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없는 숲

[2015 아르코창작기금 수상작]

 

 

숲 없는 숲

 

 

김성민

 

 

등장인물

사내
처녀
농부
마누라
의원
대신1 (삶)
대신2 (죽음)
대신3 (원로)
복면들
마을사람들

 

 

시간적 · 공간적 배경

이 극의 시간은 비사회적이다. 그것이 삶과 죽음의 위치, 생각과 결과의 차이, 이쪽과 저쪽의 이미지를 말하는데 좋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시간은 없다. 시간에 대한 현상학적 이미지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극에는 마을, 명부(冥府), 숲의 세 공간이 있다. 이 극의 공간 역시 비사회적이다. 이 극은 역사 속에 드러난 (그렇게 기술된) 특정 사실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역사 속에 드러났을 법한 (그래서 기술되지 않은) 사실을 통하고 있다.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이 두 가지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실제로 체험할 수 없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극은 사유하기 위한 거리(距離)가 절실한데, 오늘날, 거리(距離)는 미래보다는 약간의 과거적 이미지에 있는 듯이 보인다.

 

 

1.    질문

 

새벽.
숲.
복면들이 사내를 닥치는 대로 때리고 있다.
정신없이 두들겨 맞는 사내.
마지막까지 크게 후려치고는 도망가는 복면들.
사내는 죽은 채 바닥에 엎어져있다.
검은 새가 날아와 곁에 앉는다.
사이.
사내, 부스스 일어난다.

 

사내       (멀리 숲 너머를 조용히 응시하며) 얘야, 어디 있니? 내 딸아!……

 

 

 

2.    온통 상처야

 

새벽.
마을 길가.
바닥에 거적을 덮은 시신이 있다.
마을 사람들 모여 웅성거린다.

 

 

마을1       이름도 모르고 가족도 없는 몸뚱이야.
마을2       이놈 저놈 붙어먹던 지저분한 화냥년이야.
마을1       염병할 년이 여기서 죽어 자빠졌어. 썩기 전에 태워.
마을2       재수 없네. 날 밝기 전에 얼른 치우자. 눈에 띄면 동네망신이지.

 

 

마을2가 거적을 들춘다.
처녀의 시신이 드러난다.

 

 

마을3       피를 많이 흘렸는데? 온통 상처야.
마을4       그래서 죽은 거야. 죽음엔 상처가 필요하니까.

 

 

갑자기 천둥이 치고 번개가 사정없이 내리꽂힌다.
불쑥 처녀의 양팔이 솟아오른다.
부르르 떨어대다 툭 떨어진다.
사람들 기겁을 한다.

 

 

마을3       우리 소관이 아니다! 가자!
마을4       (하늘을 향하여) 갑니다!

 

 

사람들 우르르 도망간다.
사내가 처녀 곁으로 다가온다.
사이.
처녀, 부스스 일어난다.

 

 

 

3.    질문

새벽.
의원(醫院).
맹렬한 빗소리.
농부가 아픈 마누라를 의원(醫員)에게 보이고 있다.
맥을 짚고 난 의원이 끄덕이며 뭐라고 얘기한다.
농부도 끄덕이며 얘기한다.
마누라도 열심히 끄덕인다.
농부가 마누라를 부축해 나간다.
곧이어 나타난 복면들, 의원을 닥치는 대로 때리기 시작한다.
정신없이 두들겨 맞는 의원.
마지막까지 크게 후려치고는 재빠르게 도망가 버리는 복면들.
죽었는지 살았는지 바닥에 미동 없이 엎어져 있는 의원.
이 모든 상황을 어둠 속에서 지켜보던 사내, 의원에게 다가간다.
사이.
의원, 부스스 일어나 앉는다.
거센 빗소리.

 

 

 

4.    소망

한낮.
숲.
망태기를 어깨에 멘 농부.
망태기 속에는 약초와 도라지가 들어 있다.
아래를 보고 위를 살피는 농부, 누군가를 찾는 것 같다.
곧 처녀가 나타난다.

 

 

농부       그만 해! 그만 하라고. 나 자꾸 헷갈려.
처녀       덥지? 요 위로 가면 계곡에 물이 있어. 그 옆엔 시원한 그늘도 있고. 나랑 같이 가서 쉬자니까.
농부       너 여우지?
처녀       (뒤돌아 엉덩이를 눈앞에 들이댄다)
농부       (외면하며) 자꾸 이러지 마.
처녀       꼬리 있어? 있냐고?
농부       여우는 아닌 것 같다.
처녀       여우면 또 어쩌려고?
농부       말해 뭐해? 잡아서 내다 팔아야지. 가죽은 두르고 고기는 먹고 내장은 약으로 쓰지.
처녀       마누라 아프다며? 병 낫게 해줘?
농부       어떻게?

 

 

처녀, 농부 입에 자기 입을 바싹 갖다 댄다.
기묘한 소리를 내어 농부를 홀린다.

 

농부       (넋 나간 듯 혼미해져서) 의원 말씀이 도라지랑 약초랑 먹이면 된다고 한다. 도라지랑 약초랑 여기 많다. (망태기를 보인다)

 

 

망태기에서 도라지 한 뿌리를 꺼내 보란 듯이 멀리 던져 버리는 처녀,
바닥에 훨썩 앉자 허벅지가 드러나고 교태의 꽃이 농염하게 피어난다.
멀거니 바라보던 농부, 정신을 차리려 애쓴다.

 

 

농부       (도리질을 해대며) 갈 거다, 난. 아픈 마누라 기다리는데, 일단 찬물 좀 뒤집어쓰고, 얼른 집에 갈 거다. (망태기를 내려놓고 위로 비칠거리며 올라간다)

 

 

농부의 뒷모습을 작정한 듯 바라보는 처녀.
곧 지친 모습의 사내가 나타난다.

 

 

처녀       (반갑게) 이제 와? 또 밤새 다닌 거야?
사내       늘 그렇지. 걷고 걷고, 날고 날고.
처녀       얼굴이 이게 뭐야? 한숨도 못 잔 거야? 배 안 고파? 무리하면 병나!
사내       먹고 자고 병드는 건 산 자들의 것이야.

 

 

처녀, 불쑥 사내 입에 자기 입을 갖다 대고 기묘한 소리를 낸다.
사내, 처녀를 밀쳐낸다.

 

 

사내       뭐하는 짓이야. 날 홀려 뭘 어쩌려고!
처녀       (민망한 듯) 설마 아저씨한테 그런 짓을 하겠어?
사내       아까 그 자한테 하는 짓 다 봤어.
처녀       아저씨한텐 아니라니까? 부족하나마 내 기라도 보태려고 그러는 건데. 너무하네, 진짜!
사내       바보 같은 짓이야. 네가 걱정할 일 아니야.
처녀       진짜 바보는 아저씨야. 소용없어. 그런 식으로 무작정 딸을 찾을 순 없는 거야.
사내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그랬지.
처녀       넓디넓은 세상에서, 모래알 같은 사람 중에서, 부모 잃고 이리저리 떠도는 어린 것을 대체 무슨 수로 찾겠어?
사내       (침묵. 서글프다) 밤새 딸을 찾아 헤매며 아홉 산과 열두 강을 건넜다. 세상은 여전히 텅 빈 채 내 눈엔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어.
처녀       텅 빈 세상에 툭 던져진 것 같은 그 슬픔? 그 고통? 알아. 안다니까? 내가 그거 전문이잖아. 그래서 말인데 나한테 진짜 좋은 생각이 있어.
사내       명부에 특별히 고해 이곳에 머물게 했건만, 감사하기는커녕 산 자보다 더 육욕에 젖어 날뛰고 있으니 널 어찌하면 좋겠냐.
처녀       육욕? 계속 너무하네, 진짜! 내가 그걸 얼마나 환멸하는데! 이건 소망이라고, 단 하나의 소망!
사내       말 뿐이야, 그것은. 차라리 명부로 돌아가. 가서 운명을 받아들여. 그게 더 나은지도 몰라.
처녀       살아생전 내 소망은 착한 사내 만나 아이 낳고 어미가 되는 것뿐이었어. 근데 내게 닥친 운명은 뭐야?
사내       운명을 원망하려거든 명부에 가서 실컷 해. 난 널 데려갔을 뿐, 네 운명 따윈 관심 없어.
처녀       그럼 내 담당도 아니면서 날 왜 덥석 데려갔어? 내 몸을 태우려는 자들에게 왜 비와 번개를 내렸어? 날 데려가면서 내 말에 귀를 기울인 까닭은? 내가 이 숲에 머물도록 왜 그토록 애 쓴 거야?
사내       그건!
처녀       그건?
사내       그건……
처녀       그건?
사내       다 내 실수야.      
처녀       어쩜 내 팔자는 이 모양이지? 난 이제 어떻게 하지? 내 소망은 어찌 이루지?
사내       시끄러워. 왜 네 팔자타령을 계속 듣고 있어야 한단 말이야.
처녀       아저씨도 그러잖아. 툭하면 팔자타령이면서. (흉내 내며) 얘야, 어디 있니? 내 딸아!
사내       그만하지 않을래?
처녀       난 평생을 떠돌았지. 구겨지고 찢겨지고 더럽혀졌지. 원래 꽃잎처럼 고왔는데, 백설처럼 깨끗했는데, 이슬처럼 맑았는데. 이젠 다 지난 일이지.
       (노래)
       나무도 새도 바람도 흘러간다.
       남은 건 남아있지 않음 뿐.
       숲 없는 숲에서 숲을 찾는다.

 

 

사내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조용히 눈물을 닦아낸다.

 

 

처녀       지나다니는 사자 아저씨들한테 배운 거야. 응? 왜 그래? 또 우는 거야?
사내       눈에 뭐가 들어갔다.
처녀       (열렬하게) 밤낮을 찾아 헤매도 떠도는 운명을 만날 순 없을 거야. 결국 아이가 죽는 순간에나 만나게 될 걸? 그게 아저씨의 운명! 하지만 죽음의 순간에 만나는 건 죽음보다 더한 고통! 그러니 아저씨 딸을 찾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어. 나한테 진짜 좋은 생각이 있다니까?
사내       (조심스럽게) 그게 뭐란 말이야?
처녀       그 방법은, 아주 기막힌 방법이야.
사내       (기대한 듯) 그게 뭐냐고?
처녀       아주 기막힌,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끝내주는,
사내       그게 뭐냔 말이야!   
처녀       그건…… 지금 말해 줄 순 없어. 날 먼저 도와줘야 해. 날 도와주기 전엔 절대 말 하지 않을 거야.
사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처녀       단 하나의 소망을 이룰 거야. 저 순진하고 어리석은 자의 아이를 낳겠어. 대신 그 자의 마누라를 명부로 데려가 줘. 마누라가 살아있음 아이를 낳아도 아이의 온전한 어미가 되기 힘드니까.
사내       뭐? 명부를 속여? 미쳤구나!
처녀       맞아. 미쳤어. 미치지 않고 어찌 소망을 이뤄? 부탁이야. 아저씨라면 가능한 일이잖아. 어차피 그 자의 마누라는 몸이 아파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
사내       허, 네 맘대로, 네가 다 정하는 거냐? 남의 운명을 어찌 알아?
처녀       염병이라잖아.
사내       염병이면 다 죽어?
처녀       웬만하면 다 죽어.
사내       허!
처녀       아이를 낳고 싶어. 아이의 어미가 되고 싶어. 내 소망은 그것뿐이야.
사내       자꾸 허튼 소리 지껄이면 당장 너부터 데려가겠다!    
처녀       그래. 차라리 그렇게 해. 이런 상태로 여기 더 있음 뭐하겠어? 날 데려가. 얼른 명부로 데려가!
사내       설령 그 자의 마누라가 없다 해도 애를 어찌 네 손으로 키운단 말이야? 넌 이곳을 벗어날 수 없는 몸인데 애를 키울 수 있을 것 같아?
처녀       이 숲에 있다고 애를 못 키워? 나 아직 다 안 죽었어. 나 할 수 있어. 한 번 해 볼 거야. 그러다 너무 힘이 들면, 그 땐 힘을 내서 다시 한 번 해 볼 거야. 부탁이야. 아저씨도 특별한 대책이 있어 잃어버린 딸을 찾으러 다니는 건 아니잖아. 아이를 낳고 어미가 되는 거, 내 소망은 그것 뿐이야.
사내       그렇게 무리를 해서 아이를 낳으려는 이유가 뭐야?
처녀       아이 생각을 하면…… 외롭지 않아.

 

 

사이

 

 

사내       내 딸을 찾을 수 있단 말이야?
처녀       날 도와주겠다는 거야?
사내       아주 기막힌,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끝내주는, 그런 방법이 있단 거지?
처녀       날 도와주겠다는 거야. 그렇지?

 

 

농부의 기척이 들린다.
처녀는 재빨리 농부의 망태기를 들고는 모습을 감춘다.
사내도 모습을 감춘다.

 

 

농부       아이고, 이제 좀 정신이 드네. 이 숲 참 요상하네. 웬 시커먼 새들이 이렇게 많아? (쫒아내는 시늉을 하며) 가! 재수 없다! 저리 가!

 

 

문득 자신의 망태기가 없어진 걸 발견하고
이리저리 찾다가 낭패한 표정을 짓는 농부.
사내가 농부 앞에 쓱 나타난다.
농부, 사내와 마주치자 크게 놀라 기겁을 하며 자빠진다.

 

 

 

5.    소망

잠시 후 같은 자리.

 

 

농부       (풀죽은) 반나절 캐놓은 도라지랑 약초를 홀라당 가져가 버렸으니. 에이, 나쁜 년! (사내를 보며) 사람을 시커먼 새로 잘못 보질 않나. 진짜 뭐에 홀려도 단단히 홀린 거지…… 난 저 아래 마을에 삽니다.
사내       난 떠돌이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을 거요.
농부       나도 뭐, 있는 듯 없는 듯 땅이나 갈아먹고 사는 신셉니다.
사내       여기까진 어쩐 일이오?
농부       아픈 마누라 달여 먹일 도라지랑 약초랑 캐러 왔는데, 이런 깊은 숲은 처음인데, 용한 약초라도 찾으면 좋겠는데, (새삼스럽게 둘러보며) 여긴 딴 세상 같네요.
사내       마누라가 왜?
농부       염병에 걸렸네요.
사내       염병이면 쉽지 않을 텐데.
농부       웬만하면 다 죽죠. 그래도 워낙 건강했으니까. 힘이 좋아 혼자서 장정 두 사람 몫을 너끈히 해치우던 사람이니 기어이 일어날 겁니다. 그럼요. 따슨 밥 해 먹이고 용하단 약초도 써보고. 그러다 병신 되면 병신인대로 같이 살면 되는 거지. 저 위에 곤드레 나물하고 더덕도 캐 가야 하는데, 마누라가 곤드레 나물이랑 더덕을 워낙 좋아하니까, 그나저나 망태기를 얼른 찾아야 하는데, 여기 있던 웬 처녀 못 봤어요?
사내       보긴 봤는데. 저 어디로 가는 것 같던데.
농부       그 년이 내 도라지랑 약초 든 망태길 가져갔는데.
사내       자네 것을 왜 가져갔을까.
농부       분명 날 못 내려가게 할 심사인데, 어림없지, 난 마누라가 있는 몸인데, 아이고, 내가 여기 이러고 있을 게 아닌데.
사내       마누라가 좋소?
농부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마누라는 당연히 좋은 것이죠. 이때껏 다른 덴 눈길 한 번 안 주고 살았습니다…… (가슴이 답답한 듯 두드리며) 아휴, 내가 왜 이러지, 숨이 다 가쁘네. 마누라 달여 먹일 도라지랑 약초를 캐러 왔다가 그만, 저기 아래서 웬 여우같은 처녀를 만났는데 그만, 그 년이 내 도라지랑 약초가 든 망태기를 홀라당,
사내       처녀가 예쁘고 실합디다.
농부       그러게요, 그러더라니까. 흐흐. 얼른 마누라한테 가야하는데, 열이 펄펄해서 날 기다릴 텐데, 곰 같은 마누라가 나밖에 모르는데, 이거 도라지랑 약초를 얼른 찾아야 하는데, 아니면 얼른 또 캐든지.
사내       애는 없소?
농부       없는데요.
사내       외롭지 않소?
농부       뭔 소리세요?
사내       외롭군.
농부       애가 없어 사는 게 간단합니다.
사내       마누라 죽고 나면 젊은 처녀 만나 애 낳고 알콩달콩 살아갈 테구만.

 

 

농부 거친 표정이 되어 사내를 쏘아본다.
사내는 농부의 거친 눈빛의 심연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농부       (갑자기 수그러들어 울먹이는 소리가 되어) 맞아요. 내가 좀 헷갈렸어요. 아픈 마누라 두고. 이거 얼른 정신 차려야지. (자기 뺨을 치며) 에이, 나쁜 놈아!
사내       애가 필요 없소?
농부       있으면 좋겠지만, 없으니까, 나는 마누라가 있어요, 마누라가 있다니까요, 마누라 있으니까 괜찮아요.
사내       소원을 빈다면 마누라하고 애하고 둘 중 누구요?
농부       마누라하고 애하고요? 둘 다 있음 좋지요.
사내       하나만 골라 보시오.
농부       하 참! 마누라는 이미 있고 애는 아직 없으니까…… 애가 있었음 좋겠네요.
사내       알았소.
농부       근데 그런 건 왜 자꾸 물으세요?
사내       애든 마누라든 언젠간 헤어지지 않겠소?
농부       (원망하듯)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계속 이상한 말만 늘어놓고, 집안에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사내       없는 애가 생길 것이오.

 

 

사내 훌쩍 사라진다.
금방 처녀가 나타나 망태기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인다.

 

 

농부       나 원 참! 이리 내!

 

 

처녀가 내민 망태기를 얼른 챙겨드는 농부.
처녀가 농부 입에 자기 입을 냉큼 갖다 댄다. 기묘한 소리를 낸다.
농부는 달뜬 표정으로 있다가 애써 뒤로 물러서려다 땅에 주저앉고 만다.

 

 

처녀       아직 해가 많이 남아 있잖아. 요 위 계곡 옆에 바람 살랑살랑 부는 데서 우리 딱 한숨만 자고 가, 응?
농부       야, 야, 이거 정말 미치겠네. 왜 그러냐, 정말!

 

 

처녀는 다시 농부에게 달려들어
집요하게 농부의 가슴을 파고들며 옷섶을 풀 기세다.

 

 

농부       내가 왜 이렇게 힘이 빠지냐, 이거. 야, 야, 나 가야 한다니까.
처녀       누가 못 가게 해? 가! 가! 가라니까?

 

 

처녀가 농부 다리 위에 올라앉아 는실난실한다.
농부는 다시 처녀를 간신히 떼어 놓고 옆으로 기어서 간다.

 

 

농부       이쁜 처녀가, 진짜 여우는 아닌 것 같은데, 마누라 도라지 캐러 온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참말 궁금하다.
처녀       자기가 딱 내 맘에 드니까 그렇지. 나랑 한숨 자고 가면 좋잖아. 한숨 자고 해 지기 전에 집으로 갔다가,
농부       갔다가?
처녀       마누라 죽고 나면 다시 오면 된다니까?
농부       마누라가 죽어?
처녀       응.
농부       미친년아!

 

 

 

6.    질문

오후.
농부의 집.
아픈 마누라가 누워있다.
문득 방안에 검은 기운이 드리워진다.
어느새 방안에 서있는 사내.
기척을 느낀 마누라가 몸을 일으킨다.

 

 

마누라   (눈을 비비며) 누구세요?

 

 

사내가 방안을 서성거리고 휘돈다.

 

 

마누라   누구요? 시커메서 잘 안 보이네.
사내       소원을 말하라.
마누라   뭐요?
사내       소원이 있을 거 아닌가. 말하라.
마누라   그걸 왜 지금 말해요? 소원이야 있지만.
사내       소원이 무엇인가.
마누라   남편 쏙 빼다 박은 애 하나 있는 거요. 근데 누구세요?
사내       죽게 될 것이다.
마누라   누가요? 나요?
사내       염병에 걸렸잖아. 웬만하면 다 죽어. 데려가려 왔다. (다시 크게 휘돈다)
마누라   어머나! 살려주세요! 날 데려가지 마세요. 아직은 아니에요. 이렇게 펄펄하다니까요?
사내       아프잖은가.
마누라   견딜만하다니까요. 죽을 만큼 아픈 것도 아닌데. 앞으론 더 착하게 살 것이니 살려주세요, 제발!
사내       누구 하나 죽어야 한다면?
마누라   죽는단 말 좀 그만 하세요. 꼭 누가 죽어야 하나요?
사내       말해 봐. 자네 가족 중에 누구 하나 죽어야 한다면?
마누라   가족 중에요?
사내       자네 가족 말이야.
마누라   가족이라야 나하고 남편 둘인데?
사내       애는?
마누라   애요?
사내       자네 소원은?
마누라   남편 쏙 빼다 박은 애.
사내       그 중 하나 죽어야 한다면?
마누라   죽어야 한다면?
사내       남편이랑 자네랑 남편 쏙 빼다 박은 아이랑……   
마누라   (헷갈리는 듯) 남편하고 나랑, 애하고 나랑, 애하고 남편이랑……
사내       그 중 하나 꼭 죽어야 한다면?
마누라   그럼 나요!

 

 

마누라, 스르르 미끄러지듯 눕는다. 혼곤하다.

 

 

사내       보이는가?
사내       들리는가?
사내       애가 보고 싶은가.

 

마누라 양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가 힘없이 툭 떨어뜨린다.
죽는다.

 

 

사내       남편 쏙 빼다 박은 애가 생길 것이다.

 

 

 

7.    소망

오후. 해가 설핏해졌다.
숲.
몸이 달아오른 농부가 정신없이 사방을 뒤지고 다닌다.
들추니 숨어있던 처녀가 튀어나온다.

 

 

농부       찾았다. 이리 와! (덤빈다)

 

 

처녀는 까르르 웃으며 농부를 발로 차 밀어내고
저만큼 떨어져 도사리고 앉는다.
옷매무새가 이미 흐트러져 농염하고 고혹적이다.
농부 다시 덤벼들며 처녀를 격하게 탐한다.
처녀가 발로 밀어내자 큰 힘에 떠밀리듯 멀리 나가떨어지는 농부.

 

 

처녀       도라지 캐러 왔으면 도라지나 캘 일이지.

 

 

농부 다시 엉금엉금 기어서 다가간다.

 

 

처녀       흥! 나를 달여 마누라 살리게? 내가 피 나오는 기침에 좋아? 마누라가 염병에 혈담이라며 도라지는 안 캐고 뭐하는 짓이야?
농부       (갑자기 시무룩해지며) 마누라.
처녀       (치마를 걷어 허벅지를 드러낸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아무도 보는 사람 없는데,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농부       (어쩔 줄 몰라 하며) 나쁜 년!
처녀       가. 그놈의 마누라가 문제지. 흔해 빠진 도라지 달여 먹이다가 마누라 죽으면 그 때 날 찾아 다시 오든지. 아님 세상천지 어디 가 불로초 찾아내어 호박같은 마누라 배꽃으로 만들어 밤낮으로 떡방아 찧고 살든지 마음대로 해. 가! 가라니까?
농부       불로초가 진짜 어디 있냐?
처녀       알아도 병, 몰라도 병. 아, 덥다. 더워죽겠어.

 

 

처녀는 느른하게 허리를 휘어 더위를 달랜다.
농부의 음심이 다시 달아오른다.

 

 

처녀       아이, 가슴이랑 배꼽 아래가 자꾸 흔들려. 누가 확 눌러줬음 좋겠는데.
농부       그냥 도라지 달여 먹이면 낫지 않을까?
처녀       도라지가 명약이면 북망산이 저리 높아? 운 좋으면 나을 수도 있겠지. 가. 가서 산도라지나 한두 뿌리 더 캐라니까? 어서 가. 아이, 몸이 왜 이러지. 이렇게 흔들리다 축축이 달아오르고. 어서 가라니까?

 

 

농부, 망태기를 집어 들고 일어선다.

 

 

처녀       시원한 계곡물에 몸이나 담가야지.

 

 

농부, 아래로 내려간다.

 

 

처녀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아무도 보는 사람 없는데,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농부 다시 나타나 처녀를 와락 덮친다.
해 그늘이 걷히고 눈부신 태양이 비쳐온다.
처녀의 교성과 농부의 힘쓰는 소리.
갑자기 어둠.
그 어둠 속에 묵묵히 걸어가는 사내와 마누라.
마누라 자꾸 뒤돌아보며 눈물 훔친다.
이내 다시 빛이 쏟아지며 사내와 마누라를 삼킨다.
눈부신 태양 아래.
처녀와 농부의 교성이 최고조에 이른다.

 

 

 

8.    질문

명부(冥府).
중앙에 두개의 커다란 기둥이 있고
기둥 위에 두 권의 거대한 책이 펼쳐진 채 놓여 있다.
삶의 기록과 죽음의 기록.
명부대신 1(삶), 2(죽음), 3(원로)과 사내와 마누라.    
마누라가 답답한 듯 몸을 뒤흔들어대다 주의를 듣는다.

 

 

대신3     적당히 좀 있어. 정신 사나워.
대신1      그만 들여보내.
대신2      인식표 확인했나?
사내       실수가 있겠습니까.
대신2      내 말이 그 말이야.
대신3     왜 저번엔 실수했잖아.
대신2      지금 그 말은 할 게 아니구요.

 

 

사내가 마누라를 데리고 들어가려 한다.
마누라, 기겁을 하며 기둥 뒤로 가 숨는다.

 

 

대신2      그래. 놀랄 수도 있지. 이리 나와.

 

 

사내가 마누라를 데리고 나온다.

 

 

대신1      뭐가 문제냐?
마누라   (말을 못하고 가슴을 친다)
대신3     쟤가 왜 저래.
마누라   (머리를 두드린다)
대신2      말 좀 하게 해!
마누라   (양 귀를 잡아당긴다)   
대신3     (자기 귀를 잡아당기며) 어이구!

 

 

사내, 마누라 귀와 코와 입에 박힌 솜을 빼주고 등을 두드려 숨을 터준다.

 

 

마누라   (숨을 토해내며) 잘못되었다구요!
사내       (소리 낮춰) 무슨 소리야?
대신2      데리고 올 때 질문했나?
사내       실수가 있겠습니까.
대신3     왜 저번엔 실수했잖아.
대신2      지금 그 말은 할 게 아니구요.
대신1      염병을 앓았지. 건강했는데.
사내       대답도 분명히 했습니다.
대신2      어떤 대답이었는데?
사내       자신이 죽겠다고 했습니다.

 

 

대신1이 고개 끄덕인다.
대신2가 고개 끄덕인다.
대신3이 고개 끄덕인다.
마누라 고개 끄덕인다.

 

 

대신3     그런데 뭐가 잘못되었다는 거야? 뭐가 문제야?
마누라   오다가 생각해보니까, 죽을 때는 몰랐는데요,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대신2      어떤 질문이었는데?
마누라   남편하고 나하고 애 중에 누가 죽어야 한다면 누가 죽을 거냐는 거예요.
대신3     고난도인데? 요즘엔 그런 유형도 있나?
대신1      자네가 애가 있었어?
대신3     남편은 어딨어?
대신2      지금 그 말은 할 게 아니구요.
대신1      애가 있었어?
마누라   우린 애가 없이 살아서 애는 없어요.
대신3     그런데 애를 선지에 넣었군!
마누라   그 때, 질문을 받았을 땐 꼭 애가 있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런 느낌이 들어서 제가 죽겠다고 대답했는데요.
대신1      왜 질문이 비현실적이야?
마누라   죽고 나니까 비로소 제정신이 드는 게, 그 때는 순간적으로 제가 감상적이 돼놔서 그런 것 같고요. 답을 바꿀 참인데 기회가 있어야죠. 이분이 워낙 일을 빨리 진행시킨 것 같다니까요.
대신2      이 말이 맞나?
사내       (사이) 죽여주십시오.
대신2      한 번 죽었음 됐지 뭘 또 죽여줘?

 

 

사내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꿇어앉는다.

 

 

대신2      음, 우리 사자가 인물도 좋고 일도 유능하게 잘하는 이야. 어쩌다 실수가 있을 때도 있지만, 지금 그 말은 할 게 아니고. 다소 불만이 있어도 할 수 없어. 여하튼 내린 답은 자네가 죽는 거 맞잖아.
마누라   제가 염병에 걸려 죽었다면 몰라도 애가 없는데 애를 위해 죽기로 했다는 게 이상한 거지요, 제 스스로가요.
대신3     그럼 애 말고 남편 대신 죽는다고 해. 그럼 문제가 없지. 근데 남편은 어딨어?
대신2      지금 그 말은 할 게 아니구요.
대신1      (책을 들척이며) 여기 이렇게 돼 있군. 애가 생기질 않아 남편 쏙 빼다 박은 애 하나 갖는 게 소원이었다.
대신2      여긴 이렇게 되어 있는데. 남편과 애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한다.
대신3     두 기록이 서로 안 맞구만. 애가 없고, 애가 있고, 애가 애 먹이네. 어떻게 된 일이야?
대신2      정 뭐하면, 여기 애 지우고 남편만 놔두지. (대신1에게) 애 지울까? 아님 거기 애 있다고 써 넣든지.
마누라   남편만 남는다 해도, 이런 생각이 드네요. 역시 질문이 잘못되었다구요. 어차피 누구나 죽는 거라면, 누가 누구를 위해 죽는다는 게 죽는 거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지요, 제 말은.
대신1, 2, 3    대단한데!
마누라   죽음에는 이유가 없든지, 아니면 이유를 묻지 말고 죽어야 하는 것인지, 그걸 잘 모르겠다는 거지요, 제 말은.
대신3     (대신들에게) 죽기 싫다는 얘긴 아니지?
대신1      그거 내 소관이야. 내 말해 주지. 거길, 자네 살던 자리를 비워 줘야 거기 또 살러 가는 사람이 있지 않겠나? 응? 쉽지? 이해가지? 그래 죽는 거지. 비워주는 거야.
대신2      그렇지. 그래서 (삶의 책을 가리키며) 저길 새로 채우려면 (마누라를 가리키며) 자네가 비워줘야 하고 (죽음의 책을 가리키며) 대신 여기 자리가 하나 생겨나는 거야. (양쪽 책을 가리키며) 저기서 여기로 옮겨오는 거라고. 이런 걸 삼라만상의 이치라고 하는 거야. 들어봤지?
마누라   그럼 (죽음의 책을 가리키며) 거기 자리는 계속 늘어날 텐데요?
대신2      그건 내 소관인데, 이 책은 꽉 차면 새 책으로 바뀌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마누라   그럼 꽉 찬 책들은 어디로 가는데요?
대신1, 2   그건 우리 소관이 아니고!
대신3     (대신들에게) 죽기 싫다는 얘기 아니야?
마누라   정리해서 말하면, 죽는 덴 이유가 없단 말씀이세요?
대신2      이유가 있지! 저길 새로 채우려면 한 자릴 비워줘야 한다니까? 대신 여기로 옮겨오는 거라고. 간단한 걸 이해 못해?
마누라   그러니까 죽는다는 건 원래 그렇다는 거네요.
대신3     죽을 때 기분이 꽤나 섭섭할 거야.
마누라   사지에 힘이 쭉 빠지는 게 몹시 허망한 기분이 들더라구요.
사내       그만 가보겠습니다.
마누라   잠깐만요. 제게 왜 그런 질문을 하셨어요?
사내       (난처한 듯) 힘도 좋다. 죽을 때가 되었으면 어떻게든 죽어야 하지 않겠나?
대신1      자네, 왜 그런 질문을 했나?
사내       죄송합니다.
마누라   왜 그런 질문을 하셨냐구요?
사내       문득 나온 질문이다. 다른 질문을 하고 데려올 수도 있었겠지.
마누라   솔직히 말해보세요. 나 죽을 때가 아닌 거죠?
사내       ……
마누라   맞죠?
사내       ……
대신1      허, 대답 안 하네.
사내       죽여주십시오!
대신2      한 번 죽었음 됐지 뭘 자꾸 죽여줘?
대신3     이번에도 또 실수야? 그런 거야? 이래서 실수연발이란 서글픈 단어가 생겨난 거구만.
대신2      일 더 크게 만들지 말고 그냥 염병으로 죽은 걸로 하지. 일단 저번 빈자리부터 채우면 저번 실수는 해결 되겠군.
대신3     숲에서 살게 한 처녀애 자리로군.
마누라   이건 행정 착오가 분명해요. 사람을 그냥 죽이네요. 의원을 불러주세요. 제가 염병으로 죽을 사람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해야겠어요.

 

 

의원, 툭 튀어 나온다.

 

 

의원       할 소린지 몰라도, 만나서 반가워. 맥 좀 보지. (꼼꼼히 마누라의 맥을 짚는다) 허! 염병인데 안 죽어. 웬만하면 다 죽는데. 끈기 있고 건강해. 염병 마치고 나면 더 튼튼해져서 장정 세 사람 몫까지 가능해.
마누라   보셨지요? 난 안 죽어요. 염병으로 안 죽는다구요!
대신1      조용! 다시 돌아갈 순 없으니, 이렇게 하지. 여기 애를 낳는다 쓰고, 애 낳다 죽는 걸로 하지. 염병으론 안 죽고. 됐지? 여기 애 집어넣고 거기 새로 생긴 빈자리에 자네 들어가면,
대신2      그럼 저번 자리는 계속 빈 상태로 있겠구만.
대신3     숲에서 살게 한 처녀애 자리로군.
대신2      이거 죽는 자와 타협해서 죽여야 하나?
의원       난 난데없이 죽었는데, 어디서들 갑자기 나타나 마구 때리더라고. 누군지 못 봤는데, 누굴까? 물어도 통 대답을 안 해. 놈들은 대체 누굽니까?
대신1      들어가라.
의원       누구냐구요? (사내에게 매달리며) 날 데려갔으니 어떤 놈인지 알 거 아뇨? 말 좀 해봐요. 어떤 놈들이요?  
대신1, 2, 3    (엄하게) 들어가라!

 

 

의원, 풀이 죽어 들어간다.

 

 

대신2      얼른 애 낳다 죽은 걸로 하자고. 거기 빈자리에 애 집어넣어. 이 일을 해결하자고.
마누라   내 애는 어떤 애죠? 나 없이 내 애가 생길 수 있어요? 없는 애를 낳다 내가 죽어요?
대신1      논리적인 문제가 발생했군.
대신1, 2, 3    이런!
마누라   내 애를 한 번 보게 해 주세요. 내 애는 어딨어요!
대신1      그거 내 소관인데, 지금 이건 큰 문제야. 없는 애가 있으려면 애가 없으면 안 되는 건데. (사내를 보며) 어떡할 거야? 사고 또 크게 쳤어!
대신3     애는 애먹이게 돼 있어.
대신2      어떻게든 이 일을 해결해야 할 것이야.
사내       (고개 숙인 채) 책임지고 해결하겠습니다.
마누라   (갑자기 서러워져서) 우리 남편 어떡해요. 마누라 보고 싶어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내 무덤 앞에서 울고만 있을 사람인데. 우리 남편 불쌍해서 어떡해요!
사내       그건 모를 일이지.
마누라   내가 왜 몰라요? 나 없음 안 되는 사람이요, 그 사람은!
대신3     그렇게 보고 싶어? 데리고 올까?
마누라   데리고 올 수 있어요?
대신3     데리고 올 수 있지. (놀리듯) 근데 여기가 어디지?
대신1, 2   지금 그 말은 할 게 아니고!
마누라   어이구, 진짜 너무들 하시네. (울기 시작한다)

 

 

사내, 대신1에게 가 뭐라고 말한다.
대신2에게도 가 뭐라고 말한다.
대신1, 2 고개를 끄덕인다.
사내, 급히 나간다.
대신1과 2는 각자 책에 눈길을 박고 생각에 잠긴다.
대신3은 울고 있는 마누라를 달래느라 쩔쩔맨다.

 

 

 

9.    소망

늦은 오후.
숲.
임신한 처녀가 시무룩한 얼굴로 앉아있다.
사내가 황급히 걸어온다.

 

 

처녀       오늘도 늦었네.
사내       배가 많이 불렀다.
처녀       그래. 그런가봐.
사내       예뻐. 동그랗고 아담한 게 널 꼭 닮았다.
처녀       그래. 그런가봐.
사내       그리 바라던 소망을 이뤘는데 얼굴에 웬 수심이 가득이야?
처녀       입이 찢어지도록 세 번 웃어봤어. 그 다음부턴 웃음이 통 나오질 않아.
사내       배부른 게 고된 모양이지. 그게 다 애가 잘 자란단 증거 아니겠나. 어미 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처녀       배부른 건 전혀 문제 되지 않아.
사내       내겐 문제가 되었어. 네가 속히 애를 낳아줘야만 해. 그 자의 애가 꼭 있어야 한다.
처녀       어떤 문제인진 몰라도 그게 뭐 문제야. 때 되면 애는 나올 텐데. 진짜 문제는 다른 문제야.
사내       그럼 문제없지. 뭐가 문제야?
처녀       (뭔가 말하려다가) 아니야. 말 안할래. 말하려니까 말이 안 나와. 말 안 해.
사내       참 말 많다. 얼른 말 해.
처녀       외로워. 여전히 외롭다고.
사내       (끄덕인다) 그 자는 가버렸어?
처녀       처음엔 어쩔 줄 몰라 횡설수설 하더니 곧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을 원망하다가 온다 간다 말없이 휑하니 가버렸어. 지금 쯤 마누라 무덤 앞에 앉아 질질 짜고 있겠지.
사내       (자책하며)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말았으니…… 모든 게 다 내 책임이다. 내가 바로 잡아놓아야 해.
처녀       아저씨 탓이 아니야. 아저씬 날 도와줬을 뿐이야.
사내       이젠 니가 날 도와줘야 한다. 애를 무사히 낳는 것과 내 딸을 찾아주는 것. 말해 봐. 내 딸은 어디 있지? 내 딸을 찾는 아주 기막힌,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끝내주는…… 얼른 말해 봐!
처녀       (머뭇거리다가) 아저씨 없는 동안, 애비 없이 떠도는 어린 계집애들을 좀 찾아봤었는데,
사내       그래? 그랬어? 그래서?
처녀       제대로 다 찾아본 건 아니고, 그러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아저씨가 그렇게 오래 찾아다녔는데도 찾을 수 없었던 걸로 봐서, 멀리 저쪽 나라로 간 건 아닐까 하는,
사내       저쪽 나라? 거기가 어딘데? 어딜 말하는 거야?
처녀       어디라고 콕 집어 말할 순 없으나 혹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사내       추측? 지금 추측이라고 했어?
처녀       추측이지만 가장 합당한 추측이 아닐까? 여길 지나다니는 다른 사자 아저씨들한테도 물어보니까 그런 계집아인 본 적이 없다고만 하니까. 그러니까 내 생각에 아저씨 딸을 찾는 방법은, 이쪽이 아닌 저쪽 나라 같은 델 찾아가서,
사내       (노려보다가) 날 속였구나.
처녀       아니야. 아니라니까. 생각해 봐. 이 나라에선 도무지 찾을 수가 없잖아. 그게 무슨 뜻이겠어?

 

 

사내, 흥분하여 주위를 맴돈다.
천둥이 치고 번개가 사정없이 내리꽂힌다.
새들이 사방에서 요란하게 울어댄다.

 

 

처녀       태교에 안 좋을 거야. 배가 딱딱해. 아이가 잔뜩 움츠린 거야. 어미가 극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됐으니.
사내       네 년에게 어떤 벌을 내릴까.
처녀       난 명부에서도 이름이 지워진 계집이야. 다시 살아난 듯 하지만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채 이 숲에 있지. 숲에서 결코 나갈 순 없는 거야. 어찌 보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지. 너무 외롭고 허망한 마음에 애를 향한 소망만 날로 커졌던 거야.
사내       언제는 숲에서라도 지낼 수 있다는 게 좋다 감사하다 날뛰더니,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다 허망하다 지껄이고, 아주 제 멋대로 제 마음껏 제 처지를 저울질 하는구나. 제 뜻을 이루려 날 간사하게 속여 놓곤, 이제 와선 뭐? 뭐가 어째?
처녀       아저씨한텐 미안해. 내가 정말 미친년이지. 근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내친 김에 소원 하나만 더 들어줘.
사내       미친년아!
처녀       욕해도 좋고 화내도 할 수 없어. 하지만 이번 소원만은 꼭 들어줘. 그것만이 모든 일이 순리대로 돌아갈 세상에 단 하나뿐인 방법이야.
사내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온다.
처녀       나도 그래. 나도 기가 차서 확 죽고 싶은 마음뿐이야. 하지만 난 더 죽을 수도 없지. 어쩜 내 팔자는 이 모양이지? 난 이제 어떻게 하지? 이 외로움은 대체 뭐지?……

 

 

처녀, 배를 꼭 끌어안고 납작하게 엎드린 채 흐느낀다.
사내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머리를 쥐어 싼 채 앉는다.

 

 

사내       일어나. 애가 눌리잖아. 애가 힘들잖아.
처녀       (몸을 일으키며) 막상 애를 갖고 보니 애가 낯설기만 해. 소망이 이뤄지니 소망 때문에 살았던 날들이 허망하기만 해. 아이를 위하여 아이 때문에 산다는 게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고 두렵고 막막하고 텅 비어 버린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 이럴 때 그 사람이라도 곁에 있어 준다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 수도 있겠지만,
사내       하! 말로만 듣던 임신부 우울증?
처녀       이 아이도 태어나 살다가 결국은 죽겠지? 그리곤 사자 아저씨를 따라 명부로 향할 테고?
사내       그래. 너와 나처럼!
처녀       그럼 그게 뭐지? 우린 결국 죽으려고 산거야? 그리도 간절히 바라던 아이였는데 아이 역시 내 곁을 떠날 운명이라니. 그러니 그건 처음부터 없던 것과 무엇이 다른 거야? 소망을 이룬 것이나 소망을 이루지 않은 것이나 어떤 차이가 있는 거야? 소원 하나 더 들어줘. 날 명부로 다시 데려가 완전히 죽게 해. 그리고 이 아인 그냥 없던 걸로 해. 그리고 그 사람 마누라는 집으로 돌려보내. 차라리 처음부터 소망이 없었던 것처럼. 그게 내 간절한 소망이야.
사내       그 때 그 때 내키는 대로 참 잘도 지껄인다. 지금의 네 소망은 내게 통하지도 않고 받아들일 수도 없어. 지금 내 마음은 아이를 갖기 전의 니 마음과 똑같아. 넌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만 할 것이야. 그러니 아이를 낳는데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해. 나를 속인 죄는 아이를 낳은 다음 엄하게 다스리도록 하겠어. 몸조심 해.

 

 

사내, 떠나간다.
날이 곧 저물고 달이 둥실 떠오른다.

 

 

처녀       (배를 만지며) 자니? 괜찮아? (사이) 너, 거기에 있는 거니?

 

 

 

10.    질문

달밤.
마누라의 무덤가.
술을 마시고 있는 농부.
사내가 농부 곁으로 와 선다.

 

 

농부       (사내를 알아보고)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사내       (무덤을 바라보며) 정성껏 잘 만들었네.
농부       예쁘지요? 동그랗고 아담한 게 마누랄 꼭 닮았어요. 앉으세요. 술이나 한 잔 하세요. (술을 따라주며) 마누라가 담근 약술이에요. 못난 서방을 해마다 철마다 살뜰하게 챙겨줬네요. 마누라 갔으니 이 술도 마지막이네.
사내       내가 마실 술은 아니네.
농부       죽어선 아프지 말라고 도라지랑 약초랑 같이 묻었는데, 마누라 좋아하던 곤드레 나물이랑 더덕도…… (자기 뺨을 철썩철썩 때리며) 울 자격도 없는 놈이야, 이놈은! 다 내 탓이지. 에이, 나쁜 놈아!
사내       자네 탓이 아니야.
농부       왜 아니에요? 마누라는 죽을 몸이 아닌데 돌아와 보니 거짓말처럼 죽어 있었어요. 다 내 탓이요. 얼른 와서 약초랑 도라지를 달여 먹였어야 했는데. 아픈 마누랄 두고 내가 어쩌자고…… 내 잘못이 커서 하늘이 천벌을 내린 건데 우리 착한 마누라가 그 벌을 대신 받고 갔네요.
사내       자네를 보았지.
농부       네, 숲에서 보셨죠.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한심한 작자가 하는 짓거릴 잘도 구경하셨겠네요.
사내       마을 의원에서 말이야. 큰 비 내리던 이른 새벽, 이 세상에 자네하고 자네 마누라하고 막 잠에서 깨어난 의원만이 깨어있을 때.
농부       그러셨어요? 그런데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사내       그 새벽에 의원이 죽었어.
농부       내가 의원을 죽이기라도 했단 말인가요? 마을에서 그렇게 수군거리는 자들이 있다는 건 압니다. 관에서도 다녀갔어요.
사내       뭐라 하던가?
농부       뚜렷한 증거가 없으니 그냥 묻고만 갔어요. 내가 새벽에 거기 있던 걸 확실히 본 사람은 죽은 의원이랑 죽은 마누라뿐이니까. 아니지, 이제 보니 또 한 분 있었네요. 궁금한데요? 그 소문이 맞던가요? 내가 죽였어요?
사내       의원을 죽인 자는 누구인가.
농부       이 마을엔 의원이 또 한 명 있었어요. 아주 용했는데 예전에 죽었지요. 예전에, 예전에 죽은 의원의 마누라와 최근에 죽은 의원이 서로 눈이 맞았더랬어요. 그래서 예전에, 예전에 죽은 의원은 충격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어요. 예전에, 예전에 죽은 의원이 죽자 그 마누라 역시 자책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홀로 남은 그 아들은 마을을 떠났어요. 다 예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그런데 최근에 예전에 죽은 의원의 아들이 다시 돌아왔어요.
사내       최근에 돌아온 예전에 죽은 의원의 아들과 최근에 죽은 의원의 죽음과 관련이 있단 말인가.
농부       모르죠. 하지만 최근에 돌아온 예전에 죽은 의원의 아들은 최근에 죽은 의원을 죽인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을 거란 소문이 있습니다. 마을에서 그렇게 수군거리는 자들이 있다는 걸 알아요.
사내       최근에 죽은 의원은 누가 자기를 죽였는지 도통 알 수 없다며 답답해했어.
농부       (사내를 바라보다) 대체 누구세요?
사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농부       내 마누라 아세요?
사내       나는 먼데까지 데려갈 뿐이야.
농부       그러니까 죽은 자를 데려가는 사자란 말입니까?
사내       그런 소문이 있지.
농부       그럼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처럼 진짜 사자도 있고 진짜 저승도 있는 게 맞아요? 그게 다 사실이었어요?
사내       그렇게 수군거리는 자들이 있다는 건 알지.
농부       헷갈립니다.
사내       나도 여전히 헷갈리네.      
농부       사자가 자꾸 눈에 보이니 죽을 때가 된 모양이네요. 이 술 먹고 기꺼이 죽을랍니다. 데려가세요. 살 생각도 없고 살 미련도 없습니다. 삶이 가뿐해 죽음도 간단합니다.
사내       자네 아이가 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농부       미친년이 아이를 낳겠다고 소란이죠?
사내       자네 아이 아닌가.
농부       아닌데요.
사내       자네 아이 맞잖아.
농부       증거 있습니까? 아무나 홀려 붙어먹는 년인데?
사내       불쌍한 미친년이군.

 

 

복면들이 나타나 농부를 닥치는 대로 때리기 시작한다.
정신없이 두들겨 맞는 농부.
마지막까지 크게 후려치고는 재빠르게 도망가 버리는 복면들.
사내는 이 모습을 말없이 지켜본다.

 

 

농부       곧 죽을 것 같네요. 날 데려가려고 온 것 맞지요?
사내       그런가 보네.
농부       그 작자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어요.
사내       누구 같은가.
농부       최근에 죽은 의원의 아들놈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지요. 내가 지 애비를 죽인 범인이라 생각하고 날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마을에서 그렇게 수군거리는 자들이 있다는 걸 알아요.
사내       또 소문인가.
농부       소문. 다 소문입니다. 그 자들이 누구인지, 왜 날 죽이러 왔는지, 난 이제 어디로 가는지, 난 아무 것도 모르고 죽습니다.
사내       그건 산 자들의 소관이 아니지.
농부       우리 마누라 잘 있어요? 보고 싶네요. 마누라한테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죽는 게 꿈만 같네요. 산 것도 꿈만 같네요. 내가 살았던 건 맞나요? 난 아무 것도 모르고 죽습니다.
사내       (보다가) 자네 애는 어딨는가?
농부       또 뭔 소리세요?
사내       내가 질문하면 자넨 답을 해야 할 것이야. 그리고 자네를 데려가는 거지. 자네 애는 어딨는가.
농부       (잠시 생각해보다가) 내 애가 있었어요?
사내       마지막 인사나 하게.

 

 

농부, 비틀비틀 일어나 무덤 주위를 한 번 돈다.
남은 술을 무덤 주위에 정성스레 뿌린다.
달이 농부의 머리와 가슴에 환하게 걸린다.

 

 

사내       가지.
농부       달이 너무 밝아요.

 

 

 

 

 

 

 

 

 

 

 

 

 

 

 

 

 

작가소개 /김성민

극단 피오르(Theatre Fjord) 대표.
한양대학교 일반대학원 연극학 석사과정 수료.
2004년 「그녀가 본 세상」이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희곡 작품으로 『비극의 일인자』, 『우주의 물방울』, 『개고기 숲』, 『표절작가』, 『눈이 보라색이다』, 『숲 없는 숲』, 『까마귀』, 『최선의 목적』 등이 있음.

 

《문장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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