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 달력 외 6편

[2014 아르코창작기금]

 

 

멸종 달력

 

 

이지호

 

 

    멸종의 목록이 적힌 달력이 있다
    우수와 소만도 없는 달력
    움트지 않는 고백으로
    숫자를 거느린 생몰연대
    날짜들과 이어진 날짜들
    찢어진 꽃잎은 과거로 진화해 갈 뿐이다

 

    철의 씨앗이 가득한 대장장이는 자연의 모양과 그들의 울음소리로 연장을 만들다 두 손이 멸종에 이르렀다지

 

    기일도 없이 숨어있는 위기의 식물들 동물들

 

    지린내에 기댄 광릉요강꽃이 휘청거리는 향기로 남는다
    자태에 어긋나는
    천한 이름이 피우는 말간 슬픔
    수명은 도도한 흐름의 방향타다

 

    곰, 인간이 버린 아이스크림 나무를 핥는다
    동물원에서 붙여준 이름에는 없는
    목말랐던 야생의 이름으로 전설이 되어가지만
    관중이 버린 비굴한 식욕은 무거운 끝을 가진다

 

    빼앗긴 서식지가 달력 안에서 기생하지만
    여전히 늙어가는 것으로 가벼워지는 숫자들
    윤전기 소리마저 작아지고 있다는 소식과
    새로운 종을 생산해 내는 기술의 속도
    씨앗은 먼 미래이고 꽃은 멸종의 이름으로 만개해 있다

 

    붉은 표시의 날들 주위로 멸종하는 평일의 한때
    생일이 없는 두 발 짐승이
    달력을 기웃거린다

 

 

 

 

 

 

 

 

 

 

 

홀씨의 누각 2

 

 

먼 소금사막을 건너온 뒤늦은 걸음이다

 

서쪽과 서쪽은 만날 수 없다

 

휘어진 등고선에 하현이 차다

 

어느 우물과 연결되어 있는지 무너지지도 않는다

 

다만 흔들림으로 견디며 떨어지는 누수

 

어둠 속에서 색을 빌려가는 저기

 

 

 

 

 

 

 

 

 

 

 

틈잎

 

 

돋아나는 잎은 묵은 것을 새어 나가게 하는 틈

 

오랜 독에는 시름에 꺾인 잎의 무늬처럼
새잎이 돋아나 있다
작은 금 하나가 내부를 텅 비게 할 수도 있다니
소금기가 밴 시간들
한쪽으로 치워 놓았다

 

간간한 향은 치워지지 않는다
시간은 익은 채로 새 나갔으나
새어나간 것은 향을 담았다

 

간장 위에 떠 있던 짠 달은 어디로 갔을까
산새 소리가 장아찌마냥 푹 익어가던 그믐의 한 낮

 

이제는 그늘만이 발효되는 빈 독
그늘에는 금이 가지 않고
장독대 뒤의 나무들은 잎을 내며 조금씩
하늘에 금을 내어 보고 있다.

 

 

 

 

 

 

 

 

 

 

 

下衣의 날들

 

 

    낡은 허리띠 헐렁한 구멍은 집요한 이빨
    여분의 빈 구멍을 보면 포만에도 여지가 있다

 

    일탈하려 했던 下衣의 날들이 저벅이며 걸어오기도 하여 허리띠 한 칸 옮기는데 십년이 걸리기도 했다

 

    둘레를 간직하는 일은 낡아가는 일이라서
    어쩌다 새 허리띠를 차는 날이면
    내 몸을 잃어버리는 것만 같아
    불편한 칸칸의 습관이 몰려든다

 

    생활과 함께 늘어난 소가죽
    초원을 거닐며 풀을 뜯던 여유는
    꽉 끼어서 살아온 느슨했던 적 없는 허리에 밀렸다
    뚫리지 않은 코뚜레 같이
    빈 허기로 지낸 구멍들이 즐비하지만
    살아보면 한 구멍에서
    허우적거리며 지낸 시간이 낡고 늘어지는 일인걸 안다

 

    늘어진 구멍엔 깊이가 없다
    끝없는 허기의 치수

 

 

 

 

 

 

 

 

 

 

 

홀씨의 누각 1

 

 

    단 한 사람을 위해 지어진 창

 

    한가운데 머물던 마음을 뽑아 가장 높은 곳에 걸어둔다
    내게 가장 가까운 곳
    하나뿐인 세상을 얹어
    피곤을 쉬게 한다
    숨결 따라 허물어졌다가 다시 지어지는 집 한 채
    구름은 날아가는 것의 거처가 된다
    뭉쳐두었다가 한순간 놓아버리는 창

 

    노크소리로 닫히는 문
    벽은 다른 풍경을 옮기려 과거와 미래를 넘나든다
    지표면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것이 때론
    위안이 될 때도 있다

 

    폐수를 뽑아 집을 짓는 거미, 새벽의 창문에 걸리는 공중, 걸음이 지나가는 곳마다 투명한 식욕이 들어온다

 

    몽롱한 그물은 풍경을 채집한다
    발아래로 모여드는 것이 늘어날수록
    날갯짓이 떨어져 쌓여간다

 

    공중엔 앞과 뒤가 없는 평평한
    나를 보러 눈을 감는다

 

 

 

 

 

 

 

 

 

 

 

씨앗의 발

 

 

    배롱나무에 열매로 매달려 있던 알주머니 터지면서 새끼거미가 씨앗처럼 쏟아져 나온다

 

    놀란 공중, 흔들리는 사방
    기어 나와서 흩어지는
    씨앗에 발이 달린다는 것
    숲의 곳곳을 옮겨 다닐 씨앗을 본다

 

    포대 속 발 달린 씨감자들이 쏟아진다
    아니, 발은 없고 눈만
    잠자는 기간에 몰려든
    울컥 돋아나는 눈들
    어느 방향에 발을 낼까 고민했을
    아마도 눈은 제 스스로 뜬 것이 아닐 것이다
    땅 위의 모든 발에겐 독촉이 있었을 것

 

    씨앗이란 이름에는 탈피라는 말이 있다
    발이 사라질 때 쯤 열매가 되는 그 많던 발들
    숲은 붐빌 것이고 밭은 풍성해질 것이다

 

    발이 가득한 씨앗이 만든 마을
    어둠에서 눈을 틔우고 있다

 

 

 

 

 

 

 

 

 

 

 

쏙도 붓을 안다

 

 

    붓을 세웠다
    미물이 먼저 와 있었다

 

    쏙 잡는 노인 곁에서 한참을 본다
    갑각류 절지 미물도 붓을 넣으면 문다
    어떤 무학의 한이 붓을 탐하게 하는지 알 길 없지만
    남해 갯벌, 몸으로 쓴 초서가 가득하다

 

    머리에 먹물 가득 찬 선비가 서울에서 내려왔단다
    죄의 무게는 파벌의 기울기에 얹혀있고 당쟁은 모의의 먹물 줄기에서 나온다

 

    몸 하나 숨기는 구멍이 영역의 전부인 쏙
    넣었다 뺐다 성질을 건드린다
    선비의 의중이 붓을 들듯 숨구멍마다 물이 차면
    먹물 냄새를 맡고 붓을 잡는다
    붓 하나로 한 영역을 낚아 올릴 수 있는 비결이
    오랜 시간을 지나 촌부에까지 이르렀다
    문자가 궁금해 덥석 무는
    숨구멍마다 미물의 글이 깨알같이 적혀있다

 

    아침 갯벌, 새로운 초서가 상소문으로 읽힌다

 

 

 

 

 

 

 

 

 

 

 

 

 

 

 

 

작가소개 /이지호

1970년 충남 부여 출생.
충남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졸업.
2011년 《창작과비평》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여 등단.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재학 중.

 

《문장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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