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죽음 외 1편

[신작시]

 

 

시인의 죽음

 

 


이현승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하나도 놀라는 눈치가 아니어서 되레 놀라는 방식으로
    문자를 본다. 시인이 죽었다.
    마른 흙에서 몸을 뒤트는 지렁이가 그렇듯
    분별하기 어려운 고통과 쾌락으로 새겨진 한 생이 멈춘 자리

 

    열정에 사로잡힌 병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만 열정이란 신념에 종사하지 않으므로
    시인들은 바람이 고무풍선을 빠져나가듯이
    천천히 저 무미의 내를 건너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이란 가장 빛나던 순간으로 기억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보다 몇 배는 더 길고 무의미한 기다림으로 기억되어야 하는가

 

    꽃과 나비가 하는 일에 일생을 바친 사람,
    조롱과 멸시를 감당하면서 구원에 대해 말한 사람,
    암캐들이나 기웃거리는 수캐마냥 일생 킁킁거린 사람.
    열정과 맹목이 저지르는 가장 극심한 이율배반이
    개미들이 지금 토막치고 있는 지렁이의 몸에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눈이 퇴화된 동물처럼 보라.
    눈이 없는 동물이 눈앞의 장애물에 보내는 주의,
    여전히 그것이 필요하다.
    어차피 희망이 없다면 절망도 없다.
    도착하기 나름으로,
    절망이란 희망의 왼쪽 신발일 뿐이다.

 

    간밤의 지렁이도 비나 새벽이슬을 틈타 여기까지 기어 나왔을 것이다.

 

 

 

 

 

 

 

 

 

 

정오

 

 

    머리통이 익을 것처럼 볕을 내리 쬐는
    태양 아래서는 모든 것들이 골똘하다.
    생각이 생각을 낳고
    생각이 생각을 낳아서
    담쟁이 저리 뻗어나가고

 

    뻗치고 뻗쳐서 멎은 자리
    담쟁이는 담쟁이를 지우고
    생각이 생각을 지워서
    만상이 저리 골똘하다.

 

    만상이 한 점 골똘하다.
    만상의 자리에서 올려다보면
    세상을 태울 듯 불볕을 내리 쬐는 태양도
    한 점 골똘하다.

 

 

 

 

시인 이현승

작가소개 / 이현승

– 2002년 계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 『친애하는 사물들』, 『생활이라는 생각』. 2012년 동료들이 뽑은 올해의 젊은 시인상, 2013년 김달진문학상 젊은 시인상. 현재 계간 ≪파란≫ 편집위원. 한국시인협회 사무총장.

 

《문장웹진 2016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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