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향과 영향들 - 송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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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비평가 특집]

 

최근 몇 년 간 한국문학의 흐름은 그야말로 숨이 가쁠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한국문학은 달라져야 했고, 달라지고 있으며, 또 계속해서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도 더 많은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수많은 변화의 외침은 지금도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제 막 자리매김한 '젊은'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부탁했다. 이들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습을 비트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어갈 한국문학의 풍경을 기대하며 '기획'의 지면을 연다.

 

 

 

영향과 영향들
― 액티비즘의 방식에 관한 단상들

 

 

 

송민우

 

 

 

 

      관습적인 문학성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요청에는 탈신성화에 대한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인간 누구나 아름다움을 느끼는 능력이 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다면, 관습적인 문학성에 대한 의문을 부치는 이 움직임은 결국 아름다움을 느끼는 능력의 지각변동과 관계된 것일지 모른다. 물론 이때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고정불변의 아름다움이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발 딛고 있는 현실의 폭력과 예술은 당연히 영향 관계 속에 놓여 있다. 현실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 물음들은 예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될 수밖에 없다. 최근 미학 개념과 함께 등장한 문학의 자율성 담론에서 '자율성'은 근본적으로 개인의 자유 문제와 연결되어 있으나, 그것은 예술가 개인의 법을 초월한 행위에 대한 자유가 아니라 정신(Geist)을 통한 자유를 의미한다. 2000년대 초 문학의 자율성의 이론적 함의를 생산자(작가)―텍스트(작품)―수용자(독자)라는 3항 도식을 통해 구분했던 김태환의 글은 다시금 시사점을 제공한다. 김태환은 자율성의 문제를 생산자, 텍스트, 수용자의 입장 중 어느 곳에 두고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생산자 중심의 자율성은 정치권력과 사회적 압력으로부터의 검열 해방을 함축한다. 텍스트 중심의 자율성은 미적 가치에 대한 맹목성('예술을 위한 예술')의 발현을 함축한다. 수용자의 자율성은 정치권력의 금서조치로부터 벗어나 텍스트 해석으로부터의 해방을 함축한다.1) 한편, 최근 한국 문학을 둘러싼 요청들은 2000년대 초를 기준으로 두고 봤을 때 생산자/텍스트에서 수용자 중심으로의 이동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오늘날 상황에 비추어볼 땐 그 의미와 맥락을 다르게 해서 봐야 한다. 최근의 경향성이 수용자 중심으로 그 무게가 기울어졌다는 것은, 말하자면 정치권력의 금서조치와 같은 탄압이 문제라는 게 아니라 수용자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관점에 변화가 왔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문학의 미적 경험의 인식에 근본적 변화가 왔다는 것을 의미하고, 비가시화 되어 온 한국 문학 독자라는 존재가 페미니즘과 퀴어와 관련한 독자의 가시화로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이 변화의 흐름 속에서 던져진 유의미한 질문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것이 아닐까. '한국 문학은 그동안 누구에게 즐거웠던 것인가?'
      이와 관련해선 문화연구자 오혜진의 비평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문화/과학》, 2016년 봄호)이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오혜진의 비평이 한국 문학장에 일으킨 균열의 효과 자체를 부정할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물론 오혜진의 비평은 여러 차례 비판받은 바 있다.2) 하지만 오혜진의 저 비평이 없었다면 아마 한국 문학을 둘러싼 젠더 규범에 근거한 인식틀은 더 늦게 찾아왔거나 영원히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혜진의 비평은 "시장패권주의"와 결합된 "'이성애자―남성―지식인들의 문학'이라는 한국문학(사)"3)의 관습성을 해체하기 위한 것으로, 이때 조롱의 언어는 현실의 변화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4) 지난 2년의 시간 동안 찾아온 변화를 이제 쉽게 감지할 수 있다. 특히 감지되는 요소는 저자/독자의 젠더적 위치 문제에 대한 것으로 주체의 가정된 중립성이 탈은폐로 이어지는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 지점에서 문학평론가 장은정의 비평적 주체에 대한 비판 및 반성을 살펴보도록 하자. 장은정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박상수가 김행숙의 시 「하이네 보석가게에서」(『사춘기』, 문학과지성사, 2003)를 독해하는 과정에서 시의 화자를 "비―트랜스 여성이자 이성애자로 '당연하게' 전제"하는 것을 두고 비판한다. 장은정은 이어 화자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는 비평적 주체는 누구인가?"5)라고 묻는다. 이것은 젠더적 한계가 가져오는 잘못된 해석 결과를 짚은 것이자 비평적 주체들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반성을 함의한다. 장은정은 앞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으며 글을 읽고 쓰는 주체의 위치와 함께 문학에 대한 비평의 작용의미를 치열하게 고민한다.6) 문학평론가 양경언도 "우리는 시를 통해 어떤 목소리를 듣는가? 그 목소리를 듣는 '우리'는 누구"7)인지 묻는다. 또한 사회적 성원권과 결부되어 있는 문제의식 속에서 삶다운 삶의 가능성과 젠더 규범에 따른 비평의 독해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사회적 성원권은 인정투쟁과 분배 방식의 문제, 즉 권력과 정치학의 문제다. 물론 이 지점에서 경계해야 되는 것은 김현경의 말대로 인정투쟁을 "인간의 본질"과 "실존적 조건"8)(헤겔주의 및 라캉주의)으로 환원하지 않는 것이다. 사회적 성원권은 결국 환대의 문제지만 소속감, 법적 지위, 사회성과도 구분되어야 한다.9)
      한국 문학 기존의 독해를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을 통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일련의 흐름은 여성과 퀴어의 존재를 여전히 '이등 시민'으로 취급하는 현실과 '자기결정권'의 문제와 맞물려 있다. 미투 운동과 퀴어 축제는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등장한 텅 빈 공간을 채우는 투쟁이라는 점에서 혁명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텅 빈 공간에는 혁명을 통해 권리의 문제를 욕망하는 주체들이 당연히 참여하지만 문제는 이들의 전진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는 기득권 세력도 얼마든지 이 텅 빈 공간에 침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루소의 민주주의 이론은 표면적으론 평등의 가치를 내세웠으나 실질적으론 '시민/정치적인 것=남성/남성적인 것'이라는 등식을 통해 개인과 시민으로부터 '여성'을 배제하는데, 캐롤 페이트먼은 루소를 포함한 다수의 정치이론가들이 이 도식 속에 갇혀 있었음을 비판한 뒤 여성과 정치적인 것의 중요성을 언급한다.10) 말하자면, 한국 사회의 질서 재편 투쟁 과정에는 루소의 이론처럼 '근대적 한계'에 갇힌 반발 세력과의 충돌이 필연적이라는 것이다.11) 『내게 무해한 사람』(문학동네, 2018)과 『쇼코의 미소』(문학동네, 2016)와 같은 최은영의 소설과 『너무 한낮의 연애』(문학동네, 2016)와 『경애의 마음』(창비, 2018)과 같은 김금희의 소설을 비롯해 윤이형, 박민정 등의 소설12)이 독자와 평단의 지지를 고루 받고 있는 것은 한국 사회에 속해 있는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삶의 폭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때의 독자를 일상과 사랑이 지니고 있는 가치의 중요성을 문학을 통해 향유하고자 하는 존재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문학의 일 중 하나는 이 가치들을 섬세한 방식으로 보존하고 공유하는 것일 테다. 지난 10년 한국 문학장의 정동 이론의 확산도 이와 같은 가치의 공유 문제와 어느 정도 결부되어 있을 것인데, 그것과 무관하다 볼 수 없는 개념의 차원에서의 '윤리'가 "오염"되었다는 것, 윤리가 작가를 판단하는 "최상위 개념"으로 취급되는 문제에 대한 비판도 있었고, 물론 윤리 개념만이 문학을 둘러싼 유일한 기준이 되어선 안 되지만, 나는 여전히 우리가 얼마간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13) 또한, 나는 이 태도가 오늘날 문학비평에도 더 적극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아무래도 '좀비비평'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문학과 문학비평의 변두리화와 비평의 죽음 문제를 언급하며 "비평은 제도로서 유지되고 있을 뿐 죽었으나 죽지 못하는 좀비비평으로서 연명"14)한다는 문학평론가 소영현의 진단은 문학과 문학비평이 처한 현실 문제를 환기한다는 점에서 자못 심각하다. 단순히 '문학의 죽음'이나 '비평의 죽음'과 같은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빈약하고 악취미적인 담론과는 다소 다른 문제제기다. 소영현은 '감성적 사유로서의 사회비평 선언'이라는 돌파구가 비평의 존재 의미에 그 타당성을 부여할 것이라고 본다.15) 물론 소영현의 사회비평 선언의 모순과 모호함에 대한 지적은 이미 제시된 바 있다.16) 한편, 한국 문학장에서의 비평의 위기 문제는 세대의 차원에서 젊은 문학평론가들로 호명된 이들도 상세히 논의한 바 있다. 이들의 논의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비평의 위기는 한국 문학비평이라는 담론의 매력 감소, 특권적 기표로서의 본격문학의 게토화, 현재의 비평적 글쓰기 모델의 무용성, 텍스트 독해에 대한 비평의 설득력 및 이론적 클리셰로의 환원 문제, 작품―독자―비평이라는 해석 충돌 장의 부재 등에 그 원인이 있다.17) 한국 문학비평의 영향력을 대중적인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발휘하고 있는 이들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문학평론가 김현, 황현산, 신형철 등이다. 이 와중에 문학평론가 홍정선의 비평은 문제적인데 이것은 게으른 진단이다.18) 어떤 문제건 간에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해결되지 않는 게 아니라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어쨌건 문학비평의 위기 문제도 마찬가지다. 《문학3》, 《비유》, 《문장 웹진》 등의 웹 플랫폼과 <요즘비평포럼>19), 소설가와 시인들의 낭독회20) 등 독자와 직접 마주하려는 문학장의 다양하고 긍정적인 실천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1년 넘게 펼쳐지고 있는 문학평론가들의 이른바 미학과 정치 논쟁이 대중적인 차원에서의 영향력은 발휘되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이때 중요한 것은 영향력의 '크기'가 아니라 영향력이 발휘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21) 생각해 보면 '미래파'건 '근대문학의 종언'이건 '문학의 정치'건 한국 문학은 지속가능한 담론 투쟁 장이었다. 최근 강화길, 조남주 등 여성소설가의 여성/스릴러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한 비평들22)이나 황정은의 중편소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웹 《문학3》, 2017)와 박상영의 단편소설 「알려지지 않은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문학동네》 2017년 가을호)가 보인 촛불혁명 이후 누락된 소수자성의 자리를 정확히 짚은 문학평론가 강지희의 비평23)은 한국 문학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누군가를, 다른 사람들을, 세계를) 사랑할 수 없는 무기력. 결국 불행하다는 것은 종종 타인들에게 뭔가를 주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롤랑 바르트가 중세 때의 단어 '아세디'(acédie, 낙담)를 언급하며 무기력의 문제를 말했던 건 '글쓰기를 통한 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글쓰기를 선택한 사람, 다시 말해 글쓰기의 쾌락, 글쓰기의 행복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 새로운 글쓰기의 발견 말고는 다른 새로운 삶24)"이 없을 것이라는 바르트의 말을 재맥락화 해 말하자면,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것은 사랑이고 그것은 그냥 사랑은 아니다. 문학이 지향해야 하는 사랑은 도달 가능한 지점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도달 자체에 초연한, 완결되지 않을 무한한 운동성을 지닌 사랑이다. 새로운 문학성은 상처로부터 또 어둠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할 때, 다만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걷고자 할 때, 찾아올 것이다. 미래는 여기서 시작되어야 한다.

  1)  김태환, <자율성 개념과 문학사회학>, 《문학과사회》 2001년 가을호, 1061-1063쪽.
  2)  대표적으로 문학평론가 정홍수와 백지은의 비판이 있다. 정홍수는 오혜진의 비평에는 비평의 언어가 아니라 "증오와 적의, 냉소와 조롱으로 가득 찬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억견(臆見)과 단죄의 언어"가 있다고 받아들인다. 정홍수의 비평에서 어떤 환멸감을 느끼는 일은 어렵지 않다. 정홍수는 비평의 위기에 대해서는 "최근 한국 문학의 상황과 관련해서 종종 이야기되는 '비평의 위기'는 자명한 것도 아니고, 처방의 출발점도 될 수 없다."며 지금 시대는 비평의 존재 방식이 달라졌다고 진단한다(정홍수, <당신은 왜 한국 문학을 걱정하는가>, 《문학동네》 2016년 여름호, 568-569쪽.). 백지은은 오혜진이 조롱의 기표로 쓴 'K문학'이 재현장치로서의 '한국 문학'에 대한 무능을 지적한 일로 파악한다. 백지은은 "어떤 것이 무능한가가 아니라 어째서 무능한가를 물어야 한다."고 물음으로써 문제의식을 확장한다(백지은, <'K문학/비평의 종말'에 대한 단상(들)>, 《문장 웹진》 2017년 2월 1일, https://webzine.munjang.or.kr/archives/15136).
  3)  오혜진,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 《문화/과학》 2016년 봄호, 105쪽.
  4)  오혜진은 한 문예지 대담에서 문학(장)에서의 '재현'이 가져오는 자연화의 심각성을 경계하고, 비평적 개입을 통한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재현'은 불가피하게 현실을 자연화 하는 효과를 지닙니다. '여성혐오 작품이 싫으면 네가 안 읽으면 되잖아' 이렇게 말하고 끝낼 수 없다는 거예요. 여성혐오 텍스트는 여성혐오를 현실의 일부로 계속 재생산하니까요. 그건 분명 강력한 비평적 개입을 요합니다."(강동호 · 박인성 · 오혜진 · 이우창 · 황현경, <우리 세대의 비평>, 《문학과사회 하이픈: 세대론―픽션》, 2016년 가을호, 93-94쪽.) 이는 오혜진 비평이 겨냥한 실효성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준다.
  5)  장은정, <아카이브로서의 시>, 《문학3》 2018년 2호, 23쪽.
  6)  장은정은 비평적 주체로서의 자신을 향한 비판 및 반성을 그 이전에 발표한 비평에서는 문학적 감각을 상술하는 것에 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탈역사적인 것에서 미적인 것을 발견해 왔던 나의 감각이야말로 고통에 공감하기보다는 관조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현실을 부인하기 위해 문학을 동원해 왔던 것은 아닐까?"(장은정, <침투>, 《문학과사회 하이픈: 문학성―역사들》, 2017년 봄호, 37쪽.)
  7)  양경언, <최근 시에 나타난 젠더 '하기'(doing)와 '허물기'(undoing)에 대하여>, 《문학동네》 2017년 여름호, 463쪽.
  8)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63쪽.
  9)  같은 책, 64-72쪽.
  10)  캐롤 페이트먼, 『여자들의 무질서』, 이평화 ·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 b, 2018. 특히 4장과 9장 참조.
  11)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혁명은 온라인의 안티―페미니즘과 반―다문화주의 세력과 충돌을 피할 수 없을 듯하다. 안티―페미니즘과 반―다문화주의 세력은 스스로 차별과 혐오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문제적이다. 김성윤은 일자리 문제에 특히 민감하다는 근거를 통해 20∼30대 젊은 남성들이 이 세력의 주축일 것이라 추정한다. 그리고 이들이 어느 지점에서 박탈감을 느끼는지를 중심으로 젠더 이퀄리즘의 정서구조 및 반다문화 담론과 우익포퓰리즘의 공명 문제를 분석한다. 김성윤의 분석대로라면 이 반발 세력을 방치하는 것이야말로 더 큰 위험을 낳는다(김성윤, <"우리는 차별을 하지 않아요": 진화된 혐오담론으로서 젠더 이퀄리즘과 반다문화>, 《문화/과학》, 2018년 봄호 참조.).
  12)  이들 외에도 최은영, 황정은 소설에 대해 논의한 비평으로는 차미령, <너머의 퀴어: 2010년대 한국소설과 규범적 성의 문제>, 《창작과비평》 2017년 여름호 참조.
  13)  황현경, <윤리냐 도덕이냐>, 《문학과사회》 2017년 겨울호, 406쪽. 문학평론가 신형철에 대한 문학평론가 황현경의 비판은 '윤리'와 '윤리적'이라는 표현을 경유하는 이들이 과연 윤리에 대해 얼마나 더 사유했는지의 문제로까지 확장되는 것처럼 보였는데, 물론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신형철이 윤리를 최상위 개념으로 취급해 작가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판가름한다는 지적은 다소간 오해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내 생각에 신형철의 비평들은 윤리적 가치만을 중시하거나 윤리적 가치의 유무에 따라 작가를 판단한 게 아니라 항상 미학적 가치와 정치적 가치도 함께 염두에 두었다.
  14)  소영현, <좀비비평 혹은 비평의 유령>, 『올빼미의 숲』, 문학과지성사, 2017, 53쪽.
  15)  같은 책, 223-242쪽.
  16)  김형중, <빚을 갚아야 할 시간>, 《문학과사회》 2017년 겨울호. 특히 "비평의 다성화는 비평의 사사화와 어떻게 구분 가능한가", "문학비평은 사회비평에 의해 대체되거나 흡수되어야 할 영역인가 자율적인 영역인가"(421쪽)와 같은 문학평론가 김형중의 지적은 소영현이 놓친 지점을 명확히 드러낸다.
  17)  강동호 · 박인성 · 오혜진 · 이우창 · 황현경, 같은 글, 81-101쪽.
  18)  홍정선은 "공적인 장의 부재와 젊은 비평가를 착취하는 출판 제도와 관행"의 문제를 지적한 '일부 젊은 비평가들'의 진단을 놀랍게도 문제를 외부로 돌리는 책임회피라고 단언하고, 비평의 내부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물론 비평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나, 비평의 내부'만' 문제라는 지적을 통해서 절묘하게도 외부의 문제를 가려버리고 만다. 이것은 한국 문학비평(가)을 둘러싼 외부 환경의 궁핍함을 개선하지 못했거나 혹은 악화시킨 문제에 대한 치명적 회피고, 비평가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넘기려는 태도다. 문제와 책임에 대한 이 '안전한 거리두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한 홍정선은 '비평의 위기'에 대해서 "비평의 이러한 위기를 진지하게 진단하며 활로를 모색하려는 노력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오늘의 비평은 위기를 위기로 인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기반성적 기능마저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동안 비평의 위기 담론에 대한 진단이 부재했던 게 아니라 그 스스로 그것들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홍정선에 따르면 오늘날 비평의 위기가 온 것은 "성실하고 부지런한 작품 읽기라는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풍토" 때문이다. 이런 식의 지적은 익숙함을 넘어서 게으른 것이다. 홍정선은 놀라울 정도로 '성실하게 읽기'를 강조한다. "동시대의 작품 속에서 비평 행위의 즐거움을 발견"해야 한다는 '요구'는 외부 문제에 대한 논의와 개선은 제쳐 두고 오로지 비평가 개인에게 '더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무의미하다. (그런데 익숙하지 않은가? 특정 세대 혹은 개인에게 '게으름'을 지적한 뒤 '성실함'을 요구하는 것 말이다) 홍정선의 핵심 주장은 "성실한 작품 읽기로부터의 비평"이 아니라 "지식으로부터의 비평"에 문제가 있다는 것일 테다. 일견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개별 비평의 부정적 사례들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불러올 최종적 효과는 과연 무엇인가? 결국 비평가 개인에게 죄책감과 환멸감을 부여할 뿐이다. 첨언하자면, 개별 비평의 부정적 사례들을 마치 '전체 일반'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도 문제다. 결코 짧지 않은 글을 통해 홍정선이 하고 싶었던 건 결국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자'는 전언뿐이다. 이런 진단은 안 하니만 못한 것이다(홍정선, <비평의 숙명으로서의 작품 읽기>, 《쓺》 2017년 하권, 150-161쪽.).
  19)  창비학당과 함께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최근 비평장에 대해 논의하는 포럼이다. 2018년 3월 29일부터 시작됐다.
  20)  이와 관련해 김수환의 비평은 흥미로운 논점을 제공한다. 김수환은 "혁명적 아방가르드의 쇠퇴기"로 간주되는 1927~1932년의 시간을 주목해 그 당시를 "정치, 사회, 문화, 예술" 등의 분야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이행기"로 파악한다. 김수환은 이 당시의 예술 기획 중 하나였던 '팩토그래피(factography)'를 소개하는데, 팩토그래피는 간단하게 말해 현실의 '재현'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현실을 '변형'시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생존의 기술"이자 "대안적 글쓰기의 모델"이다. 그런데 김수환의 말대로 이것은 지식인으로서의 작가가 현장 투쟁을 해야 한다는 1980년대식 사유와는 거리가 멀다. 매체 변화의 시대 속에서 문학은 현실에 대해 어떤 참여가 가능한지 그 대표적인 방법론으로서 김수환이 예시를 든 것은 '작가와의 만남', '텀블벅 후원 모금', '낭독회', '프로젝트 홈페이지 제작' 등이다. 한편, 김수환은 팩토그래피를 실천한 세르게이 트레티야코프(Sergei M. Tretyakov)의 말을 인용해 일기, 여행기 등 "유사―다큐멘터리적인 산문"(김수환, <기원적 물음을 찾아서: 소비에트 팩토그래피라는 동시대성>, 《쓺》 2017년 하권, 27-49쪽.)으로서의 '오체르크(ocherk)'식 글쓰기를 언급한다. 김수환은 글쓰기의 모델의 방향성 측면에서 정지돈과 조남주의 소설을 나란히 놓을 때 새로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블랑쇼, 바르트, 페소아, 제발트 등의 글쓰기 형식을 떠올려 보는 것도 충분히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요즘도 문학이 일기나 보고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의견들을 발견하곤 하는데, 보수적인 문학주의라 생각한다. 예술에서의 경계 해체 자체가 하나의 흐름인 상황에서 문학에 대한 기존의 문학다움을 강조하는 건 생산적이지 않다.
  21)  다만 이 논쟁의 한 축을 자연스럽게 담당하게 되어버린 문학평론가 복도훈의 최근 비평들은 다소 우려스럽다. 복도훈은 "선의와 정의감, 공감 능력으로 충만한 익명의 천사들이 부르는 단일하고도 단조로운 고음의 합창"이라며 조소를 숨기지 않는데, 이때 "익명의 천사들"이란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SNS 이용자들을 염두에 둔 것일 테다. 그러나 온라인상의 익명적 존재들을 '적'으로 규정해 일반화하는 것은 결코 생산적인 일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복도훈의 일련의 비평 작업도 '문학의 자리'에 대한 고민이었겠으나 고민의 방향성에 대해선 의문이다. 구병모, 도선우 등 특정한 작가/작품을 경유해 외부 현실에 대한 불만을 비평을 통해 표출하는 것의 최종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물론 나는 복도훈의 비평 작업을 배타적으로 바라보는 걸 경계하고 싶다. "정치적 현안과 인권이 소중하다면 (……) 실존의 수수께끼에 대한 상상과 숙고, 그것을 빚어내는 형식"(복도훈, <'정치적으로 올바른' 소송의 시대, 책 읽기의 어려움>, 《쓺》 2017년 하권, 80-101쪽.)도 뒤로 밀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 복도훈 주장의 핵심일 것이다. 타인에 대한 도덕주의적 강요와 단죄의 욕망이 비판되어야 할 대상인 건 맞다. 그리고 논쟁이 불러일으키고 있는 '운동성'의 보존 또한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복도훈의 일련의 비평에 대해 전반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다는 점은 분명히 밝혀야겠다. "언어를 정동과 신체로 간주하는 의미론"의 사례들로 진은영과 이영광의 세월호에 대한 시, 정용준의 장편소설 『바벨』(문학과지성사, 2014)을 언급하며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쓴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문학평론가는 앞으로 누가 아프다고 쓰면 아프다고 부르르 떠는 사람이어야 하겠다."고 말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례하다. "감정에의 현저한 언어적 몰입이 인간과 세계를 파악하는 불가항력의 최종심급"(복도훈, <유머로서의 비평―축제, 진혼, 상처를 무대화한 비평의 10년을 되돌아보기>, 《문학과사회 하이픈: 메타―크리틱》, 2018년 봄호, 90-122쪽.)이 됐다는 것이 복도훈의 불만인데, 비판적 독해의 꼼꼼함에도 불구하고 결론에 제시한 '유머로서의 비평' 역시 동의할 수 없다. 지금은 유머가 아니라 과녁을 정확히 바라보는 '싸움'이 필요한 때다. 그리고 상처에 관한 문제는 언제나 세심하게 접근해야 한다.
  22)  양윤의, <잠재적인 것으로서의 서사―강화길론>, 《문학동네》 2017년 가을호; 김미정, <흔들리는 재현·대의의 시간―2017년 한국소설 안팎>, 《문학들》 2017년 겨울호; 오혜진, <비평의 백래시와 새로운 '페미니스트 서사'의 도래>, 《21세기문학》 2018년 여름호; 오혜진, <'즐거운 살인'과 '여성스릴러'의 정치적 가능성―강화길 「서우」>, 『ASIA』 2018년 여름호.
  23) 강지희, <광장에서 폭발하는 지성과 명랑>, 《현대문학》 2018년 4월호.
  24)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변광배 옮김, 민음사, 2015, 31쪽. 강조는 원문.

 

 

 

 

 

 

 

 

 

 

 

작가소개 / 송민우

문학평론가.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으로 등단. 조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 과정 재학.

 

   《문장웹진 2018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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