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자 동백 외 1편 - 함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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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걷는 자 동백

 

 

함기석

 

 

 

이 행이 질퍽질퍽 개펄을 걷고 있다
붉은 공기통을 맨 채 죽은 심해잠수부 자세로

 

동백이 핀다, 찢긴 팔다리가 해안을 달리고
몸통이 뒤따라 달리고

 

이 행이 질척질척 잠 속을 걷고 있다
심폐소생술로 폐를 압박하는 응급구조대원 얼굴로

 

동백은 피고, 머리통 하나 모래언덕을 구른다
어린 달이 뒤따라 구르며 울고불고

 

이 행이 질척질척 불길한 치욕 속을 걷고 있다
밤새 안개 속에선 음부들 우는 소리

 

동백은 짙고, 선홍빛 바다엔 도살된 향유고래
해병들이 술병을 던지며 싸우는 매음지다

 

이 행은 빨리 이 병든 전장을 뜨고 싶다
하늘엔 취한 배, 취한 군함들, 함포소리 꽃피어

 

동백은 컹컹 짖고, 해안 가득 낭자한 살
이 행이 취한 주검의 보폭으로 벼랑을 걷고 있다

 

 

 

 

 

 

 

 

 

 

 

 

 

네팔에서

 

 

 

첫 행이 첫 행에서 끝 행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맥주거품 모양의 기적소리 낭창낭창 울리고

 

다 떠났어! 다다, 다! 다!
어휘들은 사흘 밤낮 설주에 취해 발이 비틀거리는데

 

외줄 철로처럼 외로워 텅 빈 역사를 보는 이 행과
소리 밖의 세계로 눈을 돌리다 눈이 젖는 이 행은

 

히말라야(Himalayas) 시다 나를 천장하던
빛의 돔덴들, 그들의 헐벗은 손이다
한때 나의 연인이었던 불과 눈보라, 내 흑백 살들아

 

어떤 날은 말이 무서워서 눈이 얼어 죽고
어떤 날은 말이 회오리쳐 살이 발려 죽고

 

백지는 잠자는 설산이다
천지를 오가며 새들은 깔깔깔 죽음과 곡선놀이 중인데
세상은 또다시 꽃피는 폭설이다

 

낮보다 더 낮은 곳을 태우는 이 참혹한 얼음세계
밤보다 더 어둔 자를 얼리는 이 불길한 불꽃세계

 

다다, 다 떠났어! 다! 다!
네팔에서 네 팔이 꽃뱀으로 돋아나 나를 휘감는데

 

맥주거품 모양의 눈사태 소리 낭창낭창 울고
끝 행도 끝 행에서 첫 행으로 가는 마지막 기차를 놓친다

 

 

 

 

 

 

 

 

 

 

 

 

 

 

작가소개 / 함기석

1992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오렌지 기하학』, 『뽈랑 공원』, 『착란의 돌』, 『국어선생은 달팽이』, 동시집 『숫자벌레』, 『아무래도 수상해』, 시산문집 『고독한 대화』 등 출간.

 

   《문장웹진 2018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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