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여성이었는가 - 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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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in문학]

 

<새로운 시대, 문학의 키워드>
 

'여성, 노동'같은 전통적인 주제에서 시작해 '문체, 주체'와 같은 비평 키워드나 '번역, 상호텍스트성'같은 문학적 키워드, '환상, 무의식'같은 인접학문 그리고 '빅데이터, 가상현실'같은 미래용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학의 키워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비평in문학]의 새로운 비평 기획입니다.

 

 

 

왜 여성이었는가

 

 

 

박진영

 

 

 

 

0.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는 프로이트의 전언은 이번에도 옳았다. 최근의 다양한 젠더 이슈들은 그동안 억눌러 온 젠더 불평등의 임계점을 그대로 현상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김지영이다!"의 격한 공감이 아니더라도, 최근 페미니즘이 주류 정치 담론이 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성 정체성 정치가 오랫동안 한국 사회와 한국 문단을 지배해 왔음을 감안한다면, 억압과 폭력의 빗장을 풀고 온 여성들의 회귀, 새로운 여성 서사의 도착이 반갑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이슈는 이슈만이 아닌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올 인식론이 되어야 하며, 여성 서사는 여성만의 페미 소설이 아닌 인간 해방을 추구하는 자유의 스토리가 되어야 함을. 성 평등이 너무 당연해서 페미니즘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그날까지, 문학이 삶의 정치성과 현실의 복잡 모호함을 더욱더 온당히 드러내 줄 때까지 말이다.

 

1.
    『82년생 김지영』(2016, 민음사)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소설의 대중적 성공은 다수의 패러디 정책광고, 독자시민의 서평 올리기 문화 등을 통해서도 입증된 바 있지만, 공감/연대의 목소리 못지않게 비판/비난 또한 무성한 게 사실이다. 문학 장의 입장 또한 주지하다시피 (현실) 재현과 (작품) 미학의 문제를 둘러싼, 메시지 '효과'와 완성도의 '결함'을 중심으로 논의가 활발하다. 현실에서 '빤히' 작동하는 젠더 위계와 젠더 불평등을 다소 '빤하게' (아니 사실은 보고서라는 비문학적 형식을 통해) '재현'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문학적'인가, 새로운 '의미'를 갖는가, '미적'인가의 의문이 그것이다. 이 지점은 얼핏 문학 본연의 기능에 대한 낡은 질문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문학성'을 잣대로 『82년생 김지영』을 재단하기 전에 점검할 것은 페미니즘적 신념에 의해 현실 질서의 변화를 갈망하는 소설, 문학이 있다면, 이를 여혐민국에서의 여성의 삶의 리플릿(일 뿐)이라고 차치할 것인가의 문제다. 페미니즘에 대한 정신적 멤버십이 있건 없건, 온당하지 않은 현실의 심각성이 도드라질 때, '이상한 여자'들이 활보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절실할 때, 삶/현실에 대한 알터 에고의 존재처럼 섬세하고 높게 쌓아올려진 심미적 성채를 문학의 본연이라(고만) 하기엔 허전함과 민망함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지영'은 하나의 증상이라 할 수 있다. 증상에는 당대의 정신구조가 새겨진다. 그것은 포스트 트루스(post-truth) 시대에 개인의 일상과 내면에 틈입한 제도화된 의미구조의 단면을 증언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지젝의 말을 빌린다면 증상 없는 삶, 보편성, 법과 질서는 불가능하다. "증상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무(無)"1)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증상의 합리화를 위함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증상이 체계의 허위를 드러낼 뿐 아니라, 불평등한 권력의 배분과 배제를 가시화함으로써 새로운 '충동'의 역할, 변화와 개혁의 조짐을 이끌어내는 가능성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억압된 것의 회귀 내지 결과만이 아닌, 가부장제-자본주의라는 전체성, 지배 이념에 내재하는 균열의 지점으로서, 부정성의 내적 동기를 새로운 힘의 배치로 외화하기 위한 하나의 토대가 되는 셈이다. 지금 여기 한국 사회에서의 '김지영'이라는 증상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은 공원에서 1500원짜리 커피를 마시는 여성에게 덧씌우는 "맘충"과 같이 막말하는 왜곡된 편견을 교정하게 할 뿐 아니라, 젠더 불평등의 익숙한 구조를 내파하고, 문학의 자율성이라는 오랜 폐쇄적 신화를 재고하게 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의 하나는, 특별할 것 없는 '김지영'의 삶/소설이 현실의 모순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강력한 공감과 연대를 이끌어냄으로써 사회 변혁의 역할을 담당하는 하나의 증명사례가 되었다는 점이다. 기존의 문학, 예술의 자율성의 신화가 심미적으로 구축된 '자폐성'의 위기를 배태하고 있었다면, 『82년생 김지영』은 특정 세대의 보편적 삶의 보고서가 다수의 대중 감성에 깊은 생채기를 낼 수 있음을, 문학의 역할이 혁명을 기억하는 것만이 아닌 혁명을 선취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정과 직장에서, 한국 사회의 멘탈 구조에서 '성 평등'이 여전히 여성이 처한 현실과는 거리가 멀 때, 여성성/남성성의 이분법적 규제가 성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의 진정한 해방에 여전한 걸림돌이 될 때, 목도하듯이 아홉 살부터 일흔아홉 살까지의 또 다른 김지영들2)이 자신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들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1)  그것은 완전한 자폐증, 정신병적 자살, 죽음 충동에 대한 굴복, 심지어는 상징적 세계의 완전한 붕괴에 굴복하지 않고, 유(有)를 지속하는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슬라보예 지젝, 이수련 역,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인간사랑, 2002, 136쪽 참조)
  2)  조남주, 『그녀 이름은』, 다산책방, 2018.

 

2.
    하지만 아쉬움 또한 존재한다. 생애주기에 따른 보고서의 형식, '합목적적으로' 기능하는 에피소드의 나열이 한국 사회 특정 세대의 여성이 겪는 차별과 억압을 목록화 하는 데 유용했다 하더라도, 억압구조에 대한 공유만이 여성적 글쓰기의 전부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분노가, 불평과 불만이 새로운 인식의 출발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 새로운 역능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가령 작은 촛불이 모여 역사를 다시 썼던, 분노의 정동정치가 가능했던 데는 두 달이 넘게 주말을 반납하고 시위에 참여했던 연인원 천만 명의 행동, '불꽃액션'이 있었다. 매사 신중히 생각하고 처신하는 김지영의 행동이 적절한 신중함 이면에 '반응적'이고 '수동적'인 것으로서의 기존의 '여성성', 성 차를 차별적으로 반복한다는 것은 얼마간 문제적이다. 또한 소설 결말 부분의 정신과의사의 '망언'에 이르기까지 남성에 대항한 전선 짜기의 구도는 일률적이며, 여성의 포지션 또한 그에 따라 단순해진다. 버스정류장 사건에서 "근데,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더 많아요."라고 했던 '여자'의 한마디가 김지영을 위로해 주었지만, 소설에서 진정 '좋은 남자'는 발견되지 않는다. 여성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것은 모두 여성의 몫이다. 이는 『82년생 김지영』이 '남녀 공용'의 소설이 되기 어려운 이유일 수 있다. 여성을 흔히 사랑과 결혼에(만) 매여 있거나, 성적인 대상으로 묘사했던 과거의 재현 방식을, 가부장제-자본주의의 피해자라는 또 다른 역담론으로 전치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것이다.
    (모두를 위한) 평등과 정의는 흔히 남성을 위한 것으로 배당되어 있었기에 기존의 젠더 구조를 의심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겹겹의 불평등 구조와 여성-가난-비체, 여성-희생양-피해자의 타자화 전략을 떠올린다면, 백만 번 폭로하고 천만 번 고발하는 게 무리수가 아닐 수 있다. 페미니즘은 정당하다. 하지만 주변의 우려와 같이, 페미니즘 문학이 피해자들의 고통 경쟁의 장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페미니즘의 정치 주체는 희생자나 피억압자로(만) 재현되어서는 곤란하다. 피해자 담론의 기원이 원한의 노예도덕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지영'은 차별의 전시장을 넘어, 억압에 대한 문제제기 수준을 넘어 다양한 여성 서사를 호출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문학의 새로운 증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 시점의 페미니즘은 '신념'이지만 그것이 결국 '상식'이 될 때, 남녀를 분할하지 않는 휴머니즘이 될 것이고, 여성 서사는 다시 한 번 몸 바꾸기를 감행할 것으로 보인다.

 

3.
    도래할 미지의 여성 서사와의 마주침을 기대하며 이 글은 조금은 오래된 여성 서사의 단면들을 들춰 보기로 한다. 왜 김지영(만)이 문제적인가. 여성주의 관점에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더라도, 때로 젠더 의식과 무관해 보이는 텍스트 속에서 여성이 어떻게 재현되었는가의 문제는 오히려 여성을 바라보는 무의식적 프레임, 사회적 통념을 무심히 그러나 보다 온전히 보여줄 수 있다. 작가의 성별이 여성이건 남성이건, 젠더 문제를 직접 다루거나/다루지 않더라도, 여성들은 한국 소설에서 울고 웃고 일하며 숨 쉬고 있었다. 김지영이 눈물을 왈칵 쏟고 뜨거운 커피를 손등에 왈칵왈칵 쏟으며 이상 증세를 보이기 전에도 여성의 몸은 증상의 집합체일 때가 많았다. 혹은 김지영이 직장에서 맡은 첫 업무에서 "정말 정말 잘 해내고 싶어 두 장짜리 보도자료를 쓰는 데 며칠 밤을" 새고, "재밌고 좋아서 다녀. 일도, 돈 버는 것도."라고 성취감과 보람을 표현하기 전에도, 여성의 자아실현 내러티브, 그들이 품었던 깊은 열망을 탐색하는 소설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멀리, 아마도 1910년대생이었을 선비와 갓난이(『인간문제』, 1934), 30년대생 강영란(『민주어족』, 1955), 50년대생 경아(『별들의 고향』, 1974)와 초희·우희·말희(『휘청거리는 오후』, 1977), 그리고 『외딴방』(1995)의 '나'는 어떻게 재현되었는가. 그들이 진정 원했던 것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즐거움을 찾았고 무엇을 통해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는가를 탐문하는 일은 한국 소설(사)에 애초 부재하는 공백의 추적이 아니라, 괄호 쳐지고 빗금 쳐진 채 온전히 다뤄지지 않은 여성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오늘날보다 더 완강하게 작동했던 가부장제에 저항했고, 만연해 있는 여혐을 딛고 온몸으로 자신의 삶을 열렬히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자매애 관계의 여성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의탁했던 2016년의 김지영 이전에도, 침묵 속에서 내 말 좀 들어 달라고 울부짖는 경아와 초희가 있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아마 젠더 의식이 희박했고 젠더 감수성은 더 생소했을 과거에도 여성들은 시끄러운 고독 속에 외치고 있었다. 죽음과 소거, 생략이 아닌 '살아 있는' 여성을 달라. 우리는 "섹스밖에 남지 않은 여자"(『휘청거리는 오후』)가 아니며, "성처녀"(『별들의 고향』)도 아니고 '이상한 여자'도 아니다. 살아 있는 몸과 살아 있는 욕망을 달라, 고.
    여성은 어떻게 자신의 욕망에 따른 성적 주체가 되고, 온전한 노동 주체가 되는가? 혹은 내면에 품었던 열망과 꿈을 실현하는 자아실현 내러티브의 주인공이 되는가? 한국 소설(사)에서 자신의 진짜 욕망을 양보 없이 고수하는 여성들은 어떻게 재현되(었)는가? 가부장제의 희생양이 되거나 섹슈얼리티의 전시장이 되는 일련의 여성 서사의 흐름이 있어 왔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여성 인물은 페미니스트와 히스테리 환자의 양단을 오가는 존재로,3) 불투명한 부재만이 아닌 일하는 근로대중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이 글은 이후 한국 소설(사)의 허-스토리를 두 개의 코드를 중심으로 읽고자 한다. 하나가 여성혐오라면, 다른 하나는 일하는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과 관련해서다.

  3)  페미니스트가 여성 억압적인 조건에 대해 반항적이며 해방을 위한 외부 지향적 반응을 표출한다면, 히스테리 환자는 사회에 대해 수동적이고 내면 지향적이며 궁극적으로는 자기 파괴적인 거부를 표현한다.(리타 펠스키, 김영찬·심진경 역, 『근대성의 젠더』, 자음과모음, 2018, 25쪽 참조)

 

4.
    이미 백 년 전 신여성의 글/삶은,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방식으로(만) 여성의 삶이 기록되고,4) 일종의 가십거리, 조롱거리로 여성의 글쓰기를 소비했던 남성 지식인의 시선을 증거해 준다.(「제야」,「김연실전」) 신여성, 아프레 걸, 호스티스와 여공 문학이 아니더라도, 한국 소설사의 갈피갈피마다 미소지니(misogyny)의 장면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흔하며, 대상화·타자화는 여성 재현의 공통 규약이라 할 만하다. 물론 여성 서사 읽기가 가해자/피해자, 착취/억압에(만) 주목하게 된다면, 가부장-남성-로고스 중심의 현실에서의 이분배당 구조와 위계를 재확인하는 데서 벗어나기 어렵고, 여성은 고정불변의 영원한 타자로 낙인찍히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남성-지식인 작가에 의해 정전화 된 한국 소설을 여성 '주체'의 경험과 시선으로 읽는 일은 도식화의 반복 내지 역전치가 아니라, 불편한 사실을 정치화함으로써 신념을 상식화하기 위한 염원을 담는다. 우리는 빤함보다는 '뻔뻔해지지' 않기 위해, 그 빤함이 팩트를 재구성하는 새로운 목소리의 완전한 복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성은 언제든 '기원'이나 '본질'은 아니었고, '평균'이나 '보편'은 더더욱 아니었다. 불투명한 부재였고 소멸되는 것의 자리였으며, 소설 속 중요한 갈등은 상징적이건 실질적이건 늘 남성들 간의 갈등, 이를테면 국가, 이념, 공동체 간의 갈등이었고, 여성은 주로 감정과 보살핌의 문제, 연애와 결혼을 매개로 타자와 관계를 맺으며, 남성 중심적인 시장질서에서 부수적 존재로 소비되었다. 많은 경우 여성 인물은 성적 대상이 되고 호스티스, 창녀가 되고 구경거리가 되었다. 아버지라는 '보호자'를 잃은 후 지주 덕호의 성적 노리개가 된 선비·갓난이도 그러하지만, 경아는 첫사랑에게 '버림받은' 이후 알코올중독-자살에 이르고, 결혼을 계층이동의 수단으로 여긴 초희는 결혼 '실패'로 약물중독-치료보호를 받아야 했다.(박완서 소설은 특이하게 초희 대신 아버지 허성의 자살로 마무리된다.)
    여성의 재현에 내재된 '위선'과 '거짓'은 사랑과 모성에 헌신하는 여성을 이상화할 때뿐만 아니라, 사랑보다 편익에 입각한 결혼을 선택할 때 역시 동일하게 나타난다. 낭만적 사랑의 신화 안에 세팅되어 있는 롤 플레이를 수행하지 않는 여성의 '배제'가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굴욕을 뒤집어쓰거나 비참해지며, 결국은 '소거되는 것(cancelled)'에 위치한다. 중독에 '취약'하고 자기절제감이 '부족'하며 신성한 결혼을 타산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인가. 생명줄을 쥔 채 이들의 안위를 위협할 권리는 누가 갖는가. 이들이 무엇을 잘못한 걸까. 예쁘고 착하기만 한 여자(경아)의 실체는 미성숙하고 경제력이 없는 '아이'일 뿐이거나 신비로운 부재감을 내뿜는 이상화된 '성처녀'로 미화되고, 경제 자본이 있는 여자(『민주어족』의 김은애)는 소비에만 몰두하는 퇴폐향락의 아이콘이 된다. 왜 이토록 여성에게 가혹한가. 『별들의 고향』은 더욱 문제적이다. 경아는 '문오'라는 '70년대적' 청춘의, 허무와의 '화해'를 돕는 하나의 도구가 된다. 모두가 외롭고 우울한 청춘인데 왜 경아만 '살해'당하는가. 경아는 (고작) 그의 내적 자아의 '성장'을 위한 파트너였다가 섹슈얼리티가 소거되자 생명조차 간단히 소거되고 만다. 미대생이었던 문오는 경아와의 만남을 계기로 그림을 폭발적으로 생산하지만, 경아는 소모품에 불과한 것이다.
    김지영이 지금 여기의 젠더 불평등을 고발한다면, '언니들'은 비극 속에 조용히 삭제되어야 했다. 김지영의 이상한 증세는 소설 속에서 차라리 '합리적', '인과적'으로 읽힌다. 사회적 통계와 사실 지표를 동원해 조남주 작가가 증명하려 했던 것은 증상의 기제로서 작동하는 현실의 모순이었다. 하지만 삭제의 고통 속에 말없이 스러진 언니들의 경우는 어떤가. 흔한 논리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여혐이 너무 흔하고 빤하다고 해서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당위로서뿐 아니라, 왜곡된 여성의 표상을 문학을 통해 재생산하는 것에 대한 중지 요청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성 서사의 결이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여성의 재현이 수난의 역사로만 읽히는 건 아니며,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이들의 본분만은 아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초희를 제외하면 대부분 '일하는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노동과 계급이 젠더를 어떻게 분할하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들은 김지영의 진정한 선배 격인 셈이다. 2016년의 김지영이 출산 후 그동안 '성취감'과 '보람'을 느꼈던 일을 그만두고 '맘충'의 벌레가 되고 말았다면, 30년대의 선비는 지주 덕호의 성적 착취의 사슬을 끊고 인천의 공장노동자가 되고, 50년대의 당당한 지식인 여성 강영란은 "민생 알미늄 제조공장"의 경리로 일하며 전후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된다. 반면 70년대에 대학생이었던 경아는 가정형편이 어려워지자 경리로 일하다 술집작부가 되고, '나'(『외딴방』)는 작가의 꿈을 위해 조세희 소설을 필사하며 동남전기주식회사에서 일을 한다. 일반화의 위험을 무릅쓰자면 소수의 유한계급 여성, '자유부인', 중산층 '언니'가 아니라면, 여성들은 늘 이런저런 노동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연애와 사랑을 하면서도 여성은 일터에 있었고, 가정에 있을 때도 일터를 꿈꾸곤 했다. 그렇다면 '일하는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떠했을까. 여성에게 부착되어 온 사랑과 모성의 서사적 클리셰 이외에, 이들은 일터에서 과연 어떻게 재현되었는가.
    강영란, 경아에서 볼 수 있듯, 노동 시장에서 여성의 노동은 경리, 비서의 보조적 업무에 배당되었는데, 이는 2016년의 김지영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회사의 중요한 프로젝트에 남자 신입사원이 선발된 이유는 이들이 '남자'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산업전사의 '전투성'에 비해 여성의 노동은 소극적·비정치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고, 취업난 앞의 딸에게 아버지가 "넌 그냥 얌전히 있다 시집이나 가."라고 발언할 수 있을 정도로 여성의 일은 일종의 액세서리와 같은 것으로 묘사되었다. 한편, 여성성과 노동을 대조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젠더 규범에 의해 일하는 여성에 대한 재현은 "무성적인 존재(여성적이지 않은 존재)로 보여주는 방식과 성적으로 취약한 존재로 보여주는 방식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었다."5) 후자는 특히 문제적이다. 일하는 여성은 가부장의 '비호' 밖, 일터와 거리에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전시하는 자로 오해되기도 한다.(김승옥의 「야행」을 떠올릴 수 있다.) 여공의 엉덩이를 툭 치는 공장 감독의 존재(『인간문제』)나 사장과 "연극 구경을 같이 갔다가 어둠 속에서 손을 붙잡혔"(『민주어족』)던 경험은 약과이다. 남성 관리자의 시선에 의해 일하는 여성은 육체의 특정 부분들, 가령 목덜미, 가슴, 종아리 등의 분절화 된 신체로서 존재한다. 에로스가 극대화된 이들 신체 부위는 노동 공간에서 여성이 대상화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섹슈얼리티 또한 권력의 장(場) 안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사회적 구성물이라 할 때,6) 일하는 여성의 재현은 남성 관리자의 욕망을 권력의 배치 하에 투사한 결과물로 나타난다.
    이에 비해 소비하는 여성에 대한 시선은 어떤가. 커피 한 잔의 소비에 대한 다음과 같은 비하/혐오 발언, "나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고 싶다……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의 뿌리는 매우 깊다. 이 불편한 시선 — 남성에게라면 노동과 노동 사이의 마땅한 휴식이었을 — 은, 여성의 소비를 사치, 낭비와 결부시켜 비합리적이고 무분별한 여성과 같은 레테르 붙이기의 '백만 번 천만 번' 반복의 새로운 버전일 뿐이다. 50년대 전후 현실에서 남성의 노동 공백을 메우는 여성 노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민주어족』을 빌려 말하자면, 여성의 사회진출을 적극 장려하는 분위기와 달리 여성의 소비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이다. 노동하는 남성의 절약과 빈곤은 미덕이되, 소비하는 여성에 대한 시선은 계도를 넘어 일종의 불안감을 내포한다. 50년대뿐 아니라 그 이후 생산과 재건, 성장과 전진이라는 남성 중심의 가치가 한국 사회의 지배 담론이 되었을 때, 여성의 소비는 불온시 되고 여성은 빈곤화되었다. 한국 소설(사)에서 여성의 노동, 여성의 소비는 모두 온당하지 않게 그려진다. 그것은 남녀 불평등을 더욱 가시화하는 일터, 노동의 일상에 만연해 있는 성폭력과 같은 사실과 더불어, 더 중요하게는 여성을 재현하는 방식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4)  나혜석, 장영은 엮음,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민음사, 2018.
  5)  루스 배러클러프, 김원·노지승 역, 『여공 문학』, 후마니타스, 2017, 27쪽.
  6)  앤소니 기든스, 배은경·황정미 역, 『현대사회의 성·사랑·에로티시즘』, 새물결, 2003, 57쪽.

 

5.
    그렇다면, 김지영이 가능케 한 것은 현실의 고발과 폭로만은 아니다. 『82년생 김지영』이 페미니즘적 신념으로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여성은 피해자 담론의 '객체-되기'가 아닌, '주체-이기'를 자처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이 거칠게 일별한 여성 재현의 계보를 통해 볼 때, 여성을 대상화하는 그간의 서사 전략이 대체로 여성을, 그 이유를 묻거나 따지지 않은 채 억압과 차별을 당하는 객체, 마조히즘적 타자로 정치화했다면, 『82년생 김지영』은 2018년 현재까지도 여전히 강고한 피해자 담론의 '주체-이기', '주인공-이기'를 통해 스스로를 재정치화 한다. 그것은, 비록 새로운 발견은 아니더라도 젠더 불평등의 구조를 전경화하고 그 안의 주체성을 촉구함으로써 현실의 모순을 한 발이라도 더 '꽃 핀 쪽으로' 옮겨갈 수 있는 수행성을 낳는다. 이야말로 김지영이 불러온 효과의 하나일 것이며, 『82년생 김지영』을 페미니즘2.0 소설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이유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기존의 문학성의 완고한 기율을 해체해 문학적 규범의 외연을 넓히는 일이 될 수 있다. 평등과 정의를 갈망하는 정동(情動)의 텍스트가 완결성을 갖춘 미적 언어의 텍스트보다 못할 이유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소개 / 박진영

문학평론가. 고려대학교 기초교육원 초빙교수

 

   《문장웹진 2018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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