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 외 1편

[신작시]

 

 

계시

– 빌 에반스

 

 

허연

 

 

 

천해지는 것이 가장 쉬웠고
아름다웠다

 

몰려온 노을이 장작 같은 소년들을
어둠 속에 감추자 이내
연주가 시작됐다

 

세계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혹
희미하게 별이 뜨기는 했지만
이곳에서 별은
덜 익은 앵두알보다도 가치가 없다

 

찢겨진 선거벽보나
양철 쓰레기통
가끔 이름을 모르는 풀잎 위에 떨어지던
핏방울
놀랍지도 않은 대세들

 

전갈자리의 세력이 강해질 때
소년들은
이미 불행을 염탐했지만
도망갈 재주는 없었다
무감각한 노동과
죽는 날까지 가져갈 대여섯 명만 아는 비밀

 

그래도 이곳에선
밤이 되면
지나친 결투가 가끔씩
음표로 바뀌곤 했다

 

 

 

 

 

 

 

 

 

 

 

 

 

참회록 10

 

 

 

당신이 오라 해서 숲에 들어왔습니다.
이끼 위에 남은 당신의 발자국과
자작나무 가지에 걸린 당신의 머리칼을 따라 왔습니다
하지만
잊혀진 무덤 몇 개
잡초에 가려져 있는 곳에서
나는 당신을 잃었습니다.

 

무섭고 신비스럽습니다.
자작나무가 슬프게 떠는 숲에서
이 가을의 빗살무늬 앞에 섰습니다
죄 많은 빛과 어둠
무늬가 된 세월들
사선으로 내려오던 참회가
어느새 모여 북풍이 되고
그 사이로 잘게 찢겨져 들어온 기억들이
연서들로 쌓이는 동안
당신의 이름은 흩어집니다.
사선으로 들어온 상처들을 다시 살펴보지만
당신은 나를 호명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 숲 어딘가에서
저 사선으로 내리꽂는 차가운 빗살무늬로 서 있겠지요.
빗금처럼 서 있겠지요.

 

당신에게 묻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전생이었나요?

 

 

 

 

 

 

 

 

 

 

 

 

 

 

작가소개 / 허연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 등단.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미터』. 현대문학상·시작작품상·한국출판학술상.

 

   《문장웹진 2018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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