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의 가족사 외 7편

[2015 아르코창작기금]

 

 

뱀의 가족사

 

 

종정순

 

 

    에덴에 살던 낡은 얘기가 우리 집에 살고 있다

 

    봉천산 싱아 숲에 사는 귀가 달렸다는 뱀,
    옷고름 하나 떼어주고 줄행랑치는 할머니의 뒤를 그 옷고름 물고 따라왔다는
    할머니의 할머니 시절
    그 뱀을 본 적 없으니 믿을 수는 없다만

 

    옛이야기 속엔 제 꼬리를 물고 도는 뱀이 있어
    나는 뱀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가곤 하네

 

    뱀날은 간장을 담그지 않는다는
    입과 입으로 유전하는 모계의 금기가 있는데
    장독대 돌 틈에서 말을 걸어오던 혓바닥

 

    야밤, 그것이 내 치마 속으로 들어온 거야
    억새풀 그림자 스치듯 서늘한 비늘들이 내 잠을 스쳐 놀라 깬 후
    배가 불러와 너를 낳은 거지

 

    너는 뱀의 아들, 비 맞고 이슬 젖고 바람과 같이 살아있던 자

 

    누군가가 짓밟으며 자꾸 약을 올릴 때 그 손등에 새겼던 이빨의 무늬를 기억해?

 

    피를 흘리며 목을 세워 돌아보는 이빨,
로드 킬 당한 꼬리가 길바닥을 기어간다

 

    에덴에서 여기까지 같이 온 길 위에 길이다

 

 

 

 

 

 

 

 

 

 

강화 냉이

 

 

    하늘이 땅으로 실뿌리라도 뻗듯 가랑비 내린 밭둑이다

 

    노랑나비보다 먼저 꽃다지보다 먼저 피어난 꽃,

 

    희끗희끗 동해 입은 양날톱니 잎사귀
    겨우내 머리를 치던 얼음 눈발에
    땅과 바위를 뚫는 뿌리는 깊고 날카로워진다

 

    달이 차오른 배를 안고 저녁끼니거리 절구에 보리방아 찧고 방문턱 넘다가
    아기를 낳기도 했다는 섬

 

    굽은 등처럼 엎드린 섬 하나가 바다를 물고 놓지 않는다
    머리채를 잡아채는 해풍에
    대못이 뿌리를 내린다

 

 

 

 

 

 

 

 

 

 

오디 따기

 

 

    오디는 따는 게 아니다
    빗방울이 두들겨 보고, 바람이 가장이를 이리저리 흔들어 봐도 떨어지지 않는 열매는 잠자코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
    어미젖을 물고 떨어지지 않으려 앙버티는 강아지처럼 더 젖을 빨 수 있도록,

 

    오디 따는 수고 대신 나는 뽕나무 밑에 그물망을 벌려 놓고 지나가는 바람을 데려다 인부로 부리겠다
    산 너머 새들에게 소문 퍼트려 오디 따기 체험농장에 초대를 하겠다
    오디는 귀에 좋다는데, 사라진 야생누에 뽕잎 갉아먹는 소리가 들려올지 모르는 일,
    그때까지 배불리 먹은 누에가 잠을 청하듯 나는 모처럼 게을러터지겠다

 

    고개를 쳐든 누에 따라 하늘을 베고 은빛 실 같은 시라도 한줄 뽑아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술렁거리는 공기에도 가지를 놓고 자신을 무너뜨릴 줄 아는 농익은 오디가 오늘의 일당이다
    나는 온통 입가상이를 오디 빛으로 물들이고 별들이 뽕나무 찾아오는 밤을 또한 기다릴 것이다

 

 

 

 

 

 

 

 

 

 

어머니 통장

 

 

    깜빡, 깜빡하던 당신,
    항아리 안에 숨겨둔 통장 미처
    챙기지 못하고 가신 거기,
    너무 편안해
    벌써 오시는 길 다 잊어버렸을 거야

 

    저물도록 논두렁 밭두렁에 쪼그려 앉아 뜯어 모은 미나리, 쑥, 민들레, 냉이, 질경이, 씀바귀, 달래…… 한 알 한 알 주은 밤톨, 도토리, 감자 고구마 녹두 팥 순무 땅콩 깨알 고추 콩알 수수 조…… 이산 저산 고사리, 머위, 도라지, 두릅, 원추리, 더덕, 곰취, 고들빼기, 다래, 명이, 둥굴레, 참나물, 산갈퀴……

 

    강화 오일 장날마다 노점에 펼쳐진 신문지 좌판,
    굶은 점심 값,

 

    열아홉 살인 듯도 하고 팔십 칠세인 듯도 한 행방

 

    페이지마다 빼곡하네

 

    알토란같은 어머니
    알뜰히 입금 되었네

 

 

 

 

 

 

 

 

 

 

폭설

 

 

    창호지 문이라면 밤새 들렸겠지 저 기척. 창문 앞에 와서 뜨개질 하는 소리

 

    구운 고구마를 집어 들다 앗, 뜨거, 떨어뜨린 꿈이라도 꿨던가. 오줌 쌀 뻔했네, 손을 뻗는데 얘야, 손에 얼음 들라, 흰 털실 풀어 장갑을 짜는 소리

 

    귀는 국화를 바른 창호문이 되고, 부스스 졸다 깬 눈은 창호문에 낸 눈곱쟁이 창이 되네

 

    새들은 맨발로 어디서 발톱이 오그라드는 잠을 자고 있는지, 웅숭그린 할아버지 묘에도 어서 두툼한 양털 이불을 덮어 드려야 할 텐데

 

    손놀림 빠르게 한 코 한 코 뜨개질 하는 소리, 억새 머리 사이사이 발자국 찍으며 마을로 내려오는 고라니, 담장 밑에 제 발에 꼭 맞는 푹신푹신한 흰 털신

 

 

 

 

 

 

 

 

 

 

오리무늬 화문석

 

 

    오리궁둥이 아버지, 절반의 뼈는 왕골이었다

 

    앉아서 매만져 잘게 쪼개야
    일어서는 가계의 뼈

 

    오리 한 마리가 연못 위로 고개를 쳐들고
    식구들이 목이 마를 때 오리 한 마리 또 늘었다
    처마 끝 함석 오리가 목을 쭉 내뽑던 지붕
    비가 오는 날이면
    방 안은 양동들이 찰방거리는 못으로 바뀌기도 하였는데

 

    열 손가락 지문을 지우고
    갈퀴 손끝에서 태어나던 물갈퀴

 

    고드랫돌 딸그락 딸그락
    색오리들이 물놀이를 하였다

 

    왕골이 못 박인 손
    소용돌이 지문을 연못으로
    쪼갠 왕골 뼈 물결로

 

    사라진 아버지의 지문이
    화문석에 만개했다

 

    그 연못 위에
    설핏 잠들었던 얼굴에 박힌 날개 자국,

 

    그락딸그락 바람 속으로 왕골 뼈를 세운다

 

 

 

 

 

 

 

 

 

 

두멧골

 

 

    장닭 긴 목청이 능금 속에 있다, 터진다
    별립산 그림자 저수지에 닿자 퍼들쩍 물새 몇이 물낯을 때리며 날아오른다
    저 파문을 따라 산 능선 몇 자락도 흘러내리는 한때
    날개 끝에는 뿌리치지 못한 저수지의 물들이 매달려 있다
    뒤꼍 감나무 위 전깃줄은 현악을 타는 줄이다
    뻐꾸기 까치가 튕기다 날아가면 꾀꼬리가 울고
    방앗간 지붕에 앉아 있던 개개비 무리도 통통 끼어든다
    전봇대 타고 오른 칡넝쿨을 도돌이표로 삼아도 좋겠다
    창문 앞 텃밭에는 토마토가 한상이다 콕콕,
    이슬을 쪼는 아침 햇살처럼
    토마토 볼엔 콩새들의 부리가 달짝지근하게 찍혀 있다
    복실이가 혓바닥으로 연신 빈 밥그릇을 닦고 있는 마당귀
    담장 호박덩굴엔 줄줄이 노란 스피커,
    이장님 목소리 따라 벌들이 붕붕 아침 방송 볼륨을 높인다
    상추포기 속 달팽이도 느릿느릿 촉수를 내미는 시간
    알람시계 대신에 집안으로 두멧골을 들인다
    무너진 돌담장, 아직 수리하지 못한 아침

 

 

 

 

 

 

 

 

 

 

꽃을 반성하지 않는다

 

 

    새봄,
    눈앞이 노랗다
    (노랗다니!)
    황토처럼 그러려니 하는 색으로 핀
    낡고 낡은 꽃
    보나마나 피는 꽃
    안 봐도 다 아는
    진부한 꽃,
    시집올 때 광목에 물들인
    노랑저고리를 입고 왔었다고
    할머니가 입만 벙긋하면 되뇌시듯
    교실 꽃병에도 개나리 마당에도 개나리 논둑 밭둑에 개나리 개나리
    가는 가지 붓으로 제 흥에 겨워 곳곳에 노란 칠을 한다
    병아리들도 털갈이를 하는데
    해마다 알록달록 의상 패턴이 바뀌는
    유행에 대한 동경도 없이
    왜 늘 봄 속에 처박혀 있어야만 하지?
    부정도 반성도 없이
    사소한 얘기만 아무데나 지천으로 피어난다
    어머니가 끓여주시는 노릇노릇한 누룽지 맛같이 뻔하지만
    한 번도 질린 적 없는 꽃
    늙고 늙도록
    이 강산이 환하도록
    반성하지 않는다

 

 

 

 

 

 

 

 

 

 

 

 

 

 

 

 

 

작가소개 /종정순

인천 강화 출생.
2016년 《시인동네》에 「뱀의 가족사」 외 1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뱀의 가족사』가 있음.

 

《문장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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