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의 일들 외 1편 - 천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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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창밖의 일들

 

 

천수호

 

 

 

그때 그와 소꿉놀이처럼 간소한 밥상을 차려 놓고
개망초 키가 하늘을 가린 마당을 내다보며 늦은 아침을 먹을 때도
매미소리는 쌓이고 녹고 쌓이고 녹으며 흰 눈 행세를 했었다
그와 보낸 첫 밤도 흰 눈이 사선으로 내려 고르게 쌓이던 밤이어서
쌓이고 녹는 것은 숨 고르는 일처럼 게으르게 알게 되는 창밖의 일이었다
그와 내가 함께 쌓은 바깥의 그 무엇들이 소리도 없이 무너졌다는 것은
찬 겨울을 다 지나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이의 소꿉놀이가 순정에서 무정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은
냄새가 없는 한 줄의 짧은 언어놀이로 전달되었다
이상하게도 밖은 맑았고 쌓고 녹은 것이 깊은 밤 방바닥에서 끈적하게 만져졌다
피 냄새인지 살 냄새인지 타는 냄새인지 식는 냄새인지 간밤을 보내고
오늘 아침 첫 매미소리가 새로 시작하는 작업이 있다
매미소리는 대패에 깎인 톱밥처럼 더러는 꼬부라지고
더러는 바스러져서 어디로 떨어질 것인지도 모르고 쌓이고 있다
그의 새 소꿉놀이도 지루해졌을 만큼의 시간이 흘러갔지만
아직도 나는 간소한 밥상을 차리고 창밖엔 더러 그때의 흰 눈발이 들이치고
등 뒤에서 가만히 눈발의 속도로 노래하는 매미를 느껴 보는 것이었다

 

 

 

 

 

 

 

 

 

 

 

 

 

송도

 

 

 

검은 배를 한 짝씩 신고 대양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누굴까? 저 큰 발의 임자는!
아버지가 그 옛날 신었다는 검정고무신에
가끔씩 하얀 꽃그림을 그려 넣는 언니가 있었다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언니의 매화는 천천히 떨어졌다
회색 바다 위에 검정고무신이 흩어진다
어디를 디뎌야 아버지 화가 풀릴까
언니는 검정치마 뒤로 흰 붓을 숨겼다
알 수 없는 무늬가 엉덩짝에 어룽거렸지만
언니는 혼자만 몰랐다
아궁이에 젓가락을 달궈 머리카락에 웨이브를 넣고
분꽃씨 쪼개어 실핏줄 붉은 볼에 비벼댈 때마다
두 눈 부릅뜨던 아버지
검정고무신을 꽃신으로 만들던 언니는
꽃신의 매화가 다 진 줄도 모르고
아버지가 늦게 용서한 줄도 모르고
흰 무명천을 매화 봉오리처럼 휘휘 감고 숨었다
아버지의 고무신 보폭도 줄어들어
겹겹의 꽃잎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듯 천천히 멈췄다
그 꽃잎이 다시 겹겹 수십 번 새로 피고
바다 얘기는 점점 더 까마득해졌다
기일만 되면 키 큰 아버지는
저 너른 바다 위에 검정고무신을 흩여 놓고
이제는 제법 나이 들어 처연하게 분꽃씨 빻는
언니를 내려다보고나 있는 듯이
참 나른하게 화창한 날씨를 내다 걸었다

 

 

 

 

 

 

 

 

 

 

 

 

 

 

작가소개 / 천수호

경북 경산 출생.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민음사), 『우울은 허밍』(문학동네). 현재 명지대학교 출강. 삶의 향기 동서문학상 운영위원. 예버덩 문학의집 운영위원.

 

   《문장웹진 2018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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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oughts on “창밖의 일들 외 1편

댓글
  1. 창밖의 일들 잘 읽었습니다. 시 너무 좋습니다. 이제 시작하는 습작생이지만 열심히 읽고 따라하려고 애쓰는 중입니다. 매미소리를 저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우고 갑니다. 올 여름은 매미 소리가 드물게 들리고 낮은 매섭습니다. 맹렬한 더위도 언젠가는 사그라들 계획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는 한가롭습니다. 감사합니다.

  2. 송도를 감상하고 하늘나라에 있는 내언니를 불러 왔습니다. 우리언니는 볼우물이 들어가 웃으면 참예쁘고 큰 눈이 그리운날입니다.
    언니를 용서하고 편하게 보내줘야 하는데 나는 늘 언니가 밉습니다. 너무이른 나이에 나를 떠났기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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