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마이바흐를 타본 적이 있습니까

[2015 아르코창작기금]

 

 

당신은 마이바흐를 타본 적이 있습니까

 

 

최승린

 

 

    “탈모는 털이 있어야 하는 곳에 털이 없어진 상태입니다.”
    비디오의 제목은 ‘탈모에 관한 오해와 진실’이었다. 종편에서 방영한 ‘21세기의 질병’ 시리즈 중 하나로 조회수가 얼마 되지 않는 걸 보니 인기 프로그램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털이 있어야 하는 곳에 털이 없어진 상태가 탈모. 사실상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고 있는 김민석 박사는 40대 후반쯤으로 보였는데 의사라기보다는 중견 탤런트 같은 얼굴이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왠지 믿음이 간 건.
    언젠가부터 엘리베이터를 타면 사람들 머리를 유심히 보게 됐다. 대머리나 머리숱이 성긴 사람이 많았다. 왼쪽 귀에서부터 머리카락을 말아 올려 정수리에 널어놓은 사람도 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런 사람 천지였다. 노안은 그보다 먼저, 마흔이 넘자마자 왔다. 평생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산 탓일 터지만 그 덕에 먹고 살았으니 단순히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건망증이나 불면, 무릎, 허리 통증, 난독증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머리가 벗겨지는 건 다른 문제였다.
    모니터에는 이제 사람 정수리를 찍은 사진 두 장이 떠 있었다. 무참할 정도로 머릿속이 속속들이 들여다보이는 사진과 머리카락이 빽빽이 나서 두피가 전혀 보이지 않는 사진이 한 세트였다. 나도 모르게 머리카락을 헤치고 머릿속을 긁었다. 나는 분명 저 두 사진 가운데 어디쯤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그 CD를 발견했다. 김 박사의 어깨 뒤 책장에 CD 박스 세트로 보이는 것이 꽂혀 있었다. 유튜브 흐릿한 영상 속에서 확실한 건 아니었다. 그저 CD 스물 너덧 장이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사실 별 것 아닌 배경의 일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선이 갔다.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 봤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생각났다. ‘저것은 1980년대 중반 발매된, 박 무슨 작곡가의 전집이다.’ 그런데 박 뭐였더라? 박수현, 박수철, 아니, 박호순? 정확한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이름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저 CD는 작곡가의 이름이나 작품번호 같은 것 말고 재킷을 봐야 했다. 각각의 CD의 옆면, 그러니까 책이라면 책등이라고 불릴, 가늘고 긴 옆면에 선이 하나씩 그려져 있었다. 선의 위치와 색깔은 CD마다 달랐다. CD 번호에 따라 선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갔고, 번쩍이는 검은 색에서 옅은 흰색으로 변했다. 그래서 일렬로 꽂아놓으면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대각선이 죽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비디오를 멈추었다. 김 박사는 한 손을 얼굴 가까이 가져가려던 모습 그대로 정지했다. 비디오 해상도를 최상으로 높이고, 전체 화면 모드로 변경했다가 영화관 모드로 다시 바꿨다. 그런다고 뭐가 더 잘 보이는 건 아닌데도 그랬다. 나는 컬렉션 속에서 CD 한 장을 따로 식별해보려 했다.
    나는 그 CD를 알았다. 아니, 그걸 찾아달라는 요청을 들었다. 아니다. 내가 요청받은 건 CD를 찾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 CD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20년도 더 된 일이다. 제대를 한 해니까 스물다섯이나 스물여섯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복학하는 대신 부모님의 곱창 가게에서, 말하자면 알바를 시작했다. 독산동 우시장에 가서 곱창을 사오는 일이었다. 고르는 건 쉬웠다. 두꺼워야 하고 구멍이 많아선 안 된다. 곱창에 구멍을 뚫는 건 안에 든 것들을 빼내기 위해서인데 곱창 속에 들어 있는 게 무엇이겠는가. 구멍이 많다는 건 안에 그런 게 왕창 들어 있었다는 뜻이다. 또 꽃이 펴 있어도 거뭇한 게 비쳐도 안 된다. 사실 그런 걸 따질 필요도 없다. 신선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그냥 딱 보면 알 수 있다. 좋은 곱창을 고르는 건 시간과 돈만 있으면 오케이다.
    하지만 마을버스가 겨우 지나다니는 좁은 비탈길, 테이블 다섯 개짜리 곱창집 아들의 알바가 그렇게 간단할 리는 없었다. 나는 두꺼운 것, 구멍이 없는 것, 꽃이 없는 것, 유백색의 매끈한 것들이 다 팔려나가고 남은, 얇고, 너덜거리고, 꽃이 펴 있고, 거뭇한 것들 중 전화 주문으로 배달 나가는 저급품이나 어제의 제고가 아닌, 그나마 괜찮은 것을 골라야 했다.
    그리고 동물 내장이 담긴 비닐 봉투를 든 채 독산동에서 아현동까지 버스를 탔다. 즙이 뚝뚝 떨어지는 비닐봉투에서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냄새가 났다. 시장 거리에는 동물의 내장과 핏덩이, 털 같은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널려 있었다. 사람들은 죽은 동물의 살덩이와 염통과 허파를 손으로 주물렀다. 그런 것들을 돈을 받고 팔고 돈을 주고 샀다. 그때 나는 탈모나 노안 같은 단어가 존재하는 줄 몰랐고 아파트 상가 지하 슈퍼 안쪽에 처박힌 2.5평짜리 점포에서 컴퓨터 수리를 하며 평생을 보내게 될 줄도 몰랐다.
    내게 자동차를 보낸 건 노인이었다. 마이바흐를 소유한 노인. 나는 전화를 받고 집을 나섰다. 1층 식당 문을 열고 저 나갔다 와요 라고 하지도 않았다. 독산동에 다녀오면 내 일은 끝이었다. 하려면 일이야 많았겠지만 그때의 나는 개의치 않았다. 등록금이 없어 복학도 못했는데 그 정도면 된 거 아니야 생각했다. 나는 두피가 보일 만큼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돌아다녔다. 아무렇게나 턱수염을 기르고 세탁도 하지 않은 청바지를 매일 입었다. 그리고 분명 그런 게 멋있는 건 줄 알았다.
    그날도 햇살이 뜨거웠다. 비슷비슷한 주택과 가게, 일렬 주차된 자동차, 점집 깃발과 슈퍼 간판 같은 것들이 햇볕이 벌겋게 달아올라 몸을 비비 꼬았다. 검은 자동차는 비탈길과 큰길이 만나는 삼거리에 서 있었다. 기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차창 밖으로 많은 것이 지나갔다. 교차로, 신호등, 차선, 가로수, 행인, 그리고 다른 자동차들. 멋대로 사는 것도 좋고, 개성도 좋고, 자유로운 것도 좋다. 하지만 그런 것을 한방에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버리는 것도 있었다. 그 자동차가 그랬다. 그때 나는 그 자동차의 이름이나 배기량, 가격 같은 건 알지도 못했는데도 그랬다. 겨우 자동차 따위에 주눅이 들다니 우스운 일이었지만 그랬다. 그래서 기가 막혔지만 그 무력감에 반항해볼 방법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평생 다시 타보지 못할 자동차 안에서 제대로 본 것이라고는 유리창에 비친, 창밖 풍경에 겹쳐진 내 얼굴뿐이었다.
    철제 게이트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는데도 열렸다. 양쪽으로 활엽수가 늘어선 짧은 드라이브 웨이를 지났다. 호텔이나 레스토랑은 아니었다. 손님이나 방문객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조도가 낮은 램프가 늘어선 복도를 지나, 금세라도 실내악단이 들어와 연주를 시작할 것 같은 방에 들어섰다. 홀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남자는 짙은 색 정장을 입고 타이를 매고 있었다. 나는 잔뜩 얼었다. 커피잔에는 푸른 꽃이 그려져 있었다. 줄기부터 꽃받침, 꽃잎까지가 모두 옅은 푸른색이었다. 그 잔을 향해 손을 뻗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자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50대 정도로 보였는데 사실 그때 내게는 40대나 50대나 60대나 모두 나이든 남자였을 뿐이니 실제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남자가 말했다.
    “선생님이 쓰신 작품을 읽었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몇 가지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전화통화에서도 들은 얘기였다. 전화는 식당으로 걸려왔다. 식당 번호를 어떻게 알았을까. 개인정보 같은 개념이 희박한 때긴 했다.
    “작품에 나오는 CD 말입니다. 재킷 옆면에 은회색 선이 그어져 있는 CD요. 혹시 실제 모델이 있는 겁니까?”
    “아니요. 제가 지, 지어낸 겁니다.”
    나는 더듬었다.
    “혹시 박OO 라는 작곡가를 아십니까? 일제강점기의 작곡가인데요.”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클래식 음악에는 문외한이다. 남자는 몇몇 질문을 더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모른다’ 또는 ‘모르겠다’뿐이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남자는 바쁠 것 없으니 느긋하게 이야기하자는 듯 나에게 커피를 권했다. 어느 나라에서 수입한 커피로 깊은 흙 맛이 난다고 했다. 나는 멍청하게 커피잔을 내려다봤다. 푸른 꽃에 담긴 흙의 깊은 맛. 그게 도대체 무슨 맛인지 그때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남자는 부모님의 곱창 가게에 대해서도 물었다. 경기가 좋지 않은데 괜찮냐, 부모님의 연세는 어떻게 되시느냐, 몇 시에 열어서 몇 시에 닫느냐. 그러다가는 물었다.
    “선생님은 어떠십니까. 지금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계신다고 알고 있는데. 이제 복학을 하셔야죠. 학교는 어떻습니까. 괜찮습니까.”
    지금 돌아보면 남자는 그저 나를 가늠해보기 위해 이런저런 미끼를 던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때에는 왠지 남자가 나를 힘껏 걱정해주는 것 같았다. 나중에야 알게 됐는데 그런 느낌은 남자가, 내가 쓰던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작품’이라고 부르면서부터 시작됐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독산동행을 아르바이트라고 부른 것도 남자가 처음이었다. 친척이나, 동네 사람들은 나를 보면 복학도 안하고, 진짜 아르바이트를 안 잡고 빈둥거리며 부모님 등골이나 빼먹는다는 얼굴을 했다. 그런데 남자가 나를 바라보는 방식 어딘가에는 그때까지 누구도 나를 제대로 대해주지 않았다는 느낌이 있었다. 누구도 내 불안과 내 울분과 내 두려움을 짐작해주지 않았다는. 그래서 나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좀 했다. 별건 아니었다. 내 이야기는 다 거기서 거기일 뿐이다. 곱창, 독산동, 등록금, 복학. 비밀도 아니고 부끄럽지만 부끄럽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 이야기.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손을 맞잡으며 내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그 모든 제스처가 내 말에 대한 동의, 내 불만에 대한 동조 같았다. 남자가 내 편이라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는 누군가의 속마음을 털어놓게 하는 일을 아주 잘 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남자 뒤로 노인이 한 명 걸어가고 있었다. 키가 작고 몸피가 다부진 노인이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노인은 그곳의 주인이었다. 등기상의 소유주일 뿐 아니라, 그곳의 공기, 분위기, 시간의 주인, 그리고 그 남자의 주인이었다. 노인은 나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창가로 걸어가 1인용 소파에 앉았다.
    남자는 잠깐 노인을 보더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사실 저희는 그 CD를 찾고 있습니다.”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제가 쓴 얘기에 나오는 CD를요?”
    남자는 그렇다기보다는, 하고 입을 뗐다.
    “그 CD는 1980년대에 발매된 박OO 작곡가의 컬렉션 중 한 장입니다.”
    남자는 사진을 보여주었다. 오래된 사진을 찍은 사진이었다. 스물다섯 장은 족히 돼 보이는 CD 컬렉션이 찍혀 있었다. 재킷은 연주자의 얼굴이나 오케스트라 공연실황 사진 같은 것들이고, 가늘고 긴 옆면에는 선이 하나씩 그려져 있었다. 선은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날아올랐다. 그런데 하나가 어긋나 있었다. 선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려면 딱 CD 한 장이 더 필요했다. 아마도 스무 번째쯤 되는 CD인 것 같았다. 그 CD를 세로로 세운다면 위에서 조금 내려온 곳에 은회색 선이 있어야 했다.
    “잘 생각해봐주십시오. 혹시 어디에서 보신 거 아닙니까?”
나는 웃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노인이 웃음소리에 반응하듯 나를 돌아봤다. 그 순간 무언가가 입을 콱 틀어막았다. 갑자기 공기가 모래가 된 듯 기도가 막혔다. 실제로 움직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장이 무너지거나 독가스가 뿜어져 나온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도, 아무것도, 공기도 미동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숨을 쉬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저, 저는 정말 그 CD를 본 적이 없습니다.”
    가까스로 말을 내뱉은 건 남자가 낮게 헛기침을 하고나서였다. 나는 더듬거리면서, 중얼거리듯, 사죄하듯, 죄를 고백하듯 쩔쩔맸다. 정말입니다. 그냥 제가 만들어냈습니다. 본 적은 없습니다. 믿어주세요.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노인은 이미 방에 없었다. 문을 여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사라졌다. 창가의 1인용 소파에는 누가 앉았던 자국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자동차는 나를 삼거리에 내려주었다. 그때 자동차 뒤에 쓰인 이름을 봤다. 메이바흐(MAYBACH). 5월의 바흐. 클래식은 모르지만 그 자동차에 바흐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알 것 같았다.
    비탈길에 접어들자 누릿한 곱창 냄새가 밀려 왔다. 걸음을 멈추었다. 아직 비탈길 초입이었다. 곱창집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냄새가 진동했다. 곱창집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지저분하게 걸린 발 너머로 웃음기 없는 어머니가,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취한 아버지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집에서 태어나 그 집에서 자랐다. 그 냄새가, 그 기름때가, 그 술손님이 나를 키웠고 나를 가르쳤다. 모르지 않았다. 스물다섯 해가 반복해서 가르친 일이기도 했다. 이젠 익숙하고 편안하다 생각했다. 가끔은 이렇게 사는 거지, 뭐 있어, 정답기도 했다.
    되돌아 내려갔다. 삼거리 버스 정류장에 다다랐다. 버스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쏟아져 들어갔다. 사람들에게 휩쓸렸다. 생각해보면 그날 별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CD가 실재하는지 아닌지는 내게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어떤 위압감에 짓눌린 순간은 있었지만 자격지심 탓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가. 갑자기 모든 것이 한심해진 이유는 무엇인가.
    그 자동차 때문이다.
    그날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5월의 바흐. 그것이 그 자동차를 만든 사람의 이름이며 마이바흐라고 읽는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나중의 일이었다.
    나는 가로수 화단의 흙을 찼다. 힘껏은 아니고 그냥 찼다. 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다시 비탈길로 들어섰다. 버스를 타든 횡단보도를 건너든 소주 병나발을 불든 결국 나는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갈 터였고 그러려면 비탈길을 올라야 했다. 가게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2층으로 올라갔다. 1층 식당과 2층 살림집은 외부계단으로 연결돼 있었다.
    짙은 색 정장을 입었던 남자는 노인의 비서였다. 그에게서 받은 명함의 회사명을 PC 통신으로 검색했지만 별다른 정보는 없었다. 박OO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작곡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술이 썼다. 아니, 달았나. 아니, 어느 지점에 이르면 술은 더 이상 음료가 아니라 교통수단에 가깝다. 사람을 저마다의 정해진 장소로 데려가는 교통수단. 내게 그곳은 건너편 집 창문에 유령이 나타나고 사람이 전파를 잡아내고 폐쇄된 오피스텔 지하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오는 곳이었다. 이야기 속의 세계. 노인이 찾는다던 CD 이야기가 나오는 작품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때 나는 PC통신에 짧은 이야기들을 끄적거리고 있었다. 아마 나우누리였을 것이다. CD 이야기는 그중 최근에 쓴 것 중 하나였다. 조금 기이하다는 걸 빼면 한밤중 PC 통신에 접속한 외로운 영혼들이 낄낄거릴 만한, 심각할 것도 중요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나름 인기는 있었다. 빨리 후속편을 올리라고 독촉을 받기도 했다.
    정확한 스토리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날 ‘나’는 CD숍에서 몇 장의 CD를 산다. 언제나 다니는 지하철역사에 있는 CD숍이었다. 그런데 집에 와보니 낯선 CD가 한 장 섞여 있었다. 처음에는 되돌려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CD를 두고 나가거나 지하철을 타지 않거나 하는 일이 반복됐고 결국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옆면에 은회색 선이 그어져 있는 CD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CD에 대해 잊었다. 가끔 CD랙을 뒤적이다가 ‘아, 이런 게 있었지’ 라고 생각했지만 그뿐이었다. 그즈음의 ‘나’는 점점 음악을 듣지 않게 됐다. 한때 거리에서 탬버린을 흔들더라도 음악 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음악보다 중요한 것이 많았다. 너무 많았다. ‘나’는 결국 CD를 모두 버렸다. 이사를 할 때마다 방은 좁아졌다. 무언가는 버려야 했다. CD는 일 순위였다. 필요가 없었다. 듣지 않으니 필요가 없고 필요가 없으니 그냥 짐이었다. 그런데도 한동안은 그 짐들을 꾸역꾸역 가지고 다녔다. 한동안은 버텼다. 거리에서 탬버린은 못 흔들더라도 CD를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음악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날들이 꽤 오래 지속됐다. 하지만 결국 ‘나’는 무릎을 꿇었다. CD를 전부 버렸다. 내가 마침내 실용주의자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 어느 날 ‘나’는 문득 책상 제일 아래 서랍에서 그 CD를 발견한다. 그것이 왜 거기 있는지, 분명 버렸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것이 ‘내’게 남은 유일한 CD라는 것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CD에 모델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음악 앨범의 형태를 띠고 있지 않았다. 그건 담뱃갑이었다. 그 이야기를 쓸 때 책상에 담뱃갑이 놓여 있었다. 담뱃갑의 옆면, 책이라면 책등이라고 불릴 부분의 위에서 1cm 정도 내려온 곳에 비닐을 벗기는 데 쓰는 얇은 은색 띠가 있었다. 별다른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재킷을 묘사할 말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우연이었다. 우연히 노인이 찾는 CD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인은 내게 마이바흐까지 보냈다.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내 방은 외부 철제 계단 바로 위에 있었는데 오래된 계단에서는 삐걱 삐걱 소리가 났다. 아무도 오르내리지 않는데도 그랬다.
    노인의 집에서 마이바흐에 오르기 직전 나는 노인의 비서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그 CD를 찾으시나요? 무슨 대단한 의미라도 있는 건가요? 남자는 글쎄요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라면서도 그런데 누구나 그런 대상 하나쯤 다들 있지 않나요 라고 덧붙였다. 내가 그런 대상이요? 하고 되묻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네, 그런 대상이요 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그 CD를 가지고 있었다면 노인은 내게 무얼 제시했을까. 만약 내가 그 CD를 찾아낼 수 있다면 노인은 내게 무엇까지 해줄 용의가 있었을까. 술에 취했으니 한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내겐 그 CD가 없고 마이바흐를 소유한 노인이 찾지 못한 걸 내가 찾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날 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바닥에 드러누워 계단이 삐걱대는 소리를 들었다. 무언가 그 오래된 계단을 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언제쯤이면 도달할까. 그것은 무엇일까. 그날 밤 나는 무언가 들뜬 마음으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에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미성컴퓨터 수리 센터입니다.”
    컴퓨터 수리를 맡겼던 27동 여자였다.
    “우리 남편 회사 부부동반 모임이 생겨서 지금 나가봐야 해요. 좀 멀리 강남이거든요. 컴퓨터는 내일 오전 중으로 가져다주세요. 수리는 잘 끝났겠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여자는 끊었다. 나도 끊었다. 강남이라니. 그런 정보가 내게 왜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꼭 이렇게 말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있었다. 애도 있고 노인도 있었다. 그러니까 성별이나 연령의 문제는 아니었다. 사실 이제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솔직히 나라고 뭐가 다른가.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단련시켜 온 거지.

 

    김민석 박사의 탈모 클리닉은 좁은 도로를 가운데 두고 24시간 김밥집과 떡집, 편의점이 늘어선 상가지구 2층에 있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본 바에 의하면 상담 자체는 무료이고 평판도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미성 컴퓨터 수리 센터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지하철역 근처였다. 대기실에는 서너 명의 중년 남자가 서로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머쓱하게 웃었다.
    “원형탈모증이 있으시군요.”
    김 박사의 첫마디였다.
    “아.”
    내 대답이었다. 내 뒤통수에는 땜빵이 있었다. 모르던 일은 아니었다. 원인은 스트레스라고, 적절히 치료하면 금세 낫는다고 했다. 그 적절한 치료를 나는 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식당이, 아니, 식당뿐 아니라 그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이 철거되고 있었다. 그리 높지 않은 고갯마루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모든 대문과 계단, 깃발과 모퉁이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중장비가 토해내는 비명이 사방을 뒤덮었다. 그때에도 나는 여전히 부모님의 곱창집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를 병원으로 모셔갔다. 병실이 나지 않아 응급실 구석에서 하루, 이틀, 사흘이 갔다. 아버지는 병원 밖 화단에서 술을 마시고 토하고 다시 술을 마셨다. 그 이야기는 철거 대책 본부 전단지에 이렇게 실렸다. ‘여자가 있던 가게 건물을 포클레인이 덮쳤다. 여자가 돌더미에 깔리고 대못에 찔려 비명을 지르는데도 철거 용역들은 폭력으로 끌어내려고만 했다. 결국 먼저 끌려나온 사람들이 돌 더미를 파헤치고 여자를 빼냈다. 여자는 거의 실신 상태였고 긴급 수술이 필요해 보였다. 그 자리에서 30년 넘게 장사를 한 곱창 가게는 폐허가 됐다.’
    간이 천막이 쳐지고 붉은 머리띠가 건네지고 대책회의가 열렸다. 나는 천막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근처 길 모퉁이에 쭈그려 앉았다. 누군가 김밥을 가져다주었다. 먹었다. 안 먹힐 것 같았는데 허겁지겁 먹었다. 사람들은 싸웠다. 다른 사람들과 싸우고 자기들끼리도 싸웠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것 같았다. 다들 무언가 결의와 신념에 차 있었다. 내가 알던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평생을 알았다. 그런 사람들이 갑자기 신념을, 결의를 가지게 됐다. 우왕좌왕하는 건 나뿐인 것 같았다. 뭐라도 해야할 것 같았지만 나는 복학도 못하고 제대로 된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고 부모님 등골이나 빼먹던 알바였다.
    결국 나는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땐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같았다. 남자는 예의 침착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나는 공중전화에 매달리듯 달라붙었다. 남자는 한참 내 말을 듣고 있다가는 잠깐만 하고 말을 끊었다. 나는 남자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덧붙였다.
    “염치없는 건 알지만 지금 생각나는 분이 선생님밖에……”
    거기서 말을 멈췄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남자가 웃었다. 정말 웃었다. 뭔가 아주 기가 막히게 시기적절한, 너무 엄청나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웃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이런 실례를, 이런 말들을 내뱉으면서 웃었다. 내 멋대로 사는 것도 좋고, 자유롭게 사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런 걸 한방에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들어버리는 게 세상에는 있었다.
    공중전화 박스 멀리 천막이 보였다. 캄캄한 밤을 배경으로 천막에는 푸르스름한 불이 들어와 있었다. 바람에, 드나드는 사람에 천막이 들춰질 때마다 무언가가 울컥울컥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건, 어머니의 상처에 나는 악취 같았다. 질 나쁜 동물의 내장 냄새 같았다. 살겠다고 때마다 입으로 밀어 넣는 밥 냄새 같았다. 땜빵 같은 게 중요할 리 없었다.
    불법 복제 게임 프로그램을 사러가곤 하던 용산전자상가 가게에서 진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땜빵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때는 머리숱이 많았다. 반쯤 빠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버거운 건 머리숱이지 땜빵이 아니었다. 그래서 잊고 살았다.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으니, 그러면 없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천막도, 철거도, 보상도 그랬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잊혔다.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결국 잊혔다.
    다만 한 가지, 일에 몰두해 밤을 새다가 고개를 들면 어디선가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모님의 곱창집 2층 내 방에 드러누워 듣던, 철제 계단이 삐걱대는 소리. 지금은 알고 있다. 그 소리는 낮 시간 동안에는 들리지 않았다. 행복하거나 즐겁거나 사랑에 빠져 있을 때도 들리지 않았다. 하루 종일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출장을 다녀오고 사람들과 시시덕거리고 주위에 불이 꺼지고 난 후 혼자가 됐을 때에야 비로소 들려왔다. 삐걱. 삐걱. 무언가가 아직도 철제 계단을 힘겹게 밟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나는 두려운 마음에 허둥댔다.
    “머리숱이 조금만 더 없어지면 보이겠는데요.”
    그것이 김 박사의 두 번째 말이었다. 앞으로는 땜빵이 내 인생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거라는 뜻이었다. 김 박사는 이어서 말했다. 동전만한 탈모반이 방심하면 나중에 머리전체로 번지게 됩니다. 모발 질환이 생명과 직접 연관되는 경우는 드뭅니다만. 물론 가발을 쓰는 방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번 쓰기 시작하면 벗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러면서 슬쩍 콧구멍을 만졌다. 김 박사는 그런 버릇이 있었다. ‘탈모의 오해와 진실’ 비디오를 볼 때부터 알고 있었다. 박사는 왼손 엄지로 왼쪽 콧방울에서 콧구멍까지를 슬쩍 눌렀다 뗐다. 처음엔 코가 가려운가 생각했다. 축농증이 있는 탈모전문의도 있을 수 있지 했다. 강박증인가도 싶었다.
    그러다 박사와 시선이 부딪쳤다. 박사는 서둘러 왼손을 팔걸이에 내려놓았다. 나도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렇게 대놓고 바라보려던 건 아니었다. 박사는 무안하게 할 생각도 아니었다. 그런데 결국 그런 꼴이 되고 말았다. 박사는 다시 말을 시작했지만 이내 더듬기 시작했다. 시중에 범람하는 발모제나 발보, 아니 발모 연고를 함부로 사용하시, 시면. 나는 박사의 왼손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썼다. 박사의 눈만 바라봤다. 시선을 돌리면 나도 모르게 왼손을 보게 될 것 같았다. 박사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박사와 나는 어색하게 서로의 눈만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박사는 말을 멈추지는 않았지만 점점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다가는 못 참겠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자료를 하나 보여드리죠. 책장을 향해 돌아섰다. 그와 동시에 왼손이 콧구멍으로 향했다. 나도 한숨을 돌렸다. 모르는 새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책장에서 뭔가를 찾는다는 듯 나를 등지고 선 김 박사를 올려다봤다. 한순간 몸에 힘이 빠지더니 박사의 어깨가 무너지듯 쳐졌다.
    박사는 마음껏 만지고 있는 것이었다. 선생님께는 그런 대상이 없습니까? 마이바흐를 타고 가서 만났던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 대상. 그 말이 왜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박사의 뒤로 책장이 올려다보였다. 의학서적들이 꽂혀 있고 탈모환자의 두피 사진들도 보였다. 환자들에게 설명할 때 사용하는 모형도 눈에 띄었다.
    “그런데 선생님.”
    나는 물었다.
    “저 CD 잠시만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김 박사는 무슨 말이냐는 듯 나를 돌아보더니 다시 책장을 바라봤다. CD 컬렉션을 가리키며 이것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두 손으로 컬렉션을 받았다. 두꺼운 종이 케이스에는 스물 네 장의 CD가 담겨 있었다. 작곡가의 이름은 박수오였다. 나란히 꽂힌 CD 중 한 장을 끄집어냈다. 옆면에 은회색 선이 그어져 있었다. 케이스를 열자 별다를 것 없는 CD가 들어 있었다. 바로 옆의 CD를 한 장 더 꺼냈다. 아까 것보다 조금 더 짙은 은회색이었다. 역시 CD가 한 장 들어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박사가 물었다.
    “아닙니다. 그냥 예전에 이 CD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구하셨나요? 아주 희귀한 거라고 알고 있는데.”

 

    “시기를 놓쳤습니다.”
    김 박사는 이런 말로 진료를 마쳤다. 땜빵을 치료하기는 무리라면서 더 이상 탈모가 진행되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지금까지처럼 잘 감추고 사는 게 최선이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선생님의 경우는 유전적 요인이라기보다는 스트레스, 음주, 흡연, 환경 호르몬 같은 것에 장기간 노출됐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호르몬이나 유전적 문제가 하나도 없는데 머리카락이 빠질 정도로 나이가 들었다는 뜻.
    토요일 오후의 지하철은 붐볐다. 문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다 어느 정거장에선가 모두 내렸다. 나는 빈자리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박수오’의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인물 정보가 먼저 뜨고. 그 아래로 작품 정보가 있었다. 24장으로 이루어진 박수오 컴플리트 컬렉션은 가장 앞에 표시돼 있었다.
    구하기 힘든 CD가 아니냐고 물었을 때 박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온라인으로 주문했는데요?”
    쇼핑몰 상품정보에서 컴플리트 컬렉션은 빈틈이나 어긋난 구석 없이 완벽했다. 선의 색깔이나 위치로 봐 노인이 찾고 있던 CD는 20번이나 21번째였을 것 같았다. 상세정보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1960 ∼ 1970년대 국내 최고의 레이블이었던 신세기 레코드에서 발매했던 컬렉션을 24장의 CD에 담았습니다. 전곡 모두 오리지널 마스터로 복원된 오리지널 음원이며 클래식 음악평론가 최길춘과 단국대 김준식 교수의 해설, 그리고 박수오의 친필악보를 비롯해 다양한 정보가 담긴 책자가 포함돼 있습니다.’
    컬렉션은 4년 전 복원됐다. 1000세트 한정으로 발매된 박스세트는 30만 원 가량으로 아직도 재고가 남아 있었다. 낱장의 가격은 1만 8천 원이었다. 그러니까 노인이 마이바흐까지 보냈던 것의 가치는 1만 8천 원이었다. 만약 내가 그 CD를 가지고 있었다면 노인이 내게 주었어야 하는 돈은 1만 8천원이었다. 물론 이제 와서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런 때는 20년 전에 지나갔다. 어쩌면 8년 전만 해도 유효했을지 모른다.
    8년 전 그 노인이 죽었다.
    노인 이야기를 다시 접한 건 신문에서였다. 흐릿한 흑백 사진이지만 노인은 별로 더 늙어보이지 않았다. 기사에는 비서에게 받은 명함 속 회사명이 적혀 나왔다. 회사명은 바뀌었지만 기자는 예전 회사명을 언급하며 80년대 도시 재개발 사업을 둘러싼 잔혹함과 인권유린의 상징이었다고 썼다. 노인은 횡령, 배임, 편취로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노령과 지병으로 집행유예를 받고 입원 중 죽었다. 노인을 죽인 지병이 무엇인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내렸다. 집으로 가는 길은 예전 부모님과 살던 동네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편의점 앞 파라솔에서 노인 둘이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술 생각이 났지만 참았다. 알코올 역시 탈모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제 술은 나를 아무 곳으로도 데려다주지 않았다. 아니, 내가 그 교통수단이 불려나올 만큼 술을 마시지 않았다. 검은 자동차가 경적을 울리며 빠르게 지나갔다. 차들은 동네 골목에서도 거리낌 없이 속력을 냈다.
    그날 이후 한 번도 마이바흐를 보지 못했다. 한번쯤 먼발치에서라도 봤을 법도 한데 내 삶의 반경이 그랬다. 그런데 마이바흐를 소유한 노인도 찾지 못했던 마지막 CD 한 장은 누가 가지고 있었던 걸까. 기사에 그런 것까지 나와 있지는 않았다.

 

    27동 9층에 사는 여자는 한참만에 문을 열었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밥 냄새가 밀려 나왔다. 밥솥에서 밥이 지어지고 있는 냄새. 나는 컴퓨터 본체를 끌어안고 서재, 사람들이 서재라고 부르기 좋아하는 비좁고 지저분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공구함을 거창하게 늘어놓고 필요도 없는 십자드라이버와 펜치, 전동공구까지 동원해가면서 본체와 모니터, 전원을 연결했다.
    “27만원입니다.”
    여자는 네? 하고 되물었다.
    “어제만 해도 단순히 파워 서플라이가 나간 줄 알았는데, 입고해서 살펴보니 전기 쇼크로 CPU가 타서 메인보드에 이상이 생겼더라구요. 다행히 그중 하나가 보증기간이 남아 있어서 그나마 좀 덜 든 겁니다.”
    “현금으로 하면 좀 디씨 안 해주시나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안 되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말했다.
    “이십오만 원에 해드리죠.”
    돈을 받으며 명함을 건넸다. 혹시라도 또 문제가 생기면 연락 달라고 덧붙였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갑자기 머리숱이 더 듬성해진 것 같았다. 9층 여자의 컴퓨터는 사실 전원 스위치 접속 불량이었다. 본체를 수리 센터에 가져갈 필요도 없었다. 교체한 부품의 값어치는 몇 백 원밖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 마음이 약해져 2만원을 깎아주었다. 아마 밥 냄새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런다고 뭐가 가려지지도 않았다. ■

 

 

 

 

 

 

 

 

 

 

 

 

 

 

 

 

작가소개 /최승린

1971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2014년 《실천문학》 신인상에 소설이 당선되어 등단.

 

《문장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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