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플라나리아
권창섭
나의 반대말은
너도 아닌 우리도 아닌 나인데
나는 나밖에 낳을 줄 모릅니다
이렇게 부족한 나라도 괜찮겠습니까
그는 저 멀리서 모두 지켜보고 있고
이렇게 모자란 나라도 괜찮겠습니까
자꾸만 모자라서 나에게 말합니다
“아이를 낳아라 너 갖고는 부족하니까”ⅰ
나라는 나에게 나라도 낳아라고 말하고
I My Me Mine
아이 마이 미 미안하게도
나는 자꾸 아이 대신 나를 낳고
그런 나는 핑크 카펫에 앉을 자격이 못 됩니다
그는 저 멀리서 날 지켜보고 있고
자리가 이렇게 부족한데 괜찮습니까
“자리를 낳아라 이거 갖고는 부족하니까”ⅱ
자라가 자꾸 산란을 할 수 있는 건
바다라는 자리가 있어서
모두 받아 내기 때문인데
I’m still hungry
나는 자꾸 모자랍니다
내가 가진 건 원룸뿐이고
그래서 아이를 낳았죠
한국어 명사는 격 변화가 없어서
아이 마이 미 미안
나는 아마 못 자라지만
한국어 명사는 성 할당이 없어서
어미가 될 수는 없고
부자가 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나는 자꾸
그저
나를 낳을 뿐
우리는 슬몃,
아니 슬며시
플라나리아를
폴리나리아로 고쳐 적습니다
ⅰ 임승유,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봐”
ⅱ 박 대통령은 “소득이 없고 고용이 불안하기 때문에 결혼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며 “지금 우리나라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방치하면 젊은이들의 가슴에 사랑이 없어지고 삶에 쫓겨 가는 일상이 반복될 것”이라고 우려했다.(박 대통령 "젊은이들 가슴에 사랑이 없어질 것", 노컷뉴스, 15.12.10.)
죄책감들 4
애인이 내 침대에 다녀간 다음 날이면
샅 아래까지 내려오는 티셔츠를 입지요
그러면 나는 남자도 아닌 나,
나도 아닌 남자
어쩌면 이대로는 실수인 것처럼
여자 화장실도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나는 나도 아닌 여자,
여자도 아닌 나
,
이 시절
몇몇의 남자들이 서로를 핥는다 하여
몇몇의 여자들이 서로를 덮는다 하여
어쨌든 뒤집힌 모자들이,
상당수 버려진 수건들이,
그대로 우리를 흘러갑니다
구호는 구호대로, 이념은 이념대로
,
몇 달에 한 번쯤 내 몸의 털들을 뽑으러 갑니다
왁싱을 해 주는 사람이 여자라도 나는,
발기를 하지 않기로 다짐하지요
그것은 엄마가 해주는 일
세신을 해 주는 사람이 남자라도 나는,
발기를 하지 않기로 다짐하지요, 부디
그것은 아빠가 해주는 일…
…
팔꿈치는 제 성감대지요
때도 제일 많이 나오고
,
애인이 있는 내 애인
세상에서 제일 잘 생겨서
나는 애인의 애인도 사랑해
어떤 날에는 많이,
어떤 날에는 조금만,
,
털도 없고 때도 없이
우리는 집회에서 만납니다
유일신께 기도하지요
유일하다면 그것은
X도 아니고 Y도 아니지
어쩌면 이대로는 실수인 것처럼
천국에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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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16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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