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애

[2014 아르코창작기금 단편소설]

 

 

열 애

 

 

이후경

 

 

그녀는 그가 태운 마지막 승객 중의 하나였다. 그는 여객선이 아닌 화물을 운송하는 컨테이너선이었기에 애초에 승객을 태우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한 번에 20여 명씩 태우는 선원들을 제외한다면 어쩌다 태우는 선장이나 기관장의 사모님들이 승객의 전부였으니. 그가 평생 태운 승객이래야 몇 십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가 태운 마지막 승객인 그들은 ‘예술인 해양 체험단’이란 특수한 목적의 승객이었다. 사진작가 K, 작곡가 H, 그리고 작가인 P와 화가인 그녀 L이 그 구성원이었다. 그는 그들을 태운 채 화염에 휩싸였고, 그들은 그를 버리고 탈출했다. 그는 바다 위에서 꼬박 열이틀 동안 불길에 타올랐다.

 

그들이 사고를 당한 곳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기 직전인 아덴만 부근이었다. 전쟁 다발 지역이라 멀지 않은 곳에 군함들이 많이 있었고, 덕택에 그들은 쉽게 구출되었다. 그들이 네덜란드 군함에 구출되어 갑판에 선 채 불타는 그를 바라보는 동안, 항해 내내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던 돌고래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연신 바다 위로 솟구쳤다. 컨테이너 박스가 5,500개나 실린 거대한 선박이 붉은 화염과 잿빛 연기에 감싸여 다비식을 치르는 배경으로 천진하게 뛰노는 돌고래들의 모습은 부모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젖먹이의 웃음처럼 처연했다.
그는 불길 속에서도 의연했다. 그의 품안에서 안락한 승객으로만 머물렀던 그들은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만이 울지 않았다. 그녀는 그와 함께 불타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아직 그의 품안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그녀 자신이 있었다. 기실 그가 불타지 않았다면 그녀는 예정된 항해를 마치고, 미소 지으며 그에게 작별 인사를 던진 후 그를 잊었을 것이다. 어차피 그의 품안에서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렇게 잠시 만나 사랑을 나누고 헤어질 사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화형을 당했고, 그녀는 불타는 그를 자신의 두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죽을 때까지 그가 그녀 속에 살아있으리라는 것을 그때 그녀는 알았다. 세상에는 그런 연애도 있는 법이다. 강제로 끊어지는 바람에 불멸을 얻게 되는 연애. 하지만 몇 년 뒤, 그가 고철덩어리가 되어 지중해의 어느 나라인가로 팔려갔다는 뒷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는 말간 눈으로 담담하게 고개만 끄떡였다. 오래 전 헤어진 남자의 얘기를 듣듯 아무렇지도 않게, 무심히.

 

그 배를 탄 첫날, 그녀를 뺀 나머지 일행은 모두 악몽을 꾸었다. 그들은 예지력이 발달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 꿈은 하나같이 배가 난파되는 꿈이었다. 과정은 다 달랐지만 결론적으론 그들이 물에 빠졌지만 다시 살아난다는 내용이었다. 뭍의 동물인 인간이 발 디딜 땅이 없는 물위로 나설 때 본능적으로 갖는 두려움에 그런 꿈을 꾸게 되었을 거라고 그때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 사고가 나고, 전원이 구출되자 그 꿈들은 예지몽으로서의 권위를 되찾았다.
그녀 혼자만 악몽을 꾸지 않았다. 악몽은커녕 그녀는 첫날부터 꿈도 없는 단잠을 잤다. 뭍에서는 하루도 꿈 없이 자는 날이 없을 정도로 꿈에 시달리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그의 품에 안기자마자 그녀를 묶고 있던 뭍의 끈들은 스르르 제풀에 녹아버렸다. 기어코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난 것처럼 비로소 그녀는 편안히 숨을 쉬었다. 다른 어떤 사내도 기억나지 않았다. 충만하고, 행복했다. 악몽 따위는 깃들 틈이 없었다. 직감이나 예지력 따위도 배 밑바닥에 붙어 있을 빨판상어에게나 던져주었다.
그건 단순한 숙면이 아니었다. 태어나기 이전 어머니 자궁 속의 잠처럼 깊은 잠, 그녀는 그런 잠을 그의 품안에서 누렸다. 그의 심장소리처럼 나직하게 들리는 엔진 소리와 아무리 거대한 배라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미세한 흔들림은 그녀에게 요람과도 같았다, 그 속에서 그녀는 심연처럼 깊은 잠을 잤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런 잠은 없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잠든 열하루의 밤이 한결같았다. 단 한 번도 그녀는 꿈을 꾸지 않았고, 자다가 눈을 뜨는 일조차 없었다.

 

불타는 그를 두고 떠나와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녀는 내내 잠을 잤다. 기운이 없어 어떤 일도 할 수 없었고, 해일처럼 잠만 쏟아졌다. 식구들은 사고의 충격이 회복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고, 자고, 또 잤다. 그러나 뭍의 잠은 불안한 잠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땅 위에서 그녀는 멀미를 느꼈다. 땅이 흔들리지 않으니 그녀의 잠이 흔들려 꿈을 만들었다. 그녀는 다시 꿈에 시달렸다. 하나같이 악몽이었다. 그녀 혼자 탄 빈 배에 헛것들이 나타나거나 공포에 질린 채 끝을 모르는 검고 깊은 바다에 빠져들어 가거나 상어들의 날카로운 이빨에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꿈이었다. 한 번씩 자다 깨면 식구들이 빠져나간 조용한 집이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하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종일 잘 수 있도록 두꺼운 커튼을 쳐놓고 간 집은 대낮에 깨어도 어두웠다.
닷새를 그렇게 보낸 뒤,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기운을 차려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가 그리워서 더 이상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그를 못 만난다면 그의 형제라도, 그의 친구라도, 그와 같은 종족 누구라도 만나고 싶었다. 그녀는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배가 타고 싶었다. 사고 난 배에서 간신히 구출된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아직 자신이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몸만 내린 것인지도 몰랐다. 다시 배를 타야 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무리 작은 배라도 반드시 다시 타고 나가 돌아와야 했다. 그때까지는 하선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가장 싸게, 가장 오래 탈 수 있는 배를 찾았다. 있었다. 부산에서 오사카로 가는 페리는 비행기로 두 시간도 안 걸리는 일본을 열일곱 시간에 걸쳐 항해했다. 배를 그만큼 탈 수 있다는 말이었다. 거기다 비수기인 4월이라 게스트하우스 숙박까지 도합 5박6일의 일정이 단돈 십 몇 만원에 나와 있었다. 다시 배를 탈 수 있다니, 그녀는 그 일을 기적으로 받아들였다. 열일곱 시간씩 오가면 서른 네 시간 동안 배를 탈 수 있다는 기쁨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예약을 해버렸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그 일을 얘기하자 남편은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몸도 아직 안 나았는데. 그러나 남편은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의 품안에 있는 내내 그녀는 낮이면 갑판에 나가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심청(深靑)의 물빛 아래로 너울거리며 지나가는 커다란 물고기들의 실루엣도 매혹적이었지만 쉬지 않고 날아다니는 날치들을 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 날치는 기록상으론 400미터까지 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투명한 날개를 지니고 새처럼 오래 날아가는 물고기들, 기이하고, 신비로웠다. 바다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모든 번민이 사라졌다. 그토록 그녀의 발목을 잡던 많은 일들이 물거품 같았다. 저 남녘 바닷가 어딘가에 방 한 칸 마련해 홀로 살고 싶은 꿈도 더 이상 이기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에는 날치 같은 물고기도 있지 않은가? 물고기인데도 기이한 지느러미를 가져서 저렇게 물 밖으로 튀어 오르며 살기도 한다. 사람의 수는 수십억이나 되는데 기이한 숨통을 지니고 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은가? 날치가 저렇게 튀어 오르지 못했다면 벌써 다른 물고기의 배 속으로 모조리 들어가 씨가 말랐을 것이다. 저것은 어쩔 수 없는 생존의 욕망이다. 자신의 욕망 또한 그렇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으면서도 늘 주저앉곤 했다.
그렇게 오래도록 바다를 들여다보고 있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이 오곤 했다. 바다에 빨려들어 자기도 모르게 뛰어들고 싶어질 수도 있으니 너무 오래 바다만 보고 있지 말라는 주의는 누차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런 경계의 순간까지 이르러 물에 젖은 몸을 털 듯 몸서리를 치며 그것에서 벗어나는 일이 그녀에게도 몇 번 있었다.
해가 저물 때면 브리지로 올라가 오래도록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며 해가 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둥글게 보이는 수평선으로 해가 넘어가는 모습은 땅에서와는 달리 이 지구가 둥근 행성이라는 실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것도 온몸에 출렁거리는 물을 달고 있는 물의 행성이라는 것을.
아무런 가림막 없이 통으로 트인 바다와 하늘을 보고 있으면, 저쪽에서는 비가 내리는데 이쪽에서는 해가 빛나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인도양에서는 바다에 내리꽂히는 반쪽짜리 무지개를 보기도 했다. 밤하늘도 그런 장관을 품고 있었다. 하늘에는 별들이 가득한데 저 멀리에서는 번개가 번쩍거리며 내리꽂히고 있는 광경. 하늘조차 하나의 하늘은 아니었다. 아니, 하나의 하늘이 수많은 모습들을 품고 있었다.

 

말라카 해협에 만월이 떠오르던 그 밤을 그녀는 무덤 속까지 품고 갈 것이었다. 수평선은 구름에 덮여 달이 뜨는 순간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구름층을 벗어나는 순간 드러난 달의 모습은 그녀의 숨을 멎게 했다. 흐린 밤하늘에 떠오른 담뱃불 빛깔의 둥근 달. 태초에 부글거리는 죽음의 바다에서 귀한 생명의 알이 탄생하는 순간이 저러했을까?
그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괴기스러웠다. 네 명의 일행은 뜨는 달을 바라보며 브리지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누가 먼저인지 자연스레 드러눕기 시작했다. 그들은 밤바다를 항해하는 배 위에 그렇게 누운 채 밤하늘을 항해하는 달을 내내 올려다보았다.
음악을 하는 H가 말없이 자신이 듣던 mp3를 옆으로 건넸다. 데이빗 보이가 부르는 ‘네이처 보이(Nature boy)‘가 흐르고 있었다. 한 소년이 있었네 마법에 걸린 듯 이상한 소년이었지 그 소년은 멀리 멀리 대륙과 대양 위를 떠돌아 다녔다네,
그 음악을 볼륨 가득 높여 귀에 담은 채 그 신비스런 달을 보고 있자니 그녀의 온몸으로 전율이 흘렀다. 열정적인 남성 가수의 묵직하면서도 강렬한 목소리가 바다로 퍼져나가 달을 휘돌아 다시 그녀의 몸을 감쌌다. 그녀가 P에게 음악을 건네자 사진을 찍는 K가 그녀에게 보고 있던 망원경을 건넸다. 망원경을 눈에 대자 하얗고 커다란 달이 와락 덮쳐와 그녀는 잉태라도 할 것 같았다.
그녀는 검은 물고기 떼 같은 어두운 밤바다를 지켜보았다. 인도양의 밤, 해적이 따라붙지 못하게 배의 속도를 높인 탓에 바람은 참혹하리만치 거세고, 물결은 끝없이 일렁거렸다. 자신의 존재조차 잊을 만큼 황홀했다. 그러나 동시에 참담하고 쓰라렸다. 그녀는 자신에게 이 밤의 한 조각도 그려낼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배를 다시 탄다는 생각만으로 그녀는 기운을 회복했다. 일어나 생기 있게 생활을 꾸리고, 여행 준비를 했다. 그리고 기어이 다시 배 위에 올랐다. 대양이 아닌, 현해탄의 좁은 바다를 건너가는 것이었지만 열일곱 시간 내내 그녀는 갑판 위를 들락거리며 회색빛 흐린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았다. 오사카에 내려 보낸 나흘은 거대한 수족관인 ‘카이유칸’에서 만타레이와 해파리만 보면서 보냈다. 그 시간은 바다와 배, 오직 그를 그리워하는 시간이었다.
다시 열일곱 시간을 타고 오는 돌아오는 배에서 그녀는 아무도 몰래 소주 한 잔을 바다 위에 부었다. 그에게 보내는 마하주(馬下酒)였다. 타고 갈 말 아래서 나누는 작별의 술 마하주, 그녀는 연애를 끝낼 때 반드시 작별 인사를 하는 예의 바른 여자였다.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했다면 그 연애는 그녀에게 끝나지 않은 거나 다름없었다. 마침표를 찍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문장처럼.
그를 앞에 두지 않은 마하주는 작별 인사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잠시의 이별은 할 수 있었다. 하선, 뭍에 발을 내리는 일만은 가능해진 것이었다. 간절히 배를 타고자 했던 그녀의 갈망은 허영이 아니었다. 다시 배를 타고 와서야 그녀는 비로소 제대로 뭍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뭍에 상륙한 것이었다.

 

폭발이 있기 직전, 선실의 지극히 평화롭던 순간이 그 뒤로도 그녀에게는 자주 떠올랐다. 일상의 평온을 만날 때면 더욱 그랬다. 그때가 바로 그랬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물이 지나칠 만큼 평온했다. 선창으로 보이는 대양의 바다도 다림질한 천처럼 일렁거림 하나 없이 코발트블루로 눈부셨다.
그 전날 그들은 인도양을 벗어났다. 이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지중해도 갈 것이었다. 혼자 선실에 앉아 ‘모비 딕’을 읽고 있던 그녀는 그 비현실적인 평화가 문득 낯설게 느껴져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고요했다. 웅웅거리는 엔진소리마저 평화로운 대낮 꿀벌의 잉잉거림처럼 졸음을 불러올 만큼 고요했다. 햇살은 선실에 쏟아져 한여름 대낮에 산사를 찾아든 듯 적막감마저 불러일으켰다. 바다 위를 시속 24노트라는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는 실감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었다.
처음 볼 때 낯설게만 느껴졌던, 버튼을 눌러야 열리는 책상 서랍이나 체인이 달려 책상에 묶여있는 의자도 그 사이 길이 들어 당연하게 여겨왔는데 지극히 고요한 그 풍경 속에서는 다시 이상하게만 여겨졌다. 체인 따윈 달지 않은 채 냉장고 위에 놓인 쟁반과 그 위에 놓인 유리잔들이 오히려 정상으로 느껴졌다. 냉장고 위의 저 유리잔이 깨질 흔들림이란 없을 거라고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배는 너무나 고요하게 잔잔한 바다 위를 가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어디선가, ‘쾅’하는 폭발음이 들려왔다. 박격포 소리 같은 그 굉음이 울리는 동시에 그녀의 눈앞에서 그 유리잔이 떨어지며 박살이 났다. 그녀는 그 광경에 놀랄 수조차 없었다. 그녀의 눈길이 ‘모비 딕’에만 꽂혀 있었더라도 그녀는 정상적으로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냉장고 위의 유리잔을 바라보며 그것들의 평화로움에 감탄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그런 생각을 누군가 읽고 조롱하듯이 그것들이 폭발음과 함께 부서져 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눈앞의 광경이 너무 실감이 안 나서 비명조차 내뱉지 못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 장면은 그 뒤로도 그녀의 뇌리에서 몇 번이고 다시 되살아나곤 하였다. 무엇인가가 평화롭다고 느낄 때면 기시감이 들면서 그 장면이 떠올랐다.
박살난 것은 유리잔만이 아니었다. 방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녀의 눈앞에서 떨어지며 바스러졌다. 옆 선실 사이에 세워진 벽도 무너져 옆방의 귀퉁이가 보였다. 바닥은 순식간에 유리 조각과 사기 조각, 흙먼지로 뒤덮였다. 어떤 평화도, 어떤 고요도 한순간에 부서지지 않는 것이라곤 없다는 것을 그녀에게 증명이라도 해주듯이.

 

누군가 “해적이다!”라고 외치며 뛰어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해적의 습격에 대비하느라 내내 보초를 세우며 인도양을 벗어난 직후였으니 박격포 소리 같은 굉음은 해적의 공격을 단번에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벗어놓은 흰 양말을 천천히 주워 신었다. 문밖에 벗어놓은 운동화를 신으러 가려면 박살난 유리조각들 위를 지나가야 했다. 맨발로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운동화를 찾아 신은 그녀는 밖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깨진 선창 앞으로 걸어가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정말로 죽나보다는 생각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었다. 그러자 둘 다 고등학생인 아들들이 떠올랐다. 아늑한 안도감이 그녀를 감쌌다. 고등학생인 아들들은 아버지와 함께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고 나자 그녀는 이 지상에서 자신을 붙드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아이들이 그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나이란 걸 확인하자마자 더 이상 그녀를 붙드는 것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홀가분하고도 쓸쓸했다.
그녀는 코발트블루의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저기에 빠질 수도 있겠구나, 생각을 하자 마침 생리 중이던 자신이 상어를 불러 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뒤따라 왔다.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이었다. 그것만은 두려웠다.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을지 모른다는 여전히 예의 바른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체념이 빠른 그녀는, 어쩔 수 없지, 곧 죽을 테니 고통도 짧겠지, 생각하고 말았다. 이 모든 사념은 모두 찰나의 일이었다.
곧 옆방의 H가 달려와 큰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괜찮아요? 다친 덴 없어요?” 그녀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는 젖은 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이걸로 입을 막아요. 컨테이너가 폭발한 모양이에요. 얼른 갑판으로 모이랍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해적의 습격은 아니었던 것이다.

 

일행이 머무르던 곳은 거주구역인 E 데크의 5층이었다. 갑판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며 옆을 보니 선실 안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기둥이나 벽이 다 무너진 사이로 붉은 불길들이 날름거리고 있었다. 어쩐지 그 모든 일이 현실같이 여겨지지 않았다. 그녀가 절박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의 품안에서 내내 몽롱했기에 그 순간의 재난조차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나 보았다.
갑판으로 나서니 막 헬리콥터가 와서 팔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2항사 청년을 실어가고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 자기는 배 타는 게 싫다고, 어쩔 수 없이 타는 거라고 말했던, 얼굴이 해사한 청년이었다. 다른 선원에게 물어보니, 폭발할 때 무너지는 벽에 눌려 뼈가 부러진 것 같다고 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고, 그를 뺀 나머지 사람들은 찰과상을 입은 사람들이 몇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갑판은 부서진 잔해들로 전쟁터 같았고, 배의 뒤쪽에서는 거대한 화염이 치솟고 있었다.
선장은 구조를 요청했으니 곧 배가 올 거라고 구명조끼를 입고 침착히 지시에 따르라고 말했다. 언제나 소년처럼 서글서글하게 웃던 선장의 얼굴이 그렇게 비통하게 변하는 모습을 그녀는 처음 보았다. 폭발은 뒤쪽 갑판에 쌓여있는 컨테이너에서 일어났다고 했다. 유독한 물체가 탈 때처럼 검은 연기가 몽글몽글하게 뭉쳐진 채 눈부시게 밝은 대양의 하늘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K는 사진작가답게 종군기자처럼 연신 불타는 배를 찍었다. 다행히 앞 간판 쪽으로는 불길이 번지지 않아 그들은 몸뚱이의 반이 불타오르는 배의 타지 않은 안전한 반쪽에서 그렇게 있을 수 있었다. 어쩌면 잔인한 일이었다. 그가 죽어가는 모습을, 그의 몸 위에서 찍고 있었으니.
군함에서 보낸 보트가 배로 다가오자 그들이 내리는 걸 돕기 위해 선원 한 사람이 먼저 내려갔다. 그 다음엔 여자들의 차례였다. 배에서 탈출 순위는 아이와 여성이 첫 번째라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 배에서 여성이라고는 그녀와 P뿐이었다. 그러나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보트에 옮겨 타기 위해선 건들거리며 매달려있는 밧줄 사다리를 붙들고 내려가야 하는 절차를 통과해야 했다.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보다 체구가 작은 P가 가장 약한 여성으로 여겨져 최우선으로 내려가는 ‘특혜’를 입었다. 배에서 내린 밧줄 사다리가 보트에 걸쳐졌다.
“겁내지 말고 한 발씩 내려와요!”
먼저 보트에 탄 선원이 배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그러나 구명조끼 달랑 하나 입고, 저 시퍼런 바다를 향해 흔들리는 밧줄 사다리를 밟고 내려갈 생각을 하니 그녀는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꾸물대면 뒤의 사람들 구조도 그만큼 늦어진다는 생각이 그녀를 압박했다.
P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등에 배낭을 맨 작고 가녀린 P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뛰는 가슴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바람에 밧줄이 한번 빙그르 돌았을 때는 간신히 비명을 삼켰다. P는 무사히 보트로 내려갔다.
다음은 그녀의 순서였다. 훗날 그녀는, 만약 그 배에서 구조되는 사람이 자신 혼자였다면 자기는 절대로 발을 내디디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원래 겁이 많았고, 수영도 못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다른 길은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을 두었다. 아무 생각말자. 그냥 한 발을 딛고, 다시 다음 칸을 딛기만 하자. 그것은 그때까지 그녀가 자신의 인생을 살아온 철학이기도 했다.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는 인생항로에서 그녀는 눈앞에 달려오는 파도만 넘는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뒤에 오는 게 더 큰 파도이든, 잔잔한 파도이든 그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밧줄을 잡는데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의 팔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저 시퍼런 바닷물 쪽으로 시선이 닿지 않게 정면만을 바라보아야 했다. 한 발, 한 발, 한 칸, 다음 칸… 마침내 보트에 발이 닿고, 사람들이 그녀를 부축하자마자 그녀의 온몸에서 힘이란 힘은 다 빠져나가버렸다.
보트가 출발했다. 배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그녀는 바닷물에 바짝 붙어 속도를 내어 달리는 보트는 겁이 나 타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군함까지 가는 내내 그녀는 이 바다의 깊이가 수 천 미터라는 사실을 잊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겨우 군함 앞에 도착했는데 이번에도 사다리가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번 사다리는 밧줄이 아닌 단단한 쇠사다리인데다 배의 높이도 훨씬 낮았는데도 그녀의 온몸은 다시금 굳었다. P가 다시 먼저 올라가고, 그녀의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용기를 끌어내 사다리를 잡으려고 했지만 팔에 힘이 쥐어지지 않았다. 등산을 오래 하고 산을 내려올 때 다리가 남의 다리처럼 뇌의 명령을 받지 않을 때처럼 팔이, 손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밧줄 사다리를 타고 내려올 때 하도 긴장을 해서 근육이 다 풀려버린 탓이었다. 어떻게 해도 사다리를 쥘 수가 없자 그녀는 뒤에 물러서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올라가게 했다. 그러나 아무리 팔을 주물러도 팔은 말을 듣지 않았다. 어째야 좋을지 눈앞이 노랬다. 그러자 위쪽에서도 이런 사태에 대해 논의가 되었는지 곧 기중기 같은 게 내려와 배를 통째로 올리는 것이었다. 덕택에 그녀와 그 뒤의 사람들은 편히 올라가게 되었다. 가장 약해서 가장 우선적인 ‘특혜’를 받았던 P는 오히려 그 항해에서 가장 고생을 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돌아와 몇 달 뒤 그녀는 어렵게 개인전시회를 열었다. 다른 사람과 어울려서는 몇 번 전시회를 열었지만 혼자 여는 개인전은 처음이었다. 전시회의 제목은 <밤의 항해>였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바다와 배에 대해 그려왔다. 그의 품안에 안기기를 내내 꿈꾸며 살아왔다는 말이었다. 그 전시회는 5년이나 준비한 전시회였다. 하지만 그녀는 추상화가였기 때문에 그녀의 그림 속에서 배나 바다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왜 ‘밤의 항해’입니까?, 기자가 물었을 때 그녀 역시 답을 찾기 난감했다. 제 인생이 밤의 항해 같아서요, 겨우 그렇게 대답했는데, 대답해 놓고 나니 그게 정답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캄캄하고 막막하게만 느끼고 있었다. 전시회는 하도 오랫동안 힘들게 준비한 탓인지 진이 다 빠져버린 듯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힘들었지만 전시회를 열기 위해 돈을 마련하고, 화랑을 섭외하는 일은 몇 배나 더 힘들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의 예상대로 말라카 해협의 만월, 그날 밤의 한 조각조차 그려낼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시도를 했지만 결국 붓을 내려놓았던 자괴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추상화가인 그녀가 자신의 기조를 포기한 채 구상화를 그릴지라도 표현해낼 수 없는 것,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일에 다시금 절망을 느꼈다.
전시회의 마지막 날, 뒤풀이를 하고 술에 취해 들어온 날, 그녀는 샤워를 하고 욕조에서 나오다가 욕조 턱에 발이 걸려 순식간에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타일 위로 붉은 피와 살점이 튀어 올랐다. 모든 평화는 언제나 이렇게 불온하고 음흉한 반항을 품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다시금 깨달았다. 기시감이 몰려왔다. 자신의 눈앞에서 벽이 무너지고, 유리조각이 부서져 나가던 순간. 그녀는 배가 부서졌듯이 턱이 깨졌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살만 터지고, 뼈는 다치지 않았다. 그녀는 일곱 바늘을 꿰매고 붕대를 싸맨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보며 생각했다. 어퍼컷을 먹은 권투선수 같구나. 삶이란 것은 주로 뒤통수를 치지만 이렇게 어퍼컷을 먹이기도 하는구나. 삶이란 것은 오히려 백기를 빨리 던지지 않는 자에게 계속 어퍼컷을 먹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버티지 말았어야 했을까, 일찍이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면 이런 일조차 없었을 것을, 그런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맴돌았다.
그것조차 시작에 불과했다. 그 뒤로도 온갖 풍파가 몰아닥쳤다. 그 와중에 그녀는 오랜 숙원이던 남쪽 항구 도시에 집을 얻었고, 역시 오랜 숙원이던 이혼도 했다. 태풍은 바다를 통째로 뒤엎어 물갈이를 하기도 한다. 풍파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집은 항구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녀의 노모는 딸의 집에 올 때마다 배를 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아파트 5층의 높이는 커다란 배의 선실 높이일 수 있었다. 배에서 내려다보이는 곳도 바다 아니면 항구일 테니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 커다란 배 안에서 그녀가 가장 해내고 싶은 일은 그를 그리는 일이었다. 말라카 해협의 만월은 포기했을지라도 사라진 그의 모습만은 조금이라도 복원해내고 싶었다. 그냥 배가 아닌 살아있는 그를, 불타는 그의 몸이 아닌, 다정하게 자신을 품어준 그를 그려내고 싶었다.
사실은 얼마 전 그에 대한 소식을 새로이 들은 것이었다. 고철 덩어리로 팔려간 줄 알았던 그는 누더기가 된 몸으로 터키의 작은 섬들 사이를 오가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시골 우체부처럼, 말을 전해준 사람이 덧붙였다. 작은 섬들을 오가는 일은 소박하고, 시골 우체부는 존경스럽다. 이번에도 그녀는, 그가 고철로 팔려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말간 눈으로 고개만 끄떡였다.
그런데 갑자기, 잠결인지 모호한 그 몽롱함 속에서 그의 지금 모습이 떠올랐다. 영락하고 노쇠한 그가 초라한 몰골로 작은 섬 사이를 왕래하고 있었다. 결단코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차라리 고철이 되어 팔려가는 것이 그의 최후로는 더 어울렸다. 그러자 그때까지 사무치는 그리움 속에서도 한 방울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한 존재의 최후는 그의 전 생애와 어울려야만 했다. 그렇지 못할 때 그것은 적어도 그를 사랑했던 연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는 법이다.
그때 그녀는 자신의 등 뒤로 와 닿는 그의 슬픈 눈빛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눈을 본 적이 없고, 눈빛을 느끼는 그 순간도 그의 눈의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다. 그냥 눈빛만이 그녀를 슬프게 내려다보는 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도 자신의 마지막 모습이 슬픈 거구나, 그녀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는 이 세상에서 저런 모습으로 사라지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것은 그 장엄하고 웅장했던 그의 최후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E 데크의 계단에는 오래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옛날의 범선 그림들이었다. 밥 먹으러 갈 때마다 그 옆을 지나면서도, 배니까 배 그림을 걸어놨구나, 하는 정도로 언제나 무심히 지나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무엇엔가 끌린 듯 그림 아래에 씌어있는 깨알처럼 작은 글자들을 읽기 시작했다. 복사화인 탓인지 영어로 써 있는 그 글에는 그 배의 생몰 연대가 적혀 있고, 어떻게 배의 삶이 끝났는지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그 설명을 읽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공포감이 아니라 한 존재의 삶에 대한 경외감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계단으로만 다니면서 걸려있는 모든 그림의 설명을 읽었다. 범선들의 모습은 매혹적이었고, 그들의 이름은 화려했고, 그들의 삶은 하나같이 유장했다. 배들의 죽음은 바다 위에서 이루어졌다. 불이 나거나 암초에 부딪히거나 태풍에 부서져 그들은 생명을 마쳤다. 이 작은 나라의 화물선 계단 위에 복사화가 걸릴 만큼 위대한 배들의 죽음은 그러했다.
그 기억을 떠올리자 그녀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아, 하는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가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그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그녀는 알아차렸다. 그녀는 그의 최후를 그려야 했다. 그가 원하는 그의 최후, 적어도 시골우체부로서 조용히 낡아 부서지는 최후는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최후를 그려줄 것을 그녀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보다 신비롭고, 보다 유현하고, 보다 비장한 최후.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지금의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자신도 그것을 모를지도 몰랐다. 과연 내가 그것을 찾아내 그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까? 내 힘만으론 불가능한 일이야. 하지만 그가 도와준다면,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의 마음이 서로 닿을 수 있다면 어쩌면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그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자신처럼 예의 바른 여자가 작별 인사도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났으니까. 그때는 그가 불탄 채로 살아 있었으므로, 자신이 간다고만 했지, 그에게 잘 가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에게 새로운 최후를, 그가 원하는 새로운 최후를 그려줄 수 있다면 그녀는 유유히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지는 그에게 비로소 작별인사를 던질 수 있을 것이리라. 대양의 한복판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듯 막막하지만 그래도 이제 그녀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냈다.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였다. 그와 제대로 헤어지지 않고는 이 뭍에 사는 어떤 사내와도 그녀는 제대로 사랑하지 못할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그녀의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아 그녀를 붙들고 있었다. 그를 사랑한 것이 그녀만은 아닐 터이지만 그에게 작별인사를 제대로 하기 전에는 결코 제대로 살아낼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녀만큼 그를 사랑한 여자도 없었으리라.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그 일을 해야만 할 터였다.
그녀는 속으로 빌었다. 내가 이 길을 잘 걸어 나가 그의 장엄한 뒷모습에 제대로 작별인사를 하는 순간이 내 남은 인생에 깃들기를. 그리하여 내가 지상의 다른 사내를 사랑할 수 있는 날이 다시 한 번 오기를.
한 번도 불러보지 않았던 그의 이름을 그녀는 이제야 불러본다.
미스터 포세이돈,
그녀가 사랑한 그의 이름은 포세이돈이었다.

 

 

 

 

 

 

 

 

 

 

 

 

 

 

 

 

작가소개 /이후경

1960년 진주 출생.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과거순례」가 당선되어 등단.
소설집 『저녁은 어떻게 오는가』, 『달의 항구』가 있음.
2011년 장편소설 「저녁의 편도나무」로 김만중 문학상 수상.

 

《문장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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