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욕 외 1편

[신작시]

 

 

굴욕

 

 

최규승

 

 

 

 

    1
    너는 가만히 있다 공항행 버스는 도착하지 않는다 너는 아직 식지 않은 커피와 마주 앉아 있다 멀리 강물이 흐른다 가끔 물결에 부서지는 달빛을 따라 너는 흘러가고 있다 떠난다는 것은 마음뿐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버스는 정류장에 멈추지 않고 떠난다 너는 비로소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 생각한다 냉정하라, 오, 냉정해라, 모든 교통편이 취소되었고 공항으로 가는 길은 모두 폐쇄되었다 길가 아스팔트 위 갖가지 검은 속옷이 나란히 놓여 있다 한 여자가 울고 있다 여자는 어떤 속옷도 고르지 못하고 무릎으로 몸을 받친 채 움직이지 않는다 여자의 모든 움직임이 눈물로 흘러내린다 그해 봄은 물속에 가라앉았다

 

    2
    사진으로 막은 창문
    풀리지 않는 순열
    내 옆에 왜 네가 있는지
    네 곁에 왜 내가 잠들었는지
    그래도 웃으니 좋아
    하얀 얼굴과 헐렁한 모자
    날리는 머플러
    당신이 나를 풍경으로 만들었으니
    바람을 맞아도 눈 감지 않기를
    고개를 들고 앞으로 걷기를

 

    3
    불빛 사그라진 골목
    밤 산책에 나선다
    너의 그림자는 여전히 잠들어 있어
    너를 쫓지 않는다
    머릿속 말들을 끄집어내기가 쉽지 않아
    명사 없는 동사로 나는 살아간다
    나는 언제나 비문
    그 말들을 찾아냈을 땐 이미
    명사만 나열되는 불균형의 밤
    너는 아무 생각 없이 깊어간다

 

 

 

 

 

 

 

 

 

 

 

 

 

 

 

너란 너

 

 

 

 

    봄볕 쏟아지는 계단 끝 고양이는 비둘기의 머리 귀퉁이를 씹어 먹는다 미처 버리지 못한 시간에서 고양이 냄새가 난다 너는 계절을 지우는 시선을 떠올린다

 

    어떡하니 자꾸 너를 까먹는다 꽃은 아름다움을 잊었고 하늘은 파란을 잊었어 물속에서도 갑갑하지 않고 밥을 먹어도 배부르지 않아 숨 쉴 수 없는 곳에서 숨을 쉬고 숨 쉴 곳에서 숨을 멈췄어 그것은 너의 운명 봄은 말하고 너는 듣겠지 꽃은 고개를 젖히고 너는 뒤돌아설 거야 하늘은 벽 속으로 사라지는 너의 뒷모습을 보겠지 하늘이 다시 파란이 되면 너는 돌아서겠니 등을 맞대고 물속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으겠니

 

    너는 너를 너와 너로부터 너에게서 너인 너다

 

    봄이 왔다 봄을 생각하는 너는 이미 봄을 버린 사람이다 봄이 왔다고 말하는 순간 봄은 봄이 아니다 물속으로 사라진 사람들은 이미 봄이다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봄이 피어난다 침대에 봄을 두고 너는 버스를 기다린다 봄 없는 봄과 보는 봄을 생각하느라 너는 걷지 못한다 장의차의 선루프를 열고 봄이 손을 흔든다 흔들리는 것은 아프다 흔들리는 것을 아프게 보는 것은 봄, 봄은 흔적을 남긴다 너는 눈을 감는다

 

 

 

 

 

 

 

 

 

 

 

 

 

작가소개 / 최규승

2000년 《서정시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무중력 스웨터』 『처럼처럼』 『끝』, 육필 시집 『시간 도둑』이 있다.

 

   《문장웹진 2017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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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걷는법심리학도

https://www.youtube.com/watch?v=xaQAyN95PIM&t=4s

선생님 혹시 시를 이런식으로 홍보할 생각은 없으신가요? 같이 win-win하게 연락주십시오

010-7794-4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