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인문학 ― 해골 브룩과 ‘엑스터시’ - 권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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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원피스인문학]

 

 

"저는 죽어서 뼈만 남았습니다""

―해골 브룩과 '엑스터시'

 

 

권혁웅

 

 

 

    1
    브룩이 밀짚모자 일당에 합류하는 장면에서 경악한 독자들이 많았을 것 같다. 밀짚모자 일당을 실은 배가 마의 삼각지대에서 처음으로 맞닥뜨린 것은 유령선이었으며, 브룩은 해골만 남은 몸으로 혼자서 그 죽음의 배를 지키고 있었다. 루피의 동료들이 그를 경계하며 질문을 건넸는데, 선장 루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우선 넌 백골뿐인데 어째서 살아서 말을 하는지, 네 정체는 대체 뭔지, 왜 여기에 있는지, 이 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바다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 대답해!"(상디가 브룩에게)
    "그보다 너, 내 동료로 들어와라!"(루피가 브룩에게)
    "예, 그렇게 하죠."(브룩의 대답)
    "어어, 야아!"(놀란 상디와 나미의 탄식)
    "요호호! 하이, 여러분. 안녕들 하신지! 전 오늘부로 이 배에 신세를 지게 된 '죽어서 뼈만 남은' 브룩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브룩이 모두에게) (46권 442화)

 

    루피의 반응은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첫 회에서 말했듯 루피는 특이한 캐릭터에게는 늘 동료가 되기를 권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스릴러바크의 모험 편에서도 루피는 묘지에서 맞닥뜨린 징그러운 실험 동식물들에게도 동료로 가입하길 권유한다. 그리고 그런 권유가 다른 해적단이 위계적인 무력집단인 것과는 다르게 밀짚모자 일당을 평등하고 수평적인 동료들의 모임으로 만든 계기 가운데 하나였다. 루피가 브룩에게 맨 처음 던진 질문은 이것이다. "너 똥 싸?" 이 호기심이 단순왕 루피를 해적왕으로 추동해가는 동력이다.
    브룩은 처음에는 공포와 혐오를 유발했고, 잠시 후에는 아무도 웃지 않는 썰렁한 농담을 던지는 비호감 개그 캐릭터임이 드러났으며, 뼈만 남은 몸에 아프로 헤어스타일을 한 '엑스트라 악당급' 외모의 소유자였다. 추한 외모, 시체, 웃기기는커녕 불쾌감만 유발하는 유머 감각, 과장된 행동, 호러문법에서만 설명되는 설정…… 어느 것 하나 주인공 그룹에 들기에는 적절하지 않아 보이는 자질들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브룩은 죽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모험을 수행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캐릭터다.

 

    "전, 사실 몇 십 년 전에 한 번 죽은 몸이지요. 부활부활 열매란 '되살아나는' 다시 말해 '부활인간'이기에 두 번의 인생을 약속 받는 아주 신기한 능력이죠. 먼 옛날 전 해적이었습니다만, 제가 타고 있던 아까 그 배로 동료들과 함께 이 '마의 바다'로 흘러들었는데…… 운 나쁘게도 어마어마하게 강한 동업자들을 만나 전투로 일당은 전멸. 당연히 저도 그때 죽어버린 거죠. 살아 있을 때는 단지 맥주병에 불과한 부활부활 열매 능력이었지만, 그날 마침내 열매의 능력이 발동했습니다. 제 영혼은 황천국에서 현세로 다시 돌아온 겁니다. 곧바로 자신의 시체에 들어가면 되살아날 수 있는데, 제가 죽은 이 바다는 보다시피 안개가 짙어 길을 잃고 말았지요. 안개 속에서 영혼의 모습으로 헤매기를 1년! 자신의 몸을 발견했을 때는 아뿔싸, 이미 백골이 되어 있지 뭡니까!"(브룩, 46권 443화)

 

    그는 죽은 지 1년 만에 부활부활 열매의 능력으로 부활했다. 해골만 남은 상태 그대로. 브룩은 언제나 해골만 남은 자기 몸을 농담의 소재로 쓴다. 이런 식이다.

 

    "오늘도 배 터지게 대접 받아서 살이 쪘을지도!" "뼈다귀인데?"(50권 486화)
   "전 미인만 보면 눈이 멀어버리죠. 해골이라서 눈은 없지만서도! 요호호!"(51권 497화)
   "재회의 감동으로 가슴이 전 떨려요. 떨릴 가슴 없지만서도. 요호호."(61권 602화)
   "전 어째 으슬으슬 살이 쫀득해지는데요? 아, 하지만 저……" "넌 뼈다귀라서 살이 없는데 말이지."(62권 604화)

 

    '몸'과 관련된 언어는 모든 언어의 출발점이다. 언어가 없다면 인간은 추상화의 능력을 얻지 못했을 것인데, 실은 이 추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출발지가 구상(具象)으로서의 몸인 것이다. 몸을 지칭하는 명칭들은 모든 명사의 원형이고, 몸의 동작은 모든 동사의 기원이며, 몸의 상태는 모든 형용사의 출발지다. 브룩이 이 몸을 농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자신이 이 몸의 대부분을―살과 눈과 가슴과 귀와…… 여타의 것들을―잃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환기시킨다. 그는 자신을 걸고 말할 수 있는 것을 거의 대부분 잃었던 것이다. 단 하나, 그가 제 몸을 걸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브룩이 정식으로 밀짚모자 해적단에 가입하는 장면이다.

 

    "늦었지만 인사 올립니다. 전 죽어서 백골뿐인, 이름은 브룩이라고 합니다. 수배서가 붙은 몸이지요. 일명 콧노래 브룩! 현상금 3천 300만 베리. 옛날 어느 왕국의 호위 전단(戰團) 단장으로 지냈고, 그 후 룸바 해적단 선장대리 음악가 겸 검사, 오늘부터 밀짚모자 루피 선장께 이 목숨, 맡기겠습니다. 여러분의 짐이 되지 않도록, 이 한 몸 아끼지 않고 뼛골 빠지게 뛰겠습니다!"(50권 489화)

 

    그렇다. 그는 말 그대로 '뼈'만 남아 있다. 이 입단 선서에도 모순이 하나 있다. 그는 "죽어서 백골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맡기겠다고 말한다. 자신이 걸 수 있는 최후의 패를 잃어버린 마당에 그는 무엇을 맡길 수 있다는 말일까? 이 무력감은 실제의 전투 현장에서 재현된다. 샤봉디 제도에서 폭군 바솔로뮤 쿠마에 의해 밀짚모자 일당이 하나씩 '제거'(실제로는 쿠마에 의해 해군들의 공격에서 '구제')될 때의 일이다.

 

    "위험합니다. 브룩, 지켜드리겠습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 난 이미 죽었……"(53권 513화)

 

    말을 끝맺지 못한 것은 저 말을 하는 도중에 그가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브룩이 대표하는 모순된 두 개의 진술, '나는 죽었다'(그렇다면 죽었다고 말하는 '나'는 누군가?)와 '나는 뼈다'(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보고 듣고 느끼는가?)는 우리에게 사유의 모험을 요청한다. 우리의 실존과 사유 사이에 놓인 거대한 심연을 건너가야 하는 모험, '엑스터시'와 관련된 모험 말이다.

 

    2
    육체와 정신의 관계는 서양 근대철학의 가장 큰 탐구대상이었다. 육체는 물성(物性)을 가진 실체다. 그것은 움직이는 사물에 불과하다. 동물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거기서 움직임마저 제거되면 그것은 시체가 된다. 육체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육체 바깥의 타율적인 힘, 예컨대 신의 뜻이 원인이라면 그런 육체는 마리오네트와 같은 타율적인 인형이 된다. 육체를 움직이는 힘이 육체에 내재했을 때, 이를 정신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정신(능동성)/육체(수동성)'이라는 일방통행식의 이분법이 성립한다. 아이가 장난감을 이리저리 옮기듯, 자유의지를 가진 정신이 사물로서의 육체를 조종하는 셈이다. 이런 육체는 동력기관을 내장한 자율적인 인형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사물로서의 육체를 움직이는 정신의 인형조종술―이것이 관념론의 기획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이 인형=로봇의 조종석에 정신이 앉아있다는 선언이다. 모든 것을 의심해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심할 수는 없다. 이 의심이 곧 사유이며, 의심의 주체가 사유의 주체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저 사유란 것은 육체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맛보는 것들, 곧 지각하는 것들의 반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지각이 판단을 낳고(예컨대 '이것은 맛있다'에서 '이것은 멋있다'까지의 거리는 아주 가깝다. 둘 다 '몸'의 언어에서 파생되었다), 판단이 추론을 낳는다. 추론하는 능력이 곧 사유능력이다. 정신은 지각의 고차적원인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 정신의 모든 지각은 서로 다른 두 종류로 환원될 수 있는데, 나는 그것을 인상과 관념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지각들이 정신을 자극하며 사유 또는 의식에 들어오는 힘과 생동성의 정도에 있다. 최고의 힘과 생동성을 가지고 들어오는 지각에 우리는 인상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으며, 감각(sensation), 정념(passion) 그리고 정서(emotion) 등이 우리의 영혼에 최초로 나타나므로, 나는 이것들을 모두 인상이라는 이름에 포함시킨다. 나는 관념을 사유와 추론에 있어서 인상의 희미한 심상(a faint images)이라는 뜻으로 쓴다.1)

  1)  흄, 『오성에 관하여』, 이준호 옮김, 서광사, 1994, 25쪽.

 

    인상(impression)이란 육체(지각은 육체의 작용이다)가 정신에 찍은 도장(imprint)이다. 감각, 정념, 정서가 모두 지각이 찍은 도장이다. 관념은 "인상의 희미한 심상" 곧 인상의 인상이다. 단순한 인상에서 단순한 관념이, 복잡한 인상에서 복잡한 관념이 나온다. 따라서 정신은 육체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독자적인 능력이 아니라 육체의 작용이 만들어낸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능동적인 육체가 자신의 활동의 결과로 산출해내는 관념으로서의 정신―이것이 경험론(유물론)의 주장이다.
    전자(관념론)는 정신의 우선성을 주장하고, 후자(경험론)는 육체의 유일성을 주장한다. 둘은 화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육체에 앞선 정신인가, 아니면 육체가 투영한 스크린 위의 영상(관념)인가?

 

    '나는 사고한다'는 것(=통각)은 나의 모든 표상에 수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전혀 생각될 수 없는 것―그것은 표상으로서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님을 말하겠는데―이 나에게서 표상되는 셈이 될 터이니 말이다. 모든 사고에 앞서 주어질 수 있는 표상은 직관이라 일컫는다. 그러므로 직관의 모든 잡다는 이 잡다가 마주치는 그 주관 안에서 '나는 사고한다'는 것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는다.2)

  2)  칸트, 『순수이성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6, 346쪽.

 

    칸트는 이 둘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종합했다. ①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의 다양한 정보들을 받아들인다. 이때 대상들은 시간, 공간 안에 주어진 것으로 표상되는데, 이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이를 '직관'이라 부른다)은 우리에게 선험적으로(경험하기 전에 미리) 주어져 있다. ② 우리는 지각에 의해 받아들여진 다양한 대상들을 일정한 방식으로 분류하고 결합하고 정돈한다. 이런 종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상상력'이다. ③ 이 종합이 표상이 되려면 '통각'에 의해 통일되어야 한다. 통각이란 "~라고 생각하다"의 주체다. 지각에 들어온 다양한 대상을 종합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것들에게 정확한 자리를 부여하려면, 곧 그것들을 개념으로 인증하려면 "내가 ~라고 생각해."라는 형식을 덧붙여야 한다. 통각(apperception)이란 지각(perception)에 덧붙여진 것(Ap-)이다. "비가 온다"는 문장은 "나는 비가 온다고 생각한다"의 준말이며, "참외는 노랗다"는 문장은 "나는 참외가 노랗다고 생각한다"의 준말이다. 통각을 자기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인데, 그렇다면 자기의식('나'라는 정신작용)은 개념의 통일에 덧붙은 무의미한 강조사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의식은 모든 진술에 따라붙는 필수적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의미도 덧붙이지 않는 유령인 셈이다. 바로 여기에 해골 검사이자 음악가인 브룩의 진술이 놓인다.

 

    "전 죽어서 백골뿐인 브룩이라고 합니다."

 

    비가 옵니다=나는 비가 온다고 생각합니다. 참외가 노랗습니다=나는 참외가 노랗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죽었습니다=나는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아, 나는 이미 죽었…… 그러므로 나는 유령이거나 악령입니다. 나는 죽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장에 덧붙은, 결코 뗄 수 없는 이 가주어가 나인 거죠…… 칸트의 통각은 유령의 존재론이며, 그 점에 관해서라면 브룩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칸트는 관념론과 경험론(유물론)을 절묘하게 종합했지만, 사실 그 종합은 관념론과 유물론의 심연을 더 벌려놓는 결과를 낳았다. 유물론은 생각하는 '나'를 실정적인 것으로 만들지 못했고(통각에서의 '나'는 유령이자 시체로서의 '나'다), 관념론은 사물의 세계를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이른바 '물자체'란 인간에게 결코 파악될 수 없는 세계이다) 후자에 관해서도 브룩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브룩은 죽어서 혼만 남은 상태로 저승을 떠돌다 왔다. 그의 영혼이 뼈만 남은 몸으로 돌아온 이후 50년 동안 떠돌아다닌 세계도 실제로는 저승이다. '마의 삼각지대'란 죽은 것들만이 떠도는 유계(幽界)이며, 그는 유령선 위에서 시체들과 더불어(=혼자) 지냈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었다. 거울 에피소드는 그가 처한 세계가 이승이 아니라 저승임을, 아무도 파악할 수 없는 물자체의 세계임을 보여준다. 유령선을 혼자서 배회하던 그는 거울 앞에서 화들짝 놀란다.

 

    "끄아아 아아!! 거울…… 그래 난 해골이었지."(브룩의 혼잣말, 50권 487화)

 

    거울은 자신을 타자로 인식하게 하는 사물, 자기의식의 필수품이다. 그는 자신을 보고 놀라고, 그 놀람의 대상이 끝내 그 자신임을 인정한다. 자신이 유령임을 보고 놀라고,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브룩이 루피 일행을 만나서 타인의 시선에 의해 인증을 받는 순간, 이번에는 거울 속의 그가 사라진다.

 

    "당신, 거울 본 적 있어?"(나미)
    "끄악, 거울은 치워 주세요."(브룩)
    "엉? 이봐, 잠깐만! 너 어째서 거울에 안 비치는 거야?"(우솝, 쵸파)
    "자세히 보니까 너, 그림자도 없잖아? 으아, 진짜다! 너 정말로 정체가 뭐냐?"(밀짚모자 일당, 46권 443화)

 

    물론 그림자와 거울상을 잃은 것은 루피 일행이 스릴러바크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강적 겟코 모리아의 그림자그림자 열매 능력 때문에 생긴 일이다(루피 일행도 잠시 후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들 모두가 유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므로 브룩과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50년 동안의 고독에서 놓여나 타인의 시선에 의해 인증을 받는 순간에 이번에는 거울상과 그림자가 사라진 셈이다. 타인이 없었을 때 그는 거울을 통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본다. 반면 타인이 자신을 볼 수 있을 때에 그는 자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브룩은 타인의 인증 없이 자기의식만으로 존재하므로 유령이다. 혹은 타인의 시선 아래서 자기의식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시체다.

 

    3
    철학자들은 육체와 정신의 분열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여러 시도를 했다. 데카르트의 송과선(松科腺)3), 스피노자의 뇌수(腦髓)4), 라이프니츠의 두 개의 시계5)…… 같은 아이디어가 그래서 나왔다. 그러나 어떤 것도 둘의 일치 내지 화해를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이 둘이 불일치 내지 불화하는 형국을 포괄해야만 풀릴 수 있는 문제다. 예를 들어서 몸이 망가지면 인간은 죽는다. 이것은 정신이 깃들 처소를 잃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신을 산출하는 터전으로서의 육체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광인은 어떤가? 그는 몸이 성한데도 정신이 거류하지 못했다. 이것은 둘의 부조화 때문인가? 아니면 정신을 산출하는 특수한 기능이 망가진 탓인가?
    정신과 육체의 이런 불일치 내지 불화를 이르는 말이 엑스터시다. 엑스터시(ecstasy)는 엑스타시스(ekstasis)에서 온 말이며, 이 말은 바깥을 의미하는 'eks'(=ex)와 안정된 상태를 의미하는 'stasis'(=status)가 결합된 말이다. 내가 내 바깥으로 나간 상태, 평정한 자신의 내면에 머물지 않고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상태가 엑스터시다. 브룩의 영혼이 일 년 동안 자신의 육체를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백골이 된 자신의 육체를 발견했을 때, 그리고 이미 깃들 수 없는 육체에 깃들 수밖에 없었을 때,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바깥에 처한 것이다.
    엑스터시는 성적인 흥분 상태에서 종교적인 법열(法悅)까지를 이르는 폭넓은 이름인데, 여기에 이르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으로 약물, 진정제, 흥분제, 음악, 춤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나(자기의식)라는 의식을 놓아버리는 데 도움을 주는 보조도구다. 정신이란 내가 나를 나라고 지칭할 때 부여잡는 어떤 끈이다. "정신줄 놓는다"고 말할 때의 줄이 바로 정신이다. 그런데 누가 줄을 놓는가? 관념론에 따르면 그것도 정신이어야 한다. 정신이 정신을 놓는다라…… 이미 죽은 내가 목숨을 거는 것과 같은 형국 아닌가? 유물론에 따르면 줄을 놓는 주체는 없다. 주체는 그 줄의 얽힘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지과학자들은 뇌가 신경회로의 얽힘이며, 이 특정한 전기자극의 효과로 '의식'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이 말에 따르면 정신이란 끈이 이쪽의 육체와 잇는 저쪽은 끈의 뭉치, 곧 신경의 얽힌 타래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줄을 놓는 주체는 정신이 아니라 그 줄 자신인 것이다.
    브룩은 음악가이기도 하다. 음악과 춤은 리듬이나 반복된 동작을 통해서 그 동작 속으로 몰입하는 혹은 그 동작 바깥으로 나가는 일에 몰두하는 일이다. '몰두'란 표현을 썼지만, 실제로 몰두하는 주체는 육체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정신은 그 몰두하는 육체가 자신을 지칭할 때 하는 말이다. 엑스터시에서의 정신은 육체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체는 춤 속에서 제 몸의 윤곽이 풀어지는 것을 느낀다. 육체는 육체를 초월하면서 육체 속에 든다. 춤에는 정지동작이 없다. 거기에 하나의 관조나 정관(靜觀)이, 곧 스타시스가 없다는 뜻이다. 보기 위해서는 저 몸 바깥에 또 다른 시선을 설정해두어야 하는데 엑스터시의 바깥이란 그런 의미에서의 바깥이 아니다. 엑스터시에서의 '봄'(seeing)이란 보이는(be seen) 봄, 곧 제 육체의 내보임이 그 자체로 보는 일이 되는 봄, 온 몸이 하나의 눈이 되어서 보는(보는 눈을 보는 눈을 보는……) 그런 봄이다. 섹스에서의 엑스터시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한 몸이 될 때, 그것은 하나이면서 둘인 몸, 절대적으로 둘이면서 상대적으로 하나인 몸이 되는 것이다. 나는 내 바깥에 있으면서(=상대방이 되면서) 상대방의 몸으로 나를 느낀다(=내가 된다).

  3)  송과선[솔방울샘]이란 간뇌의 천장에 위치한 내분비기관으로 솔방울 모양으로 생겼다. 멜라토닌을 만들어 계절과 하루의 변화에 몸의 리듬을 맞추어 주는 역할을 한다. 데카르트는 송과선이 영혼이 있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뇌 가운데 있는 작은 샘이 영혼에 의해 한쪽으로 밀리고 물체(물질)일 뿐인 동물 정기에 의해 다른 쪽으로 밀리면서, 두 충동은 강한 것이 다른 것의 효과를 방해하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데카르트, 『정념론』, 김선영 옮김, 문예출판사, 2013, 58쪽) 데카르트가 보기에, 송과선은 영혼과 육체를 잇는 육교이자 둘이 길항하는 자리다.
  4)  "인간 신체의 유동적 부분이 다른 연한 부분에 자주 부딪히게끔 외부의 물체에 의해 결정된다면, 유동적 부분은 연한 부분의 표면을 변화시키고 동시에 외부의 물체에 의해서 야기된 흔적을 연한 부분에 각인시킨다."(스피노자, 『에티카』, 강영계 옮김, 서광사, 2007, 104쪽) 연한 부분이란 외부의 자극을 기록하는 뇌의 수용적 성질을 말한다.
  5)  "영혼은 그의 고유한 법칙을 따르고 육체도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법칙을 따른다. 그러나 양자는, 실체들이 모두 하나의 동일한 우주를 표현하기 때문에 모든 실체들 사이에 예정된 조화를 통하여, 서로 합치되는 것이다."(라이프니츠, 『형이상학 논고』, 윤선구 옮김, 아카넷, 2010, 292쪽) 라이프니츠의 영혼은 외부와 교통하지 않으며 육체의 법칙과도 무관하다. 서로 다른 둘이 어떻게 교통할 수 있을까? 시간을 맞춘 두 개의 시계처럼, 지각과 우주가, 영혼과 육체가 신의 섭리에 의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처음부터 조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세계의 실존론적-시간적 가능조건은 시간성이 탈자적 통일성으로서 지평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거기에 놓여 있다. 탈자태는 단순히 "~에로 빠져나감"이 아니다. 오히려 탈자태에는 빠져나감의 "거기에로"가 속한다. 탈자태의 이러한 '거기에로'를 우리는 지평적 도식이라고 이름한다.6)

  6)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8, 479쪽.

 

    하이데거가 '탈자태'(脫自態, Extase)라고 부른 말이 바로 엑스터시다. 그는 엑시터시를 시간의 축 위에서 찾는다. 하이데거에게 시간이란 단순한 과거, 현재, 미래가 아니다. 인간(시간과 공간에서 자신의 자리를 가진 존재자는 인간뿐이며, 이를 현존재[거기에-있음]라고 부른다)에게 미래는 물리적으로 측정되는 지금 '이후'가 아니라, 자신이 미리 가닿을 곳(죽음)에 앞서 달려감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자신을 자신에게 다가가게 해준다(=본래적인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이를 '도래'(Zukunft, 하이데거적인 미래)라고 부른다. 과거 역시 단순히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있어 왔음' 곧 지금-여기에 있음을 가능하게 한 시간성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를 '기재'(Gewesenheit, 하이데거적인 과거)라고 부른다. 한편 현재는 현존재가 자신의 상황 속에서 주위세계와 만나는 시간이며, 따라서 '마주함'(Gegenwart, 하이데거적인 현재)이라고 불린다.
    도래, 기재, 마주함이라는 세 시간이 왜 탈자태(엑스터시)인가? 세 시간은 인간이 본래적인 자신의 존재 가능을 위해 엮어낸 완료형 시간이다. 인간 자신이 거기에 포함된 시간("그때엔 내가 선생이 되어 있을 거야, 당시 나는 방황하고 있어서 너를 붙잡지 못했어, 지금 나는 석양을 보고 있어"처럼 그 자신의 거기에-존재함과 연동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을 찾기 위해 자신을 벗어나(탈자) 도래의 시간(=죽음)에 미리 다가가고,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해 자신을 벗어나(탈자) 자신의 있어왔음(=탄생)을 반복하며, 자신이 처한 순간과 직면하기 위해 자신을 벗어나(탈자) 자신의 곁에 선다. 내 자신의 거기에 있음 곧 실존의 양태가 시간의 탈자적 지평, 곧 엑스터시에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4.
    브룩은 바로 이런 탈자적 존재의 도래를 알리는 사자(使者)이기도 하다. 그의 등장과 더불어 밀짚모자 일당의 스릴러바크 모험 편이 시작되는데, 이곳은 그야말로 탈자들로 우글거린다. 스릴러바크의 지배자인 겟코 모리아는 그림자그림자 열매 능력자로 인간에게서 그림자를 떼어 좀비 속에 넣어서 조종한다. 그림자를 잃은 인간은 햇빛을 볼 수 없으며, 거울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부하인 천재 외과의 닥터 호그백은 징그러운 외과 수술을 통해서 시체를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좀비 가운데 전사와 장군은 또 다른 부하인 일명 묘지의 압살롬이 지휘한다. 그는 투명투명 열매 능력자로 자신을 보이지 않게 만들 수 있다. 시체나 장난감 좀비들을 지휘하는 프린세스 페로나는 홀로홀로 열매 능력자다. 그녀는 유령을 만드는데, 이 유령에 접촉한 자들은 극단적인 비관론자가 된다. 좀비, 프랑켄슈타인, 그림자, 투명인간, 유령, 장난감 인형 등, 육체와 정신의 불일치를 보여주는 호러 캐릭터들이 무수히 등장하는 것이다.

 

    5
    이제 브룩이 대표하는 두 번째 명제, '나는 뼈다'로 가보자. 브룩은 뼈가 아닌 다른 몸(살, 눈, 귀, 가슴……)에 대해서는 농담의 대상으로 삼지만, 뼈와 목숨(자신이 유일하게 갖고 있거나, 정작 가지고 있지 못한 것)만큼은 진지하게 선언하거나 맹세할 때에만 입에 올린다. 그의 용법에서 '뼛골 빠지게'는 '최선을 다해' '온몸을 바쳐'라는 뜻이다. 뼈만 남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다르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헤겔의 명제, '정신은 뼈다'에 기대서 말해보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뇌수가 살아 있는 머리라고 한다면, 두개(頭蓋)는 죽어 있는 머리(caput mortuum)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두개라는 이 죽은 존재 속에 뇌의 온갖 정신적인 움직임과 그의 일정한 양태가 외부에 나타난 현실을, 그러나 필경 개인에게 있는 그러한 현실을 표현해주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중략) 하지만 더 나아가 독자적인 유기적 생명력이 뇌와 두개골 모두에 동등하게 배분될 경우 여기서는 사실상 양자간의 인과관계는 소멸된다. 즉 양자가 내면적인 연관에 의해서 동일하게 형성된다면 내면의 일종의 유기적인 예정조화가 성립되는 것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서로 관계하는 양면은 자유롭게 풀려나서 저마다 독자적인 형태를 이루는 가운데 그 어느 쪽도 상대방과 일치할 필요는 없게 된다.7)

  7)  헤겔, 『정신현상학 1』, 임석진 옮김, 한길사, 2005, 351쪽.

 

    헤겔은 이성에서 정신으로 상승하는 마지막 단계의 논의에서 관상학과 골상학(骨相學)이라는, 시대착오적인 학문을 디딤판으로 삼는다. 내가 육체에 거한다고 할 때, 나는 어디에 있는가? 뇌가 생각하는 육체라면 뼈는 죽은 육체일 것이다(머리에 한정한다면 뇌수가 살아 있는 머리라면 두개는 죽은 머리다). 두개골이라는 죽은 사물-육체 속에 뇌라는 살아 있는 정신-육체가 담겨 있다. 골상학은 바로 이 정신(뇌)의 외적 표현으로서의 머리뼈를 연구하는 학문이며, 개인의 구체적 실존을 자립적인 실체(사물)로 표현하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뼈가 정신의 외적 표현이므로 이런 모순적인 단언이 나오게 된다. 정신은 뼈다.
    물론 헤겔이 이 모순적이고 무의미해 보이는 언명을 끝까지 밀고 가는 것은 아니다. 인용문의 후반부에서도 드러나듯이 둘(정신과 육체, 뇌와 두개골)은 예정조화의 관계에 있지 않다. 단적으로 말해서 둘은 전혀 관련이 없다. 지젝은 헤겔의 정신이 무의미한 진술이 언명하는 바로 그 불일치와 모순에 있다고 말한다. "정신은 뼈다"라는 진술에서,

 

    헤겔의 요점은 <소박한> 독해(골상학이 스스로를 파악하는 방식. 정신은 이 불활성 대상, 두개골이다. 정신의 특징들은 두개골의 오목하거나 볼록한 부위들로부터 연역될 수 있다)를 거부하고 사변적 의미(정신은 가장 불활성적인 객체성을 포함해서 현실성 전체를 포용하고 매개할 정도로 충분히 강하다)만 고려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사변적 의미는 우리가 <소박한> 독해를 유보 없이 따를 때에만 그리하여 그것의 내속적 무의미를, 그것의 터무니없는 자기모순을 경험할 때에만 출현한다. 그 두 항(정신과 뼈) 사이의 이 근본적 불일치, 양립불가능성, 이 절대적인 <부정적 관련성>은 부정성의 권능으로서의 정신이다.8)

  8)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2007, 69쪽.

 

    지젝에 따르면 정신 곧 '나'라고 지칭할 수 있는 의식(자기의식)은 명백히 무의미한 언명("나는 뼈다") 속에서만 자신의 권능을 되찾는다. 그것은 정신이 두개골을 통해 자신의 현실을 표현한다는 골상학의 소박한 전제도 아니요, 정신이 두개골이라는 죽은 사물마저도 자신의 표현형으로 삼을 만큼 충분히 강력하다는 관념론적인 주장도 아니다. "정신은 뼈"라는 단언은, 정신이야말로 제가 거할 수 없는 곳(뼈와 같이)에 거든다는 뜻이며, 따라서 정신과 육체의 불일치(탈자, 엑스터시) 속에서만 제 자신을 구별할 수 있다는 뜻이며, 이 둘이 동거하는 모순과 무의미 속에서만 제 자신의 존재를 보장받는다는 뜻이다. 헤겔과 지젝의 말을 따라간다면 뼈만 남은 브룩이야말로 정신의 부정적 권능을 온몸으로 체현하는 존재인 셈이다.

 

    6
    브룩이 엑스터시(탈자)를 대표하는 캐릭터임을 염두에 두고서야, 그가 밀짚모자 일당에 받아들여진 비밀이 풀린다. 마지막으로 브룩이 겪은 비극적 황홀(엑스터시)을 감상해보자. 이 장면은 첫 등장에서의 실망감을 상쇄하는 것은 물론, 원피스 전체 에피소드 중에서도 가장 장려한 장면에 속한다. '숭고'라는 이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야기다.

 

    "옛날 우리 해적단의 동료를, 한 장소에 홀로 두고 왔지요. 어쩔 수 없이 택한 가슴 아픈 이별이었지만…… 그 장소로 꼭 돌아가겠다고 굳게 약속하고서, 우리는 출항했습니다. 그리고 이 바다에서 전멸. 그와 나눈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거지요. 배에서 혼자 살아남은 전 이 결과를 그에게 반드시 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은 그날로부터 50년은 흘렀을까요."(브룩)
    "50년? 이봐 그렇게 옛날 일이었나? 나도 태어나기 전이군. 미안하지만 그토록 긴 세월이면 그 녀석도 더는 기다리고 있지 않을 거라구."(프랑키)
    "제게 무슨 권리가…… 그는 더 이상 기다리고 있지 않을 거라며 단념해버릴 권리가 있겠습니까. 만에 하나 약속을 믿고서 계속 기다려주고 있다면, 지금 그는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울까요? 우리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끼며 지금도 계속 기다리고 있다면, 얼마나 비참한 기분일까요?"9브룩, 47권, 459화)

 

    밀짚모자 일당이 위대한 항로 입구에서 만난 거대 고래 '라분'이 바로 그 동료였다. 이 대화 이후에, 브룩은 자신의 그림자가 들어 있는 좀비 검사와 결투를 벌인다. 여전히 아프로 헤어스타일을 고수한다고 비웃는 검사와 싸우며 브룩은 라분에게 속엣말을 건넨다.

 

    '라분, 넌 아직 우리를 기억해주고 있을까? 네 마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난 이제 찢어질 가슴 따위 있지도 않지만! 요호호! '위대한 항로'의 험난함에 우리는 역부족이었고, 동료들은 이미…… 다 죽어버렸어. 내 얘기를 하자면 동료들과 더불어 얼굴도 몸도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 만약 다시 만나도 백골로 변한 이 모습에, 넌 내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거야. 내겐 이미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만, 적어도 모두가 라분 같다고 웃었던 이 머리! 이 옛 모습 하나만이라도 지켜내 꼭 만나러 갈 테니까!'(브룩의 생각, 같은 화)

 

    브룩의 엑스터시(자기를 벗어나기)는 50년 전 고래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죽어서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죽지 못했고, 해골이 되어서도 동료가 알아보지 못할까봐 우스꽝스러운 아프로 헤어스타일을 고집했다. 그러고도 한참 지나고 나서야 50년 전 그의 최후 장면이 펼쳐진다. 브룩이 속했던 룸바 해적단이 강적을 만나 궤멸될 때의 이야기다. 독을 바른 무기에 당해서 모두가 죽어갈 때, 브룩이 제안한다.

 

    "어차피 죽는다면 즐거운 편이 좋겠죠. 노래할까요?"
    "내가 만약 정말 되살아난다면…… 전하겠습니다, 기필코. 라분도 선장도 우리 모두가 사랑했던 이 노래를."

 

    그리고 모두가 평소와 다름없이 흥겹게 그리고 힘겹게 "일생일대의 대합창"을 부른다. 「빙크스의 술」이라는 축제의 노래다. 이 노래는 지금 겟코 모리아 해적단과의 전투에서 이기고 잔치를 벌이는 밀짚모자 일당의 자리에서도 울려 퍼지고 있다. 브룩은 지금 해골이 되어, 원래의 자기 몸으로 불렀던 그 노래를 반복해서 연주하는 중이다. 노래를 부르는 중에 동료들이 하나둘씩 쓰러져 간다. 반주를 하던 브룩이 모르는 척 묻는다.

 

    "왜 그러시죠? 이래선 콰르텟…"
    털썩.
    "트리오."
    퉁탕.
    "듀엣."
    퉁탕.
    "솔로……"
    "뭡니까! 반주만 남겨두고……"(브룩, 50권 488화)

 

    브룩의 탈자(엑스터시)는 죽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건너와서, 동료와의 약속을 지키려는 사랑의 능력이었던 것이다. 본래 약속은 무시간성의 산물이다. 실현되기까지 약속은 종료되지 않으며, 따라서 무한히 연기된다. 브룩은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죽음에서 부활했으며, 이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 50년 동안의 고독을 견뎌냈다. 그러고 나서 브룩은 이 탈자태로서, 이 에피소드가 끝난 이후에 다시 루피에게 묻는다. "저, 동료로 들어가도 됩니까?" 이로써 밀짚모자 해적단은 삶과 죽음을 포함하는, 자아와 탈자를 아우르는, 안정(스타시스)과 황홀(엑스터시)을 거느리는 음악가를 동료로 얻게 되었다.

 

 

 

 

 

 

 

 

 

 

 

 

 

 

작가소개 / 권혁웅

1997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마징가 계보학』, 『소문들』,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등이 있음.

 

   《문장웹진 2018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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