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순수’한 사랑의 현전 -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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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비평가 특집]

 

최근 몇 년 간 한국문학의 흐름은 그야말로 숨이 가쁠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한국문학은 달라져야 했고, 달라지고 있으며, 또 계속해서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도 더 많은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수많은 변화의 외침은 지금도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제 막 자리매김한 '젊은'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부탁했다. 이들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습을 비트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어갈 한국문학의 풍경을 기대하며 '기획'의 지면을 연다.

 

 

 

아무것도 아닌, ‘순수’한 사랑의 현전
– 이성복의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에 부쳐

 

 

 

김정현

 

 

 

 

1. 슬픔의 두 가지 이면

      이것은 위안이다. 즉 오로지 위안에 대한 희망을 더는 갖지 않는 자들에게만 있을 수 있는 위안이다. "비탄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이 골짜기의 어둠과 혹한을 생각하라"

–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관련 노트들」

 

      조금은 은유적이고 쓸쓸한 말들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이 글 앞에 놓인 슬픔의 두 가지 이면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 말이다. 매우 단순화될 위험을 무릅쓰고 말해 본다면 하나의 슬픔은 젊은 시인들이 지닌 전위성의 이면이며, 다른 하나는 한 현역 시인의 슬픔이라 칭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 글은 대가급에 오래전에 들어섰다고 '보이는' 한 시인의 존재가 왜 지금 여기에서 호명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을 위해 쓰여졌다는 점을 밝혀 두어야 할 것 같다. 덧붙여 두 가지에 대해 양해를 구해야 한다. 하나는 서두에 이어질 젊은 시인들의 전위성에 대한 논의는 일종의 편견과 의도된 오독에 불과하다는 점. 그리고 둘째는 한 현역 시인의 말들이 던져 주는 내면과 그에 덧붙여질 교훈을 이해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글이 약간 복합적인 흐름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
      이성복의 근작 시집 『래여애반다라』를 다루기 전에1), 우선 이 글은 다른 방향에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이는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문단의 논쟁적 흐름들, 즉 '근대문학의 종언과 미래파 논쟁, 시-정치론 논쟁'2)까지 이어진 전위성과 미학성, 윤리성에 대한 현재적 담론들이 무의미하다는 일방적 결론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이야기되었던 문제를 통해 우리가 한국 문학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실질적으로 '무엇'을 말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미 지적되었듯이 2000년대로부터 이어진 오늘날의 시인들, 이른바 미래파의 원동력은 "서정적 자아의 음성과 시선이 부재하거나 분열"되어 있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이들은 "서정적 자아가 소실, 증발, 해체, 파괴되어 일종의 감각적 무정부 상태"를 토대로 삼았으며, "어떤 철학이나 지식의 개념 없이도 충분히 우리를 매혹시키고, 감동시키고, 전율시키는 그런 예술 혹은 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시는 시에 대한 학(學) 혹은 담론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존속할 수 없다"는 사실 그 자체에 기반을 두고 있다.3) 이 '말들을 위한 말', 그것이 지금 '현재' 우리의 시이다. 그렇다. 그런데 왜? 무엇이 문제일까.
      미래파로 언급되었던 혹은 이후 시단에 자리를 잡아 가는 시인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시가 공격적이며 파괴적 충동에 가득 차 있다는 점은 명확하다. 통칭 미래파(혹은 그 이후)의 시인들이 가진 날선 언어들은 그들의 근본인 아방가르드적 입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날카로운 공격성의 이면 속에 희미한, 어떤 모멸감과도 같은 슬픔의 흔적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담론들의 각축장 속에서 크게 유의미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다.4) 오늘날의 시가 맞부딪친 한계점과 벽을 그 모멸감과 슬픔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라 지칭될 수 있을까?

  1)  이성복은 『래여애반다라』(문학과지성사, 2013) 이후 『어둠속의 시』(열화당, 2014)를 출간했으나, 이는 70~80년대에 창작해 두었던 시를 정리한 것이라 본고의 논의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이성복은 열화당에서 같이 발간된 산문집인 『고백의 형식들』과 대담집 『끝나지 않은 대화』 이외에도 최근 문학과지성사에서 『무한화서』, 『불화하는 말들』, 『극지의 시』 등 시론집 3권을 상재했다.
  2)  이에 대해서는 강동호, 「파괴된 꿈, 전망으로서의 비평」 『문학과사회』, 2013년 봄호, 336면.
  3)  김홍중,「실재에의 열정에 대한 열정 : 미래파의 시와 시학」,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406면. 세 번째에 인용된 부분은 『문학과사회』, 2008년 겨울호(141~142면)에 실린 글을 참조한 것임.
  4)  신형철, 「진실은 앓는 자들의 편에」,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204~211면.; 강동호, 앞의 글, 356~357면. 여기에서 공통적으로 미래파에 대해 언급되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선언과 실패를 반복하겠다는 것"을 통해 드러나는 "근원적인 우울"(신형철)이며 또한 "진정한 자아가 없다는 사실에 희희낙락하는 주체가 따로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진정한 자아를 끝내 찾지 못한 이의 비극적인 우울의 전경"(강동호)이다.

 

      실재의 열정이 더 이상 유효한 미학적, 정치적 전략이 되기 힘든 시대에, 실재의 열정을 읽고 구성하고 활성화하려는 이러한 역설적인 열정을 우리는 '실재의 열정에 대한 열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실재의 열정에 대한 열정은, 실재의 열정이 잦아 들어간 환멸의 시대를 사는 지식인의 냉소와 허무에 빠지지 않고, 사라졌다고 생각되는 진정한 가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갱신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그것은 실재 그 자체를 열망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열정'을 열망하는 것이며, 실재의 열정이 아직 존재함을 그리고 실재의 열정이 아직 유효함을 끊임없이 확인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세기적 전환 속에서, 모든 가치들의 종언 속에서, 실재의 열정에 대한 열정은 실재를 폐기하지도 않고, 실재를 순수하고 순진하게 '열망'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실재의 폐기와 실재의 열망 사이에서, 실재와의 '가능한' 그리고 '잠재적인' 관계를 모색하는 파토스이다. 실재와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고 밀착되지도 않는다. 그 관계는 계류된다. 계류를 통해 사유는 사유의 시간을 벌 수 있다.5)

  5)  김홍중, 앞의 글, 420면.

 

      그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매개로 사유하는 것이 바로 '계류'의 윤리성, 아감벤의 말을 빌리면 '정지'의 사건적 특성이라 할 '잠재적인 어떤 것'의 출현을 기다리는 태도란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 그런데 왜? 도대체 무엇이 문제가 될까.
      인용된 부분의 핵심을 추려 보자. 오늘날의 젊은 시인들에게 명확하게 주어져 있는 어떤 것에 대한 열망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바디우의 견해를 따라 본다면, 이들은 '결정 불가능한 어떤 것'인 '익명'의 지점(『조건들』)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이들은 모든 가치들의 불확정성 속에서 어리석은 순수를 가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슬픈 실패'를 예감하고 "고리타분한 백성들"에게 칼을 휘두르며 뛰어든 윤리적 존재들이다. 그런데, 매우 특이하게도 위의 논리는 다음과 같은 역설을 가능케 한다. 즉 지금 우리의 시는 '슬프게도' 어리석고 순수할 수 없다.(그들은 똑똑하다) 따라서 갈망할 수 없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 '슬프게도' 윤리적인 태도이다.(그들은 지성적이다) 그 미묘한 지점을 지키고 서 있는 윤리가 '슬프게도' 곧 정당성이다.(그들은 이런 점에서 복잡해 보이겠지만 명료하다) 따라서 이들은 어떤 극한적인 실패의 지점 이후에 '슬프게도' 결코 도달할 수 없다.(즉 그들은 어리석지 않기 때문에 '절망'한다) 이 도달할 수 없는 '슬픈 노래'가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의 미학적이고 전위적인 시들의 슬픔 속에 깔려 있는 어떤 본질적 형상이 아닐까?
      이를 단지 말장난으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결국 미래파(와 그 이후)를 둘러싼 무수한 논의들이 의도치 않게 알려준 사실이란 '슬프게도' 우리의 문학이 여전히 계류되고 있으며, 여전히 순수할 수 없으며, 여전히 정치적이고 윤리적이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호모사케르이자 괴물들이며, 잠재적인 가능성을 지닌 그로테스크한 시대의 존재들이(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이고 윤리적이(어야만 한)다. 좋다. 이들의 절망과 슬픔이 마주하는 저 언어의 한계지점은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말할 수 없음'에 대한 열망이다. 그런데 왜? 도대체 무엇이 여전히 문제일까.
      2000년대 이후 문단을 풍미했던, 윤리성과 정치성에 관한 논쟁들을 삐딱하게 비껴서 보자. <대사들>(한스 홀바인)의 해골이 강제하는 시선처럼. 이는 지금까지 벌어졌던 많은 논의들의 지평 그 자체가 사실은 하나의 시스템적 체계이며, 세부적인 차이를 넘지 못하는 거대한 에피스테메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논의의 세부성과 진실성과는 별개의 지점에서, 어쩌면 우리는 문학이 갖는 정치성과 윤리성을 문자 그대로 믿어버리고 어느 순간 조금은 안심해 버렸던 것이 아닐까. 그 토대는 감추어져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문학이 여전히 우리가 그저 이해해 버릴 수 있는 어떤 토대로 환원되어 버렸음을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사실 우리 스스로는 어느 정도 '적당히' 안전하며, 어느 정도 '적당히' 뻔뻔스럽고, 어느 정도 '적당히' 추상화된 지평에 서 있지 않았던가. 즉 지금 이 글이 슬픔의 오독을 통해 보려 하는 것은, 저 '적당히'란 단어가 지니는 근본적 '장소'이자 에피스테메인 셈이다.
      이른바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상상력의 밑바탕이 된 사회적 사건들. 미선이 효순이 사건으로부터 출발된 촛불들의 행렬로부터, 용산참사를 거쳐 끝나지 않는 세월호의 비극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애도'는 과연 진정으로 슬픈 것인가. (그들의 슬픔과 고통은 충분히 위로받을 가치가 있다. 바라보는 우리와 다르게 그들의 슬픔과 고통은 '직접적'이기에) 그러나 슬픔을 느끼는 '나'의 존재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가면일 수 있다. 우리의 문학들 속에서 존재하는 모멸감과 슬픔, 절망에 대응되는 무수한 감정들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변화였던가 아니면 수없이 많은 기호들의 무덤인가. 우리가 가져야만 했던,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상상력으로 호명되었던 그 많은 말들의 이면에 결국 공포와 두려움이 존재한다는 것이 '사실' 말해지고 있지 않은가.
      이 세상에서 순식간에 지워질지도 모른다는 논-픽션, 그러니까 우리는 '나'의 먹거리가 위협당하고, '나'의 잠자리가 위협당하며, '나'의 목숨이 위협당하는 그 순간에서야 비로소 두려워한다. 이러한 애도의 이면에는 공포가, 나라는 개체의 위치가 근본적으로 위협당한다는 '사실'이 있다. 사회와 국가가, 세계라는 하나의 시스템이 나의 존재를 위협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슬퍼하고 위로하려 하며, 움직이려 한다. 이러한 '흔적들'이 지금의 정치성과 윤리성이란 이름 속에 호칭되는 문학의 이면, 감춰진 모멸감과 슬픔의 본질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말하자면 의도된 소통 불가능성의 불가능성, 혹은 그 불가능성 자체를 지속하려는 슬픔의 태도. 그리하여 세계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절망하는 자들의 감정. 딱 거기까지.
      그러하기에 카프카가 보여주었던 「변신」의 마지막 장면, 그레고리 잠자의 죽음을 기뻐하던 가족들처럼 우리 모두는 출구 없는 지점에 위치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명료한 체계의 외부를 보지 못하기에 '적당히 슬픈' 어떤 것처럼.

 

 

2. "당신의 숙제" 같은 죽음의 이름이란

      인간의 삶은 극단적 소비, 우리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극단적 소비를 의미하며 그런 점에서 인간의 생명운동이 갈망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것은 고뇌조차 예외일 수 없다. 우리 내부의 모든 것은 우리를 파괴하는 죽음을 향해 있다.

– 조르주 바타유, 『에로티즘의 역사』

 

      여전히 문제인 것은 '죽음'과 '공포'의 거대한 연쇄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며, 그것에 과연 어떻게 맞설 수 있는가이다. 그러나 이는 다시 이러한 질문을 가능케 한다. '맞선다'라는 말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혹은 저 '적당히'란 말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 혹은 무엇이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것의 증명을 보장하는가? 정치성과 윤리성 그 자체가? 직설적 칼날의 언어가? 해체된 날카로운 언어의 낯선 질감들이? 네가 가진 지평의 아무것도 없음을 드러내 보여주는 놀이들이? 사실 우리 모두가 괴물이자 벌레였다는 사실이? 이 모든 질문들이 타당하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은 '진실'로 충분하지 않다. 이는 최근 시단의 언어, 즉 아방가르드적 언어의 전위적 가능성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점과 관련된다. 핵심은, 이성복의 말을 빌리자면 "어리석음은 성스러움의 태반이 된다"6)는 것을 이해하기 위한 고통과 슬픔,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정직함'에 있다. 이는 일종의 극단적인 죽음과 낭비의 또 다른 형태이며, 앞서 논의했던 것과 다른 종류의 질감을 지닌 슬픔이기도 하다.
      한 현역 시인의 근작 시집을 논하기 위해, 이 글은 지금 현재의 토대에 대해 조금 살펴본 셈이 되었다. 여전히 오해가 있을 것이므로 다시 한 번 말해 두고 싶다. 미래파(혹은 그 이후)가 보여주었던 전위성은 주목되어야 할 지금의 시가 지닌 가치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의 어떤 지점을 모색할 수 있는가에 있어야 한다. 지젝의 말처럼 똑똑한 자가 속는다. 그렇기에 이성복의 언어에서 얻어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숙하고, 바보 같으며, 또한 속음을 있는 그대로 견디어내는 '순수'한 태도와 고통의 슬픔이 아닐까.7) 따라서 그의 텍스트를 언급하는 것이 단지 서정(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또한 이를 단순히 대가의 경지라고만 말하는 것 역시 텍스트를 온전히 읽지 않는 부적절한 태도라는 점도. 이는 그의 언어가 지닌 평범함의 이면이자 그 속에 분명히 필요하고 있어야 할 것. 그것의 본래적 이름이 '고통'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에 불과할 것이다.
      이는 이성복의 초기 대표작으로 알려진 「그날」의 한 구절 "아무도 그날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언어이자 그것이 아닌 어떤 지점을 숨기면서도 노리는 것. "변형은 시의 본질이다. 나는 시각(視覺)을 시각(視角)으로 이해한다."8)라는 경구처럼, 일견 단순해 보이는 텍스트는 그의 말 그대로 보는 것의 날카로운 뿔, 하나의 거대한 고통을 내포한 알레고리적 충격의 언어로 현존하고 있다. 따라서 핵심은 그의 언어 속에 존재하는 "이념", 즉 "선험적인 진리의 소여성"9)을 인식하는 것이다. 단 그것은 잡담처럼 '평범'하게.
      그가 바뀌지 않는 태도로 끊임없이 쓰고자 했던 언어의 '순수성'. 그의 말을 빌리면 "시의 근원은 잡담이다. 혹은 잡담을 포함한 본능과 꿈과 어리석음과 철면피함. 그러나 잡담이 곧 시는 아니다."10)라는 말을 인식할 수 있는 근원적 언어를 위해 그의 시작이 지속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잡담처럼 평범하게 보이면서도, 또한 시적인 것. 이성복이 꾸준히 써왔고, (그는 분명 다작의 작가는 아니다) 그에게서 항상 들었던 말들의 울림(그의 시세계를 단순한 발전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이 지닌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선, 그의 시가 지닌 고통과 아픔의 이미지들이 언어화되는 그 '순간'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에게 언어란 고통과 고독, 슬픔의 지점들을 극한적으로 이끌어 나가야만 하는 하나의 순수성에 대한 정결한 의무이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슬픔과 고통의 언어를 진정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씌어지지 않은 것을 읽기"11)에 가까운 것들을 읽어내야만 한다.(그의 시작을 굳이 변화의 개념으로 설명한다면, 이러한 순간들을 현전하게 하는 언어의 밀도가 지속적으로 농밀해진다는 차원으로 말할 수 있겠다) 이제 다음의 시를 보자. 아주 일상적인 것 같은, 그러나 사소하지 않은.

  6)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문학동네, 2001, 43면.
  7)  이성복은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술 – '느낌'의 잔해인 '사실'로부터 '느낌'을 되살려내는 일. 즉 패총으로부터 옛날 조개를, 고름으로부터 흰피톨을 되살리는 일. 요컨대 죽은 나무에 꽃을 피우는 일. 그러므로 예술은 본질적으로 무모하고 어리석다." 이성복, 위의 책, 217면. 이성복의 이러한 시작 태도에 대해서는 『현대시』에 연재되었던 그의 「시론」(2014년 4~5월호)에 언급된 다음의 말을 참고할 수 있다. "'불가능'은 차원의 혼동 혹은 무시나 무지에서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불가능 시론」, 『현대시』, 2014년 5월호, 176면)
  8)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앞의 책, 81면.
  9)  발터 벤야민, 『독일 비애극의 원천』, 조만영 옮김, 새물결, 2008, 13~16면.
  10)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앞의 책, 56면.
  11)  발터 벤야민, 「미메시스 능력에 대하여」,『발터 벤야민 선집 6』, 최성만 옮김, 길, 2008, 215~216면.  

 

1999년, 당뇨에 고혈압을 앓던 우리 장인 일 년을
못 끌고 돌아가시고, 2005년 우리 아버지도
골절상 입고 삭아 가시다가 입안이 피투성이
되어 돌아가셨어도, 그분들이 받아온 옛날
수건은 앞으로도 몇 년이나 세면대 거울 옆에
내걸릴 것이고, 언젠가 우리 세상 떠난 다음날
냄새나는 이부자리와 속옷가지랑 둘둘
말아 쓰레기장 헌옷함에 뭉쳐 넣을 것이니,
수건! 그거 맨정신으로는 무시 못할 것이더라
어느 날 아침 변기에 앉아 바라보면, 억지로
찢어발기거나 태워버리지 않으면 사라지지도 않을
낡은 수건 하나가 제 태어난 날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나 저제나 우리 숨 끊어질
날을 지켜보고 있기 위해서 저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소멸에 대하여1」, 부분12)

  12)  이후 『래여애반다라』에서 인용하는 시는 면수 표기를 생략한다.

 

      화자의 아버지가 받아온 "1983년 상주녹동서원 중수 기념수건"과 장인어른이 받아온 "1987년 강서구 청소년 위원회 기념수건"이란 "입생 로랑이나 랑세티 같은 외국물 먹은 것들"과도 별반 다를 바 없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하나의 수건이자 사물일 뿐이다.
      "하지만 수건! 그거 정말 무시 못할 것이더라"라는 언급처럼 이 사물들은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되는 '질문'을 내포하면서 시적인 것이 될 가능성을 품게 된다. 왜냐하면 언제나 걸려 있을 평범한 수건(사물)은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장인, 그리고 나와 아내 역시 마주하게 될 '죽음'의 순간까지도 이를 지켜볼, "사라지지도 않을 낡은 수건"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늙은 화자가 '어느 날' 새롭게도 변기 앞에서 이해하게 될 하나의 성찰이란, "이제나 저제나 우리 숨 끊어질 날을 지켜보고 있기 위해서 저러고 있다"는 냉철하고도 정직한 하나의 '인식'이다. 따라서 수건이란 수건으로 말해질 수 없다. 그 사물의 본래적 형상이란 "우리를 받아들인 세상에서 언젠가 소리 없이 치워질"(「식탁」) 운명인, 필연적인 죽음과 무의미성의 파국을 짙게 내뿜고 있기 때문에.
      기존에도 지적되었던 것처럼, 이성복이 보여준 시 세계의 핵심적 위치에 고통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은 자명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텍스트를 읽는 우리가 고통의 근본적 정체에 대해 질문을 던져 본 적이 있는가에 있지 않을까. 핵심은 고통의 유무가 아니라, 이 고통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에 있다. 고통이라는 평면적 단어 속에서 잠재된 그 이상의 어떤 것.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멸망하면서, 내 멸망의 시간과 맥박을 잰다. 그때 사물이 내 살가죽을 생생하게 부벼"13)대는 감각을 통해 이해되어야 하는 것. 화려하든 화려하지 않든, 그의 언어가 '생생한' 무게와 질감을 지닌다는 사실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무게를 지니지 못하는 언어는 그에게 결코 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절망이라 칭해질 근본적인 죽음과 무(無, '메멘토 모리' – 바니타스 정물화의 중심인 해골처럼)의 시선으로부터 가능하며,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의 "크기와 무게"를 내포한 '일상'을 존재하게 하는 알레고리적 언어이다. 즉 일상이면서, 일상이 아닌 어떤 지점을 그는 항상 '본다'.

  13)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앞의 책, 30면.

 

      고독은 명절 다음날의 적요한 햇빛 부서진 연탄재와 삭은 탱자나무 가시, 고독은 녹슬어 헛도는 나사못, 거미줄에 남은 나방의 날개, 아파트 담장 아래 천천히 바람 빠지는 테니스 공, 고독은 깊이와 넓이, 크기와 무게가 없지만 크기와 무게, 깊이와 넓이 지닌 것들 바로 곁에 있다. 종이 위에 한 손을 올려놓고 연필로 그리면 남는 공간, 손은 팔과 이어져 있기에, 그림은 닫히지 않는다 고독이 흘러드는 것도 그런 곳이다

-「시에 대한 각서」, 전문

 

      의미심장한 제목인 "시에 대한 각서"를 지나쳐 보이는 것은 일상의 평범한 사물들이다. '적요한 햇빛', '삭은 탱자나무', '녹슨 나사못', '거미줄에 남은 나방의 날개', '바람 빠지는 테니스공' 등등. 그러나 평소에 눈여겨보지 않았던 사물들이란 이 시에서 단지 제시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물들은 '수건'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죽음 또한 절정의 시간을 지나 쇠락해 가는 '알레고리적 형상'들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상적 상황 속에 감춰진 '수수께끼'들을 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고독"의 거대함을 향하고 있는 언어적 운동 그 자체가 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면, 비로소 그의 언어가 펼쳐 놓은 질감을 만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질 수 있다.
      세계의 죽음과 무의미성을 이해할 수 있는 자에게 주어진 근본적인 의미란, 말하자면 "고독"의 이름을 지닌다. 그러나 고독은 멀리 있거나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깊이와 넓이, 크기와 무게가 없지만 크기와 무게, 깊이와 넓이 지닌 것들 바로 곁에 있다." 즉 '크기와 무게, 깊이와 넓이'란 일상의 사물이자 벤야민의 말처럼, 주석가들이 열심히 들여다볼 '사실적' 세계일 뿐이다. 그러나 '고독'은 일상성과 분리되지 않은 채, "바로 곁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연필로 그려지는 것 이외'의 '남음'의 공간, '닫히지 않'고 이름 할 수 없는 그림의 말해지지 않은 그 지점을 인식할 수 있는 자에게만이, 고독의 흘러듦을 만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그가 '시에 대한 각서'라는 철저한 태도 아래 숨겨 둔 핵심적인 언어의 비밀이 아닐까.
      이렇게 보았을 때, '속속들이 바람 든 순무 같은 내 어리석음'(「선생1」)이나 '부끄러운 시만 쓰는 염치없음'(「선생2」)에서 나타나는 자기 자신의 윤리성에 대한 호명이란, 단순히 도덕적인 부끄러움과는 관계가 없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평범함과 세속성을 넘어설 – 죽음과 죄를 매개로 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을 – 자신의 언어에 대한 절대적인 '순수'한 태도로부터 비롯된 사유이다. 즉 "그런 미안함 밑에는 어떤 생판 짐작도 못할 미안함이 파묻혀 있을지 아득하기만"(「오다, 서럽더라 4」) 한 바로 그 '순간'에서야 비로소 그의 언어는 자신의 은밀한 비밀들을 풀어 놓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출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그 비밀을 통해 현전하게 되는 것. 그의 언어가 진정한 슬픔과 고통, 죽음을 통해 꾸는 꿈과 진실의 지평이란, "걸으며 꾸는 꿈은 수의(壽衣)처럼 찢어"지는 세계 속에서 '죽은 거미 입에 문 개미가 찾을'(「來如哀反多羅 7」) '집'의 공간으로 존속한다. 이는 "북쪽 어딘가에 제 배필이 있다는 풍문이 / 있어도 천 년 만 년 찾아갈 도리 없으니 / 봄안개 가을비에 홀로 늙어 가다가, 덜 꺼진 / 담뱃불에도 속수무책 불타버"린 '남지장사(寺)의 그 속절없는 사연'을 통해 "두고두고 가슴아파해야 할 (…) 죄 많은 한 청춘"(「남지장사2」)이 된다는 것과 동궤적 행위일 테다. 그 사유를 통해 현전할 가능성을 얻게 되는 것. 그것은 바로 '기억'의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의 수수께끼이자 '언어의 불꽃 같은 형상'으로 존재할 '꿈의 지평'일 것이다.
      다만 그것은 손쉽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이는 "아주 어두워지기 전에 잠깐, 사물들이 견디기 힘들어 보"일 때, 그러니까 "덜 접힌 이야기들이 다시 펴지려 할" 미묘한 '어둠'의 시간(「어둠에 대하여」)을 보는 행위. 혹은 "으르러져도 제 피를 볼 수 없"는 "서러움"(「돌에 대하여」)을 온전히 삼켜버리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을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겨울에 죽은 목단 나무 가지에서 꽃을 꺾었다 끈적한 씨방이 갈라지고 터져 나온 꽃, 죽은 딸을 흉내 내는 실성한 엄마처럼 꽃 떨어진 자리도 꽃을 닮았다 여름 꽃을 보지 못했어도 우리는 겨울 꽃이 될 수 있다 희뿌옇게 타다 만 배꼽 같은 꽃, 제사상에 올리는 문어다리 꽃, 철사로 동여매도 아프지는 않을 거다 그 꽃잎 마른 번데기처럼 딱딱하고, 눈비가 씻어간 고름 자국 찾을 수 없다, 죽음이 불타버린 꽃

-「죽음에 대한 각서」, 전문

 

      "무언가 안 될 때" 혹은 "발걸음은 점점 더 눈에 묻혀 가"고 "얼어붙은 발가락 마디마디가 툭, 툭 부러지는 / 가도 가도 끝없는 빙판 위"(「극지에서」)를 걷는 것과도 같은 감각은 결국 자신의 죽음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를 보고자 하는 '시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 극한적인 '슬픔'의 지점에서 비로소 보일 수 있는 '꽃'을 이해하려는 정결한 태도란, 그 꿈의 세계가 지닌 근원적 이름을 번역하는 '언어'로서 현전하는 것이다.
      "끈적한 씨방이 갈라지고 터져 나"와 버린, "죽은 딸을 흉내 내는 실성한 엄마"와도 같이 떨어져 버린 겨울 꽃은 비극적이며, 또한 그 비극적인 슬픔에 의해서 가능할 어떤 '꽃'이다. 그러하기에 화사한 "여름 꽃"처럼, "마른 번데기처럼 딱딱하고, 눈비가 씻어간 고름 자국 찾을 수 없"는 "문어다리 꽃"은 꽃이되 꽃이 아니다. 이 꽃 아닌 꽃에게는 "철사로 동여매도 아프지는 않을", 말하자면 "꽃 떨어진 자리도 꽃을 닮았"을 그러한 고통이 '없다'. 따라서 "죽음이 불타버린 꽃"이란 모순적 의미를 내포하는 이미지로 다가온다. 왜 그러한가. 이 "희뿌옇게 타다 만 배꼽 같은 꽃"에는 온전히 타버렸어야 할 죽음이 제대로 불태워지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 미적지근하게 타버린 꽃의 존재란 역설적으로 제대로 불태워지지 못한 어떤 슬픔을 '현전'시킨다. 그렇다면, 이 (여름) 꽃이 아닌 '겨울 꽃'에 대해 무엇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의 언어에 새겨져 있는, '씌어지지 않았'으면서 씌어 있는 것. 또는 '겨울'의 냉혹한 감각으로 표상되는 죽음과 극지의 삶을 통과하려는 자에게, 그러니까 '온전히 죽음을 불태워버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꽃'의 진정한 면모를 읽어내야만 한다는 태도를 갖추지 않는 자에게는, 그 모든 언어의 비밀들이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는 '진실'일 것이다. 즉 "저승의 강을 이승의 강으로 한번 되돌"릴 "당신의 숙제"(「누군가 내게 쓰다 만 편지」) 같은, 그의 서러움과 고통의 본질이란 죽음의 진정한 깊이와 무게를 체험한 자의 깊은 슬픔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한사코 헤엄치는 물"이자 "무작정 기어가는 땅"처럼 '오랜 세월 떠나감을 지속하며' "어두운 지층 속에서 길을 만드는"(「움직이는 누드」) 처절한 고투 속에서, 비로소 '죽음' 이후의 어떤 것이 있을 꿈의 세계가 마련된다는 '진실'은 그에게 너무도 자명한 진리이지 않을까.
      예컨대 다음의 시에서 느껴질 수 있는 '정결함' 같은, 너무 많이 건드릴수록 부서져 버리기에 섬세한 만짐을 통해서만 접근될 수 있는 꿈과 언어의 세계. 그 "붉은 혀"와 "미친 생각들의" 경련, "죽음"이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변함없는 물결"을 통해 닿게 될 "다른 나라의 고성"처럼.

 

      파란 많은 숨결을 거두고 눈은 심장 어디쯤에 파묻고 서 있을 때, 어디 변함없는 물결이 미끄러져 와 내 몸은 헤엄칩니다. 죽은 꽃에게 가야지! 지금 한창 붉은 혀 빼물고 미친 생각들의 불빛이 흔들리고, 곧추뻗은 다리는 경련합니다 오 죽음! 시든 꽃받침 위에 다시 나타나는 다른 나라의 古城! 하지만 내가 몸을 너무 많이 움직이면 헤엄이 빨라지고 이끼 낀 성곽이 흔들리지 않을까요? 흔들려, 조금씩 금이 가지나 않을까요?

      -「이별없는 세대 4」, 전문

 

3. "오직 눈먼 것만이" 온다는 듯이

      그러므로 저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의 힘, 즉 망각에 자신을 내맡기려 합니다. (…) 지금은 어쩌면 배운 것을 잊어버리는, 또는 우리가 관통한 지식이나 문화, 믿음의 침전물에 망각을 부과하는 그런 예측불허의 수정작업을 허용하는 또 다른 체험의 시기가 온지도 모릅니다. (…) 즉 예지라는 말을. 어떤 권력도 존재하지 않으며, 약간의 지식과 약간의 지혜, 그리고 가능한 많은 맛을 가진 그 말을

– 롤랑 바르트,『텍스트의 즐거움』

 

      이성복의 시 속에는 삶은 지옥이고, 세계는 고통이며, 또한 모든 것이 '무의미한 자'의 삶을 산다는 자의 슬픔이 있다. 이 '무의미한' 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인생이 살 값어치가 있다는 감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살할 만한 값어치가 없다는 감정에서 살아가는 것"14)이라는 글귀로서 지탱되는 삶이기도 하다.
      살 만한 값어치로서 부와 명예, 그리고 풍족함과 배부름이 아닌, 오히려 모든 것을 무(Nothing)로 환원시켜 버릴 수 있는 감각을 통해 존재하기. 삶이란 벤야민의 말처럼 '자살할 만한 값어치'조차 없는 무의미한 것이기에, 역설적으로 비로소 보일 수 있는 지점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의 시를 근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중요하다. 피터지게 부부싸움을 하고도 "어떻든 먹어야 산다"(「청도 시편 4」)고 말하는, 집을 박살내 버린 포클레인에 걸린 "때 묻은 팬티"을 보며 그것이 "네 힘의 일부라는 것을 말해"(「포크레인」) 줄 수 있는, 또는 "내장을 훑어낸 뱃대기는 청포묵처럼 투명"(「전어」)한 정직하고 순수한 언어의 세계를 탐색하는 자가 지닌 꿈의 지평에 대해서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의 대표작인 「남해금산」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또한 시집의 제목이자 책의 서두에 씌어진 '來如哀反多羅'에 대한 시인의 개인적 덧붙임. 그러니까 "이곳에 와서, 같아지려 하다가, 슬픔을 맛보고, 맞서 대들다가, 많은 일을 겪고, 비단처럼 펼쳐지다"라는 말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이 말을 시인 자신의 언어와 삶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드러냄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많은 일을 겪고, 비단처럼 펼쳐지다"라는 그 뜻을 온전히 전해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14)  발터 벤야민, 「파괴적 성격」,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역, 민음사, 1983, 29면.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해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앉아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남해금산」, 전문15)

  15)  이성복, 『남해금산』, 문학과지성사, 1994, 90면.

 

      그의 말처럼 "많은 일을 겪고 비단처럼 펼쳐"질 사랑의 운명이란,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계 속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위와 같은 지극한 고통과 슬픔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에 가깝다. 그녀가 부재하는 연옥인 세계 속에서 희미한 꿈의 지평을 바라보기 위해, 거대한 물속에서 자신의 육체를 따듯하게 불태우는 '돌'과 같은 꿈을 꾸는 것. 그 꿈이야말로 궁극적인 사랑의 이름에 도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언어의 순교자로 남고자 하는 한 시인의 필연적 운명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 거대한 운명의 그림자, 「남해금산」의 남자가 꿈꾸는 '삶'이란 궁극적으로 깊은 죽음의 잠 이면에 놓여 있는, '순수'한 영혼의 꿈에 도달하는 길일 테다. 그것은 '동면 서면 흩어진 들까마귀들'과 '아우라지 강물의 피리 새끼들'이 건져와야만 하는 '내 혼과 몸'(「정선」)의 근원이자, 죽음과 고통을 온전히 슬프게 받아들인 자만이 볼 수 있는 사랑의 지평이다. "아직 식지 않은 온기를 더듬"(「그림에서1」)으며 "내 꿈에 낀 백태" 같은 수많은 말들을 '그만두고' 마주 보아야 하는 "애인"의 모습(「입술」)처럼. 그의 언어가 도달하려 하는 '비단처럼 펼쳐질' 꿈의 세계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 이제 『래여애반다라』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를 다뤄야 한다.

 

내가 밥 먹으러 다니는
강가 부산집 뒤안에
한잠을 늘어지게 자던 개,
 
다가오는 내 발자국 소리에
깨어나, 먼 데를
보다가 다시 잠든다
 
그 흐릿한 눈으로
나도 바라본다,
 
어떤 정신 나간 깨달음처럼
허옇게 펼쳐진
강 건너 비닐하우스를

-「강가」, 전문

 

      평범하다면, 평범한 시로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시는 '정든 유곽'에서 '남해금산'을 거쳐, '강가'의 세계(그의 많은 시편들에서 강가와 물의 세계가 깨달음의 공간으로 묘사된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유지되는 '꿈'에 대한 그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이다. 이는 "어떤 정신 나간 깨달음"을 향해 조금쯤 열려 있는 '문'과 같은, 희미한 꿈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개'의 형상을 단순히 "내가 밥 먹으러 다니는 강가 부산집 뒤안"에 있는 현실적 요소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개의 형상이란 "한잠을 늘어지게 자던 개"라는 점에 미묘하게 암시되어 있다. 즉 개의 근본적인 정체는 '잠'에 취해 있는, 꿈의 세계에 속해 있는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발자국 소리에 깨어"나더라도 개는 "먼 데를 보다가 다시 잠"들 뿐이다. 이 암시된, 막연히 졸고 있는 한 마리 개의 명확한 형상이란, 말하자면 꿈의 영역에 대한 바라봄이다.
      개와 함께 시인은 "그 흐릿한 눈으로 나도 바라본다," (그래서 나'는'이 아니라 나'도'이다) 시인의 '봄'이 존재하는 곳, 마치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의 황금빛 강변처럼, 거기에는 하나의 세계가 현전할 가능성을 얻는다. 저 흐릿한 눈으로, 잠과 꿈에 취한 개이자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인 것. '하얗게 반짝이고 있을 꿈'이 존재하는 지평. 말하자면 "그 뜻 없고 서러운 길 위의 / 윷말처럼 / 비린내 하나 없던 물결, / 그 하얀 물나비의 비늘, 비늘들"(「죽지랑을 기리는 노래」)처럼 반짝이고 있을 어떤 집의 세계에 대한 순수한 갈망을 말이다.
      저 '비단결' 같으며 '비늘' 같은 비닐하우스의 반짝거림을 이해할 때, 우리는 이 시의 평범함 속에 있는, 평범하지 않는 '꿈의 집'을 그와 함께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점에서 이 '강가'란 "오직 눈먼 것만이 흐른다는 듯이"(「강에게」) 오게 되는 하나의 '계시'적 진실을 담지할 것이다. 요컨대 "썩고 농한 것들만 찾아 다"닌, '울다 잠든 것들의 눈에 침을 박고, 고여 있던 눈물을 빨어먹었'던 "누구라도 대신해 울고 싶었던" 저 "빛"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그 죽음 속에 잠겨 있는 깊은 영혼의 꿈 – "아무도 태어나지 않고 다시는 죽지 않는 곳"(「빛에게」) – 을 말이다. 그러한 꿈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자는 결국 언어의 본래적인 이름을 되찾고자 하는 자이며, 동시에 그 언어를 통해 궁극적으로 존재하게 해야만 하는 순수의 언어를 '현전'시키는 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16)
      그렇기에 핵심적인 것은 그의 언어를 통해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질문, 우리가 그의 '영혼'과 마주하는 지점을 저 "반짝임"을 통해 볼 수 있게 '된다'는 근원적 진실이다. 이 "반짝임"을 통해서 그의 말과 언어가 그리고 그의 삶이 도달해야만 하는 영혼의 비밀들이 일깨워지는 지점을 목격할 수 있다면, 우리는 깨달음을 '계시'하는 언어의 '마법적 능력'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꿈의 세계를 평범하면서 동시에 마법적인 말로 현전하게 하는 바로 그것.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위치를 김소월로부터 백석, 서정주와 김춘수로 이어지는 하나의 계보로 놓을 수 있다는 점은 지극히 온당할 것이다.
      이제 글의 서두, 어느 정도의 오독을 통해 출발한 논의가 왜 그의 말들을 다시금 호명하고자 했는가에 대한 구체적 답변을 내놓을 때가 된 것 같다. 이는 평범한 일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말, 현란한 수사가 없는 이성복의 언어가 어떠한 교훈을 담지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과 상통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순수한 언어가 고통의 직접성을 매개로, 근원적일 '영혼'의 세계(신비적이긴 하지만!)를 꿈꾸는 사유에 그 이름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17) 이 '현역 시인'에게 진정으로 시인의 이름을 불러 줄 수 있다면, 바타유의 말처럼 그것은 충분히 넘쳐흐르는 '낭비'를 통해 도달할 지점(『에로티즘』)을 비춰 주는 그림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어쩌면 말로 호명되기 거의 불가능한, 평균적인 인간의 가치(절대 고독의 인간인 사드가 그토록 거부했던)를 돌파해 버린 것. 그것은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상상력이라 칭해졌던 우리의 지평 모두를 극단적으로 넘어서 버린, 정직하고 순수한 언어의 세계를 통해 '현전'할 그의 본질이다.
      따라서 그의 '언어'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2000년대 이후 지금까지 이어진 어떤 혼란의 상황 속에서 오고갔던 문학에 대한 논의들이 도달해야 하는 최종적 도착점은 결국 '언어'라는 것을 말이다. 문학이란 참으로 언어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어리석음 이상이 될 수 없다. 이 '무용한 것들의 유용함'에 이르기 위한 길18)은 문학-언어의 절대적인 고독과 고통으로부터 출발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만 가능할 따름이다. 그러하기에 시란 어리석음 이상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그것만이 고통으로부터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가 되어 줄 것이다.19)
      이성복은, 이 '현역 시인'은 여전히 세상의 풍파와 맞서며, 무수한 말들과 무관하게 자신의 꿈의 지평을 구축해 왔다. 그의 시를 지금 현재에 읽는 것, 그러니까 그의 시가 던져 준 언어의 지평을 오롯이 읽어냄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치'란 무엇일까. 그것은 세계의 폐허와 무의미로부터 불어오는 폭풍, 그리고 '그 폭풍을 막아내려는 기병의 전진과도 같은 공부'20)가 도달할 '진실'이다. 그것은 문학과 시의 본래적 '무엇'이라 칭할 수 있는 희미한 영역, 카프카의 말을 통해서 얻어낼 수 있는 어떤 예감과도 다르지 않을 테다. "진실이란 살아가기 위해 인간 모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서 얻을 수도 없으며 또한 살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진실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부단히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멸망합니다. 진실이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지요. 진실은 아마 삶 자체일 것입니다."21)

  16)  발터 벤야민, 「프란츠 카프카」,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앞의 책, 91~92면. 벤야민은 카프카의 '어리석은' 인물들이 일종의 '바보'이자 지칠 줄 모르는 조수들이며, 또한 '성인'의 형상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지만 잊는다는 것은 항상 가장 좋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구원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17)  이성복,「예술, 탈속과 환속사이」, 『끝나지 않은 대화 – 시는 가장 낮은 곳에 머문다』, 열화당, 2014. 이성복은 이 대담에서 자신의 글쓰기를 자신의 자아보다도 보다 '상위'에 있는, 즉 "그 말로서 우리 자신을 괴롭히고 학대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그 특유의 언어의 정직성에 대한 감각이자, 오직 그것에 의해서만 '문학적인 것'을 말할 수 있는 차원과 관계되어 있다. 여기에서 이성복은 카프카를 통해 자신이 배운 것은 "빈대 한 마리 잡기 위해 초가삼간 다 태우는 글쓰기", 일종의 극단적인 지점에 이르고자 하는 것임을 언급한다.
  18)  이성복, 『불화하는 말들』, 문학과지성사, 2015, 137면. 예컨대 이성복은 시는 근본적으로 자신을 불리하게 만들며, 오직 그 '무력함'으로써만 힘을 가질 수 있게 된다고 지적한다.
  19)  이성복, 「불가능 시론」, 『고백의 형식들 – 사람은 시없이 살 수 있는가』, 열화당, 2014, 202면. 이성복은 이를 "르네 샤르에 의해 '영원한 바깥의 흐름', 혹은 '죽음의 유골함'과 가깝지만 '혼례 가능한 저 너머'로 명명되는 [그것]의 자리는 우리가 한 번도 머문 적 없고, 머물 수도 없는 곳이며,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서 찾아지는 곳이다. 이 자리를 기억/보존하고 모험/실패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언어"라고 적확하게 지적한다.
  20)  발터 벤야민, 「프란츠 카프카」,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앞의 책, 94면.
  21)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와의 대화』, 구스타프 야누흐 지음, 녹진, 1988, 217면.

 

 

4. 단지, 단지 들려오는 노래의 언어

     언제부터 나는 이다지도 막연히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노래를 불러야 했을까?

– H2O 3집, <나를 돌아보게 해>

 

      글을 마무리 지으며 나는 과거의 다른 장르인 대중음악 분야, 80년대의 헤비메탈 세대에 종언을 고했던 《H2O》 3집 음반의 한 노래를 떠올렸다. 시와 문학을 논하는 자리에서 음악에 대해 말하는 것이 뜬금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경향을 스스로 마무리 지어 버렸던 일군의 예술가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지금에 대한 어떤 '유사성'의 차원에서 읽혀졌으면 한다.
      이상하게 생각될지 모르겠지만, 80년대의 헤비메탈 씬은 고음과 샤우팅, 누가 더 빨리 연주하는가를 자랑하던 속도와 기술이 지배했던 시대였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하나의 경향이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 시대가 가고 달파란(강기영)과 박현준(이 둘은 《H20》의 해산 이후 '문화적 키치'를 시도했던 삐삐밴드-삐삐롱스타킹을 결성했다)이 있었던 밴드인 《H2O》. 1집 《안개도시》라는 LA 메탈풍의 노래로 알려졌던, 이 불운의 밴드는 1993년 세련된 리듬감을 토대로 한 모던 록 앨범인 3집 《Today I》를 발매했다. (물론 이들은 일부의 청자들만이 주목했고 실질적으로 역사 뒤편에 묻혀버렸다)
      그들의 노래, <나를 돌아보게 해>의 한 구절. "언제부터 나는 이다지도 막연히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노래를 불러야 했을까?"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시대'를 종결지어 버렸던 그 말. 자신들의 노래가 사실은 막연한,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는 지점 그 자체를 고백했던 가사는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심장하다.22) 이를 빌려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겠다. 우리의 노래는 우리의 시는 우리의 말은 과연 기쁘거나 혹은 슬픈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절망과 슬픔의 진정성의 가면으로서 다만 견디고(만) 있지 않은가.
      이 글은 이성복의 언어가 가진 근원을 탐색함과 동시에, 지금 현재의 한계적 지평을 넘어서기 위한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이 의도가 성공할지를 스스로 확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분명히 해둘 것은 그의 시는 여전히 정직하고 순수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그의 언어가 가진 '숙명'이자 본질이다. 남해 금산에서 언제까지고 기다리며 꿈꾸고 있을 그 사람처럼, 그는 '충분히' 슬프고 또한 '충분히' 기뻐할 것이다. 이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기다림의 절망과 고통 그리고 기쁨의 충만함이 그가 가진 영혼의 근본적 정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라스 폰 트리에가 <멜랑콜리아>에서 보여준 '종말'의 파국처럼, 이미 예전부터 오래도록 세계란 공포였다. 누구라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으며, 여전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단지 이를 몰랐거나 외면했을 뿐. 그러하기에 "지구는 사악해. 우리는 지구를 위해 비통해할 필요가 없어."라는 저스틴의 말처럼 지금이라는 현재적 토대, 이 무의미한 세계의 진정한 멸망을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세월호'라는 지금도 끝나지 않았으며 앞으로 끝나지 않을 '사건'을 통해 비로소 수면 위에 올라온 것처럼 보였던, 그러나 도처에 널려 있었던 죽음과 고통을 직접적으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구원'도 '순수'도 가능하지 않다. 이 깊은 무력함과 슬픔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지 않는 언어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따라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멸망의 형상인 저스틴의 이름이 파괴자 – '스틸 브레이커'라는 것(영화 내내 그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것은 그녀의 조카(아이)일 뿐이다), 그녀가 멜랑콜리아라는 운명의 별을 읽어내는 마녀라는 것. 그녀가 즐기는 '오줌싸기'(vs 결혼식)와 '초콜릿과 잼'(vs 재(ash) 맛의 미트로프) 그리고 그녀와 아이만이 만들 수 있는 '마법 동굴'만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한 '썩어 가는 대지'에 맞설 유일한 가능성이라는 점이다. 마치 벤야민이 카프카를 위해 남겨 둔 구절, "무한히 많은 희망이 있지만 단지 그것은 우리를 위한 희망이 아닌 것이다. 이 문장엔 참으로 카프카의 희망이 담겨 있다. 그것이 그의 빛나는 명랑성의 원천"이라는 그 말처럼.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순수'한 사랑의 현전에 대해서, 그 깊은 고통과 슬픔 그리고 이를 넘어서는 '진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해야 한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지옥도 없다"23)는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 그러니까 공포에 싸우지 않는 방식으로 맞서는, 슬픔과 모멸감의 존재로서 가능할 고통. 이로부터 비롯할 오래되어 보이지만 새로운 언어의 도래. 그 예감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가능해질 수 있다면, 그의 언어들에 내포된 '순수성'을 되짚어냄으로써 그 출발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복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언어란, 가장 깊은 절망이자 동시에 '매 초 매 시간이 메시아가 들어올 작은 문'(「역사철학테제」)과 같다. 언제나 그것을 모르고 지나치고 있을 뿐. 그렇기에 그의 언어가 '지금' 현전함으로 줄 수 있는 진정한 질문이자 지혜란 다음과 같다. 정치성과 윤리성 자체를 말하기보단, 상상력 자체의 '변화와 교환을 이루어낼 암호문자의 열쇠'24), 즉 언어에 자신의 온 존재를 '전부' 걸어야 한다는 것. 이 말은 고통을 모르는 우리가, 여전히 아무것도 듣고 있지 못하다는 슬픔을 이해할 정직한 태도로부터 가능할 뿐이다. 오직 그러한 슬픔을 행하는 자가 온전히 제 이름을 부여받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구원의 순수함은 도래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여전히 문제적이자 필연적인 지점은 단지, 단지 그 언어의 노래를 부단히 껴안아 보는 것에 있다.

  22)  박준흠, 「지금 나의 임무는 사람들을 트랜스시키는 것 – H2O 강기영 인터뷰」, 『이 땅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은』, 교보문고, 1999, 282~283면.
  23)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앞의 책, 63면.
  24)  발터 벤야민, 「햇빛 속에서」,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 발터 벤야민 선집1』, 김영옥, 윤미애, 최성만 옮김, 길, 2007, 207~212면 참조.

 

      단, 희망 없는 자들의 희망인, 어리석은 믿음으로서만.

 

 

 

 

 

 

 

 

 

 

 

작가소개 / 김정현

1979년생. 광운대학교 국문과 및 서울대학교 국문과 석·박사 졸업.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너는 이제 '미지'의 즐거움일 것이다(황인찬론)」로 등단.

 

   《문장웹진 2018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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