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인문학 ― 호킨스, 도플라밍고, 슈거, 핸콕과 ‘능동성/수동성’

[기획-원피스인문학]

 

 

“보고 싶다고? 설마 이것이······ 프러포즈?”

― 호킨스, 도플라밍고, 슈거, 핸콕과 ‘능동성/수동성’

 

 

권혁웅

 

 

 

    1.
    『원피스』에는 ‘인형’과 관련된 능력자가 세 명 나온다. 먼저 초신성1) 가운데 하나인 마술사 바질 호킨스가 있다. 그는 전투 시에는 자신의 몸에서 짚 인형을 내거나 스스로 거대한 짚 인형으로 변신해서 싸운다. 다음으로 칠무해의 일원인 돈키호테 도플라밍고가 있다. 그는 실실열매 능력자로 실을 걸어서 다른 이를 마리오네트처럼 조종할 수 있으며, 실 뭉치로 자신의 분신을 만들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돈키호테 패밀리의 간부 슈거다. 그녀는 하비하비(hobby-hobby) 열매 능력자로 손에 닿는 모든 이들을 인형으로 바꾸어버린다. 셋은 인형(호킨스), 인형술사(도플라밍고), 인형 제작자(슈거)에 해당한다.
    바질 호킨스는 늘 카드 점을 쳐서 미래를 예측하는 인물이다. 샤본디 제도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에도, 부하가 옷에 스파게티를 쏟은 종업원을 죽이려 하자 부하를 말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 옷의 운명이다. 겁을 주어 미안하군. 오늘은 살생을 하면 운기가 떨어지는 날이지.”(바질 호킨스, 51권 498화) 해군본부 최강의 전력인 대장 키자루와 맞닥뜨렸을 때에도 부하들이 피하라고 요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허둥대지 마라. 오늘, 난 죽지 않으니.”(52권 507화) 그러고 나서 그는 자신이 키자루와의 전투에서 질 확률(100%가 나왔다), 도주했을 때 성공률(고작 12%였다) 같은 것을 카드 점으로 산출한다. 사망률이 0%였으니, 그는 키자루와 싸우면 반드시 진다는 것, 달아나는 것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 하지만 이 싸움에서 자신이 죽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셈이다.
    예언이나 징조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기/보여주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 일이 반드시 일어난다면, 곧 예언이나 징조가 미래의 일을 필연적으로 앞당겨 보여준다면, 그것은 일종의 상기(想起), 곧 ‘이미 (일어난 일을) 말하기/보여주기’와 같은 것이 된다. 시간적인 선후인 ‘아직(not yet)’과 ‘이미(already)’를 교환할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예언이나 징조의 역할이다. 호킨스의 바꾸기 능력은 하나 더 있다. 전투가 시작되자, 그는 막강한 키자루의 공격(광속의 발차기, 레이저)에 직격 당하는데, 특이하게도 피를 쏟거나 숯검정이 되어 쓰러지는 건 호킨스가 아니라 주변의 부하들이다. 그는 자기 몸에서 부서지거나 타버린 짚 인형을 꺼내어 버리면서 말한다. “대장을 상대로 고작 10구로는 미덥지가 않군.”(52권 508화) 그러고는 그 자신이 ‘항마(降魔)의 상’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짚 인형이 되어서 전투에 임한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만든 인형과 부하들을(곧 나와 타인을) 바꾸고, 자신과 인형을(곧 제작자와 제작물을) 바꾸는 능력이 있었던 셈이다.
    본래 ‘인형’이란 물성(物性)을 가진 채 제가 놓인 곳에 있으나, 그 이름을 가진 주체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집에는 헝겊으로 된 엘사(영화 『겨울왕국』의 주인공) 인형이 하나 있다. 이 인형은 거실 소파 위에 실제로 놓여 있으나(이렇게 ‘있는 것’을 존재자라고 부른다), 그것은 공주도 여자도 나아가 인간도 아니며, 아이(인형의 주인)가 쓰다듬으며 말을 건넬 때 아이의 머릿속에 있는 특정한 인격도 아니다. 단적으로 그것을 거기에 있게 한 무엇 ― 인형을 ‘엘사’라고 부르게 만든 것, 인형에게 ‘엘사’라는 이름을 부여하게 해준 것, 다시 말해서 인형을 거기에 있게 해준 바로 그것 ― 은 존재하지 않는다(이렇게 ‘있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을 존재라고 부른다). 존재자가 존재하는 것이라면,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저 인형에서처럼 존재는 없는 것, 무(無)이지만, 있는 것을 낳는 무라는 점에서는 ‘있는 무’다.

  1)  초신성이란 신세대 해적 가운데 현상금이 1억 베리를 넘는 대형 루키 11명(루피, 조로, 유스타스 키드, X 드레이크, 트라팔가 로, 스트래치맨 아푸, 킬러, 쥬얼리 보니, 카포네 벳지, 우루지, 바질 호킨스)을 일컫는 말이다.

 

    비록 모든 탐구가 아무리 끊임없이 그리고 아주 멀리 존재자를 끝까지 찾아 나선다고 해도, 그 탐구는 어디에서도 존재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 탐구는 언제나 단지 존재자만을 만날 뿐이다. 왜냐하면 그 탐구는 미리부터 자기가 설명하려는 의도에 있어서 이미 존재자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존재는 존재자에 속한 어떤 성질이 아니다. 존재는 존재자와 같이 대상적으로 표상되거나 제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자와 단적으로 다른 이것은 비존재자(존재자가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무는 존재로서 본원적으로 있다.2)

  2)  하이데거, 『이정표 1』, 신상희 옮김, 한길사, 2005, 178쪽.

 

    인형은 거기에 있으나(=존재자로서 만날 수 있으나), 그것이 표상하거나 상징하는 것 혹은 그것을 낳았다고 간주되는 것(=곧 존재)으로서는 결코 만날 수 없다. 호킨스는 자신이 만든 인형과 타인을 맞바꾸거나 인형을 만든 자신과 인형을 맞바꾼다. 그는 존재자들을(자신의 인형과 부하를, 혹은 자신의 인형들과 자신=인형을) 교환함으로써 존재자들 속으로 숨는다. 호킨스는 제작물(인형, 수동적으로 제작된 산물)이 된 제작자(인간, 능동적으로 제작한 주체), 수동이 된 능동이다.

 

    2.
    반면 도플라밍고는 처음부터 인형술사였다. 실실열매 능력자인 그는 실을 뿜어내거나 조종하여 엄청난 일들을 해낸다. 구름에 실을 걸어 공중을 날아가기도 하고(‘하늘의 길’), 실을 총알처럼 쏘거나(‘탄사[彈絲, Termite]’) 채찍처럼 휘두르거나(‘채찍실’) 거미줄처럼 펴거나(‘거미줄’) 손톱처럼 베는 데 쓰기도 한다(‘오색실’). 그의 여러 능력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기술은 다음의 세 가지다.
    첫째, 기생사(奇生絲, Parasite)라 불리는 기술. 보이지 않는 실로 상대를 묶어서 마리오네트처럼 조종하는 기술이다. 정상결전에서 그는 적이었던 흰수염해적단의 대장 다이아몬드 조즈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하고, 대장 물소 아트모스를 움직여 동료를 베게 만들기도 했다. 왕국 드레스로자를 빼앗을 때에는 리쿠 국왕뿐 아니라 왕국의 군대 전체를 움직여 국민을 학살하는 데 쓰기도 했다.

 

    “그만 해. 제발 그만 해!”
    “리쿠 국왕님, 멈춰 주십시오. 어째서 이러십니까?”
    “비켜! 내게 다가오지 마라. 나한테서 떨어져! 몸이······ 멋대로 움직인단 말이다!”(리쿠 국왕, 73권 727화)

 

    이 일로 인해 리쿠 국왕은 백성들의 원망과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왕좌에서 쫓겨나게 된다. 리쿠 국왕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움직이지 못했으나(수동성), 자신의 행동으로 인한 책임을 져야만 했다(능동성). 이 이중성을 기억해 두도록 하자.
    둘째, ‘새장’이라 불리는 기술. 슈거가 정신을 잃자 하비하비 열매의 능력이 풀려, 그동안 인형으로 변했던 드레스로자의 백성들, 전사들, 군인들이 제 모습으로 돌아온다. 10년 동안의 작업이 수포로 돌아가자, 분노한 도플라밍고는 이 기술을 써서 경내의 모든 인물을 죽이려고 들었다. 새장이란 강력한 실을 상공에서 뿌려 드레스로자를 돔처럼 덮은 후에 크기를 점점 오므려 영역 내의 모든 생명체를 절멸시키는 기술이다. 대장 후지토라나 검객 조로와 같이 나라 안에 있던 실력자들도 이 기술을 깨지 못하고 새장이 좁혀 들어오는 속도를 줄이는 게 고작이었다.
    셋째, ‘블랙 나이트(影騎絲)’라 불리는 분신술. 대량의 실을 뭉쳐서 도플라밍고 자신과 똑같은 인형을 만들어내는 기술. 이 기술은 저주에서 풀려 제 몸을 찾은 검투사 퀴로스에게 목이 잘렸으나, 알고 보니 그가 아니라 이 분신이었다는 설정에서 처음 선을 보였다. 호킨스처럼 도플라밍고도 인형을 제작한 셈인데, 둘의 역할은 조금 다르다. 호킨스의 분신이 제작자 자신이었다면(분신이 키자루의 공격을 받자 호킨스 본인이 상처를 입는다), 도플라밍고의 분신은 제작자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분신의 목이 잘렸으나 도플라밍고 본인은 아무 영향을 받지 않았다). 전자의 경우 제작자는 그 자신의 인형이 되었으나, 후자의 경우 제작자는 자신의 인형마저 조종했다.
    도플라밍고는 리쿠 국왕에게서 나라를 빼앗아서 드레스로자의 국왕이 되었다. 드레스로자는 ‘사랑과 정열과 장난감의 나라’라 불린다. 이 나라에 대한 소개는 이렇다.

 

    이 나라를 방문한 자들은 몇몇 가지에 마음을 빼앗기리라. 하나는 향기로운 꽃들과 이 나라의 자랑인 요리의 향기. 또 하나는 지칠 줄 모르는 여인들의 춤. 그리고 또 한 가지 여행객을 놀라게 하는 것은 인간과 공존하고 있는, 생명을 가진 장난감들의 모습이다.(71권 701화)

 

    이 나라가 ‘사랑’과 ‘정열’의 나라라는 사실과 이 나라의 국왕이 도플라밍고라는 사실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다. 앞에서 살펴본 실실열매의 효력이 바로 사랑의 효력이기 때문이다. 사랑이야말로 사랑에 빠진 자를 마리오네트로, 바로 살아 있는 인형(장난감)으로 만드는 것이다. 내가 원치 않았으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힘, 나를 끌어당겨서 조종하는 이 힘을 사랑의 힘이라고 불러 마땅할 것이다. 매력이란 본래 끌어당기는 힘(引力, attractive force)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매혹하는 이에게 ‘끌려’간다. 사랑은 능동성의 외양을 띠고 있으나 실제로는 수동성의 산물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I love you)라는 고백은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었어요”(You made me love you)라는 고백의 줄임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수동적이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능동적인 것으로 감당할 수밖에 없다. 리쿠 국왕이 기생사에 휘둘려 다른 이의 의지대로 움직였으면서도 그 행동을 떠맡은 것처럼 말이다. 자유의지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이란 자신이 인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인형술사라는 것을 자인하는 심의작용이다. 물론 이 수동성을 적극적인 능동성으로 변환하는 데에 사랑의 비밀이 있다.
    ‘새장’은 이런 사랑의 부정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발적으로 그의 영향 아래 들어간다. 그는 다시는 날 수 없을 것이며, 그 좁은 새장 안에서 점점 숨이 막히게 될 것이다. 새장은 ‘사랑의 감옥’이다.

 

    처음 당신을 알게 된 게 언제부터였던가요. 이젠 기억조차 까마득하군요. 당신을 처음 알았을 때, 당신이라는 분이 이 세상에 계시는 것만 해도 얼마나 즐거웠는지요. 여러 날 밤잠을 설치며 당신에게 드리는 긴 편지를 썼지요.
    처음 당신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갈이 왔을 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득히 밀려오는 기쁨에 온몸이 떨립니다. 당신은 나의 눈이었고, 나의 눈 속에서 당신은 푸른빛 도는 날개를 곧추세우며 막 솟아올랐습니다.
    그래요. 그때만큼 지금 내 가슴은 뜨겁지 않아요. 오랜 세월, 당신을 사랑하기에는 내가 얼마나 허술한 사내인가를 뼈저리게 알았고, 당신의 사랑에 값할 만큼 미더운 사내가 되고 싶어 몸부림했지요. 그리하여 어느덧 당신은 내게 ‘사랑하는 분’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젠 아시겠지요. 왜 내가 자꾸만 당신을 떠나려 하는지를. 사랑의 의무는 사랑의 소실에 다름 아니며, 사랑의 습관은 사랑의 모독일 테지요. 오, 아름다운 당신, 나날이 나는 잔인한 사랑의 습관 속에서 당신의 푸른 깃털을 도려내고 있었어요.
    다시 한 번 당신이 한껏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내가 당신을 떠남으로써만…… 당신을 사랑합니다.3)

  3)  이성복, 『남해 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뒷표지글.

 

    당신이 내 마음에 처음 들어온 순간, 당신은 “푸른빛 도는 날개를 곧추세우며 막 솟아”오르는 자유로운 새였다. 내 마음이 식고 사랑이 의무로 변한 순간, 내 사랑은 당신의 날개를 꺾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이 편지의 주인공을 착한 도플라밍고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새장을 풀고 나라를 떠남으로써 국민을 자유롭게 해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는 더 이상 사랑과 정열의 나라를 주재하는 이는 되지 못할 것이다.

 

    3.
    한편 슈거는 하비하비 열매 능력자다. 하비(Hobby)는 일본에서 어른들이 취미로 모으는 피규어나 프라 모델과 같은 장난감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슈거는 자신이 손으로 만진 사람을 장난감으로 바꾸며, 이때 그 장난감 사람과 계약을 맺어 자신의 말에 절대 복종하게 만든다. 장난감으로 변한 인물들은 가족이나 친지, 이웃들의 기억에서 말소된다. 그것도 기억상실과 같이 특정한 장면이 삭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이 수정된다. 아버지 퀴로스가 슈거에 의해 외다리병정이 되자 딸인 레베카는 본래 아버지가 없었다고 말하며, 손자인 팔보수군 수령 돈 사이가 사라지자 전대 수령이었던 할아버지 돈 칭자오는 후계자가 없어서 자신이 팔보수군을 지금도 이끌고 있다고 말한다.
    이 열매야말로 무서운 능력이 아닐 수 없다. 한 사람의 현존을 지워버릴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연관마저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죽음보다도 무서운 소멸이다. 한 사람의 죽음은 다른 사람에게 기억을 남긴다. 그 기억들의 연관이 바로 세계이다. 기억의 소멸 및 수정은 그를 둘러싼 세계 전체의 소멸을 뜻한다.

 

    세계는 일깨워진 주체, 항상 어떤 방식으로 실천적 관심을 가진 주체인 우리에게 때에 따라서는 한 번만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적이거나 가능한 모든 실천의 보편적 장(場), 지평으로서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미리 주어져 있다. (중략) 사물들, 객체들(언제나 순수하게 생활세계에서 이해된 객체들)은 우리에게 그때그때 (존재의 확실성에 어떤 양상들로) 타당한 것으로 주어져 있지만, 원리적으로는 단지 세계의 지평 속에 있는 사물들, 객체들로 의식된 것으로 주어져 있다. 각각의 사물은 어떤 것, 즉 우리에게 끊임없이 지평으로 의식된 세계에서의 어떤 것이다.4)

  4)  에드문트 후설,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이종훈 옮김, 한길사, 2015, 273-274쪽.

 

    세계는 객관적인 사물들(존재자들)이 들어서 있는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다. 세계는 실천적인 주체인 우리의 앞에 선재하는 지평이며, 이 지평 위에서 사물들과 객체들이 의식된 것으로 경험된다.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 삭제된다는 것, 나아가 그 기억이 있었다는 기억마저도 소거된다는 것은 이 세계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장난감이 된 사람이 이 세계에서 삭제되었다면, 당사자마저도 이전의 존재방식을 망각해야 한다. 그는 정말로 장난감이 되어 사물에 불과한 존재자가 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의 기억과 의지는 지워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혼자서 주장해야만 한다. 세계에서 삭제되었으므로, 곧 세계와의 모든 관계가 끊어졌으므로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있지 않아야 할 곳에 있으며 존재하지 말아야 할 존재가 되었다. 그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인형 내지 장난감이라는 사물 존재자로만 남아 있어야 한다. 슈거의 이 능력이야말로 가장 극단적인 능동성/수동성의 역설을 보여준다. 슈거의 손에 닿은 모든 이들은 세계와 자신과의 모든 연관을 잃어버리고,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인형)로서의 삶을 영원히 선고받는다. 그것도 자신의 의지를 잃고 슈거의 명령(돈키호테 패밀리의 말에 절대 복종할 것, 영원히 노역을 할 것)에 따라 행동하면서도 그 의지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는 지옥에 처한 것이다.

 

    4.
    수동성과 능동성은 이처럼 두부를 자르듯 둘로 나뉘는 속성이 아니다. 자유의지로 움직이는 이들(능동적인 이들)이 실제로는 타율적인 운명에 휘둘리는 이들(수동적인 이들)이라는 것을 마리오네트 인형들이, 완구가 된 장난감들이 보여주고 있다. 바질 호킨스가 말하는 ‘확률’이나 ‘운명’ 역시 예언이나 징조의 형식으로 제공되는 결정론적 삶의 양태다. 결정론을 수락하는 삶이란 자유의지가 거세된 삶, 운명의 이름으로 타율적인 힘의 행사를 수락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가학증(사디즘)과 피학증(마조히즘)에 대한 프로이트의 설명을 통해 능동성과 수동성의 자리바꿈을 생각해 보자.

 

    “능동성에서 수동성으로의 변화”의 예는 서로 상반된 대립 개념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대립쌍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사디즘과 마조히즘, 관음증과 노출증이 그것이다. 이 경우의 방향 전환은 충동의 목적에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말하자면 능동적인 목적(괴롭히거나 들여다보려는 목적)에서 수동적인 목적(괴롭힘을 당하거나 관찰당하는 목적)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중략)
    사디즘과 마조히즘이라는 대립쌍의 경우 그 변화 과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1) 사디즘은 어떤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그 사람에게 폭력이나 힘을 행사하는 경우를 말한다.
    2) 이 대상이 주체 자신으로 대체된다. 자기 자신으로의 방향 전환과 더불어 충동의 능동적인 목적 또한 수동적인 목적으로 바뀌게 된다.
    3) 다시 한 번 또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구하게 된다. 충동의 목적이 바뀌게 된 상황에서 이 사람은 주체의 역할을 떠맡을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서 3)의 경우가 바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마조히즘이다. 이 경우 수동적인 자아가 실제로는 외부의 다른 주체가 떠맡은 자신의 최초의 역할을 스스로가 다시 수행한다는 환상 속에 빠짐으로써 충동의 만족 또한 원래의 사디즘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2)의 경우는 강박증의 사디즘적 충동을 고려해 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5)

  5)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윤희기 옮김, 열린책들, 2004, 113-115쪽.(‘본능’이란 번역어를 ‘충동’으로 수정)

 

    프로이트는 충동의 역전(전환)과 반전을 통해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가학증과 피학증의 대립쌍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과정이 있다. ① 가학증은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② 이 대상이 주체 자신으로 대체된다. 자기 자신으로의 방향 전환(회귀)에 더하여 충동의 능동성이 수동성으로 바뀐다(강박신경증은 이 단계에서 멈춘 상태를 말한다). ③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구하여 그로 하여금 주체의 역할을 떠맡게 한다. 이 단계가 피학증이다.
    그런데 라캉은 이 도식을 뒤집는다. 그에 따르면 고통은 가학증의 근본 목적이 아니라 피학증의 목적이다. 고통이 성적 흥분을 일으키면서 쾌락의 조건을 마련하고, 당사자는 쾌락을 위해 불쾌감을 기꺼이 경험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가학증에서의 고통은 주체가 고통 받는 다른 대상과 동일시하는 과정을 통해 자학적으로 즐기는 것(고통과 함께 성적 흥분을 즐기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능동성과 수동성으로 정의한 것을 라캉은 정반대로, 말하자면 수동성과 능동성으로 바꾸어 읽은 것이다. 이것은 관음증과 노출증에도, 사랑과 미움의 변증법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도식이다. 이처럼 능동성과 수동성을 서로 짝을 지어, 서로 호환되며 나타나는 한 작용의 두 모습이다.
    실제로 돈키호테 패밀리의 간부들(도플라밍고의 부하들)은 이런 능동성/수동성의 역설을 체현하고 있다. 돈키호테는 천룡인이면서도 스스로 세계 귀족의 자리에서 내려온 아버지 때문에 천민 취급을 받았다. 그는 살부(殺父)를 저질러 귀족의 지위를 회복하고자 했으나 세계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베르고는 해적 패밀리의 간부로 잔혹한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애로운 해군 중장으로 위장했다. 최고 간부 피카는 대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암석인간으로 나라만 한 크기로 몸을 부풀릴 수 있는 거한이지만 가냘픈 하이소프라노 톤의 목소리를 갖고 있어서 말할 때마다 부하와 적들에게 비웃음을 산다. 베이비5는 온몸을 무기로 바꿀 수 있는 무기무기 열매 능력자이지만, “네가 필요해”라는 말 한 마디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고 빚더미 위에 올라앉은 순정파다. 디아만테는 펄럭펄럭 열매를 먹은 깃발인간으로 강철과 같은 강도를 가진 무기를 깃발처럼 유연한 것으로 바꿔서 싸운다. 세뇨르 핑크는 정장 차림의 마초였으나 병상의 아내가 웃었다는 이유로 기저귀를 찬 갓난아이 복장을 고집한다. 조라는 아트아트 열매를 먹은 예술인간으로 적들을 예술작품으로 바꾸는 능력을 가졌지만, 정작 본인이나 그렇게 바꾼 작품은 추한 모습을 하고 있다. 지옥의 구현자 슈거는 무시간성을 대표하는 인물답게 10살 전후의 여아에서 멈춰 있다. 델린저는 투어(鬪魚)의 후손으로 잔인하고 강력하지만 겉모습은 하이힐을 신은 미소년이다. 라오G는 권법의 대가인 무투파지만, 싸우다가 자연사할 만큼 힘이 없는 노인이다. 마하바이스는 톤톤열매를 먹은 체중인간으로 자신의 몸무게를 1만 톤까지 늘려서 싸우지만, 상대를 깔아뭉갠 후에는 늘 허리가 아프다고 투덜댄다. 모두가 자신의 능동성/수동성 사이에서 불화를 겪고 있는 형국이다.

 

    5.
    지금까지 살펴본 인물들은 모두 적이었으므로 부정성(negativity)을 체현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긍정적인 인물을 살펴보자. 칠무해의 일원인 해적 여제 보아 핸콕은 여인섬 아마존 릴리를 다스리는 황제이자 구사(九蛇) 해적단의 선장으로 원피스 세계에서 최고의 미녀다. 매료매료 열매 능력자인 그녀는 메두사처럼(메두사는 그녀가 데리고 다니는 뱀 이름이기도 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들을 석화(石化)시키는 무서운 능력의 소유자다. 그런데 그녀에게도 긍정성/부정성의 역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체현되어 있다. 1) 그녀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유한 여제이지만, 어렸을 때 천룡인들의 노예로 팔려가 학대를 받았던 트라우마가 있다. 등에는 아직도 그때의 낙인이 있다(다른 형상으로 위장했지만). 2) 자신에게 반한 모든 남자를 불신하거나 깔보지만, 정작 자신의 미모에 관심을 두지 않는 루피를 보고는 첫눈에 반해버린다. 매료의 주인공이 단박에 다른 이에게 매료되어 버린 것이다. 3) 늘 상대를 깔보는 나머지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말하는데, 그게 심해서 오히려 올려다보는 것처럼 말한다. 이 자세는 ‘무한멸시포즈’라고 불린다.
    사랑이 무력(武力)이자 무력(無力)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보자. 정상결전의 와중에서 루피와 마주친 핸콕이 형 에이스의 수갑 열쇠를 건네준 직후의 일이다.

 

    “핸콕! 너란 녀석은 정말! 고마워! 큰 은혜를 입었어!”(루피)
    “벼······ 별말을 다.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서두르길. 루피.”(핸콕)
    “설마 해적 여제가 당한 건가? ‘허리꺾기’다! ‘가슴팍 박치기’에서 이어지는 ‘허리꺾기’!”(해군들)
    ‘이토록 힘차게 안아 줄 줄이야. 이것이 소문에 듣던······ 결혼?’(핸콕, 57권 560화)

 

    루피에게는 그저 반가움 내지 고마운 마음의 표현일 뿐이었으나, 이 행동이 바라보는 해군에게는 공격기(‘허리꺾기’)로, 당사자인 핸콕에게는 결혼 제의로 받아들여졌다. 한 사람의 호의가 누군가에겐 부정성으로, 다른 누군가에겐 적극적인 긍정성으로 독해되었던 것이다. 핸콕은 루피가 말할 때마다 이 ‘의미’를 읽는다.

 

    “한 가지 부탁이 있다. ‘안녕히’라는 말만큼은 하지 말고 가주지 않겠는가?”(핸콕)
    “에이, 난 그런 말, 누구한테도 한 적이 없는걸! 또 보고 싶으니까. 그럼 다녀올게.”(루피)
    “또 보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 설마 이것이…… ‘프러포즈’?”(핸콕)

 

    루피가 건넨 말은 하나의 자세나 태도, 곧 ‘포즈(pose)’이다. 그것은 루피가 동료를 대하는 일관된 자세다. 그런데 핸콕은 미리(pro-) 앞질러 가서 그것이 ‘청혼(propose)’이라고 생각해 버린다.6) 중립적인 하나의 말에 능동성을 부여하기, 그로써 행복한 수동성의 자리(청혼을 받은 연인)에 처하기. 이것은 ‘개념’을 창출함으로써 어떤 사건을 선취(계획이란 뜻의 ‘project’는 앞으로(미리) 던진다는 뜻이다)하는 행동이다.

 

    들뢰즈는 철학이란 개념(concept)의 창조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개념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애초에 ‘잉태된 것(conceptus)’이라는 뜻입니다. ‘개념으로 한다, 개념화한다(conception)’라는 말도 ‘임신(conceptio)’이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마리아의 수태’는 ‘Conceptio Mariae’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개념화(conceptio)에 의해 산출된 개념인 것입니다.7)

  6)  이 아이디어는 아래 책의 것이다. “몸짓(pose)은 불가능한 결말을 예견한 몸짓, 파국이 아닌 귀환을 미리 당기는 몸짓, 그러니까 구애(propose)로 변한다.”(양윤의, 『포즈와 프러포즈』, 문학동네, 2013, 115쪽)
  7)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 2012, 31쪽.

 

    핸콕은 프러포즈라는 개념을 품어서 프러포즈라는 사건을 산출했다(=낳았다). 루피가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거절했지만, 저 ‘먼저 취하기’(propose) 내지 ‘미리 던짐’(project)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수동성과 능동성의 교환이 가진 비밀, 호킨스가 예언이나 징조의 형식으로 구현해 낸 ‘아직’과 ‘이미’의 교환이 가진 비밀, 매혹 당함과 매혹함 사이에 놓인 심연의 비밀(그는 나를 유혹하지 않았으나 나는 그에게 유혹 당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소개 / 권혁웅

1997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마징가 계보학』, 『소문들』,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등이 있음.

 

   《문장웹진 2018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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