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영도-김금희론 - 이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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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비평가 특집]

 

최근 몇 년 간 한국문학의 흐름은 그야말로 숨이 가쁠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한국문학은 달라져야 했고, 달라지고 있으며, 또 계속해서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도 더 많은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수많은 변화의 외침은 지금도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제 막 자리매김한 '젊은'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부탁했다. 이들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습을 비트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어갈 한국문학의 풍경을 기대하며 '기획'의 지면을 연다.

 

 

 

마음의 영도 – 김금희론1)

 

 

 

이철주

 

 

 

 

      1. 정오의 문법

 

      마음이 자란다. 가두어 두었던 말들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고, 또 하나의 계절이 쉬이 떠나가지 않는다. 툭하면 꺾이고 뒤틀려 굶주린 낭하를 떠돌고, 상처받지 않으려 발톱을 세우고 이빨을 드러낸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허공에 마음을 잡아먹히고도 또 하루를 견뎌야 한다. 하루를 견디는 마음으로 거추장스러운 모든 마음들에 침묵을 지켜야 한다. 일상이 던져 준 소일거리들에 심장을 내어준 채 눈 감아야 한다. 그렇게 보태고 덧댄 마음의 맹점들로 하루의 무게가 불어난다. 때론 불어난 무게로 마음의 공동을 견딘다. 그러다 툭, 탄성한계를 넘어선 하루가 장력을 잃고 기이하게 찢긴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이 온다. 침묵이 강제하는 이 짧고 위태로운 무력감.
      김금희의 소설은 이 무력감 앞에서 늘 절묘하게 멈춘다. 마음에 지친 인물들의 어깨를 쓰다듬는 것도 같지만 위로의 온도로 서사를 봉합하지 않는다. 깨달음이나 성찰의 제스처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수다스런 목소리로 가르치지 않는다. 위로의 한복판을 걸을 때조차 명료하고 차분하다. 부패한 아버지들의 자리를 묻는 날선 문장들이 곳곳에 포진돼 있으면서도 비성년의 순수와 성년의 타락이라는 순진한 이분법으로 도망치지 않는다. 한 사회가 감추어 온 추문과 개인의 상처가 절묘하게 결합돼 있음에도 공공의 사건과 이를 풀어내는 이론적 개념들로 환원되지 않는다. 분명히 있음에도 온전히 읽히지 않는 무엇으로, 결국은 없지만,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는"(2:42) 내면의 파문을 발굴해 내는 그의 문장은 그래서 오래도록 읽는 이의 눈을 멈추게 만든다. 김금희의 문장이 안내하는 이 멈춤의 지점, 저 황량한 도시의 골목 곳곳에서 이 세상에 '있지 않은 것'들이 유령처럼 떠올라 자신의 마른 얼굴을 쓰다듬는 시간은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 문학은 이런 일을 되풀이해 왔고, 문학이 초대하는 이 순간을 겪어내기 위해 늘 누군가의 시간은 그 자리에 정박돼 왔다. 김금희의 특별한 점은 이 경계를 쉽게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는 점, 되도록 오래 이 순간이 건네는 파문에 자신과 독자를 멈추게 만들 줄 아는 균형감각을 지녔다는 점에 있다.
      가령 등단작인 「너의 도큐먼트」에서 서사는 '나의 없음'을 외면해 온 나의 허위가 발설되고 내면의 저항이 무력화되는 지점에서 정확히 멈춘다. 서사의 시작도 종결도 사라진 아버지를 찾는 행위에 묶여 있지만, 이는 모두 '아버지의 도큐먼트'로 '나의 도큐먼트'의 부재를 부정하려는 기만에 불과하다.

  1)  이 글에서 다루는 김금희의 작품(집)은 다음과 같다. ①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창비, 2014. ② 『너무 한낮의 연애』, 문학동네, 2016. ③ 『경애의 마음』, 창비, 2018. 이하 작품 인용 시에는 '수록 작품(집) 순서:페이지 수'로 표기한다.

 

      "아버지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회사에서 매킨토시 도큐먼트를 열어 텍스트를 깔고 있었겠지. 손목에 쥐나도록 컴퓨터 마우스를 움직여야 하는 박봉의 일자리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언제나 나풀나풀 사라져 버릴 듯 불안하던 데이터가 만지고 냄새 맡을 수 있는 실물로 제본소에서 배달되는 순간은 극적이기까지 했다."(1:39-40)

 

      결코 이 모든 것들이 아버지 때문이라며 떼를 쓰진 않는다. 김금희의 인물들은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보호해 봤자 자신만 더 비참해질 뿐이라는 걸 놀랍도록 잘 아는 조숙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원인 같은 건 없다. 어째서 나는 유일하지 못하며 늘 대체될 위험에 처해 있고 언제든 쉽게 버림받을 수 있는 존재인지 그걸 설명해 줄 단 하나의 명확하고 분명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의 불확실함은 그러므로 부정될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참고 유예될 수 있을 뿐이라는 걸 김금희의 인물들은 몸으로 체득하고 있다. 다만 그 유예의 허망함을 미처 마주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그러니 아버지를 찾기 위해 어머니가 준 지도에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도 불쑥불쑥 끼어든다. 친구 여미의 죽음이 그렇다. 남자 친구 주용을 둘러싼 삼각관계에 놓여 불편한 감정들로 남았을 텐데도 여미의 집으로 자꾸만 향하게 되는 이유를 '나'는 설명하지 못한다. 아니 댈 만한 이유를 찾아 서성이는 자신을 부정하고 싶지만 용기를 내지 못한다. 여미의 집 앞에서 여미의 동생임이 분명한 남자로부터 "엉뚱한 사람을 찾아."(1:54)라며 단호하게 되돌아온 목소리는 처음부터 이 모든 수색과 기다림이 '엉뚱한' 것만 찾으며 자신의 텅 빈 얼굴과 마주하는 것을 피해 온 자신의 뒷모습임을 정확하게 발설한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이 반복된 부정들도 결국은 자신이 될 것이다.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제거하기 위해 위 절제수술을 받은 채주처럼. 그럼에도 그 부정의 '없음'은 철저히 자신만의 몫이다. 아버지도 여미도 아닌 오직 자신만의. "이제 남은 이 텅 빈 도큐먼트야말로 네 것이라고.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더할 나위 없이 냉정하게."(1:57)로 끝나는 그의 문장은 희망이나 위로를 말하지 않는다. 다만 얼마나 더 오래 이 냉정한 시선 앞에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놔둘 수 있는가를 물을 뿐이다. 물론 이는 익숙한 성장 내지 성숙의 서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대한 그 경계에서 오래 버티며 어떤 의미화도 미화도 허락하지 않으려는 단단함이 김금희의 소설을 특별하게 만든다.
      자기응시에 대한 철저한 냉정함은 두 번째 소설집에 수록된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평소에도 자기 자신에 대해 좀 허황된 거짓말을 하"(2:16)던 필용은 자신의 '없음'을 견디지 못하는 인물이다. 필용의 향수 어린 회고담은 16년 만에 찾은 맥도날드에 더 이상 피시버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시작되는데,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고 아예 사라져 버린 그 메뉴"(2:11)는 비근하게 말하자면 지나가 버린 시절의 순수성 혹은 그에 대한 낭만쯤으로 풀이될 것이다. 필용은 인사이동으로 인한 자괴감과 불안감을 낭만적인 구질구질함 속에서 삭이곤 하지만, 소설은 단순한 향수로 회귀하지 않는다. 서사가 도달한 과거 속에서 필용이 양희의 느닷없는 고백에 집착했던 이유는, 사랑한다는 말의 근거를 스스로에게서 도무지 찾을 수 없었던 너무나도 정직한 자괴감을, 그러므로 양희의 마음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본질적인 무력감을 양희의 말 한 마디가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그 철저한 '없음' 속에서 양희는 "언제 봐도 나무 앞에서는 부끄럽질 않으니까, 비웃질 않으니까 나무나 보라."(2:37)며 필용의 나무가 되어 준다. 무력하면 무력한 대로,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대로 스스로를 받아들이며 그저 곁에서 온기를 나누면 된다는 듯.
      만약 여기서 멈췄다면 서사는 '나무'가 지닌 메타포로 매끄럽게 봉합되었을 것이다. 삶의 어찌할 수 없음, 마음의 불가피함은 내면성의 문장들로 재단되고 현실로부터 어긋난 공허한 무게만을 남겨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필용은 그러한 문학적 낭만성을 가차 없이 찢어 놓는다. 과거가 풀어 놓는 향수에 취해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부질없는 몽상에도 빠져들고, 그런 환상에 빠져들기엔 "너무 한낮이 아니"(2:42)냐며 스스로에게 핀잔을 주기도 한다. 추억의 달콤함과 뼈아픈 진실의 무게가 지나간 자리엔 여전히 무엇 하나 걸칠 것 없는 남루한 몸만이 남아 단순하고도 명확한 정오의 햇빛을 견딘다.
      정오의 문법에 따른다면 양희에 대한 마음은 이미 몸을 잃어버린 주검의 마음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 '없음'을 지독히도 선명하게 드러내는 정오는 역으로 이 '없음'을 견디는 내상의 뜨거움도 동시에 드러낸다. 날이 저물고 한낮이 가려 왔던 상흔들이 그림자의 모습으로 드러날 때쯤이면 알게 될 것이다. 허위와 거짓말로 버텨 왔던 철없는 필용조차 사실은 안간힘을 다해 저 '없음'을 견뎌 왔다는 것을. 누구나 자신만의 그늘을 감춘 채, 그 그늘의 무게를 견디며 여기를 살아간다. 그러나 그늘에 스스로의 무게조차 양도한 삶마저 긍정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김금희는 이 그림자의 시간을 기어코 정오의 순간으로 되돌린다. 김금희의 문법, 정오의 문법에 따르자면 정오란 "환하고 환해서 감당할 수조차 없이 환한 한낮"(2:42)으로 '있지 않은' 것들의 뜨거움을 그림자 없이 현상할 수 있는 시간이므로.

 

 

      2. 퇴물의 윤리

 

      퇴물이란 단어는 서늘하다. 누구도 퇴물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데도, 퇴물에는 다소 악의적이다 싶을 만큼 비하의 뜻이 담긴다. 물론 사람은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는 인생의 순환과 관련된 중요한 교훈이 그 안에 담겨 있겠지만, 한편으론 그 모욕이 지속되는 만큼은 퇴물의 중력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믿고 싶은 우리 안의 나약함이 현상된 것만 같아 안쓰럽다. 그러나 퇴물이라는 말은 언제나 인간을 이기고 만다. 아무리 잘나갔던 청춘도 불과 채 몇 십 년이 지나지 않아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앞으로의 인생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누구도 퇴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어떤 퇴물도 청춘의 열기와 기억에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지금은 태어나자마자 반쯤 늙어버린 청춘들이 거리를 활보하지 않는가.
      김금희의 소설 속에서 퇴물들은 종종 자기 윤리의 고유성을 고수하려는 시대착오적인 인물들로 묘사된다. 「아이들」의 아버지가 그렇고, 「조중균의 세계」의 조중균이 그러하며, 「경애의 마음」 속 상수가 그러하다. 이들은 줄곧 그들을 바라보고 이해하려 하나 끝끝내 일별하고 마는 관찰자의 담담한 시선으로 전해진다. 물론 상수는 조금 예외적인데, 장편인 탓에 나름의 '해결'과 '화해'로 이어지는 서사 속에서 온전한 관찰의 대상으로만 머물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머지 단편들에서 이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삶을 힘겹게 떠돌다 결국 적을 잃어버린 퇴물들이 최종 폐기 직전에서야 남루한 임시보호소에 모여든다. 가장 뜨겁게 꿈꾸었지만 가장 차갑게 폐기된 시선들이 그들을 마지막으로 증거하는 자의 망막에 잠시 어리고 스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이어지는 따뜻한 연대와 낭만적 화해를 얘기하기엔 현실과의 거리가 너무도 아득하다. 그렇다고 가치와 믿음에 대한 전적인 폐기로 나아갈 수도 없을 때 김금희의 인물들은 있었으나 사라진, '없지만 있지 않은', 더 정확히는 지금 여기 없기에 그 없음의 방식으로 '있어야 할 것'들을 호출하는 길을 선택한다. 하나의 세계가 사라졌음을 목격하고, 그 세계가 생을 바라보던 방식들을 기억하려 한다. 물론 그러한 응시는 결국 지금 나의 '없음'을 더 깊고도 날카롭게 찌르겠지만.
      다만 사고로 다리를 잃고 갑자기 퇴물이 되어버린 아버지와 그 고통을 조심스레 가늠하고 지켜보는 딸의 이야기를 다룬 「아이들」의 경우, 그 시선은 훨씬 따뜻하고 부드럽게 묘사된다. 가족 이야기인 탓도 있겠으나 무엇보다 '나'는 아버지가 하길 좋아하는 이야기를 매번 반복할 수 있도록 이미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도 처음 듣는 얘기처럼 반길 줄 아는 성숙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나'는 대학에 가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짓눌렸고, 한때는 동네 친구의 꾐에 넘어가 다단계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기도 했었으니까. 그런 '나'에게 있어 아버지의 "비장함과 결기, 노동의 신성함을 완전히 받아들인 자의 완고"(1:116)한 원칙과 윤리는 이미 시대에 동떨어진 불가능한 요구로밖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런 아버지들의 시대가 있었다. "거대한 화물선을 맞으러 선착장으로 나갔을 때, 나무들이 뗏목이 되어 바다를 건너고 팔뚝만 한 숭어가 수면을 뛰어 오"(1:133)르던 영광스러운 과거가 말이다. 그때는 아무리 젖어도 더 이상 젖지 않는다는 함수율의 존재를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믿었으며 끝도 없이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기꺼이 희망을 품었다. 비록 그 황금빛 꿈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나'는 그 몰락으로부터 빠져나와 가구 매장 매니저가 되었다. 바다를 건너 머나먼 대륙으로부터 온 나무들, 그 세계가 품은 꿈과 희망에 대한 갈망이 있으면서도 안전하고 온전하게 가공된 가구들의 세계에 안착함으로써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이미 오래 전부터 침몰하고 있었으면서도 완전히는 꺾이지 않았던 아버지의 존재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장 뜨거운 열을 가장 참혹한 그늘로 품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이해해 가며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바라보았던 풍경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기로 한다. 그 강건했던 아버지조차 실은 이곳에 정주하지 않겠다는 아슬아슬함으로 생의 부력을 만들어 왔음을 기억하며 불안과 희망 사이에서 흔들린다.
      「아이들」이 아버지의 좌절된 꿈과 희망의 자리를 되새기며 이를 다음 세대의 또 다른 미래로 투영하는 성장의 한 궤적을 보여준다면, 「조중균의 세계」는 사라져 가는 존재가 살아남은 자들을 향해 지르는 불편한 목소리들을 훨씬 건조하고 담담하게 증거한다. 「조중균의 세계」에서 서사를 이끌어 가는 '나'는 살아남기 위해 무수한 상처들을 내면화한 젊은 세대들을 대표한다. 그런 나에게 자기 혼자만의 생각에 갇혀 상사의 지시를 무시하고, 철저히 자기 원칙만을 고집하는 조중균이나 그를 두둔하는 해란은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존재들이다. 심지어 해란은 단 한 명의 정규직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사이가 아닌가. 조중균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간다. 교정에 대한 자기 원칙을 고수하다 정해진 편집 기한을 훌쩍 넘겨버리는 건 예사고, 식대 구만 육천 원을 돌려받기 위해 "나는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는 문장이 적힌 수첩을 들고 다니며 사인을 받기까지 한다. 무엇 하나 쉽게 이해되지 않는 조중균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그가 그저 자기 윤리에 무섭도록 충실한 사람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는 해란이 가져온 떡이 비록 상했다 해도 그 마음을 소중히 여겨 탈이 나도록 묵묵히 먹는 사람일 뿐이며, 학생 시절 자신을 취조했던 형사가 목욕이나 하고 들어가라며 셔츠 주머니에 찔러준 오천 원의 모욕을 되갚기 위해 늘 이만 원을 들고 다니는 사람일 뿐이다.
      서사의 끝에서 이런 조중균의 철저함은 그가 썼던 시에 대한 일화로 선명해진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이름만 적으면 점수를 주겠다는 교수에게 반발하여, 끝까지 이름을 쓰지 않고 대신 시를 써넣었다는 일화. 심지어 그 시는 그 시절 누구든 자기 이름을 붙여 자기가 쓴 것처럼 낭송할 수 있었다지 않은가. 제목마저도 '지나간 세계'인 시를. 그러곤 서사는 훌쩍 이 모든 낭만적 '지나간 세계'의 인물들이 사라지고 난 서늘한 풍경으로 옮겨간다. 해란 씨도 조중균 씨도 모두 회사에서 자리를 잃은 후 오직 '나'만 정규직이 되어 살아남는다.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앞으로도 줄곧 이 비정한 생존의 룰을 지키며 살아남아야 한다는 부끄러움 속에서 '나'는 이미 지나와 버린 조중균의 세계를 가까스로 떠올린다.

 

      "거기에는 뭐가 있었는가보다는 뭐가 없었는가가 더 세세히 떠올랐다. 거기에는 육 인용 테이블이 없었다. 복수를 잊어버린 조중균 씨도 없고 빈 시험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는 조중균 씨도 없었다. 나태한 조중균 씨도 없고 내 사인이 적힌 수첩도 다행히, 아주 다행히 없었다. 문장과 시와 드라마는 있지만 이름은 없는 세계, 내가 간신히 기억하는 한, 그것이 바로 조중균 씨의 세계였다."(2:71)

 

      이 가까스로 떠올린 세계는 어딘가 이지러지고 왜곡돼 있다. 만약 조중균의 세계를 시대의 유물로나마 간직하고 의미화하길 원했다면 보다 그럴듯한 말과 수사로 말끔히 정돈하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있음'이 아닌 '없음'으로 그의 세계를 재구성해 보려는 '나'의 말들은 지극히 잉여적이고 낭비적이다. 회사 구내식당의 반듯한 육인용 식탁이야 본래 조중균의 세계에 없는 것이지만, "복수를 잊어버린 조중균 씨"라든가 "빈 시험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는 조중균 씨"는 그 표현 자체가 '잊은 적이 있음'과 '이름을 적은 적이 있음'을 전제한다. 물론 조중균 씨는 복수를 잊은 적도 없고, 빈 시험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지도 않았지만, '없음'을 전제하기 위한 '있음'으로써 미묘한 실체성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내 사인이 적힌 수첩도 다행히, 아주 다행히 없었다."라는 말도 기이하다. '나'는 현실에서도 조중균의 수첩에 사인을 하지 않았으니까. 이미 부정된 사실을, 회고 속에서 가까스로 한 번 더 부정해 버리는 부정의 과잉은 불필요한 것이면서 불편하다. 왜냐하면 '나'는 조중균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가 불러일으킨 하나의 세계와 대면하고 있는 중이며, 그와 연루된 모든 '있음'들에 이미 자신이 너무도 깊이 들어와 있음을 깨닫고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선택은 역시 차갑고 견고하다. "문장과 시와 드라마는 있지만 이름은 없는 세계", 누구에게도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는 '문장과 시와 드라마'로만 있음을 증거하는 세계로, 여전히 이름은 없는 세계로 남겨 두려는 '나'의 다짐은 살아남기 위해 견뎌야 하는 일상의 중력과 상처의 깊이를 더 단단하게 드러낸다.

 

 

      3. 최선과 마음 사이에서

 

      최선과 마음 사이에는 쉽게 잘라낼 수 없는 버성김들이 산다. 최선은 실패한 자가 미래를 위해 지불하는 마음의 빚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과거로부터의 끈을 잘라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앞으로 최선을 다하겠다'이든, '아무래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이든 최선은 마음을 폐기하지 않기 위한 작은 거짓말일 뿐이다. 기실 최선은 늘 부재하는 말일 수밖에 없다. 말의 경계를 확정짓는 순간 최선은 타협을 포장하기 위한 말이 되기 쉽고, 그럴수록 '온 정성과 힘을 다하다'라는 말의 본뜻은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탓이다. 그렇다면 '난 단 한 번도 최선을 다한 적이 없다'며 최선의 부재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만이 옳은 것일까. 김금희의 첫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은 최선과 마음 사이에서 흔들리고 넘어지는 인물들이 가까스로 도달하게 된 어떤 경계에 주목한다. 최선이 마음을 다 잡아먹지 않도록, 반대로 마음이 최선을 위장하지 않도록 하는 담담하고도 고요한 균형이 유쾌하고도 예리한 이야기 속에 담겼다.
      이 소설을 '상수'의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자기 혼자만의 윤리에 갇혀 누군가의 마음에 대해 마음으로 마주서 본 적이 없는 '소년'의 성장담일 것이고, '경애'의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상실된 사랑의 자리에 매몰돼 있던 자기를 조금씩 바깥으로 떠나보내는 이별담일 것이다. 이 두 이야기는 경애에게는 연인이었고 상수에게는 유일한 친구였던 'E'의 죽음이라는 공동의 상처로, 그 울림이 만들어낸 사랑으로, 사랑에 다가서려는 '기다림'으로 나란히 보폭을 맞춘다. 세상이 뚫어 놓은 구멍에 갇혀 있던 마음은, 작고 우스꽝스럽지만 조심스러운 동행 속에서 타인을 위한 마음의 자리를 점차 넓혀 나간다. 위로라고도 할 수 있겠고, 따뜻한 성장담이자 희망의 이야기라고 잘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김금희는 그렇게 이분법적인 구분과 봉합으로 쉽게 달아나지 않는다. 이 소설은 '경애의 마음'을 향해, '경애(敬愛)의 마음'으로 변해 가고 흔들리는 여기의 이야기이지, 이곳의 비참과 비루함으로부터 홀연히 떠난 낭만적 사랑의 판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사를 이끌고 가는 인물은 상수인데, 물론 처음부터 그가 그러한 능동성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상수가 능동적 인물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입사 의식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인데, '공+상수'라는 이름은 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이중적 기호이다. "미망에서 깨어나게. 공상수 씨, 어차피 세상일 다 공한 거야."(3:289)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공'이라는 성은 세상일은 다 헛된 것이니 적당히 순응하고 받아들이라는 상징의 질서를 대표하지만, 상수(常數)라는 이름은 그 무수한 변수와 공란들에도 불구하고 불변하는 자기만의 윤리와 질서를 함의한다. 상수의 무게는 바로 이 '공'과 '상수' 사이에 빚어지는 함수의 불균형성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젊은 작가들의 시와 소설에서 반복되어 온 억압적인 아버지들의 세계와 반항하는 아이들의 순수성은 공상수라는 이름 하나에 집약되어 투영된다. 앞선 작품들이 반항하는 아이들의 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옹호하는 쪽을 선호해 왔다면, 김금희는 이 이율배반의 문제를 처음부터 아버지+아들이라는 공동의 짝패로 규정지음으로써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의 폐쇄성으로부터 벗어난다.
      상수는 여러 면에서 이중의 삶을 살아간다.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회사의 룰을 벗어나는 자기 원칙을 주장해도 잘리지 않을 수 있는 '팀장대리'이며, 밤에는 '언니는 죄가 없다'라는 연애상담 페이지를 운영하는 '언니'의 삶을 살아간다. 그가 이러한 이중의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뒤를 받쳐 주는 단단한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회사에선 회장의 재수학원 동기이자 전직 국회의원인 아버지가 그를 보호해 주고(물론 상수는 이를 부인하지만 그럴 작정이었다면 벌써 회사를 떠났어야 했다), SNS 속에선 철저히 신분을 감춰 주는 가상의 네트워크가 지켜준다. 상수의 안전하고 순수한 저항이 무탈하게 유지되는 것은 상수가 투쟁을 통해 얻어낸 보상 때문이 아니라, 기성의 질서가 마련해 준 비간섭의 공란 덕분인 것이다. 그가 가치가 부재하는 회사의 질서에 대해 제기하는 이의들, '언니'로서 쏟아내는 날카롭고 유쾌한 독설들은 때로 놀랍도록 명쾌하고 선명하지만 진짜 적은 맞추지 못한다. 진짜 적은 적당히 맞추며 살아가라는 타락한 세상의 윤리나 여자들을 가볍게 보는 못난 남자들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상처를 자신의 힘으로 마주하지 못한 채 아버지 혹은 네트워크가 마련해 준 반항하는 아이의 자리에서만 세상을 이해하고 재단하며 살아온 자신의 무능이기 때문이다.
      공상수가 공+상수의 공생을 벗어나 스스로의 마음에 귀 기울이게 된 것은 그와 어딘가 비슷하면서도 다른 경애와 접촉하면서부터이다. "서로가 서로를 채 인식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니 어디엔가 분명히 있었던 어떤 마음에 관한 이야기였다."(3:352)며 상수가 스스로의 이야기를 정리하듯, 경애는 상수에게 가장 낯선 존재였지만 동시에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경애에게는 상수와 달리 '공'의 자리와 여지가 부재한다. 적당히 맞춰 살라는 강압은 넘쳐나지만, 어느 누구도 보호해 주지 않는다. 저항하고 파업하지만 부정과 폭력은 파업의 연대에서조차 경애를 겨냥한다. 그러니 경애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마음을 닫아거는 것뿐이다. 함부로 이해하고 괄시하는 '공'의 시선으로부터 자기 내면의 진실을 지키기 위해 어떤 희망도 섣불리 갖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자신을 지킨다. 그것이 경애의 윤리다. 살아남기 위해, 낙인찍힌 회사조차 그만두지 못하고 그대로 다니지만 적어도 경애의 내면에서 타협은 불가능하다. "그 얼어서 풀리지 않는 마음"(3:348)은 어떤 도피처도 없이 매 순간 상실의 자리(E, 산주의 자리)와 마주하고 있기에 유지되는 것이며, 경애는 그 절망적인 낭떠러지 앞에 내몰리고도 눈감지 않는다.
      이 위태로운 자세는 상수의 내면에도 변화를 일으키는데, '언니는 죄가 없다' 페이지가 해킹당한 후 이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와 마주하게 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남자이면서 '언니'인 척 행세했던 자신의 기만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책임지지 못하는 무능. 자신이 그토록 비판했던 아버지와 어느 순간 닮아버린 자신을 견디지 못하는 무능. 타인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그들을 계속 속임으로써 스스로를 실망시키고야 마는 무능. 상수가 그 무능의 길을 멈추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을 가지기로 한 건, 어떤 타협도 거부한 채 태연히 1인 시위를 계속하는 경애의 마음, 정확히는 그 오랜 견딤을 기다리는 마음의 자세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라는 것, 자신을 방기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3:349)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으려는 마음. 이는 자기 고유의 윤리를 지키기 위해 단순히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걸어 닫는 자폐도 아니고, 끊임없이 내면을 학대하는 자책도 아니다.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기 위해 스스로를 돌봄으로써 자신의 약함이 추악한 무언가로 변질되지 않도록 다스리는 일은,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며 스스로를 채근하는 일체의 타협과도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자기 내면의 진실을 간절히 기다리며 견디는 경애의 자세, 혹은 그러한 경애를 기다리는 상수의 자세는 섣불리 죄와 순수를 가르기 전에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다. 어찌 보면 너무도 간단해서 허탈하기까지 한 이 '최선'이라는 말, 무려 마이클 조던이 상수의 어머니에게 했었을, 그러나 스포츠 스타가 다수의 팬에게 할 수 있는 지극히 의례적인 이 말은 수없이 반복되곤 하는 상투적인 수사로 퇴락해선 안 되는 말이다. 최선의 마음에 이를 수 있는 최선의 말을 찾기 위해 『경애의 마음』은 상수와 경애가 비로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마주할 수 있게 되기까지 그 긴 과정을 성실히 따라간다.
      흥미롭고 유쾌한 연애 이야기로 읽을 수 있을, 어찌 보면 별다른 일조차 일어나지 않는 일상의 면면들이 '최선을 다해 기다리는 마음'을 아프게 요청하는 것은 이 소설이 깔고 있는 사회적 현실의 무게가 결코 녹록치 않은 까닭이다. 아이들이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갈까 봐 불이 난 가게의 문을 잠그고, 혼자만 아는 통로로 빠져나와 살아남았다는 술집 사장의 이야기는 실재했던 1999년 인천호프집 화재사건이기도 하지만 또한 세월호 사건의 비극과도 참담하게 겹친다. 죄의 책임을 제대로 묻지도 않은 채 서둘러 또 그 위기의 시간을 넘겨온 우리들의 '초라함'은 이 소설이 배음으로 깔고 있는 잔혹한 현실이며, 사소한 불법과 거짓쯤은 관례처럼 그냥 받아들이며 살아야 한다는 소설 속 무수히 많은 인물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를 활발히 휘젓고 다니고 있다. 물론 『경애의 마음』이 문제 삼는 그 지점으로부터 우리 사회는 그래도 얼마쯤은 더 나아갔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얼마쯤'에 만족하는 순간, '최선의 마음'은 지금의 현실을 봉합하는 수구의 논리로 돌변하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는 윤리적 선택은, 그 윤리 기준의 타당함과 보편성을 떠나 결국엔 어떤 식으로든 폭력적 원리규정으로 작동할 위험이 있다.
      이 '마음'의 자리를 다시 살피기 위해, 김금희의 소설이 한결같이 가장 먼저 요청하는 것은 자기 마음의 무능과 마주하는 일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둘러 입은 마음의 맹점들을 내려놓은 채, 혹한의 냉소도 폭염의 희망도 접어 두고 자기 마음의 폐허 앞에, 벌거벗은 마음의 영도 앞에 바로서는 일이다. 마음의 영도 앞에선 어떤 마음도 완전히 종결되지 않는다. 부패도 치유도 망각도 없이 하나의 마음이 불러일으킨 파문 속에서 자신도 또 하나의 파문이 되어 가는 온 생을 지켜봐야만 한다. 그러니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3:176)라는 상수, 아니 '언니'의 말은 단순한 한 마디 말의 위로로 소모되지 않는다. 부스러진 마음과 함께 사는 것이 인생이니 무리해서 정리하려 하지 말라는 '언니'의 위로가 경애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순간은, 경애 역시 자기 마음의 무능과 온전히 직면하고 난 뒤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 무능을 고백하고 마음의 영도와 마주할 기회를 김금희의 소설을 통해 가까스로 다시 얻는다. 마음으로 이해했어야 할, 두렵고 고통스러워 그저 묻어 두었던 지나가 버린 마음숙제를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뒤처져버리는 굶주린 시대의 한복판에서 가까스로 맞닥뜨린다. 마음에 속지 않고 최선에 속지 않기 위하여, 초라해지지 않기 위하여, 최선의 마음으로 또 하나의 계절을 견딘다. 기다린다.

 

 

 

 

 

 

 

 

 

 

 

 

작가소개 / 이철주

201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경희대 일반대학원 국제한국언어문화학과 박사 수료.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강사.

 

   《문장웹진 2018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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