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과 기록_역사가와 소설가 : 김숨 - 서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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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복원과 기록 _ 역사가와 소설가

김숨, 『L의 운동화』, 『한 명』에 대하여

 

 

서희원

 

 

 

 

 

    역사가는 흔히 자신의 창작 작업에 ‘진실’과 ‘사실’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며, 직업적 자부심의 근간으로 삼는다. 직업적 자부심이야 윤오영의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이 오래 전부터 한국인들에게 알려주었던 것처럼 장인정신의 근간이 되는 것이지만, 이것이 지나치면 다른 종류의 글쓰기에 대한 편협한 비교와 건방진 오해로 나아가기 십상이다. 같은 산문의 영역에서 출발했지만 역사가는 소설가와는 달리 아주 일찍부터 국가라는 이데올로기에 소속되기 시작했다. 고대 중국에서 사(史)라는 단어는 원래 관리나 사관(史官)을 의미했으며, 그들은 국가 관료제도의 한 부분이었다. “이 역사가들의 임무는 사건과 말을 기록하고, 여러 가지 업적과 문서를 보존하며, 국가 문서와 칙령을 기초하고, 조정의 결정을 읽고 공포하며, 종교적인 의식과 국가의 의식에 참여하고, 달력을 만들거나 자연 현상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등의 천문학적인 일들을 감독하는 것이었다.”1) 직장인이, 그것도 준엄한 국가공무원이 실업자나 백수를 바라보는 시선. 이러한 경멸이 아주 오랜 기간 소설과 소설가에게 부당하게 주어졌다. 장자는 소설가를 “하찮은 의견(小說)”으로 높은 명성을 구한다고 비난했고, 순자는 “소수 학파의 이상한 담론(小家珍說)”이라고 했으며, 반고는 길거리의 소문이나 수집하는 하찮은 관리라고 칭했다. 역사라는 큰 이야기(大說)에 비해 작은 이야기(小說)라는 명칭에는 이러한 업신여기는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지만 역사는 ‘진실’과 ‘사실’이고, 소설은 ‘거짓’이며 ‘허구’일까? 사실 이러한 가치 논쟁은 이미 오래전에 학계에서 끝이 난 이야기이다. 노드롭 프라이는 산문픽션을 정리하고 분류하면서 “그것에 가장 가까운 것은 ‘역사’이지만, 『톰 존스』에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문학 영역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2)고 아쉬움을 표하였다. 영국의 사학자 존 H. 아널드는 짧지만 유용한 개념서 『역사』에서 “역사가는 과거의 모든 이야기가 아니라 일부만 말할 수 있다. 현존하는 사료에는 구멍이 있고, 잔존하는 증거가 없는 영역도 있다. 증거가 있어도,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다.”며 “역사가들은 당연히 틀린다.”고 쓴다. 그리고 여기에 이렇게 덧붙인다. “역사가들은 자기네 작업을 문학과 대비해 규정하곤 한다. 픽션의 저자는 인물과 장소, 사건을 지어낼 수 있지만 역사가는 증거에 얽매인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살펴보았고 앞으로 더 살펴볼 것처럼 역사 또한 증거를 다루고 제시하고 설명할 때 상상력을 동원한다. (…중략…) 역사는 ‘사실’을 더 넓은 맥락이나 서사 속에 배치하는 해석이라는 뜻에서 ‘이야기’다. (…중략…) 과거 자체는 서사가 아니다. 과거 전체는 삶만큼이나 혼란스럽고 조화롭지 못하고 복잡하다. 역사란 이 난장판을 이해하는 일, 이 대혼란에서 패턴과 의미와 이야기를 발견하거나 만들어내는 일이다.”3) 역사가 소설과 다르지 않은 상상력으로 채워진 이야기라는, 글쓰기 예술의 한 장르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피카소의 유명한 말처럼, “우리 모두는 예술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예술은 진실을 깨닫게 하는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1)  류샤오펑, 『역사에서 허구로』, 조미원·박계화·손수영 옮김, 길, 2001, 75쪽.
  2)  노드롭 프라이, 『비평의 해보』, 임철규 옮김, 한길사, 2000, 472쪽.
  3)  존 H. 아널드, 『역사』, 이재만 옮김, 교유서가, 2015, 22·29·30~31쪽.

 

    지나간 시간은 난장판이고, 대혼란에 불과하다. 게다가 전직 대통령 두 명이 모두 구치소에서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주는 것처럼 한국의 지난 10년은 지저분한 난장판이었고, 사이비들의 각축장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 파문이 잘 알려주는 것처럼 역사는 흔들렸고, 가치는 전도되었으며, 서사는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2016년에 출간된 김숨의 장편소설 두 편은 모두 역사에서 소재를 가져온 소설이며, 이것은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소설가의 방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4)
    『L의 운동화』와 『한 명』이 그것인데, 하나는 이니셜과 다른 하나는 숫자로 표기되는 제목을 지니고 있다. 김숨이 이름을 다루는 방식에서 발견할 수 있는 차이는 무엇보다 이 두 소설이 가진 간극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일반적으로 분류하자면, 『L의 운동화』는 남자의 이야기이고, 『한 명』은 여자들의 이야기이다. ‘L’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이한열의 이니셜이며, ‘이한열’은 많은 한국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민주화를 상징하는 숭고한 이름이다.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는 분명 잊지는 말아야 하지만 잘 꺼내고 싶어 하지 않는, 고향의 가족이나 남자들에게 침묵을 강요당했던, 말할 수 없는 역사의 이름 없는 희생자들이다. 『L의 운동화』는 누구나 다 아는 그 이름을 하나의 이니셜로 만들며, 즉 고유명사를 보통명사로 만들며, 민주화라는 역사적 과정을 모든 사람의 것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이에 비해 『한 명』은 이름이 없는 노인이, 이름이 지워진 할머니가 자신의 자아를 지칭하는 고유한 이름을 얻어내는 과정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의 결말부에 가서야 이 ‘한 명’의 이름인 ‘풍길’이 비로소 발화된다는 사실은 이런 점에서 중요하다. 즉, 『한 명』은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망각으로 사라지고 있는 이들이 목소리를 얻고, 자신의 고유한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의 기록이다. 김숨은 우리들에게는 그 이름을 분명히 기억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4)  김숨의 두 장편 『L의 운동화』와 『한 명』에 대해서는 2016년 8월 작가 김숨과 대담을 나눈 적이 있다. (김숨·서희원, 「소설가의 자리에서, 소설의 방식으로……」, 『현대문학』, 2016년 9월호) 그때의 시선과 판단에서 그리 달라지지 않았기에 이 글의 어떤 부분은 대담의 일정 부분과 다르지 않다.

 

    먼저 『L의 운동화』를 보자. 이한열의 ‘타이거 운동화’는 영화 <1987>(2017)에서도 애틋한 청춘남녀의 감정을 매개하는, 인생의 더 많은 길을 걸어 보지 못한 청년의 소실된 꿈을 보여주는 소재로 사용된 적이 있는 잘 알려진 유품이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이한열이 신었던 270㎜ 흰색 운동화는 피격의 끔찍함과 긴박함을 잘 보여주듯이 한 짝은 유실되고 현재 오른쪽 한 짝만 남아 있는 상태다. 집회가 끝나고 한 여학생에 의해 수거가 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밑창이 100여 조각으로 부서질 만큼 크게 손상되었고, 2015년 그의 28주기를 맞아 미술품 복원 전문가인 김겸 박사가 3개월 동안 복원하여 현재 이한열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고 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김숨은 운동화가 복원되는 과정을 통해 시대를, 삶을, 흘러가고 있는 역사를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L의 운동화』에 등장하는 복원 전문가 ‘나’는 이렇게 말한다. “L의 운동화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물질이다.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하자면 폴리에스터우레탄, PVA, 나일론 등이다. 그런데 나는 폴리에스터우레탄이라는 물질적 요소보다, 비물질적인 요소가 L의 운동화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화학적으로, 물리적으로 분석이 불가능한 그 어떤 고유하고 특정한 요소가.”5) 소설은 ‘나’가 L의 운동화에 담긴 “분석이 불가능한 그 어떤 고유하고 특정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과정을 보여주며, 객관적인 방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진실의 가치를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좀 더 설명적으로 쓰자면, 김숨은 『L의 운동화』에서 이한열의 낡은 운동화 한 짝을 복원하는 과정을 통해, 민주화의 경험을 고유한 한 사람의 행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참여하여 이룩한 시대의 열망으로 확장한다. 그렇게 이룩한 민주화의 환희가 우리 모두의 고유한 것이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간 생명이 잊어서는 안 되는 우리 모두의 고유한 슬픔이라는 것을 김숨은 말하고 있다.

  5)  김숨, 『L의 운동화』, 민음사, 2016, 35쪽.

 

    『한 명』은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가 한 명밖에 남지 않은 미래의 어느 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 명』은 고유한 동시에 희소한, 곧 역사의 망각 속으로 사라져 가는 목소리에 대한 기록을 담아내고 있다. 김숨은 이 ‘한 명’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기록하기 위해 유례가 없는 파격적 형식을 도입한다. 실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과 기록에서 가져온 문장들을 그대로 사용하여 이를 소설의 문장에 녹여내면서 서사를 전개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 명』은 수십 권의 책에 기록된 수백 명의 서사와 목소리를 한 권에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한 명’의 이야기인 동시에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말을 하고, 그리고 죽고 싶다.”6) 김숨이 『한 명』에 인용하고, 서사에 담아낸 이 문장은 어떠한 단어와 문장으로도 수식할 수 없는 피해자들의 고통스런 과거와 치유되지 않는 현재, 그리고 달라지지 않을 미래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이 가슴 아픈 것은 고향으로 돌아온 풍길의 시간이 어떠한 치유도, 희망도 그녀에게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풍길은 스무 살이 되기 이전, 즉 열세 살에서 스무 살까지 만주에서 경험했던 일이 자신의 모든 삶을 파괴했다고 말하지만, 고향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도 그녀에게는 결코 위안이 되거나 따뜻하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2차 가해’의 시간이 만주에서 보낸 7년보다 열 배나 많은 70년 가까이 그리운 고향에서 잘 아는 사람들을 통해 지속된 것이다. 김숨은 정처 없이 떠돌며, 끔찍한 고독에서 삶을 지탱하는 풍길의 현재를 통해 과거를 말하는 소설의 구성으로 그 시간들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더디고 느리게 지나가는 현재의 구덩이에 가득 고여 있는 슬픔과 고통을 말해 주듯이 김숨은 현재형의 문장을 쓰며, 풍길의 고독을 천천히 따라간다.

  6)  김숨, 『한 명』, 현대문학, 2016, 152쪽.

 

    역사가는 사료의 문장과 역사가의 방식으로, 소설가는 문학의 문장과 소설가의 방식으로 시간의 흔적을 따라 걷는다. 그들의 손에 의해 시간은 기록되고, 못 보고 지나쳐 간 것은 다시금 눈길이 가고, 소실된 것은 복원된다. 역사와 소설은 시간이라는 토양 위에서 자라는 나무와 꽃이다. 무엇을 나무라고, 무엇을 꽃이라고 구분하며 칭할 수 있지만, 꽃잎과 이파리 중에서 무엇이 더 가치 있고, 무엇이 더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변웅필
표지 / 변웅필

변웅필은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독일 뮌스터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현재 강화도에서 강아지 만득이와 살며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작가소개 / 서희원


문학평론가. 2009년 《문화일보》, 《세계일보》 평론으로 등단.

 

   《문장웹진 2018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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