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묵시록, 지옥에서의 글쓰기 – 김사과론 – - 이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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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in문학]

 

 

<새로운 시대, 문학의 키워드>
 

'여성, 노동'같은 전통적인 주제에서 시작해 '문체, 주체'와 같은 비평 키워드나 '번역, 상호텍스트성'같은 문학적 키워드, '환상, 무의식'같은 인접학문 그리고 '빅데이터, 가상현실'같은 미래용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학의 키워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비평in문학]의 새로운 비평 기획입니다.

 

 

도시의 묵시록, 지옥에서의 글쓰기
– 김사과론1)

 

 

이만영(문학평론가)

 

 

 

 

이 글은 필자가 이미 발표한 바 있는 「기식, 유희, 분노 – 2000년대 한국소설의 주체 형상화 방식을 중심으로」(『한국문예창작』 14권 2호, 2015)의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1. 목소리들 : "세계를 언인스톨하라!"
    오디세우스 서사에 등장하는 '엘페노르'는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자 하는 인간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키르케의 마법에 걸려 돼지로 변해버린 엘페노르. 그는 오디세우스에 의해 비로소 인간의 모습을 되찾지만, 자신을 인간으로 '해방'시킨 오디세우스에게 되레 맹렬한 비난을 퍼붓는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먹고 자는 것 이외에 아무런 고민이 없는 돼지의 삶이 더 매혹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렇듯 돼지의 삶을 유지하고자 하는 엘페노르의 욕망, 즉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생각이나 의심 따위는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그 욕망은, 어느덧 우리 시대의 공통감각으로 자리 잡힌 듯하다. 우리는 자본이라는 굴레 속에서 영원히 안주하고자 하고, 자기를 점차 소진해 가는 데 무감각해진 나머지 더 이상의 분노조차 느끼지 못하며, 자기만의 세계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려는 자폐아적 감각이 널리 유통되는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다.
    더 이상 전도유망한 미래가 도래하지 않을 것이라는 흉흉한 풍문들이 들려오는 가운데, 한 작가는 다음과 같은 수상한 질문을 우리 앞에 던진 바 있다. "인류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인류를 언인스톨할 것인가?"2) "개인은 세계로부터 배제되어 있다."3)라는 냉소적 선언과 함께 제기되었던 이 질문은, 2000년대 작가들이 공유하고 있는 감각을 잘 응축하고 있다. 가령 아이들에게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4)라는 혼잣말을 읊조리면서, "아무리 떨어져도 바닥에 닿지 않"5)는 희망 없는 세계에 대해 회의하고, 노인이 되어서조차 "적막과 고독 속에서 지내야 한다는 게 자명"6)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불안감이 바로 2000년대 작가들의 공통감각이라면, '언인스톨'의 욕망은 그러한 불안과 고립 상태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끝장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부터 잉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박민규가 '언인스톨'의 욕망에 대해 '질문'했다면, 김사과는 가장 가열찬 방식으로 그 욕망을 '실현'시킨다. "결국 세계를 바꿀 수 없었으므로 이제 그만 세계를 끝내려고 한다. 그 방법은 더 이상의 번식을 중단하고 집단학살과 자살을 병행하여 인류 전체가 멸종에 이르는 것이다."(3:235)와 같은 진술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 김사과의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분노 에너지는 분명 세계의 '변화'가 아니라 세계의 '절멸'을 겨냥하고 있다. 2000년대의 시점에서 볼 때, 이러한 폭력적인 방식의 서사적 문법은 이질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녀의 소설에 나타나는 낯선 리듬을 감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의 서사적 문법이 소설의 윤리와 어떠한 방식으로 매개되고 있는지를 탐독해 내는 것이다. 그것이 해명될 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그녀의 소설을, 단순히 돌출적인 변화의 징후 중 하나가 아니라 불온한 세계를 내파하는 목소리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김사과는 풍요로운 도시 공간을 '지옥'이라 지칭하고, 그 공간 속에서 위상학적인 자립성을 상실한 '나'와 '우리'를 "아무것도 아니다."(3:119)라고 선언한다. 그녀는 이러한 이중의 부정, 즉 '자기-부정'과 '세계-부정'을 지독하게 반복하면서 "주위의 모든 것이 내 분노의 원인이다."(3:191)라는 명제를 냉랭하게 발화한다. 김사과에게 있어서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없어져 있거나 없어져야 할 것으로 호명되고, 오로지 반복되는 것은 "지속 가능한 파괴"(4:126)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녀가 어김없이 도시를 파괴의 장소로 호출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일어나는 존재론적 균열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야 한다. 이를테면 도시를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5:62)는 공간으로 그린다든지, 서울을 "자본주의 체제의 최전선"(4:125) 혹은 "타인들로 이루어진, 타인의 성지"(3:242~243)로 명명하고 있다는 점은, 그녀의 소설이 근본적으로 '장소(성)'의 소설임을 확인케 하는 대목이다. 어찌 보면 그녀의 소설 전체가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4:9)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의 절멸이 폭력적으로 실천되는 (불)가능성의 공간이 바로 '테러의 시(市)'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글을 시작해야 한다.

  1)  여기서 사용된 김사과의 작품(집)은 다음과 같다. ① 『미나』, 창비, 2008, ② 『풀이 눕는다』, 문학동네, 2009, ③ 『영이』, 창비, 2010, ④ 『테러의 시』, 민음사, 2012, ⑤ 『천국에서』, 창비, 2013, ⑥ 『더 나쁜 쪽으로』, 문학동네, 2017. 이하 작품을 인용할 시에는 작품 순으로 본문 괄호 속에 '수록 작품(집):페이지 수' 표기를 따르도록 한다.
  2)  박민규, 『핑퐁』, 창비, 2006, 244면.
  3)  위의 책, 58면.
  4)  김애란, 「서른」, 『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97면.
  5)  황정은, 『야만적인 앨리스씨』, 문학동네, 2013, 132면.
  6)  편혜영, 「비밀의 호의」, 『밤이 지나간다』, 2013, 104면.

 

 

2. 분노의 조건, 지옥의 토포스(topos)
    김사과는 "도대체 이 모든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한다. "주위의 모든 것이 내 분노의 원인"(3:191)이라고. 또한 분노의 극한이라고 여겨지는 테러를 감행한 이후, "모든 게 망가졌는데 왜 아무것도 무너져 내리지 않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증오와 분노가 "방향을 알 수 없는, 아니, 모든 방향을 향한 순수한"(5:330) 것이라고. 이러한 질문과 답변의 교차적 수행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분노의 윤리학은 대략 다음과 같다. 주위의 모든 것이 분노의 대상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그저 분노할 수밖에 없다고. 그리고 테러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무너져 내리는 것이 없기 때문에 더욱더 분노할 수밖에 없다고. 요컨대 김사과의 소설에서는 분노의 원인이 전 방위적으로 육박해 들어오기 때문에 분노가 모든 방향을 향해 발산될 수밖에 없다.
    새삼 반복할 필요도 없이 김사과가 택한 행동강령은 분노이다. 분노야말로 그녀의 소설이 가진 에너지의 근원이자 '절대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최후의 포즈이다. 그렇다면 이 분노의 근원으로 호명된 '모든 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배양되는 것인가. 이는 김사과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 가장 근원적인 질문들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지칭하는 '모든 것'은 분노가 정당화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 그 자체를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도시는 영혼이 없다. 인간에게 영혼이 없듯이."(3:229)라는 진술을 통해 그 실마리를 풀어 보도록 하자. 여기에서 도시와 인간은 '영혼 없음'이라는 부정의 술어로 설명되고 있다. 대체로 불온한 세계를 비극이 발생하는 진앙지로 호출해 왔던 근대문학적 논법에 기댈 때, 도시와 인간이 모두 '영혼 없음'이라는 본질을 공유한다는 김사과의 인식은 분명 당혹스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일반적으로 근대문학은 세계와 인간의 불화를 다루는 데 있어서 인간보다는 불온한 세계를 문학의 법정으로 소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김사과는 둘 모두를 피고로 내세움으로써 불온한 세계를 방기해 왔던 인간의 책임을 결코 묵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시를 굳건하게 지탱하는 빌딩을 바라보며, "저걸 원한 건 우리들이야. 그래서 이 도시가 이따위로 생겨먹은 거야. 우리가 이런 모습의 도시를 원했으니까 이런 모양이 된 거라고."(2:146)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김사과는 인간과 세계를 모두 공모자로 몰아세움으로써, 이 세계에 대한 불온성과 인간의 비윤리성을 모두 파괴의 대상으로 그려낸다.
    김사과가 우선적으로 분노의 작인으로 호출하고 있는 것은 '영혼 없는' 인간의 축조물, 즉 '영혼 없는' 도시이다. 개인이 자신의 개별성과 특수성을 상실한 채 '세인(das Man)'으로 전락해 버리는 도시, 그러니까 균질성과 무차별성만이 지배하는 도시가 바로 그녀가 소환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서울에 대해서 생각했어. 너, 너의 도시, 타인들로 이루어진, 타인의 성지. 모든 것이 타인들을 위해 존재하는 한 도시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어. (…) 아이들은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를 위해서, 대화는 서로가 아니라 훔쳐듣는 쥐를 위해서 존재했어. (…) 매 순간 삶은 타인들에게 증명되기 위해 갱신된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3:242~243)

 

도시는 거대했다. 아니 끝이 없었다. 아무리 걸어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 바로 그곳이 내가 태어나 자랐고 또 살아가는 곳이었다. 절망적이었다. (…) 나는 분명히 익사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런 하찮은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2:13)

 

    도시의 사람들은 자신의 내밀한 욕망을 좀처럼 발화하지 못한 채 타인의 욕망을 대리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 간의 대화 회로는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다. 오로지 도시가 타인의 욕망만이 넘쳐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나'는 지워지고 삭제된다. 그야말로 '내'가 딛고 있는 도시의 땅은 타인들에게 증명받기 위한 인정투쟁의 공간인 것이다. 이처럼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휘발되고 익사해 버리는 장소. 그 장소가 바로 김사과가 지목한 도시이다.
    사실, 도시가 가진 디스토피아적 속성은 ‘개체성의 소멸’이라는 측면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사과는 자본주의 시장으로부터 초래된 실존적 불안보다도 더 커다란 문제, 즉 혁명이 좀처럼 도래하지 않는 바로 그 상황을 문제화하고 있다. 이는 『테러의 시』와 『천국에서』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김사과는 이들 소설에서 뉴욕이나 서울과 같은 도시를 절멸의 대상으로 직접 호출한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육팔 혁명에 대한 책"에 적혀 있는 "혁명, 학생, 노동자, 젊음, 신좌파, 사랑, 상상력"(4:108) 등과 같은 말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슬라보예 지젝의 책을 찾아 읽거나 윌리엄스버그에서 열리는 소규모 좌파 세미나에 참석하기도 하는 한편 프루동이나 바쿠닌이 했다는 말을 티셔츠에 써넣어 비싼 값에 팔아먹"(5:31)기도 하고, "펑크, 아나키즘, 아방가르드, 공산주의, 혁명" 등을 "철저히 개념적인 차원"(5:142)으로만 접근한다. 이제 '육팔 혁명'은 '학생, 노동자, 신좌파' 등 과거의 언어로 포장된 채 존재하며, '슬라보예 지젝'이나 '프루동', '바쿠닌' 등이 내뱉었던 뜨거운 혁명의 목소리들은 그저 시장에서 판매될 상품의 모티브로서만 작동할 뿐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서 혁명은 현시불가능한 상상적 행위로, 혹은 자본주의에 의해 오염되어 버린 언어로 기억된다.

 

그것은 육팔 혁명에 대한 책이다. 제니는 그 책을 집어 든다. (…) 거기 커다랗게 '휴머니즘'이라고 쓰여 있다. 그렇다, 휴머니즘. (…) 도착한 부엌은 놀랍게도 휴머니즘으로 가득 차 있다. 천장도, 바닥도, 싱크대도, 프라이팬도, 프라이팬 속에서 썩어 가고 있는 스파게티 또한 휴머니즘으로 충만하다. (…) 제니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부엌을, 아니 집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휴머니즘을 노려본다. 저것을 제거해야 한다. (4:110~111)

 

    위 인용문에도 나와 있듯 '휴머니즘'은 도처에 산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휴머니즘, 다시 말해 육팔 혁명이 꿈꿨던 그 휴머니즘을 쓰레기로 규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자본주의가 가진 포식성으로 혁명의 정신과 휴머니즘의 모럴이 모조리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육팔 혁명은 분명 '휴먼'을 위해 감행된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 이 세계에서 변한 것은 없고, 오로지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자본주의에 의해 오염된 휴머니즘뿐이다. 따라서 이제 혁명과 휴머니즘은 모두 과거의 언어로 사장된 채 존재한다. 그렇다면 순수한 의미의 혁명과 휴머니즘이 사라져 버린 도시, 자본주의의 성채로서 군림하는 이 도시에서 도대체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도시를 재생할 수 있는 사업을 기획하는 것이다. 도시 재생을 위한 테러야말로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다.

 

제가 연관된 중요한 사업이 하나 있어요. (…) 말하자면 긴데. 일종의 도시 재생 사업이라고 할 수 있죠. (…) 도시 문명 재생 사업? 그건 또 뭐죠? 일종의 테러죠. (…) 우리의 목적은 분명해요.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는 거죠. 그래서 흔히 세계의 자본주의 핵심 지역, 그중에서도 핵심 도시라고 말할 수 있는 곳들, 런던, 뉴욕, 도쿄 등에 사업의 역량을 집중시켰어요. 그러다 몇 년 전 우리 조직의 윗선에서 한 가지 의문을 품었죠. 지금 자본주의 체제의 최전선인 곳이 어디일까? 뉴욕? 런던? 싱가포르? 아뇨, 남한의 서울이라는 결론이 났어요. (4:124~125)

 

    김사과에게 도시는 더 이상 개인의 안전과 정체성을 제공하는 공간도, 상호 교류가 가능한 인간적인 터도, 대안적 문화가 생산될 수 있는 토대도 아니다. 위 인용문에도 나와 있듯, 도시는 자본주의의 핵심지역으로 호명된다. 이러한 공간에서 개인은 '장소에 대한 애착(topophilia)'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다. 그래서 김사과는 개체성이 뿌리 뽑히고 혁명조차도 불가능해진 불온성의 공간으로 서울을 지목하면서, "서울은 말 그대로 지옥"(4:168~169)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도시 공간에 귀속되지 못하고 오히려 불화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도시를 천국으로 예찬하고 있을 때 오히려 "여기는 천국이 아니야. 여기는 지옥이야. 여기는 지옥이야."(5:339)라고 읊조릴 수밖에 없다. 그에 따라 김사과의 소설에서 도시 공간은 결국, 사회적 분노가 고스란히 정치적 정념으로 표출되는 공간으로 화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도시 공간의 디스토피아적 속성을 묘파해 내고자 한 작가는 비단 김사과뿐만은 아닐 것이다. 예컨대 편혜영도 "비위생적인 거리의 쓰레기 더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일"7)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도시 공간을 다뤘거니와, 김중혁 또한 "수천수만 개의 유리가 위태롭게 매달려 있"어서 "언제 어떻게 유리가 떨어질지 알 수 없는"8) 불확실성의 공간으로서 도시를 다룬 바 있다. 하지만 김사과가 이들 작가들과 결별하는 지점은, 도시 공간이 가진 문제적 지점들을 낱낱이 열거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 공간 속에서 '테러'라는 형식의 극단적인 분노가 주저함 없이 표출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즉, 김사과에게 있어서 도시 공간은 휘발되어 버린 개체성과 혁명에의 의지 때문에 '존재 분열'을 반복하기만 하는 장소가 아니라, 그것들을 확보할 수 없을 바에야 모든 분노를 분출시키고야 말겠다는 '존재 폭발'의 장소인 것이다.

  7)  편혜영, 『재와 빨강』, 창비, 2010, 87면.
  8)  김중혁, 「유리의 도시」, 『1F/B1』, 2012, 212면.

 

 

3. '체제 내 존재'에서 '부정성의 존재'로
    릴케는 『말테의 수기』의 첫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 도시로 온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사람들이 여기서 오히려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9) 그가 생동하는 도시문명의 풍경 속에서 '죽음'에 대한 시선을 결코 철회할 수 없었던 이유는, 도시가 그만큼 존재론적 고통을 야기하는 문제적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정확히 100년 뒤, 우리는 김사과의 소설에서 릴케의 증언이 반복되는 듯한 문장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미 파도 안에 있다. 그들은 이미 시체들이다."(1:88) 여기서 '파도'란 "서양의 언어와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고 "고급 브랜드 아파트를 짓고, 그 안에 자신들의 유토피아를 쌓아올"리는 도시 공간을 지칭하는데, 그 안에 정주하고 있는 인간들은 모두 '시체'로 규정된다. 이 진술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죽음이 창궐하고 시체가 무한히 양산되는 이 도시 공간에서 태어나, '이미' 시체가 되어버린 존재들이다. 그녀가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존재론적 상황이야말로 우리가 처한 "사회-공간적 상황이고 거기에 예외란 없다."(1:88)는 사실이다. 이렇듯 김사과의 인물들은 '예외 없이' 높은 파도 속에서 익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상실되어 버린 '나'를 찾거나 그 파도에 맞서 싸우는 것조차 불가능한 도시 공간 위에서, '이미' 죽어버린 유령처럼 배회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연유로, 김사과의 소설에서는 임의의 좌표로 떠도는 홈리스(homeless)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집 밖을 뛰쳐나와 공원이나 홍대 주위를 서성이거나(「나와 b」, 『천국에서』), 도시의 거리를 가로지르면서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행위를 일삼고(『풀이 눕는다』), 조선족이라는 무정형의 정체성을 가지고 서울 일대에서 팔려 다니는(『테러의 시』) 등 그녀의 소설은 자신이 딛고 있는 장소의 맥락으로부터 철저하게 분리된 자들로 넘쳐난다. 김사과는 이러한 분리의 공간, 다시 말해 꽉 짜여진 '예외 없음'의 공간에 서 있는 우리를 일컬어 '체제 내 존재'라 명명한다.

  9)  라이너 마리아 릴케, 『릴케 전집 12권 : 말테의 수기』, 책세상, 2000, 9면.

 

나는 회의주의자야.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아. 세계는 더욱더 나빠지고 있어. 희망은 자살이란 형태로 존재할 뿐이지. 더 이상 무엇이 가능하지? 물론 체제 내에서의 이야기야. 하지만 알다시피, 체제는 견고해. 우리는 체제 내 존재야. 우리는 삼차원적 동물이라고. (2:228, 강조는 인용자)

 

    김사과는 누구나 '예외 없이' 자본의 힘에 예속되어 있는 현 상태를 '체제'라 부른다. 이처럼 체제는 자본의 외부로 나갈 수 있는 출구를 완벽하게 봉쇄한 상태로 운용되며, 그 결과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자본이라는 이름의 자장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에서는 "세계가 돈에 짓눌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었다. 예외는 없었다. 모두가 그 흐름에 휩쓸려야 했다. 화가건 회사원이건 택시기사건 예외가 없다."(2:58)는 체온 없는 말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사과의 소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로서의 인간이 주위 세계에 귀속되어 있고 그 세계를 실존의 장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하이데거식 논법을 따름과 동시에 초과한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 김사과는 세계라는 무대에서 인간의 선택과 결단에 따라 '실존'의 가능성을 탐문하고자 했던 하이데거의 관점을 넘어서, 모두가 예외 없이 '전락'의 가능성만을 담지할 수밖에 없다는 극한의 존재론을 구사한다.
    요컨대 김사과에게 있어서 더 이상의 희망은 없다. 희망이라는 것은 오로지 "자살이란 형태로 존재할 뿐"이며 "고통 속에서 희망을 찾는 것 자체가 이미 조금도 정상적인 태도가 아"(1:88)니라는 이 냉랭한 발화들은, 꽉 짜인 체제에 순응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이제 어떠한 외부도 허용하지 않는 이 빈틈없는 자본의 성채에서 살아남기 위해, 김사과의 인물들은 두 갈래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 체계 안에 귀속되어 동물적인 삶을 살아가든지 아니면 그 체계 속에 편입되기를 끝까지 거부하면서 잉여물로 남아 있든지. 김사과의 인물은 주로 후자 쪽의 길을 선택하면서, 이 체계 안에 거주하면서도 어떠한 방식으로든 언표화 되기를 거부하는 공백의 주체들로 남아 있다.
    그에 따라 김사과의 소설에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3:119) 혹은 "쉽게 말해 난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난 투명한 인간이다."(3:190), 그리고 "제니는 조선족이야. (…)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야. 어, 아무것도 아니야."(4:88) 등과 같은 진술들이 범람한다. 요컨대 그녀의 소설에서 '나(우리)'의 정체성은 '없는 것', '투명함', '아무것도 아님' 등과 같은 화법을 통해 부정된다. 이와 같이 김사과는 부정의 존재론을 통해, 견고하게 짜인 이 '체계' 속에서 아무런 언표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는 자들의 목소리를 복원하고자 한다.

 

공원 입구 벤치에 앉아 있으면 할아버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와의 대화는 언제나 지루했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내 아들은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너는 어느 대학에 다니느냐. 내가 대답했다. 나는 대학에 다니지 않습니다. 내 딸은 연대 경영학과에 다니고 씨티은행에서 인턴을 한다. 너는 뭘 하느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내 손자는 하바드와 스탠퍼드에 동시에 합격하는 것이 꿈이다. 너는 꿈이 뭐냐. 나는 아무런 꿈도 없습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실망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나는 조금 쓸쓸해졌다. (3:123)

 

    위 인용문에서 '나'는 대학에도 다니지 않고, 취직도 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꿈도 없는 존재이다. 대학, 취업, 꿈 등을 통해서 한 사람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할아버지의 입장에서 볼 때,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호명될 수 없는 잉여물일 뿐이다. 다시 말해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학벌의 공동체로부터 배제되어 있고, 취업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노동의 질서에서 자리를 할당받지 못한 존재로 형상화된다. 할아버지가 대화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에 '나'는 쓸쓸함을 느끼는데, 그 이유는 '내'가 궁극적인 의미의 '사람', 순수하게 평등한 의미의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있는 현실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대학생도 아니고, 직장도 다니지 않으며, 꿈조차 없는 이 무정형의 인물은 자본 공동체의 특권적 언표로부터 배제된 유배지, 예외, 잉여의 자리에 위태롭게 서 있다. 이와 같이 김사과는 잉여물들, 그러니까 이 체제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죽을 수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소설의 언어로 포획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녀의 부정의 존재론을 단순히 '부정을 위한 부정'이라고 예단해서는 안 된다. 그녀의 부정 존재론은 단순히 파괴만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고, 허무주의를 완성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구사하는 부정의 화법은 보다 근원적인 긍정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김사과는 자본의 체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체제의 언어로 결코 포획되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체제 내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결코 그 안에 포섭되지 못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체제 내부에서 파열을 일으키는 존재로 불러들인다. 그리하여 개체성이 휘발되고 혁명조차 불가능해진 이 체제가 전복되는 순간을, 다시 말해 억압된 자들이 회귀하는 그 불가능성의 순간을 집요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4. 지옥에서의 글쓰기
    김사과의 소설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이 세계를 절멸시키는 중요한 벡터로 작동된다. 그녀는 혁명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이 도시 공간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을 호출한다. 그리하여 체제의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이러한 부정의 주체들이야말로 혁명 없는 시대를 '끝장'낼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녀의 소설을 지탱하는 힘은, '세계에 대한 부정'과 '존재에 대한 부정'을 가로지름으로써 형성된다. 다시 말해 김사과는 이 체제 내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결코 체제의 질서에 들어서지 못하는 잉여들을 소환함으로써,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5:60~61)는 이 견고한 체제의 질서에 구멍을 내고자 한다. 김사과는 이러한 불가능한 것들의 회귀를 통해서 체제 바깥의 정치와 접속한다.

 

    케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믿지 않겠다. 아무것도, 흘러가도록,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 불어나는 저 푸른 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지 않겠다. (…) 그녀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바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문득 그녀는 수족관 따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기억의 푸른 물은 나를 익사시키지 못할 것이다. 헤엄쳐 그 강을 건널 거니까. 그렇다. 헤엄쳐, 저 너머에 닿을 거다. (…) 거기가 천국일지 지옥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겠다. 아니, 지금 간다. (5:341, 강조는 인용자)

 

    자본의 체계가 '예외 없음'을 원칙으로 삼는다면 그 체계를 교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체제의 '바깥'을 향해 구멍을 내는 것일 터이다. 그 '바깥'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체제 바깥을 응시하려는 실천에의 길이 바로 김사과가 택한 소설적 행로이다. 김사과 소설의 독자라면 잘 알고 있듯, 이러한 실천은 김사과에게 있어서 분노, 죽음, 테러 등의 소재와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의 소설에서 분노와 테러가 난무한다는 점을 근거로, 그녀의 소설이 도덕적 기율을 항상 초과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어찌 보면 부당한 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김사과의 소설은 궁극적으로 '도덕의 부재'가 아니라 '도덕을 넘어서는 도덕(hypermorale)'10)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이 하나의 상징화된 의미체계를 의미한다면, 김사과는 그것을 넘어서는 도덕을 새롭게 주창해 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그러한 소재들을 차용한다. 그녀는 주어진 세계 내부의 질서에 복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질서에 기필코 균열을 내겠다는 바로 그 의지를 자신의 문학적 기율로 설정하고자 한다.
    주지하듯 묵시록의 목적은 '종말'과 '구원'을 동시에 설파하는 데에 있다. 『계시록』의 저자 요한이 이 세계의 몰락을 예고했으면서도 끝까지 재림의 순간을 예시하려고 했던 이유도, 심판의 기록이 결국 구원의 기록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개체성과 휴머니즘이 스러진 잔해 위에서 이 세계의 종말을 설파하려는 김사과의 쓰기 행위는, 어찌 보면 새로운 구원에의 가능성을 열어젖히기 위해 기획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작 『더 나쁜 쪽으로』에 나타나듯, 김사과식 묵시록은 구원 가능성에 대한 신뢰가 소거되었다는 점에서 본래의 묵시록과는 괴리되는 지점을 향한다.

  10)  조르주 바타유, 최윤정 역, 『문학과 악』, 민음사, 1995, 12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면 한 손에 십자가를 한 손에 교회를 든 금발의 성녀가 미소 짓고 있다. 발목까지 닿는 굽이치는 황금빛 머리카락, 장밋빛 뺨과 입술의 그녀가 우리를 내려다본다. 오래된 천국 속 그녀가 최신식 천국을 내려다보며 웃는다. (…) 오 그대 나를 구원하나요? 그녀가 웃고, 나는 깨닫는다. 천국의 그녀가 내려다보는 여기가 다름 아닌 지옥이라는 것을. (6:18~19)

 

    우리에게는 아무런 생산능력이 없다/먹고 쓴다/오로지 누워 있다/우리에게는 어떤 대항수단도 없다/당신들에게 대적할 아무런 의지가 없다/힘도 없다/항복한다/아무런 조건 없이, 원한 없이/우리는 투항한다 (6:205)

 

    『더 나쁜 쪽으로』를 읽은 독자라면 김사과가 가졌던 고유의 열도(熱度)가 상당히 소실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기존 소설에서 느껴졌던 투쟁과 저항의 에너지는 상당 부분 경감된 반면 투항과 냉소의 에너지가 부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위의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를 구원해야 할 성녀는 그저 이 세계가 '지옥'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는 매개물로 전락한 지 오래이며, 어떤 대항수단도 없는 우리는 이제 이 세계에 대해 '투항'을 선언할 수밖에 없다. 급기야 "미래에 관해서,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나에겐 없다."(6:50)라고까지 말할 정도이니, 김사과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세계는 그야말로 '더 나쁜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김사과의 소설이 새롭게 시작되고 있음을 직감해야 한다. 기존 소설에서는 체제 질서가 폭력적으로 중단되는 절멸(혹은 구원)의 순간이 예시되었던 반면, 이제는 폭력이나 테러로도 불온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투항의 목소리가 범람하고 있다. 조금 더 범박하게 말해 "너는 절대로 지면 안 돼. 너는 절대로 파괴당하면 안 돼. 너는 포기하면 안 돼. 짓밟히더라도, 살아남아야 해."(2:146~147)라는 온기 섞인 목소리에서, "아무런 조건 없이, 원한 없이 우리는 투항한다."(6:205)라는 냉랭한 목소리로의 전환. 이러한 전환이 미학적으로, 윤리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일단 답변을 유보해 두도록 하자. 왜냐하면 김사과가 말하는 투항은 이를테면 체념이나 포기와 같은 용어와 동일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에게 중요한 의제는 세계를 어떻게 바꾸느냐가 아니라 어떠한 세계를 재현하느냐이다. 더 나빠질 이 세계를 끝까지 재현해 보겠다는 의지라면, 다시 말해 쇠멸의 리얼리티를 극한까지 구사해 보겠다는 의지라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김사과 소설의 소재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분명 이 세계는 더 나빠질 것이므로.

 

 

 

 

 

 

 

 

 

 

 

작가소개 / 이만영

문학평론가. 고려대학교 기초교육원 초빙교수.

 

   《문장웹진 2018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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