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하지도 높지도 않게 문학‘하기’ - 김효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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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비평가 특집]

 

최근 몇 년 간 한국문학의 흐름은 그야말로 숨이 가쁠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한국문학은 달라져야 했고, 달라지고 있으며, 또 계속해서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도 더 많은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수많은 변화의 외침은 지금도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제 막 자리매김한 '젊은'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부탁했다. 이들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습을 비트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어갈 한국문학의 풍경을 기대하며 '기획'의 지면을 연다.

 

 

 

쓸쓸하지도 높지도 않게 문학‘하기’

 

 

 

김효숙

 

 

 

 

1. 여전히 소비되는 문학

 

    이런 자학적·가학적 진단이 있어 왔다. 우리 문학이 ‘문화’라는 환경이 내준 자리에서 존재를 표명한다는. 그들은 정책을 동반한 문화가 제국적 지위를 획득했다고들 한다. 대중이 문화를 지원하고 향유하는 양방향 에너지원이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문학은 대중에게 유희를 지어 바쳐야 하고, 그러한 작업은 앞으로 더 다원화할 것이라고 한다. 숭고미·비장미·심미감을 따져 묻는 고상한 취향은 낡은 것이고, 과장된 불량기로 가짜 욕망을 적발하여 들추어내는 게 문학이 맡아 놓은 임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렇기만 하다면 문학은 진정 비장하게 울어야 한다. 문화의 오지랖은 소비풍(風)을 잘 부추기는 재능이 있다. 문화가 시장주의로 힘을 낼 때, 삶의 신명을 위한 이벤트들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거행할 때, 문학은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

 

    문학 언어 침탈의 주범은, 할거하는 이미지들이다. 책이 안 팔린다는 지표 앞에서 힘이 빠진다면, 전자적 글쓰기와 읽기 쪽으로 독서대중이 대거 이동 중인 실상을 눈여겨봐야 한다. 종이책이 요구하는 고상한 방식에서 뛰쳐나온 로맨스 등 장르물들이 전자기 속에서 무한 부활하고 있다. 문학은 오히려 과잉 소비되고 있다. 당신의 쾌와 흥을 위해 열정적이고 엽기적이고 생기발랄하게. 그러니 문학의 몸집을 왜소하다 몰아붙이지는 말자. 글은 언제나 우리가 미처 파악 못한 어떤 장소에서 잠행하고 있다. 하여 우리는 문학의 위기라는, 언제나 화급해 보이는 이 진단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서 이마를 짚어 볼 수 있다.

 

    일제가 문화정책을 펼 때 어느 비평가가 이것을 제시했다. “위대한 문학 작품”의 “위대한 배경”이 되어 줄 필수 조건으로 영상의 사진성을.1) 이 말은, 이미지가 문학의 리얼리티에 협조하도록 유도한다. 문학이 고급 장르로 옹호되기를, 그 지위를 보호받기를, 타 장르의 변방으로 밀려나는 일 없이 자리를 지킬 것을 표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언제나 위기였다. 그 주범은 비가시적인 위협, 즉 보이지 않는 손의 경쟁 법칙이다. 그 손으로부터 악마적 진화를 거쳐 천수(千手)를 장착한 자본의 힘이 신자유주의다. 계층 간 차이와 격차를 조장하고 불평등과 적대적 감정을 심화시키면서 자본은 속으로 웃는다. 게다가 자연을 문명의 불도저로 갈아엎은 근육에서는 리비도의 환상이 불뚝거린다. 자본을 앞세워 살갗을 매만져 주는 이 거대한 살덩이를 밀쳐내야 할 당위론 같은 것은 대중에게 없다. 그것은 오히려 욕망을 표명할 수 없기에 대중이 더더욱 목말라 하는 발포성(sparkling) 강한 와인이다.

  1)  이원조, 양재훈 엮음, 『이원조 비평선집』, 현대문학, 2013, 25쪽(1937년의 글).; 이 글에서는 영화를 대중문화 매체로서보다 뉴스의 사진성을 보고문학과 관련하여 높이 평가한다. 이원조는 여기서 소셜리스트의 관점으로 부르주아 매체인 영화를 배격하는 듯 보이지만, 이후 그는 시/소설/영화가 시대적 핸디캡을 갖고 있으며 시는 소설에, 소설은 영화에 항거할 만한 능력을 잃었다고 쓴다. 이것이 “자유경쟁적인 현대”적 현상이며, 시와 소설이 영화에 비해 “비현대적”이고 “낙오된 형식”임이 분명하다면서 “현대”를 “광란한 파도”에 비유한다. 49쪽(1938년의 글).

 

    ‘근대문학의 종언’ 선언이 우리 문학에 조기를 걸어 줬던 때가 2006년. 치열한 입론이 그 발언의 진의 쪽으로 쏠렸다. 우리 문학을 겨냥한 이 진혼제의를 단 하나로 초점화 할 수는 없다. 지금 눈여겨보는 것은, 문학학과에 영상 관련 과목을 개설하지 않고선 존립할 수 없는 예로 미국의 학제를 들고 나온 점이다.2) 그런 자상함이 아니더라도 할리우드의 초국적 자본력과 기획력은 이제 천 개의 손으로 세력화되어 있고, 문학의 생존법을 그 손들의 갈퀴질 사이에서 찾아야 하는 엄연한 현실은 결코 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과연 그 손들이 적대적 타자이기만 하겠느냐는 게 문제다. 하여 그 선언은, 해답은 결국 문학이 쥐고 있다는 데로 환원하는 사건이 되었다. 영상과 디지털미디어 산책자들의 파죽지세가 사회를 움직이는 이 시대. 문학은 어떻게 힘을 낼 것인가.

  2)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b, 2006, 47~48쪽 참조.

 

    모든 억압적 상황을 경과하려는 게 문학의 본성이다. 2000년대 초반에 순문학과 대중문학의 절개선은 이미 지워지고 있었다. 시간차로 변하는 디지털 이미지들의 매혹을 자본이 지휘하면서, 순문학의 정절에 자물쇠를 채우려는 자들이 ‘대중’이라는 그 방정맞음을 특히 경계했다. 문학은 이제 문화적 자장에 전자성을 이입하고 접속해야 살아남는다는 불안감을 내비친다. 책 판매 지표상 하류 상품으로 분류해 놓고 문학을 비하하는 외부자들의 발언은 더 성가시다. 문화산업의 하위 항목에 처한 듯한 현실에서 문학은 자체 정립을 위해 해방구를 찾아보지만 그 비전들에 되레 질식당한다. 심지어 ‘K문학’으로 비하되고 강등당하는 현실은 결코 희망고문일 수가 없다. 그럴수록 문학은 내부 면적을 자체 점검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 문학을 참수하려는 무참한 인용방식이 저들이 추격하거나 맹신하는 물질적 관념 때문임을 상기시켜 주려 한다. SNS에서 부유하는 ‘K문학’이라는 불확정적 개념에 적극적으로 응전한 사건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그 표현이 이 시대 대중미디어 채널로부터 발신된 것이고, 그 기원이 K팝의 키치 이미지에 있는 한 K문학이라는 호명은 조야한 대중성 속에 고스란히 포위된다.

 

    아도르노가 일찍이 전망했다. 거대하게 산업화된 문화가 현대인의 환경이 될 것이라고. 현대사회 “윤리의 객관적 기초는 문화주의”3)이며, 관광객 같은 소비대중이 이동하면서 문화적 일상을 즐긴다. 대중문화의 자연화가 인간 삶의 내용을 이루는 시대. 인간의 일상도 문화의 모습으로 낱낱이 재편된다. 우리의 대중문화는 1990년대에 “문학생산의 문화적 환경”4)으로 진단된 바 있다. 기계화와 포스트모더니즘이 급습한 사회의 변화를 문학만큼 절절이 체감한 것도 없다. 현대 사회의 속도전쟁과 무한경쟁은 인간에게 자기 강화의 시간을 주지 않는다. 자기 소진, 자기 살 파먹기 같은 소모적 행위를 하면서 인간은 우울증을 앓는다. 갱신과 창조적 행위가 모방의 모방이라는 형식으로 대체되면서, ‘고급진’ 예술은 박물관의 어둠을 지키는 장승같은 사물로 전락해 간다. 고귀하고 품격 있는 예술품과 일상 물품 간 미학을 따질 수 없는 지점에서 자본은 활성화된다. 하여 대중은 굳이 상급과 하급을 따질 수 없는, 경계선이 수시로 이동하는 상품에 만족한다. 그 편이 더 머릿속을 가볍게 해준다.

  3)  알랭 바디우, 이종영 옮김, 『윤리학』, 동문선, 2001, 36쪽.
  4)  이광호, 「키치를 먹고 자라는 문학」, 김기택 외, 『21세기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9, 191쪽.

 

2. 비체들이 내지르는 괴성

 

    이 글은 특히 여성 작가가 쓴 비체(abject)들에 주목한다. 2005년에 우리는 ‘미래파’의 출현을 목격했다. 1년 뒤 이근화가 시집 『칸트의 동물원』(2006, 이 표제시는 2004년 이근화의 등단작이다.)에 오토바이를 몰며 도시를 질주하는 스킨헤드족을 탑재하고 나타난다. 대부분의 시에 산포한 도시 소음의 틈새에서 인간의 아비규환이 터져 나온다. 이 동력기들의 굉음은 이탈리아 ‘미래주의’5)에서 세례 받고, 앙리 르페브르가 현대 도시의 시끌벅적한 자동차 소음에 대해 제출했던 것의 재구성물로 보인다. 생경하지만 희망의 기미는 농후한 미래파라는 명명어가 미래주의를 경과한 것이고, 비율로 보건대 남성보다 여성이 미래파로 더 많이 분류된 데에는 어떤 징후가 있다. 앞당겨 말하자면 미래파의 소음이 극렬했던 것은 교육받은 여성의 문학적 젠더 수행이 가세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의 아방가르드적 발화가 ‘종언’ 이후 우리 시의 생존 범위였음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그들은 전위의 상상력을 최전선으로 몰아가 사회의 헤게모니를 가차 없이 조롱·살해하면서 수직적 위계를 깨트렸다. 견디는 자와 창안하는 자들 간 불쾌/쾌가 격돌하고, 이제껏 보존해 온 시의 육체는 파열된다. 그들은 문학이 최종까지 지녀야 할 인간의 ‘몸’과 ‘언어’를 난도질하여 형질을 변경하거나 무화시켜 놓고, 추와 불쾌를 충돌시키면서 더러운 감각을 말살하거나 해방하려 했다. 게다가 사회적 문제로 부상한 “포스트IMF 세대”6) 가장의 실직 문제를, 생계 방편을 찾아 도시로 진출한 여성들의 억압과 굴종을, 소녀에게 가해지는 가부장적 기율을, 퀴어 정체성을 분열적 목소리로 타전했다.

  5)  노버트 린턴, 「미래주의」, 니코스 스탠고스 엮음, 성완경·김안례 옮김, 『현대미술의 개념』, 문예출판사, 2014(제2판 1쇄), 146~147쪽 참조. 이 글의 필자는 이탈리아 미래주의 운동의 창시자를 시인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로 본다. 1909년 1월 발간한 자신의 시집에 머리글 형식으로 실은 것을 같은 해 2월 20일 《르 피가로》 1면에 프랑스어로 선언문을 싣는다. 역동주의(dynamism), 전기(electricity)라는 명칭도 ‘미래주의’와 함께 고민했으며, “기술공학적인 힘의 세계가 태동하는 것을 대부분의 문필가나 예술가보다 더 민감하게 의식했던 그는, 예술이 과거를 파괴하고 속도와 기계 동력이 주는 유쾌함을 찬양하기를 바랐다.”
  6)  박진, 「포스트IMF 시대, 문학의 욕망과 욕망의 윤리」, 《작가세계》 2011년 봄호, 257쪽.

 

    그 떠들썩함은 규범을 균열 내는 비체들로부터 왔다. 부정어들의 장광설, 중얼거리는 병렬적·산문적 기호들, 비대한 기형적 언어들이 태어났다.7) 그 무렵 시집을 출간한 여성 시인이 압도적으로 늘어났고, 남성지배와 억압을 부정하면서 실존의 지형을 상당 부분 움직여 놓았다. 엄연한 주체적 개인으로 나선 여성들이 지고지순을 요구하는 세계와 동질화를 거부한 현상은 2000년대 이전 여성주의 시를 계승한 것이었다. 어느 비평의 “페미니즘적인 해석방식”이 1990년대를 전후하여 “미학적인 탐색단계로 이행하고 있다.”8)는 평은 참고할 만하다. 요약하자. 여성 시인들의 열성적인 약진은 배제되었거나 강요되어 온 보편적 젠더에 대한 반동형성이었다. 이전 것을 갈아엎은 미래파의 작업은 긍정적 측면으로는 혁신적이었으나, 동일적 세계와 전면전을 치르면서 문학의 ‘가슴’을 도려내 버린 일, 세대를 이분하면서 비동일화를 위협적으로 수행한 것은 섬뜩했다.

  7)  “시적 자아의 정서표출이라는 점을 벗어나서 이야기의 구성이 시의 전면에 놓이는 경우”를 일부 시인이 보여준다는 2000년대 초반의 글이 있다. 이로 보면, 서사성을 장착한 미래파의 시는 이전의 토대에서 서서히 진행되었다. 그러한 경향이 시의 노래성을 막고, “멀티미디어적 다성성을 공유한 시들이 득세할” 것이라고 이 글은 예견한다. 이숭원, 「서정시의 다양한 분출과 새로운 전망」, 『문예연감』 2001(2000년도판) 통권 25호, 한국문화예술진흥원, 45쪽.
  8)  백지연, 「비평의 존재 의미에 대한 다양한 성찰」, 위의 책, 78쪽.

 

    미래파는 거침없는 기호들로 낡은 것의 종말을 고했다. “새로운 감각의 출현”이고 “놀랄 만큼 생산적”이라면서 이들의 기행을 호위하고, “시는 낡은 감각을 갱신함으로써만 그 미래를 보장 받”9)는다면서 예언자적 발언을 하고, 서정적 자아의 시스템을 고착시키는 악무한을 끊어내는 부류가 “뉴웨이브”들이며, “전위는 본질적으로 소수”10)라는 수호자들이 있었기에 미래파는 기찬 말들의 가공력을 존재의 근거로 삼았다. 미래파의 시들은 이제껏 표명되지 않았던 존재‘되기’의 생성물이었다. 지성은 지성에 의해서만 승인될 수 있다는 정언명령 같은 것이 그들에게는 최고선이었다. 타자와의 동일시를 낙원으로 아는 서정도, 현실을 불거지게 하면서 그 근력을 자랑하는 리얼리티도, 2000년대를 전후하여 우리 시의 대안으로 지목되었던 환경·생태·여성주의도 이들의 세력화로 교착에 빠졌다. 이 특수자들의 존립 이유는 오직 낡은 것을 파괴하는 것이었고, 그러한 원리가 그들의 활기였다.

  9)  권혁웅, 『미래파』, 문학과지성사, 2005, 9쪽.
  10)  신형철, 「전복을 전복하는 전복」,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16, 273~275쪽 참조.

 

    이 흐름에서 제외된 자들은 자의식이 없거나 아둔하거나 무시당해도 되는 자일 수가 있었다. 찬미자를 만나지 못한 글은 사생아나 다름없었다. 한 방향으로 과도하게 쏠리는 관심은 거기서 배제된 자들의 자리를 빠르게 사막화한다. 이때 생기는 회의 하나. 극지까지 가 추락할 것 같은 상상력이 찬미되는 것에 대해 독자는 종전의 단단한 권위와 전형성을 처단했다고 과연 쾌재를 부를 수 있었던가. 그것은 소수의 탐미주의자들, 최신 이론에 능통한 엘리트들, 젊은 세대들의 지적 호기심에 쾌락을 제공할 뿐인 문학은 아니었던가. 기성세대 독자의 불쾌가 쾌로 전환되지 않고 불쾌가 끝내 불쾌로 잔존하는 전위적 모형이 미래파가 아니었을까. 시낭송을 무대화하면서까지 시 생명의 핍진함을 돌본 이들에게는 어떤 명칭이 맞는 걸까. 과거파? 지킬 것이 없는 자는 모든 것이 파괴되더라도 슬프지 않다. 그러나 지킬 것이 있는 자는 사정이 다르다. 그러니 이것은 몹시 웃픈 명칭이다. 바디우를 인용하자면, 미래파의 출현은 시끄러운 ‘사건’이다. 이때 새로움은 이전 것과 분리·단절하면서 생성된 것. 이전 지식이나 언어로는 그 기호들을 규명할 수 없다. ‘사건’이라는 것의 단발성에 비춰볼 때 제법 길게 지속된 생명력을 보면 미래파는 “잉여 부가적”(바디우, 84쪽) 효과를 잘 체질화한 경우다. 자본 재생산 구조의 핵인 잉여 지분 같은 것을 그들은 이전과 다른 언어로 확보했다. 생소한 언어로 갈아치운 시를 발전과 활성화로 받아들인 독자가 있는가 하면, 다른 편에서는 악마로부터 온 파괴적인 전언으로 대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차이가 상대방 배제로 이어졌다.

 

    비평이 앉았던 자리를 털어내도 ‘먼지 나는 문학’이 보이지 않은 것도 2000년대 현상이다. 신경숙 표절 사태 때, 비판 기능에 무기력해진 자리를 털어내자 제 먼지를 다시 뒤집어쓰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체형 관리를 철저하게 한 비평은 독자를 매혹했다. 대중문화와 선별적으로 사귀면서 유연함과 가벼움을 고상한 지식에 비비고, 논리와 수사를 까부르면서 비평의 체질을 바꾼 경우다. 그들은 비평 읽기도 놀이화하려 한 명석한 자들이다. 고급한 자리를 지켜 온 순문학은 하향하고, 대중문화는 상향하여 손을 맞잡고서 놀이를 벌인다. 문학 언어가 비평 언어를 지원하면서 독자의 감수성을 흔든다. 강단 비평의 완고함이 대중적으로 희석되면서 철학과 문학의 중간지대쯤에서 비평은 논리와 감수성을 배합한다. 우리는 이를 두고 중간예술이라고 비하하지 않는다. 작중 인물의 열망·기대를 잘 읽어내어 독자에게 매개한 글들이 비평의 생명을 지켰으므로. 그러나 비판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문학이 독자대중을 매개하는 기능만을 비평에 요구할 때 작품의 내적 역학을 얼마나 진정성 있게 감당할지 의문이다. 그보다 더 아이러니한 것도 있다. 문학 언어가 상실한 힘을 문화 언어에 기대면서 문학이 불편부당한 장르가 아님을 해명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더더욱 저 친밀한 이웃 같은 문학-문화가 동일 언어를 쓰는 한 문학의 펑크가 곧 문학의 자멸로 이어질 것이라는 불안을 우리에게 안긴다. 물론 그것이 문학과 문화의 대화 형식인 한 이상적이긴 하다. 그러나 내재적 문학비평이 있던 자리에 문화비평이 들어와, 문학이 정크푸드를 섭취하는 것마냥 슬쩍 비하해 놓고선 전략적 회유를 하는 자의 자세 같은 것. 그것이 이즈음 자본화된 문화(또는 문화화 된 자본)의 언어일지도 모르겠다.

 

3. 매혹과 유혹의 모멘트

 

    환상을 생산하는 예술은 매혹적이면서 유혹적이다. 이것은 리비도 발산과 투여의 문제이기도 하여 예술은 누군가에게는 ‘위험’하다. ‘호’ 아저씨. 목에 힘을 준 호메로스 판본의 오디세우스를 이렇게 불러 보겠다. 이 근대적 이성 앞에서 세이렌이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는 “노래가 있다고 하는 자기-지칭적 주장”11)일 뿐, 풍문과는 달리 매혹적이지도 치명적이지도 않다. 매혹의 최전선이 곧 사선(死線)이라는 풍문 속에는 수많은 남성들의 해골이 나뒹굴고 있었으나, 이 ‘호’ 아저씨는 돛대에 몸을 동여매고서 무사히 사선을 통과한다. 그는 세이렌에 대해 정보를 미리 입수한 뒤 “자기유지의 목표”12)를 달성한다. 그가 “노래하는 여괴(女怪)”13)라고 명명하는 세이렌과의 사이에 예술은 성립하지 않는다. ‘호’ 아저씨는 실존의 푯대에 몸을 묶어 노래를 거부했고, 세이렌은 그의 현실을 침해하지 않았다.

  11)  레나타 살레클, 이성민 역,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도서출판b, 2003, 102쪽.
  12)  Th. W. 아도르노·M. 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문학과지성사, 2016(초판 16쇄), 85쪽.
  13)  호메로스, 이상훈 역, 『일리아스/오디세이아』, 동서문화사, 2013(2판 8쇄), 707쪽.

 

    공선옥 소설14)에서는 15세 소녀 정애가 노래를 부른다. 소녀에게 접근하다가 뒷걸음치고,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는 자는 남성이다. 그는 일단 여성의 노래를 매혹-유혹의 혼합물로 감각한다. 보험증서가 그렇듯, 아무 일 없으면 본전을 유지하고, 사건 발생 시에는 목적적 보장을 받을 수 있다는 식이다. 남성이 그 노랫소리 쪽으로 접근해 오자 정애는 노래로 감정 전략을 현실화한다. 폭력적 동일화를 획책한 이 남성에게서 우리는 노래 부르는 여성에게 내면화된 대남성적 감정을 읽는다. 지배적 타자인 남성 앞에서 정애는 끝끝내 노래로 버틴다. 떨지 않고, 울지도 않으려는 결기로부터 구조화된 행위다. 반면 노래 쪽으로 거리를 좁히는 남성은 위계적 동일화를 꾀한다. 여성 몸의 좌표가 처음부터 복잡하게 현실적 지점을 찾고 있다는 것에 대해 그는 무지하다. 잘 숨겨야만 일상화될 수 있는 폭력을 정애가 노래로써 폭로한다.

  14)  공선옥,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창비, 2013.

 

    ‘카’ 청년. 가상의 세계에서 눈을 돌리는 카프카 단편의 오디세우스에게는 이렇게 이름표를 달아 본다.15) 그는 세이렌의 또 다른 관객이다. 카프카는 대립쌍의 버티기, 그리고 세이렌의 침묵에 대해서 쓴다. 노래하는 자가 입을 다물다니, 그 이유가 어설퍼서는 곤란하다. 그녀는 노래의 사용도 교환도 폐기한다. 예술가의 정체성을 상실한 여성이 “발톱을 한껏 드러내놓고 힘을 주고” 있을 뿐이다. 안타깝지만 가상과 마법을 망실한 음유시인에게 독자가 머물 이유란 없다. 반대로, 실존재자인 정애가 노래할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그녀 앞의 “부로꾸 찍는 사람”과 “박샌”은 지배적 야만성을 숨긴 자들. “벌금을 내지 않도록 조치”해 준다면서 사회자본을 주무를 수 있는 힘을 과시한다. 이에 맞서는 소녀의 노래가 폭력의 자연화를 무력화한다.

  15)  프란츠 카프카, 전영애 역, 「사이렌의 침묵」, 『변신·시골의사』, 민음사, 2017(1판 83쇄) 참조.

 

    정리하자. ‘카’ 청년에게 들리는 노래는 없다. 실행 주체와 감상자의 상호 주관적 정신 교류도 없다. 카프카는 여성의 리비도는 복원했으나 남성의 그것과 가상은 살려내지 못했다. 자본 갈등과 계급적 현실을 약화시킬 리비도의 부재와 예술가의 눈물. 눈빛을 거두어버린 ‘카’ 청년에게 절망하는 세이렌은 그렇다면 지금-이곳 예술가의 현실이 아닌가. 그녀 홀로 ‘카’ 청년을 사랑할 뿐이므로. 환언해 보자. 아무리 8등신을 꼬아 붙여 본들 소진된 에너지로는 그 몸짓에다 리비도를 최적화할 수 없지 않겠는가. ‘호’ 아저씨를 상대하는 세이렌은 더 비관적이다. 시장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녀의 노래는 ‘호’ 아저씨가 정보 입수 과정에서 가치 판단을 끝낸 상품이다. 그가 지워버린 가상과 리비도는 합리성에 복종한다. 그는 예술을 확인하는 일과 자기 파괴가 동시에 진행될 수 있다는 가능성부터 철폐한다. 신비, 그리고 경악할 예술은 이미 풍문 속에서 소비되어 버렸다. 그는 진부하고 값싼 그것에 귀 기울일 마음이 없다. ‘관객 없음’은 예술가를 비춰 주는 ‘거울 없음’과 같다.

 

4. 파레시아: 불평등의 미시적 목록들

 

    우리의 형편이 불리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삶의 산문이 ‘현실의 예술에다 불리한 지반을 제공한다는 징후’(루카치의 말을 변용함)가 맞다면, 김지영의 현실 토대는 충분히 불리하다. 재현의 거울 앞에 선 ‘82년생 김지영’16)의 미친 말은 어떤가. 김지영의 ‘배제된’ 말은, 산아제한 정책으로 여아를 낙태로 살해한 현실로부터 출발한다. 바로 당신이 낙태에서 제외되어 생명을 얻었고, 이 소설에 목록화한 사건들마저 당신의 성장기에 큰 이슈였다면 이 서사는 틀림없이 당신에게 아슬아슬하다. 어떤 이는 여성주의로, 어떤 이는 퇴행하는 엘리트 아내에 대한 정신과 의사의 변명으로 이 소설을 읽고 간다. 당신은 여기서 이 땅의 무수한 ‘당신들’의 재현을 볼 것이다.

  16)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2017. 9(1판 36쇄) 참조.

 

    판타지를 잠시 경유하자. 급성장에 짓눌린 20세기 후반부터 우리는 그 가벼움을 즐겼다. 판도라의 ‘희망’을 재앙의 근원으로 재현하는 일도 잦아졌다. 3포·N포 세대들에게는 ‘희망은 없다’는 종언이 좌우명이 되었다. 그들에게 미래는 현실의 연장일 뿐, 저 너머로 도약하게 하는 아름다운 상처의 문턱은 되지 못한다. 캄캄한 상자에 희망을 가둬 놓고 관리할 힘을 잃은 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들에게 임하는 메시아는 현실 도취성 나르시시즘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의 지위를 되도록 벗으려는 그들. 그렇게 처신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이해받으려는 여성적 메커니즘과, 내면화된 남성성을 포기하지 못하는 공격성이 그들의 내면에 같이 산다. 여성은 어떤가?

 

    공선옥은 반인간적 폭력과 불평등의 조건, 기층민의 생존회로를 여성생태 생명정치로 보완하려 한다. 조남주는 “상위회로”17)에서 배제된 주체를 반복적으로 사회 문제화하면서 젠더의 ‘말’을 체현한다. 하위주체는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다는 스피박의 언명을 정론으로 수용한 것처럼 대신 말하기를 수행하지만 정작 김지영은 이 시대의 하위주체와는 거리가 있다. 급격한 산업화 이후 포만해진 자본에 낀 중산층의 두께 안에서 이 인물을 파악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정애의 미친 말과 김지영의 그것 중 소란스런 말을 구현하는 쪽은 김지영이다. 그 말은 젠더 정치를 문학의 틀에 가시화한다. 거기에 기입된 문제들이 정교한 현실언어를 요구한다. 특권이 제거된 이 말들은, 동질적일 수 없는 여성의 처지를 이전과는 다른 별쭝난 방식으로 표명한다. 그 미친 언어는 의미생성에 당당할 수 없는 여성 문제를 제출했다는 점에서 새롭다. 그런 측면에서 김지영은 여성 개체의 차이와 요구를 간과한 채 보편적 대문자여성(Woman)만을 이상적으로 강요한 사회에서 때마침 잘 튀어나와 준 소문자여성(woman)이다.

  17)  사)여성문화이론연구소, 『페미니즘의 개념들』, 동녘, 2015, 141쪽.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여성사적 서지로 읽는다. 이것은 실증적 자료를 제시한 것으로도 증명되지만, 우리의 안도감은 다른 데 있다. 사회가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고서 배제해 버린 여성 주체에게 집중력을 놓지 않은 점이다. 나의 곤경에 대해서는 누구도 대신 말해 주기 어렵다. 당신에게도 눈앞에 온 기회조차 타자에게 넘겨줘야 할 때가 있었다. 불평등한 사회적 지표와 기준들에 압착당한 채 말이다. 김지영처럼 그 아픔을 드러내지 못했던 눈치 보기야말로 대부분의 소문자여성에게 내면화된 삶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김지영 신상의 일에 참여한 의사가 아내의 탁월성을 사회화하는 일에 협조하지 못하고 가정에 들어앉혀 퇴행을 조장한 장본인임을 인정하는 형식, 그리고 만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주는 대속행위만으로는 김지영의 문제가 풀리지 않을 것이다.

 

    조남주는 소문자여성이 처한 불평등과 무반성적 사회를 미시화한다. 대사회적 적대의 이빨을 숨겨 온 김지영은 미친 말을 하면서야 자기 밖으로 나왔고, 제 위치를 알리면서 여성들로부터 복수적 장소를 이끌어낸다. 그곳은 개체들의 차이, 그리고 해체된 발언들이 서로 존중받으면서 제 목소리를 내는 곳이다. 이 보고서는 35년간의 김지영 진료차트를 겸한다. 의사는 이 시대 김지영의 목소리를 거기에 목록화한다. 자기치유가 불가능한 김지영의 병증에 사회적 처방을 구한다. 김지영의 말을 청취한 결과이기에 그것은 지지의 언어임이 틀림없다.

 

    제주도 말 ‘붕당붕당거린다’에서는 파당 냄새가 난다. 여성 언어의 당파적 분열성, 그 말을 들어줄 ‘귀’의 현전이 이 말에 실려 있다. 여성 리얼리즘에서는 통합된 보편성을 간추리기 어렵다. 여성 문제는 특정 계층과 개인의 경험 그리고 소수 집단 내에서 개별적이고 내면적으로 발화한다. 거기서 다시 계급이 쪼개지고, 세대 간 갈등이 불거지고, 다양한 목소리가 와글거린다. 복수화한 어떤 계층의 목소리는 그 자체 헤게모니로 또 다른 여성 계층을 상대적으로 소외시키거나 단절시키니 말이다. 이렇게 난해한 계급문제를 다룬 조남주 소설이 실패작이냐 성공작이냐는 논란에 끼어들었다면 당신은 적어도 방관자는 아닐 것이다. 이 작품은 비미학이라는 규범 틀에 갇히기 쉽지만, 그 말이 내향적 인간인 김지영의 말을 받아서 대리 발언하는 의사의 서술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하지 않을까. 냉소나 연민으로는 밀고 나갈 수 없는 리얼리티는 방관자를 배제해 놓고 투명한 언어를 세상에다 던진다. 문학 텍스트가 여성 운동의 서지 역할에 그쳐서는 곤란하니 미학적 갱신을 꾀해야 하지 않느냐는 일각의 지적은 타당하다. 문학이 여성 운동과 만나 헛바퀴를 돌리지 않으려 하는 목적주의를 자각하는 데서부터 조남주식 재현의 갱신은 시작될 터다.

 

    공선옥은 아래로부터 공동체를 보여주면서 여성의 비폭력적 감성과, 양성 간 배타성을 상생 쪽으로 돌려놓는다. 조남주는 보편적인 중산층 여성을 가둔 곳을 열어젖힌다. 언어를 실용적으로 쓴다는 점에서 김지영 서사는 목적적이다. 실존의 고통에 대한 발화법이 파토스를 경박하다고 여겨서일까. 불평등이라는 주제를 교차시키는 문학적 실천을 동시대인의 통점을 자극하면서 수행한다. 하여 정애와 김지영들은 이후에도 중단 없이 말해야 하고, 그 말은 복기되어야 한다. 그때 간과해선 안 될 것 하나. 조남주식 불평등의 시작은 결혼과 출산에 있고, 사회적 여성으로서 기회 박탈을 출산으로 보는 한 이 소설에서 제기한 문제들은 순환론의 한계에 맞닥뜨린다. 그러므로 계속되는 공회전은 이 소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은 되지 못할 것이다.

 

장-에티엔 리오타르, <터키식 의상을 입은 프랑스 마담 아델라이드>, 1753년
우피치 미술관, 이탈리아 피렌체

 

    여성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라는 이유로 자율성을 억압당할지라도 두뇌로는 사회적 자아를 구성한다. 글을 가까이하는 여성을 남성들이 무서워해 온 이유다. 자신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일이 책을 읽는 것(또는 교육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기에, 글은 여성에게 배제된 자의 자의식을 일깨워 준 절대강령 같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태생적으로 차이와 불평등을 부여받은 여성은 책읽기로 계층 간 불평등을 조장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불평등에 처하는 역설적인 존재다. 삶이 본래 모순과 역설임을 문학이 말해 줄 때 여성은 자신을 포위한 억압의 규범을 한층 잘 독해해 낸다. 봉건적 가부장제에서부터 자본주의 생산양식까지의 과정을 몸소 거쳐 왔으므로.

 

    대영박물관의 서고를 뒤져 본 여성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16세기 이전에는 여성의 이름을 건 탁월한 문학작품이 출간된 적이 없다18)면서 문자의 권위마저 독점한 남성 지배력을 적발해 낸다. 여성은 남성의 저작물에 등장하는 가장 빈도수 높은 “동물”(43쪽)일 뿐이었다. 그 보고서 위에다 우리는 한국판 소네트를 목청 높여 불렀을 걸출한 시인을 올려놓는다. 그 이름은, 16세기 여성 황진이다.

  18)  버지니아 울프, 이미애 역, 『자기만의 방』, 민음사, 2014(1판 26쇄), 64쪽.

 

5. 지속되리라, 배제된 자들의 귀환

 

    자본은 기만적인 환영(illusion)을 마음껏 제조한다. 문화산업은 조직적 전략으로 문학의 체력을 고갈시킨다. 그럴수록 문학은 희망을 무턱대고 믿지 않고, 오래 지속되는 희망을 더 의심한다. 희망은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을 거느린 채 유보된다. 재앙에게 털려버린 여분 같은 희망은 이제 신화 속에서만 산다. 그렇다면 문학에게 무슨 희망이 있는가. 더군다나 문학의 문제가 그 자체 내재성에 있지 않고 문단과 출판 권력에서 비롯한다는 정당방위는 솔직하고도 슬픈, 아울러 자기모멸적인 고해성사다. 바꿔 생각해 보면, 문학의 문제를 문단으로 돌리는 복잡한 사안들은 내적 성찰의 계기는 될지언정, 문단이 문학을 지배하는 절대적 환경이거나 동맹자라는 논리를 성립시키려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문학도 문단도 서로를 반영하는 상징계의 거울임이 분명하므로. 현실적인 것 하나를 짚어 보자. 여성을 상대로 폭력적 낭만을 소비해 온 지배적 타자들에 대해. 그리고 그들에게 대항력을 가질 수 있게 된 게 아주 최근의 일이라는 것에 대해. 불평등에 처한 여성 작가는 이제껏 그러한 재앙을 오직 문학 언어로 체화해 왔다는 사실에 대해.

 

    2000년대 문학의 시작이자 최종 심급은 발화방식과 매체의 다원화다. n 수의 타자들이 디지털 환경 안에서 다중언어를 중얼거린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한 강남역 사건 이후 해시태그 운동이 비등했다. 지금 이후의 문학은 n의 생명성과 권리를 더욱 주체화할 것이다. 개인의 생명윤리가 주권·생태주의와 결합하여 텍스트로서 몸을, 인간이 가장 나중까지 지니는 고유한 몸 윤리의 복잡성을, 존엄을 지키려는 순수체일수록 상처에 노출되는 몸을, 자연 순환체계로 보면 한낱 재료에 불과한 몸을 집요하게 읽어낼 것이다. 문학은 재현의 생명력으로 변형되고, 미메시스의 미메시스로 길쭉하게 전달되면서 유지되지 않을까. ‘카’ 청년이 ‘호’ 아저씨의 아우라를 박탈하고서 외사랑에 빠진 세이렌을 밀어올린 것처럼 저자의 자리도 끊임없이 지워지면서 새로이 채워질 것이다. 그때도 틀림없이 살아 있을 것 하나는 무엇인가? 그것을 문화의 하위체계로 주저앉히는 존재가 있다면 그는 인간의 말을 하지 않는 자임이 틀림없다. 그것은, 다채로운 문학 언어다.

 

    동종(同種)을 배제하면서 이형(異形)의 공존을 꾀하는 것이 문학의 자의식이다. 미래파가 출현하여 충격에 무뎌진 인간의 감각을 극단적으로 소비시켰다. 소모적으로까지 보이는 그들의 시 쓰기를 단지 과거를 망각하려는 동기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시는 어쨌든 읽혔고, 변형물로 살아남았음을 그들이 증명해 줬다. 쇠약해진 우리 시를 발칙한 말로 긴장시킨 뒤 그들은 그 말을 다 쓰지 못한 채 퇴장 중이다. 논란의 치열함은 어떤 면에서 진보의 방식이기도 하다. 미래파 이후 시들은 이전의 피로감을 날려버리는 더더욱 기찬 말들을 몰아오지 않겠는가. 소설은, 여성의 문화·정치 주권화 바람이 거세지고 있음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보편화된 젠더, 그리고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을 더욱 쪼개면서 자폐증적 내부 면적을 밀고 나가 주변 세계와 만나야 한다. 모순적 현실에 필사적으로 반응하는 ‘야생적 사고’(레비스트로스), 무의식에 새겨진 필생의 생명 욕구로 계급적 상황을 녹이는 ‘정치적 무의식’(프레드릭 제임슨)으로.

 

    배제된 자들을 환대하면서 또 다른 배제를 낳는 게 문학이다. 이 시대 우리 문학은 문장을 구성하는 ‘세력’ 없는 것들을 외면했다. 인접어에 기대야만 쓰임새를 표명할 수 있는 언어들, 경망스럽게 남의 흉내나 내는 소리글과 몸짓 글들은 뼈대 굳건한 품사들과 한 줄에 서지 못했다. 감각의 지류가 말소된 문장들, 징징거리는 소리를 내거나, 오글거리는 모양새를 취하거나, 경솔한 품새를 보이는 품사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정황에 소외된 품사들의 이름을 불러 준 비평이 있다. 부사와 형용사들을 불러 모으면서 필자의 언어 사랑을 누설하고 만다. 서영채의 비평적 에세이19)는 ‘같은 것’의 사막에서 ‘다른 것’의 희귀한 광채를 만나게 한다. 오그라든 문장이 펴지고, 내몰렸던 타자들은 힘 있는 품사의 옆구리를 간질이며 사랑스럽게 귀환한다. 이 아웃사이더들을 졸래졸래, 사부작사부작, 방싯방싯 따라가는 시늉만 해도 넘지 못할 글의 국경이 없어 보인다. 블록화 되고 게토화 된 세계의 구석들이 같이 부름 받아 나가는 모양새가 가장행렬처럼 장렬하고 흥이 난다. 이 글은, 우리가 잃어버렸던 가슴을 기어이 되찾아 주고야 만다.

  19)  서영채, 「속물·바보·광인 사이에서, 부사처럼」, 『미메시스의 힘』, 문학동네, 2012, 15쪽.

 

    문학은 가상과 실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자세를 취한다. 흔들리면서 균형의 지평을 찾고, 안정 뒤에는 다시 혼돈을 그리워한다. 문학의 논리는 일쑤 발을 헛딛는 곳에서 찾아진다. 조금은 들뜬 부력을 즐기면서 능동적인 ‘하기’로 활력을 생산하는 것, 그것이 문학이다. 달아나는 상대를 사지를 오그려 붙여 매혹하는 사마귀처럼, 착각하면서 몰입하는 것이 문학 행위다. 문학은 작가가 씀으로써만 말해진다. 정애처럼 문학을 ‘하면’ 글이 말을 하고, 김지영처럼 말을 하면 관계성을 소중하다 여기는 지지자가 받아 적는다. 예술가‘되기’의 생성적 존재론은 본래적 문학‘하기’가 아니고선 성립되지 않는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문화의 ‘훈련’ 덕분에 문학도 발밑의 사정을 바짝 살피게 된다. 그렇게 단련되면서 끈덕지게 생명을 지켜 왔다. 살아남으려는 야생적 몸부림만큼 분명한 진리가 달리 있을까. 문학이 문화의 서브텍스트로 놓이는 것은 자본주의 생산 방식의 모순 탓이다. 그럴수록 문학은 모든 이데올로기의 외압을 벗어나 무의식적으로 유토피아를 꿈꾸면서 앓는다. 그 몹쓸 병의 내압을 기꺼이 감당해 온 당신은 그 정체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작가소개 / 김효숙

2017년 《서울신문》 문학평론 부문 당선.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 수료.

 

   《문장웹진 201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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