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무덤

[단편소설]

 

 

책의 무덤

 

 

이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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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낮의 도서관에서는 정갈하게 구운 도자기 냄새가 난다. 도자기에서 나는 냄새를 맡아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종이 한 장도 안 들어갈 만큼 책이 꽉 들어찬 서가를 둘러보며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복도 위에 구두소리를 또각또각 새기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세 글자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도, 자, 기.
    박물관의 카탈로그에 실린 백자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사진의 백자에는 둥그스름한 광채가 어려 있었다. 백자를 꾸미기 위해 일부러 그려 넣은 빛이었는데 너무 어설프게 그려져 있어 교회에서 나눠 주는 조악한 예수 그림의 광채 같았다. 그러나 지금 도서관 가득 펼쳐진 빛은 진짜다. 누군가의 조작 같은 것이 아니다. 열람실의 창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몇 개의 서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늘어선 책 사이에 햇살이 뿌옇게 번지면 마치 서가 안에서 광채가 흘러나오는 것 같다. 좋은 흙으로 빚어진 훌륭한 도자기나 깨달음을 얻은 성인에게서 정말로 빛이 나온다면, 지금 내 앞의 서가와 같은 빛일 것이다. 같은 빛에서는 같은 냄새가 나지 않을까? 그렇다면 도서관이든 도자기든 예수님이든 같은 냄새가 날 것이다.
    몇 개의 서가를 지나쳐 얼마 전 봐둔 책이 있는 곳으로 갔다. 구석에 꽂힌 ‘라쇼몽’을 집어 들었다. 십 년 전쯤 나온 책인데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다. 비닐 종이로 된 하얀색 표지는 사람들의 손을 많이 탄 듯 너덜너덜 벌어졌고, 페이지마다 누런 얼룩이 묻어 있다. 오히려 그런 점이 마음에 든다. 이런 책이야말로 할아버지의 서재에 꽂혀 있었을 법한 책이다.
    열두 시 이전의 도서관은 한적하다.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책 맨 뒤의 날개를 폈다. 한가운데에 스티커 모양의 도난방지 칩이 붙어 있었다. 손톱으로 스티커를 벗겨냈다. 도서관의 책을 효과적으로 가져오기 위해 나는 손톱의 모양을 쓰임새에 따라 다르게 손질해 왔다. 엄지는 짧고 뭉툭하게, 검지는 날카롭게, 중지와 약지는 평평하게. 날카로운 검지로 스티커의 틈을 벌리고, 그 사이에 평평한 중지와 약지를 집어넣었다. 난폭하지 않게, 어디까지나 부드럽게. 서두르거나 억지로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책이 상하게 된다. 몹시 민감한 부위를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레 스티커를 떼어낸 다음 엄지로 금속 칩을 구부렸다.
    입고 있던 티셔츠를 올려 바지 속에 ‘라쇼몽’을 꽂아 넣었다. 셔츠를 내리고 유리창에 모습을 비춰 봤다. 어색한 곳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몇 권의 책을 골라 대출 신청을 했다. 빌린 책을 가슴께에 올리고 출입문을 나섰다. 자주 해온 일이지만 책을 숨겨 도서관 문을 나설 때면 언제나 심장이 두근거린다. 두려운 건 아니다. 오히려 흥분에 가깝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가슴 끝이 뾰족하게 일어선다. 가끔 부피가 큰 책을 넣고 나오면 아래쪽까지 젖을 때도 있었다.
    사물함에서 가방을 꺼내어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 칸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바지춤의 책을 핸드백에 넣었다. ‘라쇼몽’은 초대받은 손님처럼 핸드백의 빈 공간에 딱 맞게 들어갔다.

 

    깡마른 남자가 정문의 주차장 단말기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몇 번인가 본 적 있는 도서관 사서였다. 왜소한 체격의 사서는 하얀 폴로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까치집을 짓고 있었고, 답답해 보이는 뿔테 안경이 코 위에 대충 걸쳐져 있었다. 도서관에서 나오는 나를 보며 사서가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내게로 다가온 사서가 앞을 가로막았다.
    몇 번인가 이런 상황을 떠올려 본 적이 있었다. 책을 가져오는 짓을 하는 걸 들키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 놓은 대로 행동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끄러미 사서의 얼굴을 봤다. 거울 앞에서 수십 번 연습한 표정이다. 사서가 가방을 보자고 하면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세요?”라고 말할 것이다. 약간 실랑이를 벌이다 적당한 때가 되면 자리에 주저앉아 될 수 있는 한 큰 소리를 내어 운다. 그럼 적어도 이 순간은 모면할 수 있겠지.
    말없이 나를 보던 사서가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사서는 뒷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내 앞에 펼쳐 보였다. A4 용지로 된 종이에는 두 칸짜리 표가 그려져 있었다. 워드프로세서로 그린 표의 첫 번째 칸에는 책의 제목이, 두 번째 칸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사서가 말했다.
    “짐을 확인하자고 할 마음은 없어.”
    종이를 내 손에 들려주며 사서가 말을 이었다.
    “거기 전화번호 적어 놨어. 목록을 살펴보고 뭔가 이야기할 게 있다는 생각이 들면 연락하라고.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야. 약속할게.”
    말을 마친 사서는 도서관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사서가 건네준 목록을 훑어봤다. 눈에 익은 책들의 제목이 적혀 있었다. 목록의 책들은 한두 권을 제외하고 모두 내가 도서관에서 가지고 나온 책들이었다. 비슷한 장면을 책에서 본 것 같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에서 수수께끼가 풀리는 장면들. 열심히 읽어 왔던 문제의 해답을 확인하는 대목은 언제나 즐거웠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다르다. 범인이 나였기 때문에.

 

    초인종을 누르자 엄마가 문을 열었다. 왜 이리 일찍 들어오느냐고 묻는 엄마에게 수업이 일찍 끝났다고 둘러댔다. 엄마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달 전 휴학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거짓말이 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혹시나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귀찮게 하지 않는다면 그걸로 좋았다.
    빌린 책을 책상에 던져 놓고 침대 밑에 넣어 둔 플라스틱 박스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착착 정리해 둔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라쇼몽’을 박스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박스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오른쪽 뒷주머니에 빳빳한 종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사서의 말이 떠올랐다.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야.” 뭐가 나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라면 모를까, 아니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라 해도, 그 남자의 말은 무척 음침하고 고약했다. 말의 내용은 둘째치고, 표정과 태도가. 그러니까 다른 무엇보다 그 남자 자체가. 혐오감과 함께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약속이라, 그 남자 같은 사람이 건네는 약속에 무슨 가치가 있을까.
    베개를 끌어안고 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벽지의 무늬를 눈으로 쫓는다. 벽지는 하얀 바탕에 연한 녹색의 덩굴과 파랗고 빨간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무늬는 무질서하게 그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나름의 규칙에 따라 반복을 계속하고 있었다.
    춤을 추듯 미려하게 꼬인 덩굴 사이에 옅은 색깔로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꽃들을 보고 있으면 할머니가 떠오른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던 날, 아궁이 앞에 앉아 있던 할머니의 울긋불긋한 얼굴이.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오 년 전의 일이다. 심장마비라던가? 서재에 엎드린 채로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잘 된 일이지 뭐니?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그렇게 좋아하는 책을 읽다 죽고 말이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할머니 앞에서 식구들은 입을 다물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대학 동기였다. 똑 부러지는 성격의 할머니와 옛날 남자를 고스란히 그려 놓은 것 같은 할아버지는 썩 어울리는 만남이 아니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묻히던 날, 어른들이 무덤을 만드는 것을 봤다. 어른들은 삽으로 땅을 파 흙을 다지고, 솔잎이 붙은 나뭇가지로 주변을 정리해 할아버지가 누울 자리를 만들었다.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삽이 내려가고, 흙이 올라오고, 발이 땅을 밟고, 솔잎이 주변을 정리하는 동안 사람들은 쉴 새 없이 농담을 주고받았다. 무덤을 만드는 것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신나는 일이었다.
    그날 새벽, 요의를 느끼며 잠을 깼다. 옷을 걸치고 화장실로 갔다. 재래식 한옥의 흔적이 남은 시골집의 화장실은 집 밖에 붙어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오다 대문과 마주한 별채에서 불빛이 나오는 것을 봤다. 불빛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별채의 쪽방에 딸린 아궁이 앞에 누군가 쭈그려 앉아 있었다. 할머니였다.
    뭐 하세요? 할머니 곁에 앉으며 물었다. 할머니의 발치에는 한 무더기의 책이 쌓여 있었다. 너희 할아버지 말이다. 할머니가 말했다. 죽기 전에 읽고 있었던 책이 뭔지 아니?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가 무더기에 쌓여 있던 책 중 한 권을 내게 건넸다. 책을 펼치자마자 삽화가 나왔다. 오래된 외국 책에 흔히 그려져 있는 가는 펜선의 그림이었다. 레이스가 달린 유럽 복식의 남자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남자가 누운 침대 옆에는 창문이 열려 있었다. 열린 창문 너머의 나무 아래, 하녀 옷을 입은 두 여자가 서로의 젖가슴을 만지며 입을 맞추고 있었다. 남자는 바지 앞을 풀어헤치고 왼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쥔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림을 살피던 내게서 책을 가져가며 할머니가 말했다. 네 할아버지 서재의 뒤쪽에 꽂힌 책들은 거의가 이런 것들이야. 숨겨 두면 모를 줄 알았나 본데, 어림없지. 거길 매일같이 쓸고 닦는 게 나니까. 죽어라 이런 책을 모아 놓고는 혼자 숨어서 보는 게 너무 웃겨서 그냥 놔뒀다. 슬쩍 나를 바라보며 할머니는 미소를 지었다. 웃기지 않니?
    할머니가 책을 펼치고 한 장을 북 뜯어냈다. 종이 찢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구깃구깃해진 책장이 아궁이로 들어갔다.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찢어진 종이에서 작은 벌레가 날개를 비비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노란 반딧불처럼, 혹은 하얗게 빛나는 하루살이처럼 책은 몸을 구겨 빛을 내며 재로 변했다. 할머니는 쉬지 않고 책을 아궁이에 찢어 넣었다. 책장이 탈 때 뿜어져 나오는 빛이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얼굴 위를 넘어 다녔다. 굴곡이 완연하게 드러난 할머니의 웃는 얼굴은 언젠가 봤던 만화영화나 동화 속의 마녀와 똑같이 닮아 있었다. 어떤 마녀였더라? 독이 든 사과를 만든 여자였나? 아니면, 앞쪽이 잔뜩 구부러진 괴상한 구두를 신은 사람? 쭈그리고 앉은 나의 치마 속으로 차가운 밤공기와 아궁이의 열기가 뒤엉켰다. 어느새 책 한 권이 아궁이에 다 들어갔다. 할머니가 다음 책으로 손을 옮겼다. 곁눈질로 할머니가 태우는 책을 훔쳐봤다. 제목은 알 수 없었지만 간단한 문장 몇 개를 읽어낼 순 있었다. 몇 번이고 그 문장들을 곱씹었다. 나는 곧 타오를 책들을 머리에 담았다. 책 무더기가 모두 아궁이 속으로 사라지자 할머니가 몸을 일으켰다. 할머니를 따라 일어섰다. 열기로 몸이 화끈거렸다. 타는 냄새가 코끝에 돌았다. 걸음을 옮기며 할머니가 내 머리를 감싸 안았다. 할머니의 품에선 불의 냄새가 났다. 따뜻한 온기와 아직 다 타지 않은 나무의 냄새가.
    다음날 아침, 식구들이 집을 나설 때에도 할머니는 잠을 깨지 않았다. 대문을 나서며 별채에 달려 있던 아궁이를 흘깃 봤다. 회색의 재들이 아궁이 깊숙한 곳에 엎드려 있었다. 어젯밤의 불꽃은 모두 꿈이었던 것처럼 재는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목록을 되짚어 봤다. 서른두 권의 책 중에서 내가 가져온 것들은 스물여덟 권 정도다. 다른 곳에서 모은 것까지 합하면 지금 내게는 마흔 권 정도의 책이 있다.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할아버지의 서재에는 오백 권 정도의 책이 꽂혀 있었다. 이 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의 서재는 텅 비어 있었다. 할머니는 그날부터 매일 책을 태웠을 것이다. 책을 생각할 때마다 할머니의 품에서 나던 냄새가 떠오른다. 활활 타오르는 살아 있는 것의 냄새. 작은 벌레들과, 새와 뜨겁게 불이 붙은 살아 있는 나무의 냄새. 책을 모으는 일을 그만둘 순 없다. 나는 목록에 적힌 전화번호를 눌렀다.

 

    “금방 왔네, 집이 가까운가 보지?”
    정문 앞에서 기다리던 사서가 친근하게 말을 붙인다.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서는 도서관 뒤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뒤를 따라갔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폐관 시간이 한참 지났기 때문에 오가는 사람은 없었다. 걷는 동안 사서는 쉴 새 없이 말을 걸었다. 학생이지? 전공이 뭐야? 자취해? 아니면 가족하고 같이? 엄마에게 그러는 것처럼 대부분 건성으로 대답했다.
    도서관 뒤쪽 구석에서 사서가 발을 멈췄다. 철문이 하나 닫혀 있었다. 사서는 열쇠를 꺼내어 잠긴 문에 넣고 돌렸다. 녹이 슨 철문이 불편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 안쪽에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나 있었다. 사서가 계단을 내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란 불빛이 올라왔다. 사서가 나를 불렀다.
    “괜찮아, 아무도 없으니까. 이리 와.”
    어째서 저 남자가 하는 말은 전부 저렇게 음침하게 들릴까. 계단을 내려갔다. 축축한 콘크리트 냄새가 올라왔다. 스산한 공기가 발에 감겼다. 어릴 적 읽은 동화 몇 가지가 뒤죽박죽 섞여 떠올랐다. 비밀의 지하방엔 뭐가 있었지? 죽은 여자들의 박제였던가, 아니면 에메랄드로 된 미녀였던가.
    상상은 빗나갔다. 계단을 내려간 그곳엔 거대한 책의 탑들이 서있었다. 열 평 남짓 되어 보이는 지하실 가득히 책들이 쌓여 있었다. 천장까지 빽빽하게 올라간 무더기도 있고, 대여섯 권이 쌓인 무더기도 있었다. 적어도 수천 권은 되어 보인다. 몇 개의 무더기들은 비닐로 단단하게 포장되어 있었지만 대부분은 노끈으로 아무렇게나 묶여 있었다. 이리저리 무더기를 헤집으며 뭔가를 찾던 사서가 구석 쪽에서 한 무더기의 책을 끄집어냈다. 노끈을 끊으며 사서가 말했다.
    “거기 아무데나 앉아. 선물을 하나 줄 테니까.”
    비교적 낮은 책 무더기 위에 앉았다. 온 신경이 책들에 쏠려 있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당장이라도 손에 잡히는 대로 책들을 한 권, 한 권 살펴보고 싶었다. 마음속에 담아 둔 타버린 책들이 모두 여기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서가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잔뜩 멋을 부린 활자로 제목이 적혀 있었다. ‘돈 쥬앙’.
    사서의 손에서 뺏듯이 책을 가져와 펼쳤다. 가는 펜선의 삽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페이지를 뒤졌다. 오랜 동안 찾아 헤맸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침대에 누운 남자가 나를 반겼다. 자신의 성기를 만지작거리며.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찬찬히 내 얼굴을 살피던 사서가 입 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목록은 살펴봤어?”
    사근사근하게 사서가 말했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행복한 순간을 맞으러 이곳에 온 게 아니다. 주머니에서 목록을 꺼내어 사서에게 건넸다. 내가 가져간 책들에는 표시를 해두었다. 목록을 살피며 사서가 말했다.
    “그 책 좋아해?”
    좋아하느냐고? 이 책을 내가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이 남자는 모른다. 몇 군데의 도서관을 돌아다녔다. 서가의 끝에서 끝까지. 제목도 지은이도 몰랐기에 무작정 비슷한 내용일 것 같은 책들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던 중에 몇 권 정도 닮은 느낌의 책을 구한 적도 있지만, 책의 온전한 실물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설명한다고 해서 이 남자가 알아듣기나 할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난 듯 사서가 말했다.
    “아폴리네르. 자극적인 성 묘사로 유명해. 몇 군데의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내놓은 적이 있었는데 곧 절판되어 버렸어. 워낙 음란해서 도서관에서도 금방 치워졌고.”
    “제가 이 책을 찾는 걸 어떻게 알았죠?”
    “도서관 밥만 십 년이야. 도둑맞은 책들을 살펴보면 네 취향이 어떤 건지 대충은 답이 나오지.”
    “내 취향이 어떤데요?”
    위아래로 나를 훑어보며 사서가 말했다.
    “악취미. 겉으론 어떨지 몰라도 속은 다 타버렸어. 열정이라고 해도 좋고, 욕망이라고 해도 좋아. 아무튼 어두컴컴한 게 가득해. 목록을 뽑고 난 후에 확신했어. 너라면 내 요구에 응할 거라고 말이야.”
    남자들은 매번 확신한다. 그리고 그 확신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틀렸는지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저 매번 믿고, 믿는 대로 원한다.
    “무슨 요구?”
    “조그만 부탁 같은 거야.” 사서가 말했다. “섹스.”
    말을 뱉고 나니 그래도 부끄럽긴 한 건지 사서는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몇 번 헛기침을 한 후 사서가 말을 이었다.
    “책이 없어지는 거, 그렇게 큰일은 아냐. 하지만 네가 계속 책을 훔치도록 놔둘 수는 없는 거잖아?”
    사서가 바싹 한 걸음 더 다가와 내 손목을 잡았다. 자기 딴에는 자연스럽게 해내고 싶었을 테지만 손가락 끝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 보았다. 그러자 용기를 얻은 듯 사서는 내 귀 쪽으로 얼굴을 갖다 댔다. 사서가 말했다.
    “어차피 네 취향에 맞는 지저분한 책들은 대부분 여기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위에 올라가서 여러 사람 귀찮게 할 필요 없잖아? 잡히면 너도 큰일이고.”
    맞는 소리다. 바싹 말라버린 옛날 종이. 허름한 표지에 잔뜩 멋을 부린 활자로 찍힌 저속한 제목들. 내가 원하는 책들은 대부분 지하실에 있었다. 다만 그것들을 지저분한 책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들은 그저 오래된 책들이다. 오래된 것만으로 지저분해지는 거라면 이 세계는 대체 얼마나 지저분한 것일까. 시작부터 지금까지 줄곧 지저분해져 왔고, 지금부터 끝까지 계속 지저분해질 테지.
    “한 번 잘 때마다, 여기 있는 책들을 한 권씩 주지.” 큰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사서가 말했다. “어차피 버릴 것들이니 가져가도 상관없어. 아무 문제없을 거야.”
    지하실을 둘러봤다. 어차피 버려질, 하지만 내가 가져가야 하는 책이 적어도 수십 권은 되어 보인다. 원하는 책을 모두 얻으려면 이 남자와 수십 번 자야 한다는 건가?
    “한 권씩은 너무 쩨쩨하네요. 가져갈 게 한두 권이 아닌데.”
    “그럼 한 번에”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사서는 되지도 않는 셈을 하는 것 같았다. 더 듣기가 괴로워,
    “하겠다는 건 아니고.” 일단 다음 말을 막았다. “생각은 해볼게요.”
    “생각이나마나 싫다고 하면 위에 알려야 돼. 그러면 네가 제일 곤란할 거 아냐?”
    “싫다는 것도 아니고.” 다시 말을 막고, “생각해 본다니까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못마땅한 듯 사서가 인상을 찡그렸다. 표정이 고스란히 겉에 드러나는 것이, 그나마 다루기는 쉬울 것 같다. 건네받은 ‘돈 쥬앙’을 손에 꼭 쥐고 나는 입구를 향해 돌아섰다.
    “마음이 정해지면 연락할게요.”
    “언제까지?”
    언제까지라. 이런 제의를 해놓고도 기한을 재촉하는 꼴은 그렇다 치고. 글쎄, 언제쯤이면 좋을까. 지금의 세상이 충분할 만큼 지저분해져서, 저 남자와 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하지만 그러려면 몇 만 년 정도는 걸릴 것 같은데. 대답하지 않고 나는 계단을 올라갔다.
    “네 번호 나한테 있어.” 등에 대고 사서가 말했다. “연락할게.” 아무런 답이 없자, “그래도 되지?” 다시 확인하려는 태도가 몹시 우스웠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울 때까지도 나는 ‘돈 쥬앙’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 잠시라도 팔을 풀면 ‘돈 쥬앙’은 금세 날개를 펴고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한참 천장을 바라보며 가슴에 안긴 ‘돈 쥬앙’의 질감을 음미하다 이윽고 팔을 높이 치켜들고 페이지를 넘겼다. 손을 놀려 수음을 하는 돈 쥬앙의 삽화를 찾았다.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녀들의 밀회를 지켜보던 돈 쥬앙이 두 사람을 불러들였다. 직접 읽은 책의 내용은 상상했던 것처럼 썩 훌륭하진 않았다. 문장은 촌스러웠고, 내용은 작위적이었다. 그것은 오직 성교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이야기였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누운 채 책을 읽어서인지, 그저 책을 읽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손을 내려 얼굴 위에 책을 펼쳤다. 오래된 냄새. 타기 전의, 설익은 과일과 채소의 향기. 그제야 비로소 책을 얻은 실감이 났다.
    핸드폰이 울렸다. 사서로부터의 전화였다. 몇 통 정도 무시하자 문자가 오기 시작했다. 느슨한 협박으로 시작해 느끼한 유혹까지. 눈에 빤히 보이는 회유와 확신할 수 없는 약속 같은 것들. 다음날 저녁까지 사서는 같은 일을 반복했다. 어차피 받지 않을 전화였으니 꺼둘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른 사람으로부터 중요한 연락이 올지도 모르고, 켜두는 쪽이 더 약 오를 것 같아 그대로 두었다. 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남자였다. 전화 한 번, 받지 않으면 부드러운 내용의 문자 두세 개, 그리고 몇 번 더 통화를 시도하다, 문자의 내용이 거칠어졌다. 그와 대화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진 않았다. 속내가 뻔히 들여다보였고, 천박했으며, 그만큼 단순한 남자였다. 딴에는 꽤나 거창한 유혹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지간히 퇴폐적이면서도 어느 정도 탐미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약점을 잡았다고 여겼을 것이고 자기보다 훨씬 어린 사람이라면 그런 약점에 휘둘릴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것은 눈이 먼 상태와 비슷하다. 볼 수 없는 것들을 대충 만져 본 후, 코끼리를 기둥이나 밧줄이라 믿는 것. 그런 상태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정작 문제는 나였다. ‘돈 쥬앙’의 실물을 구한 후 여러 가지가 복잡해졌다. 오랫동안 바라던 것을 손에 넣은 기분이란 건, 언제나 그렇듯 허무할 뿐이었다. 이런 순간을 한두 번 겪은 것이 아니지만 매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어쩐지 낯설고, 뭔가 부족하고, 자꾸 짜증이 나는 일. 사서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던 며칠 동안, 몇 번이고 애써 얻은 ‘돈 쥬앙’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려 했다. 한 번도 마지막 장을 넘긴 적이 없었다. 읽은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고, 다음 장을 넘기기가 몹시 어려웠다. 가져온 책들 중에는 마음에 드는 것도 있었고 괜히 탐을 냈다 싶은 것도 있었지만, 이렇게나 읽기 어려운 것은 처음이었다.
    결국 ‘돈 쥬앙’은 다 읽지 못한 채 플라스틱 박스에 넣어야 했다. 침대 밑에서 책을 모아 둔 박스를 꺼냈다. 한참 동안 책들의 제목을 읽어 내려가다 문득 한 권을 꺼내어 가장 좋아하는 대목을 찾아 바닥에 펼쳐 놓았다. 서너 권 정도를 상자에서 꺼내어 펼쳐 놓자 문득 묘한 충동이 들었다. 거실을 내다봤다. 엄마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것을 확인한 뒤 문을 잠갔다. 상자에 담긴 책을 모두 꺼내어 좋아하는 쪽을 펼쳤다. ‘돈 쥬앙’의 경우는 당연히 익숙한 삽화가 있는 페이지였다. 온갖 책들의 좋아하는 장면이 방을 가득 채웠다. 발끝을 세워 책들 사이로 조심스레 움직여 보았다. 어렴풋하게 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입을 막고 잠시 쪼그려 앉았다가 책 위에 누웠다.
    할머니가 떠올랐다. 타오르던 불의 냄새. 열기 가득한 아궁이. 애써 모은 책들의 좋아하는 장면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았다. 그 장면들에 맞추어 눈을 감고 아래쪽에 손을 가져다 댔다. 심장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감은 눈 위로 빛이 번쩍였다. 이름 없는 벌레들과 새들이, 불타는 나무들이 몸 안에 가득 들어찬 것 같았다. 기관지가 부풀어 올라 저절로 입이 벌어지고 입술은 타는 듯 뜨거웠다. 참으려 해도 혀가 말려 올라갔다. 간질거리는 요의가 퍼졌다. 곧 온몸의 근육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머리 안쪽 아주 깊은 곳에서 불빛이 아른거렸다. 도서관 지하의 노란 전등 빛, 혹은 아궁이의 잦아드는 불길. 책 무더기가 놓인 지하는 불이 꺼져버린 아궁이와도 같다. 재만 남아 싸늘하게 식은 아궁이는 단단하게 흙이 덮인 누군가의 무덤 같다. 어느새 나는 죽은 것처럼 꿈을 꾼다.
    종이로 만들어진 오래된 열차에 타고 있었다. 풍경이 화살처럼 지나가는 어느 객실의 창가에 우두커니 혼자 앉아 있는데 덜컹 덜컹, 열차의 움직임에 맞춰 몸이 흔들린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객실 안에는 하얀 먼지가 피어오른다. 풀 냄새가 난다. 자리에서 일어나 열차의 머리 쪽을 향해 간다. 열차의 객실 문은 내가 다가서는 순간, 바람에 책의 페이지가 날리는 것처럼 활짝 열린다. 문이 하나하나 열릴 때마다 작은 새가 날갯짓을 할 때처럼 파드득거리는 소리가 난다. 열차의 심장에 가까이 가는 동안 나는 열기를 느낀다. 객실의 문이 끝나는 곳이 보인다. 맨 앞 칸에는 커다란 아궁이가 놓여 있다. 아랫배 쪽이 뜨겁다. 퍼뜩 몸을 쳐다보니 배 위로 활활 불이 타고 있었다. 몸 밖으로 나온 불에서는 할머니의 냄새가 난다. 대체 뭐가 타고 있지?
    눈을 떴을 땐 밤이었다. 책들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두컴컴한 방 한가운데 선 채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전화기를 들고 사서에게 문자를 보냈다. 도서관에서 만날 약속을 잡았다.

 

    폐관 시간에 맞추어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 뒤편에 집에서 가져온 책이 든 상자를 놓아두고 도서관 건물로 들어섰다.
    도서관의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사서에게 얼굴을 비췄다. 밖으로 나오라는 눈짓을 보내자 그가 일어섰다. 입구에서 그를 기다렸다. 사서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주변을 둘러보고 사람이 없는 쪽의 벤치로 갔다.
    벤치에 앉아 의례적인 인사를 건넨 후, “생각해 봤어?” 사서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봤죠. 그런데” 슬쩍 사서를 돌아봤다. “도서관에서 책을 훔치면 몇 년 형 정도를 받아요?”
    질문을 못 알아들은 듯 사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지, 아무것도 모르지. 눈이 멀었으니까.
    “백 권 정도 훔치면, 십 년? 한 그 정도 살게 되나?” 놀리듯 사서를 따라 고개를 갸웃거려 보았다. “아니, 한 권당 일 년 정도 치면 내 경우에는 한 이십 년 정도인가?”
    “그게 무슨 소리야?”
    짜증스러운 듯 사서가 표정을 구겼다. 그에 맞서 나는 도리어 빙긋 웃어보였다.
    “무슨 소리냐면, 책을 훔친 걸로 이런 개수작을 해도 되느냐는 거예요.”
    “개수작?” 잔뜩 성난 표정으로 사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나마 바로 따귀 같은 것이 날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바짝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험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 마음을 가다듬고,
    “나 오늘 핸드폰 안 가져왔어.” 준비했던 말을 했다.
    다시 알아듣지 못한 듯 사서의 표정이 잠시 풀어졌다.
    “그쪽이 힘으로 뺏어갈 수도 있으니까, 아예 안 가져왔어. 그쪽이 보낸 문자 하나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있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 봐. 어떻게 되나.”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것 같았다. 빠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사서가 이를 갈았다.
    “일단 앉아요.” 벤치를 가리키며 나는 말했다.
    몹시 화가 난 상태였지만 그래도 사서는 순순히 내 말을 따랐다. 부들거리며 씩씩거리는 꼴이 조르던 장난감을 얻지 못한 어린아이 같았다. 안타깝지만 조르는 건 부모에게 해야 하고, 부모에게 섹스를 조를 순 없는 법이다.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책을 빌미로 그런 걸 요구해?” 조롱할 때는 아니었지만, “옛날 야설을 너무 많이 읽었나 봐요.” 며칠 동안 쌓인 감정을 조금은 풀고 싶었다. 고개를 저으며, “악취미네요.” 하고 나는 말했다.
    무섭게 나를 노려보며, “이게 진짜, 봐주려고 했더니.” 사서가 말했다.
    새삼 겁이 나기도 했지만, “나도 그래. 봐주려고 이러는 거야.” 하고 지지 않고 대꾸했다.
    사서는 가만히 앉아 고개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이것저것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당장 나를 때려 분을 푸는 일. 하지만 죽일 정도로 때리지 않는다면 자신이 보낸 문자가 발목을 잡을 것이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다면 정말로 날 해칠 생각도 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다니는 도서관이다. 어디로 날 끌고 갈 수도 없고, 끌고 가서 해친다 해도 집에 둔 핸드폰을 어쩔 순 없다. 아무리 멍청해도 그 정도는 계산할 수 있겠지.
    “그래서 어쩌자고?” 침묵 끝에 사서가 물었다. 기대했던 대로였다.
    “조그만 부탁.” 손바닥을 사서에게 내밀었다. “열쇠를 줘요.”
    작은 소리로 사서가 욕설을 뱉었다. 고함을 질렀더라도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만 해주면” 될 수 있는 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무 문제없을 거예요.”
    사나운 눈초리로 사서가 나를 훑었다. 아마 머릿속으로 온갖 고약한 상상을 하고 있겠지.
    “나한테는 무슨 이득이 있는데?”
    이 와중에도 이득을 따지는 게 우스울 지경이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이득이죠.” 그나마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책을 훔친 건 잘못이니까 그걸 문제 삼으면 어쩔 수 없죠. 그런데 어느 정도의 벌을 받게 될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감옥에 갈 것 같진 않은데? 하지만 그쪽은” 사서를 돌아보며, “경우가 다르잖아요?” 말했다.
    “그냥 얘기만 꺼낸 것뿐이야.” 처음으로 사서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뭐?”
    “물론 그쪽도 큰 벌을 받진 않겠죠. 얘기만 한 거니까.” 똑바로 사서를 마주 보며, “그렇지만 여기서 계속 일하는 건 힘들지 않겠어요?” 나는 말했다.
    한동안 사서는 입을 다물었다. 신경질적으로 발을 차거나 손가락을 꺾다가 간간이 나를 쳐다보다 이내 눈을 돌렸다. 나는 기다렸다. 이 부분만큼은 재촉할 수 없었다. 나 역시 번거로운 건 딱 질색이었고, 무엇보다 내겐 원하는 것이 있었다.
    이윽고 마음을 정한 듯 사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서는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꺼낸 후 내 발치에 툭 던졌다. 열쇠를 건네는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나마 시간을 아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열쇠를 줍고 몸을 일으키며 나는 말했다. “이건 문에 꽂아 둘게요.”
    사서가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이번엔 진짜 얻어맞게 되는 건가 싶어 겁이 났지만,
    “이 썅년.” 욕설에 그쳤다. “두 번 다시 여기 나타나기만 해봐.”
    그 말을 끝으로 사서는 돌아섰다.

 

    벤치에 앉아 숨을 골랐다. 생각했던 대로 일이 풀려 다행이었지만 꽤나 겁을 먹기도 했다. 몇 번이고 손에 쥔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도서관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플라스틱 박스를 철문 앞에 가져다 놓고, 열쇠를 돌렸다. 계단을 내려갈 때는 어쩔 수 없이 반쯤 플라스틱 박스를 끌어야 했다. 전등을 켰다.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아직 찾지 않은 책들이 가득했다. 하나하나 제목을 읽어 두고 싶었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다. 착 가라앉은 공기를 한동안 들이마셨다. 제목을 외울 수 없다면 공기만이라도 확실히 마음속에 담아 두어야 했다.
    박스에 넣어 둔 라이터 기름을 꺼내고 안에 들어 있던 책들을 바닥에 쏟았다. 지하실에 쌓인 책 무더기들을 무너뜨렸다. 푸드득, 파다다닥. 자그마한 새들이 땅에 부딪치는 둔한 소리가 들렸다. 눈에 띄는 모든 무더기가 무너지고 지하실 가득히 자그마한 둔덕이 올라왔다. 농담이라도 하며 즐겁게 책을 밟아 다져 볼까? 라이터 기름을 부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세상의 모든 장례식은 즐거운 법이다. 준비해 온 다섯 통의 라이터 기름을 모두 책 위에 뿌리고 허리를 편다. 심호흡을 하고 성냥을 꺼냈다.
    마지막으로 책을 둘러본다. 죽은 것처럼 깊이 잠든, 살아 있는 것들. 가까스로 나는 할머니의 서재를 찾았다. 할머니의 손에서 타오른 수많은 이름 없는 것들.
    불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새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매일 밤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왕비의 이야기를. 정복자에게 이끌려 한 자리에 모인 동양과 서양의 재담꾼들이 중얼거리던 잊혀진 노래를. 어디에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이야기들. 상관없다. 이제 나는 새 서재가 생길 테니까. 온몸을 저리게 하는 쾌감으로, 무덤과 아궁이로, 몸과, 불과, 열기로, 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갖는다.
    성냥을 그어 던졌다. 불길이 거세게 머리를 들었다. 돌아서 계단을 올라갔다. 아랫도리로 뜨끈한 기운이 올라온다.
    세상은 밤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머리 위에 돈다. 지하로부터 불기운이 올라온다. 뜨겁고 차가운 기운은 한데 뒤엉켜 내 몸을 어루만지다, 이내 흩어진다. 그리고 냄새. 냄새가.

 

 

 

 

 

 

 

 

 

 

 

 

 

 

작가소개 / 이영훈

서울 출생. 2008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단편소설 「거대한 기계」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장편소설 「체인지킹의 후예」로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했다.

 

   《문장웹진 2018년 0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