이 극도의 분노를 표출한다. 반면, “유나”의 연인이었던 “주한”은 ‘분노’보다는,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슬퍼할 뿐이다. 그는 “유나”와 함께 광주의 옛 도청 앞 회화나무를 봤던 때를 추억하며, “이제는 영영 그럴 수가 없다”(194쪽)는 절대적인 상실과 마주한다. “철용”과 “주한”이 보인 감정의 스펙트럼은 상극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죽은 “유나”를 기억하고, 그녀의 죽음을 본래의 의미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친구이자, 연인인 그들에게 그녀의 죽음은 여전히 지울 수 없는 상처와 후회를 불러일으키면서 그 존재적 상실의 무게를 더욱 가중시킨다. “철용”이 “주한”에게서 생전 “유나”가 겪은 일들을 나중에 전해 들었을 때 느낀 감정의 흐름(201쪽)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5. 인간다운 감수성을 복원하기 위하여

 

    ‘고발의 서사’의 분투는 끝나지 않았다. “해리”의 석연치 않은 죽음 뒤에 새롭게 그 자리를 대신한 “백 신부”는 여전히 무진에 남아 있으며(『해리』), 완결되었다는 느낌은 잠시일 뿐 여전히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한 기분”(『죽은 자로 하여금』, 225쪽)은 무주의 뇌리에 남아 있다. 또한 아직도 찾지 못한 “일기”와, 자신이 딸에게 했던 “저주에 가까웠을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끝내 떠올리지 못”(『미스 플라이트』, 228쪽)한 “정근”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세 작품이 보여준 ‘분투’의 과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에 놓여 있다. 해결이 요원한 ‘난점’으로서 대두된 비인간적이면서도 충격적인 사건의 ‘과정’은 (내부)고발자, 밝히려는 자들에게 ‘반성’과 ‘고백’을 요청한다. ‘죽음답지 못한 죽음’이 벌어진 파국의 한복판에 남겨진 자들은 그렇게 끊임없이 윤리적 시험대를 오르내린다.
    문제적 장소로 자리 잡은 도시(이인시, 무진시)는 작중 인물들의 분투가 벌어지는 시험대이자, 윤리적 회색지대이다. ‘불황’과 ‘안개’라고 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그 안에 있는 인물들을 보다 과감하게 묘파하려는 시도는, 곧 작가들의 문제의식에서 발현된 것이라 하겠다. 생존과 경쟁, 그릇된 탐욕은 차가운 질서를 견고하게 만들어 놓았고, 그로부터 벌어진 ‘죽음답지 못한 죽음’은 앞으로 전개될 작중 인물들의 이곳과의 이질성을 보다 뚜렷하게 드러낸다. 존재적 사건으로서 ‘죽음’이 지닌 본래의 의미가 무참히 훼손된 채 방치된 것을 가리키는 ‘죽음답지 못한 죽음’은 작중 인물들(죽음 이후 남겨진 자들)의 윤리적 행위를 추동하는 외적 동기이다. 사건을 향해 ‘이것이 왜 발생했는가?’라는 인간다운 질문(의심)은 곧이어 훼손된 사회적, 윤리적 의미망에 갇힌 죽음(시신)을 건짐(기억과 추적)으로써 죽음의 본래의 의미를 되찾게 될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특히 『해리』와 『미스 플라이트』에서 ‘자살’은 부조리한 사회 구조와 그에 따른 차별과 폭력이 발생시킨 ‘죽음답지 못한 죽음’이다. 이러한 죽음은 그저 흔한 ‘뉴스거리’로 취급되거나, 더 나아가 “불륜 관계”(『죽은 자로 하여금』, 218쪽)처럼 모욕적인 꼬리표까지도 따라붙는다(이것이 작품에서만 일어나는 일인가?). ‘죽음답지 못한 죽음’은 그 시신 또한 훼손된 의미망으로 내던져졌음을 가리킨다(조롱과 인격모독). 매장되지 않은 시신이 ‘죽음다운 죽음’이 아닌 것처럼, 우리 사회의 죽음 또한 갈수록 그 본래의 의미가 훼손된 채 방치되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이번에 다룬 세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분투’와 ‘고발’의 서사는 이러한 ‘죽음답지 못한 죽음’에 응전하려는 인간적인 행위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문제 삼는 것이다. 여기서 대안으로 제시될 만한 인간다운 ‘감수성’은 ‘죽음’의 존재적 의미를 복원하고, 훼손된 의미망에 갇힌 시신을 기억하고, 그 죽음을 둘러싼 사회적 폭력을 추적하려는 자들의 행위에서 드러난다.
    작중에서 ‘죽음’ 이후에 남겨진 자들이 보여준 인간다운 ‘감수성’은 독자들 또한 동시대에 남겨진 자들로서 시험대에 오르길 요청한다. 그렇기 때문에 『해리』의 서두에 있는 “만약 당신이 이 소설을 읽으며 누군가를 떠올린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사정일 뿐이다”라는 말은 위험의 소지가 있다. 이 대목에 대한 작가의 해명8)은 정작 작가가 구축한 ‘고발의 서사’를 문학 밖의 사회적 공감대로까지 확대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약화시킬 여지도 있어 보인다. “전적으로 당신의 사정”이라는 말은 그것을 마치 개별적인 문제로 돌림으로써 남겨진 자들의 연대를 자칫 자의든, 타의든 간에 부정하는 투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나치게 뚜렷한 선악 대립과, 말미에 벌어진 갑작스러운 러브라인(“이나”와 “강 변호사”)은 서사를 지배하고 있던 사건의 긴장성(그것이 작가가 바라본 ‘실화’라면, 더욱더 묘파를 했어야 하는 부분이다)을 오히려 떨어지게 만든다.
    이것은 어느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의 문제이다. ‘분투’는 남겨진 자들(개인이 아닌, 공동으로서)이 서로 짊어지고 가야 할 윤리적 과제를 내포한다.9) 물론 여기에는 ‘비판’이라는 잣대가 세워질 수 있으나, 그것을 비판하는 위치(소위 ‘작가’라는 이름하에)에 있다고 하여 전적으로 선하다고 봐야 할까?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 또한 ‘죽음답지 못한 죽음’을 벌이고 있는 사회적 폭력으로부터 작품의 모티프를 가져왔다면, 고고하고 엄숙한 위치에 서서 ‘저들은 악이다.’라고 비판할 게 아니라, 오히려 ‘반성’하고 ‘고백’함으로써 자신을 포함한 독자 모두를 윤리적 시험대에 과감히 세워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여전히 감추고 있을지도 모를 추악한 가식도 스스럼없이 ‘고발’하려는 과감한 문학적 상상력이야말로, 이곳을 지배하는 차가운 ‘질서’를 진정으로 전복시킬 만한 정신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것만이 인간다운 ‘감수성’을 복원시킬, 그리고 유일하게 남겨진 대안이기 때문이다.

  8)  공지영은 뉴스 매체에 출연하여(, 2018년 8월 8일 방영), 이 대목을 쓴 이유가 본인을 향한 명예훼손 소송을 미연에 막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작품에 담긴 비판적 시각이나, 그에 따른 묘사가 자칫 독자나 다른 이들로부터 공격받을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이 대목을 단순히 책임소재를 회피하기 위해 배치할 게 아니라, ‘죽음답지 못한 죽음’ 이후에 남겨진 자들로서 작가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분투’해야만 하는 지점으로서 제시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9) 이것은 결국 ‘연대’를 전제한 각 인물들의 행위의 연속에 의해서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무주”는 “아내”를 떠올리며, “모두 털어놓을 것”(226쪽)이라고 다짐했다. “아내”에게 고백하기로 다짐한 “무주”의 이러한 태도는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누군가와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할 것임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유나의 억울함을 풀어 줄 사람은 아저씨랑 아버님밖에 없”(『미스 플라이트』, 224쪽)다고 말하는 “주한”의 말처럼, 죽음 이후에 남겨진 자들이 맞닥뜨린 문제는 어느 누가 혼자서 감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과제로서 대두된다.

 

 

 

 

 

 

 

 

 

 

 

작가소개 / 정재훈

2018년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연성대학교 강사. 공역 『재일이라는 근거』(소명출판, 2016).

 

   《문장웹진 201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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