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 사이즈 외 6편

[2015 아르코창작기금]

 

 

더위 사이즈

 

 

이해원

 

 

    서울 34
    대구 37
    제주 31

 

    풍만한 더위가 엉덩이를 흔들면 발전소가 쓰러지고 녹조가 떠오르고 고추밭이 쓰러지고
    집집마다 전기료가 비대해진다
    에스컬레이터가 멈췄다 다이어트를 거절한 상가들
    흘려버린 냉기에 과태료가 부과된다

 

    한낮의 더위가 앞가슴처럼 부푼다
    계절을 건너지 못한 여름이 혀를 빼문다
    삼복의 전략에 내몰린 사람들은 제2의 피서지로 버스를 선호한다

 

    연일 풍만한 사이즈
    막바지 매미소리에 살이 오른다
    가슴둘레 34가 손을 흔들 때마다 전국의 체온이 올라간다
    오늘 더위의 허리는 37, 복부 비만

 

    흘러내리는 더위를 에어컨으로 졸라맨다
    허리가 한 뼘 줄어든다

 

 

 

 

 

 

 

 

 

 

파도막이

 

 

커다란 콘크리트 덩어리
온몸이 뿔이다

 

물결이 잔잔할 때
가끔 네 개의 뿔로 낚시꾼을 낚시하는 테트라포드
바람의 채찍이 등짝을 후려치면
고삐 풀린 황소처럼 달려드는 바다와 각축을 벌인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
맨 앞에서 바다와 맞선다
육중한 뿔이 한 판 뒤집기로 파도를 넘긴다
파도와 뿔이 마주칠 때
비명이 솟아오르고 살점이 방파제 위로 튄다
치명타를 입고 갈가리 흩어진 물,
뿔에 받힌 가슴이 시퍼렇다

 

파도막이는 육지의 배수진,
제자리에서 한발도 물러서지 않는다

 

저만치 바람을 앞세우고 바다가 달려온다
파도의 무게를 계산한 인간 앞에
태풍도 맥없이 돌아 선다

 

 

 

 

 

 

 

 

 

 

우주쓰레기

 

 

인간의 욕망이 미아처럼 우주를 떠돈다
퇴역한 인공위성 폭발한 로켓파편 충돌한 위성잔해
우주선에서 떨어져나간 페인트 조각까지,
초고속으로 날아다니며 위성을 파괴한다

 

발달한 과학이 흉기가 되었다

 

위성사진으로 보내온 지구의 SOS
하늘 길을 막고 지구 저궤도를 빽빽하게 둘러싼 인간의 허물이
사진 한 장에 담겼다
사람의 손에서 태어난 하늘쓰레기
지구는 숨이 막힌다

 

로켓이 발사되는 순간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카운트다운을 세며 가슴이 벅찼다
모두 쓰레기를 버리는데 동조했다

 

오늘 인공위성이 하늘로 올랐다
썩지 않는 쓰레기가 또 늘었다

 

점점 멀어지는 밤하늘
표정이 없다

 

인공물체를 피해 드문드문 별이 뜬다

 

 

 

 

 

 

 

 

 

 

약탕관

 

 

대를 물린 우리 집 주치의가 베란다 구석에 방치 되었다
의료보험카드에 밀려 먼지를 뒤집어썼지만 보약의 힘으로 아직 멀쩡하다

 

마당가 맨드라미가 꾸벅꾸벅 조는 삼복에도 숯불에 부채질하던 어머니
풍로 곁을 맴돌며 은근하게 약을 달였다
땅심 약심이 반 사발로 졸아들면
막대기 두 개가 남은 한 방울까지 짜내고 삼베 약보는 풀어졌다
철따라 바뀌던 약 냄새에 오던 병도 돌아섰다

 

어머니에게 붙잡혀 코를 막고 삼키던 탕약
그 쓰디쓴 힘으로 나는 아직 멀쩡하다

 

약탕관이 실금 하나 없이 지금도 묵직한 건
약을 달일 때 조금씩조금씩 삼켰기 때문
탕약이 졸아드는 건 약탕관이 입을 막고 몰래 마시는 것

 

뿔처럼 솟은 손잡이와 큰 입이 전부다
숯가마에서 단련된 힘으로 식구들을 지키던 뚝심과
숯불에 종일 견디던 배짱마저 건강원에 밀려
한지로 봉했던 입을 바닥에 내려놨다

 

약탕관에 물을 붓는다
고여 있던 약 냄새가 흘러나온다

 

 

 

 

 

 

 

 

 

 

페이지터너

 

 

왼손만 있는 몸
그는 바람이다

 

검은 옷을 입고 그림자가 된다
액세서리도 화려한 화장도 금지
객석은 무채색의 그를 보지 못한다

 

연주자의 호흡에 맞춰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 끝에
눈과 귀가 있다
피아니스트가 도돌이표에 갇혔을 때 잠깐 쉬어가는
연주자의 또 다른 손, 열한 번째 손가락

 

격렬하게 건반을 질주하던 손이 고요해지면
그의 손도 가라앉는다

 

분위기는 연주자가 차지하고
박수갈채를 피해 소리 없이 무대 뒤로 사라지는 투명인간

 

종이악보가 그의 생명이다

 

 

 

 

 

 

 

 

 

 

역류

 

 

    통기타와 청바지를 싣고 달리는 ITX청춘열차
    용산에서 춘천까지
    시간을 거슬러 달린다
    빛바랜 스무 살의 꿈을 채색할 때
    사라진 하늘이 달려와 합석을 하고 추억이 마주 앉는다
    강물처럼 기억이 반짝인다
    목적지를 향해 전동차는 앞으로 가고
    우리는 아스라이 멀어진 그때를 향해 페달을 밟는다

 

    높은음자리의 웃음이 쏟아지는 ‘청’
    행운을 찾던 초록 들판의 ‘춘’

 

    차창은 고속 스크린,
    바람이 터치하자 코스모스 분홍 꽃무늬가 찍히고
    함박눈이 내리다가 금세 튜브가 출렁인다
    세상의 손끝에서 흩어진 웃음이 과속으로 달려오고 흘러간 봄이 역류한다

 

    기타 줄처럼 팽팽했던 시절을 어느 역에 흘리고 왔을까
    느슨해진 시간은 나를 알아 볼 수 있을까

 

    중앙선을 넘고 하늘을 들이받던 내 청춘의 속도는 시속 200km
    길은 모두 직진이었다

 

 

 

 

 

 

 

 

 

 

강의 부록

 

 

밤새 안개를 짓는 강변북로
새벽을 복사하면 긴 강이 출력된다

 

안개는 강의 부록
자욱하게 안개를 출하하는 강을 따라 걸으면
물이 익어가는 소리,
허공에는 수없이 안개의 지문이 찍힌다

 

싱싱한 입자들은 새벽에 배달된다
촘촘한 강의 밀도에 길은 뒤집히고
도시는 실종된다

 

국제업무지구에 불안한 소음이 둥둥 떠다닌다
반대와 찬성으로 안개에 덮인 이촌동
현수막은 대변인이다
합의점을 찾지 못해 등을 보인 도시개발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조망권의 실소유자는 누구일까
질 좋은 배경으로 해마다 프리미엄이 늘어나는 강
안개의 성분을 분석하면 전망이라는 고가의 지분이 숨어있다

 

달리는 차들은 모두 안개를 한 줌씩 얻어서 통과한다

 

 

 

 

 

 

 

 

 

 

 

 

 

 

 

 

작가소개 /이해원

1948년 경북 봉화 출생.
201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문장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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