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아카이브즈 기고문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 지원 사업, 어떻게 할 것인가 - 양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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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사이버문학광장 '문예지 아카이브즈' 기고문]

 

≪문장웹진≫ 9월호의 [기획] 코너에서는 사이버문학광장의 '문예지 아카이브즈'의 개시와 함께 기획된 두 편의 기고문을 통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예지발간지원사업에 대한 과거와 미래를 짚어보려 합니다. (* 이 글은 2018 문학주간의 '문예지 활성화 워크숍'에서 발제와 토론으로 다루어집니다.)
 
* '사이버문학광장 문예지 아카이브즈'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1974년부터 지금까지 우리 문학의 유통 활성화와 안정적인 생태계 조성을 위하여 문예지의 발간을 지원해왔습니다. 이에 사이버문학광장은 '문예지 아카이브즈'를 통해 그간 지원받은 약 100여종, 4,000호에 이르는 문예지의 표지 및 목차를 디지털 아카이빙했습니다. 이 문예지들은 곧 현실 세계로 나와, 직접 관람객들과 만날 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오래된 문예지부터, 패션잡지만큼 세련되고 감각적인 요즘의 문예지까지……. 사이버문학광장의 '문예지 아카이브즈'에 방문하시고, 우리 문예지의 다채로운 어제와 오늘을 살펴보세요. (바로가기 : http://archive.munjang.or.kr/)
 
* 2018 문학주간, '문예지 아카이브즈' 관련 행사 안내
– 문예지 기획전시 : 8. 31(금)~9. 6(목) 10:00~20:00 / 마로니에공원 지하 다목적실
– 문예지 활성화 워크숍 : 9. 5(수) 14:00 / 마로니에공원 지하 다목적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 지원 사업, 어떻게 할 것인가?

 

 

 

양재훈

 

 

 

 

      문예지 지원 사업 재개를 (일단은) 환영하며

 

      문예지는 한국문학 작품의 생산과 유통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문예지의 역사가 곧 한국 근현대문학의 역사라 해도 좋을 정도다. 한국 근대문학의 태동기부터 지금까지 문예지는 문학작품과 문예담론 생산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1919년 김동인에 의해 『창조』가 창간된 이래 『폐허』, 『장미촌』, 『백조』, 『조선문단』, 『문예운동』, 『해외문학』, 『문장』, 『인문평론』 등등 다종다양의 문예지가 등장하면서 초창기의 한국 근대문학을 지탱했던 바 있거니와 문예지가 한국문학 장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동일하게 지속되고 있다. 여전히 문학 작품과 문예 담론의 생산이 문예지를 통해 행해진다.
      그런데 최근 들어 문예지라는 매체가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국 근현대문학의 역사가 문예지와 함께 해온 역사라면, 문예지의 위기는 한국문학 자체의 위기와 연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문학 자체가 위기를 맞았기 때문에 문예지라는 매체가 함께 위기에 처해 있거나, 아니면 문예지가 담당해 왔던 한국문학의 생산과 유통 방식에 문제가 있어 한국문학이 위기를 맞게 되었거나. 위기론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은 주로 한국문학이 독자를 외면하고 있다거나 문학동네, 창작과비평사, 문학과지성사 등 대형출판사들을 중심으로 한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있다거나 하는 말들이다. 한데 이런 이야기들은 꽤 오래 전부터 나온 것들이어서 그다지 새삼스럽지 않다. 그러나 201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문예위)가 주관하던 문예지 지원 사업이 중단된 뒤 상당수의 문예지가 폐간되면서 저 위기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실감 있는 말이 되었다. 한국에서 문예지를 간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다수의 문예지가 폐간됨으로써 한국문학 생산의 장은 그만큼 축소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문예위가 문예지 지원 사업을 중단했던 것은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지난 수구 정권이 문화예술계를 제 입맛에 맞게 길들이려 했던 것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정권이 바뀐 지금 문예위 역시 정상화를 도모하는 중이며, 그 일환으로 중단됐던 문예지 지원 사업 등 문학 지원 사업 재개를 준비하고 있다. 환영할 만한 일이다. 다만 재개되는 지원 사업이 단지 명목만에 그치지 않으려면 지원의 목적과 대상, 방식 등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현재의 한국문학을 진단하고 지원의 초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정해야만 현재의 문학 장에 긍정적으로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문예위로부터 재개되는 문예지 지원 사업을 포함한 문학 지원 사업의 역할과 목적, 지원의 방식 및 초점 등을 정하기 위한 일종의 방향 제시를 요청받아 쓰게 된 기고문이다. 사실 나는 이런 막중한 이야기를 감당할 깜냥이 되지 않는다. 현장에서 문예지 편집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문단의 생리에 밝은 다른 사람들도 많을 텐데 왜 내게 이런 글을 청탁한 것인지도 의아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위 '제도권' 문단의 주변부에 있는 위치에서 오히려 이 글을 내가 맡은 의미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따끈따끈한 신인은 아니지만 등단한 지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고, 소위 '메이저'에 해당하는 『경향신문』 신춘문예 출신이지만 문단의 중심에 안착하지는 못했으며, 더욱이––이 점이 핵심인데––지방대학인 군산대학교 출신이기도 하다. 이런 점들이 나를 한국문학 장의 주변부에 위치시키고 있거니와, 문단의 '아웃사이더'가 보는 눈이 현재의 한국문학 장을 진단하는 데 유용한 데가 있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모자란 깜냥이지만 내 눈에 비친 한국문학 장의 현재를 이야기하고 향후 문예위의 문학 지원 사업 운영 방향에 대한 의견을 제시해 보려 한다.

 

 

      문학/문예지의 위기론을 둘러싼 맥락과 한국문학 장의 현재 상황

 

      문예지 또는 문학 자체가 위기를 맞았다는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또 어떤 점에서 위기라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문예지들이 상업 자본의 논리에 따라 운영되는 출판사의 이윤을 확보하기 위한 이른바 '문학권력' (재)생산의 창구로(만) 이용되고 있어 문제라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한국문학이 독자를 잃어버렸음을 지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한국문학 시장을 주도하는 출판사들과 연결되어 있는 『문학동네』, 『창작과비평』, 『문학과사회』 등 소위 '메이저' 문예지들이 제 입맛에 맞는 작가에게만 작품 발표 지면을 제공하고 그들에 대해서만 서평 및 평론을 통해 지원하고 있어서 문제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저 문예지들이 제 나름의 뚜렷한 문학관을 잃었거나 아예 가지려 하지 않고 있어서 문제라고 말한다. 요컨대 팔기 위해서만 만들고 있어서 문제라는 이야기와 팔리지 않아서 문제라는 이야기가, 그리고 문예지들이 제각각 배타적인 패거리를 형성하고 있어서 문제라는 이야기와 서로 뚜렷한 차이를 갖지 않아서 문제라는 이야기 들이 동시에 나오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데다가 상호모순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이야기들이 현재 문학/문예지의 위기와 관련된 논의에서 나오고 있는 진단들이다. 이쯤 되면 저 위기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현재 문학 또는 문예지가 이러저러하게 위기를 맞았다'는 상황판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저 문학이 위기를 맞았음을 일단 사실로 전제한 뒤 제가끔 끼워 맞춘 내러티브인 것은 아닌지, 따라서 저 '위기론'이 실은 과장된 호들갑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저 이야기들이 등장한 맥락을 보면 그것들을 쉽게 호들갑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최근의 위기론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계기들로부터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체로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문학 장을 둘러싸고 일어난 몇 개의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다.

 

      (1) 신경숙 표절 사태
      (2)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3) 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지 지원 사업 중단

 

      이와 같은 사건들을 둘러싸고 나온 문학 또는 문예지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들은, 앞서 말했듯 대체로 '문학권력'에 대해 문제 제기하거나 한국문학에 대한 독자의 외면을 지적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1)이 터졌을 때는 출판자본의 이익을 위해 표절과 같은 창작자로서의 부도덕을 눈감아주기까지 몇몇 베스트셀러 작가와(만) 썩 건강하지 못한 유착관계를 유지해온 문학권력에 대한 공격이 있었다. (2)에서는 문단 안의 성별에 따른 위계와 등단제도에 대한 반성과 혁신의 요구가 빗발쳤다. (1)과 (2)가 문학 장 내부의 부패에 대한 문제 제기로부터 혁신의 요구를 불러일으켰다면 (3)의 경우 국가로부터의 지원이 끊긴 후 수종의 문예지가 폐간됨으로써 문학 장이 좁아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거칠게나마 이 사건들과 문학계의 대응을 스케치해 보자.
      2015년 6월 16일, 소설가 이응준이 인터넷 매체인 '허핑턴포스트 코리아'를 통해 신경숙의 「전설」이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표절한 것이라는 고발을 담은 글을 발표했다. 이후 다른 언론 매체들이 이 글을 받아썼고, 이 고발의 내용은 SNS를 통해 공유되며 널리 퍼져 나갔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아직 진짜 문제가 아니었다. 신경숙과 그를 키운 문학 출판사들을 성토하는 여론도 높았지만 성급히 판단해선 안 될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나 역시도 그랬는데, 문장 몇 개가 유사하다고 해서 '표절'이라는 무서운 말을 붙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출처를 밝히지 않은 불성실한 인용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원전이 다른 문건을 아무렇게나 가져다 써도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일은 표절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합의가 필요함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사태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국문학 장 전체를 지배하는 출판자본의 권력이라는 문제로 확대된 것이다. 표절에 대한 고발도 고발이지만, 그보다도 신경숙 본인과 해당 작품집을 출간한 창비의 대응이 문제를 키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경숙은 처음엔 표절 의혹이 제기된 원작을 읽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다가 나중에는 기억나지 않지만 언젠가 읽었던 문장이 자기도 모르게 작품 창작 중에 나왔을 수도 있다고 바꿔 말했다. 해당 작품집을 출간한 창작과비평사는 문장 몇 개가 같다고 해서 표절인 것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며, 두 작품을 같이 읽어보면 의혹이 제기된 부분이 비슷하긴 하지만 신경숙의 것이 더 깊은 안목을 보여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신경숙의 작품이 더 좋으니 표절이 아니라는 말로 읽히기 쉬운 이야기였다. 둘 모두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었다. 이후 문학권력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던 바, 거기에는 해당 사태가 작가 한 사람의 부도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표절을 가능케 한, 그리고 그것을 그때까지 은폐되어 있게 한 출판자본과의 공모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논리가 작용하고 있었다.
      문학권력에 대한 성토가 한창인 가운데 그 권력의 주체로 지목되던 출판사들과 연결되어 있는 문예지들은 나름대로 그에 응답했다. 문학권력에 대한 좌담이나 특집을 마련하는 소극적인 대응에서부터 기존의 문예지를 폐간하는 데까지 다양한 대응이 있었다. 문학동네와 『문학동네』는 출판사 대표와 문예지 1기 편집위원들이 총사퇴를 했고, 『문학과사회』는 잡지를 둘로 나누며 나름대로 혁신을 꾀하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창비』 역시 '백낙청 1인체제'라는 비판에 응하는 듯 백낙청이 편집 1선에서 물러났다. 문학 장을 주도하던 매체들은 나름대로 쇄신하는 모습을 보이려 했던 셈이다.
      이듬해에는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표절 사태의 여파로 한국문학이 위축될 것을 걱정했던 사람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이내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터져나오며 한국문학 장은 또 다시 대대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 당연하게도 문단의 남성중심적 위계에 대한 성토가 빗발쳤고, 문단의 폐쇄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특히 해당 사건은 문단에 속해 있는 문인이 문단에 진입하고자 하는 문학 지망생을 향해 저지른 폭력이었으므로, 그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등단 제도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문학계는 이 사태에 대해서도 나름의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많은 문인들이 피해고발자들에게 연대 의지를 표시했고, 문단의 남성중심주의 타개를 목적으로 하는 모임 페미라이터가 결성되었으며, '#문단_내_성폭력' 피해자들 등 문단 안팎의 여성들의 목소리를 모은 『참고문헌없음』이 출간되기도 했다.
      표절 사태와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은 한국문학 장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말하자면 이로 인해 한국문학이 도덕적 위기에 놓여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문학계 안에서도 반성과 혁신을 꾀하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문학 장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등단제도의 문제에 대한 지적 이후로도 신춘문예나 주요 문예지들의 신인문학상 공모는 동일하게 운영되고 있다. 문학권력에 대한 지적 이후로도 여전히 작가들에게 『창비』, 『문학동네』, 『문학과사회』 등은 작가로서 살아남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지면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은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저 출판사 및 문예지들이 한국문학 장 안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권력과 관계된 문제는 언제나 그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행사되는 방식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소위 '문학권력'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문예지들은 제 나름의 기준에 따라 문학 작품 및 작가들을 평가하고 그에 부합하는 작가들에게 지면을 제공한다. 이것은 잘못된 권력 행사가 아니며, 문예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문제는 저들 문예지 및 출판사가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한국문학 장 전체에서 찾아야 한다. 몇몇 출판사와 연계된 문예지들이 권력을 갖는다면, 그리고 그러한 권력 집중이 썩 좋지 못한 결과들을 낳는다면, 문제는 한국문학 장이 몇몇 문예지에 좌우될 만큼 좁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몇몇 출판사의 권력이 아니라 그에 대한 대항 권력이 없다는 점이 문제다.
      이런 점에서 문예위가 문예지 지원 사업을 중단한 뒤 일어난 일들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문예지 지원 사업이 중단되자 상업출판사와의 긴밀한 연계를 통해 자금을 지원받을 수 없는 문예지들이 대거 폐간된 것이다.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상을 통해 등단한 작가들이 그들에게 작품을 청탁하는 문예지들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고, 그렇게 발표된 작품들이 모여 출간되는 방식으로 재생산되는 한국문학 장의 특성상 문예지의 위기는 곧 한국문학 자체의 위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문예지들의 대거 폐간은 한국문학 장의 심각한 협소화를 의미한다.
      물론 생존을 위한 노력 역시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다. 앞에서 말한 여러 잡지들의 쇄신은 도덕성의 문제에 대한 반성뿐 아니라 생존을 위한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또한 기존의 것과 다른 형태를 지닌 문예지들이 새로 창간되기도 했다. 창비는 계간 『창작과비평』 외에도 문예지, 문학몹, 문학웹 등을 포함하는 플랫폼 문예지 『문학3』을 창간했고, 민음사는 『세계의문학』을 폐간한 대신 독자에게 보다 가볍게 독자에게 『릿터』를 창간했다. 은행나무 역시 『Axt』를 통해 새로운 문예지 시스템을 선보였다. 그밖에도 『더멀리』나 『젤리와 만년필』 등 상업출판사와 연계되지 않은 문예지들도 등장해 협동조합형 문예지나 크라우드펀딩을 통한 문예지 제작을 실험하는 중이다. 새로 등장한 문예지들은 독자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며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고 있다. 이들의 노력은 아직은 시작되는 단계에 불과하지만, 문학 장 전체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 줄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학 지원 사업의 방향에 대한 제안

 

      최근에 이야기되고 있는 문예지 위기론이 등장한 계기들과 그에 대한 문학 장의 대응을 중심으로 한국문학의 현재 상황을 거칠게 스케치해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재개되는 문예지 지원 사업은 무엇보다 문학 장을 확장시키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공 자금을 투여하는 다른 많은 영역처럼 산업적 잠재력을 가진 주체들을 키우는 데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우리가 문학에서 기대하는 것은 공공성이며, 그 핵심은 개개인이 자신과 사회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반성적 기능에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의 공공성은 시장의 확장을 통해 파이를 키우자는 생각만으로 접근하다 보면 자칫 놓쳐버리기 쉽다. 그러니 지원의 초점은 성공의 잠재력을 지닌 문학 주체를 찾아 성장을 돕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공공성에 기여하면서 실패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는 데 맞춰져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예지의 형식만을 갖춘 잡지들을 모두 지원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런 경우 공공 자금을 통해서만 생존하며 실제로는 우리 문학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하는 문예지들이 양산되기 쉽다.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은 현재 한국문학 장에서 문예지는 상품으로서 기능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소위 메이저 출판사들을 제외한 문예지 발행처들은 독자적인 유통망도 유통과 마케팅을 담당할 전문 인력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또 보통의 독자들은 문예지보다는 단행본으로 출판된 책을 통해 문예작가 및 작품을 접한다. 요컨대 문예지의 소비층은 대체로 문학계 내의 인사들, 넓게 봐도 그 외에 문학 지망생들 정도로 한정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예지가 곧장 독자와 접촉하며 판매 수익을 통해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과도한 기대가 될 것이다. 상품으로서의 자력생존을 문예지의 건강한 존재방식이라고 전제한다면 현재로서는 대다수의 문예지가 폐간돼 마땅하다는 결론 밖에 얻을 것이 없다. 하지만 지금 문예지는 상품으로서 기능하지는 못하더라도 작품 생산 및 문예 담론 생산의 매체로서는 기능하고 있다. 특히 문예 담론 생산 매체로서의 기능에 대해서는 문예지 외에 대안이 없다시피 하다. 단적인 예로 문예지가 없다면 누가 어디다 비평을 쓰고 또 누가 어디서 그것을 읽을 수 있겠는가?
      지금 공공자금을 투여하는 문예지지원사업은 자력생존이 불가능한 문예지들이 마냥 공공자금 투입을 통해 존속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장에서의 자력생존을 요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인식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 딜레마는 단시일 내에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완전한 해결은 장기간에 걸쳐 차차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지금은 이를 위한 첫 번째 발걸음으로, 사업의 초점을 문예지가 공공성에 기여할 수 있는 좋은 문학 작품과 문예 담론의 산실로서 기능하도록 하는 데 맞춰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나는 재개되는 문예지 지원 사업을 비롯한 문학 지원 사업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향을 제안하고자 한다.

 

      (1) 문예지에 대한 직접 지원의 대상은 시장에서의 자생능력은 없지만 공공성을 위해서는 필요한 문예지가 되도록 하라.
      장애인, 성소수자, 청소년, 외국인노동자, 북향민, 재외국민, 지방 등을 생산의 주체, 향유 대상으로 정하거나 그들과 관련된 테마를 명확히 하는 문예지들이 필요하다. 지금의 문학시장에서 그런 문예지들이 자력으로 살아남기 어려우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문예지들의 창간을 유도하고 속간되도록 해야 한다.

 

      (2) 상업출판사와 연결된 문예지는 지원에서 배제하라.
     『문학동네』나 『창비』, 『문학과사회』 등은 공공자금을 투여하지 않아도 살아남을 것이다. 또, 새로 등장해 성공을 거두고 있는 『Axt』, 『문학3』, 『릿터』 등이 모두 기존의 대형출판사들과 연결되어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문예지들을 발간하는 출판사들은 이들 이전에 이미 다른 문예지들을 간행하고 있었다. 이들만 놓고 생각한다면 문예지 지원 사업이 중단된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원 중단에 따라 적자를 면하기 어려운 기존의 문예지 사업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고, 살아남기 위해 혁신을 꾀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있다. 이들의 혁신은 한국문학 장에 신선한 자극이 되고 있다.

 

      (3) 본격적인 비평을 전문으로 하는 문예지들의 창간을 유도하고 지속되도록 하는 지원 정책을 마련하라.
      현재 본격 비평은 멸종위기종이다. 최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다. 대형출판사들의 문학권력 독점에 대한 지적에서 가장 많이 나온 이야기도 비평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비평이 해당 출판사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비평(가들)의 타락과 연결시키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자신이 읽고 좋았던 작품에 대해 좋다고 말하는 것은 비평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며, 그러한 작품 경향을 추구하는 문예지들에 해당 비평가가 연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비평가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몇몇 대형출판사들이 제공하는 지면으로 편입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데 있다. 지면이 제한되어 있다는 점은 해당 지면의 이해관계를 해치지 않는 비평만을 남기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게다가 비평의 지면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새로 창간되고 있는 문예지들은 아예 본격 비평을 위한 지면을 마련하지 않거나 줄이는 추세다.1) 이대로라면 비평은 점점 더 동질화되고 점점 더 유명무실해질 것이다. 기존의 것과의 동질화를 거부하는 비평이 살아남을 수 있는 지면이 절박하게 요구되는 상황이다.
      비평은 문학의 하위 장르이되 문학 자체의 자기반성을 목적으로 발화하는 장르다. 스스로에 대한 반성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삼는 장르로서 비평은 다른 무엇보다도 적극적으로 개별 문학 작품들과 문학 장 자체에 대해 공공성의 문제를 상기시키는 기능을 한다. 비평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문학 자체의 반성적 기능 역시 동반 하락할 것이다. 시장이 모든 것의 생존을 결정하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문학이 단지 오락물 내지 상품으로서만 기능하지 않고 공공적·반성적 기능을 하는 것으로 남기 위해 비평은 반드시 쓰여야 한다. 하지만 비평은 시장에서 상품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한 장르다. '상품으로서의 문예지'를 표방하는 새로운 문예지들이 비평을 싣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겠다. 비평이 일반 독자에게 읽힐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위에서 말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그것은 충분한 존재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문학에 공공자금을 투입한다면 비평은 가장 먼저 보호되어야 한다. 지금은 무엇보다 다양한 지면의 공급이 절실하다.

  1)  문예지가 비평문을 싣지 않는다고 해서 거기에 비평적 행위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다. 문예지의 기획, 청탁, 편집은 그 자체로 어떤 것을 선택하고 다른 것은 배제함으로써 읽는 자와 쓰는 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비평적 행위라는 것이다(장은정, 「설계–비평」, 『창비』 2018년 봄호 참조). 그러나 이런 식으로 행해지는 비평은 상업적 판단보다 비평적 관점을 우선시하려는 편집자의 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비평적 관점'이라는 것도 본격 비평문을 통해 생산되고 발달할 수밖에 없다. 지금 새로 창간된 문예지들을 놓고 볼 때 '설계–비평'이 어느 정도는 성공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본격 비평문이 한쪽에서 존속하지 않게 된다면 이런 식의 '설계-비평'도 혼자서 살아남을 수는 없을 것이다.

 

      (4) 본격 비평이 아닌 리뷰나 해설 등을 담당할 수 있는 웹진을 구축하고 이를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웹 포털과 연계될 수 있도록 하라.
      한국에는 문학으로부터 멀어져 있지만 독서에 대한 꽤 큰 욕구를 지닌 잠재적 독자층이 많다. 한데 그중에는 독서에 대한 욕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문학 작품 읽기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문학은 다른 읽을거리에 비해 독자에게 더 많은 주체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때문에 많은 초보 독자들은 어떤 책부터 읽어야 할지 몰라서 시작하지 못하거나, 어쩌다 알게 된 작품을 읽어본 뒤에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독서를 계속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문학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 가벼운 해설을 제공하고, 쉽게 읽을 수 있는 리뷰를 통해 어떤 작품부터 읽으면 좋을지 이야기해 줌으로써 잠재적 독자들을 실제 독자로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별점제 도입 같은 것도 시도해 볼 만하다. 또, 문학 전문 채널이 늘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잠재적) 일반 독자와 연결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이런 일에는 네이버와 같은 포털 사이트를 통해 연결될 수 있게 하는 일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2)

  2)  단, 네이버를 통해 제공되는 뉴스에서 이미 드러난 것처럼 상업 사이트인 네이버 등이 작품 게시의 주도권을 갖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지 못하다. 상업 포털 사이트의 홈페이지를 통해 링크 등이 제공될 수 있게 하되, 해당 채널에 게시되는 글에 대한 반응 등은 반드시 독자적으로 관리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5)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문예지의 원고료를 적정수준까지 끌어올리는 데 1차적인 목적을 두라.
      소위 '메이저' 문예지와 기타의 문예지 사이의 원고료 차이는 크다. 심한 경우 10배까지 차이가 나기도 한다. 예전부터 지속적으로 문제로 제기되어 오던 문학권력이 발생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주요 문학 출판사들이 운영하는 문예지들만이 제대로 된 원고료를 지급한다는 데 있다. 게다가 그 주요 문학 출판사들의 원고료 역시 10년이 넘게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학 작품 생산이라는 노동의 대가가 돈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문학 지원 사업 전반을 통틀어 원고료의 현실화를 우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문예지 지원 사업으로 선정된 문예지들의 원고료를 얼마 이상으로 강제하고 그 금액을 지급할 수 있는 수준으로 지원해야 한다. 또 문예지뿐 아니라 문학적 글쓰기가 행해지는 모든 영역에서 그러한 노동의 대가로 제공되어야 할 원고료의 적정 수준은 얼마인가에 대한 토론과 이를 실현하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문예위가 이를 주도해 주었으면 한다.

 

      (6) 청탁이 아닌 공모를 통해 원고를 수급하는 문예지를 우대하고 더 많은 문예지가 공모제를 채택할 수 있도록 유도하라.
     현재 문학계에서 일부 문예지들에 권력이 집중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지면과 연계된 출판사의 자본력에서 발생하고 문예지면의 청탁을 통해 행사된다. 이 때문에 문학권력 문제의 원인을 편집진의 구성이나 편집위원들의 불공정 등에서 찾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편집위원이 아무리 공정하다고 해도 청탁을 해야 할 때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우선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필자의 인지도나 학연 따위가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청탁제에서 공모제로의 전환뿐이다. 또한 공모제의 시행은 최근 문제로 떠오른 등단제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미등단신인을 특정하는 공모를 따로 마련할 필요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문예지의 특집이 문제가 된다면 주제를 사전에 공지한다거나 공모를 통해 모집된 글들을 고려하여 특집을 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때때로 여의치 않을 때는 편집위원들 자신의 글을 실을 수도 있겠다. 단, 공모제를 시행하려면 상당한 원고료를 통해 양질의 원고를 유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역시 지원 예산 규모의 확대를 바랄 수밖에 없겠다.

 

      (7) 공적 자금의 지원을 통해 간행된 문예지에 수록되는 글들은 웹을 통해 공개되도록 강제하라.
      앞에서 말했듯 현재 문예지는 문학작품과 문예담론 발표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매체지만 상품으로서의 기능은 하지 않고 있어 독자와 직접 접촉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독자들은 문예지에 실린 글들이 단행본으로 엮여 나오기 전에는 읽지 못하고 있다. 좀 더 용이하게 문예지에 접근할 수 있는 경로가 마련되어야 한다. 상업출판사와 연계된 문예지가 아니라면 발표된 글이 웹을 통해 일반 독자에게 공개되는 일을 꺼리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하지만 독자적인 웹진 또는 웹페이지를 구축하고 안정적으로 운영할 여력을 지닌 발행처는 많지 않다. 독자적인 웹진을 구축하고 있는 곳이라면 자가 운영하는 웹진을 통해 게재원고를 게시토록 하고 여력을 갖추지 못한 발행처들을 위해서 통합 웹진을 구축해 글을 공개한다면 문예지와 독자의 접촉면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이 통합 웹진 역시 네이버 등을 통해 링크될 수 있도록 하고, (4)에서 제안한 해설이나 리뷰 코너 역시 그 안에 마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3) 만약 상업출판사와 연계된 문예지들을 배려해야 한다면, 발표 이후 일정 기간이 지난 뒤부터 공개되도록 한다거나 문예지에 실린 글이 단행본으로 출간되기 전까지만 무료 제공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조정할 수 있다.
      이 제안에는 문학작품을 공공재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자는 제안이 숨어 있다. 현재 문예지가 상품으로서 기능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문예지의 자립과 관련해서 매우 복잡한 문제가 된다. 어쨌든 단행본을 발간하는 출판사는 책을 팔아 수익을 내고 필자는 원고료나 인세를 받을 수 있는데 작품의 최초 발표 지면을 제공하는 문예지는 아무런 이익도 낼 수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문예지가 시장에서 자력생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문예지에 발표된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문예지가 갖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단행본 출간시 출판사가 1쇄에 대한 인세를 작품의 최초 발표지면에 제공하고 2쇄 이후의 인세부터 작가에게 지급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하지만 이를 진지한 제안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이는 출판계의 어려움에 대한 고려가 없는 아이디어다. 또한 이를 실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 앞서 원고료가 지금 가장 높은 고료를 제공하는 문예지의 그것보다도 더 높게 책정돼야 할 것이다. 더욱이 그렇게 될 경우 대형출판사와 연계된 문예지로의 권력 집중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시장에서의 자력생존은 요구할 수 없고 문예지들이 폐간되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어 공적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면, 공적 자금을 통한 문예지의 생존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대신 이를 통해 발표되는 글들이 누구에게나 무료로 읽힐 수 있는 경로를 마련함으로써 아예 문학이 공공재로 사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것이다. 물론 점차 예산을 늘려 원고료 및 문예지 발행에 필요한 재정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수준으로 지원규모를 확대해야 할 것이다.

  3)  이 밖에도 신인 작가 풀을 형성하기 위한 코너를 두어 누구나 자신의 작품을 게시할 수 있게 하고 누구나 이를 읽을 수 있게 한다면 문예지 편집진들이 신인을 발굴할 수 있는 새로운 경로가 마련됨으로써 이 역시 등단제도의 문제 해결에 일조 할 수 있을 것이다.

 

      (8) 웹진 등 기존의 종이잡지와 다른 형태의 문예지 지원책을 마련하라.
      기존의 문예지 지원 사업은 ISBN을 달고 간행하는 종이잡지만을 대상으로 했다. 웹진과 같은 형태로 발행되는 문예지는 처음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배려한 정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9) 독자들을 문학 작품 독서로 유인하기 위한 지원책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문학 작품 독서를 위한 동호회의 성격을 가진 모임이나 각 지방의 공립도서관 및 작은도서관 등을 키움으로써 문학 작품이 시장이 확장되게 해야 한다. 특히 한국의 문학 장은 지나치게 서울을 중심으로 편중되어 있는데, 각 지방의 도서관들이 그 지방의 평론가들을 고용하거나 초빙해 시민들과 함께 작품 읽기 세미나를 할 수 있도록 한다거나 자발적인 독서 모임들에 대해 그들이 선택한 작가를 직접 초빙해 만날 수 있도록 한다거나 하는 식의 지원 정책이 마련된다면 문학 작품 시장의 확장과 지나치게 서울에 편중되어 있는 문학 장의 균형 회복에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여기까지가 내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학 지원 정책에 대해서 제안하고자 하는 바다. 깜냥에 넘치는 주제여서 이 제안들이 목적에 잘 부합하는 것인지, 이보다 더 우선해야 할 것은 없는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들인지 등에 대해서는 그다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모두가 한국 문학 장이 건강하게 확장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제안들이며, 문학 장의 확장은 나 자신의 생존과도 직결된 문제이므로 결코 가벼운 생각에서 나온 것들이 아니라고는 확언할 수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지난 9년의 과오를 씻어내고 한국문학 장의 확장에 실질적이고도 중요한 기여를 해 줄 것으로 믿는다.

 

 

 

 

 

 

 

 

 

 

 

작가소개 / 양재훈

문학평론가. 편저 『이원조 비평선집』이 있음.

 

   《문장웹진 2018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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