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이웃

[2015 아르코창작기금]

 

 

좋은 이웃

 

 

김수미

 

 

등장인물

정기 38세
경이 25세
서진 40세
차련 35세

 

 

무대 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문을 쓰진 않겠다.
누가 누구와 식사를 하느냐가 이 작품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최소한으로 밝혀두고 싶은 건 그들의 집이 위치한 곳은 도심이 아닌 한적한 시골이라는 거다. 앉아서 먹는 둔탁한 원목 식탁은 정기와 경이의 집으로, 모던한 서양식 식탁은 서진과 차련의 집으로 상징되면 되겠다. 방문, 욕실, 주방, 출입구 등은 인물의 등퇴장에 따라 유기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공간이길 바란다.

 

 

1. 그들이 떠나기 하루 전

 

빈 식탁.
오후 5시 45분
헤어클립을 한 속옷차림의 경이, 분주하게 무언가를 찾으며 방에서 거실로 나온다.

 

경이        여보! 여보! (점점 신경질적으로) 이봐요! (사이) 왜 대답이 없는 거야. 이 망할 놈의 인간.

 

경이, 창문으로 가서 밖을 확인하고는…

 

경이        정말이지…

 

경이, 창문을 열고 소리친다.

 

경이        뭐하는 거예요? 당장 들어와요. 당장…

 

경이, 빨리 들어오라는 손짓을 한다.
정기, 작업복 차림으로 들어오며…

 

정기        아직 일이 남았어.
경이        시계는 봤어요?
정기        서두르고 있어.
경이        손님을 초대해 놓고… 옷이 그러면 안 되죠.
정기        내 꼴이 그렇게 불만이면 당신도 나와서 돕지 그래.
경이        음식장만에 집안청소까지… 내 몸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물은 모조리 땀으로 흘렸어.
정기        축사 청소 하란 것도 당신이고, 가지치기를 시킨 것도 당신이야.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 먹자며? 잡초는 어쩔 거지? 숯은 누가 준비할 거야?

 

짧은 사이.

 

경이        그 들을 초대하자고 한 건 당신 생각이었어요.
정기        그랬지.
경이        씻기부터 해요. 냄새는 없애야 하지 않겠어요.

 

경이, 다시 뭔가를 찾는다.

 

정기        거울은 봤어?
경이        (신경질적으로) 서두르고 있어요.
정기        당신 꼴도 나랑 별반 다르지 않은데…
경이        (뭔가 말하려다 말고) 찾아도 없어서 그래요.
정기        아직도 못 정했어? 옷이라는 옷은 다 꺼내 놓고 고르더니…
경이        어제 사온 란제리 못 봤어요? 어디다 뒀는지… 분명히 들고 와서 당신한테 보여준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정기        겉에 옷 걸치면 보이지도 않을 건데, 뭐. 그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지는 않겠지?
경이        그 여잔… 격식을 갖춰서 입을 거라고요. 나도 그러고 싶어요.
정기        옷을 새로 장만하지 그랬어.
경이        안돼요. (사이) 항상… 언제나… 입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보여야 되요. 오늘은 그저 이웃을 불러서 식사 한 끼 하는 자리니까…
정기        ….

 

경이의 눈에 들어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건조해 보인다.

 

경이        화장을 끝내야겠어요.
정기        찾는 건..?
경이        당신 말처럼 오늘밤 내 속옷을 보고 싶어 할 남자는 없을 테니까요.

 

경이, 방으로 들어간다.
정기, 장식장에서 봉투를 꺼내 확인한다. 란제리다.
정기, 란제리의 냄새를 맡고는 장식장 안에 다시 숨긴다.
정기, 윗옷의 단추를 풀며 욕실로 들어간다. 휘파람까지 불며…
경이,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온다. 샤워기 물소리를 확인하고는 장식장으로가 봉투를 찾아낸다.
경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고 있던 속옷을 벗고 새 란제리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자신이 벗은 속옷을 봉투에 담아 장식장에 다시 넣는다.
경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해하며 방으로 들어간다.
사이가 흐르는 사이 창 너머로 보이던 해가 기운다.
잠시 뒤,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천둥 번개가 치더니 세찬 빗줄기가 쏟아진다.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네 사람. 차련은 술잔만 들고, 서진은 와인병과 고기 접시를, 정기 고기 접시와 술잔을, 경이는 촛대며 접시며 잔뜩 들고 뛰어 들어온다.
비에 젖은 네 사람.
차련은 쉬폰으로 된 옷이라 실루엣이 드러난다. 경이는 유행지난 정장풍의 꽃무늬 원피스가 몸을 너무 꽉 조인다. 서진은 청바지에 바쳐 입은 하얀 셔츠의 앞 단추를 가슴까지 풀었다. 정기는 구김이 간 체크 남방에 줄무늬 바지를 입었다.

 

정기        비 온다는 예보 없었는데…
서진        어차피 세상은 예고 된 대로 되지 않습니다. 예상치 못한 전개가 극        적인 효과를 주기 때문이죠.

 

차련, 소리 내 웃는다.

 

차련        우리 꼴 좀 보세요. 모두가 먹고 마실 걸 들고 있어요. (경이를 보더니) 촛대를 들고 뛰다니… 차라리 머리를 감싸지 그랬어요. 꽤 많은 시간을 들인 거 같은데…
경이        (촛대를 내려놓고) 닦을 걸 내올게요.

 

경이, 욕실로 들어간다.

 

서진        (차련에게) 우린 그만 집으로 가지.
차련        옷이 젖었는데…
서진        그러니까.
정기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았잖아요. 식사는 마쳐야죠.
서진        다음에 하죠.
차련        다음이 있을 까…. 내일이면 이곳을 떠날 건데…
서진        서로 오고 갈 수 있는 곳이야.

 

경이, 수건을 들고 나오며…

 

경이        처음 이곳에 오셨을 때는 꽃이 피는 계절이었는데… 낙엽이 지는 계절에 떠나네요.
차련        달라졌어…. 말하는 게… 본인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서진        (말을 가로채며) 좋은 이웃을 만나 잘 지냈습니다.

 

차련, 서진이 들고 온 와인을 뺏아 마신다.

 

경이        이렇게 보내드리기엔 너무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은…
서진        이사 가면 많이 생각 날 겁니다. 밑반찬이며 김치며… 맛있었어요.
차련        (수건을 받아들며) 입맛이 길들여지면 정신도 지배당한다던데…
경이        상을 다시 차릴게요.
차련        술이나 하죠. (어깨를 움츠리며) 찬기가 드는데….
정기        창고에 난로가 있어요.

 

정기, 밖으로 나간다.
세차게 내리치는 빗소리.
경이, 서진에게 수건을 건넨다.
서진, 수건을 받아들고 닦는다.

 

경이        (차련에게) 내 옷이라도….
차련        그 정도로 젖진 않았어요. (경이에게) 바꿔 입지 그래요.
경이        그 정도로 젖진….
차련        불편해 보이는데…
경이        …..
서진        잘 어울리세요.

 

경이, 표정이 밝아진다.

 

경이        다음 달이면 입동인데…
서진        추워지면 움직이기가 힘들어 질 거 같아서요.
경이        겨울이 참 예뻐요, 여기.
서진        눈이 없어도 예뻐요, 여긴. 산과 강,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라.
경이        어디서 왔는지 밤새 내린 눈이 세상의 색을 바꿔 놔요. 금세 사라질거 같지 않은 두터운 무게. 눈부신 깨끗함. 한 참을 서 있게 되요. 깨고 싶지 않는 평화로움. 눈은 모든 걸 덮어 주겠죠. 그리움까지…
서진        아름다운 말이네요.
경이        이곳 눈은 깨끗해서 먹을 수도 있어요.
차련        어색해.
경이        ….
차련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는 게 어때요?
경이        불편하지 않아요. 상을 다시 차릴게요.

 

경이, 주방으로 들어간다.

 

서진        (차련에게)그럴 거면 가.
차련        재밌어 지는데 왜?
서진        이젠 안 볼 사람들인데 불편해질 거 없잖아.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가자고.
차련        그러니까… 더더욱… 상관없잖아. 우린 떠날 사람인데…
서진        그만하자. 그러기로 했잖아.
차련        시인이라도 된 거처럼 굴잖아. 유치한 감상으로 떠들어 대는 말이         아름답다니… 당신 취향이 그 쪽인지 몰랐네.
서진        도시를 떠나 살고 싶다고 말한 건 당신이었어. 이곳에 온 것도 당신이 원해서고…
차련        시골풍경은 왜 사진이나 그림으로만 감상해야하는지 알아? 냄새… 어딜 가나 퇴비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파. 사람들한테서도 똑같은 냄새가 나. 내 몸에도 박혀버렸어. 토할 거 같아.

 

언제 왔는지 정기가 그 말을 듣고 서 있다.
비에 젖은 채로 난로를 들고….

 

천둥 번개가 치고 세찬 빗줄기가 내리친다.

 

서진        …..
차련        …..
정기        목욕을 다시 해야겠어요.

 

정기, 난로를 내려놓고 욕실로 간다.

 

차련        여긴 밤이 너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 칠흑 같은 어둠이라는 말이 내 눈 앞에 밤마다 펼쳐져. 새어 나오는 불빛조차 먹어 버렸어. 나를… 우리를…

 

비가 내리친다. 세차게… 세차게…

 

 

2. 45시간 전

 

경이와 정기의 식탁.
정오를 막 지난 시각.
침묵 속에 식사를 하는 경이, 정기.

 

정기        오후에는 버섯을 따야겠어.

 

침묵….

 

경이        올해는 비가 많이 와서 붉은 고추가 귀하네요.
정기        고춧가루 금이 많이 오르겠네.

 

침묵….

 

정기        고추를 좀 심어 볼 걸 그랬어.
경이        축사일은….

 

침묵….

 

경이        볕이 적어서 고추를 말리기 싶지 않았을 거예요.

 

침묵….

 

정기        지난 장마에 농작물이 다 썩은 줄 알았는데 장에 있을 건 다 있더라.
경이        비싸잖아요.
정기        박선생님 댁도 식사 중이겠지. (사이) 그러겠지. 때가 됐으니까.
경이        밥 모자르면 더 떠다줘요.
정기        아니. 매실 장아찌 맛이 제대로 들었네.
경이        우리 다른 얘기 좀 해요.

 

침묵…
정기, 짧은 한 숨이 나온다.
순간, 경이 ‘흑’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정기        ….
경이        떠난데요.
정기        들었어.

 

정기, 답 없이 밥을 크게 떠서 입에 넣는다.

 

경이        몰랐어요.

 

정기, 우적우적 밥을 씹는다.

 

경이        어떤 말도 없었어요. 어떤 말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어떤 말이든 해야지…

 

침묵…

 

정기        떠나지 않을 수도 있어.
경이        ….
정기        이유가 있다면….
경이        ….
정기        없으면 만들어 주지, 뭐.

 

경이, 눈물을 닦고 밥을 먹기 시작한다. 묵묵히…

 

경이        뭐가 있을까요?

 

침묵…

 

정기        우리가 좋은 이웃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경이        그게 좋겠어요.

 

경이, 수저를 놓고 일어선다.

 

경이        교양 있고 친절한 부부잖아요. 말을 하면 들어주겠죠.
정기        밥 안 먹어?
경이        빈손으로 가긴 그렇잖아요. 메실 장아찌라도 들고 가서 말을 넣어 봐요. 내일 저녁에 같이 밥 먹자고…
정기        올까?
경이        떠나기 전에 밥 한번 먹자는 데 거절 하겠어요.

 

경이, 주방으로 간다.

 

정기        옷 갈아입을 까?
경이        ….
정기        그러는 게 좋겠지?
경이        ….

 

정기, 방으로 들어간다.

 

 

3. 일주일전

 

차련과 서진의 식탁.
아침식사로 베이컨과 빵, 커피가 차려져 있다.
식사를 하는 차련과 서진.

 

차련        역사가 직접적인 질문을 던져주지 않는 시대에 개인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역사를 완성해야 하는 시대지. 인간의 역사를 들여다 본다는 것,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할까.

 

서진, 반응 없이 먹는다.

 

차련        내 말 들었어?

 

서진, 먹기만 한다.

 

차련        당신 책상에 붙어 있더라.
서진        ….
차련        요즘 쓰는 작품인가 봐?
서진        ….
차련        말 할 줄 몰라?
서진        아니.
차련        …..
서진        쓰고 있는 거 그거 아니라고.
차련        뭐 쓰는 데..
서진        그냥…
차련        무슨 내용이냐고?
서진        당신 그런 거 관심 없었잖아.
차련        있어. 그러니까 말해.
서진        지성인의 책임을 물어 볼까 해.
차련        그게 다야?
서진        내일부턴 국에다 밥 먹자.
차련        항상 먹던 아침이야.
서진        바꿔 보자고.
차련        말 해. 말 하자고, 우리.
서진        하고 있잖아.
차련        지껄임 말고, 말 같은 말. 해 본지가 언제였는지 아득해.

 

차련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잠시 정적이 흐른다.

 

서진        설익은 민주주의와 절대 권력에 해바라기가 된 매스미디어를 다룰거야. 집단이기 주의, 개인의 이기주의에 대한 경고도… 정치권력의 역사란 범죄와 집단학살의 역사 외에 아무것도 아니니까. 인류 모두는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왔다고 봐.
차련        연설문을 쓰겠다는 거야? 연극을 만들겠다는 거야?
서진        …. (다시 먹는다)
차련        논리는 인간을 움직이지 못 해.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찾아봐.
서진        작품을 보지도 않았잖아.
차련        당신 글을 알지. 혼자만 정의고 혼자만 잘났어.
서진        (계속 먹으며) 더럽게 맛없네.
차련        먹지 마. 먹지 마.
서진        먹을 땐 조용히 해. 그게 내가 배우고 자란 방식이야.

 

계속 먹기만 하는 서진.
그런 서진을 노려보는 차련.

 

차련        언제까지 갇혀 있어야 돼?
서진        ….
차련        더는 못 살아, 여기선.
서진        상황이 변하면…
차련        무슨…? 계절이 바뀌는 거? 여긴 모든 게 멈춰 있는데…. 돌아가자.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서진        변화에 지쳤다면서, 사람들을 떠나 자연에서 쉬고 싶다고 했던 말 잊었어. 차련 매일 똑 같아. 시간이 가고 있는 건지, 멈춰 버린 건지 모르겠어. 되돌이표처럼 반복되는 하루, 하루… 아침에 눈 뜨는 게 끔찍해.
서진        좋아질 거야. 익숙해지면…
차련        나 죽어. 죽어서 관에 실려서라도 여길 떠날 거야.
서진        곧 추워질 거야. 따뜻해지면…
차련        얼어 죽을 거야.

 

차련, 서진이 먹고 있는 빵을 뺏는다.

 

차련        사람들이 당신은 찾지만 난 찾지 않아. 잊혀 진 거야. 내 무대를 돌려 받고 싶어. 돌려줘.
서진        시작한 작품은 끝내야 돼.

 

서진, 다시 먹는다.

 

차련        이 곳에 오기 전에 우린 친구였어. 당신은 내가 속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우린 결혼 까지 한 거야. 하지만 여긴 당신을 바꿔놨 어. 우릴 멀어지게 한다고..

 

서진, 묵묵히 먹고 마신다.

 

차련        그만 좀 쩝쩝거려.
서진        아침 식사는 끝내자.
차련        쳐 먹어. 그거라도 해야지.

 

차련, 빵을 먹다가 먹고 있던 빵을 서진에게 던진다.

 

차련        떨어졌네. 무릎을 꿇고 아가리를 바닥에 처박고 먹지 그래. 그게 더 어울리겠다.

 

서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입으로 빵을 문다.

 

차련         짐승하고 다른 게 뭐야?
서진        인간은 다 짐승이야. 이런 거 좋아하지, 너.

 

차련, 차를 들고 일어서 서진에게 다가간다.

 

차련        목이 막힐 텐데.. 차도 마시라고…

 

차련, 차를 서진에게 붓는다.

 

차련        양보할게.

 

차련, 돌아서는데
서진, 먹던 음식을 차련에게 던진다.
차련도 음식을 서진에게 집어 던진다.
육탄전을 벌리는 서진과 차련.
옷이 찢겨지고, 머리가 헝클어진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널 부러진 차련과 서진.

 

차련        당신의 사랑을 보여줘.

 

차련, 서진의 성기를 잡는다.
서진, 차련을 끌어안으려고 하면….

 

차련        떠난다고 약속하기 전엔 안돼.

 

서진, 차련에게 키스를 하려고 한다.
으르렁 거리는 차련.
서진도 으르렁 거린다.
서로에게 거친 키스와 애무를 쏟아내는 서진과 차련.

 

 

4-1. 29일전

 

경이와 정기의 식탁
점심으로 국수를 먹고 있다.
묵묵히 말없이…

 

정기        선선해 질만도 한데…
경이        ….
정기        한낮은 여름 무더위야.
경이        ….
정기        축사에 물이라도 뿌릴까봐.
경이        ….
정기        그러는 게 좋겠지.

 

(사이)

 

경이        사람이 행동을 하잖아요.
정기        그거 모르는 사람 있어?
경이        그런데 그 행동이 말에 의해서 뜻이 달라진다는 거죠.
정기        국수 불어.
경이        그러니까… 예를 들어 당신이랑 나랑 국수를 먹어요. 어제도 먹었고 오늘도 먹잖아요. 국수 먹는 다는 행동은 같은데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뜻을 가지게 된다는 거죠.
정기        거길 또 갔어? 아침부터…
경이        국수 불어요.

 

경이, 국수를 먹는다.

 

정기        그 집 여자도 있던가?
경이        왜 물어요?
정기        그냥… 아무 일도 없더냐고… 이웃이니까…. 밤새 안녕이라는 말도 있잖어.
경이        ….

 

정기, 국수를 먹는다.

 

경이        생각할수록 근사해요.        
정기        날을 봐가며 끓이지.
경이        ….
정기        시원한 콩국수로 하지 그랬어.
경이        ….
정기        더운 날, 멸치 다시는….
경이        다 식었네요.
정기        어제는 그 집 서 뭐했어?
경이        안 먹을 거면 둬요. 개라도 주게.
정기        둘 만 있었어?
경이        누구랑 둘이요?
정기        …
경이        축사에 늦게까지 불 켜 있던데…
정기        아침에 젖을 들 짠 놈이 있어서… 봤어?
경이        불 켜 있더라고… 봤으니 말 하죠.
정기        다른 건?

 

경이, 말없이 국수를 먹는다.
정기, 말없이 국수를 먹는다.

 

 

4-2. 29일전

 

차련, 서진 점심을 먹고 있다.
마른 반찬에 맨밥이다.

 

서진        국 없어?
차련        ….
서진        반찬이게 다야?
차련        ….
서진        까끌 거려 안 넘어가.

 

차련, 물 잔을 서진 앞에 둔탁하게 내려놓는다.

 

서진        어제 늦던데…
차련        더 늦어야 했어.
서진        봤어?
차련        ….
서진        치즈랑 요구르트… 직접 만든 거래.
차련        버렸어.
서진        왜?
차련        밥만 먹자. 안 먹을 거 아니면…
서진        비 많이 맞았어?
차련        ….
서진        소나기는 피했다 오는 거야.
차련        어젠 비가 오지 않았어.
서진        이상하게 굴지 마.
차련        비도 오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그러니 본 것도 없고…. 어제는 이미 내 기억 안에 없어.

 

침묵이 흐른다.
차련, 흔들리는 손에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주며 수저를 든다.
차련, 밥을 먹는다.

 

차련        조용히… 평화로운 오후를 지키게 해 줘.

 

서진, 차련의 손을 잡는다.

 

서진        열나잖아. 어제 비를 많이 맞은 탓이야.
차련        어제는 없었다고.. 어제는….

 

차련, 어지럽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서진을 잡는다.

 

서진        침대에 눕자.
차련        아무렇지도 않아. 밥 먹어.

 

차련, 수저를 든다.
서진, 수저를 든다.

 

 

5. 29일 전. 그 날의 어제….

늦은 밤, 축사.
투둑… 꽃비가 떨어진다.
젖소의 울음소리.
정기, 볏짚을 축사로 나르고 있다.
차련, 들어온다.
정기, 차련을 보고 우뚝 멈춰 선다.

 

차련        불빛이 여기 밖에 없었어요.
정기        ….
차련        잠깐이면 되요. 잠깐만 여기 있을게요.

 

차련, 마른 볏짚에 기대앉는다.
정기, 우유를 한 잔 내민다.

 

정기        아직 따뜻합니다. 방금 전에….

 

차련, 받아 마신다.

 

차련        비릿해.
정기        진해서 그래요.

 

정기, 차련의 곁에 앉는다.
두 사람 말이 없다.
정기, 젖은 머리로 손이 가다 멈춘다.

 

차련        비열한 방법은 쓰지 않을 거라 약속해 줘요.
정기        겁에 질려 있군요. 내가 뭘 했다고….
차련        가는 게 좋겠어요.
정기        밖이 어둡다면서요. 빛을 찾아 왔다면서요.
차련        깨어 있는 사람이 있겠죠.
정기        여긴 도시가 아닙니다. 밤엔 모두 잡니다. 그래야 아침에 일을 하니까. 있다 해도 너무 멀리 있을 겁니다.
차련        ….
정기        비도 굵어졌어요. 지나가는 비라 오래 내리진 않을 겁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차련        방해를 한 거 같네요. 아무래도 가는 게….
정기        나 힘세요. 당신 남편처럼 많이 배우질 못해서 머리보다는 몸을 많이 쓰고 살죠. 도덕적이지도 못해요. 몸이 원하는 데로 사는 게 친숙하고 편해요. 하지만 미치지는 않았어요. 그랬다면 벌써 당신을… 가졌을 겁니다. 죽여서라도…
차련        겁주지 말아요.

 

어색한 둘의 침묵 사이로 빗소리만 들린다.

 

차련        방해를 한 거 같네요. 아무래도 가는 게….
정기        나 힘세요. 당신 남편처럼 많이 배우질 못해서 머리보다는 몸을 많이 쓰고 살죠. 도덕적이지도 못해요. 몸이 원하는 데로 사는 게 친숙하고 편해요. 하지만 미치지는 않았어요. 그랬다면 벌써 당신을… 가졌을 겁니다. 죽여서라도…
차련        겁주지 말아요.

 

어색한 둘의 침묵 사이로 빗소리만 들린다.

 

정기        잘 웃질 않네요. 처음 여기 왔을 땐 웃는 소리도 거침없었는데…
차련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정기        좋아합니다. 좋아해요.

 

차련, 어쩔 줄 몰라 하는 정기의 모습에 웃음이 터진다.

 

정기        어떻게 알았어요?
차련        네?
정기        아니요.
차련        여긴 관객이 없으니까. 배우는 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거든요. 거울 앞에서 떠들어 되는 것도 신물이 나요.
정기        저는 요? 내가 볼게요.
차련        여기서 연기를 하라고요?
정기        얼마나 아름다운지 당신이 더 잘 알 테지만… 처음 당신을 봤을 때 그때야 알았어요. ‘아름답다’라는 말이 세상에 왜 있는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차련, 삼키던 웃음이 밖으로 터져 나온다.

 

정기        당신의 웃음 때문에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군요.
차련        나쁜 뜻은 없었어요.
정기        사과하지 말아요. 나 같은 놈한테 그러지 말아요. 그럴만한 가치가 없어요.
차련        건강한 것도 아름다운 거예요. 손마디에 박힌 굳은살에서 책임감이 느껴지고, 구릿빛 피부는 노동의 신성함을 배워요.
정기        시골 사내는 다 나와 같은 꼴을 하고 삽니다.
차련        좋아요. 당신을 위해 보여 드리죠.
정기        나를 위해서요.
차련        (손가락으로 입을 막으며) 쉿! 극이 시작됐어요. 당신의 말을 멈추고 주인공의 말을 들어요. 당신의 생각도 멈추고 주인공의 마음을 읽어요.

 

차련,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중 ‘블랑세’의 대사 한 대목을 해 보인다. 어느새 극 속 인물이 되어서…

 

차련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녜요. 그는 신사고 또 나를 존경하고 있어요. (정신없이 말을 꾸며 낸다) 그는 친구를 원해요. 굉장한 부호는 때때로 외로운 법이거든요. 지적이고 좋은 환경에서 자라난 숙녀, 교양 있는 숙녀는 남자의 인생을 윤기 있게 해주거든요. 얼마든지! 나는 그런 것들을 줄 수 있어요. 아무리 줘도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 육체의 아름다움은 잠시에요. 곧 사라지죠. 그렇지만 정신의 아름다움, 영혼의 풍족, 마음의 애정은 없어지기는커녕 더 풍부해지는 거예요. 나는 그런 걸 모두 갖고 있어요. 시간이 지날 수록 풍부해져요! 난 가난하지 않아요. 그런 보물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데 말이에요. (억누른 흐느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온다) 나는 나를 매우 부자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내 진주를 돼지한테 던져주라니 난 참 바보였어요.”

 

차련, 연기속의 흐느낌이 이어진다. 그 흐느낌은 분노로 터진다.

 

차련        이건 미친 짓이야. 당신이 뭔데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내가 이런 냄새나는 짐승들 앞에서… ‘테네시 윌리엄스’도 알지 못 하는 당신 같은 인간 앞에서… (헛웃음을 웃다가 지우고는) 이건 아니야.
정기        다 배울게요. 당신과 가까워지고 싶어요. 대화도 하고… 그러다 보면 우리 관계도…
차련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정기        당신이 좋아할 수 있는 남자가 될게요. 방법만 가르쳐 준다면…

 

차련, 정기의 뺨을 만져준다.
정기, 차련에게 오래전부터 흔들렸던 마음을 더는 숨기고 싶지 않다.

 

차련        사람들은 얻을 수 없는 걸 원하지.
정기        사람들은 얻고 싶은 걸 얻어요.
차련        당신은… 못 해.

 

차련, 나가려 한다.
정기, 돌아서는 차련을 팔을 잡는다.

 

차련        놔.
정기        비와요.
차련        가게 해줘.
정기        지나가는 비는 잠시만 피해 있으면 되요.
차련        이러면 우리 다시는 못 봐.

 

정기, 차련의 팔을 놓는다.
차련, 나간다.
정기, 차련이 나가고 잠시… 우유통을 온 몸에 들이 붓는다.

 

 

6. 30분 전

식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서진.
경이, 차려입은 모양새로 바구니를 들고 들어온다.

 

서진        “내 인생에서 가장 절실한 노력으로 만든 웃음이었어.”
        “그 여잔, 당신의 노력을 사랑하지 않아.”
        “잊게 하려고… 절망 따위 웃음으로 가볍게 넘길 수 있기를…”
경이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해를 못 했는지도 몰라요. 웃는 다는 건 무슨 뜻인지 알아야…
서진        언제 오셨어요?
경이        방해가 됐군요. 죄송합니다.
서진        잠시 쉴 생각이었어요. 글이 안 풀릴 땐 떨어져 생각하는 게 생산적이에요.
경이        치즈를 만들어 봤어요. 요구르트도 집에서 만든 거예요. 불루베리로 쨈도 만들었는데 요구르트 드실 때 같이 드세요. 눈에 좋데요.
서진        (가져 온 것을 받아 들며) 번번이… 고맙습니다.

 

경이, 가지도 않고 어색하게 서 있다.

 

서진        아내가 외출 중이에요.
경이        가는 게 좋겠죠?
서진        커피한잔 하실래요?
경이        친절하시네요. 항상 그러세요. 참 친절하세요.
서진        잠시만…

 

서진, 주방으로 간다.
경이, 식탁주위를 돌며 어느 자세로 어느 의자에 앉을지 고심한다.
서진, 커피를 들고 나온다.

 

경이        같이 안 하세요?
서진        방금 전에…
경이        향이 다르네요.

 

둘 사이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서진        달라 보여요.
경이        남편은 모르던데… 그 사람 눈엔 안개가 껴 있나 봐요.
서진        대다수의 남자들이 그럴 겁니다. 저도 그런 걸요.
경이        ‘눈을 감아도 보일 건 보인다. 안개는 진실을 가리지 못한다.’
서진        멋진 말이네요.
경이        선생님 책에서 읽었어요.
서진        내가 그런 말을 썼던 가요?
경이        (책을 내밀며) 싸인을 받고 싶은데…
서진        희곡집을 사는 사람은 드문데…. 차라리 시집을 사지 그러셨어요.

 

서진, 자신의 책에 싸인을 해준다.

 

경이        ‘꿈을 꿀 권리를 포기하지 마라. 먹고 마시는 걸 멈추는 거와 같다.’시한부 선고를 받은 여자가 거울 앞에서 하는 말이죠. 울었어요. 난 이렇게 건강한데… 아픈 데 하나 없으니까… 이 여자보단 오래 살겠구나. 그런데 전 이미 내일이… 멈췄어요.
서진        자연이 멈추는 걸 본 적 있어요?
경이        아니요.
서진        계절은 바뀌고 나무는 자라요. 우리가 자연의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인 건 분명하다면 태어나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어요. 살아있다는 게 그걸 증명하는 겁니다.
경이        많은 걸 상상하며 살았던 시간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잘 안되요. 아침에 일어나 해야 할 일들만 머리에 꽉 차서… 매일 같은 생각… 같은 일… 같은 생각… 같은 일….
서진        고흐가 이런 말을 했어요. ‘그림을 그린다는 행동은 이미 창조다.’경이씨도 창조하는 건 맞아요. 그게 그림이냐, 젖소를 키우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경이        고흐가 누군데요?

 

서진, 선뜻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경이        바보 같은 질문이었나 보군요.
서진        아니요. 그 사람을 아는 게 별로 중요할 거 같지 않아서… 우리들 대화 중에는…
경이        우리…. 그렇군요. 우리 대화를 하고 있었군요. 궁금했어요. 선생님처럼 완벽하신 분은 어떤 말을 하고 사실까….
서진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죠.
경이        제가 말을 나눌 상대로는 부족하다는 건 알지만…. 노력은 할 수 있는데…
서진        우리 무슨 얘기 중이었죠? 그래요. 행동…. 나는 행동을 쓰는 사람입니다. 행동이 시작되면 극도 시작됩니다. 그게 연극이죠. 세상이 움직이는 겁니다. 내가 정한 행동에서 부터…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걷는 게 꼭 걷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보는 건 하나일 수 있지만 의미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결정되니까…
        ‘인간의 행동은 언어에 의해 재창조 된다. 인간의 언어는 행동에 의해 재창조 된다.’ 전 아직도 이 말과 싸우고 있어요.

 

경이, 감격에 찬 눈빛으로 박수를 친다.

 

경이        멋져요. 태어나 제가 들은 말 중에 최고였어요.
서진        부끄럽네요. 당신의 칭찬이 날 부끄럽게 만들어요.
경이        당신은 위대해요. 당신의 글은 더 위대하지만…
서진        필사적으로 짜내도 상상력은 바닥을 들어낸 지 오래고… 세상의 규칙에 길들여진 분노는 터져 나오길 주저해요. 극장을 찾는 사람들은 희곡을 들으러 오지 않아요. 아무리 아름다운 말도, 숭고한 관념도 감각적인 시간을 체험하려는 그들을 유혹하지 못하요.
경이        매일…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매일… 망설임 없이 밤은 찾아와요. 우리의 사정 따윈 상관도 안 하죠. 두려울 거 없어요. 어차피 아침도 매일… 매일…. 찾아오니까.
서진        최고의 대사네… 허…
경이        당신과 있으면 태어나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들을 쏟아 놓게 되요. 머릿속 이런 말이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에요. 당신처럼 매일 멋진 말을 하고 사는 사람들은 잘 모를 거지만…. 나에겐 굉장한 일이 일어난 거죠. 당신과 말을 하다보면 내가 꽤 가치 있게 느껴져요. 피도 뜨거워지고… 이런 게 살아있는 가치겠죠?
서진        ….
경이        제가 선물 하나 드릴 게요?

 

경이, 서진 앞에 무릎을 꿇고 바지를 푼다.
서진, 경이의 손을 저지한다.

 

서진        안돼요.
경이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서진        너무 오래전 일이라…
경이        하고 싶다는 생각만 하세요.

 

차련, 들어온다.
경이, 차련과 눈이 마주치지만 행동을 멈추지는 않는다.
차련,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손으로 틀어막고 밖으로 나간다.

 

경이        당신에게 내가 어떤 여잔지 알려주고 싶어요. 내 얘길 해 줄게요.
서진        왜 창녀가 되려하지?
경이        선물이에요. 보세요. 커졌어요.
서진        다시 작품을 쓰고 싶어. 다시… 제대로 글을…

 

서진, 경이의 애무를 받아들인다.
소낙비가 쏟아진다.

 

 

7. 23일전

이른 아침 시간.
차련,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고 있다. 슬립 차림으로…
경이, 주방에서 나온다.

 

경이        주방에 뒀어요.
차련        고마워요.
경이        일이랄 것도 없는데… 아침에 국 끊이면서 양만 더 하면…

 

경이, 차련의 뒤로 다가선다.

 

경이        예뻐요.
차련        ….
경이        머릿결도 곱고… 어깨도 하얀 게….

 

경이, 손끝으로 차련을 쓸어내린다.

 

차련        만지는 거 싫어해요, 나.
경이        여자끼린데 어때요?
차련        ….
경이        당신이 되고 싶어요. 하루를 살더라고…

 

차련, 소리 내서 웃는다.

 

경이        왜 그래요?
차련        신경 쓰지 마요. 그냥… 우스운 일이 생각나서…       
경이        절대 당신처럼 될 수는 없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 웃음이…

 

차련, 일어선다.

 

차련        우린 당신들하고 달라서 아침 안 먹어요. 잠이 더 좋다고…
경이        고맙다고…
차련        예의상 그런 거지… 불쑥불쑥… 자기 집 드나들 듯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경이        말을 하지 그랬어요.
차련        왜 모를 까… 눈치도 빠른 거 같은데….

 

차련,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차련        시간이 남아돌면 차라리 애를 가져요. 남에 아침잠 방해하지 말고…

 

차련, 방으로 들어간다.
경이, 주먹을 꽉 쥔다.

 

 

8. 두 달 전

늦은 밤.
정기와 서진, 소주를 마시고 있다.

 

서진        인류를 멸망시킬 최대의 적은 환경이 아닙니다. 불평등. 불평등입니다. 먹이사슬의 피라미드 중, 가장 밑바닥, 최하층이 없어지면 다음 단계가 밑바닥이 된다는 걸 몰라요. 그러다 점차 인류는 멸망하고 말텐데…. 인간들만 모르고 있을 뿐… 자연이 몸소 가르쳐 주고 있는 데 말이야.
정기        마을 청년들이 선생님한테 부탁하자고…
서진        술이나 마시자고.
정기        바쁘시겠지만… 우리의 입장을 대면해 주세요.
서진        그 얘긴 끝난 걸로 아는데…
정기        사람의 맘을 움직이는 그런 글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세요.
서진        결혼 한지 3년 이랬나…. 애는 왜 안 가졌어요?
정기        죽었어요. 두 번이나… 뱃속에서…
서진        착하게 산 사람일수록 대가가 잔인하지. 그게 세상의 법칙이지만…

 

정기, 술을 마신다.
서진, 술을 마신다.

 

정기        저희 편이 되 주실 줄 알았어요.               
서진        그런 글은 못 써요. 절실한 사람들이 쓰는 게 맞아. 내가 써봐야 남에 얘기지. 땅을 일구고 가축을 기르며 사는 당신들의 노동에 대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어.
정기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진 세상. 모든 인간의 자유와 권리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존중되는 세상이 와야 한다고 말한 건 뭡니까?
서진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입으로 떠들어 대는 먹물들의 이야기는 믿지 말아요. 다 거짓말 이니까…

 

차련, 방에서 나온다.

 

서진        당신 잘 왔어. 노래 하나 해.
차련        취했어.
서진        당연하지. 취하라고 마신 건데….
차련        (정기에게) 부탁한 글은 안 쓸 겁니다, 이 사람.
정기        사례는 할 겁니다.
서진        당신 들었어. 내 글을 사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어.
차련        다른 사람을 찾아가세요. 거짓말로도 당신들을 위한 글을 써줄 수 있는 사람. 이 사람은 못 해요.
서진        아무도 남을 돌보지 않는 시대에 왜 나더러 그 짓을 하라는 거야. 잘 나가지도 않고 마이너스 통장으로 사는 거지같은 예술가인 나한테… 왜?
정기        ….
서진        난 니들과 달라. 난 예술가야. 예술가라고…       

 

잠시, 침묵이 흐르고…
정기, 조용히 일어선다.

 

정기        존경했습니다.

 

정기, 나간다.

 

서진        (나가는 정기의 뒷모습에 대고) 잘 생각했어. 존경은 언제나 과거형이 맞는 거야.

 

서진, 고래를 숙인다.
차련, 서진의 곁에 앉아 품에 안는다.

 

차련        자.
서진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차련        날 밝으면 머리도 맑아질 거야.
서진        한 줄도 써지질 않아. 날 버렸어. 숭고한 영혼이 날 떠났어.
차련        쉿! 눈을 감아요.

 

서진, 차련의 무릎에 얼굴을 묻는다.
차련, 자장가를 불러준다.

 

 

9 여름 살인사건

저녁식탁.
서진과 차련, 밥을 먹고 있다.

 

서진        심심하지 않아?
차련        ….
서진        정원을 가꿔 보는 건 어때? 작은 밭을 일궈도 좋고…
차련        볕에 그을리는 거 싫어. 손톱도 망가질 테고…
서진        마당도 넓은데 개를 키울까?
차련        귀찮아.
서진        뭐라도 배워 봐.
차련        ….

 

(사이)

 

차련        다시 무대로 돌아가고 싶어.
서진        둘만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 건 당신이야.
차련        말해주지 않아도 기억하고 있어.
서진        여기선 글이 잘 써질 거 같아. 아무런 세상의 방해를 받지 않고 글만 생각할 수 있어서…
차련        인터넷은 깔자. 가끔 소식은 듣고 살아야지.
서진        우리랑 상관없는 일들이 더 많아.

 

휴대전화벨이 울린다.
차련, 전화를 확인하고 선뜩 받지 못한다.

 

서진        누구야?

 

차련, 전화를 끊는다.

 

차련        잘 못 걸린 전화.

 

다시, 전화가 울린다.

 

서진        내가 받을 게.
차련        (식탁에서 일어서며) 내가 받아.
서진        여기서 받아.

 

차련, 전화를 받으러 방으로 들어간다.
서진, 밥을 먹는다.
차련, 외투를 걸치고 나온다.

 

차련        잠깐 나갔다 올게.
서진        누군데?
차련        아는 사람.
서진        집으로 오라 그래.
차련        잠깐이면 돼.
서진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았어.
차련        당신 먼저 먹어.

 

차련, 나간다.
서진, 밥을 먹는다. 다시 밥을 뜨려다 밥그릇을 엎는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식탁에 놓인 그릇들을 확 밀쳐낸다.
서진, 망치를 찾아들고 밖으로 나간다.
잠시 후
경이가 들어온다. 상추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경이, 흐트러진 식탁을 보고 치우기 시작한다.
잠시 후
차련, 들어온다.

 

차련        당신이 여기 왜 있어요?
경이        상추… 밭에서 딴 건데 달아서…
차련        그 사람은 요?
경이        싸우셨나 봐요?
차련        주인도 없는 집에서 뭐하는 거예요?
경이        미안해 할 거 없어요. 우린 이웃이잖아요.
차련        내가 할게요.
경이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먼서 사과하세요. 남자들은 달래며 살아야 되요.
차련        내가 한다고요.
경이        화나는 일은 있었나 보죠.
차련        나갈 거면 문을 닫고 갈 것이지…
경이        여기서 살 거 아니에요?
차련        그런데요?
경이        여기서 살려면 문을 열어둬야 해요. 사람한테도… 벌레한테도… 같이 사는 거예요. 이웃이니까.
차련        ….

 

경이, 나간다.

 

차련        이건 악몽이야.

 

차련,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간다.

 

 

10 이사 온 날.

서진, 이삿짐을 들고 들어온다.
차련, 주방에서 라면을 끓여 나오며…

 

차련        먹고 하자.
서진        그럴까.

 

식탁에 마주앉는 두 사람.

 

차련        이사하는 날은 짜장면을 시켜 먹어야 되는데… 여긴 배달해 주는 데가 없네.
서진        철가방의 신화가 이렇게 깨지는 군.
차련        여기 너무 좋지.
서진        공기가 달라.
차련        그런 거 말고.
서진        사람들도 순박하고…
차련        당신하고 나, 서로가 서로만 보자나.
서진        너무 많은 시간을 다른 곳만 봤어.

 

라면을 먹는 차련과 서진.

 

서진        땡긴다.
차련        라면은 어쩌고…
서진        다시 끓이지 뭐.
차련         먹고 해.

 

서진, 식탁 밑으로 간다.
차련의 치마를 걷어 올리고 허벅지에 키스를 한다.

 

차련        라면 퍼져.

 

서진의 애무가 점점 짙어진다.
차련, 서진을 끌어안는다.
경이와 정기, 들어오다 그 모습을 본다.
사랑을 나누던 차련과 서진, 그들을 보고 놀라 옷을 추스린다.
차련, 방으로 들어간다.

 

경이        방해가 됐다면 미안해요.
정기        이웃이라… 인사나 드리려고…

 

경이, 가져온 포도를 내민다.

 

서진        (포도를 받아들고) 감사합니다.
정기        식사 중이셨나요?
경이        저희 집에 밥이 있는데 가져다 드릴까요?
서진        아니요. 괜찮습니다.
경이        여기서 사실 분 같아 보이지 않네요.
서진        살려고 온 겁니다.
경이        무슨 일 하세요?
서진        조금 있다, 저희가 인사를 하러 가겠습니다.
정기        그러는 게 좋겠네요. 바쁘실 텐데… 일 보세요.

 

경이와 정기, 밖으로 나간다.

 

서진        포도 먹을 래? (포도를 하나 먹고는) 달다.

 

서진, 방으로 들어간다.

 

 

1-2 그들이 떠나기 하루 전.

네 사람의 식탁.
그들 옆에는 난로가 피워져 있다.
저녁을 먹고 있는 네 사람, 건배를 하고 와인 잔을 비운다.

 

경이        술을 더 내 올게요.
서진        됐습니다.

 

경이, 주방으로 들어간다.

 

정기        꼭 떠나셔야 합니까?
서진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차련        (서진에게) 그만 가. 아침 일찍 차가 올 거야.
정기        좋은 이웃 이었잖아요.
서진        그만 가 볼게요. (주방 쪽을 보고) 저희 갈게요.

 

서진, 주방으로 간다.
말이 없는 정기와 차련… 어색한 시간이 흐른다.
정기, 봉투를 들고 온다.

 

정기        선물입니다. 다른 뜻은 없어요. 당신한테 어울릴 거 같아서…

 

차련, 봉투를 받아든다.

 

정기        가지 마세요. 같이 살아요. 더 좋은 이웃이 되어 드릴게요.

 

차련, 봉투에서 꺼내든 건 경이가 벗어 넣어둔 속옷이다.
경악을 하는 차련.

 

차련        당신 뭐야? 같이 살자고…
정기        이게 왜 여기 들었지?       
차련        역겨운 새끼. 구석구석에서 베어 나오는 짐승냄새…
정기        설명 할게요.
차련        내 몸에 손도 대지마. 다시 손끝이라도 대면 갈기갈기 찢어 놓겠어.
정기        뭔가 오해가…

 

차련, ‘악~’ 비명을 지른다.
서진, 뛰쳐나온다.

 

서진        왜 그래?
정기        설명을 못 하겠어요. 나도 왜 이게…

 

경이, 슬립만 입고 주방에서 나온다.

 

경이        당신이 찾는 거 여기 있어.
차련        미쳤어.
서진        마지막 인사는 이걸로 끝냅시다.
        (차련에게) 가자.
경이        사람은 많은 걸 이용하면서 살지만 가장 나쁜 건 사랑을 이용하는 거예요.
서진        취했어요.

 

차련, 경이에게 다가가 지폐 몇 장을 꺼내 던진다.

 

차련        화대야. 내 남자를 상대한…
경이        다른 얘길 할 참이었는데…        
차련        ….

 

경이        마지막 밤을 위해 준비했어요.
차련        뭐 하자는 거야?
경이        당신 남편한테 물어.
서진        ….
경이        당신을 찾아온 낮선 남자…
차련        (서진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날 봐. 날 보고 말해.
서진        ….

 

경이, 식탁에 앉는다.

 

경이        식사를 끝내죠.

 

서진, 식탁에 앉는다.

 

경이        시간이 늘어났네요. 같이 밥 먹을…

 

경이, 밥을 먹는다.
서진도 밥을 먹는다.
차련도…
정기도…
식탁에 앉는다.
식사를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막이 내린다.

 

 

 

 

 

 

 

 

 

 

 

 

 

 

 

작가소개 /김수미

1997년 「부러진 날개로 날다」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서울예술대학 극작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하였음.
한국희곡작가협회 부이사장, 서울연극협회 이사, 강동연극협회 부지부장으로 활동 중.

 

《문장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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