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몰랐다 - 김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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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아무도 몰랐다

 

 

김서령

 

 

 

    여자와 남자가 연애를 시작한 건 열여덟 살, L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고입 연합고사 180문제 중 다섯 개만 틀려도 떨어지는, 지방 소재 명문 고등학교였다. 고등학교 입시에서부터 재수를 하겠다고 각오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경쟁률은 높지 않았지만 개교 10년이 지나도록 어마어마한 커트라인은 유지되었다. 해마다 오십여 명의 중학교 졸업생들이 낙방을 했고 그들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소도시의 고입 전문 재수학원 특별반에 등록했다. 재수학원에서는 특별반 아이들에게 학원비를 받지 않았다. L고등학교에 몇 명을 합격시켰는지가 학원의 명성에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합격자 발표가 나자마자 학원 선생들은 불합격생들의 집으로 직접 찾아가 학원등록신청서를 받아왔다. L고등학교 불합격생들은 멀쩡하게 합격한 여타 고등학교의 학생들보다 더 거만한 표정으로 재수학원에 다녔다

 

    여자와 남자는 고입 연합고사에서 똑같이 179점으로 합격했다. 180점 만점자가 둘이나 있었고 179점은 흔한 점수여서 그들은 부모님에게 별다른 칭찬을 듣기는커녕 짜증나서 죽겠다는 핀잔만 들었다.
    "걔들, 만점 받은 애들, 둘 다 중학교에서 전교 3등도 못 했던 애라며?"
    "아무리 입시는 운이라지만…… 너는 어떻게 수학 1번을 틀리니? 제정신이야?"
    초등학교 교사인 여자의 엄마와 중학교 미술 선생인 남자의 엄마는 신경질이 나서 며칠 잠을 이루지 못했다. 36개월에 혼자 한글을 깨쳐 천재 소리 깨나 듣고 자랐던 여자는 중학교 3년 내내 전교 2등으로 성적표를 마무리했다. 전교 1등은 몇 번 했어도 3등은 해본 적 없었다. 그나마 위로가 된 건 한 번도 제대로 이겨 본 적 없어 여자를 우울에 빠뜨리곤 했던 전교 1등 K가 178점을 받았다는 거였다. 그러지 않았으면 입시를 치르고도 짜장면 한 그릇 얻어먹지 못할 뻔했다. 남자는 정말이지 분통이 터졌다. 이제껏 모의고사에서 수학을 틀려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누구나 다 맞으라고 내어주는 1번 집합 문제였다. 한순간 머릿속 나사가 살짝 풀린 모양이었다. 틀렸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해서 남자는 자신이 만점을 받은 줄 알았다. 시험이 끝나고 중학교로 돌아온 후 담임에게도 만점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전교 1등 남자를 기다리고 있던 교장이 짧게 깎은 남자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끄허허헉, 기분 좋은 짐승 울음소리 같은 것을 냈다. 다음날, L고등학교에서 알려온 만점자 두 명 중에 자신의 이름이 빠진 것을 알고 남자는 화장실에 처박혀 조금 울었다.
    "야, 이놈의 새끼야. 내가 어제 선생들한테 너 만점 받았다고 술 다 샀는데."
    이를 앙다문 남자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담임이 웃으며 남자의 귓불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남자의 담임이 술을 산답시고 선생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 남자의 엄마가 찾아가 술값을 지불했다는 것을 말이다. 담임은 "아이고, 안 그러셔도 됩니다. 제가 기분 좋아서 사는 건데요." 빈말을 두어 번 하기는 했지만 적극적으로 남자의 엄마를 말리지는 않았다. 고기값이 많이 나와 선생들이 대충 얼마씩 추렴해 담임의 주머니에 찔러주었는데, 담임은 그때에도 "됐다니까! 내가 산다니까!" 빈말을 또 두어 번 했을 뿐이었다. 여자의 엄마도 몰랐다. 여자가 단짝 친구에게 "내가 시험을 망친 건 다 우리 엄마 때문이야."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자의 엄마는 시험날 새벽부터 일어나 전복죽을 끓였다. 들기름을 넉넉히 넣어 전복 내장을 푸르게 볶은 뒤 불린 쌀을 넣었다. 점심시간에 보온도시락을 열어 본 여자는 기분이 더럭 나빠졌다. 한 숟가락도 먹지 않았다. 사실 가슴이 콩닥거려서 무엇이건 넘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마지막 시간인 과학에서 한 문제를 틀렸는데 여자는 그게 다 전복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시험날 도시락에 죽을 싸주다니. 내가 그래서 죽을 쑨 거 아냐!"
    단짝 친구는 딸 시험을 죽 쑤게 한 여자의 엄마를 두고 함께 분개했다.

 

    그 정도의 성적으로 입학을 했다면 전교생 대부분이 명문대학에 진학해야 할 일이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아이들은 새로운 리그에서 새로운 등수를 부여받았다. 한 반 당 40명, 모두 여섯 반. 전교 1등, 최소한 반 1등이었던 전적은 그저 아름답고 날카로운 추억일 뿐이었다. 주번이 된 아이들은 칠판지우개와 물주전자를 들고 망연해했다. 중학교 시절 늘 반장이거나 부반장이었던 아이들은 생애 처음 주번을 맡았고 쉬는 시간마다 뛰어나가 칠판을 지워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히려 주번 경력이 있는 아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반장도 부반장도 아닌 시절을 겪었다는 것이 이 학교에서는 더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첫 시험에서 전교 4등을 했던 날, 여자의 엄마는 빵 접시가 담긴 쟁반을 던져버렸다. 쟁반은 안방 문짝에 부딪혔고 산산조각이 났다. 사흘이 지나서야 여자의 엄마는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한 번만 더 너를 믿어 보겠다, 였는지 엄마를 더 이상 실망시키지 말라, 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여자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다시는 전교 4등이라는 화려한 성적표를 받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걸. 정말 그랬다. 두 번째 시험에서 여자는 19등을 했다.
    "19등? 너 지금 19등이라고 했니?"
    엄마의 눈에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그렁 올라왔고 여자는 가방을 마루에 내려놓지도 못했다. 여자의 엄마가 다시 물었다.
    "그럼 반에선 몇 등이야?"
    여자는 가방을 고쳐 멨다. 나가라고 하면 나갈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반 등수가 19등이에요."
    세 번째 시험에서 여자는 21등을 했다. 물론 반 등수였다. 그러고는 다시 그보다 나은 성적을 받지 못했다. 눈이 퀭해진 엄마 앞에서 여자는 종종 소리를 질렀다.
    "어차피 누군가는 1등을 하고 누군가는 꼴찌를 하는 거잖아! 나라고 왜 꼴찌를 못 해?"
    새롭게 부여된 등수에 적응을 하지 못한 아이들은 주눅이 들었고, 전학을 보내 달라 부모에게 떼를 썼고, 고액과외를 시작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여전한 열등생으로 남았다.
    남자는 전교 6등 밑으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즉 반에서 1등은 여차저차 유지했다는 말이었다.

 

    여자와 남자의 연애가 시작된 것은 학교 후문 앞이었다.
    밤 10시가 되면 야간자율학습이 끝났지만 아이들은 대부분 하교하지 않았다. 상위권 아이들은 등수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더 오래 남아 공부를 했고, 하위권 아이들은 집에 가봐야 성난 부모들의 눈총을 받을 일이 빤해 더 오래 남아 시간을 때웠다. 아이들이 생각하는 적절한 하교 시간은 밤 12시였다. 일찍 돌아가는 아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스쿨버스 기사는 10시에 아이들을 실어 나른 뒤 퇴근을 했기 때문에 부모 중 한 명이 픽업을 해줄 수 없는 아이들은 별수 없이 교실을 나섰다. 여자의 아버지는 매일 여자를 데리러 왔다. 남자는 데리러 올 사람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데리러 올 사람이 없어 일찍 하교하는 아이들 틈에 끼어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기에 12시 15분까지 학교에 남았다. 다른 아이들보다 15분 늦게 나가는 건 차를 타고 하나하나 사라지는 아이들을 쳐다보는 일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사십 분쯤 걸어 집에 도착했다. 여자의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졸다가 늦게 오는 날이 잦았다. 아이들이 거의 다 사라진 후문 앞에 혼자 서 있다 보면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꼭 후문 앞에 다다라서야 운동화 끈을 고쳐 맸고 마른세수를 했다. 요이땅, 하고 뛸 준비를 하는 사람 같았으나 물론 뛰지는 않았다. 하릴없이 기다리고 선 여자를 지나쳐 갈 길을 서두르던 남자는 어느 날인가부터 후문 앞에서 뭉개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여자와는 조금 멀찍이 떨어져 서 있기만 했다. 서너 번 그런 일이 있은 후에야 여자는 알 수 있었다. 혼자 있는 나를 기다려주는 거구나. 같은 반도 아니었고 말도 섞어 본 적 없었다. 별이 낮게 내려앉은 후문 앞에 혼자 서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
    "아, 진짜 미안! 아빠가 깜빡 잠들었어!"
    여자는 차문을 열다 말고 남자를 불렀다.
    "같이 갈래?"
    머쓱해하는 남자에게 여자가 다시 말했다.
    "밤인데도 덥잖아. 그냥…… 같이 가자."
    그날 이후로 졸업을 할 때까지 두 사람의 동승은 계속되었다. 여자의 아버지는 비밀을 지켜주었다. 대신 여자는 아버지의 흡연을 엄마에게 고해바치지 않았다. 여자의 아버지는 둘을 태워 주는 동안 차창을 연 채 네댓 개비 담배를 피웠고 집 앞에 차를 주차한 뒤 한 대를 더 피우고 들어갔다. 여자와 남자는 자동차 뒷좌석에서 가방으로 가린 채 처음 손을 잡았고 후문 앞 기둥 뒤에서 첫 키스를 했다. 둘 다 서툴러서 자꾸 앞니를 부딪쳤다. 마른 편이었지만 한창 먹을 때라 여자는 엄마가 간식으로 챙겨 주는 커다란 샌드위치 두 개를 매일 남자의 사물함에 넣어 두었다.
    "어떻게 100등 안에도 못 드냐?"
    시험 결과가 나올 때마다 남자는 여자에게 밉지 않을 만큼의 면박을 주었다. 100등까지만 결과를 복도에 붙이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여자의 성적은 이미 200등 밖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말이면 시립도서관에 같이 갔다. 시립도서관 열람실은 밤 9시면 문을 닫았다. 여자와 남자는 8시에 도서관을 나와 어두운 골목길을 걸었다. 더 어두운 골목이 있었으면 했지만 두 사람이 원하는 정도의 어두운 골목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기어이 가장 어두운 정도의 골목길을 찾아 고양이들처럼 숨어들면 남자는 여자의 가슴을 헤집었고 여자는 남자의 목을 껴안았다. 키가 큰 남자의 단단해진 아랫도리를 배꼽 근처에서 느끼며 여자는 언제쯤 스무 살이 되려나 생각했다. 브래지어 위로는 여자의 젖꼭지를 느낄 수가 없어 남자는 애가 탔다. 밤마다 연분홍색 여자의 젖꼭지를 상상하느라 새벽녘이 되면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엄마들이 둘의 연애를 진작 알아챘다는 것을 그때의 둘은 몰랐다.
    여자의 아버지는 딸의 연애를 애초에 털어놓았다. 여자의 엄마가 입을 다문 건 공부 잘하는 남자와 어울리다 보면 성적이 좀 오르겠지 기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설사 성적이 오르지 않더라도 손해 볼 것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가만히만 둔다면 딸은 서울대에 다니는 남자 친구를 가질 수 있는 것이고 여차하면 서울대 출신의 사윗감이 절로 굴러 들어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자의 엄마는 달걀프라이 한 개씩을 끼워 넣던 샌드위치에 햄도 넣고 멸균우유를 세 개씩 싸주었다. 남자의 엄마도 둘의 연애를 말리지 않았다. 남자에게는 아버지가 없었고 피곤에 전 남자의 엄마는 매일 밤 12시에 아들을 데리러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은 단단히 그어 놓고 싶었다. 그래서 여자의 엄마가 근무하는 학교로 전화를 걸었다.
    "저는 뭐, 그 나이 때에 예쁘고 순수하게 만나는 것, 굳이 반대하지 않습니다."
    "네, 그럼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스무 살 넘어 애들이 연애라도 하면 모를까, 벌써부터 엄마들이 못 만나게 하고 그러는 것도 오버가 아닐까 싶고요."
    "네, 그렇죠."
    "둘이 같이 신림동 나란히 가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신촌에도 좋은 대학 있고……. 저야 어려운 시절에 학교를 다니다 보니 그런 추억이 없어요. 그래도 요즘 애들은 서로 학교 친구들도 소개해 주고 그러면서 인맥도 넓히고 그러잖아요?"
    여자의 엄마는 슬슬 배알이 꼬이기 시작했다. 어디서 공부 잘하는 아들 가진 유세인가 싶었다. 이 여자 어느 대학 출신이지? 알음알음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애다 보니…… 숙대 정도만 가도 괜찮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 잘하면야 좋겠지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숙대 정도만이라니.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망할 계집애. 아침 드라마의 못된 시어머니 자리 흉내나 내고 있는 남자의 엄마가 고까워 여자의 엄마는 그날 밤 12시 반이 넘어 돌아온 여자의 등짝을 별 이유도 없이 세 번이나 내리쳤다. 여자는 제가 얻어맞은 이유를 끝끝내 알 수 없었다.

 

    둘은 마침맞게 어두운 장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낡은 연립주택 건물이었다. 3층까지 오른 뒤 계단을 반 바퀴만 더 오르면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옥상 문은 잠겨 있었고 그 계단참에 몸을 숨기면 당분간은 아무에게도 들킬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곳에서 남자는 처음으로 여자의 젖꼭지를 만질 수 있었다. 지나치게 어두웠지만 그래도 연분홍색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겨울이었는데 말이야. 초등학교 4학년이었어. 열한 살. 시내에 중앙만두집 알지? 거기 만두가 그렇게 먹고 싶었어. 내가 뭘 그렇게 조르는 편이 아닌데, 그날은 아주 줄기차게 졸랐다? 천 원만 달라고. 만두를 사오겠다고. 그때 만두가 천 원이었거든. 끝내 천 원을 얻어서 만두를 사러갔어. 추워서 점퍼 입고, 두꺼운 장갑 끼고. 그런데 장갑이 너무 두꺼웠던 거야. 손에 쥔 천 원을 떨어뜨린 줄도 몰랐던 거지. 그 천 원을 다시 찾겠다고 눈 내리는 거리를 내내 걸었어."
    여자는 눈물이 날 뻔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귀여웠겠다, 그때 너."
    남자가 말했다.
    "아니. 지옥 같았어."
    어두워서 눈물을 들키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여자는 추위에 하얗게 질린 채 천 원짜리 한 장을 찾겠다고 눈길을 헤맨 남자가 가여워 미칠 것만 같았다.
    "나는 왜 아버지도 없고, 천 원도 없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그땐 상관이 있었어. 나는 아무것도 없이 가난한 소년인 것 같았어."
    남자는 가방에서 필통을 꺼내 낡은 볼펜 한 자루를 보여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주신 거야. 스무 살 되면 쓰려고 했는데, 얼마 전부터 쓰기 시작했어."
    은색 파카 볼펜이었다.

 

    여자와 남자는 이후로도 오래 만났다. 남자는 서울대생이 되었고 여자는 내세울 것 없는 서울의 한 여대에 진학했다. 남자의 학교 근처 여관에서 처음으로 섹스를 했고 여자의 학교 앞 주점에서 처음으로 맥주를 마셨다. 월말이 되면 일주일에 세 번도 넘게 여관엘 갔다. 둘 다 매달 25일에 용돈을 송금 받았기 때문이었다. 2주 정도가 지나면 여관에 갈 돈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남자는 지하철이 끊기기 전에 기숙사로 돌아갔고 용돈을 받기 전 마지막 주가 되면 아예 여자에게 오지도 않았다.
    "네가 좀 와. 아니면 다음 주에 보든가."
    기분이 나빠진 여자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동시에 가고 싶었다. 약이 오르는 것과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내켜하지 않는 남자를 불러내 그의 학교 앞에서 막 배우기 시작한 소주를 몇 잔 마시고 나면 금세 지하철 막차 시간이었고 여자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너는 왜 이렇게 생각이 없니? 왜 마음 가는 대로 막 행동하는 거야?"
    마치 어른인 양 구는 남자가 얄미워 여자는 엉엉 울었다. 남자는 여자를 주점에 앉혀 둔 채 근처에 사는 선배에게서 돈을 빌려왔다. 가장 허름하고 가장 싼 여관을 찾아 들어간 후, 둘은 마치 신혼부부처럼 싸워댔다. 신혼부부로 살아 본 적은 없지만 신혼부부들이란 매일 피가 터지도록 싸운다니 아마 신혼부부처럼 싸운다는 표현이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너, 나랑 헤어지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
    여자의 앙칼진 질문에 남자는 기가 막혔다. 남자는 여태 여자 외에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어 본 적 없었다. 후문 앞, 어두운 밤에 혼자 선 여자를 보고 그저 막연히 저 아이가 무사히 집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겠다 생각한 이후부터 그랬다. 사랑이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의리 같은 것이 아닐까 막연히 생각했던 것이다. 걸핏하면 징징 울고 걸핏하면 따져대는 여자가 못마땅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사소한 이유로 헤어질 수는 없었다. 더 큰 어른이 될 때까지 남자는 여자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야말로 그런 거 아냐? 나랑 헤어질 핑계 찾는 거 아냐?"
    여자는 더 크게 울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헤어지고 싶은 적이 많았다. 다정하지도 부드럽지도 않고 고등학교 시절처럼 여자를 안고 싶어 안달복달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화가 났다. 충만하게 사랑받는 느낌 같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여자는 헤어질 수 없었다. 여자에게도 사랑은 의리 같은 것이었다. 그 의리를 지탱하는 것이 여자에게는 연민이었다. 열한 살 소년의 장갑 낀 손바닥 안에서 사라져 버린 천 원짜리.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아버지와 천 원짜리. 다시는 남자가 그런 상실감을 느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사랑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만났다.

 

    하지만 그때 여자는 몰랐다. 남자가 어두운 연립주택 꼭대기 계단참에서 그 이야기를 꺼낸 진짜 이유를 말이다. 남자는 잔뜩 애가 말라 있었다. 계단참 자리를 찾아냈을 무렵 둘의 스킨십은 점점 대담해져 가고 있었다. 교복 스커트 아래 여자의 맨살 허벅지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기어이 여자를 졸라 마스터베이션을 몇 번 할 수 있었다. 조그마한 여자의 손이 철없이 솟아오른 페니스를 쓰다듬으면 남자는 정말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여자가 그 일을 질색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손을 적시는 끈적한 액체에 여자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 남자는 최선을 다해 여자를 안아 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급기야 여자는 연립주택 입구 앞에서 몸을 빼기도 했다. 그때 꺼낸 만두집 천 원 사건은 매우 적절했다. 남자가 가여워서 견디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여자는 남자의 페니스를 어루만졌다. 모자란다 싶을 때 은색 파카 볼펜 이야기도 꺼냈던 것이다. 그렇다고 만두집 천 원짜리 사건이 거짓말인 건 아니었다. 눈이 온 것까지는 아니었고 대충 길을 헤매고 다니다 집에 돌아와서 엄마에게 머리통을 몇 대 쥐어 박혔다. 어릴 적 한 번쯤은 겪을 수 있는 일이었고 그리 서러운 기억은 아니었다. 은색 파카 볼펜은 아버지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임종 즈음 병원에 찾아왔던 작은아버지가 흘리고 간 것이었다. 비싸 보였고 딱히 돌려줄 만한 기회도 없었기 때문에 가지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둘은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몰랐다. 사람들은 서로가 지겹거나 미워질 때 큰 미련 없이 헤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다들 지겨운 것을 참고 미워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사랑을 하는 줄로만 알았다. 짧게는 두 달, 길게는 여섯 달, 일곱 달이 되도록 데이트를 거른 적도 있었지만 둘은 여전히 애인 사이였다.
    "아유, 징그러워. 십 년도 넘게 만나는 걸 보면 쟤들은 진짜 사랑하나 봐."
    친구들이 비아냥거리면 여자와 남자도 함께 비아냥에 동참했다.
    "사랑은 개뿔."
    그러면서도 헤어질 줄을 몰랐다.

 

    서른 살이 넘으면서부터는 일 년에 두세 번씩 헤어졌다. 헤어지는 이유는 싱거웠고 또한 다채로웠다.
    "넌 애초부터 그랬어. 내가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에도 비웃었잖아. 내가 하는 일은 다 우습지? 너만 잘난 것 같지?"
    여자가 대학원에 진학한 것은 스물다섯 살 때였다. 그렇게 5년도 지난 일을 가지고 새삼 헤어지기도 했고 늦은 퇴근 후 야식을 시켜먹자는 남자의 말에 "아우, 집에서 뭐 시켜먹으면 냄새 나. 니네 집에 가서 먹어."라고 여자가 대답을 하는 바람에 헤어진 적도 있었다.
    "너랑 만나는 일, 정말 자괴감 느껴져."
    남자의 말에 여자는 솟구쳐 오르는 짜증을 겨우 눌러 참으며 입속으로만 "별……" 웅얼거렸을 뿐이었는데 남자는 그걸 알아듣고야 말았다.
    "별? 별 뭐? 끝까지 말해 봐!"
    아마 서른세 살이었을 텐데, 그때의 냉전은 꽤 오래갔다. "별 웃기는 소릴 다 하고 있네. 족발 안 시켜 준다고 자괴감?" 그렇게 비웃어 주지 못한 것을 여자는 오래도록 후회했지만 진짜로 그 말을 뱉었다면 둘은 아마 회복되지 못했을 것이었다.
    남자는 병역특례를 마친 뒤 자동차회사 연구원으로 입사했고 취업시험에 번번이 떨어진 여자는 일단 대학원에 들어가 시간을 대충 벌었다. 영문학을 전공한 여자가 IT 스타트업 회사에 통역 직으로 들어갔을 때 남자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몇 년 다니고 말 것도 아닌데 오래 다닐 회사를 찾아야지. 넌 정말."
    하지만 서른 살을 넘어서면서부터 남자는 여자 앞에서 그리 자신만만해하지 못했다. 여자의 회사는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고 서른네 살이 되었을 때에는 남자의 연봉을 저만치 앞섰다. 여자가 한 회사에서 착실하게 호봉을 높이고 있는 동안 남자는 네 번이나 이직을 했는데 희한하게도 자꾸만 별 볼 일 없는 곳으로 이직을 하는 기이한 행보를 보였다.

 

    여자는 몰랐다. 남자는 여자와 헤어질 수가 없었다. 지금 헤어진다면 말 많은 친구들은 여자의 높은 연봉을 견디지 못한 촌스러운 남자의 자존심 탓이라고 생각할 것이 빤했다. 촌스러운 남자가 될 수는 없었다. 남자도 몰랐다. 여자는 자신보다 못 나가는 오랜 애인을 버린 파렴치한 사람이 되기 싫었다. 그래서 헤어질 수가 없었다. 변변찮은 남자의 연봉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마침맞게 그런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 싫었던 것이었다. 여자와 남자는 가끔씩 하는 데이트에서 서로의 일과 미래를 이유도 없이 추어주다가, 그나마도 내키지 않으면 토라졌고 또 헤어졌다. 그러다가 둘은 서른여덟 살이 되고야 말았다.

 

    "내가 대학원에 간다고 할 때 니가 뭐랬어? 왜 그렇게 인생에 책임감이 없냐고 그랬지?"
    여자는 바락바락 악을 썼다.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근데 이게 다 뭐야?"
    여자가 손에 들고 흔든 건 수능문제집이었다. 남자의 19평 전세 아파트에서는 수능문제집이 열 권쯤 발견되었다.
    "너도 대학원엘 가서 일이 잘 풀렸잖아. 나도……."
    "내가 대학원에 가서 잘 풀렸어? 그렇게 생각해? 난 그냥 쪽팔려서 대학원엘 간 거야! 취직도 못 하고 백수건달 되는 게 부끄러워서 간 거라고."
    "늦지 않았어. 난 지금이라도 길을 바꿀 거야."
    여자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니 나이 서른여덟에 의대를 가겠다고? 너야말로 왜 그렇게 인생에 책임감이 없니?"
    "그게 왜 책임감의 문제야?"
    책임감의 문제는 아니었다. 여자도 알고 있었다. 다만 화를 내고 싶었다. 열여덟 살에 만나 사랑에 빠지고 서른여덟 살이 되도록 발목에 대롱대롱 매달린 지지부진하고 지리멸렬한 사랑, 그런 것을 이제 끝장내고 싶기도 했다. 정말 사랑을 하기나 하는 건지, 이런 것도 사랑이라 쳐야 하는 건지 누가 좀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남자도 지지 않고 대거리를 했지만 그의 논리는 애초부터 역부족이었다. 의대 입시를 준비하는 것이 맞는 일인지조차 스스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남자의 대거리는 어버버버, 모자란 녀석의 몸부림 같기만 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여자는 이제 정말 끝내자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래서 의자를 끌어 남자의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았다. 고개를 든 그는 굴에 갇힌 가엾은 아기 곰 같았다.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입술을 옴짝이던 여자가 내뱉은 소리는 이것이었다.
    "그냥…… 결혼하자. 이럴 거면. 이렇게 살 거면."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남자도 입술을 옴짝이다가, 대답했다.
    "그러자. 그냥 그래 버리자."

 

    남자는 몰랐다.
    그날 남자를 만나기 전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자에게는 종종 만나는 개발자가 있었다. 약삭빠르고 진중하지 못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애인이 될 생각이 없었기에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회사 근처 이자카야에서 사케를 몇 잔 마신 뒤 함께 자는 게 다였다. 의도도 없이 1년쯤 지속된 관계였다. 그러는 동안 개발자의 애인도 두어 번 바뀌었고 여자도 남자와 몇 번 헤어졌다 다시 만났다. 새로 생긴 개발자의 여자 친구는 정말이지 끝내줬다. 아주 회사가 떠들썩하도록 난동을 부렸다. 너 저런 애를 왜 만나니, 진심으로 개발자를 앉혀 놓고 충고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삼각관계의 당사자로 지목당한 이상 여자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여자의 참을성이 조금만 덜했더라도 당장 사표를 던지고 나왔을는지 몰랐다. 동료들 보기에 면이 서지 않았다. 잡아뗄 만큼 잡아떼다 결국 개발자를 세상에 없는 바람둥이로 몰아가는 방법을 택하고야 말았는데 그것에 마음을 다친 개발자 녀석이 전화를 걸어왔다.
    "너 뭐냐, 너 걸레냐?"
    아무리 생각해도 흉측한 일이었다. 걸레 운운 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왱왱 맴돌아 남자의 집을 찾아갔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기 곰처럼 가련한 얼굴로 여자를 쳐다보는 남자를 보자, 회사 내의 추문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결혼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여자는 이제 연애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싶었다.

 

    여자도 몰랐다. 남자에게 다른 애인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새 애인은 고교 동창 K였다. 그러니까 중학교 시절 전교 1등 자리를 내놓지 않아 여자의 애를 마르게 했던 그 K 말이다. 명문여대 법대를 졸업하고 고등학생들 과외를 뛰고 있는 K와 남자는 일주일에 한 번쯤 만났다. K는 남자의 하소연을 잘 들어주었다. 의대나 갈까 봐, 라는 남자의 말에도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K는 수수했고 다정했다.
    "나 공부 참 열심히 했는데. 그랬는데 아직 변두리 동네 19평 전세가 다야. 그것뿐이야."
    K는 남자의 말에 깜짝 놀란 듯했다.
    "정말 부모님 도움 하나도 없이 혼자서 전셋집을 마련한 거야? 역시, 어릴 때부터 대단하다 싶었어. 난 아직 원룸 신세인걸. 사법시험 준비한답시고 까불다가 이렇게 됐지, 뭐."
    K가 성실하고 똑똑했다는 것을 남자도 잘 알고 있었다. 성실하고 똑똑해 봐야 별 볼 일 없는 어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K도 알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의대에 다시 가느라 한참을 허송세월한다 해도 소박한 K는 기다려 줄 것 같았다. 변두리 동네 19평 전세 아파트에서 함께 살자 해도 기쁜 얼굴로 그러마고 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남자가 결혼을 하자는 여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건 그게 더 나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올해 안에 바짝 공부를 해 의대에 합격을 하더라도 결국 십 년 공부였다. K는 지켜보아 주겠지만 도와줄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자는 달랐다. 둘이 살던 전셋집을 합쳐 넓고 쾌적한 곳으로 옮길 수도 있었고 생활비 걱정 없이 공부에 전념할 수도 있었다. 여자가 은퇴를 할 즈음 남자가 개원을 해서 그간 진 마음의 빚을 갚으면 될 일이었다. 20년의 애정은 아무리 보잘 것 없다 한들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남자로서는 끄덕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20년을 연애하고 결혼까지 하다니, 정말 참신하다."
    친구들은 너나없이 신이 나서 나불거렸다. 두 엄마들은 몇 번의 신경전을 거쳤으나 곧 서로 크게 손해나는 일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했고 남자는 미련 없이 수능 공부를 접었다. 둘이 합친 돈이 꽤 된다는 것을 깨닫자 굳이 그 돈을 의대 공부에 처박기가 싫어진 탓이었다. 결혼 준비는 순조로웠다. 그건 둘 다 심드렁했기 때문이었다. 둘의 집 중 그래도 더 넓은 여자의 집을 신혼집으로 결정했고 가구도 둘이 가진 것 중 더 나은 것을 골라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신혼여행지도 대충 골랐다. 남자는 여행을 죽도록 싫어했고 여자는 어지간한 여행지를 이미 다 가보아서 그냥 가까운 일본 온천에서 사흘만 보내기로 했다. 액세서리를 싫어하는 여자의 취향 때문에 예물은 반지 하나씩만 나누어 끼었다. 그래도 그것만큼은 꽤나 비싼 브랜드로 골랐다. 반지는 너무나 거치적거린다며 차라리 목걸이를 하는 게 낫겠다고 남자가 투덜거렸지만 여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깨알만 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반지는 말도 안 되게 비쌌지만 다른 자잘한 일들에서 여자가 양보를 해준 게 많았으므로 남자도 더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여자의 추문은 생각보다 쉽게 사그라들었고 K도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와 남자는 아무런 풍파 없이 20년을 오로지 사랑만 해온 사람들처럼 말짱한 얼굴로 결혼 준비를 쓱쓱 해치웠다.
    결혼식은 결코 조촐하지 않았다. 삼십대 후반, 딱히 놀 거리가 없었던 고교 동창들이 모조리 몰려왔고 20년 근속을 한 여자의 회사 동료들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남자는 고향 어른들을 버스 세 대로 몽땅 실어왔다. 5만 5천 원짜리 떡갈비 스테이크가 700접시나 나갔다. 축의금은 고스란히 떡갈비 스테이크 값으로 나갔고 여자와 남자는 식장 앞 100평짜리 호프집을 통째 빌렸다. 남자는 술을 많이 마셨다.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들을 배웅하러 지하 호프집 계단을 오를 때마다 비틀거렸다.

 

    남자의 결혼반지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은 것은 그때였다.
    "반지 어쨌어?"
    여자의 말에 남자는 술이 번쩍 깬 듯했다.
    "반지? 어? 어디 갔지?"
    반지를 낀 손가락이 갑갑하다는 둥 흰소리를 지껄이며 몇 번을 꼈다 뺐다 하는 것을 여자도 멀찍이서 지켜본 터였다. 불안하다 싶기는 했지만 결혼식이 끝난 지 열 시간도 되지 않아 잃어버리다니. 여자는 기가 막혔다. 여자와 남자는 한 무리의 친구들이 떠나는 모습을 다 지켜보지도 못하고 호프집으로 뛰어 내려갔다. 남자가 앉았던 테이블마다 달려가 반지의 행방을 물었지만 찾을 수 없었다.
    "반지? 아까 바닥에 떨어뜨렸댔잖아. 못 찾았어?"
    그렇게 말한 건 K였다. 남자는 머리를 긁적였다. 반지를 떨어뜨린 것 같기도 했고 도로 주운 것 같기도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식장에 와서 동창들과 어울려 주는 K가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해서 폭탄주를 여러 잔 받아 마시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취기가 오를 줄이야. K 앞에서 반지 이야기를 더 하기도 무엇 해서 남자는 테이블을 떠났다. 여자는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다가 자리를 떠나버렸다. 동창 녀석 하나가 남자의 곁에 서서 중얼거렸다.
    "이건 십 년짜리다."
    한 녀석이 더 말을 보탰다.
    "십 년짜리긴. 이건 삼십 년짜리지. 무병장수한다면 오십 년짜리도 될 수 있어. 넌 이제 죽었다. 결혼식 날 결혼반지를 날려먹다니. 진짜 이 커플은 놀라워."
    피로연 비용은 공동 통장 잔고에서 쓰기로 약속했지만 남자는 슬그머니 제 카드를 꺼냈다. 조금이라도 덜 욕먹는 방향으로 가야 했다. 삼백만 원 술값을 6개월 할부로 그었다. 속이 쓰렸다. 그래도 여자가 눈을 매섭게 한 번 흘긴 후 남자의 머리통을 껴안아 줘서 다행이었다.
    "앞으로 미친놈처럼 나한테 충성해!"
    남자는 프러포즈를 받던 그날처럼, 가련한 아기 곰을 닮은 얼굴로 헤벌쭉 웃었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혼자만 바람둥이 취급을 받은 개발자 녀석은 여자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결혼식 훼방을 놓은 대가로 설령 회사를 더 못 다니게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젊고 똘똘한 개발자를 찾는 회사는 얼마든지 있었다. 이직은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술에 취한 남자가 화장실에 가는 것을 보고 따라나섰다. 남자가 소변기 앞에 섰고 개발자는 화장실 칸막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전화를 거는 척을 했다.
    "시발, 걸레 같은 년이 시집을 다 가네. 그래, 그년. 지금 피로연 중이야. 남편 새끼는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그년이 어떤 년인지도 모르고. 걸레 같은 년인데."
    개발자는 점점 목소리를 크게 냈다. 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어서 등이 서늘해 왔지만 자신이 회사에서 받은 수모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밖은 조용했다. 물소리도 나지 않았다. 놀랐나 보군. 지금 나가면 한 대 맞게 될까. 조금 있다가 나갈까. 개발자는 변기에 앉아 숨을 골랐다. 여전히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K도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가진 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피로연 테이블에 나타난 남자는 K를 보고 몹시 놀란 듯했다. K는 예의 그 소박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엉거주춤 자리에 앉는 남자에게 술도 따라 주었다. K와 남자가 몰래 만나 왔다는 것을 아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언젠가 K는 동창 모임에서 여자가 농담이랍시고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마흔 살의 여자는 두 종류로 나눠져. 아파트에 사는 여자, 그리고 원룸에 사는 여자."
    그날 미혼의 여자 동창들은 꺄아악 소리를 질러댔다.
    "뭐야! 가슴이 확 쪼그라드는데? 마흔이면 우리 얼마 안 남았잖아!"
    "야, 그런 말 무섭다, 좀."
    그러면서도 깔깔대는 친구들을 보며 여자는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긴장 좀 하며 사시라고들. 우리 금방 마흔이야."
    K는 살면서 그토록 치욕적인 농담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보증금도 다 깎아먹은 월세 집은 곧 비워 주어야 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대학 시절부터 시작한 사법시험 공부는 K의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사법시험 패스가 영영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건 서른두어 살 무렵이었지만 그때에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녀가 취직을 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이력서 한 줄 채울 수 없는 인생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K는 사법시험 공부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로스쿨 입학시험마저 떨어진 K에게 19평 전세 아파트를 가진 남자는 구원 같았다. 남자의 단단한 팔뚝 아래로 파고들어 곤한 잠을 자고 싶었다. 남자와 이미 두 번이나 잔 이후였다. 남자가 실수라고 우긴다면 할 말은 없었지만 K는 앞으로라도 남자를 깊이 사랑하고 싶어졌다. 그의 19평 아파트로 숨어들고 싶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몹시 공손한 표정으로 K에게 이별의 말을 전했다. K의 전화라면 아예 받기도 싫어하는 엄마나 언니에게 그래도 연락을 넣어 월세 낼 돈을 빌려야만 했다. 지긋지긋한 인생이었다. 그렇다고 보복을 결심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가 K의 테이블로 와서 술을 마시고 반지를 만지다 떨어뜨렸다. 정말이다. 주워주려고 했다. 바닥을 구르는 반지가 손에 닿는 순간 가슴 한 곳이 빠르게 식었고, 반지는 아주 천천히 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K로서도 뜻밖의 일이었다.
    주먹 속에 감춘 반지는 가방 속주머니로 얌전히 옮겨 놓았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 여자를 직접 만나 돌려줄 것이었다. 왜 네가 가지고 있냐고 여자가 묻는다면 K는 대답을 하지 않을 참이었다. 그냥 조용히 미소 지을 것이었다. 몰라서 묻니? 그 사람, 이 반지 끼기 싫어했어. 그런 표정으로 여자를 오래 쳐다볼 것이었다. K는 피로연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 가방을 옷장에 처박았다. 반지를 꺼낸다면, 밀린 월세 걱정에 그걸 팔게 될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사소하게 써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노랗게 질린 여자의 얼굴을 제 눈으로 꼭 보고 싶어서 참고 또 참았다. 가방은 옷장 속에서 오래 묵었다.

 

    그래서 아무도 몰랐다.
    술에 취한 남자가 화장실 안쪽 칸에서 주절주절 떠드는 개발자의 소리를 하나도 듣지 못했다는 것을, 번잡한 골목을 돌아 허겁지겁 원룸으로 숨어드는 K의 뒤에 붙어 서서 잭나이프로 가방을 긋는 청년이 있었다는 것을. 남자도 K도, 아무도 몰랐다.
    뒤늦게야 화장실 칸에서 나온 개발자는 두근두근 떨리는 가슴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달아났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여자의 표정은 지쳐 보였지만 이혼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참을성이 강한 남자인 건지 쇼윈도 부부로 남을 작정인 건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반지를 훔친 소매치기는 반지 안쪽에 새겨진 이니셜을 갈아내고 중고매장에 팔아넘겼다. 보증서가 없어서 제값을 받지는 못했지만 제법 큰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K는 반지를 팔고 싶은 마음을 여태 꾸역꾸역 참는 중이었다. ■

 

 

 

 

 

 

 

 

 

 

 

 

 

 

 

작가소개 / 김서령

1974년 경북 포항 출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대산창작기금·아르코창작기금 등 수혜.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디로 갈까요』, 장편소설 『티타티타』,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 등 출간. 『빨강머리 앤』, 『에이번리의 앤』,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두 번째 이야기』 등 번역.

 

   《문장웹진 2018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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